듣고 지키는 자 (눅 11: 27-28)
우리가 예수님을 믿을 때에 제일 먼저 하나님을 접합니다. 나를 사랑하시고 용서하신 하나님. 그런데 불행한 사실은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처음 믿을 때 접한 그 하나님에서 더 이상 진전을 하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은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와 교제하시고 우리에게 천국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우리에게 천국은 오직 하나님과 함께 있는 곳, 하나님과 교제하는 관계 속에서 있습니다. 천국이 천국 됨은 많은 보석이 있어서가 아니고, 물이 흐르고 많은 나무가 있어서가 아니고, 어디든지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천국입니다.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 생명이 우리와 연결이 될 때 그것을 비로소 우리에게 천국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예수님을 믿은 뒤의 모든 삶에서 하나님을 믿어야 되고, 하나님과 관계를 가져야 되고, 그 하나님의 뜻을 알고 그 뜻 안에서 살아가야 됩니다. 점점 하나님을 아는 관계가 깊어져야만 합니다. 그런데 많은 경우 하나님을 알지도 못하고,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선한 뜻, 좋은 뜻도 알지 못하고, 결과적으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예비하신 축복의 길로도 가지 못합니다. 왜 우리가 하나님을 알지도 못하고 하나님의 뜻도 알지 못할까요? 거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바로 이유를 한번 생각해보시면서 여러분의 삶 속에서 진정 천국이 이루어지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하나님의 뜻을 알고 싶다고 하면서도 왜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하는가, 그것을 한번 잘 생각해 봅시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잘 알지 못하는 이유는 제일 첫 번째로 하나님이 누구이신지를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객관적인 하나님-하나님이 어떠어떠한 분이시라는 것을 잘 모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성경을 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깊은 관계를 갖기 위해서는 그 분이 누구인지를 알아야 하는데, 그 분이 누구인지를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성경을 안 읽기 때문에, 성경을 공부하지 않기 때문에요. 성경은 끊임없이 통독해 나가야 합니다. 한 번에 여러 장씩을 읽어서 전체의 흐름을 알아야 합니다. 또 그 중의 일부는 깊이 있게 공부해야 합니다. 그리고 나 혼자 할 것이 아니고 좀 더 성경을 조직적으로 하는 공부도 또한 필요합니다. 그렇게 할 때에 비로소 성경 속에서 하나님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변치 않는 바로 그 하나님이 수 천 년 전부터 인간을 만드시고 천지만물을 지으시고 그 이후에, 인간이 죄를 지은 그 이후에도 어떠한 뜻을 가지고 계시는가, 인간이 수없이 다양한 반응을 보일 때에 그러한 인간들에게 하나님은 어떻게 행하시는가,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은 무엇인가, 성경에 다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해서는 먼저 성경부터 공부해야만 합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내 삶속의 하나님의 뜻을 알고 싶다고 하면서, 이리저리 예언하는 사람을 찾아다닙니다. 기도하면서 직통계시 받으려고 합니다. 하나님이 뭐하려고 이 성경을 주셨겠습니까? 1,500년 기간 동안에 수십 명의 저자들을 통해서 기록된 것이 성경입니다. 기록할 때도 하나님의 영광으로 기록되었지만, 이 성경을 성경답게 보존하신 것도 성령님의 역사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읽을 때에 이해되게 하는 것도 성령님의 역사입니다. 하나님의 책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것을 주셔서 이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도록 계획하셨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알려면, 제일 먼저 성경을 봐야죠. 성경을 보지 않고 어떻게 하나님의 뜻을 알겠다고 하는 것입니까? 성경부터 읽고, 성경부터 묵상하고, 성경부터 외우고…, 이렇게 하면서 성경말씀을 좀 더 가까이 하고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참 이상한 책입니다. 성경은 성경을 몰라서는 성경이 이해가 안 됩니다. 성경의 다른 지식이 없으면 이렇게 한 두 구절을 읽어가지고 그 구절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저도 처음에 예수님 믿을 때 저를 전도한 분이 제게 조언을 해서 누가복음부터 읽었습니다. 마태복음은 처음 1장에 누가 누구를 낳고, 낳고, 낳고…, 읽다가 포기하게 된다고 나중에 읽으라고 하셨고, 마가복음은 상당히 행동적인 복음이라 처음 읽으면 자칫 메마른 것처럼 보일 수가 있다고 해서 누가복음부터 보게 되었습니다. 누가복음에는 감탄사도 많이 나오고 형용사도 많이 나오고 좀 다양한 표현이 있어서 재미있다는 거예요. 읽어보니까 정말 그래요. 그런데 중간에 모르는 것 투성이예요. 모르니까 그 분을 계속 좇아다니면서 성경 말씀을 물어봤습니다. 당신들이 나를 예수님 믿게 했으니까 A/S까지 끝까지 책임지라고 했습니다. 그 분들이 아는 것은 가르쳐 주고 모르는 것은 못 가르쳐줘요.
