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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가능을 넘어선 기적 (요한복음 6:1~15)

by 【고동엽】 2022. 7.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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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가능을 넘어선 기적   (요한복음 6:1~15)

사람은 불가능의 상황을 일상적으로 경험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불가능을 겪고 있습니다. ‘나는 방법이 없다’ ‘나는 길이 없다’ ‘나는 이대로 안 된다’며 많은 사람들은 절망하고 방황하고 포기하는 일상적인 경험을 하고 살아갑니다. 우리는 불가능의 상황을 넘어서야 됩니다. 만약 오늘 우리가 할 수 없다고 하는 그 한계에 머물러 버린다면 우리는 불행한 존재가 되고 말 것입니다. 현재의 내가 겪고 있는 그 상황을 극복할 때 또 다른 발전이 있고, 행복이 있고, 가치가 있고 거기에 또 다른 소망이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말렉을 만났을 때 불가능한 상황을 실감했습니다. 골리앗이 나타났을 때 그들은 불가능을 실감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아말렉을 이겼고 골리앗을 이겼습니다. 오늘 내가 한걸음도 앞으로 갈 수 없는 그 불가능의 상황은 뛰어넘으라고 우리 앞에 있는 것입니다. 그 불가능을 극복하라는 하나님의 요구가 있는 것입니다.

절망의 상황

예수님을 따르던 무리들이 만오천여명이 되었습니다. 빈 들판에서 해가 져 가는 황혼에 그들은 주린 백성으로 저녁식사를 해결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사람의 힘으로 해결하기 어렵습니다. 그 주린 백성들에게는 많은 먹거리가 필요합니다. 예수님은 빌립더러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로 먹게 하겠느냐?”라고 물었습니다. 빌립이 대답하기를 “주여, 이 사람들을 각 사람으로 조금씩 받게 할지라도 이백 데나리온의 떡이 필요합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이백 데나리온은 지금 우리의 환율로 계산을 하면 천만원입니다. 천만원 어치의 빵을 사서 먹여야 할 그 많은 군중들, ‘주여, 이건 도무지 불가능합니다.’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빌립에게 중대한 도전의 말씀을 주십니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 너희가 해결하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받아들이는 제자들은 한 사람도 예외 없이 불가능의 말씀으로 받아들입니다. 예수님의 명령이지만 그것은 제자들에게 불가능의 명령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렇기 때문에 끝내라가 아니고 너희들이 불가능하다고 하는 거기에 대하여 너희들이 해결을 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신 이 말씀에 오늘 우리가 들을 메시지가 있습니다. 주님은 그 수많은 무리들을 향하여 먹을 것을 너희가 해결하라고 했습니다. 너희 안에 해답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예수님이 하신 이 말씀의 진의를 모르고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 말씀을 불가능한 말씀으로 받고 있지만 예수님은 답이 너희 안에 가까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여러분이 겪고 있는 그 문제, 그 고통, 그 짐은 여러분의 짐 속에, 여러분 자신 안에 해답이 있다는 것을 인식하기 바랍니다. 우리 안에 문제만 있는 게 아니라 하나님은 그 문제 안에 답까지 함께 두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 답을 발견하기 바랍니다. 그 답을 붙잡기 바랍니다. 그 답을 활용하기 바랍니다.

