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빈 무덤 : 예수님의 부활의 증거
여러분, 오늘 본문을 보면 안식 후 첫날에 두 마리아가 예수님의 무덤에 갔다고 했지 않습니까? 유대인들은 토요일인 안식일에 모였었는데, 예수님 시신을 십자가에 그대로 두고 안식일을 지내고 싶지 않아서 금요일 저녁에 예수님을 부랴부랴 매장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안식 후 첫날이 예수님의 부활하신 날이기 때문에 전통적으로 교회는 안식 후 첫날 부활의 주님을 경배하기 위해서 모이게 된 줄 믿습니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의 주일입니다. 그런데 복음서들의 맨 뒤를 보면, 특별히 요한복음 20장을 보면 원래 첫 번째 부활주일은 저녁 집회로 모였던 것 같습니다. 그 때 제자들이 예수님을 만났는데 거기 도마가 빠졌지 않습니까? 그래서 도마를 위해서 여드레 후에 두 번째 저녁 집회가 있었습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는 손과 발을, 그리고 옆구리를 만져보게 하시고 "믿음이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음 있는 자가 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주일은 부활하신 주님을 찬양하고 경배하는 축제일이 되어야 할 줄 믿습니다. 아멘! 부활 주일만 일회성 행사로 지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주일은 부활하신 주님을 높이고 찬양하는 그러한 축제가 되어야 할 줄 믿습니다. 잔치가 되어야 할 줄 믿습니다. 예수님을 높이고 즐거워하고 기뻐하고 환희에 넘치는 부활의 축제가 되어야 할 줄 믿습니다. 그래야 거기에서 힘을 얻고 부활하신 주님을 경험하고, 그 주님의 부활의 능력으로 이 세상에 나아가서 냉랭한 세상을 정복하고 저들에게 생명의 주님을 전할 수 있는 힘이 이곳에서 나오게 될 줄 믿습니다. 오늘 우리는 일회성 행사를 위해서가 아니라 정말로 부활하신 주님을 찬양하고 높이는 축제로 모인 예배인 줄 믿습니다. 할렐루야! 아멘!
그런데 공관복음서나 요한복음서를 보면 최초로 무덤에 갔었던 사람들마다 발견한 것은 빈 무덤뿐이었습니다. 오늘도 본문을 보니까 이제 두 마리아가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서 '돌을 누가 옮겨주랴?' 걱정하면서 가는데, 지진이 나고 하늘에서 천사들이 내려와서 돌을 옮기고 무덤을 지키던 병사들은 혼비백산했습니다. 아마 처음 보는 현상이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 천사들이 두 마리아에게 "너희가 찾는 예수 그리스도는 이곳에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다. 생전에 말씀하시던 모양으로 살아나셔서 약속하신 대로 제자들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셔서 기다리실 것이니 가서 제자들에게 갈릴리에서 주를 뵈올 것이라고 전하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이 여자들이 너무나 놀랍고 환희에 차서 기뻐 달려갔다고 했어요. 이 여자들이 가는 길목에서 갈릴리로 가시는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습니다. "평안하뇨?" 하고 주님께서 물으셨을 때에 이 여자들은 너무나 기뻐서 예수님의 발을 잡았다고 했어요. 원문에는 발이 복수로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두 발을 잡았어요. 그리고 경배했습니다. 얼마나 놀랍고 기뻤는지 모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여자들에게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리에서 만나자고 전하라"고 하십니다. 이제 제자들을 '형제들'이라고 부르십니다.
여러분, 공관복음서 맨 뒤를 보면 예수님의 부활하시는 그 현장에 한 사람도 사실 없었습니다. 마치 아무 것도 없는 것 가운데서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 현장에 아무도 있을 수 없었던 것처럼, 어떤 면에서는 재창조의 부활의 첫 열매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현장에는 아무도 있지 않았습니다. 어떤 면에서는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천지를 지으시는 그 현장에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현장이 감추어지게 하시고 믿음으로 그것을 받아들이도록 하셨던 하나님의 섭리인 것을 볼 수 있습니다.
II. 복음의 핵심 : 부활
여러분, 부활의 현장에 계셨습니까? 부활의 현장을 목격하셨습니까? 예수님의 부활을 믿으십니까? 보지도 아니하고 어떻게 믿으세요? 대단하십니다. 예수님의 부활의 현장을 목격하지도 않고 어떻게 믿으십니까? 여러분, 복음서는 굉장히 솔직하게 얘기하고 있습니다.
