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δεδομένα 18,185편 ◑/उपदेश सामग्री 16,731편

예수,사람 되심의 은혜 (빌립보서 2:6~8)

by 【고동엽】 2022. 8. 9.
전체 목록가기 예수님 목록 돌아가기
   

예수,사람 되심의 은혜  (빌립보서 2:6~8)


크리스마스는 하나님의 아들이 세상에 태어나심을 축하하는 날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세상에 태어나셨다는 말은 하나님 자신이 사람이 되셨다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이사야 9장 6절은 이미 이 사실을 선명하게 예언하고 있습니다. "이는 한 아이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또 이사야 7장 14절에는 좀더 구체적인 이야기가 나옵니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임마누엘은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의미로 하나님의 이름입니다. 이 예언을 성취하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나사렛에 살고 있는 마리아라는 처녀를 주목하셨습니다. 그녀는 이미 요셉이라는 청년과 약혼한 관계에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래 전부터 예언하셨던 하나님이 사람으로 태어나는 일을 위해 그녀를 택하시고 그 태를 사용하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성령으로 잉태된 예수 그리스도가 마리아를 통해서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셨다.'는 성육신과 '처녀의 몸에서 탄생하셨다.'는 처녀 탄생문제는 인간이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불가사의한 사건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놀라운 사건은 우리의 이성을 초월한 초월적인 신비에 해당됩니다. 따라서 많은 사람들이 이런 이유로 믿지 않습니다.

미국 TV 토크 쇼의 제왕이라고 불리는 래리 킹(Larry King)에게 누군가가 물었답니다. "당신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사람들과 다 인터뷰를 해왔는데, 만일 전 세계 역사를 통해서 딱 한 사람만 선택해서 인터뷰를 하라고 한다면 누구를 선택하겠습니까?" 그러자 래리 킹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이어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무엇을 묻고 싶으냐?"는 질문에, "정말로 처녀의 몸에서 나셨습니까? 이것을 묻고 싶습니다."라고 대답했다는 것입니다. 곧 자신도 안 믿는다는 말입니다. 믿을 수 없는 허황된 전설이나 우화에 불과하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성경을 통해 처녀가 성령으로 잉태했다는 사실을 확신합니다. 모든 생명과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처녀의 태를 이용하여 이 세상에 사람으로 오신다는 것은 그리 힘든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아무튼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셨습니다. 빌립보서 2장은 신학적인 심오한 표현을 빌려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6절) 여기에서 '그'는 사람이 되어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하나님의 본체'라는 말은 하나님과 동등한 존재라는 말입니다. 곧 하나님 자신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면 하나님 자신이라고 말할 때 사람과 어떤 차이가 있겠습니까? 구약성경에서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이름을 여호와라고 했습니다. 여호와란 스스로 있는 자를 의미합니다. 자존하는 존재를 말합니다. 이 말에는 세 가지 의미를 포함합니다. 즉 '스스로 존재하는 자', '스스로 만족하는 자', '영존하시는 자'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는 존재의 원인이 없습니다. 어떤 원인 때문에 존재하는 분이 아니라 스스로 존재합니다. 반면 사람은 어떤 원인이 있기 때문에 존재합니다.

따라서 하나님과 인간은 도무지 맞닿을 수 없는 극과 극입니다. 하나님은 자족하시는 분입니다. 심지어 우리가 드리는 예배도 하나님의 필요에 따라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예배를 받지 않아도 만족하시는 분입니다. 다만 우리 자신을 위해서 예배를 명하신 것입니다. 반대로 인간은 너무나 많은 것을 필요로 하는 존재입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영존하신 분입니다. 시작도, 끝도 없고 영원히 계십니다. 그래서 그분을 일컬어 알파와 오메가라고 합니다. 그러나 인간은 아침에 피었다가 저녁에 지는 들꽃처럼 잠깐 태어났다가 한 생을 마치는 존재입니다.