가까이에 답이 있다

제자들이 먹을 게 있는가 찾아보니까 한 아이가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한 아이의 식사입니다. 그런데 안드레가 말하기를 “여기 한 아이가 있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졌나이다. 그러나 그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삽나이까?” 주여,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하셨지만 우리가 먹을 것을 찾아보니까 이것밖에 없습니다 라는 이야기입니다. 계속 절망입니다. 계속 주님이 하신 말씀에 대하여 제자들은 답을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가까이 답을 두시고 제자들에게 명령을 하신 것입니다.
성경에 여러 가지 사건을 보면 같은 원리입니다. 아람의 나아만 장군이 나병이 들었습니다. 그때 그 집에 이스라엘 포로로 끌려온 소녀 아이가 주모에게 이런 말을 합니다. “이스라엘의 선지자 앞에 가면 내 주인의 병이 나으리이다.” 주모가 그 말을 나아만에게 아뢰고 나아만이 엘리사를 찾아갑니다. 결국 엘리사의 말대로 그는 요단강에 일곱 번 몸을 담그고 깨끗하게 병 고침을 받습니다. 나아만 장군이 병을 고친 이 기적은 자기 집 안에 있는 계집아이의 말로부터 시작이 되었습니다. 자기 집에 있는 계집아이에게 답이 있었습니다. 그것을 계집아이가 말함으로 그 말을 받아들였고, 그 말에 순종하고 그 말을 따라서 나아만이 하나님의 기적을 보았던 것입니다.
우리에게 불가능하다는 판단이나 결정은 수없이 많습니다. 역사 속에 과학자들도 불가능을 선언했습니다. 1901년 인간의 비행을 가능하게 하는 실제적인 기계조립은 불가능하다고 했습니다. 1926년 인간이 달에 가겠다는 생각은 근본적으로 불가능하다, 절대로 인간은 그런 생각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과학자들의 생각입니다. 그러나 이 불가능을 뛰어넘은 지는 벌써 오래고 몇 백배로 발전을 하고 있습니다. 과학자들의 이론이 불가능하다는 거기에만 머물렀다면 오늘 인류의 문명은 비참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 불가능을 넘어서는 기술의 문명, 인간의 가치관의 혁신, 삶의 질이 점점 높아갔기 때문에 오늘 우리의 이만한 행복이 있고 영광이 있는 것입니다.

불가능을 넘어서라

우리는 불가능을 넘어서야 합니다. 불가능을 뛰어넘는 가능이 일어나는 신앙생활을 하기를 축원합니다. 왜 하나님이 우리에게 길을 막습니까? 그 막힌 길에서 주저앉으라고 길을 막은 게 아니라 그 막은 길을 넘어서라는 것입니다. 그 막은 길을 열리게 되어 있는 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문제를 넘어서서 축복의 자리로 나아가라고 문제를 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가정의 문제는 가정 안에 답이 있습니다. 내 신앙생활의 갈등의 문제는 내 안에 답이 있습니다. 우리 교회의 문제는 우리 교회 안에 답이 있습니다. 밖에서 답을 구하지 말기 바랍니다. 멀리서 답을 구하지 마세요. 가까이에 답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오천 명을 먹이고 열두 바구니를 거두는 기적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여기에 변치 않는 원리와 목적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기적은 마술과 다릅니다. 마술은 본질적으로 속임입니다. 마술은 어떤 진리가 성립되는 원리가 없습니다. 마술은 청중을 속여야 진리가 되는 것입니다. 또 마술은 마술사마다 다릅니다. 그러므로 기적은 마술이 아닙니다. 기적은 철저한 원칙이 있고 철저한 목적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창조 때부터 이 원칙을 주시고 하나님의 창조의 역사는 모든 자연의 질서 안에서 기적의 원리로 역사하는 것입니다.
마늘 한쪽을 심으면 열 쪽으로 수확이 됩니다. 감자농사를 지어보신 분은 잘 아실 것입니다. 감자순이 난 한쪽을 심으면 잘 되면 열 개, 열 다섯 개의 감자알이 주렁주렁 달립니다. 농부도 보잘 것 없는 볍씨 하나는 주목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보잘 것 없는 볍씨 하나가 심어져서 알을 맺으면 백오십알 이상 다시 결실을 합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감자 한쪽을 심어서 그렇게 충만히 거두는 이것은 자연법칙이 아닙니다. 저절로 되는 것처럼 생각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은 안 되게도 하시고 되게 하시는 창조의 능력을 가진 분입니다. 아무리 우리가 볍씨를 심어놓아도 하나님께서 기상을 간섭하셔서 관리해주지 않으면 수확을 못합니다. 그러므로 이 추수의 결과는 하나님의 기적의 원리 안에서 얻어진 결과입니다. 심어서 거두는 이것이 창조법칙입니다. 하나님의 기적의 손길이 간섭하시기 때문에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이것이 우리 신앙생활에 똑같은 원리라는 것입니다. 오병이어가 오천명을 먹인 이것은 마술이 아닙니다. 여기에 감자 한쪽을 심어서 풍성하게 거두는 그 추수의 원리와 똑같은 창조의 원리가 도입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 기적을 우리가 한번 추적해 봅시다.