무덤이 열리고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그 현장에 있다가 기절초풍했던 병졸들이 이제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가서 나타난 얘기를 합니다. 원래 마태복음 27장을 보면, 이들은 두려워서 병정들을 많이 두고 아주 삼엄하게 지키도록 했습니다. 왜냐 하면 예수께서 살아 계실 때 자기가 부활한다고 했는데, 정말로 부활하고 나면 더 소요가 극심해 질 것이라고 염려해서 굳게 지키도록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권능으로 무덤 문이 열리고 예수께서는 정말로 부활하셨습니다.
이 병정들 일부가 이제 혼비백산해서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을 찾아가서 일어났던 사실을 얘기했습니다. 그러니까 그들은 대뜸 돈으로 그 병정들을 매수하고 "너희들은 가서 제자들이 와서 예수의 시체를 훔쳐갔다고 하라. 빌라도가 뭐라고 하면 우리가 손보겠으니 염려하지 말라"고 보냈어요. 이 나쁜 놈들, 종교인들이었는데 가롯 유다에게 주었던 그 돈을 똑같이 병정들에게 매수하는 돈으로 사용했던 것입니다. 예수의 시체를 도둑맞았다고 허황된 소문을 퍼뜨리도록 했습니다. 마태는 기록하기를, 이 마태복음이 기록되는 그 순간까지도 민간에 그러한 헛소문이 돌고 있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현장에 있지도 아니했고 보지도 않았는데 여러분은 어째서 믿습니까? 어째서 예수께서 부활했다는 사실을 믿습니까? 성경은 이렇듯 솔직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처음에 빈 무덤을 발견한 것도 사실 용감했던 남자 제자들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돌아가시기 직전에 수제자 베드로, "내가 죽을 때까지 예수님을 쫓겠다. 아무도 따르지 않는다고 해도 나는 죽을 때까지 쫓겠다"고 그렇게 담대하게 얘기했던 베드로도 처음 빈 무덤을 목격했던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어처구니없이 예수님께서 잡히시던 밤에 조그만 계집종 앞에서 맹세하고 저주하면서 "나는 그를 모른다"고 했던 베드로입니다. 거기 모여있던 이들이 "너의 액센트는 갈릴리 액센트이니 너는 예수와 같이 있었던 사람이라"고 얘기했을 때에도 맹세하고 저주하면서 "나는 그를 모른다"고 했어요.
여러분, 예수님을 팔아먹고 난 후 자살한 가롯 유다를 제외하고 남은 열 한 제자, 이들은 남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문고리를 안으로 잠그고 벌벌 떨고 있었습니다. 그저 여자들만 무덤에 보냈었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의 시체가 없다고 했을 때 서로 얼굴만 쳐다보다가 베드로와 요한이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아마 달리기는 요한이 먼저였었던 것 같습니다. 뒤늦게 온 베드로가 먼저 굴에 들어가서 예수님의 시체가 없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여러분, 빈 무덤만을 본 그들이 어찌해서 믿을 수 있었겠습니까? 공관복음이나 요한복음 맨 뒤를 보면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적어도 열 번 이상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내 손과 발과 옆구리를 만져보라. 귀신은 먹을 수 없지만 나는 먹을 수 있다"고 하셨어요. 문이 닫혀 있는데도 들어오시고 그들이 보는 앞에서도 올리우실 수 있는 영광스러운 몸이었습니다. 그렇게 겁 많고 의심 많고 두려워하던 그들이 어찌하여서 믿을 수 있었습니까? 사도행전을 보세요. 이 벌벌 떨던 베드로, 맹세하고 저주하며 부인했던 베드로, 고기나 잡으러 가자고 제자들을 선동해서 갈릴리 바다로 갔었던 이 베드로가 어찌하여서 서슬이 시퍼런 당국자들 앞에서 "내가 주님의 말을 들어야 하느냐, 너희 말을 들어야 하느냐?" 하며 담대하게 목숨을 걸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전할 수 있었습니까? 어찌하여서 베드로가 그렇게 바뀔 수 있었습니까?
