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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또는 의인을 사랑하기란 쉽지 않다 행14:19~22 10.10.31.설교녹취
◑의인을 사랑하기란 결코 쉽지 않다.
▶사람들은 의인에게 박수를 보낸다. 그러나 거기에는 반드시 전제조건이 있다.
의인이 자기에게 멀리 떨어져 있거나,
자기 곁에 있더라도, 자기와 직접 관계를 맺고 있지는 않아야 한다.
가령 청백리(청렴한 관리)가 있다고 가정할 때,
사람들은 그 청백리에게 찬사를 보낼 것이다.
그러나 그 청백리 곁에서, 그와 함께 일하는 동료들에게 있어서
그의 존재는 눈엣가시일 것이다. 자기들과 비교되니까.
그 청백리가 청렴을 고수하다가, 만약 인사상의 불이익을 당한다면
일반 사람들은 그 청백리 편에 서서 의분을 느낄 것이다.
하지만 그 청백리의 관할 구역이 만약 자신들의 삶의 영역이라고 할 때,
그때 사람들의 반응이 어떠할까?
그 청백리로 인해서, 그동안 내지 않아도 되던 세금을 꼬박꼬박 납부해야 되고,
그동안 누리던 부당이득을 전혀 취할 수 없게 될 때에도,
사람들이 그 청백리에게 박수갈채를 보낼까? 그럴 리 없다.
박수는 고사하고, 어떻게 하면 그 청백리를 자신들의 삶의 영역에서 몰아낼까..
모든 사람들이 한 마음이 되어서, 노심초사할 것이다.
▶의인에게 박수를 친다고 해서, 그 박수친 사람도 의인인 것은 아니다.
불의한 사람도, 의인을 바라보며, 얼마든지 박수를 보낼 수 있다.
오히려 불의한 사람이 자신의 불의를 감추고 거짓 의를 내세우기 위해서,
누구보다도 의인에게 더 열렬하게 찬사를 보낼 수 있다.
그러므로 의인에게 박수를 보낸다는 것만으로는,
그 박수 치는 사람이 의인인지, 불의한 사람인지.. 구별할 수 없다.
그 여부는, 그 사람이 찬사를 보내던 그 의인이,
그의 곁에 와서, 그와 직접적인 관련이 맺어질 때, 비로소 드러나게 된다.
그 의인이, 자기가 듣기 껄끄러운 의로운 발언을 계속 할 때에도
그 사람이 그 의인에게 (자기 손해에도 불구하고) 계속 찬사를 보낸다면,
그는 의인 편에 선 사람이고,
만약 평소에는 의인에게 박수를 보내다가도,
자기 곁에 온 의인을 대하기가 불편해서 그를 배척한다면, 그는 의로운 사람일 수 없다.
그래서 오늘날 우리가 우스갯소리로 이런 얘기들을 나눈다.
우리가 평소에는 ‘예수님, 예수님’ 하고 흠모하고,
또한 사도바울을 진심으로 존경하더라도,
만약 그 분들이 오늘 우리 집에 한 사흘 쉬어가신다고 하면
모두들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게 될 것이라고...
예수님 또는 사도바울과 같이 지내는 사흘이.. 얼마나 불편하겠는가!
우리들의 믿음이.. 그만큼 참 믿음이 아니라는 뜻이다.
◑의인은 악인에게 미움을 받는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잠29:27절을 통해 이렇게 말씀하신다.
‘불의한 자는 의인에게 미움을 받고, 바르게 행하는 자는 악인에게 미움을 받느니라.’
의인은, 불의한 자를 미워하게 되고,
불의한 자는, 불의를 미워하는 의인을 미워할 수밖에 없다.
▶내 미움의 근본적 뿌리를 밝혀 보자!
그렇다면 우리 각자는,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게 나 자신을 점검해 볼 필요가 있다.
만약에 내가 지금 누군가를 미워한다면, 그 사람을 미워하는 까닭이 무엇인가?
