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요한복음 5장 24-30절)
사람들이 물리적인 시공세계를 이해하게 된 이래로 '타임머신'이라는 것을 생각하면서 많은 상상의 꿈을 키워왔습니다.
만약 그것이 실제로 가능하다면 모든 불분명한 과거의 역사를 정확하게 새로 알 수 있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그보다는 더욱 마음에 끌리는 것이 바로 미래의 세계로 미리 가보는 것입니다.
바로 저 유명한 'Back To The Future'(미래로 돌아가다)라는 영화에도 그런 장면이 나옵니다.
주인공 '마티'가 타임머신을 타고 미래로 갔다가, 자기가 자동차 사고로 머리를 다친 이후로 직장생활도 잘 안 되고 결국 해고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다시 현재로 돌아온 그는, 어느 날 사거리 신호등 앞에서 친구들이 타고 있는 트럭과 자기가 몰고 있는 지프 중에서 어느 쪽이 더 빨리 출발할 수 있는지 시합을 하게 됩니다.
신호등이 파란불로 바뀌는 순간 그 친구의 트럭은 전속력으로 앞으로 내닫지만, 마티는 그것이 어리석고 위험한 짓이라고 생각하고 오히려 차를 후진시켜서 반대방향으로 돌아서버립니다.
그때 앞으로 치닫던 친구의 트럭은 옆골목에서 튀어나온 승용차와 거의 충돌할 뻔하게 되는데, 마티는 만약 자기도 그 방향으로 경주해갔더라면 바로 그 승용차와 큰 충돌을 피할 수 없는 차선에 있었을 것을 깨닫게 되면서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것입니다.
이처럼 자신의 미래가 어떻게 될 것인지를 미리 가보고 만약 무언가 잘못된 것을 미리 볼 수 있다면 다시 현재로 돌아와서 그것을 사전에 예방하는 것도 가능하게 될 것이지만, 그처럼 '미래'를 미리 알고 '현재'에 대비한다는 것은 현실에 있어서는 그저 공상과학을 통해서나 생각해볼 수 있는 꿈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그것이 실제로 가능한 세계가 있는데,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가 이루어지고 있는 영적 시공세계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 예수님께서 그런 신기한 타임머신을 탈 수 있는 법을 가르쳐주고 계시는데, 바로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An hour is coming, and now is.)는 말씀입니다. "때가 오나니"라는 말씀은 물론 미래에 일어날 종말의 때가 가까이 다가오고 있음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런데 곧 바로 이어서, 바로 그 미래의 어느 때가 "곧 이때라"라고, '그 미래의 때란 바로 지금 현재이다.'라고, 언뜻 듣기에는 정말 이상한 말씀을 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과연 이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쳐줍니까?
오늘 저와 여러분은 시간세계에서도 '알파와 오메가'가 되시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선포해주시는 이 신비한 진리, 미래와 현재를 직결시켜주는 이 오묘한 말씀의 깊은 의미를 함께 상고해보고자 합니다.
1. 영생구원은 미래에 완성될 일이지만, 예수님의 복음을 듣고 믿는 자에게는 이미 '이때'에 이루어져 있습니다.
본문 24절에서 예수님께서는 "24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내 말"이라는 것은 앞서 17절부터 23절까지를 통해서 하신 말씀, 곧 '성자를 통해서 성부를 믿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여기에서도 '내 말을 듣고 그 말을 믿어야 한다.'라고 하시는 대신에 '내 말을 듣고 나를 보내신 이 곧 성부 하나님을 믿어야 한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처럼 말씀을 '듣는' 것은 '믿는' 것과 직결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눈에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을 믿을 수 있는 길은 오직 말씀을 듣고 깨닫는 데에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말씀'은 다른 사람의 말이 아니라 바로 "내 말" 즉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10장 17절에서도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고 명백하게 확증하고 있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신앙이라는 것은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믿는 것, 다시 말해서 사람이 하나님과 관계를 맺는 것입니다.