나중에 저한테 하는 말이 지금은 이해가 안 되더라도 우선 성경을 한번 읽어보라는 거예요. 한번 다 읽고 나서 그 다음에 읽으면 많이 이해가 될 거라고 해요. 실제로 다 읽고 또 오니까 훨씬 많은 부분이 이해가 되기 시작하는 거예요. 왜냐하면 마치 성경은 몸 하나와 똑같기 때문이에요. 모든 말씀이 우리 몸이 연결된 것처럼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것을 유기적 통일성(organic unity)이라고 해요. 손끝이 벌에 쏘였을 때 손끝만 아픈 게 아니라 우리 몸이 다 아파요. 그 것이 유기적 연관성, 유기적 통일성입니다. 한 군데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성경 전체의 지식을 동원해서 이해하는 것입니다. 한 두 구절만 보고 그것만으로 이해 못합니다. 그래서 성경공부를 지속적으로 성경 전체를 이해할 수 있도록 공부를 해 나가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뜻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기 전에는 잘 모릅니다. 이 수고와 땀이 있어야 하나님을 이해한단 말입니다. 부부간에도 서로 사랑해서 결혼해도 사실 서로를 잘 모릅니다. 10년, 20년, 30년 살면서 비로소 서로를 깊이 알아가는 것이죠. 그만큼 서로를 알려면 노력이 필요합니다.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도 계속해서 끊임없는 관계 속에서 상대편을 이해하려는 노력을 해야 합니다. 제가 신학을 공부한 지 20년이 넘었지만 아직도 성경 말씀 모르는 게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 계속 공부해야 됩니다. 여러분도 계속 공부해서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해서,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알기 위해서 계속 공부해야 합니다.
그런데 공부한다는 것은 필요조건이지 충분한 것은 아니에요. 하나님에 대해서 공부를 해야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 노력해야 합니다. “하나님에 관하여” 아는 것과 “하나님을” 아는 것과는 다릅니다. 우선 하나님에 관하여 먼저 공부는 해야 합니다. 이 공부를 안 하면 하나님을 알 수가 없습니다. 제가 처음에 미국에 유학을 갔을 때 도대체 강의가 안 들려요. 어떡하면 강의가 들릴까 생각하다가, 그 다음에 미리 내일 할 것을 예습해 갔습니다. 책을 미리 보고, 모르는 단어도 찾고, 내용이 뭔지를 다 알고 갔습니다. 예습을 하고 가서 들으니까 이제 좀 들리기 시작하더라고요.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이 있죠? 마찬가지로 그림도, 좀 아는 만큼 그림을 이해하는 것 같아요. 들리는 것도 아는 만큼 들려요. 꼭 같은 것은 아닌데, 하나님에 대해서 많이 알면 알수록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을 이해할 확률이 높아집니다. 그래서 우선 공부를 해야 해요. 공부를 하는데 여러분이 분명히 이 두 가지는 구분을 해야 합니다. 유명한 신학자인 J. I. Packer(제임스 패커)라는 분이 있습니다. 그 분이 「Knowing God」이라는 책을 썼습니다. 우리말로도「하나님을 아는 지식」이라는 책으로 번역되어 있는데, 그 책에서 J. I. Packer라는 학자는 “오늘날 많은 믿는 사람들이 하나님에 ‘대하여’는 많이 아는데 실제 하나님을 모른다.”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성경을 지식적으로만 알고 지식적으로만 접근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백날 성경 공부해도 사람이 변하지를 않아요. 아무리 성경 공부를 많이 해도 성경의 지식만 늘어나지, 그것이 오히려 남을 비판하거나 무시하는 도구로 사용될 뿐이지,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그 사람의 품성이 변화되는 능력은 없다는 말입니다. 그 변화되는 품성은 하나님을 만나야 돼요. 하나님을 알아야 됩니다. 성경을 읽으면서도 그 가운데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이 누구신가, 그 하나님을 보고 그 하나님 앞에 서야 합니다. 이게 달라요. 