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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하나님

하나님설교 : 하나님의 선함에 참여하는 사람 (레위기 19:17-18 마태복음 20:1-16)

by 【고동엽】 2022. 8.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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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선함에 참여하는 사람     (레위기 19:17-18 마태복음 20:1-16)  


우리는 인정을 받을 때, 행복과 보람을 느낍니다.

먼저 우리의 능력을 인정 받을 때, 삶의 보람을 느낍니다. 능력의 인정은 인정 받을 만한 능력을 배양하기 위해서 쏟은 나의 수고에 대한 보상입니다.

다음으로 나의 존재 자체에 대한 인정을 받을 때 행복을 느낍니다. 자식의 존재 자체가 사랑받을 자격이 있는 것입니다. 부모님의 존재 자체가 존경을 받을 만한 것입니다. 배우자의 존재 자체가 내 삶의 행복입니다. 이 때 인생 자체에 대한 긍정적인 의식을 느낍니다.

내가 나의 능력을 인정받을 때 참 보람이 있습니다. 하지만 내가 몸이 아파서 아무런 일도 할 수 없을 때도 내가 여전히 같은 사랑을 받는다면 나는 행복할 것입니다. 내가 늙어서 아무런 기력이 없을 때도 내가 여전히 존경을 받을 수 있다면 이것이 행복입니다.

내가 사람들의 질책을 받고, 사랑하는 사람이 떠나고, 오랫동안 노력하던 일들이 실패로 끝나고, 나를 통해서 무슨 유익을 보려고 했던 사람들은 다 떠나고, 내가 의지할 사람이 한 명 없을 때, 우리는 고독을 느낍니다. 나를 인정하는 사람이 없을 때 고독을 느낍니다.

나의 성공한 모습이 인정받을 때보다도 나의 존재 자체가 인정을 받을 때가 훨씬 행복합니다.



오늘 본문에는 한 포도원 주인이 나옵니다. 이 포도원 주인은 일꾼이 필요하여 아침 6시에 장터에 나가서 일꾼을 불러옵니다. 성경이 기록될 당시에 일꾼들의 노동시간은 해가 떠서 부터 별이 뜰 때까지 입니다. 대략 아침 6시부터 저녁 6시까지입니다. 그래서 주인은 이렇게 일찍 장터에 나갔습니다.

주인은 하루에 한 데나리온 씩 주기로 하고 일꾼 몇 명을 불렀습니다. 주인은 9시와 12시와 오후 3시에 다시 장터에 나가서 ‘적당한’ 품삯을 주기로 하고 일꾼들을 각각 포도원에 불렀습니다.

그런데 오후 5시에도 장터에 나가보니 아직도 빈둥거리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주인이 그 이유를 묻었습니다. “당신들은 왜 종일토록 이렇게 빈둥거리며 서 있습니까?” 이 사람들의 대답은 “아무도 우리에게 일을 시켜주지 않아서, 이러고 있습니다” 였습니다. 주인은 이 사람들에게도 일을 주었습니다.

오후 6시가 되어 근무시간이 끝났습니다. 주인은 청지기에게 늦게 온 사람부터 임금을 지불하라고 지시했습니다. 처음에 오후 5시에 와서 한 시간만 일한 사람들에게 한 데나리온을 지불했습니다. 먼저 온 사람들이 이 광경을 보고 자신들은 더 받을 줄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받은 임금은 똑같이 한 데나리온이었습니다. 실망한 이들은 주인에게 따집니다. ‘이것은 형평의 원칙에 어긋납니다. 우리는 종일 찌는 더위 속에서 일했는데 한 시간 밖에 일하지 않은 사람들과 우리를 똑같이 여기시는군요.’

이 때 주인의 대답이 이렇습니다.

“친구여, 나는 그대를 부당하게 대한 것이 아니오. 그대는 나와 한 데나리온으로 합의하지 않았소? 나는 약속을 잘 지켰소. 그대의 품삯이나 받아 가지고 돌아가시오. 그대에게 주는 것과 꼭 같이 이 마지막 사람에게 주는 것이 내 뜻이오.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수 없다는 말이오? 내가 후하기 때문에, 그대 눈에 거슬리오? 이와 같이, 꼴찌들이 첫째가 되고, 첫째들이 꼴찌가 될 것이다.”



먼저 온 품꾼들의 어리석음

이 비유에서 주인은 하나님을 나타내고, 일꾼들은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본문에서 주연급 등장 인물들은 주인과 먼저 온 사람들 특히 아침 6시부터 일한 사람들일 것입니다. 하루 종일 일한 사람들은 주인을 좋지 않게 여겼습니다. 이 사람들의 불만의 원인은 어디에 있을까요?



첫째로, 종일 일을 한 사람들은 감사할 줄을 몰랐습니다.