기적을 위한 요건

제일 먼저 예수님께서 그 오병이어를 가진 이야기를 듣고는 “그것을 내게로 가져오라”고 했습니다. 첫 번째, 주님의 손에 잡혀야 됩니다. 주님의 손이 움직이지 않고는 기적은 일어날 수가 없습니다. 내 손이 아무리 분주히 움직여도 기적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주님의 손이 움직여야 됩니다. 오병이어를 아이가 가지고 있으면 기적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안드레가 받아서 가지고 있어도 기적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주님은 그것을 내게로 가져오라고 하셨습니다. 감자 한쪽을 심는 것과 그 오병이어를 예수님 손에 잡혀드리는 것은 똑같은 원리입니다. 주님 손에 잡힌 그것은 심겨진 곡식과 같습니다. 심어졌기 때문에 이제는 싹이 나는 역사가 일어나듯이 예수님의 손에 잡힌 오병이어는 이제 한 사람의 식사거리가 아니라 오천명을 먹이고도 남는 풍성한 하나님의 식탁으로 변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기적을 바랍니다. 그러면서도 크게 오해하는 것은 주님 손에 잡혀드리지 않습니다. 무엇을 말입니까? 우리 안에 있는 것을 잡혀드려야 됩니다. 오병이어는 오천명 무리 가운데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다른 데 있었던 것을 가져온 게 아닙니다. 우리 가운데 있는 것을 주님 손에 잡혀드리는 일이 반드시 일어나야 기적은 시작됩니다. 아름다운 일입니다. 그 아이가 오병이어를 내어놓지 않을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리고 빌립이 선입관을 가지고 ‘주여, 이것으로 뭘 하시겠습니까?’ 하고 얼마든지 의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것을 내게로 가져오라고 하셨습니다. 주님 손에 잡혀드림입니다. 우리는 우리 몸을 주님께 바쳐 드려야 합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날 때부터 소경된 그 소경이 예수님께 무엇을 드렸는가를 여러분이 상식적으로 알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소경이 눈을 뜬 것도 기적입니다. 그러면 그 소경이 예수님께 무엇을 드렸는가? 아주 중요한 것을 드렸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시간을 원합니다. 우리가 주님을 위해 시간을 바쳐드려야 기적이 일어납니다. 나의 재능과 건강과 나의 물질과 나의 지식과 내게 있는 것으로 주님이 쓰시도록 잡혀드려야 기적이 시작됩니다. 그것을 하지 않고 거두기를 바란다면 이것은 하나의 마술이요 도박입니다. 복음은 도박의 원리나 마술의 원리는 전혀 용납하지 않습니다. 주님 손에 잡히는 헌신입니다.
두 번째, 순종의 열쇠입니다. 이 기적을 보면 처음부터 끝까지 주님이 순종을 요구합니다. 오병이어가 있다는 그 보고를 듣고는 그것을 내게로 가져오라고 했습니다. 그것을 가져가는 순종부터 일어나야 됩니다. 그리고 “이 무리들로 잔디에 앉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만오천명을 앉게 하는 것도 보통문제가 아닙니다. 질서정연하게 앉히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떡을 나누어주라고 하셨습니다. 순종하기 어려운 명령을 주님이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이 주님의 그 말씀을 순종했습니다. 하나님의 기적의 역사는 우리의 순종을 요구합니다. 성경에 나와 있는 모든 기적을 분석해보면 그 내면에 믿는 자의 순종이 함께 있습니다.