그 하나님을 만나야 됩니다. ‘아! 우리 하나님은 그런 하나님이구나.’ 하면서 그 하나님께 매달려야 합니다. 성경에 치료하시는 하나님이 나오면 ‘내가 믿는 하나님이 치료하는 하나님이구나.’ 하면서 그 하나님께 치료를 위해서 간구하고, 내 병이 아니면 다른 사람의 병을 위해서 함께 간구하고, 그러면서 하나님을 만나고…. 이게 필요해요. 우리가 양육 훈련하고 제자 훈련하는 그 모든 것도 물론 한 가지는 “하나님에 대하여” 공부합니다. 그러나 궁극적인 목표는 그 하나님에 대하여 아는 지식을 가지고 결국은 그러한 면의 하나님을 만나라는 것입니다. 그러한 면의 하나님을 만나기 위한 기회를 제공해 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목적으로 가야 합니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만날 수 있을 것인가?” 하나님에 대하여 아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을 만나기 위한 목적으로 큐티(Q.T)도 하고…. 어떤 사람을 보면 참 답답해요. 열심히 한다고 하는데 전혀 하나님과의 대면이 없어요. 그게 큐티를 하게 되면 나타납니다. 큐티하고 나눠보면 그 분은 답답해요. 하나님과의 대면이 없어요. 하나님 안에서 내 마음에 은혜가 없는 거예요. 하나님에 관해서만 논의하기를 좋아하는 것이지….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 노력하십시오. 우리에게 하나님에 대한 지식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결국 하나님을 만나는 도구로 사용되어서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그럴 때 비로소 하나님의 뜻이 내게 들어오기 시작합니다.
두 번째로 이 하나님에 대한 관점이 잘못 되었을 때 하나님께 쉽게 나아가지 못하고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합니다. 혹시 지난날의 어떤 죄가 있을 때, 지금 현재 죄적인 삶을 살 때에, 아직도 회개하지 않거나 아니면 다른 사람보다 지나치게 열등의식에 사로잡혀 있거나, 이럴 때에 하나님을 쉽게 경험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그런 분들에게 하나님은 무서운 하나님이에요. 하나님이 무서우니까 가까이 못 가는 것입니다. 실제 하나님은 모든 믿는 백성들에게 무서운 하나님이 아닙니다. 그리고 믿는 백성은 하나같이 죄인입니다. 한 사람도 빠짐없이 죄인입니다. 그리고 예수님 믿어서 우리의 죄 된 것을 보지 않을 뿐이지 우리의 수준은 내내 죄적인 수준입니다. 주님 앞에 가는 그 날까지 죄적인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러니까 내가 죄지었다고 해서 하나님 앞에 나오지 못할 것이 없습니다. 오히려 죄를 지었을 때, 내가 잘못되었을 때 더 빨리 하나님께 나와서 하나님의 용서를 구하고, 하나님의 씻음을 받고, 다시 새 출발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전도할 때도 보면 전혀 하나님에 대해서 엉뚱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복음을 전하면 “아, 좋지요. 나가야 되죠. 그런데 죄가 워낙 죄가 많아서….” 이렇게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현재 지금 제가 아직 해결하지 못한 여러 가지 문제들이 많이 있거든요(대개 술 먹거나 담배 피거나 그런 일들이에요). 그거 해결하고 가야죠.” 그것은 하나님을 전혀 모르는 거예요. 그러한 것을 진짜 해결하려는 능력은 하나님 앞에 나와야 되죠. 나오기 전에는 해결이 안 되죠. 은혜를 받으면 저절로 되는 겁니다. 그런데 은혜 없이 내가 억지로 하려면 아무리 해도 안 되는 것입니다. 담배 끊는 것, 하나님께 맡기세요. 술 끊는 것도 하나님께 맡기십시오. 제가 예수 믿는 사람들에게 “술 끊어라, 담배 끊어라.” 별로 이야기한 기억이 없습니다. 은혜 받으면 끊어요. 집사가 되려면 끊어야죠. 그런데 성도들에게는 그렇게 말 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은혜를 먼저 받아야 되니까요. 하나님의 은혜의 능력이 들어가기 전에는 내가 변화될 능력이 없는 겁니다. 그러니까 죄의식, 열등의식, 이런 것들도 하나님 앞에 먼저 어떻게든 나와야 해결이 되는 것입니다. 나오기 전에는 해결이 안 됩니다.