하지만 문제는 그 하나님은 영(靈)이시며 지극히 높으신 절대자이신 까닭에 사람의 눈은 그 하나님의 존재를 볼 수 없고 사람의 귀는 그 하나님의 언어를 들을 수 없습니다.
어떤 관계를 맺거나 교제를 하기는커녕 무슨 의사소통조차 이루어질 수 없는 사이였던 것입니다.
바로 그 치명적인 벽을 깨뜨리는 것이 바로 '말씀' 계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신구약 66권, '하나님의 말씀'이면서도 '사람의 언어'로 기록된 이 성경을 우리에게 주심으로써 아주 쉽고도 분명하게 하나님을 알 수 있게 해주신 것입니다.
그 정도만 해도 보통 은혜로운 일이 아닌데, 성부 하나님께서는 성자 예수님으로 하여금 바로 그 말씀의 주제요 정점이 되게 하셨습니다.
'옛적에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말씀하신' 하나님께서 '마지막에는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그냥 글로써만 보여주신 것이 아니라,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는' 입체 영상, 아니 실상으로써 우리에게 생생하게 보여주셨으니, 그 '포도원 주인'께서 "저희가 내 아들은 공경하리라"고 기대하시는 것은 당연지사가 아니겠습니까?
그처럼 말씀을 '들음'으로써 '믿음'에 이른 자에게는 실로 놀라운 일이 연이어 벌어집니다.
바로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라는 사실인데, 여기에 나오는 두 개의 서술어가 현재형으로 되어 있는 것이 참 신기합니다.
영생이나 심판이나 둘 다 분명히 미래에 일어날 일인데, 예수님께서는 '영생을 얻게 될 것이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게 될 것이다.'라고 미래형으로 말씀하지 않으시고, '벌써 일어나고 있고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상태'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다음에 이어지는 말씀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는 말씀은 더욱 기가 막힙니다.
이것은 아예 완료형으로 되어 있습니다.
즉 이미 성취되었고 끝난 상태임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을 믿게 된 자는 이미 영생 구원을 얻었고 심판과는 멀리 떨어져 살고 있는 사람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은, 그 신자는 사망의 지옥으로부터 생명의 천당으로 벌써부터 옮겨져 있는, 이미 완전히 이사가 끝난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믿는' 순간 장차 미래에 얻게 될 영생구원은 확정되었을 뿐 아니라 이미 현재에 실현되어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바로 그런 판결의 권위가 그런 영생구원의 복음을 선포하시는 예수님께 전적으로 부여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26절과 27절에서 "26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생명이 있음 같이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어 그 속에 있게 하셨고
27또 인자됨을 인하여 심판하는 권세를 주셨느니라"고 예수님께서 확인해주시는 사실입니다.
26절에서 '성부께서 성자에게 생명을 주셨다'는 말씀을 오해해서는 아니 됩니다.
실제로 이단자 아리우스는 바로 이 구절을 인용하면서 "성자는 성부에 의하여 창조된 최초의 피조물이었다."라고 예수님의 신성을 부인했습니다.
하지만 이 말씀의 참 뜻은 어디까지나 '아버지'와 '아들'에게는 처음부터 '같은 생명'이 '있음' 즉 '성부와 성자의 동질성'을 강조하는 데에 있습니다.
즉 바로 다음 절에서 성자에게 심판의 권세가 주어져 있는 것처럼 생명을 줄 수 있는 권세도 주어져 있다는 사실을 밝혀주는 것입니다.
"인자(人子)"라는 말은 예수님의 메시아 되심을 강조하는 대표적인 명칭입니다.
그러므로 27절의 말씀은, 예수님께서는 구세주이신 동시에 심판주도 되시며, 또한 구세주이신 까닭에 심판주가 되셔야 마땅하다는 사실을 밝히고 있습니다.
