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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사람 (사무엘하 1:17-27)

by 【고동엽】 2022. 7.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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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사람      (사무엘하 1:17-27)


남아프리카 최초의 대통령인 넬슨 만델라(Nelson Mandela)는 흑인 인권 운동가로서 1993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기도 했습니다. 오늘의 그가 있기 까지 만델라는 오랜 고통의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는 유럽에서 건너온 소수의 백인들이 정권을 쥐고 인종격리정책(아파르트헤이트, Apartheid)을 통해 흑인들의 권리를 착취하고 짐승처럼 취급하는 것을 보면서, 목숨을 걸고 저항운동에 나섰습니다. 그러다가 남아프리카 백인 정권에 의해 체포, 투옥되어 1992년에 석방될 때까지 무려 27년 동안이나 감옥살이를 하였습니다. 그는 고문과 투옥으로 몸이 말할 수 없이 망가졌습니다. 그런 그가 1994년 대통령에 당선되었을 때, 정치 보복을 두려워한 백인들은 불안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대통령에 당선된 이후에 흑인과 백인 사이의 화해를 위해서 자기의 개인적 원한은 다 잊어버리고 무서운 가해자였던 백인 지도자들을 다 포용해 버렸습니다. 물론 남아프리카 공화국은 지금도 흑백 갈등의 요소가 남아있고, 앞으로도 흑백 갈등과 충돌은 계속될 것입니다. 그러나 만델라처럼 스스로 화해의 제물이 되고자 노력하는 사람들이 있는 한 그들은 평화를 맛보며 살게 될 것입니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전쟁과 분쟁으로 고통당하고 있는 이 세상의 한복판에서 평화를 만드는 사람(peace maker)으로서 그 사명을 묵묵히 감당하고 있습니다. 이 지구상에 만델라 같은 평화의 사람들이 계속 존재하는 한 이 땅의 미래는 결코 어둡지 않을 것입니다.

본문에 나오는 다윗도 평화의 사람이었습니다. 비록 골리앗과의 싸움을 시작으로 그의 일생은 전쟁과 피비린내로 가득 찼지만 다윗 개인은 끊임없이 하나님의 평화를 추구하며 살았던 사람입니다. 이러한 다윗을 통해 전쟁과 갈등으로 불안한 이 시대에 평화의 메시지를 찾으시길 바랍니다. 아울러 우리 가정과, 교회와, 이 나라에, 그리고 세계 열방에 하나님의 평화가 가득하기를 바랍니다.

1. 다윗은 끝까지 사울을 대적하지 않았습니다.

다윗은 사울 왕이 정치의 혼조를 보이고 있을 때 사무엘 선지자로부터 기름부음을 받고 이스라엘의 왕으로 선택받게 되었습니다. “사무엘이 기름 뿔을 취하여 그 형제 중에서 그에게 부었더니 이날 이후로 다윗이 여호와의 신에게 크게 감동되니라”(삼상 16:13). 그러나 아직 이스라엘은 사울이 통치하고 있었습니다. 다윗은 비록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기는 했지만, 사울의 뒤를 이어 왕이 되기까지 실로 고난의 연속인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한 순간도 평화를 추구하지 않은 적이 없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신에게 감동된 다음 길이 열려 궁중에 들어가 악신으로 괴로움을 당하던 사울 왕을 위해 음악치료를 하게 됩니다. 사울은 하나님의 말씀과 뜻을 어긴 후 악신으로 괴로움을 당하게 되었는데, 하나님과 함께 했던 다윗은 일개 목동 출신이었으나 왕의 정신치료를 하는 사람으로 선택받았던 것입니다.
그 뒤 다윗은 블레셋의 대장군 골리앗을 처치하고 백성들 사이에 영웅으로 떠오르게 됩니다. 골리앗을 물리친 공로로 사울 왕의 사위가 된 이후에도 전쟁터에 나가 혁혁한 전공을 올리며 다윗의 위상은 점점 더 올라갔습니다. 한편 사울은 그러한 다윗을 경계하고 시기하기 시작했습니다. 국민적 인기를 한 몸에 받고 있는 다윗이 언젠가 자신의 권력에 위협적인 존재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급기야 사울은 다윗을 제거하려고 안간힘을 썼습니다. 비록 다윗을 죽이려던 몇 차례의 시도가 실패로 돌아갔지만, 다윗은 사울을 피해 도망 다니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 와중에 다윗은 사울을 죽일 수 있는 기회를 두 번이나 얻었습니다. 한번은 사울이 엔게디 황무지 어느 동굴에 용변을 보러 들어갔는데, 마침 다윗과 부하들이 거기 있었습니다. 다윗의 부하들은 하나님이 주신 기회라면서 사울을 없애자고 다윗을 부추겼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내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부음을 받은 내 주를 치는 것은 여호와께서 금하시는 것이니 그는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가 됨이라”(삼상 24:6)고 하면서 사울의 옷자락만을 베었습니다.
또 한번은 사울이 다윗을 추격하다가 십 황무지 앞 하길라 산 길가에 진을 쳤는데, 밤중에 다윗과 아비새가 몰래 진에 잠입하였습니다. 이때 아비새는 다윗의 원수를 단번에 없애버리자고 하였으나 이때도 다윗은 “죽이지 말라. 누구든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부음을 받은 자를 치면 죄가 없겠느냐?”(삼상 26:9)고 하면서 사울의 창과 물병만을 가지고 진을 빠져나왔습니다.
이처럼 다윗은 아무 잘못이 없이 사울 왕에게 십수년 동안을 쫓겨 도망다녔지만, 결코 사울을 대적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사울 왕과 그의 아들 요나단이 전사했다는 소식을 듣고 자기 옷을 찢으면서 저녁까지 울며 금식하였습니다. 그리고 다윗에게 보상을 기대하고 사울 왕을 죽였다고 보고한 아말렉 사람을 오히려 처형했습니다(삼하 1:13-16).
만약 다윗에게 정치적 야망이 있었다면, 그에게 찾아온 몇 번의 기회를 결코 놓치지 않았을 것입니다. 자신의 야망을 위해서, 정권을 잡기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지만 다윗은 결코 그런 부류의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투쟁과 권모술수를 통해서 권력을 차지하려는 소인배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다윗은 자신의 생명을 노리는 사울을 두 번씩이나 살려주었고, 원수인 사울의 아들 요나단과 둘도 없는 우정을 나누었습니다. 이스라엘의 평화를 위협하는 이방 족속과는 최선을 다해 맞서 싸웠지만 나라의 분열을 촉발하는 내부 정권 다툼에는 전혀 나서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손에 사울의 피를 묻히지 않고도 왕위에 오를 수 있었는데도, 그것을 기뻐하기 보다는 오로지 사울과 요나단의 죽음을 진심으로 애통해 했습니다.
자신의 영달이나 정치적 야욕을 채우기 위해서 배신과 술수를 일삼는 소인배들이 가득한 오늘날, 다윗은 믿음의 대로를 걷는 큰 인물의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2. 다윗은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고 그 말씀대로 살았습니다.