그 사람이 불의를 행하기 때문인가, 아니면 내 곁에서 의를 행하기 때문인가?
만약에 누군가가 나를 미워하고 있다면, 그 까닭은 또 무엇인가?
내가 그 사람 곁에서 매사에 불의를 행하기 때문인가, 아니면 의를 행하기 때문인가?
▶탁월한 지도자의 남다른 점
우리 각자는 정직해져야 한다.
종종 우리 주변에, 탁월하게 뛰어난 하나님의 사람이 있는데,
그가 사실 보통 사람과 같이 평범한 면을 갖고 있지만,
그에게 한 가지 남다른 점을 발견하게 된다.
자신의 불의, 약점, 개선할 점 등을 아프게 지적해 주는 사람을
자기의 ‘대적’으로 여기지 않고,
‘하나님이 내게 보내주신 사람’으로 여겨서,
그의 지적과 비판을 달갑게 듣는 사람이다. 비록 가슴이 아프더라도..
그 비판자를 미워하지 않고, ‘저 자식 손 봐야 되겠다!’ 하지 않고
그 비판자(합당한 비판인 경우)의 비판을 가슴에 새길 때, 사실 누가 정직하게 비판해 주지 않는다.
이런 지도자는.. 무한대로 성장해간다. 절대 부패하지 않는다.
그런데 보통 사람은, 보통 지도자는,
자기에 대한 정직한 평가는.. 미워하고,
자기에 대한 아첨의 평가는.. 흐뭇해 한다.
이렇게 사람은 자기 스스로 '의롭지 못한'것이.. 인간의 본능이다.
▶의롭게 살려는 성도는, 반드시 미움을 받게 되어 있다.
그러므로 ‘불의를 행하는 자는, 의인에게 미움을 받고,
바르게 행하는 자는, 악인에게 미움을 받는다’는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 의롭고 바르게 살려고 하는 크리스천들은
반드시 누군가로부터 어떤 형태로든지 미움을 받을 수밖에 없음을 깨닫게 해 준다.
◑바울의 의로운(정직한) 권면
▶행14:22절에서 바울은 제자들에게 정직하게 권면한다.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머물러 있으라 권하고,
또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란을 겪어야 할 것이라 하고..’
바울은, 성도가 세상에서 당할 환란에 대해, 빙 둘러서 말하지 않았다.
성도들이 듣기 싫어할 것이라고 예상하고, 그 실상을 숨기지 않았다.
성도들이 자기를 미워하든지 말든지.. 직설적으로 의롭게 말해 버렸다.
(본문에 안 나와 있지만) 아마 그래서 바울을 미워한 신자들도 많이 생겼을 것이다.
그러나 바울의 의롭고 정직한 권면을 듣고서.. 믿음이 성숙한 신자들이 더 많이 생겼을 것이다.
▶더베에서 루스드라로 다시 돌아온 바울
'바울이 일어나 그 성에 들어갔다가 이튿날 바나바와 함께 더베로 가서
복음을 그 성에서 전하여 많은 사람을 제자로 삼고 루스드라와 이고니온과 안디옥으로 돌아가서' 14:20~21
루스드라에서 죽음의 돌 세례를 받은 사도바울은,
상처와 피멍투성이의 몸을 이끌고,
루스드라에서 동쪽으로 140km 떨어져 있는 더베에 찾아가서 복음을 전했다.
더베는 사도바울이 (1차)전도여행의 마지막 전도지로 삼았던 곳이고,
더베에서 동쪽으로 200km 못 미치는 곳에, 고향 다소가 있었다.
더베까지 찾아간 바울에게는, 계속 앞을 향해 다소로 나아가야할 이유들이 있었다.
1) 다소는 바울이 태어난 바울의 고향이다.
그러므로 루스드라에서 죽음의 돌세례를 당해서
그 어느 때보다도 심신이 지쳐있는 바울에게는,
고향을 찾아가서 사랑하는 가족들의 따뜻한 보살핌 속에서
상처투성이인 몸을 추스르고, 지친 마음을 달랠 필요가 절실했다.