서슬이 퍼렇게 예수 믿는 자들을 핍박했던 사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공중에서 만나 뵙고 난 후 그의 인생은 180도 바뀌게 되고, 로마의 칼 앞에서 순교할 때까지 그는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전했습니다. 사도행전에 나오는 제자들은 공관복음서나 요한복음에 나오는 제자들과는 전혀 다른 제자들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초대 교회 성도들이 불같이 일어나서 전했던 메시지의 핵심은 예수께서 부활하셨다는 것입니다. 베드로도 수없이 행했던 그의 설교에서 "예수님은 부활하셨다. 이것에 대해서 우리가 증인이다"라고 얘기하고 있습니다. 신약 성경 모두는, 바울서신이나 요한계시록까지도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 얘기하고 잇습니다.
특히 바울은 그의 서신서들에서 부활의 세 가지를 얘기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는, 이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즉각적으로 다시 오실 것이라고 하는 '즉각적인 재림(imminent parousia)'을 얘기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는, 바로 이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믿는 자들 안에서 성령으로 살아 계시고 지금도 역사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는, 예수께서 부활하셨기 때문에 종국적으로는 예수 믿는 자들도 부활하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 그 긴 한 장을 할애해서 예수께서 부활하셨다는 것을 논리적으로 증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지 않으셨다면 예수 믿는 자들이 가장 미련하고 가장 많이 속고 있는 가장 가련한 자들이다"라고 했습니다. "예수께서 부활하시지 않았다면 우리도 부활하지 못할 것이다"라고 얘기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빈 무덤을 보았던 그 제자들이 예수께서 부활했다는 것을 확신하고 선포했던 것은 어디에서 나온 것입니까? 그것은 바로 주님께서 직접 나타나셔서 그들에게 믿음을 주시고 확신을 주셨기 때문에 가능한 줄 믿습니다. 20세기가 지난 오늘날 사랑하는 저와 여러분이 예수 부활했다는 사실을 믿을 수 있는 것은 어디에 있습니까? 바로 부활하신 주님께서 성령으로 우리에게 찾아오셔서 우리가 죄인인 것과 바로 죄인된 우리를 위해서 고난 당하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신 것을 증거해 주시기에, 주님의 성령께서 우리에게 깨달음을 주시고 확신을 주시고 믿음을 주시기에 우리는 예수 부활한 사실을 믿게 된 줄 믿습니다. 할렐루야! 아멘! 믿으십니까?
여러분, 성경이 얼마나 솔직한지 '예수시체 도둑설'을 얘기하고 있어요. 아주 유명한 신학자였던 루돌프 불트만(Rodolf Bultmann)과 같은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역사성을 철저하게 부인하며 다른 방법으로 설명하려고 하는 여러 안들을 내었습니다. 그 대표적인 학자들의 첫 번째 안은 '도둑설'입니다.
예수시체 도둑설, 오늘의 본문에도 나오고 있어요. 여러분, 한 번 보십시다. 성경을 눈 씻고 쳐다봅시다. 그리고 상식적으로 생각해 봅시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렸을 때 남자 제자는 한 사람도 빠짐없이, 요한복음을 보면 그래도 요한은 조금 가까이 있었던 같습니다마는, 다 도망갔습니다. 안식 후 첫날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온 것은 연약한 여자들뿐이었습니다. 여자들이 빈 무덤을 보고 와서 그 빈 무덤에 대해서 얘기할 때에도 그들은 의심했었습니다. 문고리를 안으로 잠그고 벌벌 떨고 있었던 그 제자들은 로마와 유대 병정들이 서슬이 시퍼렇게 지키고 있던 그 무덤에 가서 감히 무덤 문을 열고 그 병정들을 제치고 예수님의 시신을 훔쳐올 수 있는 용기가 있었던 자들이 결코 아닙니다.
좋아요. 그들이 예수의 시체를 훔쳐왔다손 칩시다. 그렇더라도 여러분, 한 사람도 아니라 수없이 많은 초대 교회 사도들과 제자들이 목숨을 걸고 예수께서 부활했다고 증거했는데, 부활하지도 않은 예수의 시체를 훔쳐다 놓고 거짓된 존재와 허황된 거짓말로 온 지중해 연안 국가들을 다니면서 자기 평생토록 예수께서 부활했다고 전할 수 있는 사람들이 어디 있겠습니까? 우리가 분명하게 알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분명하게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무엇인가 사도들과 제자들의 심령 속에 엄청난 변화가 일어났고 확신이 있었기에 그들이 목숨을 걸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증거할 수 있었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믿으십니까? 예수 시체 도둑설은 허무맹랑한 거짓인 것입니다.
