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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의 길 (1) : 요단강 세례 (마3:13~17)

by 【고동엽】 2022. 8.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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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의 길 (1) : 요단강 세례  (마3:13~17)

  2007년이 시작된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2월 마지막 주일입니다. 이제 교회 절기 상 ‘사순절’에 접어들었습니다. 사순절(四旬節 Lent)은 부활절 직전 주일을 제외한 40일의 기간을 가리킵니다. 매년 부활절과 사순절 날짜는 달라집니다. 아마 여러분 중에는 왜 그런지 궁금해 하는 분들이 계실 겁니다. 그 이유는 교회 역사 상 처음 부활절 날짜를 결정할 때 만월을 중심으로 정했기 때문입니다. 부활절(復活節 Easter)은 춘분 지나고 만월(滿月) 후 첫번째 주일입니다. 그래서 금년은 4월 8일이 됩니다. 역산해 보면 금년 사순절은 2월 21일~4월 7일이 됩니다. 특히 사순절이 시작되는 수요일을 가리켜 ‘재의 수요일’(Ash Wednesday)이라 부르는데, 지난 수요일(2월 21일)이었죠. ‘재’는 회개를 상징합니다. 사순절 기간에는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을 묵상하면서 우리의 죄를 회개하고 경건한 시간을 보내게 되는데, 그런 점에서 ‘재의 수요일’이라 부르는 것입니다.
  예수님 생애의 하이라이트는 아무래도 십자가 죽음과 부활일 겁니다. 그렇게 볼 때 1년 중 가장 중요한 절기는 아무래도 사순절과 부활절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우리는 사순절 기간 동안 예수님의 십자가에 관련된 말씀을 많이 읽고 묵상해야 하겠습니다. 그런 취지에서 오늘부터 부활 절 전까지 6주 동안 ‘십자가의 길’이란 큰 주제 하에 말씀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지만 이 세상에 인간으로 오셨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지상 생애는 그 전체가 ‘십자가의 길’입니다.
베들레헴 말구유에 오신 그때부터 골고다 언덕 십자가에 달릴 때까지 전부가 ‘십자가의 길’인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생애 중 십자가와 관련된 중요한 몇 가지 사건과 말씀을 뽑아서 소개해 드립니다. 오늘은 그 첫 번째 순서로 ‘예수님의 요단강 세례 사건’을 함께 살펴보려고 합니다. 아무쪼록 이 말씀을 통해 예수님을 더욱 깊이 만나는 기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1] 예수님의 요단강 세례 : 요한의 만류와 예수님의 강권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지만 인간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런데 30세에 이르기까지는 한두 가지를 제외하고는 성경에 특별한 기록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 기간을 가리켜 ‘예수님의 사생애’(사적인 생애 Private Life)라고 부릅니다.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의 생애 기록이 30세 이후 십자가에 달리신 33세에 이리는 기간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이 기간 동안 예수님은 구세주로서 공식적인 생애를 사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 기간을 가리켜 ‘예수님의 공생애’(공적인 생애 Public Life)라고 부릅니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예수님의 공생애가 언제부터 시작될까요? 예수님의 ‘요단강 세례’입니다. 예수님이 고향 갈릴리에서 멀리 요단강으로 오셔서 세례를 받으신 사건입니다. 그때는 마침 선지자 요한이 하나님의 계시를 받고 요단강에서 백성들에게 세례를 베풀고 있던 때였습니다. (참고로 세례를 베푼 선지자 요한을 가리켜 ‘사도 요한’과 구별하는 의미로 ‘세례 요한’이라 부릅니다.)