2) 또 1차선교여행 마지막 전도지인 더베에서, 첫출발지인 수리아 안디옥으로 되돌아가기 위해서는,
다소를 경유하는 코스가 최단거리 코스였다.
구태여 왔던 길을 역행해서, 멀고 먼 길을 둘러갈 이유가 전혀 없었다.
3) 더욱이 지금까지 바울이 거쳐왔던 성읍들에는, 바울을 죽이려는 사람들이 득실거렸다.
그러므로 다소를 경유하는 최단코스를 눈앞에 두고,
자신을 죽이려는 사람들이 득실거리는 그 길을 거꾸로 다시 방문한다는 것은,
자기 목숨을 내어놓아야 하는 어리석고 위험하기 짝이 없는 길이었다.
그럼에도 사도바울은, 자기 일신의 안일을 위하여 고향 다소를 찾지 않고,
자신을 죽이려는 사람들로 득실거리는 루스드라, 이고니온, 비시디아 안디옥을
왔던 길을 거꾸로 해서.. 그들을 다시 찾아갔다. :21
전에 자기가 전도해서, 그곳에서 크리스천이 된 사람들을 만나서,
그들의 믿음을 북돋아주기 위함이었다.
바울로부터 복음을 듣고, 주님을 영접한
루스드라, 이고니온, 비시디아 안디옥의 크리스천들은,
자신들에게 복음을 전해 준 사도바울이, 사람들에게 박해 받고, 쫓겨나고,
죽음의 돌팔매질을 당해 시체처럼 질질 끌려나가는 것을, 앞서 자신들의 두 눈으로 목격했다. 행14:19
그러므로 그들에게 그 험한 세상 속에서 크리스천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얼마나 두렵고 떨리는 일이었을까?
다시는 보지 못하리라 생각했던 사도바울이,
애써 자신들을 찾아와 줌으로써
그들이 사도바울을 보는 것만으로도
뒤흔들리던 그들의 마음은 다시 용기를 얻고,
주님을 향한 그들의 마음이 더욱 굳게 세워졌던 것이다.
▶사도바울은, 되돌아오는 길에 다시 만난 크리스천들에게
예수를 잘 믿어서,
세상에서 출세하고, 부귀영화와 무병장수를 누리라고 말하지 않았다.
바울은 그들에게,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란을 겪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바울의 그 말은, 언뜻 이 세상에서 많은 환란을 겪는 것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한 전제조건인 것처럼 들릴 수도 있다.
다시 말해서, 이 세상에서 많은 환란을 당하는 인간의 공로가 없으면,
그 누구도 하나님의 나라(천국)를 얻을 수 없는 것처럼 여겨진다.
그러나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바울신학의 핵심은,
이신칭의 -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입는다는 것이 그 핵심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란을 겪어야 할 것’이라는 본문 말씀은,
정말 자신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얻었음을 믿는다면,
이 세상에서 결과적으로 겪는 환란은 조금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의미다.
바울이 많은 환란을 당한 이유 중 한 가지가, - 그의 정직한/의로운 복음전파에 있었다고 본다.
위 본문에서 보듯이, 그의 메시지에는 '타협이 없었다.'
그런 원색적 복음전파는.. 먼저 사탄을 미치게 만들었을 것이다. '저 바울을 잡아 죽이자!'
그리고 많은 안티 세력들이 생겨났을 것이다.
바울의 복음이.. 지나치게 의로웠던 것이다. (좋은 뜻으로)
◑성도(의인)는 세상에서 미움을 당하게 되어 있다.
바울 뿐만 아니라, 의롭게 살려는 모든 성도는.. 세상에서 미움을 당하게 되어 있다. 마5:10~11
▶의로우신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간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 의로운 삶의 길을 추구하는 것이기에,
의를 미워하는 사람들로부터, 반드시 미움을 당할 수밖에 없다.