'기절설'을 얘기하는 사람들도 있어요. 그들의 얘기는 이렇습니다. 예수께서 너무 심하게 맞아서 기절하셨다는 것이에요. 그래서 향품을 바르고 서늘한 무덤에 뉘였더니 서늘한 무덤의 기운과 향품 냄새 때문에 기절했던 분이 깨어나셔서 툭 털고 벗어버리고 그 큰 돌을 움직이시고 로마와 유대 병정들을 다 제치고 나오셨다는 것이에요. 기절했던 자가 깨어난 것은 부활이 아닙니다. 그것은 기절했다가 그저 깨어난 것뿐입니다. 기절했다가 깨어난 것은 결코 부활이 아닙니다. 부활은 100 % 죽어있던 상태에서 살아나야 부활인 것입니다. 그렇지요? 예수님께서는 3일간 무덤에 장사지낸 바 되었다가, 죽은 상태로 계신 바 되었다가 3일 후에 하나님의 권능으로 부활하신 줄 우리는 믿습니다.
좋아요. 기절설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다. 여러분, 성경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금요일 밤에 체포되셨습니다. 제자들과 마지막 만찬을 하시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도록 "아버지여, 할 수 있으면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라고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누가는 기록하기를, '그 땀방울이 핏방울 같았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의사의 혜안으로 본 것인 줄 믿습니다. 오늘날 의사들이 증거하기를, 사람이 심한 고뇌 속에 있을 때 모세혈관이 터져서 피가 나오는데 마치 피땀을 흘리는 것 같은 '혈한증'이라는 현상이 일어난다고 얘銖爛求?
예수님께서는 그토록 저와 여러분의, 인류의 죄와 짐을 지고 가시는 고뇌 속에 있었습니다. 십자가상에서도 "아버지여, 아버지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라고 절규하셨던 주님의 절규를 우리는 기억합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심한 고뇌 속에 있으셨던 그 예수님을 몽치와 칼을 든 로마와 유대병정이 체포했습니다. 그 밤에 한숨도 주무시지 못하고 빌라도의 법정으로, 헤롯의 궁전으로, 가야바의 뜰로 수없이 오고가며 매맞고, 찢기고, 조롱 당하고, 침뱉음 당하고, 주먹으로 때림을 당하고, 가죽끈에 단단한 쇠붙이나 짐승의 뼈가 붙은 채찍으로 수없이 맞으셨습니다. 그분은 목수였습니다. 육체 노동으로 건장한 육체를 가지셨던 분입니다. 결혼도 안 하셨고 아주 혈기방장한 30대 초반이었지만 십자가를 지고 가실 때 그 십자가의 무게를 견딜 수 없어서 쓰러지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우리는 볼 수 있습니다.
원래 십자가형은 몇 날 며칠 태양 볕 아래에서 기진한 가운데 몸의 물이 다 마르고 피와 모든 것이 쏟아져서 죽어가는 처참한 형벌이었습니다. 며칠동안 견디다가 죽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께서는 아침 9시에 십자가에 달리셔서 오후 3시에 운명하셨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빨리 돌아가실 수 있었을까요? 그것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영혼과 육체의 모든 힘이 기진한 상태였던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분께서 운명하셨다는 것이 확인되었습니다. 옆구리에 창을 찔러서 물과 피가 쏟아지는 것으로 뼈를 꺾을 필요도 없이 운명하신 것이 확인되었습니다. 그랬던 그분께서 어찌하여서 기절하셨다가 모든 것을 풀고 돌을 옮기고 로마병정과 유대병정을 제치고 나오실 수 있단 말입니까? 이런 어처구니없는 설이 어디 있단 말입니까?
또 '환상설'을 말하는 사람도 있어요. 예수의 제자들이 너무나 주님을 사랑했기 때문에 돌아가셨어도 꿈에 보이고 환상을 보았다는 것이에요. 그래서 그분께서 부활하셨다고 외쳤다는 것입니다. 예수의 도둑설 뿐만 아니라 이런 터무니없는 설들이 많은 이들을 혼미하게 했습니다. 오늘 우리 본문 속에서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아무 것도 없는 것 가운데에서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의 역사를 어떻게 믿으셨습니까? 히브리서에 나타난 대로, 우리가 보지는 못했지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믿음을 주셔서 믿게된 줄 믿습니다. 아멘! 어찌 동정녀에게서 탄생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수 있습니까? 그러나 주님께서 우리에게 믿음을 주셔서, 성령께서 확증을 주셔서 믿게된 줄 믿습니다. 아멘! 여러분, 도둑설을 믿습니까? 환상설을 믿으십니까? 기절설을 믿으십니까? 이런 터무니없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이미 오셔서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말미암아 예수 부활하신 것을 확신하고 외칠 수 있는 부활의 증인이 된 줄 믿습니다. 할렐루야! 아멘!