이렇게 스스로 있는 자로서 자존하시며, 자족하시며, 영존하시는 그 하나님이 사람이 되셨다는 것입니다. 이 사실은 우리 마음에 큰 감동을 줍니다. 스스로 사람이 되시기 위해 주전 4년 경 한 날을 선택해서 그분은 세상에 오셨고, 처녀의 몸을 빌려 탄생하셨습니다. 완전한 하나님이시면서, 완전한 사람으로 세상에 오셨습니다. 신성으로는 하나님과 동체요, 인성으로는 사람과 동체인 존재로 오셨습니다. 그렇다고 신성이 없어진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이시면서 동시에 사람으로 오셨습니다. 이분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더 놀라운 사실은 사람으로 오시되 종의 모습으로 오셨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7절). 자신에게 있는 영광을 다 포기하고 종의 모습을 입고 세상에 사람으로 오셨다는 것입니다. 천대 받기 쉬운 종의 모습으로, 사람들의 관심을 끌 수 없는 종의 모습으로 오셨다는 것입니다. 이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성경을 보면 종의 모습으로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셨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역사적인 사건입니다. 마태복음, 누가복음만 읽어봐도 알 수 있습니다. 종으로 오셨기에 악취가 진동하고, 양들의 배설물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마구간 구석의 차갑고 단단한 말구유를 만족스럽게 생각하시고 자기 몸을 누이셨습니다.

종의 모습으로 오셨기에 아무도 그분을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목자들이 오긴 했지만 스스로 온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천사들을 보내 그들로 말구유를 찾게 만들어서 온 사람들입니다. 얼마 후 박사들도 찾아왔지만 그들 역시 스스로가 걸어온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별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소식을 가르쳐주셨기에 찾아온 사람들입니다. 억지로 찾아온 소수의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예수님이 탄생하심을 기뻐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6개월 전 세례 요한이 태어났을 때는 온 동네 사람들이 기뻐하고 그의 소식을 듣는 사람마다 무언가를 기대하고 축하했지만, 하나님이 사람이 되어 종으로 오실 때는 그분을 영접하거나 기뻐하며 캐롤을 부르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스스로 존재하시는 하나님이 사람이 되시되 종의 모습으로 오셨다는 사실을 머리로 이해하려 들지 마십시오. 설득 당할 수 있는 설명을 요구하지 마십시오. 오직 믿음으로 받으십시오. 은혜로 받으십시오. 그러면 그 사실이 내 마음을 촉촉히 적시는 은혜가 됩니다. 그 사실을 곰곰이 묵상하면 그 말씀 한 마디 한 마디가 나를 울리고 감동시켜 가슴을 채우는 은혜가 됩니다.

그러면 믿으면 믿을수록 감격스럽고 가슴이 뜨거워지는 이 은혜 속에 담긴 몇 가지 사실을 살펴 보겠습니다.

첫째로 사람이 되신 예수를 보면 우리와 똑같은 감정을 가지신 하나님을 보게 됩니다. 저 하늘 높은 보좌에 계시는 하나님께 어떤 감정이 있다고는 쉽게 생각되지 않습니다. 설혹 어떤 감정이 있다고 해도 그 감정이 우리와 맞닿는 선이 없습니다. 그러나 베들레헴에 탄생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와 똑같은 감정을 가지고 찾아오신 하나님입니다.

프린스톤과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서 교수로 있던 유명한 신학자 워필드(B. B. Warfield)가 이 사실을 아주 강조한 바 있습니다. "사람이 되신 예수님에게 우리가 찾을 수 있는 독특성 하나는 감정이다." 사람이 되어 세상에 오신 예수님은 자기를 따르고 추종하는 수많은 군중들을 보면서 연민의 정을 이기지 못했습니다. 목자 잃은 양같이 방황하는 그들의 모습을 보면서 안타깝고 불쌍한 마음을 가누지 못했습니다. 오늘 우리를 향해서도 예수님은 불쌍히 여기시는 감정을 갖고 계십니다.

주님은 사랑하는 나사로가 죽자 가족들이 울며 통곡하는 것을 보시고는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우리가 슬퍼하시는 하나님을 상상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이 아니면 슬퍼하는 하나님의 이미지를 우리 마음에 떠올릴 수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내가 잘못했을 때 슬퍼하십니다. 내가 고통에 빠져 통곡하고 있을 때 슬퍼하십니다.

수가성의 여인이 예수님을 믿고 나서 너무나 기쁜 나머지 물동이를 던져버리고 마을로 달려갈 때, 그를 지켜보던 예수님의 가슴에 기쁨이 넘쳤습니다. 오늘도 예배 드리는 우리 모두를 보시고 주님은 기뻐하실 것입니다. 우리가 두손들고 주님 앞에 나오는 모습을 볼 때 주님은 기뻐하십니다.