세 번째, 예수님의 감사입니다. 주님은 그 떡과 고기를 가지고 축사하셨습니다. 주님의 감사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축사하여 하나님의 손길을 움직이게 한 것입니다. 그 무리들을 먹이고도 남기는 기적의 역사를 베푸신 것입니다. 우리의 감사는 기적의 중요한 요건입니다. 감사하는 신앙생활 속에 하나님의 기적의 손길이 역사합니다. 우리가 원망하면서 사는 한 우리의 기도는 고발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 고발하는 기도는 하지 말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감동시키고 하나님의 손을 움직이는 기도를 해야 되는데 그것은 감사의 삶을 살면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감사가 섞인 기도를 해야 하나님이 움직입니다. 예수님은 인간입니다.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나신 인자 예수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기적을 베푸실 때 하나님 아버지 앞에 기도한 장면을 여러 곳에서 보게 됩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손을 움직이는 것입니다. 나사로를 살릴 때도 예수님이 감사기도를 했습니다. “이 일을 나타내심을 감사합니다.” 감사는 하나님이 감동합니다. 그리고 사람이 감동합니다. 하나님이 감동하셔야 하나님의 손이 역사하시고 거기에 기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한 여성도가 남편의 술주정 때문에 속이 매일 상합니다. 십여 년 동안 이 술꾼 남편이 자기를 괴롭힙니다. 그날 밤에도 술이 만취되어 들어와서는 세상모르게 곯아 떨어져 잠을 자고 있습니다. 그 광경을 보는 이 부인은 속이 상해서 잠을 이룰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잠을 자지 못하고 시간을 보내고 있는 중에 목사님의 설교가 생각이 났습니다. “범사에 감사하라!” ‘이런 경우에도 감사해야 되나? 그래도 성경말씀에 범사에 감사하라고 했으니까 감사기도를 해보자’ 하고는 그 속상한 그 자리에서 감사기도를 시작했는데 처음에는 기도가 잘 안 됩니다. 그런데 성령께서 이 여성도의 기도를 도우셔서 감사의 기도가 입에서 줄줄 나옵니다. 가만히 보니까 이 남편이 십여 년간 자기를 실망시켰지만 그래도 가정을 지탱하고 남편이라고 있는 게 참 감사하구나! 그 생각이 들어서 감사했습니다. 또 이렇게 만취되어서도 남의 집 안 가고 우리 집에 오는 게 참 감사하구나! 그걸 봐도 감사하고, 언젠가는 술을 끊고 좋은 남편 되겠지 하는 가능성을 가지고 남편을 보니까 또 감사하고, 토요일은 더 만취가 되는데 그러다보니까 주일날 밖에 안 나가고 집을 지켜 주니까 주일봉사하기 좋아서 감사하고, 전에는 전부 원망했던 제목을 거꾸로 다 하나님 앞에 감사했습니다. 그런데 이 남편이 갈증이 나서 눈을 떠 보니까 아내가 옆에서 뭐라고 감사의 기도를 하는데 자세히 들어보니 자기 때문에 더 감사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자기를 봐도 형편없는 남자인데 이런 남편을 두고 감사를 한다? 이 남편이 감동을 받은 것입니다. 남편이 그 이튿날 “여보, 지난밤에 당신이 감사기도를 하던데 날 두고 그렇게 감사기도가 되오?” “그럼요.” 사실은 이 부인이 십여 년 동안 새벽마다 남편이 술 끊으고 예수 믿으라고 기도했는데 그때까지 기도응답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감사기도 한방 만에 남편이 감동을 받고 예수를 믿어주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제는 고발성 기도를 그만하고 감사기도를 하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손길이 간섭합니다. 예수님은 기적을 이런 원리로 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보잘 것 없는 오병이어, 그 천진한 아이가 가지고 있는 그것을 가지고 역사하신 것입니다.

