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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기 설교[1,404편]〓/부활 주일 설교

부활 사건의 의미(마태28:1-15)

by 【고동엽】 2022. 8.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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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 사건의 의미(마태28:1-15)

오늘은 우리 예수님께서 사망의 권세를 이기시고 다시 사신 부활 주일입니다. 다시 사신 주님의 평강이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어느날 3대 독자를 잃은 한 어머니가 석가모니에게 찾아와서 죽은 자기 아들을 살려달라고 애원을 했습니다. 석가모니는 하도 기가차서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다음과 같은 말을 하게 되었습니다. "부인, 내가 당신의 아들을 살려드리리이다. 그런데 조건이 하나 있습니다. 부인이 저 동네에 가서 겨자씨 하나를 구해 오는 일입니다. 그 겨자씨는 아무도 죽음의 고통을 당해 보지 아니한 집에서 구해 와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 부인은 한 가닥의 희망을 품고 이집 저집 모든 집을 다 찾아 다니면서 겨자씨 하나를 구해 오려 하였으나 모든 노력이 헛 수고였습니다. 다시 돌아와 "그런 겨자씨는 구할 수 없습니다."고 고백하였습니다. 그 때 석가모니는 다시 말하기를 "그렇지요! 죽음의 비애란 모든 집,모든 인생에게 다 임하는 것인데 그대의 아들이라고 왜 당하지 않겠습니까?" 하고 발길을 돌렸다고 하는 일화가 있습니다.

인생은 한번 태어났으면 한번은 죽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 가운데서 '나 하나 죽으면 그만이지' 라고 생각하며 문제를 해결하려는 사람이 있습니다.

아주 위험한 생각이요,

죽음의 의미를 모르는 사람입니다.

죽음이 모든 것의 끝으로 착각한 것입니다.

더군다나 죽음이 모든 문제의 해결이 될 수는 없습니다. 세상의 모든 종교, 사상은 여기서 끝납니다. 죽음을 그냥 받아들이는 것으로도 위대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여기서 모든 것이 끝나지 않습니다.

고린도전서 15장 32절에 보시면

"죽은 자가 다시 살지 못할 것이면 내일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자 하리라"고 말합니다. 죽음이 끝이라는 생각의 사람들이 취하는 태도입니다. 그러나 죽음은 인생의 끝이 아닙니다. 여기 예수님의 다시 사심의 사건이 이를 증명하고 있습니다. 이 사건이 주는 의미를 생각해 보면서 오늘 아침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1. 역사적이며 실제적인 사건(1-6)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이유는 우리 인간의 머리로 도저히 이해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는 자신의 생각과 자신의 판단을 우선으로 놓으려는 자기 교만입니다. 어떤 아이가 학교에서 구구단을 배워와서는 집에서 할아버지 앞에서 자랑을 했다고 합니다. 할아버지가 하도 기특해서 물어 보았다고 합니다. "얘 3 곱하기 4는 뭐지?"

"예 그것은요...12지요"

"오 그래 잘 맞추는데 그러면 6곱하기 7은?"

"42요"

"그러면 13 곱하기 12는 뭐지?"

"애이 할아버지 이 세상에 그런 것은 없어요. 할아버지는 바보 같애" 하더라는 것입니다. 자신의 머리 속에 들어오지 않는 지식에 대한 거부는 이 어린애에게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들도 우리 머리로 이해하기 어려운 것에 대한 거부를 느낄 때가 많이 있습니다. 부활의 사건이 그렇습니다. 죽은 사람이 어떻게 다시 살아난단 말입니까?

그러나 성경은 그 사실을 있는 그대로 자세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안식 후 첫날에 그를 평소에 사랑하던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들이 예수님의 시체라도 보기위해 무덤을 찾아갔습니다. 그 때 큰 지진이 나며 주의 천사가 하늘로서 내려와 돌을 굴려내고 그 위에 앉았습니다. 그 천사의 모습이 번개와 같고 그 옷은 눈과 같이 희었습니다. 그가 말하십니다. "너희는 무서워 말라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를 너희가 찾는 줄을 내가 아노라. 그가 여기 계시지 아니하고 그의 말씀대로 살아나셨느니라. 와서 그의 누우셨던 곳을 보라" 그의 누우신 곳도 확인시켜 주었습니다.

꾸밀래도 이렇게 자세히 꾸밀 수가 있겠습니까?


