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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상4:9-10
요즘 집들이 많이 지어지고 있습니다. 10년 전 혹은 20년 전과는 상상하지 못할 정도로 많은 집들과 빌딩들이 지어지고 있습니다. 그전에는 아파트 하면 5층 정도만 생각했는데 이제는 20층 이상으로 높은 건물들이 많이 지어지고 있습니다. 그런 건물들이 지어지기 위해서는 설계도가 필요합니다. 그 설계도는 간단한 것이 아니라 토목설계도, 건축 설계도, 내장설계도 등 설계가 되어야 집을 짓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를 지으신 목사님들의 얘기를 들어보면 교회를 짓기 전에 설계비를 아끼지 말고 확실히 해야 건물이 잘 지어진다고 말씀을 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간단한 창고를 지어도 설계를 가져야 합니다. 이를 보면서 우리의 인생이라는 집은 아름답게 짓기 위해서도 설계도를 가져야 하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의 인생을 위해서 어떤 설계도를 가지고 계십니까? 또 그 설계도에 맞게 인생의 집을 지어가고 계십니까?
하나님께서는 오늘 우리들이 좋은 신앙의 집을 짓기 원하십니다.
오늘 성경에 보면 좋은 신앙의 집을 지은 사람의 이름이 나옵니다. 그 사람의 이름은 야베스입니다.
성경은 말하기를 "야베스는 그 형제들 보다 존귀한 자라"고 했습니다. 존귀하다는 말은 높일 만하고 섬길 만하고 남을 다스릴 수 있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적어도 이 땅에 살면서 우리의 삶의 목표는 어느 정도여야 하겠습니까? 높임 받아야 합니다. 인정도 받아야 하고 사랑도 받아야 할 것입니다. 더 나아가 이 세상을 다스리는 지도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만드실 때에 이미 존귀한 자로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에 모든 피조물들을 말씀으로 만드셨습니다. 꽃과 나무 모두 말씀으로 만드셨습니다. 하늘의 해와 달과 별, 대단해 보여도 말씀으로 있으라고 하시니 그냥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만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친히 흙을 가져 손으로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그 속에 생기를 불어 넣어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손으로 친히 땀을 흘려 만드신 것은 사람뿐입니다. 뿐만 아니라 사람을 만드실 때 그 모델을 누구로 하셨습니까? 어떤 사람은 사자같이 용맹한 사람이 되기를 원하고 또 어떤 사람은 꽃처럼 아름다워 지기를 원합니다. 이처럼 사자나, 꽃에 자신을 비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를 만드실 때는 아무리 사자가 용맹스럽고 꽃이 아름답다고 해도 그와 같은 것을 모델로 해서 만드시지 않으셨습니다. 이 세상을 만드신 하나님, 존귀하신 자신의 형상을 따라 만드셨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사람은 존귀한 자로 만들어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세상을 다스리는 지배권과 생육하고 번성하는 복도 주셨습니다. 참으로 존귀한 인생들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아담이 타락한 결과 인류는 모든 하나님의 존귀를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시29:12 "사람은 존귀하나 장구치 못함이여 멸망하는 짐승과 같도다" 우리의 타락한 모습은 존귀함은 없고 타락한 짐승, 멸망할 짐승의 모습으로 변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는 이 창조때에 주셨던 존귀함을 사람에게 주시기를 원하셨습니다. 다윗은 이것을 알고 대상17:
18 "주의 종에게 베푸신 존귀"고 했습니다. 솔로몬은 전6:2 "사람은... 존귀를 하나님께 받았으나..."라고 했습니다. 이 세상의 살았던 존귀한 사람들이 자신의 삶을 고백하기를 존귀는 스스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 받았다고 했습니다. 히5:4" 이 존귀는 아무나 스스로 취하지 못하고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자라야 할 것이니라" 존귀는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시16:3 "땅 위에 있는 성도는 존귀한 자니 나의 모든 즐거움이 저희에게 있도다"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이미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천국 백성이 되었습니다. 이 세상 사람들과는 다른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 바로 저와 여러분들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존귀한 자라는 것입니다. 내가 그렇게 느끼던 느끼지 않던 그것은 상관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우리에게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땅히 존귀한 삶을 살아야 될줄로 믿습니다. 이것이 인생의 목표입니다. 좀더 가치있고 높임받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인생의 목표가 되어야 합니다.