해결하고 나올 수가 없습니다. 순서가 바뀌어서는 안 됩니다. 먼저 나오십시오. 왜냐하면 우리의 하나님은 여러분의 아버지이십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부모와 자식 간에 잘못했다고 관계가 끊어집니까? 잘못되어도 끊어질 수가 없죠. 그래도 사랑하며 기다립니다. 탕자의 비유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래도 사랑하며 기다립니다. 제가 어느 교회에 행사가 있어서 갔더니, 쟁쟁한 목사님들도 많이 모여 있고 목사님 방에 다 같이 앉아 있었습니다. 그렇게 목사님들이 많이 모여 있는 데에는 성도님들이 얼씬도 안 해요. 그런데 옆의 문이 빼곡하게 열리면서 조그만 아이가 하나 들어옵니다. 초등학교 3학년짜리가 살금살금 가더니 냉장고를 열고 콜라 하나를 싹 가져가더라고요. 그 교회 목사님의 막내딸이에요. 그 아이한테는 기라성 같은 목사님들이 안 보여요. 자기 아버지 방이에요. 곧잘 그렇게 했어요. 그러니까 누구 쳐다도 안 보고 관계없이 왔다 가는 거예요. 그 엄마 되는 사모님은 그 아이한테 아버지 방에 들어가지 말라고 그렇게 교육을 하나 봐요. 그런데도 엄마 눈만 피하면 아버지 방에 들어와서 마실 것 하나씩 가져가는 거예요. 그냥 목사님 방이라면 누가 그렇게 들어오겠습니까? 들어올 수가 없죠. 아버지 방이니까 들어오는 겁니다. 마찬가지에요. 잘했건 잘못했건 하나님이 나를 자녀라고 부르신다면 담대하게 나아가십시오.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주님의 은혜를 구하고 주님께 매달리고…. 좀 과하다 싶을 정도로 주님께 매달릴 수 있어야 합니다. 나는 그 분의 자녀이니까, 그 분의 아들 그 분의 딸이니까요. 우린 너무 점잖게 하나님 믿는 것 같아요. 제가 처음 예수님 믿을 때에 학교 안에 신앙인들의 모임이 있었습니다. 거기에 우리 한국 학생들도 있었고 미국 학생들도 있었어요. 기도회를 매주 하는데, 각자 기도 제목을 놓고 같이 기도하는데, 한 친구가 갔다 와서 황당해 하면서 왔어요. 그래서 왜 그러냐고 했더니, 사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구하는데 너무 미안해서, 구하는 것을 좀 절제합니다. 예를 들어서 그 친구는 뭐라고 기도제목을 내 놓았냐면 “제가 이번 학기에 공부한 만큼 성적이 나오게 해 주십시오.” 이렇게 기도제목을 내 놓았는데, 미국 학생 하나가 “하나님, 제가 차가 없는데 공짜로 자동차 한 대 주십시오.” 하고 기도하더래요.
