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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기쁨

주안에서 기뻐하는 성도 (빌4:4)

by 【고동엽】 2022. 7.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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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안에서 기뻐하는 성도  (빌4:4)

(빌 4:4)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카네기 공대의 졸업생들을 상대로 진행된 실험에서 재능이 있고 머리가 똑똑한 사람의 성공확률은 15%이내였고 85%이상이 인간관계가 성공의 핵심이었다고 합니다.
인간관계는 무엇으로 알 수 있을까? 수만 명의 사람을 백만장자로 만들었던 브라이언 트레이시는  인간관계는 얼마나 잘 웃느냐에 따라 결정된다고 단언했다합니다. 사람과 사람사이가 멀어지기 전에 나타나는 현상은 웃음이 없어진다고 합니다. 이혼하는 부부관계의 대표적인 증상은 웃음이 사라진다합니다. 고객에게 웃음을 줄 수 있다면 그 세일즈맨은 탁월한 성과를 낸다합니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사가의 기록"에 “인간은 상대의 웃는 모습을 보고 그 사람의 됨됨이를 알 수 있다. 당신이 상대를 전혀 알지 못하는데도 그 남자의 웃는 모습에 호감을 느끼게 된다면, 당신은 '그 남자는 착한 사람'이라고 확신 있게 말할 수 있다.'는 말이 있다합니다.
웃음은 인간관계의 핵심이라 하기도 합니다. 모든 사람은 잘 웃고 유머 있는 사람에게 매력을 느낀다합니다. 그런 사람과 함께 있고 싶어한다합니다. 웃음을 선사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로부터 호감을 사게 된다합니다. 한번 시험 삼아 언제나 웃고 있어보면 반드시 예전보다 몇 배나 많은 사람들로부터 호감을 사게 될 것이라 합니다. 웃어 보면 좋은 일이 틀림없이 일어난다합니다.

  한 랍비가 제자들을 데리고 시장에 갔습니다. 여러 가지 물건들을 파는 사람과 필요한 물건들을 사러 나온 사람으로 시장 안은 발디딜 틈도 없었어요. 랍비가 제자들에게 외쳤습니다. "이 시장에는 영원한 생명을 얻을 만한 자격이 있는 사람이 있다네." 제자들이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며 웅성거렸습니다. "이런 시장 바닥에 영원한 생명을 얻을 만한 사람이 있다고?" "있기는 뭐가 있겠어? 이 안에 그렇게 훌륭한 사람이 어디 있겠나?" 어떤 제자가 랍비에게 물었습니다. "선생님, 혹시 아픈 사람을 치료해 주어 하나뿐인 사람의 목숨을 구해 주는 약사입니까?" 랍비는 고개를 저었습니다. "그러면 선생님 사람들에게 지혜를 주는 책을 파는 사람입니까?" 그런데도 이번에도 랍비는 고개를 저었습니다. 그 때 그들 옆으로 어떤 두 사람이 지나갔습니다. 그들은 아주 허름한 옷차림을 하고 있었어요. 랍비가 그 사람들을 가리켰습니다. "바로 저 사람들일세." 제자들은 어리둥절해졌습니다. 제자들은 그 두 사람을 쫓아가 물었습니다. "여보세요. 실례지만 당신들은 어떤 귀중한 것을 파나요?" 그 두 사람이 대답했습니다. "우리는 그저 보잘것없는 광대랍니다. 쓸쓸한 사람들에게는 웃음을, 싸우는 사람들에게는 화평을 가져다주지요." 비록 보잘것없는 광대지만 그들이 하는 일은 외롭고 쓸쓸한 사람들에게 웃음과 평안을 가져다주는 귀중한 일입니다. 이 광대들의 훌륭한 점은 자신들의 비천한 처지를 비관한 것이 아니라 외롭고 쓸쓸한 사람들에게 관심과 사랑을 가지고 그들을 위로함입니다. (인터넷정보클럽-  웃음과 평안)