오늘 성경이 바로 그 사실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야베스는 그 형제들 보다 존귀한 자라" 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많은 사람들 가운데 존귀한 자로 살아가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럼 존귀함은 어디에서 옵니까?
1.존귀함은 비전에서부터 시작 됩니다.
10절 "야베스가 이스라엘 하나님께 아뢰어 가로되 원컨데 주께서 내게 복에 복을 더하사 나의 지경을 넓히시고..." 하나님의 복을 받아 우리의 삶의 지경을 넓혀야 하겠다는 것이 비전입니다. 오늘 보다는 내일이 더 나은 삶을 살자는 것입니다. 오늘 이 모습 보다는 내일 더 나은 모습으로 만들자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교회의 모습도 이 모습으로 두지 말고 더 나은 모습으로 만들자는 것입니다. 지경을 넓혀 달라는 것이 야베스의 소원이었습니다. 오늘 여러분의 소원은 무엇입니까? 여러분에게도 하나님의 복을 받아 지경을 넓혀지게 해 달라는 비전이 소원이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프랑스 파리에 "앙또아누아" 라는 거지가 있었습니다. 이 거지는 파리의 대로에 앉아 구걸을 했는데 "아르노"라는 중년 신사가 매일 그에게 도움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그 중년신사는 거지의 몸이 건강함을 보고 꾸짖었습니다. "당신처럼 사지가 멀쩡한 사람이 구걸한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 아니오? 나도 당신처럼 구걸하던 때가 있었소 그러나 나는 당신처럼 돈을 구걸하지 않고 책을 구걸했소. 손수레를 끌고 다니며 종이나 책을 모아 제지공장에 팔기 시작하여 그 돈을 잘 모아 지금은 제지공장의 사장이 되었다오"그 날부터 그 거리에는 앙또아누아의 모습이 사라졌습니다. 한번은 아르노 씨가 한 서점에 들러 책을 사는데 그 서점 주인이 와서 정중히 인사를 하며 말했습니다. "선생님 제가 10년전 파리에 거지였습니다. 그 때 선생님이 따끔한 충고를 받아들여 지금은 50여명의 직원을 거느린 주인이 되었습니다."
사람을 황폐하게 만드는 것은 절망입니다. 생각을 바꾸면 미래가 보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비전, 그것은 우리의 지경을 넓히는 것입니다. 더 나은 삶을 위한 비전이 우리에게 있는지 성경은 우리에게 묻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나안 땅을 약속하셨습니다. 애굽 땅 종 되었던 곳에 있지 말고 가나안을 향해 가라고 하신 것입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가라는 것입니다. 홍해바다를 건너고, 만나와 메추라기를 먹고, 반석의 물을 먹습니다. 전쟁에 승리와 실패를 겪으면서 가나안 땅을 향해 나아가는 것입니다. 인간적으로 볼 때는 왜 이런 어려움을 겪게 하시는지, 이런 고생을 하게 하는지 하지만 가나안 땅에 목표를 두고 나아가는 것은 아름다운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 모두가 가나안 땅에 가는 것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그 중에는 애굽 땅을 그리워 하면서 그래도 편하게 살지 않는가 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우리들 가운데도 '예수를 믿지 말걸...' 하면서 믿어서 고생을 한다고 생각하는 분도 계실 수 있습니다. 주일마다 나와야 하고 안 나오면 안 나왔다고 전화가 오고, 헌금도 해야 하고 봉사도 해야 하기에 차라리 예수를 믿지 않았으면 편하지 않는가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여러분을 부르신 것은 가나안으로, 지경을 넓히시기 위해서 불렀다는 것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지경을 넓혀 달라고 간절히 소원해야 합니다.
1)비전은 행동으로 옮겨야 합니다. 생각 이상의 복이 있습니다.
