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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는 누구인가 (마 21:1-5)

by 【고동엽】 2022. 8.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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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는 누구인가  (마 21:1-5)

하나님이 예수님을 이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이 예수를 이 땅에 보내신 것은 사건중의 사건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실 때 땅에서 하늘에서 이상이 나타나고 기적이 수반되고 천체에 지각변동이 일어나고 야단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세상에 오시는데 조용히 있었겠습니까. 모든 예언자들이 요란하게 예언하고 연구가들이 온갓 연구하던 가운데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러면 그 예수는 누구입니까. 우리는 예수를 다음과 같이 몇가지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겸손의 구세주” 입니다.

예수님은 겸손의 대명사입니다. 예루살렘 입성하실 때는 “나귀 타시고”입성하셨습니다. 당시 나귀는 가장 천한 동물이었습니다. 예수께서 그 천한 동물들 타시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습니다. 겸손의 모습입니다. 또 예수님은 너무 초라하게 태어나셨습니다. 마굿간에서 나시고 가난한 목수의 아들로 태어나셨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무시한 것도 그 출신과 배경이 너무나 빈천했기 때문입니다. 이같은 상황은 예수께서 어떤 목적을 위해서 이땅에 오시고 왜 오셨는가를 잘 설명해 주는 대목입니다.

그렇게 보면 예수님은 대기만성형입니다. 마굿간에 오시고 목수의 집안에 태어나시고 30년의 성장기간도 초야에 뭍혀서 누구의 눈에도 뜨지 않은채 보내다가 30세에 혜성처럼 나타나서 가르치고 기적을 일으키고 병자들을 고치고 호령  하시면서 사회개혁에 나섰습니다. 그렇게 3년을 뜨겁게 활동하시다가 어느날 순식간에 사라져버렸습니다. 위인들을 보면 공통점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어려서는 별볼일 없는 아이로 성장했다는 것입니다. 어려서 신동소리 듣고 자란 아이들에게도 공통점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커서 별볼일 없는 아이들이 된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어려서는 조용히 성장하고 점점 커가면서 발전하는 것이 좋은 것 같습니다.  

위인들의 전기를 보면 한결같이 어려서 평균 우수한 경우가 드물고 성적도 평균이하의 경우도 많습니다. 존 뉴턴은 초등학교 시절에 낙제도 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아인슈타인은 4살 때 비로서 말하기 시작했고 7세때 가서야 글을 깨우쳤다고 합니다. 그런 생각을 하면 오늘 아이들은 모두 천재입니다. 톨스토이도 대학때 낙제를 했고 미사일을 발명한 브라운(Werner Von Braun)은 대학다닐 때 수학공부에 낙제했다고 하는데 그럼에도 그는 후에 마사일을 발명하게 됩니다.  

포춘지에서 조사한 통계를 보면 미국에서 500개 회사를 거느리고 있는 어느 사장은 학창시절 성적이 평균 C 학점이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미국 상원의원 들중 65%가 성적이 평균 이하였다고 하며 미국의 백만장자들 가운데 50%는 대학도 가지못한 사람들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들이 모두 나중에 탁월한 성공자들이 되었습니다. 그것은 순전히 노력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니까 일류대학이나 학벌은 그냥 보기에 좋은 것입니다. 기왕이면 좋은 것입니다. 그것이 성공하는데 절대적인 기준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런면에서 예수님은 겸손의 화신입니다. 마굿간에서 태어나시고, 목수의 집안에서 태어나시고, 말없이 초라한 집에서 30년 동안을 준비합니다. 그 어느 부분을 보아도 가능성이 있는 부분은 없습니다. 사람들의 눈에 띄지도 않은 채 청소년기를 보냅니다. 그러다가 어느날 혜성처럼 나타난 분이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의 삶의 전기를 보면 이렇게 겸손한 부분이 많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을 겸손의 표본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또 예수님은 “평화의 그리스도” 이십니다.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겸손 때문은 아니고 순전히 평화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오시기 전에는 하나님과 인간이 한창 불화 중이었을 때입니다. 제사장을 통하지 않으면 하나님과 교통이 없을 때였습니다. 죄로 인해서 인간과 하나님 사이는 거리가 상당히 멀리 벌어져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심으로 인간과 하나님 사이에 평화가 이루어졌습니다. 예수님은 그 평화를 이루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고 결국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 결과 우리들이 지금 하나님과 자유롭게 교제를 이루고 있는 것입니다. 생각하면 이것이 참 큰 은혜입니다.

여러분, 진정한 행복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것은 더불어 함께 살아가는 삶입니다. 하나님과 더불어 살아가고 이웃과 더불어 함께 살아가고 형제와 교우와 함께 살아갈 때가 가장 행복할 때입니다. 하나님과 관계가 악화되어 보십시오. 이웃과, 가족이 관계가 악화되어 보십시오. 평화는 금방 깨어져 버립니다. 그래서 우리는 더불어 살아가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내 주위에 귀찮케 하는 사람이 있어도 생각해 보면 없는 것 보다는 훨씬 낫습니다. 어떤 때는 사람들이 귀찮을 때도 있지만 그것이 혼자있는 것 보다 훨씬 행복한 삶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외딴곳에서 혼자 살아갈 수 없는 존재입니다. 또 그것이 창조의 질서입니다.  

