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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하시는 예수 (막 1:35-39)

by 【고동엽】 2022. 8.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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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하시는 예수   (막 1:35-39)

사람은 생각하는 존재입니다. 사람이 생각한다는 것은 참 행복한 일입니다. 사람의 값은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호젓한 시간이 있어야 합니다. 그 호젓한 시간에 지난날을 생각하고 추억하고 회상하고 미래를 생각하고 옮고 그름을 생각해서 판단하는 일은 인간만이 지닌 값입니다.

일반 사람들에게 생각하는 일이 이렇게 중요하다고 하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기도하는 시간이 중요합니다. 그리스도인은 반드시 조용하게 묵상하는 시간이 있어야 합니다. 이 묵상의 삶은 신앙생활의 요소이기도 합니다. 저는 지극히 정적인 사람에 속합니다. 그래서 조용히 생각하는 시간을 참 좋아합니다. 그리고 조용하고 호젓한 호숫가나 산길 그리고 혼자있는 시간이 참 좋습니다. 산길도 높고 깊은 산보다 정감있는 동네 산이 좋습니다. 그 조그만 산을 오르내리며 혼자 걷는 것이 얼마나 좋습니까. “옛동산에 올라” 라는 노래를 지은 작사자도 그런 심정을 가지고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도 산을 좋아하셨던 것 같습니다.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은 혼자 호젓한 산을 찾아서 기도하는 시간을 많이 가진 것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신앙인은 산을 찾아야 합니다. 이것이 신앙의 요소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기도하는 모범을 보이셨습니다. 예수님이 보여주신 기도하는 모습이 성경을 보면 몇 가지로 나타나 있습니다.

하나는 “규칙적인 기도” 입니다.

유대인들은 하루에 3시, 6시, 9시 세 번 기도시간을 정해놓고 기도했습니다. 일 하다가도, 길을 가다가도 그 시간이 되면 길에 서서 기도했습니다. 베드로도 그 시간에 기도하다가 고넬료 집으로 가라는 계시를 받았습니다. 고넬료도 그 기도시간에 기도하다가 베드로를 청하라는 계시를 받았습니다. 규칙적인 기도가 중요합니다.

규칙적인 기도 중에 가장 대표적인 기도는 새벽기도일 것입니다. 우리나라는 세계적으로 새벽기도가 참 유명한 나라입니다. 우리민족은 새벽을 좋아하는 민족입니다. 새벽에 일어나서 일하고 출근하고 교회가는 사람은 우리나라 밖에 없을 것입니다. 원래 새벽기도는 평양에 있었던 장대현교회가 원조입니다. 일본 지배 시에서부터 6,25가 일어나기 전까지 장대현교회를 중심으로 열심히 새벽기도를 했습니다. 그때 뜨거운 새벽기도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평양에 가 보니까 교회는 간 데 없고 지금은 그 자리에 수십 미터나 되는 금칠 한 김일성 동상이 세워져있습니다. 평양을 방문하는 모든 사람은 그곳부터 안내해서 참배하게 합니다. 그리고 결혼하는 북한의 젊은이들은 결혼식을 마치자마자 그곳부터 찾아가서 머리 숙여 참배부터 하게 합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새벽기도를 하던 그 자리가 오늘은 김일성 동상 앞에 모두 절하는 장소로 변해버렸습니다.

새벽기도는 참 의미가 있습니다. 새벽기도는 하루의 첫 대화를 하나님과 나눈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리고 새벽기도는 하루의 시작을 하나님께 당부한다는데 뜻이 있습니다. 그리고 새벽기도는 아주 조용한 시간에 하나님과 진지한 대화의 시간을 가진다는 뜻도 있습니다. 얼마나 의미있는 시간입니까. 그리고 또 새벽기도가 의미있는 것은 일어나기가 참 힘든 시간인데 그래도 일어나서 하나님을 찾아간다는데 있습니다. 새벽기도하기가 얼마나 어렵습니까. 그래서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시끄럽게 부르짖는 기도도 필요할 대가 있지만 사실은 진지하지는 못합니다. 정말 진지한 대화는 조용히 하는 것입니다. 부부가 앉아서 진지하게 대화할 때는 조용히 하는 것입니다. 연인끼리 앉아서 하는 대화도 조용히 합니다. 연인들의 대화는 아예 말이 필요 없습니다. 연인은 그냥 앉아서 서로 바라만 보아도 눈과 눈으로 뜨거운 대화가 오고 갑니다. 새벽기도도 마찬가지로 진지한 기도를 할 수 있는 시간입니다.