그러니까 ‘아무리 뻔뻔해도 하나님 앞에 그렇게 뻔뻔할 수가 있을까?’ 그렇게 생각하고 온 거예요. 어떻게 공짜 차를 달라고 하냐고요. 그런 면에서 우리 한국 사람들은 너무 하나님 앞에 점잖게 예수님 믿는 것 같아요. 그런데 어느 면을 뒤집어 보면 그게 이해가 가요. 아버지니까 차 사달라고 하죠. 대학 다니는 우리 아들도 차 고장 났다고 저한테 차 사달라고 그래요. 왜 저한테 그러겠어요? 그 아이는 분명히 공짜 차 사달라고 하는 것 아니에요? 아버지니까요. 그렇게 생각하니까 맞아요. 하나님께 공짜 차도 달라고 기도할 수 있어요. 그것보다 더 큰 것도 달라고 기도할 수 있겠어요. 왜요? 아버지니까요. 하나님께 너무 격식 차려가면서 나가지 맙시다. 부모와 자식의 관계로서, 자녀로서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오히려 더 쉽게 하나님의 뜻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무서운 하나님이 아닙니다. 사랑의 하나님입니다. 여러분을 자녀로 두신 하나님입니다. 자녀로 삼으신 하나님입니다. 그 하나님이 여러분과 교제하시기를 원하실 때, 여러분의 현재 상태를 보고 돌아서지 마십시오. 그냥 주님 앞에 가십시오. 계속 밖으로 도는 사람은 영원히 주님의 사랑의 음성을 들을 수가 없습니다. 모든 믿음이 마찬가지에요. 열심을 내서 주님을 붙들기 위한 노력을 해야 합니다. 그럴 때에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를 경험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경 말씀을 모를 때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에 대한 관점이 잘못 되었을 때 하나님 앞에 나아가지 않으니까 하나님 뜻을 알지 못하고, 세 번째는 알려고 해도 훈련이 안 되어 있을 때 하나님 뜻을 알지 못합니다. 여러분, 어느 날 갑자기 주님 앞에 앉아서 하나님 뜻 알겠다고 기도해 보십시오, 기도가 제대로 되나. 잘 안 됩니다. 이것이 계속적으로 좀 훈련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훈련은 대개 혼자 하기는 참 어렵습니다.
그래서 교회에서 그렇게 훈련이 잘 될 수 있도록 돕는 여러 프로그램을 합니다. 양육 프로그램도 있고, 계절용 프로그램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 프로그램을 통해서 결국은 하나님을 만나는 것을 훈련시키는 거예요. 말씀도 가르치지만 하나님과 대면하는 법을, 내 경험도 이야기하고 함께 나누고 훈련하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 교회에서는 장로님들 참 은혜롭습니다. 지금 제자훈련, 장로님들이 제일 앞서 있어요. 사역훈련도 지금 하고 있습니다. 처음 사역훈련 할 때 지난 봄 학기에 로마서 8장을 다 외웠습니다. 한 주에 서 너 구절 씩 외워가면서 8장을 다 외웠습니다. 그런데 외우면서 우리 장로님들과 함께 느낀 것이 많습니다. 그냥 읽을 때 보다 외우니까 완전히 말씀이 달라져요. 제가 성경 말씀에 대해 충분히 설명을 해 드리고, 그 이해한 가운데서 외우니까 그 말씀 하나 하나가 계속 은혜로 다가오는 것입니다. 그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과 교제하는 법이 훈련이 되고, 그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게 되고, 삶의 변화가 거기에서도 올 수가 있습니다. 사실 많은 분들이 이야기해요. “아, 제자훈련…, 암송만 없으면 좋겠다.” 그런데 암송 없는 제자훈련은 앙꼬 없는 찐빵입니다. 암송이 있으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있고, 하나님의 말씀이 있으니까 그것을 통해서, 그것을 매체로 해서 하나님과 교제가 됩니다. 하나님의 뜻을 점점 알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적절한 때에, 특정한 때에 하나님의 말씀이 생각이 나요. 그래서 살아있는 말씀이 되고 살아있는 교제, 생명의 교제가 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훈련이기 때문에 어느 정도 어려움이 따릅니다. 훈련이 뭡니까? 습관이 안 된 것을 새로운 습관으로 만들 때까지 계속 반복적으로 하는 것이 훈련입니다. 금년의 우리 교회 표어가 “가르쳐 지키게 하라.”입니다. 가르침의 목적은 지키게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안 지킬 때는 어떻게 해요? 하여튼 귀에 박히게 가르쳐야 해요. 지킬 때 까지요. 그게 훈련입니다. 그래서 저는 ‘교육’이라는 말보다 ‘훈련’이라는 말을 더 좋아해요. 왜냐하면 훈련을 습관을 바꾸는 거니까요. 교육은 잘못하면 정보의 전달밖에 안 됩니다. 그런데 훈련이에요. 하나님과 교제하는 훈련, 하나님과 동행하는 훈련, 이 훈련을 계속하는 겁니다. 그렇게 하면 비로소 점점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 알아지기 시작합니다.