왜 바르게 살려는 크리스천들이, 이 세상에서 미움을 받고, 환란을 당해야 하는가?
왜 하나님의 의를 좇는 사람들이, 시련과 고통을 겪고,
고뇌와 괴로움에 시달려야 하는가?
그 이유는 간단하다. 이 세상이 악하고, 어둠이기 때문이다.
악은 반드시 의를 미워하고, 어둠은 반드시 빛을 배척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의가 악을 이기고, 빛이 어둠을 이기는 길은, 하나밖에 없다.
자신을 태우는 것이다. 빛이 스스로 자신을 태우지 않으면,
자신을 태우는 시련과 환란을 면할 수 있겠지만,
자신을 태우기를 멈추는 것은, 어둠에 굴종하는 것이다. 결코 더 이상 빛일 수 없다.
양초 그 자체는, 빛이 아니다. 어둠속에 놓여있는 양초는, 어둠의 한 부분일뿐이다.
그러나 어둠속의 양초가 자신을 태우기 시작하는 즉각, 그 양초는 어둠을 제압하는 빛이 된다.
양초가 자신을 태우는 것은, 시련이요, 환란이다.
그러나 아무리 고뇌와 고통과 괴로움에 시달려도,
양초가 자신을 태우는 그 과정을 피하지 말아야 할 것은,
오직 그 과정을 통해서만, 미물에 지나지 않는 양초가,
어둠을 제압하는 빛으로 승화될 수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사랑하는 제자들을 세상속으로 파송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마10:16,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가운데 보냄과 같도다.’
이 세상이 얼마나 악하고 어두우면, 주님께서 이 세상을 가리켜, 이리 떼라 말씀하시고,
그 세상 속에서 살아갈 당신의 제자들, 크리스천들을 양이라고 표현 하셨겠는가?
악한 이리떼가운데서 시련과 환란을 당하지 않는 길은,
자신도 악한 이리처럼 사는 것이다. 이리떼 속에서 이리가 되면,
양으로서 겪는 고뇌도, 괴로움도 없게 된다.
악한 이리떼 속에서 양이 되는 것은,
시련과 환란, 고뇌와 괴로움과 고통을 자초하는 길이다.
현실적으로나 상식적으로 그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악한 이리떼 속에서, 양은 생존자체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왜 예수님께서는 사랑하시는 당신의 제자들에게, 크리스천들에게,
그처럼 무모한 삶의 길을 요구하고 계시는 것일까? (답은 아래 밑줄 친 부분)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 전에, 이른바 제자들과 최후의 만찬을 가지신 뒤에,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요16:32, ‘보라 너희가 다 각각 제 곳으로 흩어지고, 나를 혼자 둘 때가 오나니 벌써 왔도다.
그러나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느니라.’
예수님께서는 악한 이리떼 속에 오신 하나님의 어린양이셨다.
이리떼가 하나님의 어린 양을 가만히 내버려둘 리가 없었다.
하나님의 어린양의 생명을 노리면서, 이리저리 생채기(상처)를 내다가,
끝내는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기로 했다.
예수님께서는 임박한 당신의 십자가 죽음을 내다보시면서,
막상 당신의 십자가 고난이 시작될 때,
당신을 따르던 제자들마저 겁에 질려 뿔뿔이 흩어지고,
당신 혼자 남게 될 것을 알고 계셨다.
그리고 실제로 그 상황이 되었을 때,
모든 제자들이 주님을 배신하고 도망간 그 현장에서
주님 홀로 십자가의 고난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가셨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할 수 있었을까?
‘내가 혼자가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하시느니라!’
제자들이 모두 도망가도, 이 세상 모든 사람이 당신을 버려도,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 당신 혼자뿐인 것처럼 보여도,
그 순간에도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변함없이,
당신과 함께 하고 계심을 분명히 아시고, 또한 굳게 믿으셨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계속 이렇게 말씀하셨다.