예수님은 규칙적으로 산을 찾으셨습니다. 사람은 산을 오르는 것만으로도 마음의 안정이 오고 고요가 오고 신앙요소가 만들어집니다. 그래서 괴테는 “네 영혼이 피곤하거든 산으로 가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불행한 것은 오늘 현대인들은 산과 멀리 떨어져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눈만 뜨면 아스팔트 위를 걸어야 하고, 듣는 소리는 매일같이 세속의 소리만 듣고, 음악은 귀를 찢을 듯한 거친 음악만 듣고, 생활은 다람쥐 쳇바퀴 돌듯 매일 똑같은 생활만 되풀이하고, 직장에 가면 그 시간부터 경쟁이 시작됩니다. 그러니 성격이 난폭해지고 갈등이 쌓이고 소화불량에 걸리는 것입니다. 그러니 어떻게 영성이 제대로 유지가 되겠습니까. 그래서 예수님은 규칙적으로 산을 찾아 기도하셨다고 했습니다. 우리에게 아주 좋은 모습을 보여 주셨습니다.

두 번째는 “특별기도” 입니다.

예수님은 규칙적인 기도도 했지만 때로는 특별기도도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큰 일이 앞에 있을 때에는 언제나 특별기도를 하셨습니다. 먼저 예수님은 공생애를 시작하기 전에 40일 금식기도부터 하셨습니다. 그 금식은 엄밀히 말하자면 단식입니다. 물 냄새조차 맞지 않고 기도하셨습니다. 그 순간 금식기도 안 할 수 있습니까. 또 십자가를 지시기 전날 밤에는 겟세마네 산으로 올라가 철야기도를 하셨습니다. 그 밤에 피땀을 흘리며 기도했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그런 모범을 보여 주셨습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동안 때로는 특별기도가 있어야 합니다. 우리들이 세상을 살아가는 과정에는 반드시 특별기도를 해서 하나님을 찾아야 할 때가 발생합니다. 그때는 일상의 기도만 가지고는 부족합니다. 예를 들면 미래를 결정해야 할 때는 그냥 기도로는 부족합니다. 그래서 그때는 특별기도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또 배우자를 결정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학교를 졸업하고 직업을 선택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냥 결정해도 상관없지만 정말 그 일이 중요한 일이라고 인식된다면 어떻게 그냥 결정할 수 있습니까. 나의 미래를 결정하는 일, 얼마나 중요한 일입니까. 오늘 결정하는 일에 따라 나의 일생의 방향과 모습이 결정됩니다.

그리고 결혼하는 일 또한 얼마나 중요한 일입니까. 평생 함께 살아가야 할 사람을 결정하는 일입니다. 어떻게 그냥 쉽게 결정해 버리겠습니까. 그래서 칼 힐티라는 사람은 “결혼이란 결코 아무렇게나 다루어도 괜찮은 일이 아니다. 그것은 실로 무서운 것이다. 혼례를 올리는 날 그 순간이 생애에서 가장 결정적인 순간이 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가장 심각한 문제들이 앞에 있을 때는 언제나 특별기도를 하셨습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보여주신 기도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세 번째는 “항상 하는 기도” 입니다.