등산하는 사람들은 높은 산에 올라가는 것이 소원입니다. 그러다가 죽기도 합니다. 일반 사람들은 산에 올라가면 떡이 나오나 하겠지만 그러나 그것은 산을 모르는 사람들이 그런 얘기를 하는 것입니다. 산에 올라가기 위해서 얼마나 준비하겠습니까? 건강도 준비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옷도 보다 가볍고 따뜻한 옷을 고를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을 위해서 개발을 하다보니 우리도 보다 따뜻하고 가벼운 옷을 사 입을 수 있는 부수적인 복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우주선을 띄웁니다. 무중력 상태에서 가능한 충격을 덜 받도록 만들어진 신발이 있습니다. 요즘 학생들이 신는 신발 가운데 충격을 완화시키는 에어쿠션이 있는 신발이 있습니다. 이렇게 자연적으로 따라오는 부수적인 복이 있습니다. 성가대를 향한 비전이 있습니다. 세계적인 성가대가 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세계 곳곳에서 초청을 해서 곳곳을 누비며 찬양하는 것입니다. 처음에 예술에 전당에서, 세종문화회관에서 음악회에 참여했을 때 처음에는 '우리교회처럼 작은 교회가 어떻게 참여할까' 했는데 참여하고 나니 부수적으로 따라오는 복들이 있지 않았습니까? 예를 들어 작년 35주년 음악회를 준비하면서 연습을 했습니다. 보다 향상된 성가대가 되었습니다. 그것은 세계적인 성가대가 되기 전 준비과정인 것입니다. 또 열심히 모이다 보니 나오지 못한 사람도 나오게 되어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게 된 것입니다. 또한 개인적으로도 성악을 전공하거나, 공부를 한 사람도 아닌데 큰 음악당에서 노래하게 되는 영광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인생의 아름다운 페이지를 만들게 된 것입니다. 세상적으로도 북한 어린이 돕기 자선 음악회로 열어 북한 어린이를 돕기도 했습니다. 이에 많은 사람들을 참여시켜 복음도 전하게 되었습니다. 음악회 그 자체로 보면 아무것도 생기는 것이 없다고 하지만 그런 비전을 통해 주시는 은혜가 있음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높은 비전을 향해 나아가는 것입니다. 내 지경을 넓혀 달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가나안의 비전을 주시고 그 비전에 도전하기를 원하시고 계십니다. 이것은 이기적인 꿈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따라가는 순종일 뿐입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지금보다 더 나은 삶을 위해서 우리는 충성하고 헌신해야 하나님이 기뻐하실 줄로 믿습니다.
2)비전은 교회를 넘어 세상에서 힘을 발휘해야 합니다.
저는 가끔 이런 생각을 합니다. 우리 나라에 미국 선교사들이 와서 복음을 전해서 한국에 교회들이 세워졌습니다.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그런데 그들 가운데는 선교의 비전이 없이 미국 땅도 아직 복음화 되지 않았는데 외국까지 가느냐고 하는 목소리가 높았더라면 우리 나라는 복음을 더 늦게 받았을런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내 땅 만이 아니라 세계를 향한 지경이 넓혀지기를 원한 비전이 있었기 때문에 한국에 까지 복음을 전하게 된 것입니다. 제 목회의 비전도 이와 같습니다. 제 소원이 있습니다. 그것은 한남제일교회의 목사님 이라는 것 보다는 교회 다니지 않는 분이라고 할지라도 저를 "우리 목사님"이라고 불러주기를 원합니다. 전도한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아직 믿지 않는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그들을 향해 손을 펴는 것입니다. 우리 교인을 다 훈련시킨 후에 전도하는 것이 아니라 같이 손을 펴는 것입니다. 적어도 한남동 이 지역에서는 한남제일교회가 이름으로 불려지지 말고 "우리교회, 우리 목사님"이라고 불려져야 할 것입니다. 장로님들 까지도 "우리 장로님"이라고 불려져야 합니다. 이것이 존귀한 자입니다. 이것이 지도자입니다. 교회 안에서만 아니라 밖에서도 높임을 받아야 합니다. 전도의 개념이 넓어지는 것입니다. 때가 되면 우리의 사랑을 받은 이들이 주의 사랑 안으로 들어오게 될 것을 꿈꾸는 것입니다.