  세례 요한이 한참 세례를 베풀고 있는데 예수님이 그곳에 나타나셨습니다. 그 위엄 앞에 세례 요한은 직감적으로 예사로운 분이 아님을 알았습니다. 고수는 고수를 알아봅니다. 하나님의 선지자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이미 알아본 겁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처음부터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확신했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세례 요한 앞에서 예수님은 대뜸 세례를 받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세례 요한의 입장에서는 곤혹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세례는 죄인이 회개하고 받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기보다 훨씬 거룩해 보이는 분에게 세례를 베푼다는 게 도무지 용납되지 않았던 겁니다. 14절 보면 요한이 난처해하는 모습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14절. “요한이 말려 가로되 내가 당신에게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당신이 내게로 오시나이까” 여기서 ‘말리다’라는 말은 아주 강하게 만류한다는 뜻입니다. 또 이 단어가 문법적으로 미완료시제로 되어 있는데, 여러 번 계속해서 만류했음을 나타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한 발자국도 물러서지 않습니다. 오히려 요한에게 세례를 베풀 것을 강권합니다. 결국 요한은 예수님에게 세례를 베풀게 됩니다. 15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 하신대 이에 요한이 허락하는지라”
  여러분, 한번 잘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물론 세례 요한도 백성들도 아직 예수님이 누구신지 확실히 알지 못하지만 어쨌든 그분은 하나님의 아들이신데 죄인처럼 자진해서 세례를 받는다는 게 너무 이상하지 않습니까? 어떻게 보면 우스꽝스럽게 여겨질 정도입니다. 그것도 요한에게 강권하면서 받으니 말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그만큼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려고 하신 데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을 살펴보는 게 중요합니다.    
[2]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신 의미 : 메시야 대관식
  먼저 예수님이 세례 받으신 장면을 본문을 읽으면서 한번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어떻습니까? 예수님의 행색은 아마 누추한 모습이었을 겁니다. 예수님은 당시 외모로 볼 때 영락없는 평민의 모습입니다. 그것도 먼 길을 걸어오셨을 테니까 차림새가 보잘 것 없었을 겁니다. 하지만 요한이 감히 세례를 베푸는 것을 주저했을 정도로 예수님에게서 풍기는 위엄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비록 요단강 물 속으로 내려가서 세례를 받으셨지만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는 등 장엄한 모습이었습니다. 그래서 여러 신학자들이 이 사건을 가리켜 예수님이 만왕의 왕으로, 메시야로 등장하는 ‘대관식’(戴冠式)이라고 표현합니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예수님의 요단강 세례는 어떤 의미를 가질까요? 세 가지로 정리해 봅니다.  
  ① 메시야 신분의 공인 :
16절~17절 보면 예수님의 세례 장면이 잘 묘사되어 있습니다.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하늘로서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
  먼저 메시야라는 말에 관해 설명 드리죠. ‘메시야’는 히브리어로 ‘기름부음을 받은 자’ ‘구세주’ 라는 뜻입니다. 헬라어로는 ‘그리스도’입니다. 그러니까 메시야, 그리스도는 같은 말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그런데 지금 아무도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메시야라는 사실을 모릅니다. 요한도 긴가민가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세례 받으실 때 분명하게 메시야라는 증표(Signs)가 나타난 겁니다. 세 가지인데, 하늘이 열리고 성령이 비둘기처럼 임하고 하나님의 음성의 들린 겁니다. 마치 왕이 즉위할 때 왕관을 씌우고, 축포를 쏘고, 빵파레를 울리듯 하나님 아버지께서 증표들을 보여주신 겁니다.
  이런 장엄한 장면을 보고 요한이 예수님의 신분에 대해 확신하게 됩니다. 그리고 백성들에게 담대히 증거합니다. 그런 경위를 잘 설명해주는 구절이 있습니다. 요1:32~34입니다.  
요1:32~34 “요한이 또 증거하여 가로되 내가 보매 성령이 비둘기같이 하늘로서 내려와서 그의 위에 머물렀더라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나를 보내어 물로 세례를 주라 하신 그이(=하나님)가 나에게 말씀하시되 성령이 내려서 누구 위에든지 머무는 것을 보거든 그가 곧 성령으로 세례를 주는 이(=하나님의 아들 메시야)인 줄 알라 하셨기에 내가 보고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하였노라 하니라”
  그러니까 예수님이 굳이 세례를 받으시려고 한 이유가 무엇인지 아시겠죠? 세례 요한이 예수님의 범상치 않은 분으로 예감했지만 그래도 하나님의 아들인 것으로 100% 확신하지는 못했는데, 예수님이 세례의 과정을 통해 당신의 신분을 확신시켜 주신 것입니다.  