반면에 양심이 마비되어 숱한 죄를 범하면서도 스스로 의롭다고 괴변을 늘어놓는 바리새인들을 보실 때 주님은 분노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께서는 희로애락의 감정을 가지신 하나님이셨습니다.

감정이 통한다는 것은 그만큼 우리가 가까워질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저 사람의 감정과 내 감정은 통하는 데가 있어." 그러면 벌써 뭔가 서로 가까워지고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나처럼 슬퍼하기도 하시고 기뻐하기도 하시고, 또 나를 불쌍히 여기기도 하시는 그런 감정을 가지신 하나님을 마음에 모시고 묵상할 수 있는 자체가 얼마나 큰 은혜인지 모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시지 않았다면 감정을 가지신 하나님이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입니다. '내 감정이 어떠하면 예수님의 감정도 어떠하겠다. 예수님이 저렇게 슬퍼하시니 내 마음이 슬프지.' 이렇게 서로 통하는 데가 있는 하나님을 우리가 모시게 된 것입니다.

둘째로 사람이 되신 예수를 보면 우리와 똑같이 시험과 고통을 당하신 하나님을 보게 됩니다. 예수님은 너무나 가난한 집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러면서도 식구는 많은, 마치 흥부 집이나 다름 없는 집에서 태어났습니다. 끼니마다 걱정을 덜어놓을 수 없는 각박한 상황에서 청소년기를 보내셨습니다. 나중에 복음을 들고 일하실 때에도 얼마나 굶으셨는지 모릅니다. 가난을 아시는 하나님, 과연 상상이나 할 수 있습니까? 나처럼 가난해지신 하나님을 상상할 수 있습니까? 예수님은 천대와 멸시를 당하셨습니다. 잘못한 것이 하나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천대 받을 이유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로부터 고의적인 천대와 멸시를 받았습니다.

이런 고통을 아시는 하나님이 바로 예수님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고통을 당하거나 가난할 때 그분이 가까이 계심을 느끼는 것입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인간이면 누구나 당하는 가난의 고통, 배신의 고통, 멸시의 고통, 죽음의 모르신다면 아마 우리와는 상당한 거리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친히 사람이 되셔서 그 모든 고통을 다 맛보셨습니다. 그러므로 고통 당하는 나를 이해하십니다. 내가 슬퍼할 때 왜 슬퍼하시는지를 아십니다. 내가 눈물을 흘리며 그분을 찾을 때 왜 자신을 찾는지 알고 계십니다. 내가 외로워서, 내가 버림받아서, 내가 배신 당해서 어찌할 바를 모를 때 그분은 곁에 계십니다.

이런 예수님이기 때문에 우리는 어떤 고통이나 슬픔, 또는 시험을 당할 때, 자기도 모르게 예수님께로 달려가고 싶은 충동을 느낍니다. 무엇 때문에 그분에게 달려가려고 합니까? 왜 그분의 이름을 부르려고 합니까? 왜 그분의 옷자락을 잡고 늘어지려고 합니까? 내가 당하는 고통을 굳이 말하지 않더라도 그분은 다 아신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분을 찾는 것입니다. 고통을 아시는 하나님은 사람이 되신 예수님입니다.

몇 일전에 교회당으로 들어왔습니다. 아무도 없는 줄로 알았는데 2층에 어떤 성도가 혼자 앉아서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그분에게 방해가 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살금살금 걸어 가서는 아래에서 볼 일을 보고 나가려던 참이었습니다. 마침 저를 봤는지 뒤에서 저를 부르면서 복도로 나왔습니다. 한 40대 초반의 젊은 성도였는데, 우리 교회 교인은 아니었습니다. 그분은 "목사님께 꼭 좀 의논하고 싶어서요." 하고 상담을 요청해 왔습니다. "목사님, 제 남편은 대학교 교수입니다. 아이는 둘이 있고요. 그런데 남편이 어떤 여자에게 눈이 팔려서 이혼하자고 합니다. 교수이기에 논리적으로 제가 빠져나갈 수 없는 많은 구실들을 만들어 이혼 서류를 꾸미고는 거기에 도장을 찍으라고 해요. 목사님, 저는 이혼하고 싶은 생각이 하나도 없어요. 제 남편은 믿음이 없어요. 하지만 전 예수 믿는 사람인데, 이혼할 수 없잖아요. 목사님, 어떻게 하면 좋겠어요? 제가 어떻게 해야 될까요?"