당시 의사로서 사회적으로 인정받던 누가도 이 사실을 당시 총독으로 있던 데오빌로에게 자세히 전합니다. 이 사실을 과학적으로 혹은 생리학적으로나 의학적으로 증명할 수는 없으나 사실로 나타난 일에 대해서는 부인 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 당시 이 역사적인 사건을 부인해 보려는 시도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1)예수님의 죽음은 그가 완전히 죽은 것이 아니라 기절한 것이다,기절하여 의식을 잠간 잃은 상태에서 바위 속 서늘한 무덤속에 눕혀 놓으니까 다시 정신을 차리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는 당시의 상황을 자세히 이해하지 못한 것입니다. 기절하신 것이라면 당시 안식일이 가까와 오는데 예수님이 죽지 않으시니까 안식일을 지키기 위해 예수님의 옆구리를 찔러서 심장이 파열되어 물과 피를 다 쏟았다는 것을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2) 시체를 도둑질해 가서 숨겨놓고 부활했다고 선전했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 도둑은 제자들일 수 있다는 얘기입니다.

말이 않됩니다. 어린 여자 아이 앞에서도 예수를 부인하던 수제자의 상황에서 유대 군병이 지키는 그 곳에서 예수님의 시체를 빼 내 온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또 그도둑은 유대인일 수 있다는 것인데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복음이 계속 전파될 때 그들이 잠잠할 리가 없지 않습니까? 3)부활을 목격한 사람들의 환상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사모하는 나머지 잠재의식의 발로로 유령을 보듯 착각했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환상도 한 두 사람이어야지요. 제자들을 포함한 500명 이상의 사람이 장소와 시간이 다른 곳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뵈었는데 이런 똑같은 환상을 가질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4) 마지막으로 타묘설이 있습니다. 새벽 미명에 마리아 일행이 찾아간 것은 다른 무덤,빈무덤을 찾아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무덤이 누구의 무덤입니까? 당시 공의회 의원이었던 아리마데 요셉의 무덤이 아닙니까? 특별한 무덤이었기에 잘못 찾을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이와같이 많은 사람이 예수님의 부활의 사건을 부정하려 해보았지만 부정되어지지 않는 것은 이 사건은 역사적 사실이며 실제적인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사실보다 더 강한 힘은 없습니다. 기독교가 강하게 역사하는 이유는 부활의 사건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역사적이고 실제적인 사건을 마음에 받아들임으로 여러분의 생애 더 큰 부활의 감격이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2. 증거자로서의 삶을 사는 이유가 된 사건(7-10)

인도의 성자 썬다싱이 영국을 방문하였을 때에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질문을 했습니다.

"당신은 오랫동안 전통의 힌두교를 버리고 기독교를 믿게 된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 질문은 힌두교와 기독교의 차이가 무엇이기에 이렇게 바꾸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썬다씽은

"부활하신 예수님 때문"이었다고 대답했습니다.

  

예수의 부활을 믿는 사람들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증거하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이유는 너무도 감격스럽고 기쁜 일이기에 전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기쁜소식이나 놀라운 소식을 접하면 얼른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려는 생각이 앞서는 것은 당연한 마음입니다.

그러나 그보다 우리 주님의 부탁이었습니다.

본문 7절에 보면 그 여인들에게

"빨리 가서 그 제자들에게 이르되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고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거기서 너희가 뵈오리라 하라"고 하셨습니다. 이에 이여인들이 빨리가서 제자들에게 알리게 되었습니다. 이 소식을 듣고 후에 확인한 제자들은 모두 다 이 복음의 소식을 전하다가 순교의 제물이 되고말았습니다. 그만큼 가치가 있는 복음입니다.

기독교의 신앙이 여기에 세워진것입니다.

기독교의 신앙은 오병이어의 기적이나 병든자를 살리신 예수님의 사건등이 없어도 이루어 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에 죽으셨다가 다시 사신 이 부활의 사건이 없다면 기독교는 성립될 수 없습니다.


만일 부활이 없이 죽음이 인생의 끝이라면 여러분과 저를 포함한 그리스도인들처럼 불쌍한 사람들은 없습니다.(고전15:19) 이 좋은 시간에 이 자리에 앉아 있는 것도 안타까운일 입니다.

여러분 무엇 때문에 여기에 나와 계십니까?

무엇때문에 사랑하십니까?

무엇때문에 진리를 말해야하고 의를 행하려 하십니까? 무엇 때문에 빼앗아도 모자라는 판국에 남을 주고 사십니까?

예수님의 부활때문이 아닙니까? 부활신앙없이 의,자유,평등,진리,선,사랑 ,인내를 말한들 생명이 없는 것입니다.

사랑해야할 이유도,

참고 살아야 할 이유도,

남을 주어야할 이유도 다 예수님의 부활에 기인한 것입니다. 그러기에 부활이 없으면 뿌리없는 꽃을 꽃병에 꽂아 놓는 것과도 같습니다. 잠간의 화려함과 아름다움은 있으나 오래 못 갑니다. 뿌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의 뿌리는 부활신앙에 있습니다. 우리도 후에 예수님처럼 부활 한다는 신앙이요,확신입니다.