  요즘 TV 방송사마다 중국의 동북공정에 대응하는 취지로 고구려 시대의 사극을 방영하고 있는데, 많은 분들이 「주몽」을 봅니다. 거기 보니까 고주몽의 아들이 당당하게 찾아가서 자기가 아들이라고 말합니다. 무엇으로 확인합니까? 주위 사람들도 어떻게 그걸 믿을 수 있었습니까? 증표 때문입니다. ‘부러진 칼’이 증표였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세례 요한이 이런 증표를 분명히 보고 들었기에 아무런 의심 없이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메시야, 구세주로 증거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게 은혜입니다. 하나님은, 그리고 예수님은 우리에게 무턱대고 믿으라고 말씀하지 않습니다. 차근차근 그리고 분명하게 증거를 보여주십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신 것, 그리고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을 보여줍니다. 그러니까 세례 요한이 순교하면서까지 예수님을 증거한 겁니다. 교회 역사 속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의 제자, 사도들이 사도 요한을 제외하고 다 순교했습니다. 사도 요한도 순교한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로마 황제 도미티아누스가 기름 가마에 튀겨서 죽이려고 했지만 죽지 않으니까 질겁하고 밧모섬에 귀양을 보냈던 겁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는 이 사건을 통해 당신이 죄인의 모습으로 낮아지면서까지 요한에게, 우리에게 하나님의 아들 메시야이신 증거를 보여주신 예수님의 배려하시는 마음을  헤아려 보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분 앞에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이렇게 고백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② 대속주의 사역 개시 :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신 것은 죄인이 모습이 되신 겁니다. 그렇게 하신 이유 중 아주 중요한 것이 바로 대속의 원리입니다. 예수님이 죄인인 인간들의 대표가 되신 겁니다. 말하자면 십자가에서 대속의 제물이 되기에 앞서 인간의 죄를 짊어지신 것을 나타냅니다.  
  이런 사실을 그림으로 보여주는 게 구약 성경의 속죄제사입니다. 구약의 속죄제(贖罪祭)는 대표적으로 레위기 4장, 16장 등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죄를 지은 인간이 속죄제를 드릴 때 양, 염소, 송아지 등으로 제물을 바치는데, 그 절차가 의미심장합니다. 먼저 인간이 자기 죄를 고하면 제물의 머리 위에 안수합니다. 그것은 인간의 죄가 제물에게로 전가(轉嫁)됨을 의미합니다. 말하자면 짐승제물이 인간의 죄를 대신 짊어지는 겁니다. 그리고 난 후 그 짐승은 피를 흘리고 죽게 됩니다. 곧 ‘대속(代贖)의 죽음’입니다. 그때 짐승은 거룩하고 흠이 없는 것을 고르게 되는데, 그 이유는 죄를 대신하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은 죄가 없어야 함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죄를 대신 짊어지고 자신의 ‘흠 없는 의’를 안수하는 인간에게 전가시켜 줍니다. 물론 그 짐승 자신의 의가 아니라 장차 오실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상징하는 겁니다. 이것을 가리켜 ‘이중전가’(二重轉嫁)라고 부릅니다. 이중전가는 맞교환(exchange), 바꾸기입니다. 그러니까 이중전가는 ‘인간의 죄’와 ‘예수님의 의’를 맞교환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죄가 없으신 거룩하고 의로운 분입니다. 그런데 그분이 인간의 죄를 다 짊어지신 겁니다. 세례 받으신 게 바로 그런 의미입니다. 그래서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가리켜 무라고 증거합니까? 요1:29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가로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고후5:21에도 이런 사실이 잘 설명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렇게 인간의 죄를 대신 짊어지신 예수님이 나중에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신 겁니다. 그럼으로써 인간의 죄값을 다 치르고, 인간은 믿음으로 예수님의 의를 받아들이게 됩니다. 이것을 가리켜 ‘이신칭의’(以信稱義 Justification by Faith)라 부릅니다. 롬3:20 이하를 보면 이런 원리가 잘 설명되어 있습니다. 롬3:20~24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救贖)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칭의 稱義)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이것은 마치 옷을 바꿔 입는 것과 같은 원리입니다. 