III. 부활하신 주님의 명령 (왕의 칙령)
이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그 유명한 마태복음 28장 16절부터 20절까지의 말씀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우리는 '지상최대의 명령'이라고 얘기하지만 부활하신 예수님과는 상관없이 그저 승천하시기 전에 주신 메시지로만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오늘 부활절을 맞이해서 부활의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메시지로 받아들일 때 더욱 살아있는 주님의 명령이 되리라고 확신합니다. 할렐루야! 아멘!
여기 보면 16절에 그토록 천사를 통해서 갈릴리에서 만나자고 하셨던 주님께서 과연 갈릴리에서 열 한 제자를 만나서 그들에게 명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왜 하필 갈릴리입니까? 여러 가지 생각이 있었을지 모릅니다. 예루살렘은 완전히 타락했고, 예루살렘은 예수 그리스도를 배척했고, 예루살렘은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지마는, 이제 이방인에게로 복음이 향하는 때에 이제 종교적인 때가 묻지 않은 그곳에서 다시 출발하는, 예루살렘 출신이 아닌 갈릴리 출신 어부들을 통해 주님께서 하시고자 하는 계획이 있었는지 모릅니다. 어떤 면에서는 구약성경의 완성이라고 볼 수 있는 마태복음, 구약에서 예언한 메시아의 성취라고 볼 수 있는 이 마태복음, 구약의 모든 것의 성취,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 왕국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그리고 있는 마태가 바로 이제 새로운 이스라엘 열 두 지파를 이 열 두 제자를 통해서 이루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계획을 말해주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 제가 참고적으로 말씀드립니다마는 원래 히브리 사람들이 쓰는 히브리 바이블은 24권으로 되어 있습니다. 우리 개신교의 구약 성경은 39권으로 되어 있는데, 히브리 사람들의 성경 24권과 우리 개신교의 구약 성경 39권이 똑같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묶어놓은 것이라든지 배열은 우리의 것과 조금 달라서, 사무엘 상․하, 열왕기 상․하, 역대기 상․하, 이렇게 두 권으로 되어 있는 것들을 그들은 한 권으로 묶었습니다. 에스라와 느헤미야도 한 권으로 되어 있습니다. 열 두 소선지서도 한 권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그들은 그들의 바이블을 율법(토라)과 선지서(나빔)와 성문서(케투빔)의 세 부분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제가 지금 자세하게 말씀드리지는 않겠지만, 다니엘서라든지 역대기 상․하가 성문서에 포함되어 있고, 히브리 바이블의 맨 마지막 책은 역대기 상․하가 함께 묶여있는 역대기입니다. 그런데 역대기하의 맨 뒤를 읽어보시면 아시겠지만, 이제 하나님께서 바사왕 고레스를 일으키셔서 유대민족을 예루살렘으로 귀환시키십니다. 그러면서 이 역대기는, 다시 말해서 그들의 성경은 그들로 예루살렘 성전을 짓도록 하는 고레스 왕의 칙령으로 끝나고 있습니다.
구약 성경의 완성으로 보았던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그리고 있는 마태는 그 복음서를 왕의 칙령으로 끝내고 있습니다. 구약의 고레스 왕이 아니라 진정한 왕이신, 사망과 죽음과 마귀의 권세를 깨뜨리신 만 왕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칙령으로 마태복음을 끝내고 있습니다. 이것은 지상최대의 명령이 아니라 어떻게 보면 살아 계신 만 왕의 왕이시고 부활하신 왕 중의 왕이신 우리 주님의 칙령인 줄 믿습니다. 할렐루야! 아멘!
그분의 칙령을 우리 한번 엄숙한 마음으로 보겠습니다. 무엇을 명령하시는지 보기 위해서 18절부터 20절까지 읽겠습니다.