어느 책을 보니 "교회는 미사일 발사대"라고 말씀한 목사님이 있습니다. 미사일 발사대라는 말은 폭탄을 쏘아 올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미사일은 목표점에 가서 터지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폭탄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세상에 나아가 터져야 합니다. 이것이 세상의 빛이고 소금이 되는 것입니다. 만약에 폭탄이 세상을 향해 나가서 터지지 않고 발사대 위에서 터졌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집안에서는 호랑이로, 밖에 나가서는 쥐와 같은 인생을 살지 말아야 합니다. 밖에 나가서 터져야 합니다. 혹 불발탄도 있습니다. 내가 가진 지식, 경험을 가지고 집 안에서 왕이 되려고 하지 마십시오. 세상에 나가서 빛이 되고 세상을 변화시키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비전은 존귀함의 시작입니다. 내 지경을 넓혀 주소서! 우리 가정, 우리 교회, 이 민족 그리고 작게는 남녀 선교회, 성가대의 비전이 지경이 넓혀지기를 사모하면서 충성하는 여러분에게 은혜가 있을 줄로 믿습니다.
2. 존귀함은 믿음으로 가능해 집니다.
이 믿음은 한계를 극복한 믿음입니다. 비전을 이루는 방법입니다. 세상은 신념으로 하지만 우리는 믿음으로 하는 것입니다. 9절 "야베스는 그 형제들보다 존귀한 자라 그 어미가 이름하여 야베스라 하였으니 이는 내가 수고로이 낳았다 함이었더라" 야베스라는 이름은 "고통"이라는 뜻입니다. 낳을 때 고통이었고 그의 삶도 그랬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10절의 그의 기도내용을 보면 "주의 손으로 나를 붙드사 나를 환난에서 벗어나 근심이 없게 하소서"라고 합니다. 태어날 때도 고통이었지만 살아갈 때도 그 인생이 고통이고, 근심이고 환난 이었던것 같습니다. 제 이름이 "오 고통, 오 뚱뚱이, 오 짱구, 오바보, 오 머저리.. "라고 부른다면 어떻겠습니까? 여러분의 이름이 그렇다면 마음이 어떠시겠습니까? 한 사람만 나를 그렇게 부르는 것이 아니라 집에서도 "고통아" 밖에서도 "고통아" 라고 한다면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이런 고통에서 이길 수 있는 힘은 무엇입니까? 지식입니까? 재물입니까? 믿음 밖에는 없습니다. 믿음은 지식보다, 경험보다, 재물보다 더 값지게 하는 것입니다. 비전을 이루어 가게 하는 것입니다. 고통 속에 있는 사람이 무슨 비전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야베스는 그의 이름이 고통이라고 했을지라도 하나님께서 주시는 능력으로 승리하는 인생을 살 줄로 믿는 믿음이 있었던 것입니다. 이 믿음이 그로 하여금 고통 받는자에서 존귀한 자로 변화시켰습니다.
대상21장에 보면 다윗왕이 백성들이 인구조사를 명령합니다. 그 결과 칼을 들 수 있는자의 숫자를 파악하게 됩니다. 없는 미래를 무엇으로 믿고 살수 있느냐 하는 뜻에서 였습니다. 다윗은 조사된 군인 숫자 167만명으로 만족해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에 분노하시고 선견자 갓을 보내셔서 책망하십니다. 그리고 3년 가뭄, 혹은 전쟁의 피해로 3달 쫓겨 다님, 그리고 온 백성에게 온역이 생기는 것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하셨습니다. 그 결과 백성들은 온역으로 7만명이 죽게 됩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한계를 하나님의 믿음으로 극복하지 않고 자신의 능력으로 극복하려 할 때 임하는 하나님의 저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능력으로 우리를 책임 져 주시길 원하십니다.