미국과 핀랜드 그리고 스웨덴 사람 37,000명을 대상으로 조사를 해 보았더니 혼자 살아가는 사람은 담배피우는 만큼 좋지않고 마음을 터놓고 지낼만한 친구가 없고 사회적으로 소속된 집단이 없이 혼자 시간보내며 살아가는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급사율이 배나 높다고 조상되었습니다.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것이 최고라는 말입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세워놓으신 더불어 살아가는 평화의 삶입니다.

중국인의 상술을 보면 334법칙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전체 이익중에서 3은 소비자에게 주고 3은 자신을 도와준 동업자에게 돌리고 4는 자신이 이익으로 가진다는 상술입니다. 이 상술의 철학은 모두가 행복하자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장사를 해도 함께 먹고 함께 나누고 함께 행복하자는 것입니다. 얼마나 지혜로운 삶의 철학입니까. 함께 행복해야 나도 행복한 것입니다. 중국인들은 그 철학을 깨우쳤습니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그런 철학이 없습니다. 그래서 소비자에게 속이고 바가지를 씌우고 가짜를 비사게 팔아먹습니다. 동업자에게는 불량 어음을 주고 결국 부도나게 합니다. 그리고 자신은 알먹고 꿩먹고 다 먹습니다. 그러니까 당장은 돈을 좀 벌기는 하겠지만 결국은 모두가 불행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두가 서로 믿지를 못하고 불안하게 살아갑니다. 그러다가 자기도 속고 남도 속여서피차가 피해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 삶 어디에 더불어 살고 함께 행복해지려는 의지가 있고 여지가 있습니까. 그러니까 모두가 불행해지는 것입니다. 우리민족은 지금 이렇게 아주 어설픈 인생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땅에는 날마다 부정과 속임과 사기와 가자가 판을 치고 모두 속고 속이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평화를 주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그 평화는 함께 더불어 살아갈 때 찾아오는 평화입니다. 사람이 하나님과 떨어져서는 절대로 평화를 얻을 수 없습니다. 사람이 이웃과 떨어지고 가족과의 관계도 좋지 않으면 불화한 법인데 인간이 하나님과 불화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우리는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법부터 배워야 합니다. 거기서 평화가 만들어지고 주어집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진정한 평화를 주시기 위해서 오셨고 그 평화를 이루는 방법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또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는 메시야” 이십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지독한 고난을 당하고 마침내 지독한 죽음을 죽으셨습니다. 그 고난이 십자가를 지는 고난입니다. 예수님은 이 모든 고난을 아무 소리없이 지셨습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자신을 따르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 그래서 그리스도를 따르는 신앙의 삶은 십자가를 지는 삶입니다. 십자가를 지는 삶을 살아갈 때 진정한 평화가 주어지고 은혜가 주어지고 예수를 따르는 정신이 발휘됩니다.

  예수 때문에 수고하는 삶이 십자가를 지는 삶입니다. 예수 때문에 욕을 당하는 것도 십자가를 지는 삶입니다. 예수 때문에 불이익을 당하고 살아가는 것도 십자가를 지는 삶입니다. 이 십자가의 삶은 어려움이 있어도 결코 싫지않은 삶입니다. 그리고 그 삶이 싫거나 주저되면 더 수양해야 할 신앙입니다. 왜냐하면 그 삶이 은혜의 삶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신앙인은 엄밀히 말하자면 이같은 십자가를 지는 삶을 회피해서는 안됩니다. 그 십자가를 기쁨으로 질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스스로에게 기쁨이 주어지고 이 세상에 변화를 이룰 수가 있습니다.  

미국에서 한인 2세가 미국 명문대인 콜롬비아대학 의과대학에 지원서를 넣었습니다. 이 젊은이는 수능시험 성적이 만점에 가까운 공부잘하는 학생이었습니다. 그리고 집안 형편도 아주 부유해서 그 정도면 합격은 무난했습니다. 그래서 이 학생이 안심하고 기다렸는데 뜻밖에도 불합격 통지서를 받았습니다. 그 불합격 사유가 이렇습니다. “성적은 우수하나 어디에도 헌혈을 했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남을 위해서 헌혈한 경험도 없는 사람이 어떻게 환자를 돌볼 수 있겠습니까. 의사지망생으로서 자격이 없습니다“.

  한마디로 “십자가를 지는 삶의 흔적이 전혀없는 사람이 어떻게 사람의 생명을 다룰 자격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이것이 미국이 지향하는 교육일 것입니다. 젊은이라면 그 청순한 정신을 가지고 스스로 봉사도 하고 수고도 하고 서로 돕는 삶을 체험해야 합니다. 누가 시켜서가 아니고 스스로 말입니다. 그것이 이를테면 십자가를 지는 삶입니다. 젊은이가 그런 삶의 체험도 없으면 그것은 젊은이도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런 사람은 우리 대학에서는 필요없다는 말입니다. 참 부러운 교육철학입니다.

