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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의 길(4)메시야의 통곡 (눅19:41~44)

by 【고동엽】 2022. 8.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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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의 길(4)메시야의 통곡  (눅19:41~44)

  눈물은 생리적 작용이지만 분명 인간의 감정과 연관성이 있습니다. 그런 눈물을 흔히 ‘감정 눈물’이라 부릅니다. 그런데 눈물을 흘리는 것이 대개 나약한 이미지로 비쳐집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려서부터 눈물을 흘리지 말라는 가르침을 받고 자라났습니다. 특히 남자아이가 울면 “뚝!” “뚝!” 하면서 눈물을 그치라고 다그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성경을 보니까 예수님께서 눈물을 흘리는 장면이 나옵니다. 여러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하나님의 아들인 그분이, 메시야인 그분이 눈물을 흘리다니!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하지만 잘 생각해 보면 눈물은 나약한 것만은 아닙니다. ‘사나이의 눈물’도 있지 않습니까? 남자들이 눈물을 잘 보이지 않지만 때로는 비장하고 뜨거운 눈물을 흘리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그런 경우는 오히려 강렬한 이미지를 나타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눈물은 이상한 게 아니라 역설적으로 예수님의 ‘강렬한 마음’을 표현해 주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과연 예수님이 눈물을 흘리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함께 살펴보면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1] 예수님의 눈물 : 메시야의 뜨거운 마음
  ① 눈물 젖은 공생애 :
  성경을 보면 예수님이 우신 것이 본문을 포함해서 세 번 기록되어 있습니다. i)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요11:35) 예수님은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나사로가 죽자 사람들이 애통해 하며 울었습니다. 그 슬픔 광경을 보고 예수님도 비통한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ii) 겟세마네 동산에서(히5:7)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십자가를 지기 전 인간적으로 고통스런 그 순간 아버지 하나님께 눈물로 기도했습니다. iii) 41절.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 예수님께서 공생애 마지막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실 때 백성들은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외치며 환영합니다. 그런데 입성 행렬이 예루살렘 성을 내려다보는 감람산 기슭에 당도하자 예수님이 갑자기 우신 겁니다.
  이렇게 공식적인 기록으로는 세 번이지만, 공생애 전체의 분위기로 미루어 짐작건대 예수님은 3년 내내 눈물을 흘리셨을 겁니다. 때로는 불쌍한 무리들을 바라보면서, 때로는 기도하면서 눈물짓는 경우가 많이 있었으리라 생각됩니다.
  ② 감람산 기슭의 통곡 :
  그 중에 본문 사건이 가장 비통한 눈물이 아니었을까 추측해 봅니다. 본문 41절의 ‘울다’라는 단어는 헬라어 원어로 ‘클라이오’(κλαιω)인데, ‘흐느껴 울다’ ‘울부짖다’ ‘ 통곡하다’ 등 강한 뜻을 갖고 있는 말입니다. 영어 성경(NIV)에서는 ‘weep’로 번역합니다. 그러니까 메시야가 ‘통곡’을 하셨다는 말입니다. 성지 예루살렘에 가면 이 사건을 기념하는 교회당이 감람산 기슭에 세워져 있는데, 그 이름이 ‘눈물 교회’(Dominus Flevit “주님이 우셨다”)입니다. 꼭 눈물 모양으로 세워져 예수님이 통곡하신 그 사건을 생생하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이것은 큰 사건이었습니다.  
  ③ 그 눈물의 의미 : 죄인에 대한 연민과 비통, 십자가 대속의 각오
  그러면 구체적으로 예수님은 왜 그렇게 통곡하셨을까요? 예루살렘 입성을 하는 도중이었으므로 주변에 제자들과 많은 사람들이 있었을 텐데 말입니다. 주위에 사람들이 있으면 울다가도 그치는 법인데 말입니다. 그만큼 예수님의 마음이 비통했음을 반증합니다.  
  감람산 기슭을 내려오면서 눈앞에 펼쳐진 예루살렘 성의 모습은 평화로운 모습이었는지  모릅니다. 예루살렘 성전의 모습은 그 위용을 자랑하며 황금빛으로 빛나고 있었을 겁니다. 게다가 마침 유월절 명절을 지키러 각지에서 몰려든 사람들도 예루살렘은 온통 축제 분위기로 북적거렸을 겁니다. 그런데 정작 예루살렘 성 안에 사는 백성들의 영적인 상황은 암울했습니다. 하나님을 배반하고, 죄가 가득하고, 그러면서도 마치 자기들이 의로운 척하고, 강퍅하고 ...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메시야로 오셨지만, 전혀 엉뚱하게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시는 영적인 메시야가 아니라, 지상의 나라를 세울 정치적 메시야로 오해하고 환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 보시기에 얼마나 안타깝고 한심스러웠겠습니까?  