구원의 은혜를 베풀어주신 분께서 그 구원의 복음 듣기를 거부하고 그 메시아를 모독하는 자에 대한 심판의 권세를 발휘하시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이처럼 생명의 구원을 주느냐 아니면 심판의 저주를 내리느냐 하는 것은 전적으로 성자 예수님께 주어진 권한에 달려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 예수님께서 어떤 선고를 내리셨으면 이미 끝난 일이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 심판주께서 판결을 내리시고 망치를 땅땅 두드리셨으면 이미 '상황종료'나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무인도에 떨어져 있는 사람은 현재까지는 살아 있지만 사실상 이미 죽은 사람이나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같은 상황에 처했다 할지라도 구조대와 연락이 닿은 사람, 구조헬기 소리가 귀에 들리게 되는 사람은 이미 살게 된 사람입니다.
마찬가지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못 듣고 장망성에 떨어져 있는 사람은 살아있는 것 같아도 이미 죽은 목숨이지만, 그 말씀을 듣고 믿게 된 사람은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진,' 이미 '구원의 완료 상태'에 도달해 있는 사람인 것입니다.
불쌍하게도, '이행득구'를 믿는 자들은 이런 확신을 결코 얻을 수 없습니다.
그들은 "나는 구원 받을 만큼 충분히 선하게 살았습니다."라고 말하면 그 자체로 교만이 될 수밖에 없고, 그저 "내가 과연 구원 받을 만큼 충분히 선하게 살았는지 자신이 없습니다."라고 고백해야만 겸손이 유지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천주교의 구원론은 겸손을 지키자니 구원의 확신이 없어지고, 구원을 확신하자니 하나님 앞에서 교만해지게 되는, 정말 어떻게 해결될 길이 없는 자체 모순을 안게 되는 것입니다.
아니, 예수님께서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라고 확증하시면서 "내 말을 듣고 믿는 자는 이미 구원을 받았다."라고 선언해주시는데 왜 그 예수님의 진실하심을 믿지 못하는 것입니까?
신자는 이미 생명으로 옮겨진 사람이라고 예수님께서 이처럼 분명히 선포해주시는데, "글쎄요, 제가 정말 구원 받았을까요? 제가 선행이 부족한데요."라고 하는 것이 정말 참된 겸손일 수가 있겠습니까?
그것은 결코 겸손이 아니라 예수님을 정면으로 모독하는 말, 십자가 은혜를 깔보는 말, 실로 극악한 불신의 말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복음을 듣고 믿은 신자에게 있어서 구원이라는 것은 더 이상 불확실한 미래가 결코 아닙니다.
인터넷으로 대금 다 지불해 놓고도 상품이 배달되기까지 마음을 놓지 못하고 기다리는 상태가 아니며, 시험을 쳐놓고 발표 결과를 조마조마하게 기다리는 상태도 결코 아닌 것입니다.
왜냐하면 '말씀을 듣고 하나님을 믿는 자'는 이미 '영생을 얻은 자'이기 때문입니다.
신자의 영생구원은 '아무 것도 씌어 있지 않은 백지'와 같은 미래가 아니라 현재에 이미 완료되어 있는 '실상'입니다.
예수님께서 "진실로 진실로" 확증해주시는 사실, 영생은 분명히 '미래'에 일어날 일이지만, 말씀을 듣고 믿는 자에게는 이미 '이때에' 이루어진 현재완료의 구원이라는 사실을 똑바로 깨닫고 철저히 확신하는 성도들 되시기 바랍니다.
2. 재림심판은 미래에 성취될 일이지만, 그 예수님의 예언을 듣고 준비할 수 있는 기회는 '이때'밖에 없습니다.
25절에서 예수님께서는 "25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고, 미래와 현재를 잇는 또 하나의 타임머신을 보여주고 계십니다.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라는 것은 곧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게"(살전 4:16)되는 재림의 때를 가리킵니다.