예수님은 규칙적인 기도를 하시고 특별기도를 하셨지만 항상 기도하는 것도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주기도문을 통해서 일용할 양식을 위해서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그 말은 항상, 매일 기도하라는 말씀입니다. 항상 기도는 일상의 기도를 말합니다. 우리 신앙인들은 일상의 기도를 해야 합니다. 우리는 적어도 세 가지의 기도제목을 놓고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는 “어려움 당하지 않도록” 기도하는 일입니다. 심방하다 보면 어려움을 당해서 고난받는 가정들을 많이 봅니다. 갑자기 예기치 않았던 어려움이 임해서 고난 당하는 가정들이 참 많습니다. 그래서 세상입니다. 세상에는 언제나 이 어려움의 요소들이 서려있습니다. 언제 그런 어려움이 나에게 찾아올는지 모릅니다. 가정 경제가 갑자기 뒤틀리던지, 갑자기 직장에 문제가 발생하던지, 가정에 불화가 찾아오던지, 갑자기 아이들이 가출하고 탈선하고 사고를 저지르던지, 교회가 갑자기 불화가 일어나서 갈등하고 시험드는 일이 발생하던지 갑자기 건강이 악화되어서 고난을 당하는 일이 발생하던지, 영적 시험을 당하든지, 이웃과 다툼이 일어날지 모를 일입니다. 그래서 기도해야 합니다. 그 기도가 일상의 기도입니다.

그런가 하면 “어려움이 와도 잘 감당하게 해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살아가다가 만나는 어려움 중에는 때로 하나님이 주시는 어려움도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신앙인은 무조건 어려움이 없게 해 달라고 기도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 신앙인은 하나님이 주시는 어려움이면 기꺼이 받아야들여야 합니다. 그리고 잘 감당하게 해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뱃사람은 풍랑을 만나는 것이 아주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그래서 배를 탈 때는 거친 파도를 만날 것을 각오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타신 배에도 거친 파도가 밀려왔습니다. 사람은 살다보면 어려움을 만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그래서 그 일이 무조건 없게 해 달라고 기도할 것이 아니고 때로는 잘 감당하게 해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이것이 두 번째 기도할 일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고난을 앞에 두고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시옵소서”하고 기도했습니다. 이것이 두 번째 기도입니다.

세 번째로 기도할 제목이 있습니다. 그것은 “어려움을 당하는 사람들을 위한 기도” 입니다. 여러분, 주변을 한번 살펴보십시오. 우리 주위를 살펴보면 어려움을 당하는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그들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도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진 임무입니다. 보험은 건강한 사람에게는 불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때로 보험료를 낼 때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억울할 일이 결코 아닙니다. 내가 보험을 듦으로서 지금 병난 사람을 돕게 되는 것입니다. 그 정신으로 보험을 드는 것입니다. 또 내가 병들었을 때 남들이 낸 보험으로 나도 도움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람이 서로 살아가는 방법입니다.

나는 지금 건강하고 평안합니다. 그런데 남들도 지금 평안하고 건강한 것은 아닙니다. 나는 지금 편안한데 남들은 지금 말할 수 없는 고난을 당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마땅히 우리는 그들을 위해서 기도해 주어야 합니다. 그것이 항상 기도하는 중보의 기도입니다. 이것은 주님이 부탁하신 일입니다, 주님은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고 하셨습니다. 이웃이 평안해야 나도 평안해지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평안은 나도 평안하고 이웃도 평안해야 평안입니다. 이웃은 굶고 있고 아프고 병들고 실패했는데 나만 평안하다고 평안한 것은 아닙니다. 나도 평안하고 이웃도 평안해야 진정 내가 평안한 것입니다. 그래서 중보의 기도가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는 이웃을 위해서 중보의 기도를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내 이웃이 아픔을 당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북한 동포를 위해서 중보의 기도를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지금 굶주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세상 사람들을 위해서도 중보의 기도를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지금 예수를 믿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남의 불행을 나의 불행으로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의 가슴은 뜨거워야 합니다. 불타야 합니다. 민족애로, 동포애로, 형제애로, 뜨거워야 하고 불타야 합니다. 그래야 안타까운 마음으로 기도할 수 있게 됩니다.

본문 38-39절을 보십시오. “우리가 다른 가까운 마을들로 가자 거기서도 전도하리니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 하시고 온 갈릴리로 다니시며 그들의 회당에서 전도하시고 귀신을 내 좇으시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하루도 쉴 날이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세상에 귀신들린 자, 병든 자, 불신자들이 너무 많았기 때문에 그들이 있는 한 예수님은 평안히 쉴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부지런히 다니며 먹이시고 고치시고 전도하셨다고 했습니다. 그런 일들을 위해서 예수님은 수시로 산을 찾았고 매일같이 기도하셨던 것입니다.