자신은 노동 시장에서도 제일 먼저 선택될 정도로 건강하고 능력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항상 먼저 선택되어서 살아가는데 자신이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자신만만합니다. 당당합니다. 그렇다면 이들은 자신들의 조건에 감사를 할 수 있어야 했습니다. 감사는 신앙 생활의 아주 중요한 원인인 것입니다. 마태복음 14:19의 오병이어의 기적도 감사의 기적이었습니다. 이들은 자신이 받은 복에 대해 감사하지 않았고, 주인이 선택해 준데 대한 감사가 없었습니다.

주인에게 항의한 사람들은 자기가 받는 임금에 대한 만족이 없었습니다. 만족이 없으면 감사가 없습니다. 원래 하루 한 데나리온의 임금은 아주 정상적인 임금인 것입니다. 사람은 자기 인생을 자기가 만족해서 감사하며 살아 가면 됩니다. 그런데 자기 인생에 감사가 없고 불만이 있으니까 남과 비교하여 상대적 우위를 차지하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사실 감사는 외부적 조건에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외부적 상황에서 만족을 발견하는 내면적 만족이 선행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외부적 만족 보다는 내부적 만족이 중요합니다. 동물의 왕이라는 사자도 큰 소를 한 마리 잡아 먹으면 만족하여 24시간을 늘어지게 잠을 자고 주위에 사슴이 떼로 있어도 본 척도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자신이 먹을 것이 충분히 있어도 타인을 못 살게 굴고 자기보다 가난한 타인의 것을 빼앗기를 원하는 동물입니다. 자기에게 모든 것이 족한대도 남에게 해를 끼치는 동물입니다. 인간에게 내면적 깊은 만족이 있을 때 만이 감사가 넘쳐 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들은 생각합니다. 인생은 경쟁이고 이긴 사람은 언제나 더 많은 보상과 혜택을 누리는 것은 당연하게 생각합니다. 경쟁에서 패배한 사람들은 궁핍하게 살아가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습니다.



둘째로, 이들은 형편이 어려운 사람들에 대한 감수성이 없었습니다. 동정이 없었습니다.

고난 당하는 사람과 함께 느끼고, 함께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고난 당하는 사람들과의 연대성(Solidarity)이 없었습니다.

만약 한 시간 밖에 일하지 않은 사람이 자신의 친구였다면 주인을 어떻게 생각했을까요? ‘주인님 참 고맙습니다. 주인님이 아니면 이 친구의 가족이 오늘 굶어야 합니다. 감사합니다’ 하고 말했을 것입니다.

한 시간 밖에 일하지 않은 일꾼의 가족들은 주인을 어떻게 생각했을까요? ‘그 분은 참 훌륭하신 분이지! 그렇게 훌륭한 사람이 이 세상에 또 있을까?’

어차피 일꾼들은 은혜로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자기가 잘난 것이 아니라, 주인이 선택해 주어서 일자리가 생긴 것이었습니다. 이들은 스스로 굉장한 일을 하는 양 착각 속에 있었습니다. 자신도 은혜로 살아가는 존재이면서 타인의 은혜에 불만을 갖는다면 이웃과 연대성이 없는 증거인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시편 기자의 표현에 의하면 ‘날아가는 먼지’와 같습니다. 우리 인생을 주관하는 것은 하나님이십니다. 이것을 아는 것이 지혜입니다. 일생을 보람 가운데서 마치려면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사람들은 남이 힘들 때 자신의 행복을 확인하는 못된 버릇이 있습니다. 그리고 남이 잘 될 때 자신의 처지와 비교하여, 자신보다 못되도록 바라는 못된 버릇이 있습니다. 이 병은 도저히 치유 불가능한 병인 것입니다.

인간은 내가 잘되고 남이 안되었을 때, ‘인간성의 시험대’에 서게 됩니다. 또한 내가 안되고 남이 잘 되었을 때, ‘인간성의 위기’가 옵니다. 사람은 타인과 연대성을 가지고, 타인이 받은 복에 대해서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람이 타인이 받은 은혜를 감사할 수 있다면, 이 사람은 타인의 은혜도 자기의 것으로 삼을 수 있게 됩니다. 우리가 타인의 즐거움에 참여할 수 있다면, 그 즐거움이 내 것이 됩니다. 그리고 내 즐거움이 커집니다.



셋째로, 주인에게 항의한 사람들은 자기 위치를 착각한 교만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주인보다도 높은 자리에서 주인의 일을 평가합니다. 자기 자신을 모르는 사람이었습니다. 이들은 자기 욕심에 이끌려서 공평한 주인도 불공평한 주인으로 만들었습니다.

자기의 위치를 모르는 착각을 하게 된 배경에는 주인의 마음을 잘 모르는 무지가 있었습니다. 주인의 베푸는 즐거움을 알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이 주인과 같은 하나님의 즐거움에 참여해야 할 것입니다.



