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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 이레 (창22:1-14빌3:1-16)
최근에 베스트셀러 목록에 오른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와 데이비드 케슬러가 함께 쓴 <인생수업>이란 책을 읽었습니다. 그 책 제일 처음에 나오는 40대 초반 여성의 경험을 좀 길지만 그대로 소개를 하겠습니다.
“어느 금요일 오후, 나는 혼자서 차를 몰고 시내 외곽 쪽으로 달리고 있었습니다. …고속도로 중간쯤 갔을 때 앞서 달리던 차들이 갑자기 멈춰 섰습니다. 나도 차를 정지한 뒤, 백미러를 쳐다보았습니다. 그런데 내 뒤를 따라오던 차 한 대가 전혀 정지할 기미를 보이지 않고 그대로 달려오는 것이었습니다. … 그 차의 운전자가 순간적으로 한눈을 팔았으며, 곧 내 차를 강하게 들이받으리라는 걸 알 수 있었습니다. 그 차의 속도, 그리고 내 차와 앞차의 간격을 볼 때, 나는 아주 위험한 상황에 놓여 있었습니다.
순간 나는 운전대를 움켜쥐고 있는 내 손을 내려다보게 되었습니다. 의식적으로 그렇게 꽉 잡았던 건 아닙니다. 나도 모르게 그런 것이었고, 그것이 내가 그때까지 살아온 방식이었습니다. 계속 이런 식으로 살고 싶지도 않았고, 이런 식으로 죽고 싶지도 않았습니다. 나는 눈을 감고 숨을 크게 들이쉬고는 양손을 옆으로 내려놓았습니다. 운전대를 놔버린 것입니다. 삶에, 그리고 죽음에 순순히 나 자신을 맡겼습니다. 뒤이어 엄청난 충격이 느껴졌습니다.
얼마 후, 사방이 고요해지고, 나는 눈을 떴습니다. 너무나 놀랍게도 나는 하나도 다치지 않고 멀쩡했습니다. 내 앞에 있던 차는 박살이 났고, 뒤 차 역시 완전히 부서진 상태였습니다. 내 차는 그 중간에서 마치 종잇장처럼 구겨져 있었습니다.
경찰은 내가 몸의 긴장을 푼 것이 천만다행이라고 했습니다. 근육이 긴장하면 심한 부상을 입을 확률이 훨씬 커진다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큰 선물을 받은 기분으로 그곳을 떠났습니다. 단지 다치지 않고 살아남았다는 것 이상의 더 큰 의미를 지닌 경험이었습니다. 지금까지 늘 주먹을 꽉 움켜쥔 채 살아왔지만, 이제는 손바닥 위에 부드러운 깃털이 놓인 것처럼 평화롭게 손을 편 채로도 삶을 살 수 있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이 여인의 경험을 통한 교훈은 중요한 신앙의 핵심을 담고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삶을 지탱시키고 행복하게 하려고 움켜쥐고 있는 것들 때문에 오히려 우리의 삶은 행복하지 못하고 진정한 자기를 발견하지 못한 채 떠돌고 있습니다. 우리가 붙잡고 있는 것들을 놓아버릴 때 내 속에 있는 하느님의 형상이 드러나기 시작하며, 막혔던 사랑의 샘이 솟아나며, 삶의 진정한 행복과 기쁨이 무엇인지를 알게 됩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우리는 죽음 앞에 바짝 다가갔을 때야 비로소 헛된 욕망 때문에 삶의 진정한 행복을 놓쳐버렸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성경은 여러 곳에서 누누이 우리가 붙잡고 있는 헛된 욕망과 집념을 버리라고 권고하고 있지만, 우리는 그 말씀을 비현실적인 이상으로 치부하여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하느님이 친히 이루시는 역사
오늘 읽어 드린 창세기 말씀은 아브라함이 백세에 얻은 아들 이삭을 번제(燔祭)로 드리라는 하느님의 명령을 받고 모리아 산으로 갔을 때 일어난 사건의 기록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의문을 갖습니다. 하느님은 왜 아브라함에게 약속의 아들인 이삭을 바치라고 하셨을까? 여러 가지로 생각할 수 있겠지만, 아마도 그것은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철저하게 하나님의 역사를 기다리게 하시기 위한 시험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삭이 아버지에게 번제 할 양이 어디 있느냐고 물었을 때 아브라함은 “내 아들아 번제 할 어린양은 하느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고 대답하였습니다. 하느님이 친히 준비하신다는 말이 이 이야기의 핵심이라고 하겠습니다. 나중에 아브라함이 그곳을 ‘여호와 이레’라고 이름을 지었습니다. 그것은 “하느님이 준비하신다”는 뜻입니다. 하느님이 아브라함에게 준비해 주신 것은 번제 할 어린양이었지만, 하느님은 ‘세상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으로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준비하셨다 이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따라서 ‘여호와 이레’는 만물의 구속이 준비된 땅이라 할 수 있습니다. 놀라운 하느님의 은총이 예비된 땅으로 아브라함을 부르셨고 우리를 또한 부르고 계십니다.