마지막 네 번째로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해서 꼭 필요한 것은 순종하려는 결단입니다. 말씀도 순종하려는 자세로 성경을 읽어야 이해되고, 실제로 순종을 해 봐야 이 말씀의 참된 의미를 깨닫게 됩니다. 순종해 봐야 하나님의 사랑의 뜻을 알게 돼요. 성경에 수많은 하나님의 명령이 나오는데, 하나님의 명령은 초점이 그 명령을 지키는 행함에 초점이 있는 게 아닙니다. 행함을 통해서 관계-하나님과 나와의 관계, 나와 저 사람과의 관계에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많은 경우에 이것을 혼동해요. 이것을 혼동한 사람이 대표적으로 바리새인들이에요. ‘내가 이것을 행함으로 복 받는다.’ 이렇게 생각해요. 그러니까 부모님이 심부름을 시킵니다. “가게에 갔다 와라.” “아니, 나 싫은데, 나 지금 텔레비전 이거 봐야 하는데.” “갔다 와. 갔다 오면 천원 줄게.” 그러면 가기 싫어도 천원 받기 위해서 가게 심부름 갔다 옵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가 복이 있느니라.” 할 때에 ‘내가 하나님의 말씀, 어렵고 힘들고 지키기 힘들지만 이것을 지켜야 천원-복을 받으니까 하나님 말씀을 지켜야 하는가?’이겁니다. 그 뜻이 아니에요. 많은 경우에 그렇게 생각해요. ‘내가 열심히 하나님 뜻에 순종하면 하나님이 내가 원하는 돈도 주실 것이고, 내가 원하는 지위도 주실 것이고, 내가 원하는 대로 형통하게 하시리라.’ 그게 아닙니다. 여기에서 복은 “내가 A라는 행동을 하면 내가 원하는 B라는 축복을 주시리라.” 그게 아닙니다. A라는 행동 속에 하나님의 축복이 있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예를 봅시다. “원수를 사랑하라.”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 지키기 조금 힘들죠? ‘원수’라고 하면 사람들은 ‘나는 원수는 없어.’ 하고 생각해요. 그런데 여러분과 관계가 끊어진 사람들이 있지 않습니까? 여러분과의 관계가 문제 있는 사람들이 있지 않습니까? 그게 다 넓은 의미에서 원수에 들어가는 거예요. 그 관계를 다 회복시키라는 겁니다. 그 잘못된 관계, 서로 미워할 수밖에 없는 그 관계조차도 먼저 그 관계를 회복하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관계를 회복해야 내게 천국이 있으니까요.