요16:33,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란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내가 불의해서, 의를 미워할 수도 있다.
▶중요한 사실은,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서 온갖 시련과 환란을 당하실 때,
예수님을 미워하고 배척하던 최선봉에 선 사람들은, 다른 사람 아닌 유대인들이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세상 사람들에게 환란을 당하시지 않았다.
누구보다도 하나님을 잘 알고, 하나님의 선민임을 자처하던 유대인들에게
예수님은 환란을 당하셨다.
무릇 크리스천이라면, 이 사실을 절대로 잊어서는 안 된다.
교회가 크리스천이 깨어있지 않으면, 교회가 크리스천들이,
예수의 이름으로, 크리스천들을 얼마든지 미워하고 배척할 수 있기 때문이다.
▶두 분의 글을 읽어드리겠다.
(바른 말 하다가, 미움 받은 분들이다.)
한 분의 글
‘주여 주의 양들이 주렸나이다. 목말랐나이다.
삯꾼들이 주는 꼴은 참 꼴이 아니로소이다.
제 생각, 제 솜씨로 장만한 꼴이로소이다.
주여, 그들에게는 참꼴이 없나이다.
주의 살을 먹여줄 목자가 없나이다.
주의 피를 마시울 그 아무도 없나이다.
주의 생명을 그대로 줄 종들이 없나이다.
오 주여, 그들에게는 모든 것이 다 갖추어져 있나이다.
그러나 그들의 생명은 말랐나이다. 죽게 되었나이다.
주여, 누구를 보내셔서, 주의 양을 살리시려 하시니이까?
생명양식을 주시려 하시나이까?
오 주여, 내가 여기에 있사오니, 나를 보내주옵소서!’
또 다른 분의 글이다.
‘오늘날의 신자를 향하여, 그대가 예수를 믿는 목적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곧 대답하기를 ‘죄 사함을 입어, 영생에 들어가기 위하여’ 라고 대답합니다.
그러나 사실이 정말 그렇습니까?
그 보다 더,
생활이 나아지기 위하여,
남의 신용을 얻기 위하여,
인격 수양을 얻기 위하여,
사회사업을 위하여,
주님을 믿는 자가 더 많지 않습니까.
그 증거로는,
저희 중에 자기 죄를 위하여 정말 슬퍼하는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저들은, 죄라면, 살인, 강도나 간음, 사기 같은 법률상의 죄로만 알뿐이요,
그런 잘못이 없는 한, 자기는 의인인줄로 생각합니다.
기도할 때는 습관처럼 ‘저는 죄인이오나..’ 하지만,
머리를 들고 있는 동안은, 자신이 죄인이라는 생각은 조금도 없습니다.
영생을 원한다고 하나
그 영생은 늙은이에게는 욕심밖에 더 되는 것 없고,
젊은이에게는 내용 없는 빈말 밖에 되는 것이 없습니다.
불신자가 누리는 세상 영화에서 털끝만한 것도 빼지 않고 다 누린 뒤에,
천당에 가서, 불신자는 못 가지는 복락을 또 한 가지 더 얻자는 것이니..
욕심의 변태(변형된 형태)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이 시대의 목회자와 교회들의 문제점을 어쩌면 이렇게 잘 지적했을까..
공감이 가는 글들이다.
그러나 놀라운 사실은, 이 글들은 우리 시대의 글들이 아니라는 것이다.
첫 번째 글은, 지금부터 79년전인 1931년에 차재선 전도사가 쓴 글이고,
두 번째 글은, 지금부터 75년전인 1935년에 김교신 선생에 의해서 쓰여진 글이다.
사람들은 옛날로 거슬러 올라가면,
교회는 지금보다 훨씬 더 교회다운 교회였을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감을 갖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두 분의 글들을 통해서, 이 시대의 교회나 교인이나,
70~80년 전의 교회나 교인이나, 그 양자 사이에 아무런 차이가 없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
그래서 누구보다도 참되고, 바른 크리스천으로 살기를 원했고,
실제로 살았던 차재선 전도사와 김교신 선생은,
세상 사람들, 멀리 있는 사람들로부터는 박수를 받았지만,
그러나 그들이 정작 몸담고 있던 교회로부터는 불편해하고,
달가워하지 않는 가운데 배척당하고 말았다.