아브라함은 늦게까지 아들을 낳지 못하자 중간에 사라의 몸종인 하갈을 통해 이스마엘을 낳았던 일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하느님의 구원사를 아브라함 자신이 이루겠다는 헛된 욕망의 표현이었습니다. 이런 전력(前歷)을 가진 아브라함이 백세에 아들 이삭을 낳았습니다. 그는 이삭이야말로 약속의 아들이기에 그를 소중히 여겼을 것입니다. 혹시라도 그가 다치거나 중도에 병으로 죽게 되면 하느님의 계획이 수포로 돌아갈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으로 이삭에 집착(執着)하였을 것입니다. 하느님은 이런 아브라함의 집착을 깨트리시고자 그를 번제로 드리라고 하셨습니다. 결국 이 이야기의 요점은 구원의 역사는 인간의 어떤 계획이나 노력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 자신에 의해서 이루어진다는 점입니다. 아브라함은 여기서 새롭게 하느님을 만나게 되고, 또 이전의 자기와 다른 새로운 자신을 찾게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이 경험을 통해서 자기가 움켜쥐고 있던 모든 것을 놓으므로 이제는 하느님이 예비하신 땅 ‘여호와 이레’에서 살게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의 이야기는 사실상 여기에서 끝납니다. 그것은 그 후 그의 삶이 ‘여호와 이레’ 땅에서 행복했음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인간이 붙잡고 있는 것들
인간들은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은 이후 계속해서 창조주이신 하느님께 자신을 맡기는 대신에 자신들이 그 삶을 지탱하려 하며 풍요하게 하려고 애를 써 왔습니다. 재물과 권력과 명예를 얻으면 인간의 삶은 행복해질 것이라고 믿고, 그것을 얻으려고 열심히 달려왔습니다. 사실 이런 것들이 있으면 인간의 삶은 행복해지는 것처럼 보입니다. 여유로운 삶, 섬김을 받는 삶, 인기 있는 삶은 겉으로 보기에 행복해 보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얻기 위한 과정에서 많은 사람에게 고통을 주었고, 그것을 지키기 위해서 또한 많은 사람에게 고통을 안겨 줍니다. 뿐만 아니라 그것을 끝까지 지켰다 하더라도 결국 죽음 앞에서 그 모든 것을 다 내려놓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에 허무하게 죽어갈 수밖에 없습니다.
성경은 그런 모든 것을 얻었으나 결국 모든 것을 잃은 사람으로 솔로몬 왕을 예로 들고 있습니다. 그는 부와 명예와 지식과 권력을 모두 얻었으나 그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당하였고, 결국 그가 죽은 뒤에 나라는 둘로 나뉘어지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은 산상설교에서 솔로몬의 영광은 들의 꽃보다도 못한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허무를 노래한 전도서가 솔로몬이 죽기 직전에 쓴 지혜서인지도 모릅니다. 그가 죽음 앞에서 비로소 자기가 붙잡으려고 했던 모든 것이 헛되고 헛된 것임을 깨달았던 것이 아닐까요?
인간이 붙잡으려고 했던 것은 재물과 명예와 권력만이 아닙니다. 인간을 보다 가치 있는 존재로 되게 할 것으로 생각한 신앙, 철학, 이념, 지식 같은 것들도 인간이 붙잡고 놓지 않으려 했던 것들입니다. 나름대로 하느님을 잘 섬긴다고 만든 교리와 신학, 종교적 관습 같은 것에 오히려 얽매임으로 하느님의 뜻과는 반대로 행동했던 이스라엘의 역사를 성경에서 볼 수 있습니다.