  예수님은 이전에도 그들의 한심한 모습을 보며 탄식한 적이 있습니다. 눅13:34~35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제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같이 내가 너희의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린 바 되리라 ... ”  예루살렘은 평화의 도성입니다. 그런데 로마에 짓밟혀 있습니다. 그것은 그들의 죄악과 완악함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배반한 그들에게 하나님은 선지자들을 많이 보내셨습니다. 그래서 회개하기를 촉구했지만 그들은 오히려 선지자들을 죽였습니다. 그리고 이제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님을 보내셨지만 그마저 십자가에 매달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말씀입니다.
  본문 42절 이하를 보면 예수님의 탄식어린 애가(哀歌)가 나옵니다. 42절. “가라사대 너도 오늘날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기웠도다” 죄를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으면 평화를 얻을 수 있는데, 그걸 모르고 무지한 가운데 예수님을 오해하고 거부하니 안타깝다는 말씀입니다.
43절~44절. “날이 이를지라 네 원수들이 토성을 쌓고 너를 둘러 사면으로 가두고 또 너와 및 그 가운데 있는 네 자식들을 땅에 메어치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니 이는 권고 받는 날을 네가 알지 못함을 인함이니라 하시니라”  ‘날’은 심판의 날을 의미하는데, 구체적으로 예수님은 예루살렘이 죄 가운데 장차 멸망할 것을 내다보시고 예언하신 겁니다. 적군이 쳐들어와 토성(성을 공격하려고 쌓아올리는 흙무더기)을 쌓고 예루살렘 성을 포위할 겁니다. 그 와중에 백성들이, 어린 아이들까지 대량 학살될 겁니다.  
  안타깝게도 예수님의 이 예언은 그대로 성취되고 말았습니다. A.D. 70년 티투스(Titus) 장군이 이끄는 로마 군대가 예루살렘을 침공합니다. 예루살렘 성을 포위하고 출입을 못하게 합니다. 때마침 유월절이라 많은 인파가 몰려들었는데, 약 110만 명이 전염병으로 혹은 굶어 죽거나 학살당했습니다. 심지어 먹을 게 없어서 어미가 어린 자식을 잡아먹는 일까지 있었습니다. 한 마디로 아비규환입니다. 또 10만명이 로마 제국 각지로 끌려가 경기장에서 맹수 밥이 되고, 칼로 죽임을 당하는 노리개가 됩니다. 노예로 끌려가 고초를 당하한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그들의 자랑이었던 예루살렘 성전이 돌 하나도 남기지 않고 완파되고 말았습니다.  
  그 비극의 흔적이 지금 예루살렘 현지에 남아 있습니다. 성전이 세워졌던 그 자리에 이슬람 ‘황금 사원’(Dome of the Rock, Mosque of Omar)이 서 있습니다. 오직 성전의 서쪽 벽체 일부만 덩그러니 남아 있습니다. 그것은 로마 군대가 웅장한 성전을 파괴할 정도로 강했다는 증거로 일부러 남겨놓은 것입니다. 그것이 곧 ‘통곡의 벽’(The Western Wall, The Wailing Wall)입니다. 지금도 많은 유대인들이 그곳에 가서 성전의 회복을 위해 울며 기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감람산 기슭을 내려오실 때 장차 있을 이 비극을 훤히 내다보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전혀 모르는 채 죄악 중에 희희낙락하고 메시야를 거부하고 있으니 얼마나 안타깝습니까? 예수님의 마음은 찢어질 듯 아팠습니다. 그래서 통곡한 겁니다.
  그러니까 여러분, 예수님의 눈물은 어떤 의미입니까? 죄인들과 이스라엘에 대한 연민과 비통의 눈물입니다. 그리고 십자가를 지심으로 그들을 구원하시려는 각오가 담긴 비장한 눈물입니다. 예수님은 겟세마네에서도 그 눈물을 흘리셨고, 십자가 위에서도 그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결국 그 눈물이 인류를, 저와 여러분을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신 겁니다.