[18]예수께서 나아와 일러 가라사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19]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침례를 주고 [20]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1. 조건 :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주셨으니
왕의 칙령을 내리실 때 먼저, 조건이 있었습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가 왕 중의 왕이신 부활하신 주님께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열 한 제자들에게는 연약하여 의심한 부분이 있었지마는, 또한 이 땅위에서 명령을 받는 저와 여러분 교회는 연약하지마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부활하신 주님께서, 죽으심과 부활을 통하여 진정한 왕이 되신 그분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고 그분께서 칙령을 내리시고 명령하시는 줄 믿습니다. 할렐루야! 아멘!
2. 대상 : 열 한 제자
그런데 16절과 17절을 잠깐 보겠습니다.
열 한 제자가 갈릴리에 가서 예수의 명하시던 산에 이르러 예수를 뵈옵고 왕이신 그분을 경배하나 오히려 의심하는 자도 있더라.
예수님께서 누구에게 이 명령을 하셨는가 하면 예수님께서 명하시던 산에 이른 열 한 제자에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을 팔아먹은 배신자 가롯 유다를 제외한 이들은 진정 주님을 사랑하는 자들이었고 순종하고 경배하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마태는 솔직하게 '오히려 의심하는 자도 있더라'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의심하는 자도 있었다고 하니까 의심하지 않는 사람도 있었겠지요? 그러나 원문에는 의심 안 하는 자도 있더라 하는 말이 아니라 '경배는 하지만 저들이 의심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모두다 의심했다는 말에 더 가깝습니다. 그런데 이 의심이라는 말은 불신앙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 열 한 제자에게도 '이 예수님의 부활이 진짜인가?' 하는 의구심이 아직도 남아 있을 정도로 엄청난 사건이었다는 것을 반증하고 있습니다. 이 제자들, 주님을 사랑하고 순종하고 경배하는 이들, 예수님의 부활을 처음 목격한 이 제자들도 의심했다고 했어요.
이 연약한 열 한 제자들을 향해서 주님께서 명령하십니다. 어떻게 보면 이 열 한 제자는 교회의 대표라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를 볼 때 간혹 의심할 수도 있고 긴가민가할 수도 있습니다마는, 바로 교회를 향해서 주님께서는 신뢰하시고 명령하시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3. 주된 명령 : 제자를 삼아라!
19절은 '그러므로'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그분께서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침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런데 많은 이들이 이 지상명령을 오해하기도 합니다. 어떻게 오해하는가 하면, '가라,' '제자를 삼아라,' '침례를 주어라' 하는 것들을 대등한 명령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핵심적이고 진정한 명령법은 제자를 삼으라는 것입니다. 핵심적인 명령은 제자를 삼으라는 것이고, 가는 것과 침례를 주는 것과 가르치는 이 세 가지 활동은 제자를 삼기 위해서 계속적이고 부대적으로 수반되어야 하는 활동이라는 것입니다. 원문에 의하면 이 세 가지 활동은 분사구문으로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주님의 마지막 명령은 바로 부활하신 주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가르침을 쫓아가고 그분을 순종하고 그분의 발자취를 쫓아가는 제자를 삼으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의 핵심적인 명령인 것입니다. 누구의 제자를 삼아야 합니까?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입니다. 어떤 사람의 제자나 자기의 제자를 만들라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는 주님의 제자가 먼저 될 뿐만 아니라 우리가 전도하고 가르치는 모든 이들이 주님을 사모하고 주님을 따라가는 주님의 제자가 되도록 그들에게 가서 침례를 주고 그들을 가르쳐야 할 줄 믿습니다. 할렐루야! 아멘! 그런데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가야 한다고 했어요.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침례를 주어야 한다고 했어요.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가르쳐야 한다고 했습니다.
4. 부수적이지만 필수적으로 따라야할 명령
1) 가라!
먼저 가야한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단동에도 가고, 압록강에도 가고, 신의주에도 가야합니다. 공주 새누리에도 가고, 춘천 거성교회에도 가야 할 줄 믿습니다. 지난주에는 공주 새누리가 2주년이었는데, 5월 5일에는 거성 교회에서 김 수복 전도사님의 목사 안수식이 있답니다. 잊지 마시고 우리 춘천 땅에 가서 기도합시다. 거성교회를 통해서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날 수 있도록 기도하는 하루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공주에도 가야하고, 춘천에도 가야 합니다. 노숙자들에게도 가야하고, 독거 노인에게도 반찬을 만들어 가야하고, 복지관에도 가야할 줄 믿습니다. 학교에도 가야하고, 연구소에도 가야하고, 감호소에도 가야하고, 감옥에도 가야 할 줄 믿습니다. 32사단에도 가야하고, 연무대에도 가야할 줄 믿습니다. 할렐루야! 아멘! 우리는 가야합니다. 어디든지 가야할 줄 믿습니다.