욥기에 보면 욥이 까닭 없이 고난을 당하고 이를 위로하기 위해 친구들이 찾아오지만, 팽팽한 이념의 대립으로 위로는커녕 서로 장황한 논쟁만 하였을 뿐입니다. 친구들은 인과응보설(因果應報說)로 욥을 공격하였습니다. 네가 이렇게 고난 당하는 것은 죄가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욥은 자기의 의를 주장하면서 친구들을 논박(論駁)하였습니다. 그러나 결국 욥기는 양쪽 다 틀렸다는 사실을 밝히면서 하느님의 구원의 역사는 인간의 얄팍한 신학적 지식이나 교리로 규정할 수 없는 크고 광대한 역사임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선포된 하느님 나라
예수님께서 오셔서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시면서 영원한 생명의 세계를 우리 앞에 열어 주셨습니다. 그러면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고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고 하셨습니다. 우리 앞에 가려졌던 영원한 생명의 세계가 이제 그리스도를 통해서 분명하게 선포되고 그의 십자가를 통하여 그 길이 활짝 열렸습니다. 영원한 하느님의 나라를 알지 못하였을 때는 재물과 권력과 명예, 이념과 사상, 종교적 신념 등이 행복의 요소이며, 삶의 중요한 가치인 것처럼 착각을 하였지만, 이제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영원한 생명의 세계가 활짝 열린 지금에 와서는 그런 것들이 아무것도 아님을 분명하게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오늘 읽어 드린 본문에서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현대어 번역으로 인용하겠습니다.
그러나 한때 대단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던 이런 것들을 지금에 와서는 모조리 내던졌습니다. 그리스도만을 의지하고 그분에게만 소망을 두기 위해서입니다. 그렇습니다. 나의 주님 그리스도 예수를 알게 된 것이 너무도 존귀해서 이것과 비교하면 다른 것은 다 무가치하게 여겨질 뿐입니다. 나는 그리스도 외에는 다 쓰레기처럼 여기고 모두 내버렸습니다. 그리스도를 얻기 위해 그렇게 한 것입니다. 빌 3:7-8
바울은 그리스도를 알기 전에는 열성적인 바리새파 진짜 유대인임을 자랑스럽게 생각했던 사람입니다. 그것이 가장 중요한 삶의 가치라고 확신하였는데, 그리스도를 만난 이후 그런 것들은 정말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바울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영원한 하느님 나라를 발견하였습니다. 인간의 삶이 죽음에서 끝나지 않고 부활하여 영원한 생명으로 나아가게 됨을 깨달았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도 삼위일체 하느님의 신비로운 하나되심에 동참하여 하나되는 놀라운 미래를 내다보았던 것입니다. 하느님이 준비하여 주신 영생의 세계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놀라운 영광의 세계임을 미리 보았던 것입니다.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하느님 나라가 바로 ‘여호와 이레’의 땅임을 알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자기가 자랑스럽게 생각했던 과거의 모든 것을 쓰레기처럼 버렸습니다.
진정한 행복
이제는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 자신을 돌아볼 때입니다. 여러분이 붙들고 놓지 않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은 지금 하느님의 은총이 예비된 땅 ‘여호와 이레’에서 살고 계십니까? 날마다 행복하고 날마다 기쁘며, 누구나 사랑하고 싶고, 누구나 용서해주고 싶은 삶을 살고 계신가요? 아니면 여전히 무언가 이루어지지 않은 욕망 속에서 날마다 짜증을 내고 스트레스를 받으며 불평하면서 살고 계신가요? 정신 없이 바쁘게 살아가는 자기 자신을 한 번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무엇 때문에 정신 없이 바쁜가요? 돈을 벌기 위해섭니까? 무슨 명예를 얻기 위해서입니까? 그것을 얻었을 때 정말 행복을 느끼십니까?