이런 처지에 있는 사람에게 목사가 무슨 대답을 할 수 있습니까? 남의 집안 일에, 남의 부부의 일에 제가 어떻게 개입할 수 있습니까? "이혼해도 괜찮소. 제가 대신 당신 남편 노릇 해줄 테니 이혼하시오."라고 말하겠습니까? 그럴 수도 없는 일입니다. 이 말 외에는 달리 할 말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을 찾으세요. 예수님은 성도님의 모든 형편 다 아십니다. 예수님을 찾아 그분께 간절히 기도하세요. 다른 대안이 없어요. 그분께 매달려 보세요. 때가 되면 해결해 주실 것입니다. 한번 이런 사건이 일어나면 하루 아침에 문제 해결이 안됩니다. 앞으로 몇 년 동안 십자가를 지고 고통 해야 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낙심하지 마세요. 예수님만 열심히 찾으세요. 그분은 성도님이 왜 눈물을 흘리는지 다 알고 계십니다. 그분께 기도하세요." 사실 이것만이 가장 완전한 대답입니다. 감사하게도 그 성도는 "목사님, 알겠습니다." 하고 떠났습니다.

고통을 당해보신 하나님이 아니라면 우리가 겪는 고통을 가지고 그분을 만나려는 마음이 생길까요? 기쁨으로 찬양에 마음 깊이 와 닿는 찬송 가사가 하나 있습니다. "주님과 같이 내 마음 만지는 분은 없네." 여기에서 마음을 만진다는 것은 나의 고통하는 마음을 아시고, 이해하시고, 받아주신다는 말입니다. 예수님만이 내 마음을 만질 수 있습니다. 친히 고통을 당해보셨기 때문입니다. "고통 받는 자녀 부르시니 주밖에 없네." 고통 당하는 모든 사람들을 받으시고 품으십니다. 그분이 바로 고통 하신, 시험 받으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셋째로 사람이 되신 예수를 보면, 우리의 인간됨의 소중함을 깨우쳐 주는 하나님을 보게 됩니다. 중세기의 위대한 신학자 안셀름(Anselm)은 이런 지적을 했습니다. "하나님이 사람이 되신 것은 인간이 얼마나 가치 있는 존재인가를 입증해주기 위해서 이다." 하나님께서 짐승이나 천사가 아닌 사람이 되신 이유는, 인간이 그만큼 하나님 앞에 소중하고 존귀하다는 사실을 입증해 보이기 위해서 입니다.

저는 이러한 견해에 동감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손에서 만들어질 때 나름대로 퍽 괜찮은 존재였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사람이면서 하나님 같고, 하나님이면서 사람 같았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죄를 범하고 타락하자마자 그 하나님의 형상이 형편없이 쇠잔해졌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보다 마귀를 닮은 사람처럼, 어떤 면에서는 짐승을 닮은 존재처럼 타락하고 말았습니다.

우리가 사람을 보면 어떤 때는 '사람이 왜 저럴까?' 하고 나름대로 고민합니다. 사실 짐승과 다른 데가 없습니다. 날마다 먹고 마시고 배설하는 것이나 암수 짝을 지어서 후손을 남기는 것도 똑같습니다. 얄팍한 영성과 도덕성을 빼버리면 짐승과 다를 게 없습니다. 인생을 살다가 늙고 병들고 죽는, 모든 짐승이 가는 길을 그대로 가고 있습니다. 더욱이 인간만큼 잔인하고 악한 짐승도 없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잔인하고 악한 것이 인간입니다.