다윗의 인물됨은 그의 신앙에서 우러나온 것입니다. 다윗은 기름부음을 받은 이후에 하나님의 신에게 감동을 받고 그는 오직 하나님의 소유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소유가 된 다윗은 이제 모든 것을 하나님의 눈으로 보게 되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적으로는 사울 왕이 자신의 원수였지만,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받은 종이라는 이유만으로 한번도 그를 원수로 여기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도 역시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신에게 감동된 사람만이 이런 삶을 살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신에게 감동받았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과 경륜을 이루는 삶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뜻과 경륜은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 안에 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사는 것을 최고의 영광으로 알았습니다. “내가 주의 법을 어찌 그리 사랑하는지요. 내가 그것을 종일 묵상하나이다. 주의 말씀의 맛이 내게 어찌 그리 단지요. 내 입에 꿀보다 더하니이다”(시 119:97, 103).
하나님의 성령에 감동된 다윗은 하나님의 말씀이 꿀보다 달다고 고백할 정도로 말씀을 사모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신다고 하였는데(히 4:12), 하나님의 말씀을 이렇게 사랑하고 좋아하고 기뻐하는 사람이 어찌 세상에서 승리하지 못하겠습니까?
하나님과 함께하는 자는 말씀을 사모하는 자입니다. 즉 ‘말씀을 어떻게 대하느냐’ 하는 것이 ‘그가 하나님을 어떻게 여기느냐’ 하는 것을 말해줍니다. 통계학자로 유명한 로저 뱁슨은 “모든 경제적인 침제의 전조를 알리는 것은 종교의 쇠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의 말은 경제적인 위기가 닥쳐 오는 것은 백성들의 신앙생활이 침체하였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경제적 위기를 극복하는 데 있어서 가장 필요한 것은 신앙의 회복이라는 것입니다. 이는 이미 독일의 유명한 사회학자인 막스 베버가 그의 저서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에서 언급한 내용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신앙의 회복은 곧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회복을 말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16세기에 종교개혁을 단행한 루터는 ‘오직 믿음만으로’(sola fiede)라는 구호와 ‘오직 말씀만으로’(sola scriptura)라는 구호를 동시에 내걸면서 신앙의 회복은 말씀의 회복임을 주창하였던 것입니다. 주전 8세기, 여로보암 2세 때, 북이스라엘에서 예언활동을 했던 선지자 아모스 또한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오직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암 8:11)고 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이 사라진 세대에 대한 경고의 메시지를 선포하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인류의 미래, 나라의 미래, 사회와 가정의 미래를 걱정하고 과학이나 정치, 문화, 경제적 차원에서만 그 미래를 준비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다윗과 이스라엘에게 그랬던 것처럼, 가정과 사회와 나라와 인류의 미래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만 있습니다.
여러분 개인의 미래에 대해 걱정하고 계십니까? 가정의 미래를 위해 무엇인가 준비하고 계십니까? 나라와 민족의 미래를 위해 기도하고 계십니까?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꿀송이보다 더 달게 여기고 사모하는 마음을 회복하시기 바랍니다. 그 말씀대로 살아갈 때, 희망찬 미래가 활짝 열릴 것입니다.