여러분 교회 봉사도 적당히 하십시오. 이런 저런 일로 한 주일에 몇 번씩 교회당에 오느라 시간을 낭비하지 말고, 멋진 영화도 구경하고, 향기로운 커피 한 잔 마시면서 음악 감상도 하십시오. 여러분이 봉사한다고 해서 하느님 나라가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보다는 하느님께서 여러분에게 주신 삶의 본질을 찾는 것이 더 중요하고, 그 삶을 즐기는 것이 더욱 하느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이 됩니다. 하느님이 여러분을 위해 예비해 놓으신 사랑과 행복을 지금 여러분의 삶에서 찾아서 누리시기 바랍니다. 신앙이란 움켜쥐고 있는 것을 놓고, 하느님이 준비해 두신 삶의 기쁨들을 누리며, 잃어버린 사랑을 되찾아 영원한 생명을 준비하는 과정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책 <인생수업>에 성공한 한 사업가가 암을 치료한 후의 고백이 있는데 한 번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언젠가부터 목이 붓기 시작했어요. 아주 빠른 속도로 부어오르더군요. 난 곧바로 암 전문의를 찾아갔고 그 즉시 부어오른 부위를 제거했어요. 그리고 화학 치료를 받았죠. 난 부지런한 사업가에서 부지런한 환자로 변해갔습니다. 검사 결과를 꼼꼼히 확인하고, 약을 먹고, 의사의 진찰을 받았습니다. 병을 앓는다는 게 그렇게 큰일인줄 몰랐습니다.
화학 치료가 거의 끝나갈 무렵, 복직에 대해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고, 암 때문에 이제는 내 삶도 너무 심각해졌습니다. 모든 게 살아남기 위해 거쳐야 할 과정이었고, 어쨌든 내가 살아 있음을 하느님께 감s사 드렸습니다. 그리고 나니 궁금해지더군요. ‘왜? 무엇 때문에 내가 살아남았을까? 일을 더 많이 하려고? 더 생산적으로 살기 위해서?’
난 그때 비로소 깨달았습니다. 지금까지 내가 얼마나 공허한 삶을 살아왔는지. 내가 아는 모든 이들은 삶의 의미를 성공에 두었고, 난 성공이라는 이름의 벽을 구성하는 하나의 벽돌에 불과했습니다. 난 그런 삶으로는 다시 돌아가지 않기로 결심했습니다.
삶을 다시 설계하고, 친구들과 시간을 보내고, 즐거움을 되찾으리라 결심했어요. 공원에도 가고, 공연도 보러 다니고, 지나가는 사람들을 구경하기로 했어요. 마음의 문을 닫고 지내는 대신 가끔씩 처음 보는 사람들과 수다를 떨기도 하고요. 나는 삶에서 너무 많은 것을 잃고 있었어요. 지금은 그것들을 되찾을 시간입니다.”
저는 은퇴한 후 참으로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매일 산책할 수 있는 좋은 산이 가까이 있어서 행복합니다. 아침마다 차를 마시며 집사람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어서 행복합니다. 집에 와 있는 외손자와 놀아주고 그 아이의 성장하는 모습을 보는 것이 즐겁습니다. 외손자와 놀다 보면 저 자신이 완전히 어린아이가 된 느낌입니다. 하루 종일 지내도 핸드폰 한 번 울리지 않는 한가함이 행복합니다. 사람들이 나를 잊어버린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당연한 것으로 받아드리니까 서운한 마음 대신 평화가 내 마음에 깃들고 있습니다. 제가 이렇게 한가하게 지낸다고 해서 하느님 나라 사업에 차질이 생길까요? “너 이놈, 아직도 할 일이 많은데 빈둥빈둥 놀고만 있느냐?”고 하느님이 저를 책망 하실까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오히려 잘했다고 칭찬하실 것입니다. 제가 지금 은퇴하지 않고 있었다면 아마도 총회에서 이런저런 위원장이나 부장 더 나아가서 총회장도 해보겠다는 생각에 몹시 분주했을지 모릅니다. 그런 일 맡아서 했다고 해서 하느님이 더 많은 상급을 주실까요? 제가 일찍 은퇴해도 여전히 위원장, 부장 할 사람 많고, 총회장 할 사람이 줄을 섰습니다. 조금 일찍 은퇴하므로 그만큼 일찍 하느님이 예비하신 안식의 땅에 들어감으로 저는 더 큰 상급을 받고 있습니다. 지금 이 노년의 삶이야말로 진정한 나 자신을 발견하는 때이며, 영원한 삶의 의미를 점점 알아 가는 때이며, 하느님이 우리에게 주셨는데 정신 없이 뛰느라 누리지 못했던 사랑과 기쁨과 행복을 찾아 누릴 때입니다.