대상2-4장에는 유다 지파의 족보가 나오고 있습니다. 2-3장에는 다윗 왕가의 족보가 나옵니다. 그래서 유다 지파에서는 다윗왕의 족보 이외에는 내세울 것이 없었습니다. 어떤 면으로는 유다 지파였지만 야베스는 보잘 것 없는 지파였던 것 같습니다. 이것이 야베스의 현실이었지만 그러나 하나님은 오늘의 하나님이 아니라 미래의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한계에 머물지 않고 하나님이 주시는 비전을 믿음으로 얻으려고 애썼음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벧전1:7"믿음의 시련이 금보다 귀하여 예수님 오실 때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함이니라" 오늘 주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으리라"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것이 여러분 신앙의 고백이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여러분의 가정에 늘 이 말이 기도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 힘들어 죽겠다!" 가 아니라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능치 못할 일이 없을 줄로 믿습니다."라는 말이 기도가 되어야 될줄로 믿습니다. 고통을 이기십시오. 오늘의 현실을 이기십시오. 그리고 지경을 넓히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믿음으로 받아 승리하는 여러분에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존귀는 기도로 이루어 집니다.
염려하지 않는 기도입니다. 10절에서 야베스가 기도하기를 "주의 손으로 나를 도우사 나로 환난에서 벗어나 근심이 없게 하옵소서 하였더니 하나님이 그 구하는 것을 하락하셨더라" 했습니다. 비전은 믿음으로 이루고 믿음의 구체적인 행위는 기도입니다. 기도하지 않기 때문에 응답이 없는 것입니다. 기도가 믿음의 전부라고 할 수는 없지만 그러나 믿음이 있으면 당연히 기도하는 것입니다. 염려하지 않는 것입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가 아니라 기도하면서 주님이 주시는 은혜를 마땅히 경험해야 될 것입니다.
제주도에서 가뭄이 들었을 때가 있었습니다. 모든 나무들이 말라 죽는데 한 과수원에는 나무들은 생명을 연장하고 있었습니다. 파릇파릇 하진 않았지만 죽지 않았습니다. 왜 그런지를 궁금해 했습니다. 주인은 얘기했습니다. "나는 이 나무에 물을 줄 때 흠뻑 주지 않았습니다. 나무가 자라기에 죽지 않을 만큼만 주었습니다. 그랬더니 나무들이 스스로 살 길을 찾았는데 그것은 나무들이 뿌리를 깊이 내렸던 것입니다." 위에서 오는 것이 없으면 밑에서 공급받는 것이었습니다. 시련은 망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만나게 하는 기회임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비전을 향한 뿌리를 깊이 내리시기 바랍니다. 믿음의 뿌리를 깊이 내리시기 바랍니다. 기도의 뿌리를 깊이 내려야 합니다. 기도하면 하나님이 꼭 응답하실 줄로 믿습니다. 어려운 일 당할 때, 생각지도 못했던 일들이 다가올 때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됩니다. 첫째는, 자신을 성찰하는 기회가 됩니다. 갈등 속에 나 자신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나의 모난 부분, 파여진 부분은 무엇인지 보고 온전한 모습으로 만들어 가는 기회로 삼습니다. 두번째는 어려운 일이나, 어려움을 주는 사람을 예수님의 심정으로 사랑합니다. "하나님 그를 통해 깨닫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물론 어렵습니다. 그러나 성령님을 의지하여 어려움을 오히려 감사하고 사랑하는 기회로 삼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의지합니다. 기도하는 것입니다. "주여 나를 도와 주소서, 저들을 도와 주소서" 이처럼 기도하면 어려운 일도 은혜가 됩니다.이것은 마땅히 우리가 가야 할 길 인줄로 믿습니다.
오늘 하나님의 계획은 우리를 존귀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청년들 만이 아닙니다. 나이가 들어도 비전이 있고, 믿음이 있고, 기도가 있으면 우리는 존귀한 삶을 살수 있음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이제 몇 년 남았습니까? 하나님이 부르시는 그 날이 몇 년 남았습니까? 독일에 격언 가운데 무서운 격언이 있습니다. "청년은 죽을 수 있다, 노인은 죽는다" 그 때가 올 것입니다. 이제 남은 시간은 얼마 되지 않습니다. 존귀한 자로 우리의 삶을 살기에 더 큰 비전과 믿음과 기도로 승리하는 여러분이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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