도대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워진 교회가
어떻게 성경과 동떨어진 채, 참된 크리스천으로 살려는 사람을 미워하고 배척할 수 있겠는가.
저와 여러분도, 조심하지 않으면 그럴 수 있으므로, 하나님께 은혜를 구하자.
내 이익, 내 교회 이익, 내 체면과 명예의 득실.. 이런 것만 늘 따지다가는
서두에 언급한 것처럼 ‘의를 미워하고, 불의를 사랑하는 자’가 되고 말 것이다.
▶교회를 살린다면서, 복음을 희생시키면 안 된다.
신약성경은, 복음서로 시작되고 있다.
그 복음서 뒤에 교회의 태동과 역사를 전해주는 사도행전이 이어진다.
복음서 그 뒤에 사도행전, 바로 이 순서가 중요하다.
복음이 먼저 있고, 교회가 다음에 오는 것이지,
교회가 먼저 있고, 복음이 그 다음에 오는 것은 아니다.
어떤 경우도 교회 그 자체를 위해서, 복음마저도 희생시켜서는 안 된다.
교회가 중요하다면, 교회 그 자체가 중요해서가 아니라,
교회는 복음, 하나님의 말씀을 드러내는 복음의 통로요, 도구이기 때문에 중요하다.
교회가 이 순서를 무시하고, 복음보다 교회를 앞세울 때는,
그래서 교회를 위한다면서, 심지어 복음까지 희생시켜 버린다면,
교회든, 교단이든, 추악한 이해집단으로 추락하고 만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주님의 양들을 해치는 악한 이리떼로 전락할 것이다.
이것이 2천년 교회역사가 우리에게 던져주는 냉엄한 교훈이다.
(교회 교회! 하면서, 복음을 무시하고, 의로운 외침들을 미워한 것이다.)
▶마치는 말/ 나 한 사람, 올바로 의를 사랑하며, 의인으로 살자.
도대체 교회가 무엇인가?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인으로 모시고,
주님을 본받아 사는 사람들의 모임이다.
그렇다면 이 시대의 교회의 모든 문제는,
교회를 이루고 있는 우리 자신들의 문제, 아니 나 자신의 문제임을 알게 된다.
이 시간에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다시 한 번 정직하게 우리 각자를 점검해 보자.
내가 만약에 누군가를 사랑하고 있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가?
그가 내 곁에서 나를 위해 불의마저 서슴지 않기 때문에 그를 사랑하는 것인가?
아니면 매사에 나를 의의 길로 인도해 주기 때문에 그를 사랑하는가?
내가 환란을 당할지라도, 의를 좇는 사람들을 사랑하고,
의를 좇는 사람들로부터 사랑받고 있다면,
나는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먼저 구하는 삶을 살고 있음이 분명하다.
복음서, 그 뒤의 사도행전, 이 순서를 잊지 말자.
복음, 하나님의 말씀을 삶의 목적으로 삼되,
어떤 경우에도 복음을 자기 욕망을 성취하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시키는 어리석음을 범치 말자.
악한 이리떼가 득실거리고, 칠흙 같은 어둠에 뒤덮여 있는 이 세상 속에서
설령 시련과 환란을 당하고, 온갖 괴로움과 고통과 고뇌에 시달린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먹고 마시는,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 살아가자.
하나님의 섭리를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을 태우기를 주저하지 않는,
용기 있는 크리스천들이 되자. 그때 우리는 우리의 가정과 일터,
이 땅의 교회, 이 시대의 역사를 새롭게 하는 진정한 개혁자로 살 수 있을 것이다.
세상의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들과 함께 하고 계신다. ▣ 크리스천 인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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