많은 사람들이 왜 스트레스 쌓입니까? 항상 인간관계에서 고민하니까 스트레스 받아요. 왜 많은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평안함을 못 누립니까? 거의 대부분이 관계에 문제가 생겨서 평안함을 못 누리는 것입니다. 가진 것이 있고 없고는 문제가 아니에요. 그것은 사탄이 속이는 것입니다. 실제로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들이 국가별 행복지수를 볼 때 1위가 방글라데시에요. 스스로 자기들이 생각할 때 행복하다고 생각한다는 거예요. 오히려 훨씬 하위권에 드는 나라가 잘 사는 나라들이에요. 세계적으로 자살률이 제일 높은 나라가 스웨덴, 노르웨이라는 말입니다. 있고 없고가 행복의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인간관계에서 행복할 때 우리는 행복한 것인데, 그 관계의 축복을 받기 위해서 필요한 게 원수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잘 안 되죠. 하고 싶지도 않죠. 원수를 사랑하려고 노력하고, 또 노력하고 주님 앞에 서 보십시오. 저도 그런 경험이 있어요. 제가 목사로서 언제가 제일 괴로웠냐면 제가 제일 사랑을 쏟아 부은 사람에게서 배신당할 때, 그때가 제일 괴롭더라고요. 처음부터 저에게 막 나쁘게 말하면서 괴롭힌 사람은 괜찮아요. 마음으로 접고 저 사람은 그런 사람이려니 하고 불쌍하게 보면 되니까요. 그런데 막 사랑을 쏟아 부었는데 그 사람에게서 배신당했다고 느낄 때가 제일 힘들었어요. 사랑을 부은 만큼 정신이 없어요. 기도도 안 되고 아무것도 하기 싫어요. 이 배신감에 미움으로 막 가슴이 끓기 시작하는 거예요. 그런데 목사에게 목사의 목을 죄는 것은 점점 주일이 다가온다는 겁니다. 마음이 이런 상태로 이 영광스러운 강단에 설 수가 없어요. 누군가와 마음이 거리낀 상태로 제가 여기 설 수가 없습니다. 그 전에 해결해야 될 것 아니에요? 제가 뭔가, 누군가에게 미운 마음으로 여기 서면, 사람은 영물이라 묘하게 이게 전달이 되요. 제가 그것을 전염시킨다니까요. 그것을 다 녹여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매달리는데, 너무 마음이 그러니까 기도도 안 돼요. 다리도 쭉 뻗고 퍼져 있으면서 “주여…!” 할 말 없어요. 그냥 가만히 있는 거예요.
그리고 또 한참 있다가 “주여…!”하고는 또 가만히 있어요. 이렇게 며칠을 있었어요. 그런데 어느 날 밤에 갑자기 마음을 탁 치는 생각이 있었어요. 주님께서 제 마음에 주신 말씀이 “너는 나한테 뭐냐?” 하시는 겁니다. “네? 저는 지금 이 사람 때문에 지금 기도하고 있는데 너는 나한테 뭐냐니 그게 무슨 소립니까?”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내가 예수님께 웬수에요, 웬수. 주님께 잘못하고 주님을 배신하고 주님의 호의를 접고 다른 길로 간 적이 한 두 번이 아닌 거예요. 그게 막 갑자기 생각이 나기 시작하는 겁니다. 그래서 그 사람과의 관계는 젖혀놓고 주님께 실컷 회개하고 울었어요. 얼마만큼 내가 하나님 앞에 잘못된 존재였던가를 실컷 회개하고 나니까, 원수를 사랑하는 것이 나한테 하라는 게 아니고 먼저 그게 하나님의 품성이더라고요. 예수님께서 “원수를 사랑하라.” 하실 때에는 이미 예수님이 원수를 사랑한 분입니다. 여러분이 다 하나님의 원수였어요. 하나님을 떠나가고 하나님을 대적하고 하나님께 죄를 지은 사람들 아닙니까? 그런데 그런 원수 된 우리, 끊임없이 원수 된 우리에게 주님이 다가오셔서 생명까지 주셨잖아요? 그것을 일반적으로만 이야기했는데, 내가 그렇다는 것을 그 날 확 느끼기 시작한 겁니다. 실컷 회개하고 나니까 그 사람이 나한테 한 것은 내가 주님한테 한 것에 비하면 새 발에 피도 안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용서하려고 막 억지로 할 게 없어요. 저절로 이미 없어진 거예요. 원수를 사랑하라는 그 말씀을 어떡하든지 지키려고 하는 가운데, 주님과의 관계에서도 주님을 더 깊이 이해하게 됐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과의 관계도 그냥 회복되었습니다. 그 사람은 몰라요, 저 혼자 그냥 가슴이 뭉그러진거지. 제 마음 다 해결되고 그 다음부터는 사랑으로 안을 수 있게 됐어요. 