3. 다윗의 삶의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에 있었습니다.

내년에 우리나라에서는 대통령 선거가 예정되어 있습니다. 벌써부터 각 당에서는 대선후보를 놓고 신경전을 펼치고 있습니다. 언론에서도 누가 어떻게 후보로 나오게 될 지 지대한 관심을 보이고 있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시대에도 백성들은 사울과 다윗의 정권 다툼이 어떻게 전개될 것인지 무척 흥미로웠을 것입니다. 베냐민 지파 출신으로 기브아를 거점으로 세력을 형성하고 있는 사울과, 헤브론에서 기름부음을 받고 골리앗을 물리쳐 이스라엘의 영웅이 되었지만 왕의 미움을 받아 정처 없이 떠돌아 다니는 다윗의 대결이 어떻게 전개될 지 흥미를 끌기에 충분했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명실공히 차기 대권주자인 요나단과 다윗의 관계도 흥미진진한 이야기거리였을 것입니다. 이러한 대결구도에서 사울은 정권 수호에 사활을 걸고 무리수를 두면서까지 다윗을 제거하려고 혈안이 되어 있었습니다. 권력에 눈 먼 소인배의 모습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이와 달랐습니다. 다윗의 관심은 대권을 차지하고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자기가 일찍이 사무엘을 통해서 기름부음을 받았지만, 어서 사울 왕이 죽고 자신의 시대가 펼쳐지기를 기다린 것이 아니라, 오로지 어떻게 하면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하나님을 기쁘게 할까에 관심이 있었습니다. 실제로 그가 지은 시편에는 “주의 영광”이 온 땅과 하늘에 가득하기를 바라는 시들로 가득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울 왕과, 왕 계승 영순위에 있었던 요나단의 전사는 그에게 기쁜 소식이 아니라, 애통한 소식이었습니다. 하나님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가 칼에 맞아 엎드려졌다는 소식이 블레셋을 비롯한 이방 민족에게 웃음거리로 전락하지 않을까 염려하여 정보를 통제했습니다. “이 일을 가드에도 고하지 말며, 아스글론 거리에도 전파하지 말지어다. 블레셋 사람으 딸들이 즐거워할까, 할례받지 못한 자의 딸들이 개가를 부를까 염려로다”(삼하 1:20)
그의 모든 관심은 하나님의 영광이었습니다. 여러분의 관심사는 무엇입니까? 혹시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보다 내 체면, 내 안위, 내 입장만 생각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내 자신을 버리는 사람입니까? 나의 영광을 위해서 하나님을 버리는 사람입니까? 다윗은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자신의 안위와 자존심은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에 모든 관심이 집중된 다윗은 자연적으로 평화를 추구하는 사람한 사람이었습니다. 기름부음을 받은 후 성령에 감동받은 다윗은 눈 앞의 이익보다는 하나님의 뜻과 경륜에 순종하는 사람이 되어, 그에게 대적하는 사울 왕을 끝까지 선대하였습니다. 그가 훗날 ‘평화’라는 의미의 살렘을 정복하여 예루살렘을 이스라엘의 수도로 삼은 것은 평화를 추구하는 다윗의 면모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스웨덴 출신의 함마슐드 전 유엔 사무총장은 세계 대전 이후 동서 갈등 속에서 각국의 문제를 해결해 나가면서 유엔의 위상을 드높여 노벨 평화상을 받은 인물입니다. 1961년 그의 마지막 길도 콩고 내전을 중재하러 가는 길이었습니다. 그는 비행기 추락사고로 사망하였는데, 그 끔찍한 사고 현장에서 그의 시체를 발견한 조사팀의 보고에 의하면 비행기가 산산조각 날 정도로 처참한 현장에서 발견된 그의 얼굴은 이상할 정도로 평화로웠다고 합니다.
당시 그의 여행용 가방에는 갈아입을 옷 몇 벌과 성경, 그리고 토마스 아켐피스의 “그리스도를 본받아”라는 책이 들어있을 뿐이었습니다. 함마슐드는 평소 성경과 “그리스도를 본받아”라는 책을 휴대하고 다니면서 묵상하고 기도하면서 위대한 신앙의 거장 토마스 아켐피스의 삶을 배울려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성서나 그 책에서 평화를 위해서 일할 수 있는 영적인 힘을 공급받았습니다. 이렇게 평화를 위해서 사는 사람이 있는 한 우리의 세상에 평화는 오고야 말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성령에 감동된 다윗의 삶을 본받아야 할 것입니다. 성령에 감동된 삶이란 자기의 이익보다 오직 하나님의 뜻과 경륜에 따라 사는 삶을 말합니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고 평화를 추구하는 삶을 말합니다. 다윗이나, 만델라, 함마슐드와 같은 성령에 감동되어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며, 이땅에서 평화를 이루고자 헌신했던 이들의 삶을 본받아 했던 우리들 또한 우리의 가정과 교회와 이 세상에 평화를 심는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출처/전병금목사 설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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