우리 중에 정말로 복음을 들고 중국 땅으로, 일본 땅으로, 북한 땅으로 갈 수 있는 선교사들이 나오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지금 이미 가 있는 선교사들을 위해서 선교헌금 몇 푼 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직접 복음을 들고 부활하신 주님을 증거하는 증인들로 갈 수 있는 사람들이 우리 중에 많이 나올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할렐루야! 아멘! 우리는 가야합니다.
이사야서 52장 7절을 보면,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평화를 공포하며 복된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구원을 공포하며 시온을 향하여 이르기를, "네 하나님이 통치하신다" 하는 자의 산을 넘는 발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고!
발이 아름답다고 했어요. 입이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산을 넘는 발이 아름답다고 했어요. 에베소서 6장 15절에도, '평안의 복음의 예비한 것으로 신을 신으라'고 했습니다. 왜 신을 신어야 할까요? 그것은 바로 우리를 필요로 하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필요로 하는 그 사람을 찾아 나서야 하기 때문에 발이 아름답다고 노래한 줄 믿습니다. 우리는 가야합니다. 할렐루야! 아멘! 이미 우리를 부르는 영혼의, 그 심령의 깊은 소리를 들어야합니다. 여러분, 내 부모형제들에게도 가야하고, 이미 주님께서 데려다 놓으신 내 직장의 동료들에게도 가야할 줄 믿습니다. 할렐루야! 아멘!
2) 침례를 주어라!
두 번째로는, 바로 이 제자를 삼기 위해서는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침례를 주라고 했습니다. 저는 침례를 믿습니다. 이왕이면 다홍치마라고 조금 씻어 쓰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죽어 장사지낸 바 되었다가 부활의 새 생명 안에서 태어나야만 소망이 있는 것이 저와 여러분의 운명입니다. 그러나 그 확신이 없는 사람을 아무리 물에 백 번 넣었다 뺀다고 해서 그 사람에게 변화가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진정으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에게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만으로 침례를 주어야할 줄 믿습니다.
이름이 무엇입니까?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은 세분인데 이름은 단수로 되어 있어요. 삼위일체 하나님으로 볼 수 있습니다. 또 이 이름은 무엇을 상징합니까? 하나님의 이름은, 부활하신 우리 주님의 이름은, 성령의 이름은 바로 소유권과 보호와 통치권을 얘기하는 것입니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 안으로 침례를 준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아닌 것을 향해서 하나님이라고 부르고 경배하던 그들에게 진정한 하나님, 부활하신 우리 주님, 우리에게 살아서 역사하시는 성령 하나님 앞에, 그분의 절대권력 앞에 순종하고 그분의 소유가 되고 그분께 그분의 권세를 인정하고 그분의 보호 아래 올 수 있는 사람들이 되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아멘!
여러분, 하나님과 부활하신 우리 주님과 성령의 이름 안으로 침례를 받으셨습니까? 아멘! 그것은 예식으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통치와 보호와 소유권을 인정하는 것임을 믿습니다. 아멘!
3) 가르쳐 지키게 하라!
마지막으로 이 제자 삼는 사역을 위해서 해야할 것은 주님께서 우리에게 분부하신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는 것입니다. 내가 좋아하는 것만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가르쳐야 합니다. 누가복음 15장만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창세기도 가르쳐야 하고, 누가복음만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요한복음도 가르쳐야 하고, 복음서만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바울서신도 가르쳐야 하고, 요한계시록도 가르쳐야 할 줄 믿습니다. 로마서만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빌레몬서도 가르쳐야 합니다. 이사야서만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오바댜서도 가르쳐야 할 줄 믿습니다. 내가 좋아하는 것만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우리에게 분부하신 모든 것을 총체적으로 가르쳐야 할 줄 믿습니다. 할렐루야! 아멘!
그런데 가르쳐 지키게 하라고 했습니다마는, 이 말은 그들이 지킬 때까지 가르치라는 것입니다. 이 침례를 주는 것은 입교식이라고 볼 수 있지만, 가르치는 것은 평생을 통한 과정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이 주님의 어떠하심을 알아가고 그분의 성품을 닮아가고 그분의 온전한 제자가 될 수 있도록 한 사람을 평생을 두고 가르치는 사역이 있어야 할 줄 믿습니다. 할렐루야! 아멘!