  여기서 우리가 짚고 넘어가야 할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로마 군대에 의한 예루살렘 멸망은 그 자체로 역사적 사건이지만, 더 나아가 ‘최후의 심판에 대한 모형’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렇습니다! 모든 인간은 죄인이요 심판을 당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죄인인 줄 모르고 인정하지도 않습니다. 최후의 심판이 닥쳐오는데도 새까맣게 모르는 채 세상에서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그런 데만 온통 정신이 팔린 채 살아갑니다. 하지만 성경은 분명히 증거합니다. 히9:27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그리고 그 심판이 얼마나 심각하고 비참한지 경고합니다. 계20:13~14 “ ...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 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지우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못이라” 최후의 심판 때 예수님의 십자가 피로 죄사함을 받지 않은 모든 사람이 둘째 사망 즉 영원히 지옥의 불못에서 고통을 당하는 영원한 사망을 겪게 될 겁니다.
막9:47~49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빼어 버리라 한 눈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니라 거기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 하느니라 사람마다 불로서 소금 치듯 함을 받으리라” 지옥의 고통이 얼마나 큰지 범죄케 하는 눈을 빼버리고 천국에 들어가는 게 더 낫다고 표현합니다. 지옥은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로 인해 죽지도 못하고 영원히 고통 받는 곳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은 이와 같은 지옥의 형벌을 면케 하시려고 불쌍한 마음으로 눈물을 흘리셨던 겁니다. 지금은 부활 승천하셔서 지금 하나님 보좌 우편에 계시지만, 여전히 비통한 마음으로 눈물을 흘리실 겁니다. 예수님이 구원의 길을 열어놓으셨건만 죄 가운데 아무 것도 모르고 지옥을 향해 달려가는 인간들을 바라보며 탄식하실 겁니다. 또한 예수를 믿노라 하면서 여전히 죄 중에 있는 자들을 바라보며 눈물 흘리실 겁니다.
[2] 우리가 흘릴 눈물 : 회개, 감사, 헌신의 눈물
  이제는 우리가 예수님의 눈물을 그치게 해드려야 합니다. 통곡 소리를 멈추게 해드려야 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눈물을 흘림으로써 가능합니다. 우리가 무지와 죄악 가운데 희희낙락하면 예수님은 눈물을 흘립니다. 그러나 우리가 뜨거운 눈물을 흘리면 예수님이 눈물을 그치고 기뻐하십니다.  
  ① 회개의 눈물 :
  무엇보다 먼저 우리는 회개의 눈물을 흘려야 합니다. 죄를 회개하고 십자가 대속의 복음을 믿는 게 중요합니다. 그것이 예수님이 통곡했던 이유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에 제1성으로 하신 말씀입니다. 막1:15 “가라사대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천국은 죄인입장불가입니다. 오직 의인만 입장이 가능합니다. 인간 중에 의인은 하나도 없습니다. 오직 회개하는 자에게 하나님 나라의 문이 열립니다. 오직 예수 십자가 피를 믿음으로 죄 씻음 받은 자만이 의인이되고, 천국에 들어갑니다. 그럴 때 예수님이 얼마나 기뻐하는지 눅15:10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 기쁨이 되느니라” 죄인 하나가 회개하고 예수 믿으면 천국에서 천사들과 더불어 잔치가 벌어진다는 겁니다.  
  그리고 예수 믿고 하나님 자녀가 된 후에는 깨끗한 삶을 살아야 하는데, 우리 속에 남아 있는 죄성으로 인해 실수하고 자주 넘어집니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죄를 통회 자복해야 합니다. 그럴 때 주님이 용서해 주시고 우리를 깨끗해 해 주십니다.  
욜2:12~13 “여호와의 말씀에 너희는 이제라도 금식하며 울며 애통하고 마음을 다하여 내게로 돌아오라 하셨나니 너희는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올지어다 그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나니”
  신앙 생활하면서 통회의 눈물이 중요합니다. 늘 부족하고 죄를 짓고 살지만 실컷 울고 나면 죄사함의 은총으로 영혼이 깨끗해집니다. 마치 비가 온 후 무지개가 뜨는 것처럼, 회개의 눈물을 흘리고 나면 우리 영혼에 영롱한 무지개가 뜹니다. 그리고 우리 삶에 놀라운 회복과 치유, 그리고 축복의 역사가 나타납니다.