죽음을 생각하라
아직도 무엇인가 할 일이 많고, 갖고 싶은 것이 많으며, 그래서 매일 스트레스를 받으며, 근심 걱정이 떠나지 않는 분이 계시다면 한 번쯤 자기 죽음을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내가 오늘 병원에 갔다가 뜻밖에 암 말기 진단을 받았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럴 때 나는 무엇을 할 것인가? 지금 여기 계신 분들 가운데 이미 이런 경험을 하신 분들이 계십니다. 그 죽음 앞에서도 내가 할 일을 걱정하고 내가 이루지 못한 일에 대해 가슴 치며, 왜 내게 이런 불행이 닥쳐왔는지 원망만 하고 있을 것인가요?
어느 교회 노인여름성경학교에서 임종을 체험하는 프로그램을 하였습니다. 노인들에게 유서를 쓰게 하고 조용한 방에 관을 마련하여 그 안에 들어가 눕게 한 다음 가족들을 불러 임종예배를 드리게 하였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기분 나쁜 일이기에 원하는 사람만 그 프로그램에 참여하게 하였는데, 의외로 반응이 뜨거웠고 새롭게 자신들의 삶을 보게 되었다고들 합니다.
여러분도 유서도 쓰고 관속에 한 번씩 누워보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죽음이 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가까이 있음을 느끼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새로운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내가 무엇 때문에 이렇게 아등바등 싸우며 살고 있나? 내가 이렇게 놓지 않으려고 붙잡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 돌아보고 용기 있게 놓아버립시오. 그러면 의외로 편안해지고 기쁨이 찾아오며, 하느님이 정말로 나의 삶을 행복하게 만들어 놓으셨다는 사실을 발견하면서 진정한 감사를 하느님께 드릴 수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염려하지 않아도 지구는 잘 돌아가며, 해는 동쪽에서 잘 떠오릅니다. 쓸데없는 일에 목매지 말고 자유하십시오.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이 땅을 하느님이 구원하시고 온전케 하실 것입니다. 하느님께 맡기고 그를 찬양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과거 때문에 오늘을 불행하게 만들지 말고, 미래에 오늘의 행복을 미루지 마십시오.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이 붙잡고 있는 과거, 그리고 미래에 대한 기대와 염려를 모두 놓으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이 마련하신 ‘여호와 이레’ 땅에 있는 온갖 행복과 기쁨을 오늘 누리십시오. 그 땅에서 찬란하게 빛나고 있는 사랑의 햇빛 아래 우리의 무거운 이 땅의 짐들을 내려놓고, 마음껏 그 사랑을 호흡하고 여유롭게 그 햇빛 아래 빛나는 세계를 둘러보시기 바랍니다. <인생수업> 문장을 한 번 더 인용하면서 마치겠습니다.
"마지막으로 바다를 본 것이 언제였는가? 아침의 냄새를 맡아 본 것은 언제였는가? 아기의 머리를 만져 본 것은? 정말로 음식을 맛보고 즐긴 것은? 맨발로 풀밭을 걸어 본 것은? 파란 하늘을 본 것은 또 언제였는가? 많은 사람들이 바다 가까이 살지만 바다를 볼 시간이 없다. 죽음을 앞둔 사람들은 한 번만 더 별을 보고 싶다고, 바다를 보고 싶다고 말한다. 삶의 마지막 순간에 바다와 하늘과 별 또는 사랑하는 사람들을 한 번만 더 볼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하지 말라. 지금 그들을 보러 가라. 마지막 순간에 간절히 원하게 될 것, 그것을 지금 하라.”
여러분 안에 이미 ‘여호와 이레’라 이름 붙여진 땅이 있습니다. 거기에 하느님께서 여러분을 위해 하늘의 선물들을 준비해 놓으셨습니다. 이제 붙잡고 있는 욕망과 염려와 쓸데없는 이념과 편견들을 벗어버리고 눈을 떠서 이제까지 맛보지 못한 사랑과 행복을 누리시는 여러분의 생활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출처/유경재목사 설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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