3. 새로운 창조의 사건(11-15)

매년 이 봄의 계절이 오면 다 죽어가던 나무에서 다시 새로은 잎이 피고 녹음이 푸르게 되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동면하던 곤충이나 동물들도 새로운 생명의 순환을 보여주는 계절입니다. 이로서 부활의 모습을 어렴풋이나마 짐작을 할 수 있게 해 줍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부활 사건은 자연적인 현상이 아닙니다. 식물이 싹이 트고 자라고 하는 과정 정도가 아닌 창조의 계시입니다.

사실 저도 어린아이에게 설명할 때는 자연질서에서 부활을 설명할 때도 있었습니다. 다 죽어진 것 같은 나뭇가지에서 봄이 되면 다시 움이 터오르는 것으로 부활을 설명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또 나비가 신나게 세상을 날아다니지만 사실 그 이전에 번데기의 시절이 있었다는 얘기입니다.

그래서 제가 아동부를 지도할 때에 아이들에게 쓴 하나의 수필이 있는데 그 제목이 '아기뻔데기의 슬픔'이었습니다. 아기뻔데기가 울고 있는 장면에서 시작합니다. 그의 울음은 자기 엄마의 죽음이었습니다. 껍데기만 남기도 죽어간 엄마를 그리워하며 우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나가던 개미의 도움으로 저기 멀리서 멋지게 나는 나비가 자기들의 엄마임을 발견하게 되고 이제 자기도 곧 자기 엄마처럼 새로운 모습으로 변모할 것이라는 희망을 안고 기뻐했다는 것입니다. 이는 부활의 기쁨의 관점에서 본 비유일 수 있습니다. 어찌보면 일반계시의 의미에서 부활을 접근한 것이 되겠지요.그러나 진정한 의미에서의 부활은 새로운 창조의 사건이었습니다.

  
그러기에 당시 부활의 광경을 목격한 제자들이 그렇게도 중요하게 생각하며 지키던 안식일을 예수님이 부활하신 날인 주일로 바꾸어 모이게 된 것입니다. 부활은 새로운 차원의 역사의 시작입니다. 어린 계집아이 앞에서도 비겁하게 선생을 부인하던 베드로였지만 부활하신 주님을 뵈옵고 "우리의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 우리가 다 이 일에 증인이도다" 라고 외치며 순교의 제물이 되기도 했습니다.

구약의 창조를 기념하는 날을 지키는 대신 신약의 창조의 사건인 부활을 기념하며 지내는 주일!

용기를 잃고 다 죽어가던 예수님의 제자들이 다시 새로운 힘을 얻어 부활의 증인으로 활기있게 걷게 된 것은 하나님의 새로운 창조의 발걸음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수많은 사람을 살인하고 죄를 범했던 사람들이 부활의 예수님을 만난후 변화되어 새사람이 되는 모습은 과연 새로운 창조의 사건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하나님의 창조의 질서는 어느누구도 막을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부활의 사건을 목격한 파수꾼들이 이 사실을 대제사장들에게 고했을 때 장로들과의 의논에서 이 사실을 말하지 않는 조건으로 그들에게 돈을 주고 입을 막으려 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막으려해도 막아질 수 없었습니다. 조그마한 형광등 불빛은 우리가 막을 수 있어도 태양빛을 막을 수는 없는 것과도 같습니다. 과연 창조의 사건이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부활의 신앙을 갖고 있을 때 우리 역시 창조의 새 질서를 누릴 수 있습니다.

도저히 헤어나오기 힘들고 고치기 힘든 어떤 일 앞에서 고민 할 필요가 없습니다. 아예 새롭게 시작하면 되기 때문입니다. 창조는 무에서 시작한 사건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에서 시작한 사건이 부활의 사건입니다. 부술 것은 부수고 새로운 건축을 세울 수 있는 용기는 부활신앙에서 시작됩니다.

예수님을 3번씩이나 부인했던 뻔뻔한 베드로이지만 그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후에 새로 시작했습니다. 과거를 묻지 않으시는 창조의 하나님을 믿고 끝까지 승리하는 길을 가게 되었습니다. 모든 불의를 이기신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믿음만이 새로운 창조의 지평을 열 수가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을 이루려 하노라" 라고 했습니다. 앉아서 부활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죽어서 부활을 이루려고 한 것입니다. 부활의 자리로 가는 생활이었습니다. 오늘 아침 예수님은 부활하셨습니다. 그 부활의 현장을 향해 우리도 발걸음을 옮겨야 하지 않겠습니까?"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 하노라"(고전15:55)이제 부활의 주님 안에서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죽음까지도 극복된 사건아닙니까? 이러한 부활의 의미를 확고히 가지며 승리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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