사도 바울은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고 말씀합니다. 기쁨이란 누구나 다 원합니다. 그런데 이 기쁨은 세상에서 얻는 기쁨과 주님께로부터 오는 기쁨입니다. 세상 기쁨이란 육신의 기쁨을 의미합니다. 육감적인 기쁨입니다.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입니다. 이 기쁨은 환경에 따라서 달라지는 외적인 기쁨입니다. 그러므로 맑은 날은 기쁘고 흐린 날은 슬픕니다. 건강하면 기쁘고 병들면 슬픕니다. 순경에는 기뻐하고 역경에는 슬퍼합니다. 젊어서는 기뻐하고 늙어서는 슬퍼합니다. 살 때는 기쁘고 죽을 때는 슬픕니다. 그러므로 세상적인 기쁨은 일시적인 기쁨이요, 잠깐 있다가 없어지는 기쁨입니다. 지는 해와 같아서 점점 없어집니다.
서양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하루를 기쁘게 살려면 이발을 하라. 한 주간을 기쁘게 살려면 새 자동차를 사라. 한 달을 기쁘게 살려면 결혼을 하라. 일년을 기쁘게 살려면 새 집을 지으라. 의미 있는 말입니다. 세상 기쁨은 잠깐 지나가 버립니다. 이발하면 하루는 상쾌해도 다음 날은 그저 그렇습니다. 새 자동차를 사면 한 주간 동안은 새 자동차 타는 맛이 있습니다. 그러나 한 주간 지나면 그것도 별것 아닙니다. 결혼을 하면 한 달 동안은 정말 꿀처럼 달콤합니다. 그래서 밀월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한 달이 지나면 씁쓸할 때가 있습니다. 세상의 기쁨이라는 것이 그렇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주시는 기쁨은 세상이 주는 기쁨과 같지 아니합니다. 주님이 주시는 기쁨은 영혼의 기쁨이기 때문입니다. 생명의 기쁨이요, 양심의 기쁨이요, 목마른 영혼이 생수를 마시는 기쁨이요, 거룩한 기쁨입니다. 그러므로 환경과 조건에 상관없이 기뻐할 수 있습니다. 이 기쁨은 영원한 기쁨입니다.

예수님은 잃어버린 것을 다시 찾는 기쁨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양을 비유하여 말씀하셨습니다. 백 마리의 양 중에서 한 마리가 길을 잃어버렸다고 한다면 아흔 아홉 마리의 양을 그대로 두고 한 마리의 양을 찾지 않겠느냐? 고 말씀하셨습니다. 한 영혼을 소중하게 여기십니다. 생명의 가치는 그 숫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생명 그 자체가 중요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한 생명은 천하보다 귀하다(마 16:26)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골짜기에서, 광야에서, 들판에서, 방황하는 길 잃은 양을 구하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셨고 찾아 기뻐하십니다. (눅 15:5-7)에 또 찾은즉 즐거워 어깨에 메고  집에 와서 그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았노라 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 하십니다.

잃어버린 동전을 비유하여 말씀하셨습니다. 열 개의 동전이 있었는데 그만 실수로 한 개의 동전이 마루 밑으로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이런 일을 당하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분명히 찾을 것입니다. 어두워서 찾기 힘들면 등잔을 손에 들고 찾을 것입니다. 마루 밑에 손을 넣고, 막대기를 넣어서 찾을 것입니다. 땀을 흘리면서 찾다가 마침내 잃어버린 동전을 찾았다면 어떻겠습니까? (눅15:9,10)에 또 찾은즉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잃은 드라크마를 찾았노라 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 기쁨이 되느니라 합니다.

돌아온 아들을 통해서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죄인 하나가 회개하고 돌아오는 것을 매우 기뻐하십니다. 죄인의 자리를 걷어버리고 신앙의 자리로 돌아오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방송 프로그램에서 가족들을 다시 찾았을 때 잃어버린 가족을 품에 안고 하염없는 눈물을 흘리는 가족들의 모습처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께서는 회개하고 돌아오는 죄인 하나를 품에 안고 기뻐하십니다. (눅 15:24)에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저희가 즐거워하더라 합니다.