여기서 우리나라 교육을 한번 생각해 보게 됩니다. 우리나라 교육과는 그 정신이 너무 차이가 납니다. 우리나라는 수능시험만 잘 보면 대학에 갈수 있습니다. 그래서 모두 봉사니 협동이니 십자가니 하는 부분은 생각조차 하지못하고 오직 수능시험에만 생명을 겁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학창세월 동안 누구를 위해서 수고하고 돕고 함께 살아가는 삶의 모습이 전무합니다. 그러니 언제 남을 위해서 살아가는 삶을 배우겠습니까.

그렇게 아이들이 커서 자기위치를 찾고 소위 성공했다하는 사람은 괜찮은데 제자리를 찾지못한 사람은 그 머리만 발전시킨 그 머리로 뭘 해먹고 살겠습니까. 그러니까 사회에서 낙오되고 쳐지면 그 빨리 회전하는 머리로 악용하고 고도로 사기치는 일 밖에 뭘 하겠습니까. 지금 그 회전이 잘되는 머리로 큰 기대를 가지고 벤처사업에 뛰어든 젊은이들이 사업을 하다가 뜻대로 되지않으니까 모두 사행성 사업에 손대고 경제사기를 쳐서 오늘 저렇게 온 나라가 시끄럽지 않습니까.

역사의 연구라는 책을 써서 유명해진 아놀드 토인비라는 역사학자가 있습니다. 토인비교수가 런던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강조하기를 “너희는 역사의 주인이 되라, 그리고 역사를 창조하는 사람이 되라”고 강조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학생이 물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역사의 주인이 될 수 있습니까”. 토인비교수가 대답하기를 “인류의 역사를 보면 그 시대를 빛낸 사람들이 있다. 그 사람들을 연구해 보면 그들의 삶에 한가지 공통점이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그 사람들이 자기가 살고 있는 그 시대를 위해서 자기자신을 제물로 드려서 희생했다는 점이다. 그러기에 그들이 그 시대에 위인이 될수 있었던 것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라는 말씀은 예수를 위해서만 꼭 수고하라는 말씀만은 아닐 것입니다. 바로 이런 삶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삶이 십자가를 지는 삶입니다. 이 삶이 한알의 밀알이 되는 삶입니다. 한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썩지 않으면 아무런 변화가 없습니다. 어떤 밀알들이 땅에 떨어져 썩은 까닭에 이땅에 60배 100배의 결실을 주게 된 것입니다. 그것이 십자가를 지는 삶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는 모습을 우리에게 구체적으로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면서 그 삶을 살라고 강조하십니다.

또 예수님은 “부활의 그리스도” 이십니다.

예수님이 당하신 고난은 참으로 엄청난 아품이었고 고난이었습니다. 예수 이후로 그런 아품을 당한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그렇게 아픈 고난을 당하셨기에 그에게는 부활이 주어졌습니다. 부활은 어쩌면 하나님이 주시는 고난의 상급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수고하고 희생한 사람에게는 언제나 이 상급이 주어집니다. 한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썩으면 반드시 하늘은 상급을 주십니다. 그것이 100배의 결실입니다. 예수님은 고통스럽게 십자가에서 죽으셨지만 마침내 부활로서 보상을 받으셨습니다. 그러기에 주님은 우리에게 십자가를 질뿐 아니라 죽도록 충성하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부활이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신앙인의 삶에는 반드시 수고가 들어갑니다. 수고없는 신앙생활은 없습니다. 평안한 신앙생활도 중요하지만 나중에 주어질 상급을 위해서는 오늘 수고하는 삶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오늘 심는 생활입니다. 오늘 심지않으면 나중에 거둘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외상이 전혀 없는 분입니다. 심은 사람은 그대로 보상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요한 웨슬레의 어머니 수산나는 아이가 19명이었다고 합니다. 그 많은 아이를 낳아 길렀습니다. 참 용합니다. 그 아이들을 기르는데 수산나가 얼마나 분주했겠습니까. 생각해 보십시오. 여유도 없는 집안에서 19명의 아이들을 먹이는 일, 입히는 일, 돌보는 일 등 상당히 분주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수산나는 매일 1-2시까지 기도시간을 정해놓고 누구의 방해도 받지않고 그 시간에 기도에 전념했다고 합니다. 그 생활이 바로 심는 생활입니다. 그 결과 19명의 아이들 중에서 요한 웨슬레가 나왔고 찰스 웨슬레가 탄생했습니다. 그것이 우연이었겠습니까.

예수께서 우리에게 이 삶의 원리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 스스로가 이 삶을 실천해 보이셨습니다.  그러면서 우리에게 그렇게 살라고 강조하십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예수님은 겸손의 그리스도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평화의 예수시고, 십자가를 지신 예수시고 부활의 구주십니다. 우리 신앙의 최대의 목표는 이 예수를 닮아가는 것입니다.

출처/ 이정익목사 설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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