신사와 거지가 있다고 가정해 보십시오. 신사와 거지가 옷을 바꿔 입는 겁니다. 거지는 누더기 옷을 벗어서 신사에게 주고, 신사복을 입는 겁니다. 마찬가지로 인간이 ‘죄의 옷’을 벗어서 예수님에게 넘겨드리고, 예수님의 ‘의의 옷’을 입는 겁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대속해 주셨음을 믿고 예수님의 의의 옷을 입은 성도로서 구원을 확신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자녀 되었으니 영생합니다. 이 세상 살 동안 하나님이 보호하시고 축복해 주십니다. 영원한 천국이 우리가 들어갈 본향입니다. 이런 구원의 확신을 갖고 담대하게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③ 그리스도인 삶의 모델 제시 :
  예수님은 또한 믿는 성도들이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모델을 보여주신 겁니다. 하나님의 믿는 자라면 당연히 이렇게 살아야 한다는 겁니다. 그것은 ‘겸손’과 ‘순종’의 모습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하나님 자신입니다. 창조주이십니다. 만왕의 왕이십니다. 주님이십니다. 그런데 요단강에 내려가시고, 세례 요한 앞에 고개 숙여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그만큼 자신을 낮추신 겁니다. 겸손이죠. 그리고 그렇게 하신 것은 다름 아니라 하나님의 아버지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더 나아가 죽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일거수일투족 모든 게 하나님 아버지의 뜻대로 순종한 삶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이런 겸손과 순종의 모습을 바울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빌2:5~8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예수님은 본래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 자신이지만 인간의 낮은 몸으로 오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달려 죽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 부활하도록 하셨고,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로 온 세상에 나타나게 해 주셨습니다.
  여러분, 이것은 너무 중요한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분이 그토록 낮아지시고, 아버지의 말씀에 순종하셨다면 우리는 두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분은 높으신 분이 낮아지신 겁니다. 그런데 사실 우리는 본래부터 낮은 자입니다. 그런데 예수 믿고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의 백성이란 신분을 취득함으로 존귀한 자가 된 겁니다.
  그러나 우리는 개구리 올챙이 시절 모르면 안 되는 것처럼 우리의 본래 모습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 우리는 본래 흙으로 지어진 미천한 존재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은 창주조이십니다. 그리고 멸망할 수밖에 없는 죄인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분 앞에 늘 겸손히 엎드려야합니다. 그게 성도의 당연한 자세입니다.  
  겸손이란 단어가 아주 흥미롭습니다. 영어로 Humility인데, 이 단어는 라틴어 Humus(땅, 흙), Humilis(땅바닥에 엎드린) 등에서 유래합니다. 이 말처럼 인간은 흙입니다. 그 위치는 땅바닥입니다. 그 사실을 한시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 믿음으로 하나님의 존귀한 백성이 되었다 하더라도 이 사실을 잊으면 안 됩니다.
  예수님이 겸손히 순종했을 때 하나님의 아들 메시야로서 십자가 대속의 위업을 이루시고 부활하신 것처럼, 만왕의 왕으로 나타나신 것처럼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겸손한 자세로 순종할 때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납니다.  
  흔히 우리가 잘 순종하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대로 뜻대로 순종하면 위험하다는 겁니다. 손해 본다는 겁니다. 자존심이 상한다는 겁니다. 마음속으로 계산해 보면서 피해의식을 느끼는 겁니다. 그러나 그것은 기우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순종하면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가 나타납니다. 이것은 마치 자동문의 원리와 같습니다. 멀리 서서 머뭇거릴 때는 닫힌 문입니다. 그러나 담대하게 다가가면 열린 문이 됩니다.