그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이 어떤 소리일지는 모르지만, 확실한 것 하나는 바로 '죽은 자들을 부활시키기 위하여 부르시는 소리'가 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예수님께서 나사로를 살리실 때에는 "나사로야, 일어나라"고 딱 한 명만 지적해서 부르셨지만, 재림하실 때에는 "온 천하 만민들아, 다 일어나라"고 부르실 것이 틀림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도 예수님께서는 아까처럼 미래와 현재의 시제를 일치시키고 계십니다.
'죽은 자들이 주님의 음성을 들을(shall hear) 때'와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shall live)'는 말씀은 미래형으로 되어 있습니다.
두말할 필요 없이 그것은 '오고 있는 때' 즉 미래의 어느 시점에서 벌어질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모든 미래의 때가 "곧 이때라"고, '바로 지금 현재'라고 단언하셨습니다.
"내일 이런 일이 벌어질 것인데, 그 내일이 바로 오늘이다."라고, "장차 언젠가는 이런 일이 반드시 일어날 것인데, 지금 현재가 바로 그 미래의 사건이 일어나고 있는 순간이다."라는, 아주 앞뒤 맞지 않아 보이는 말씀을 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런 이상한 시제(時制)가 가르치는 사실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곧 예수님의 재림을 믿느냐 믿지 않느냐를 결정하고 예비할 수 있는 시기는 '그때'가 아니라 '이때'밖에 없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아들"께서 다시 오시는 '그때'라는 것은, '그때'를 준비하기에는 늦어도 너무 늦은 시간이며, '그때' "그 음성을 듣고 살아나는" 자가 될 수 있는 기회는 바로 지금 '이때'밖에 없다는 엄중한 말씀인 것입니다.
사람이 깊은 잠을 잔 후에 깨어나는 것이나, 오랫동안 죽어 있다가 부활하여 깨어나는 것이나 그 느끼는 기분에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사실상 아무 차이가 없습니다.
깊이 잠든 사람이 '내가 몇 시간을 자고 있구나.'라고 계산을 하면서 잘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죽은 사람도 '내가 몇 년을 죽은 상태로 누워 있구나.'라고 세면서 지낼 수 없습니다.
그 죽어 있는 동안에는 아무 의식이 없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천년 동안 묻혀 있다가 부활한 사람이나 하루 전에 죽었다가 그 다음날에 예수님께서 재림하셔서 부활하게 되는 사람이나 실제적으로는 아무 차이가 없습니다. 그 죽어 있는 동안에는 예수님 재림을 위해서 아무 준비도 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 '미래의 때'가 자신에게 어떻게 닥쳐오는가 하는 것은 '그때' 가서도 아니고 '그때'와 '이때' 사이도 아니라 "곧 이때"에 모든 것이 결정 나고 마는 것입니다.
이것은 세상의 모든 사람에게 빠짐없이 현재에 적용되고 미래에 닥치게 될 사실입니다.
바로 28절부터 30절에서 예수님께서"28이를 기이히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29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30내가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노라 듣는 대로 심판하노니 나는 나의 원대로 하려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이의 원대로 하려는 고로 내 심판은 의로우니라"고 말씀하시는 그대로입니다.
그 재림심판은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어떻게 살다가 어떻게 죽었는지에 상관없이, 신자는 물론 불신자까지도 예수님 재림하실 때에는 "다 그의 음성을 듣고" 일제히 무덤에서 부활하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시는 이유는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누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우선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이 말씀이 "선한 일"이 구원의 공로가 된다는 뜻은 결코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이미 앞서 24절에서 예수님께서 분명히 밝혀주신 대로 '믿는 자'는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이미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이 29절의 말씀은 오직 '선한 행위는 참된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는 증거가 됨'을 가리킬 뿐입니다.
다시 말해서, 바로 믿는 사람은 필연적으로 신행일치의 삶을 살게 되어 있기 때문에 '신자'는 '선한 일을 행한 자'라는 별명으로도 불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악한 일을 행한 자"란 바로 '믿지 않은 자' 곧 불신자를 가리키는 말씀임에 분명합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신자뿐 아니라 불신자까지도 반드시 부활시켜서 심판대에 올려놓고야 마십니다.