  인도의 한 청년의 간증입니다. 그는 신앙을 거부하던 불신 청년인데 눈병에 걸려 고생하다 병원에 입원합니다. 정밀 진찰을 한 의사가 조심스럽게 말합니다. 살인적인 병균에 감염되어 당장 다음 날 두 눈을 뽑지 않으면 생명까지 위협을 받을 것이라고 ... 절망입니다. 막막한 가운데 있는데, 그리스도인 친구가 찾아와서 권면합니다. 이제 아무 것도 할 수 없으니 마지막으로 하나님께 매달려 보라고 ... 그 청년은 염치가 없었지만 별 수 없이 그러마고 약속하고 기도를 시작합니다. 그런데 답답하고 기도가 안 됩니다. 그러다가 먼저 자신의 죄를 생각하면서 회개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면서 기도의 문이 열리고 눈물이 났습니다. 실컷 울고 또 울었습니다. 다음 날 수술 받는 순간이 닥쳤지만 마음이 평안합니다. 비록 육신의 눈은 못 보게 되었지만, 이제 영안이 열려 천국을 바라보니 감사할 수 있었던 겁니다. 그런데 의사가 수술 전에 다시 진찰하다 깜짝 놀랍니다. 전날까지 심하게 번졌던 독한 병균이 사라져버렸다는 겁니다.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회개의 눈물이 그의 영혼과 육신을 동시에 구원하고 치유한 것입니다.  
  여러분, 회개의 눈물은 이렇게 능력이 있습니다. 부디 저와 여러분도 회개의 눈물로 구원의 은총, 치유와 회복의 은총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② 감사의 눈물 :
  가만히 생각해 보면 지금 우리가 살아있는 것 자체가 주님의 은혜입니다. 육신의 생명 주신 것도, 영혼을 구원해서 영생을 주신 것도, 넉넉하든 빠듯하든 의식주를 공급해주시는 것도, 험한 세상에서 보호해 주시는 것도, ... 그 하나하나가 다 은혜입니다. 그것을 생각하면 할수록 감사할 뿐입니다. 그 감사가 깊어지면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옵니다. 그래서 우리는 시편기자처럼 이렇게 고백하게 됩니다. 시116:12 “여호와께서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무엇으로 보답할꼬” 그리고 또 이렇게 찬송하게 됩니다. 사순절에 자주 부르는 찬송가 141장인데, 아이작 와츠(Isaac Watts)가 작사한 찬송입니다.  (1절) “웬 말인가 날 위하여 주 돌아가셨나 이 벌레 같은 날 위해 큰 해 받으셨나” (4절) “나 십자가 대할 때에 그 일이 고마워 내 얼굴 감히 못 들고 눈물 흘리도다”
  여러분, 감사의 눈물이 있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은 더 큰 은혜를 주심을 기억하십시오. ‘은혜 위에 은혜’의 역사입니다. 아무쪼록 감사의 눈물로 더 큰 감사의 축복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③ 헌신의 눈물(예수님을 닮은 눈물) :
  우리 인간이 흘릴 수 있는 가장 고상한 눈물은 예수님을 닮은 눈물입니다. 그것은 나를 위한 눈물이 아니라 이웃을 위한 눈물이요, 더 나아가 민족과 세계 만민을 위한 눈물입니다. 이것이 곧 ‘헌신의 눈물’입니다.
  예수님은 한번도 자신을 위해 눈물을 흘리지 않으셨습니다. 오직 이스라엘 백성과 세계 인류를 위해, 죄인들을 위해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오늘 우리도 이제는 나 자신만을 위한 눈물이 아니라, 남을 위한 눈물,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위한 눈물을 흘려야 합니다. 이것이 성숙한 신앙입니다. 위대한 신앙의 인물들은 한결같이 이런 헌신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눈물의 선지자 예레미야는 ‘거룩한 울보’였습니다. 그는 밤낮으로 울었습니다.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었습니다. 죄악으로 인해 멸망하는 이스라엘 민족을 위해 기도하며 말씀 전하며 눈물을 흘렸습니다. 애1:2 “밤새도록 애곡하니 눈물이 뺨에 흐름이여 ... ” 애2:11 “내 눈이 눈물에 상하며 내 창자가 끓으며 내 간이 땅에 쏟아졌으니 ... ” 애3:48 “ ... 내 눈에 눈물이 시내처럼 흐르도다”
  바울 사도 역시 눈물의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아주 강퍅하고,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혈인간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 믿고 은혜를 체험한 후에 그는 회개와 감사의 눈물을 넘어 헌신의 눈물을 흘리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빌3:18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 ” 바울은 죄악에 빠진 자들을 바라보며 그들의 멸망을 안타까워하며 눈물로 기도하고 복음을 전했습니다.    