어쩌다가 한번 가난을 십자가로 지면 평생 그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온갖 고생을 다하다가 인생을 마치는 사람들과, 지도자와 나라를 잘못 만나 평생 노예처럼 살다가 한 생을 마치는 무고한 백성들을 볼 때면 스스로 회의에 빠지게 됩니다. '도대체 인간에게 무슨 가치가 있는가? 무슨 존엄성이 있는가?' 하고 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셨다는 사실 때문에 우리는 마음 속에 있는 회의를 몰아낼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있는 비관론을 씻어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사람을 보는 눈이 달라집니다. '하나님이 사람이 되셨다. 얼마나 사람이 존중한 존재였으면 하나님이 사람이 되셨을까?' 바로 이것을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짐승과 별 다를 것이 없어 보이는 인간을 예수님처럼 고귀한 존재로 보십니다. 비록 악하고 더럽고 천하다고 할지라도 예수님처럼 특별한 존재로 보십니다. 그래서 인간됨의 중요성과 가치를 다시 한번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 한창 인기 리에 있는 미국의 탁월한 기독교 저자 필립 얀시(Philip Yancey)는「큰 천사와 작은 천사의 대화」라는 우화를 출간했습니다. 그 책을 보면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가 있는데 일부를 소개합니다. "우리의 영광스럽고 존귀하시며 위대하신 왕, 그분께서 다섯 번째로 작은 저 행성 지구로 내려가셨다는 말입니까? 도대체 뭘 하시기 위해서 그리로 가셨단 말이죠? 정말 그분께서 저기 떠있는 지구의 하찮은 존재처럼 엉금엉금 기어 다니는 피조물이 되셨다는 말인가요?"라며 도무지 납득할 수 없다는 눈초리로 작은 천사가 큰 천사에게 물었다고 합니다. 그 말을 들은 큰 천사가 대답했습니다. "그래. 맞았어. 그분은 그리로 가셨어. 그런데 그분이라면 네가 말하는 식으로는 말씀하지 않으실 거야. 뭐? 지구 상에서 엉금엉금 붙어 기어 다니는 피조물이라고? 주님은 그렇게 멸시하는 투로 말하시지 않을 거야. 그러나 주님은 그리로 가셨어. 왜냐하면 우리가 이해할 수는 없지만, 그분은 저 지구의 그 엉금엉금 기어 다니는 피조물을 무척 사랑하신다네. 그리고 그 사람들을 자기와 똑같이 닮은 존귀한 존재로 높여 주려고 하는 큰 목적을 가지고 그리로 내려가셨다네." 작은 천사는 그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우두커니 큰 천사를 보고만 있었다고 합니다.

엉금엉금 기어 다니는 하찮은 짐승과 같은 인간을 하나님께서 자기처럼 높은 존재로, 존귀한 존재로 받들어 세우기 위해 사람이 되어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되신 예수님을 볼 때마다 우리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보는 눈이 달라집니다. 못생겨도 존귀한 존재입니다. 가난해도 존귀한 존재입니다. 죄를 범했어도 존귀한 존재입니다. 실수해서 사람대접을 못 받는 존재라도 그는 하나님 앞에 귀중한 존재라는 사실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사람이 되어 오셨기 때문입니다. 얼마나 큰 은혜인지 모릅니다.

네 번째로 사람이 되신 예수를 보면, 허물과 죄로 죽은 우리를 살리시는 하나님을 보게 됩니다. 우리 모두는 허물과 죄로 영원히 죽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소망이 없었습니다. 우리를 살리려면, 우리를 구원하려면 누군가 죄 없는 분이 오셔서 우리 대신 피를 흘려주셔야 했습니다.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히9:22) 하나님께서 만들어 놓으신 영원한 영적 원리입니다. 피 흘림이 없이는 죄 사함이 없습니다. 그것도 의인의 피어야 합니다. 누가 우리를 대신하여 피를 흘려준 의인이 있습니까? 피를 흘리려면 하나님께는 불가능합니다. 그분께는 피도 육신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의인으로서 피를 흘려주려면 몸을 가진 하나님이어야 합니다. 누가 몸을 가진 하나님이십니까? 어디에 가야 그런 분을 찾을 수 있습니까? 설혹 찾았다고 할지라도 찾아가서 얼만큼 손을 비벼야 그 사람이 나를 대신해서 죽어줄 수 있을까요? 한 마디로 불가능한 이야기입니다. 우리로서는 해결 받을 수 없는 난제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예수님께서 스스로 자원해서, "내가 가마. 내가 사람이 되마. 내가 피를 흘리마. 내가 죽어주마. 내가 너희를 살려주마." 하시고는 이 세상으로 오신 것입니다.

빌립보 2장 8절을 보십시오.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의 죽으심이라.' 우리를 위해 스스로 피를 흘리시려고 사람이 되셨고, 피를 흘리는 의인이 되시기 위해서 하나님이시면서 사람이 되셨습니다. 이분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죽기까지 복종하시고, 우리를 허물과 죄에서 건지시기 위해 사람이 되셨습니다.