전쟁을 할 때 자기 원수나 적장을 가능하면 죽이지 않고 일단 생포해 와서 나중에 재판하고 처형시키려는 것과 마찬가지로, 예수님께서도 당신의 말씀을 무시하고 은혜의 십자가를 모독하는 원수들을 꼭 다시 살려내어서 지옥 심판에 던지고야 마시는 것입니다.
30절에서 "내가 듣는 대로 심판한다"라고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은, '성부께서 말씀해주시는 대로 심판한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아버지의 원대로 하려는 고로 내 심판은 의로우니라"는 말씀과 함께, 예수님께서 성부의 뜻에 순종하여 대속의 십자가를 지셨던 것처럼 역시 성부의 의로우심을 따라서 모든 사람을 선악 간에 심판하실 것을 천명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의 심판은 곧 성부 하나님께서 소유하고 계시는 공의로우심을 모든 인류에게 정확하게 실현시키시는 사역이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죄형법정주의' 즉 '법에 의하지 않고는 벌 받지 아니한다.'는 말은 바꾸어 말하자면 '법에 걸리면' 꼼짝없이 벌 받아야 한다는 뜻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공의로운 법에 걸리는 사람은 그야말로 영락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그 법을 시행함에 있어서 추호의 여지도 남기지 않으실 것이 분명합니다.
'공의로우신 성부께서 원하시는 대로, 들려주시는 뜻대로' 어김없이 심판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까닭에 그 재림주 앞에서는 '어떻게 적당히'라는 말이나 '얼렁뚱땅 대충'이라는 말이 전혀 통할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의 심판은 믿는 자는 천당 보내어주고 믿지 않은 사람은 그냥 없어지게 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그처럼 가르치는 목사나 신학자는 마치 자기가 하나님보다 더 선하고 더 의롭다고 여기는, 아주 지독한 신성모독자일 뿐입니다.
'다 부활시킨다.'라는 말씀대로, 정말 완벽하고 공의로운 심판이 되기 위해서는 악인에 대한 심판 또한 필연적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처럼 모든 죽은 자들을 한 명도 빠짐없이 다 부활시켜 놓고 천당과 지옥으로 깨끗이 갈라놓으실 것을 두고 우리 예수님께서는 "이를 기이히 여기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은 '놀라지 말라' 혹은 '무슨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 하고 의심하지 말아라. 반드시 진짜로 벌어진다.'는 뜻입니다.
사실상 정말 놀랄 수밖에 없는 일을 말씀해주시면서도 놀라지 말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놀랄 일에 놀라지 않는 사람이 되어야 구원 받는 사람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카운트다운 후에 로켓이 발사되는 폭음에는 사람들이 놀라지 않습니다.
이미 알고 예상하고 있기 때문이며 오히려 그 폭음을 즐기게 됩니다.
하지만 발사된 로켓이 고장 나서 폭발하는 소리에는 다들 놀라고 기절까지도 하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전혀 예기치 못했던 소리이기 때문입니다.
재림하시는 예수님의 호령이 떨어지고 천사장의 소리와 나팔소리가 울려 퍼질 때, 그것을 예상치 않았던 사람들, 즉 믿지 않고 있던 사람들은 깜짝 놀라 '간이 떨어지게' 될 것입니다.
아니 그 정도가 아니라 혼비백산하면서 '산아 날 가리우라'하고 극도의 공포에 떨게 될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전혀 예상하지도 않았고 아무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신자들은 꼭 같은 그 음성을 듣고 조금도 놀라지 않고 오히려 반기며 기뻐하게 될 것입니다.
그 소리는 '주여 어서 속히 오시옵소서'라고 손꼽아 카운트다운을 하면서 기다리던 사람에게는 너무나도 통쾌하고 멋진 팡파르와 같은 소리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듣는 소리는 가지각색입니다.