여보게, 친구

주인에게 항의하는 일꾼들을 부른 말이 ‘친구여’ 입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의 ‘친구여’가 의미하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먼저 온 일꾼들은 주인을 호칭도 없이 부르며 따지는데, 이것은 정말 무례하고 나쁜 행위인 것입니다. 여기에 대한 반응으로서 주인이 ‘친구여’ 라고 부릅니다. 이 말은 친근감이 담긴 말이 아니라, 상당한 거리감과 감정적인 냉정함이 그 속에 담겨 있습니다. ‘이 친구 정신이 없구만!’ 하는 내용입니다. 이미 냉정한 주인의 엄격함이 그 안에 담겨 있습니다. 신분상의 엄청난 차이가 있을 때, 윗 사람이 아랫 사람을 ‘이 친구야’하고 부르면, 이 때는 굉장히 위험한 순간입니다. 이 말은 둘 사이의 도저히 좁힐 수 없는 엄청난 간격을 확인하는 말인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으로부터 어떤 호칭을 듣기를 원하십니까? 하나님의 장난기 섞인, 그리고 그 뒤에는 커다란 분노가 숨겨져 있는 ‘여보게, 친구’라는 말을 듣기를 원하십니까? 아니면 ‘착하고 충성된 나의 종아, 주인의 기쁨에 참여 하여라’는 말씀을 듣기를 원하십니까?



천국 비유

오늘 본문은 천국 비유입니다.

“천국은 마치 품꾼을 얻어 포도원에 들여보내려고 이른 아침에 나간 집 주인과 같다”(마20:1).

이 말에서 주어와 서술어만 정리하면 “천국은 집 주인과 같다”입니다. 무슨 뜻입니까?

‘집 주인과 같은 행동을 하는 곳이 천국이다. 천국은 집 주인과 같은 삶의 방식이 이루어지는 곳이다. 천국은 집주인의 마음이 널리 알려지는 곳이다’ 라는 의미입니다.

여기서 집 주인은 하나님을 말합니다. 그래서 “천국은 집 주인과 같다”는 말은 ‘천국은 하나님의 마음과 같다. 천국은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는 곳입니다.

천국은 모든 사람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뜻이 지배하는 곳입니다. 하나님은 천국에 모든 사람들을 초대하셨습니다. 그러나 천국을 차지하느냐 잃어버리느냐 하는 것은 자신의 선택에 달렸습니다. 공평한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것이 천국을 소유하는 행위입니다.



하나님의 마음

우리는 모든 일을 하나님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첫째, 하나님의 마음은 ‘은혜의 마음’입니다.

어떤 일꾼을 쓸 것인가 하는 점은 철저히 주인 마음입니다. 모든 선택은 주인이 은혜입니다. 제아무리 건강하고 일 잘하는 사람이라도 주인이 은혜로 일자리를 주어야만 합니다.



둘째, 하나님의 마음은 ‘정의의 마음’입니다.

주인은 약속을 지켰습니다. 처음 온 일꾼들과 하루 한 데나리온의 약속을 지켰습니다. 다른 종들과는 상당히 주리라고 약속을 해서 약속을 지켰습니다. 그리고 11시에 온 일꿈들과는 임금 예약을 맺은 일이 없습니다. 주인이 주고싶은대로 주는 것은 적법한 것입니다.



셋째, 하나님의 마음은 ‘사랑의 마음’입니다.

포도원 주인은 ? 아침, 9시, 12시, 오후 3시, 오후 5시 ? 다섯 번이나 장터에 나가서 사람들을 데리고 왔습니다. 주인은 하루 이틀 농사를 짓는 사람이 아닙니다. 왜 처음부터 농장에 필요한 인력을 계산하지 못했을까요? 왜 그랬을까요? 풀리지 않는 의문은 왜 11시에도 장터에 나가서 일꾼을 데려왔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아마도 주인은 장터에 나가서 일꾼들을 뽑아오면서 아직 남아서 일자리를 찾는 사람들의 모습이 눈에 아른 거려서 장터에 다시 나갈 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심지어는 11시에도 장터에 나간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서 하나님의 즐거움에 참여 해야 할 것입니다. 누가복음 15장의 ‘탕자의 비유’에서 집 나간 작은 아들이 돌아왔을 때, 아버지는 기뻐하며 잔치를 열었습니다. 그러나 집 안에 있던 큰 아들은 이것을 시기했습니다. 아버지의 기뻐하는 마음에 참여하지 못했습니다. 바로 이 순간이 그의 성실한 노력과 많은 순종이 수포로 돌아가는 순간이었습니다. 이 순간이 꼴찌들이 첫째가 되고, 첫째들이 꼴찌가 되는 순간입니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과연 어떤 사람인가? 첫째가 꼴찌가 된다는 말씀에 불만을 느끼고 형평성의 원리를 내세우는 사람인가? 꼴찌들이 첫째가 되고, 첫째들이 꼴찌가 되는 하나님의 말씀에 위로를 받고 용기를 얻으며 감사하는 사람인가?