5. 약속
그리고 주님께서는 마지막으로 약속합니다.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의심했던 초라한 열 한 제자, 초대 교회의 성도들을 향해서 말씀하신 그 주님, 하늘과 땅의 권세를 가지신 그분께서 세상 끝 날까지, 세상이 완성되는 그날까지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저와 여러분을 바라볼 때 능력 없고 초라한 존재들뿐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하늘과 땅의 권세를 가지신 그분께서 우리와 늘 함께 하시겠다고 하는 이 엄청난 약속이 있는 자들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마태복음 1장 23절의 임마누엘 하나님으로 오셨던 그 주님께서 이제는 사망 권세를 깨뜨리고 마귀 권세를 깨뜨리고 부활하셔서 이제는 진정한 임마누엘로 저와 여러분과 세상 끝 날까지 함께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아멘! 할렐루야! 아멘!
VI. 권면 : 왕의 칙령을 받은 자들로
지난 수요일에 단동에 다녀온 선교보고를 두 시간에 걸쳐서 했습니다. 저도 단동에 갔다 왔어요. 그런데 저는 여러분에게 이런 간증을 하고 싶습니다. 거기에 가서 비밀리에 만났던 한 자매님의 간증입니다. 이 자매님이 임신 8개월의 몸으로 인신매매를 당해서 팔려가던 중에 예수 믿는 자매를 통해 200원에 다시 자유의 몸이 되어, 부활하신 주님이나 하나님에 대해서 전연 믿지 않았던 그가 주님을 만나게 되었다고 간증하던 그 모습을 저는 지금도 기억합니다. 조선족이지만 보따리 장사를 하면서 장백산을 찾아가고 북한 땅의 여러 곳을 비밀리에 찾아가서 예수 그리스도 믿는 사람들을 위로하고 복음 전하는 그 권사님을 저는 지금도 기억합니다.
그런데 저에게 참으로 잊지 못할 것은 우리 O 형제의 부친의 얘기입니다. 그 형제님은 신의주 바로 밑이 고향이셨던 지금 70이 넘으신 부친과 어머님을 모시고 갔었습니다. 압록강에서 우리는 수없이 찬양하고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형제님의 아버님께서 어머니와 동생들을 신의주 근교에 남겨둔 채 아버지의 손을 붙잡고 지금은 끊겨있는 압록강을 건넜던 것이 18살 때였습니다. 그곳에 와서 북녘 땅의 생사를 모르는 어머님과 자기 동생들의 안부를 공중에 메아리쳐 물으면서 그들을 위해서 기도하던 많은 목회자들이나 성도들의 기도 소리를 들으시던 그 노인께, 그 이튿날 밤에 심양의 한 호텔에서 우리 성도들이 마지막 모임을 할 때 우리 안 진섭 목사님이 조용하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 두 분만을 위한 시간을 우리가 가졌습니다. 복음을 전했어요. 우리 안 목사님이 중학교 때 아버님 돌아가신 얘기도 하면서 압록강에서 어머님의 생사도 모르던 그 아버님께 복음을 전했습니다. 아버지 하나님, 부활하신 예수님을 전했습니다. 조용한 가운데 전했지만 그 두 분께서 주님 앞에 마음을 열고 울면서 "내가 예수를 믿겠노라"고 고백하고 주님을 모셔들인 감격적인 사건이 호텔 방에서 있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왜 32사단에 가서 흥분합니까? 군대에 와서 초코파이를 먹기 위해서 왔지만, 그들이 찬양을 듣고 말씀을 듣고 회개하고, 이름만 기독교인이었던 그들이 헌신하고 예수님을 영접하고 나오는 모습을 보면서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놀라운 기쁨을 허락하신 것을 우리는 기억합니다. 우리는 오늘 논산 연무대에 가서 복음을 전합니다. 여러분, 그들이 혹은 초코파이 때문에, 혹은 콜라 한 병 때문에, 혹은 편안하게 잠을 즐기기 위해서 그 자리에 나올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 메마른 심령들에게, 두려워 떠는 그 젊은 영혼들에게 부활하신 예수님을 전할 때, 그들에게는 일생에 잊을 수 없는 놀라운 밤이 되리라고 믿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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