자식들의 흐느낌 소리나 조객들의 대화하는 소리가 들릴 것이고, 어떤 사람은 목사와 성도들의 기도 소리를 듣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목탁과 불경 외는 소리를 듣고 죽어갈 것입니다.
하지만 부활할 때에는 모두가 다 꼭 같은 한 가지 소리만 듣게 됩니다.
바로 모든 죽은 자들을 깨우는 예수님의 음성입니다.
일단 그 기상 명령을 들으면 죽었던 모든 사람들이 그야말로 '용수철 튀어 오르듯이' 즉시 무덤에서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바로 '그때' 그 음성에 놀라지 아니하고 반길 줄 아는 사람이 될 수 있도록 지금 '이때'에 그 주님의 음성을 미리 듣고 배우고 믿고 따르고 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시간은 거꾸로 가지 아니하는 일방통행입니다.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고 말씀하신 대로, '이때'는 '오는 때'를 향하여 줄기차게 흘러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오는 때'와 '이때'의 사이에 있는 시간이라는 것은 실제적으로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죽어 있는 동안은 복음을 들을 수도, 믿을 수도 없는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그 시간은 세상에서는 믿지 않았던 사람이 무슨 연옥이나 낙원에서 자기 구원을 위하여 연장전을 할 수 있는 시간이 결코 아닌 것입니다.
게다가 그 '이때'라는 시간도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길거나 보장되어 있지 않습니다.
제일 길게 잡아야 '칠팔 십년'이지만 빠르면 바로 '내일' 아니 '오늘 밤'에 끝나버릴지도 모르는 시간입니다.
그리고 그 짧은 '이때'가 끝나는 순간 모든 상황은 종료이며 '게임 끝'이 될 뿐인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생명 부활이냐 심판 부활이냐'로 갈리게 되는 그 '오는 때'를 결정짓는 것은 '그때' 가서가 아니라 바로 '이때'에 '믿느냐 안 믿느냐'에서 다 끝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복음을 들을 수 있는 '현재'는 예수님의 심판이 벌어질 '미래'와 직결되어 있습니다.
그 현재는 너무나도 짧고 급한 시간이며, 그 현재가 끝나버리고 그 미래가 성취될 그 사이 시간이라는 것은 아무 의미도 기회도 없는, 무슨 '타임아웃'을 신청할 수가 없는 때입니다.
하지만 그 대신에 예수님께서는 지금 벌써 우리에게 그 마지막 때에 일어날 일을 말씀의 타임머신에 태워서 미리 보여주고 계십니다.
시험지 미리 보고 왔으면, 이제 그 문제만 확실히 공부한다면 당연히 백점 받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 마지막 날의 백보좌 심판대에서 무엇이 문제가 되고 무엇이 판결의 근거가 될 것인지를 미리 알게 되었으면, 이제 남은 것은 그 보여주신 문제를 가지고 준비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문제조차 쉬워도 너무나 쉽지 않습니까?
그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을 믿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문제도 미리 보여주었고 답조차 이렇게 간단한 것이니, 이것 준비 못할 이유가 무엇이며, 이것 준비 안 했다가 나중에 변명할 수 있는 말이 무엇이 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사도 바울도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고후 6:2)라고 증거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지금' 믿어야 하며 영생은 '이미' 얻은 자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신앙고백은 미래가 아니라 현재에 속히 해야 하며, 우리의 구원은 미정이 아니라 완료임을 체험해야 합니다.
'오는 때' - 이미 정해진 심판이 집행될 그때 재림주의 호령을 듣고 놀라는 자가 되지 않도록, '이때' - 아직 은혜의 기회가 주어진 오늘에 주님의 초청 음성을 듣고 믿음으로써 그 '하나님의 아들'의 육성을 친히 듣게 될 그날에 바로 그 음성을 듣고 다 같이 영생으로 살아나는 성도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출처/석기현목사 설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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