우리 모두 자신을 향해서 질문해 봅시다. 오늘 본문에서 나는 누구의 입장에 서 있는가? 나의 위치는 어디인가? 나는 오늘 본문에서 누구와 가장 친근한가?



나는 아침부터 일한 사람입니까?

나는 경쟁력 있는 사람인가? 나는 제일 먼저 일 자리를 차지한 건강한 사람인가? 소위 인간으로서 갖추어야 할 좋은 조건들을 다 갖추어서, 남들보다 먼저 출세하고 더 많은 재산을 모은 사람인가?

새벽 6시부터 일을 한 사람들은 소위 엘리트들입니다. 건강하고 능력을 인정 받은 사람들입니다. 일을 잘한다고 농장 주인들 사이에서 소문이 난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매일 같이 일자리가 있어서 가족들도 그렇게 궁핍하지 않게 살아갑니다. 주인을 향하여 항의를 할 수 있을 정도로 당당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무언가 능력이 있고 건강한 사람들은 자신이 어차피 은혜로 살아간다는 사실을 잊어 버렸습니다.

사람은 무엇인가 가졌을 때가 가지지 못했을 때보다 더 위험한 순간입니다. 사람들은 내 힘으로 무언가를 할 수 있고, 나의 나 된 것이 나의 능력과 노력의 결과라고 생각하고, 자기가 잘나서 가진 줄로 착각하고, 무언가 더 큰 일을 스스로 할 것 같은 교만에 사로 잡힐 때가 많은 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인가를 가졌을 때, 무엇인가를 가졌다는 안도감은 우리로 하여금 이웃과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합니다. 우리의 소유는 우리로 하여금 천국을 소유하지 못하게 합니다. 이래서 천국은 가난한 자들의 것이요,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보다 어려운 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가졌다는 사실은 이웃의 형편을 이해하지 못하게 합니다. 우리의 소유는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지 않게 하므로 하나님과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게 합니다.



나는 9시나 12시나 3시에 온 사람입니까?

나는 최고의 엘리트는 아니지만 그래도 주어진 일은 해내는 사람입니까? 최고의 엘리트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꼴찌인 낙오자는 아닙니다. 그럭저럭 세상의 풍조를 따라 사는 사람입니다.



나는 오후 5시에 온 사람입니까?

이 사람은 주목을 받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오늘의 비유에서도 전혀 주인공으로 등장하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철저히 피동적인 사람입니다. 내세울 것이 전혀 없는 사람입니다. 자기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는 사람입니다.

그가 오늘도 일자리를 못 얻었다면 그는 돌아가는 길에 구걸을 해야만 합니다. 그래야 가족을 먹여 살릴 수 있는데, 해도 지고 더 이상 구걸도 할 수 없는 처지인 것입니다. 먹지 못하니 힘도 없고 건강하지 못하고 그래서 더욱 일자리가 없는 악순환에 빠집니다. 그는 주인과 당당하게 계약을 체결하지도 못하고, 본문의 비유에서도 전혀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지 못합니다. 그가 한 말이란 겨우 “아무도 우리에게 일을 시켜 주지 않아서, 이러고 있습니다” 하는 말이었습니다. 이 말은 ‘저는 못난 사람입니다. 저는 건강하지도 못하고 가진 재주도 변변치 않아서 아무 농장 주인도 저를 써주지 않습니다’ 하는 말입니다.

건강도 학벌도 가문도 재산도 인물도 무엇하나 변변한 게 없는 사람입니다. 별로 능력도 없습니다. 그렇다고 성실하게 살아온 것도 아닙니다. 때로는 문제아로 말썽을 부렸던 적도 있습니다. 지지리도 못난 천덕꾸러기였습니다. 그저 오늘을 살아간다는 자체가 감사한 사람입니다. 한 마디로 은혜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은혜를 은혜로 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서, 하나님의 기쁨에 참여를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참여하여, 그 기쁨에 함께 참여 하는 것이 최고의 신앙인 것입니다.

고통 속의 이웃의 마음을 이해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유기견 보호소에서는 유기견이 들어오면 보호하고 있다가 일정 기간 동안 주인이나 새로운 주인을 찾지못하면  안락사하게 되어 있다고 합니다. 다음 사진은 어느 말라뮤트 한 마리가 안락사 되기 3시간 전에 한 새끼 유기견에게 자신의 사료를 나눠주고 있는 모습을 찍은 것입니다. 다가올 자신의 운명을 알고 그랬을지는 모르겠지만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출처/박병욱 목사 설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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