  기독교 2천년 역사는 이런 헌신의 눈물로 이어져왔습니다. 그 눈물이 있었기에 멸망할 백성들이 회개하고 예수님께 돌아왔습니다. 사실은 저와 여러분도 그 눈물의 열매임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우리 민족이 어떻게 예수 믿고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었습니까?   토머스 선교사(Robert Thomas, 1840~1866)를 아시죠. 그는 영국의 목사 가정에 태어났습니다. 24세에 목사 안수를 받고 중국 상해로 파송됩니다. 얼마 되지 않아 아내 캐롤라인 죽었습니다. 며칠간 타지로 출장 갔다 오니까 임신 중이었던 아내가 선혈이 낭자한 가운데 숨져 있었고, 아이도 죽었습니다. 젊디젊은 선교사가 어떻게 그 극한 슬픔을 딛고 일어설 수 있었을까요? 놀랍게도 그는 개인적인 슬픔의 눈물을 거두고 예수님의 눈물을 가지고 조선 땅으로 향합니다. 마침 제너럴 샤먼호가 조선으로 간다 하여 그 배를 타고 입국하려고 했지만 쇄국정책으로 거부당합니다. 그러나 포기할 수 없어서 한문 성경을 전해주려고 배에서 내립니다. 결국 대동 강변에서 순교를 당합니다. 그때 나이가 만 26세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의 눈물과 피를 결코 헛되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의 목을 친 포졸 박춘권은 후일 회개하고 예수 믿고 평양 교회의 장로가 됩니다. 그 후로 수많은 사람들이 회개하고 예수 믿게 됩니다. 여러분, 이와 같은 수많은 선교사들의 눈물이 오늘 한국교회와 우리 성도들을 있게 한 것입니다.
  여러분, 주기철 목사님(朱基徹 1897~1944)도 아시죠. 일제 말기 총독부는 조선인들에게 신사참배를 강요합니다. 버티다가 하나둘 굴복합니다. 당시 조선교회들도 차례로 신사참배를 결의합니다. 그것은 결코 있어서는 안 될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거부한다는 것이 너무 어려웠습니다. 그런 와중에 주기철 목사님은 신사참배를 단호히 거부하다 5 차례에 걸쳐 5년 4개월간 옥고를 치릅니다. 결국 해방 1년 전 감옥에서 순교합니다. 그는 당시 범죄한 이 민족과 교회를 안타까운 모습으로 바라보며 통곡했습니다. “예수의 이름이 땅에 떨어지는구나! 평양아, 평양아! 동방의 예루살렘아! 영광이 네게서 떠났도다. 모란봉아! 통곡하라! 대동강아! 나와 함께 울자!” 여러분, 이런 눈물이 이 땅의 역사를 이끌어왔고, 이 민족을 구원했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오늘 주님은 찾고 계십니다. 예수님의 눈물이, 믿음의 선배들의 눈물이 나와 이 민족을 변화시켰듯이 오늘 나와 우리의 눈물을 찾고 있습니다. 우리가 눈물로 기도하고, 눈물로 십자가 복음을 전하면 주님이 이 땅을 고쳐주실 겁니다. 그리고 많은 눈물의 열매를 허락해 주실 겁니다. 여러분! 가족을 위해 눈물을 흘리십시오. 죄로 가득한 이 세상을 위해, 어지러운 이 나라와 이 민족을 위해 눈물로 기도하십시오. 그리고 죄에 빠져 방황하며 멸망 길로 달려가는 영혼들에게 눈물로 복음을 증거하십시오. 우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을지라도 눈물은 흘릴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눈물을 흘리면 예수님의 눈물은 기쁨과 웃음으로 바뀔 것입니다. 아무쪼록 이 사순절에 예수님의 통곡을 마음의 귀로 들으시고 과연 ‘내가 흘릴 눈물’이 무엇인지 곰곰이 생각하고 실천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출처/홍문수목사 설교 자료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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