그러므로 성탄절, 다시 말하면 성 베들레헴의 요람이 우리에게 그토록 중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베들레헴의 예수 탄생은 하나님의 아들을 갈보리의 십자가로 이끌어가는 길목에 놓여있기 때문입니다. 베들레헴은 십자가로 가는 길목에 놓여있습니다. 베들레헴의 말구유는 십자가로 통하는 길목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베들레헴의 말구유, 예수님의 탄생을 볼 때마다 우리는 그 배경에 십자가가 있음을 알게 됩니다. 십자가를 둔 베들레헴의 탄생이 진정한 복음이요, 은혜이지 십자가를 모르는 크리스마스는 복음도, 은혜도 아닙니다. 예수님은 죄와 허물로 죽은 우리를 살리기 위해 우리 대신 피를 흘리시고 죽기 위하여 사람이 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만난 죄인들은 다 살아났습니다. 간음 현장에서 잡혀 초라하기 짝이 없는 한 여자가 사람이 되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녀는 말도 못하고 부들부들 떨고 서있습니다.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고개를 숙인 채 굳은 몸으로 서있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물으셨습니다. '너를 정죄하고 있는 자가 어디를 갔느냐?" "예, 아무도 없습니다. 다 가고 말았습니다." 사람이 되신 예수님이 말씀합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라. 내가 너를 죄 있다고 말하지 아니하노라. 내가 너를 용서하노라. 다시는 가서 같은 죄를 범하지 말라." 왜 그렇게 말씀하실 수 있습니까? 그 여인을 위해 자신이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스터드(C. T. Studd)라는 위대한 선교사가 아프리카에서 선교할 때 원주민들이 나와서 죄를 고백하는 대부흥이 일어났었습니다. "나는 압니다. 내가 세 살 때 우리 아버지가 사람을 죽인 것을 압니다. 사람을 죽였는데, 그가 누구냐고요? 우리 형님이었어요. 그 형님을 아버지가 죽이고는 그 고기를 아버지와 내가 같이 먹었어요." 바로 이런 식인종들도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것입니다. 자기를 위해 피 흘려주시고 죽으신 예수님을 만난 것입니다. 그러자 그 예수님이 자기를 용서해주셨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는 환희와 기쁨에 젖어 하나님을 찬송하는 대부흥이 일어났습니다. 사람이 되신 예수님, 그분은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입니다. 그리하여 죄와 허물로 죽은 우리를 살리셨습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예수님을 볼 때마다 우리는 우리와 똑같은 감정을 가지신 하나님을 봅니다. 예수님을 볼 때마다 우리와 똑같은 시험과 고통을 당하신 하나님을 봅니다. 예수님을 볼 때마다 우리 인간됨의 존귀함을 가르쳐주신 하나님을 봅니다. 예수님을 볼 때마다 허물과 죄로 죽은 우리를 살리기 위해 피 흘려 주신 하나님을 봅니다. 이 하나님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러므로 그분을 내 마음에 모시고 생각할 때마다 그분은 내게 은혜 그 자체가 되는 것입니다. 생각하면 할수록 감사하고, 믿으면 믿을수록 가슴이 벅차 오르고, 그 이름을 부르면 부를수록 나의 전 인격이 가만있지 못하고 흥분하는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그분을 묵상하는 크리스마스가 됩시다. 그분에게 찬양을 돌리는 크리스마스가 됩시다. 그분 앞에 무릎을 꿇고, 그 놀라운 은혜 앞에 감사하는 성탄이 됩시다.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가 여러분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다같이 기도합시다.

"스스로 계시면서 유한한 사람이 되어 세상에 오시되 종으로 오신 예수님, 감사합니다. 오늘 이 자리에 나와서 하나님 앞에 예배하는 거룩한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을 성령께서 감동하셔서, 예수님을 모르는 세상 사람들이 즐기는 식으로 성탄을 맞이하고 보내지 않도록 해 주시옵소서. 사람이 되어 우리를 찾아오신 예수님을 마음에 모시고, 그분 앞에 무릎을 꿇고 감격하며 경배하고 찬양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되게 해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성탄이 주는 은혜 때문에 우리 영혼이 소생하게 하시고, 우리 심령이 기뻐 뛰게 하시고, 우리 영혼의 모든 질병들이 날라가게 하시고, 우리의 모든 고통을 통해서 주님의 놀라운 위로를 받는 귀한 성탄이 되도록 복을 더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출처/옥한흠 목사 설교 중에서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