제로와 온전

오늘 우리가 근본적으로 생각해야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무슨 의미나 수치를 가지고 대하시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성경을 잘 보면 하나님이 해도 너무 합니다. 우리를 완전히 제로상태로 계산하는 것입니다. 너희들은 아무 것도 아니다, 너희들은 죄인이다, 너희들은 죄와 허물로 죽었다, 너희들은 하나님의 심판아래 있다, 너희들은 병들어야 되고 죽어야 되고 지옥에 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처음부터 제로로 계산하고 우리를 대했습니다. 우리가 제로라면 우리가 하고 있는 일도 제로이고,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도 하나님 앞에 하나도 내세울 것 없습니다. 가지고 있는 것도 다 무효입니다. 우리가 한 일도 무효이고, 가진 것도 무효이고, 우리 존재 자체가 하나님 앞에 무효입니다. 그런데 이런 제로인간을 여호와 하나님의 손길이 함께 하여 모든 것을 완성시킨 것이 바로 구원입니다. 이것이 신앙의 원리입니다. 오늘 우리가 여기 나아와서 예배드리는 이것은 하나님의 손길이 임하여 우리를 온전케 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이름을 부를 자격이 없습니다. 예배드릴 자격이 없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할 자격이 없습니다. 하나님을 순종할 자격이 없습니다. 근본적으로 우리는 제로 존재입니다. 그런데도 오늘 우리가 주님 앞에 어떻게 삽니까? 아무 것도 아닌 그것을 지금 주님이 가져오라는 것입니다. 너희 가운데 있는 오병이어는 아무 것도 아니지만 그것을 내게로 가져오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주 앞에 헌금하면서 대단한 것을 드리는 것처럼 오만하면 안 됩니다. 내가 주 앞에 일억을 드려도, 십억을 드려도 그것은 하나님 앞에 제로입니다. 우리가 계산할 때 일억이니 십억이니 계산하는 것이지 하나님은 그것을 제로로 보십니다. 아무 것도 아닌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왜 하나님께 드리면서 대단해 하고 교만해 하고 오만해 하고 그것을 왜 자꾸 기억합니까? 헌금한 추억을 지워 버리기 바랍니다. 아무리 귀한 것을 드려도 하나님 앞에 근본적으로 그것은 제로입니다. 하나님이 그게 있으면 풍족하고 그게 없으면 궁색합니까? 하나님은 그런 분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우리 것을 가져오라고 하십니다. 내가 너의 것을 붙잡고 너희들의 순종을 통하여 기적을 베풀리라는 것입니다.

맺는 말

지금 내가 못하고 있는 일, 내가 앞으로 못 나아가고 있는 그 한계, 그것은 결코 고난이 아닙니다. 그것을 넘어서면 하나님이 인도하는 축복의 역사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원망하고 좌절하고 의심하고 방황하는 것은 큰 불신앙입니다. 그것을 뛰어넘어야 합니다. 의심을 넘어서십시오. 방황을 넘어서십시오. 좌절을 넘어서십시오. 낙심을 넘어서십시오. 그것을 넘어서야만 하나님의 축복의 손길이 다가오는 것입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은 바로 그 메시지를 오늘 우리 시대에 들려주는 것입니다. 조그마한 그것으로 일어났던 하나님의 놀라운 기적의 역사, 이것은 오늘 우리의 일상의 경험입니다. 큰 것을 원하는 하나님이라면 우리는 하나님의 기적을 받을 자격이 없습니다. 그러나 오병이어를 가져오라는 주님 앞에 우리도 얼마든지 드릴 수 있습니다. 또 드릴 것도 있습니다. 이 축복의 역사가 여러분의 생애에 충만하기를 기원합니다.

출처/이용호 목사 설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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