그 뒤로도 몇 번씩 그러한 사건들이 있는데 이제는 마음에 그런 면에서 굳은살이 딱 박혀서 아프지도 않아요. ‘원래 사람이 그런 존재지, 뭐.’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렇게 시험도 안 들어요. 원수가 안 만들어지니까 세상이 너무 편해요. 그게 최고의 축복이라고 느끼는 겁니다. 하나님 말씀을 지키려고 노력하면 할수록 그 말씀 속에 있는 하나님을 만납니다.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면, 원수가 크면 클수록, 그 원수를 용서하기 힘들면 힘들수록 나를 용서하신 주님의 마음이 그만큼 이해됩니다. 내가 경험하는 만큼 경험하는 거예요. 하나님을 알아가는 겁니다. 그리고 그만큼 경험하고 나면 저 사람과의 관계에서 내가 원수 될 일이 별로 없어요. 그러니까 사람들이 내 마음에서 녹아지기 시작하니까 마음이 편한 거예요.
천국이 임하게 되고 ‘아, 하나님이 이래서 내게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시는 거구나.’ 하는 것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지키려고 노력하기 전에는 하나님이 “원수를 사랑하라.” 그러면 ‘하나님, 제가 약 먹었습니까? 저 사람을 사랑하게….’ 이런 생각밖에 안 들어요. ‘왜 하나님은 제게 손해 보는 짓을 하라고 합니까? 저 사람은 나를 사랑하지 않는데 왜 나만 사랑해야 합니까? 왜 나만 손해 봐야 합니까?’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전혀 손해 보는 것이 없어요. 내가 꿋꿋이 용서하지 않을 때 나만 괴롭지 저 사람은 아무렇지도 않다니까요. 말씀은 경험하는 것입니다. 순종을 통해서 경험해 가는 것입니다. 순종하려고 노력하지 않으면 하나님을 더 깊이 만날 수가 없습니다. 깊이 경험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 우리를 사랑하셔서 복 주시기 위해서 이 말씀을 주셨다는 사실을 경험할 수가 없습니다. 29절에 보면 “이 세대는 악한 세대라 표적을 구하되 요나의 표적밖에는 보일 것이 없다”고 하십니다. 요나의 표적에 대해서 여러 가지로 이야기할 수 있지만, 특히 순종하는 면에서 한 가지 이야기할 수 있어요. 요나는 하나님께 불순종함으로 니느웨로 안 가고 다시스로 갑니다. 가다가 죽을 뻔했죠? 돌이켜서 하나님 뜻에 순종할 때 다시 생명을 얻게 되고 하나님 안에서 자기의 존재 의미를 깨닫게 됩니다. 우리도 원래 죽은 목숨이지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명령하신 것을 듣고 돌이켜서 새로운 삶을 살려고 할 때에 그 속에 진정한 생명이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들, 한번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려고 노력해 보십시오. 순종하려고 노력하다 보면 점점 그 속에서 나를 사랑하신 하나님의 뜻을 여러분이 경험할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의 인생이 새롭게 바뀔 거라 이겁니다. 그냥 ‘하나님 뜻도 모르겠다, 알려고도 안 한다. 그냥 내 맘대로 산다.’ 그렇게 생명 없는 삶 살지 마십시오. 예수님 믿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이 끊임없이 그 심령 속에 성령께서 흔들면서 이야기하십니다. 하나님 뜻대로 하라고요. 그 성령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시고, 말씀을 보면서 그 하나님을 만나려고 노력하시고, 열심히 그러한 훈련을 통해서 순종하려는 각오를 하면서 이 훈련에 임할 때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실제 삶 속에서 천국으로 역사하실 줄을 믿습니다. 바로 이 은혜가 충만한 우리 성도님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출처/차규현목사 설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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