  그런데 순종하지 않으니까 하나님의 역사를 전혀 체험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어떤 성도의 간증입니다. 한밤중에 강도가 침입했습니다. 흉기를 들이대고 위협합니다. “꼼짝 마!” “손들어!” “금고 어디 있어?” “돈 있는 거 다 내놔!” 강도의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절절 매면서 순종했습니다. 강도가 간 후 억울하기도 했지만, 자신이 너무 한심스러웠습니다. 강도에게는 절대 순종을 했는데, 평소 하나님께 얼마나 순종했는지 돌아보았습니다. 자신의 이해타산에 따라 순종할 때도 있고 불순종할 때도 있었습니다. 한 마디로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자기 뜻대로 살아왔던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의 모습도 대동소이합니다.
  성경을 보면 모든 하나님의 역사가 순종을 통해 나타납니다. 행16:6~10 보면 바울이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유럽에 건너간 이야기가 나옵니다. 바울은 소아시아(터키)에서만 복음을 전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성령께서 자꾸 막았습니다. 바울은 나중에 그것이 유럽으로 건너가 복음을 전하라는 하나님의 뜻인 줄 깨닫게 됩니다. 그러자 그는 즉시 순종합니다. 마게도냐로 건너가는데, 그때 처음 들어간 도시가 ‘빌립보’입니다. 그 일이 오늘날 유럽을 형성한 겁니다. 그리고 세계 복음화의 초석이 된 겁니다. 우리 한국에까지 복음이 전해지고 우리가 이렇게 예수 믿고 성도로 복되게 살아가는 것도 다 그 덕택입니다. 이처럼 순종은 하나님의 큰일을 이룹니다.
  눅5:1~7 보면 베드로가 순종할 때 하나님의 축복의 역사가 나타났습니다. 그는 갈릴리 바다에서 밤새도록 고기 한 마리 잡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리라고 했을 때 순종합니다. 상식적으로 경험적으로 맞지 않았지만 그 말씀에 의지하여 순종하자 어떤 일이 벌어집니까? 그물이 찢어지고 배에 고기가 채워지는 만선의 축복을 받게 됩니다.  
  왕하5:8~14 보면 아람 장군 나아만이 순종할 때 하나님의 치유의 역사가 나타났습니다.
나아만 장군은 아람의 제2인자이지만 불치병인 문둥병에 걸립니다. 인간적으로 절망입니다. 그런데 소문을 듣고 이스라엘로 가서 엘리사를 만납니다. 그런데 문전박대를 당합니다. 다만 요단강에 가서 일곱 번 씻으라는 말만 듣게 됩니다. 자존심이 얼마나 상했겠습니까? 대국의 장군이 불원천리하고 찾아왔는데 나와 보지도 않고 요단강에 가서 몸이나 씻으라니! 돌아가려는 그에게 신하들이 만류해서 겨우 자존심, 상식, 다 접고 순종합니다.  일곱 번 몸을 씻으니까 어떤 일이 생깁니까? 어린 아이 피부처럼 치유되었습니다. 순종하는 그에게 치유의 역사가 나타난 겁니다.  

  여러분, 이처럼 성도의 삶은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으로 이뤄집니다. 하나님의 일도 순종함으로, 하나님의 축복도 순종함으로, 하나님의 치유도 순종함으로, 하나님의 기적도 순종함으로 이뤄집니다. 우리는 요단강 세례를 통해 얼마나 철저히 순종해야 되는지 모범을 보여주신 예수님을 뒤따라가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의 큰 역사를 체험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요단강에서 세례 받으신 것은 이상한 일이었습니다. 그런 만큼 특별한 의미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분명 하나님의 아들 메시야임을 증명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대속의 은혜를 깨닫게 해 주었습니다. 또 한 가지 순종의 삶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 가르쳐 주었습니다. 아무쪼록 요단강 세례의 이런 의미들을 마음속에 새기시고 사순절 내내 예수님의 은혜에 감사하고, 예수님을 뒤따라감으로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를 체험하시기 바랍니다.  

출처/홍문수 목사 설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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