십자가를 지시기 몇 일전 감람산으로 올라가 성을 내려다보시고 눈물을 흘리며 기도하셨습니다. 저 안타까운 중생들을 보시며, 저 타락한 세속도시를 내려다보시며, 살아가는 목적도 잃어버린 채 그날그날 살아가는 저 사람들을 보시면서, 외쳐도 믿지 않는 동포들의 모습을 보시면서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셨다고 했습니다. 그 눈물이 오늘 이 시대 우리 눈에서도 흘러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들이 흘려야 할 눈물입니다.

오늘 많은 사람들이 천국과 지옥을 말하면 비웃습니다. 그들에게 전도하면 너나 천당에 잘 가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언젠가 그 날은 현실로 나타날 것입니다. 그것은 성경의 약속입니다. 그 날이오면 그렇게 말하던 사람들은 모두 그 비참한 지옥으로 던져질 것입니다. 지옥으로 던져지는 그 날 그 사람들은 모두 심각하게 천국과 지옥을 말하며 전도하던 그 전도자들의 모습을 생생하게 기억하며 눈물을 흘릴 것입니다. 그 사람이 내 이웃집 아저씨라면 모르지만, 그 사람이 길 가던 낯모르는 사람이었다면 모르지만, 그 사람이 다름 아닌 내 남편이고, 내 아내고, 내 부모고, 내 자식이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강원도에 사는 어떤 사업가가 부산으로 출장을 갔습니다. 도착하자마자 아내에게 이메일로 무사히 도착했다고 전했습니다. 그런데 주소를 잘못 써서 며칠 전에 세상을 떠난 목사님 사모님 이메일로 잘못 전해졌습니다. 그 사모님, 그 메일을 읽자마자 기절을 했습니다. 내용이 문제였습니다. “여보, 무사히 도착했소, 그런데 이 아래는 정말이지 듣던 대로 무척이나 뜨겁구려”. 이래도 천국과 지옥을 말할 때 듣고 웃을 수 있습니까.

세상에는 빈정대는 천성을 타고 난 사람이 있습니다. 어떤 여자 집사님이 비행기를 타고 외국으로 가고 있었습니다. 시간이 지루해서 성경을 펼쳐놓고 읽기 시작했습니다. 옆에 앉은 남자가 비꼬는 말로 물었습니다. “그 책에 쓰인 내용을 다 믿수”. “그럼 믿지요, 성경말씀인데요”. “그럼 고래 뱃속에 들어갔다 나왔다는 그 사람도 아슈”. “알구말구요 ‘요나’라는 사람이지요”. “고래 뱃속에서 사람이 살수 있다고 믿수”. “글쎄요 이 다음 천국 가서 물어 보아야겠네요”. “그럼 그 친구 천국에 없으면 어쩔거유”. “그럼 아저씨가 물어보시면 되겠네요”. 세상에는 이런 사람들이 있게 마련입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이 다름 아닌 내 집안에 있거나 나와 함께 살아가는 사람일 경우에는 참 불행할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런 경우가 우리 주변에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날마다 쉬지도 못하고 다니며 가르치고 전하고 고치셨다고 했습니다. 그런 일을 위해서 주님은 날마다 산을 찾으신 것입니다.

우리는 이 예수님의 뜨거운 눈물과 기도와 달구어진 심장을 이식 받아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언제까지나 나 자신만을 위해서 기도하고 살아갈 수만은 없습니다. 우리의 주변을 돌아보며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기도하며 함께 하며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이것이 오늘 아침 예수님으로부터 배우는 기도생활입니다. 기도는 이 땅에서 하늘을 움직일 수 있는 유일한 통로입니다. 어떤 면에서 기도는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진 특권입니다. 그 기도의 모범을 예수님은 우리에게 복음서를 통해서 보여주셨습니다.

출처/이정익목사 설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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