유대인으로서 나치 독일의 히틀러의 핍박 아래서 잔인한 고 통을 당했던 유명한 세계적인 심리학자 빅터 프랭클 박사는 그가 나치의 고문을 받고 그 감옥소에서 그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받으면서도 한결같은 마음에 평정의 자세, 또 인간다움의 태도를 잃어버리지 않고 그가 그 감옥 생활을 잘 견뎌냈던 그 비밀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감옥에서 나온 후에 받았을 때 프랭클 박사는 이런 대답을 남겼다합니다. “그 것은 나의 고난이 장차 가져올 나의 삶에 어떤 유익이 있겠는가를 저는 줄기차게 묵상했습니다. 저는 그것을 기도했습니다. 신이여, 내가 이 시험과 고통의 시간이 지났을 때 그 것이 나의 삶에 어떤 유익이 될 수 가 있겠습니까? 그리고 이것 때문에 내가 변할 수 있었던 내 삶의 모습, 그리고 이 고통을 견디는 삶의 의미, 희망의 문제 이런 것들을 묵상 하고 이것을 통해서 전세계 사람들 에게 기여할 수 있는 부분을 계속 묵상했고 이런 희망이 나로 하여금 이런 고통을 견딜 수 있도록 만들었습니다.”
우리가 시험 중 에도 기뻐할 수 있다면 그것은 시험의 유익을 묵상할 때 가능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시험은 우리에게 어떤 유익을 줄 수가 있을까요? 시험 이 주는 유익은 무엇일까요? (약 1:3)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옥한흠 목사님이 그 교회 이 송달 장로님의 이야기를 이렇게 하십니다.“장로님은 특별한 분입니다. 회계학을 전공하신 분으로, 우리나라에서는 아주 정상급에 있는 회계사입니다. 과거 한보사태 때 국가의 요청을 받아 그 기업의 재무구조를 전부 분석, 정리, 평가하는 책임자로 있었을 만큼 탁월한 분입니다. 우리 교회에서는 재정을 담당하고 게셨습니다. 이제 50대 중반인데, 그가 지금 꿈꾸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회사를 은퇴하면 연변과학기술대학에 가서 경제학, 회계학을 가르치면서 학생들을 전도하고, 중국에 복음을 전하는 일을 위해서 평생을 바치겠다는 꿈입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장로님인지 모릅니다. 그런데 6개월 전에 병원에 가서 진찰을 했는데 폐암이라는 것입니다. 게다가 제대로 손을 쓸 수 없을 정도로 암세포가 너무 많이 전이되어 있었습니다. 병원에서도 다른 대안이 없어 그동안 방사선 치료만 계속 해왔는데 별다른 진전이 없었습니다. 이제는 몸 이곳저곳에서 통증이 심해졌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몰핀 주사를 맞고 있을 정도입니다. 이 정도의 병을 가지고 병상에 누워있는 환자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 얼굴에 무슨 웃음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마음을 가진 사람이 그런 병을 앓고 있다니 이해가 됩니까? 그런데 그 병실을 방문한 사람들마다 깊은 감동을 받습니다. 장로님의 얼굴이 어린아이와 같기 때문입니다. 그 얼굴에 웃음이 가득 피어 있습니다. 오히려 찾아간 사람이 민망할 정도입니다. 저도 몇 번 가서 보고는 똑같이 감동을 받았습니다. 한두 번은 사람이 위선할 수 있습니다. 가장도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왔으니 적어도 장로라는 체면에 어떻게 찡그리고 있을 수 있습니까? 그러나 그 병상에서 변함없이 수개월 동안 그럴 수가 있습니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특별한 은혜가 그에게 있는 것입니다. 대각성전도집회가 끝난 그 다음날 아침이었습니다. 우리 교회 부목사님 한 분이 병상을 방문했습니다. 그런데 그 장로님이 이렇게 말씀하시더라는 것입니다. "목사님, 오늘은 특별히 기쁜 날입니다. 너무너무 기쁜 날입니다." 그래서 속으로 '의사가 병이 좀 나았다고 했나...' 하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더라는 것입니다. "목사님, 이번 대 각성 전도 집회 때 저는 병상에 있어 참석을 못해 태신자만 등록시켰거든요. 그리고는 제가 등록한 부부를 놓고 계속 기도했는데, 그 태신자가 마지막 날 저녁에 참석해서 예수 믿겠다고 일어섰대요. 그리고는 예수를 믿기고 결신을 했더니 얼마나 마음이 기쁘고 감사한지 제 생각이 나서 그 다음날 아침 일찍 저를 찾아와 '장로님, 그동안 기도해주셔서 고맙습니다.' 하고 인사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장로님이 너무 기뻐 견디지 못하다가 마침 목사님이 오시니까 막 털어놓았던 것입니다. "너무너무 기뻐요. 목사님." 하고 기쁨을 아직도 삭이지 못한 채 말입니다. 자기가 지금 죽어가는 마당에, 살지 죽을지 모르는 처참한 병상에서 한 가정이 구원 받았다고 해서 그렇게 기뻐하는 것이 보통 일입니까? 흔히 있을 수 있는 일인가요? 예수 믿고 돌아온 그 부부가 누구인지 물었더니 그 장로님의 자가용 기사였습니다. 그러니 같이 타고 다니면서 얼마나 전도를 많이 했겠습니까? 그런데도 귀를 막고 안 듣던 사람들이 이제 예수 믿고 스스로 하나님 앞에 돌아왔으니 얼마나 장로님이 감사했는지 모릅니다. 병상에서 그렇게 중병을 앓고 있으면서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그 기쁨을 가슴에 안고, 그 기쁨을 주체하지 못하는 장로님이 있는데, 우리가 건강한 몸으로 예배드리고 있으면서 하나님 아버지가 기뻐하는 그 기쁨을 누리지 못한다면 무언가 문제가 있지 않을까요?”

인생의 450가지 이야기라는 책에서 거스트 앤더슨은 캐나다의 앨버타 동쪽에 위치한 농촌의 교회를 방문했던 일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곳은 8년째 가뭄이 들어 농민들의 경제상황은 희망이 없는 것만 같았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빈곤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계속 모여 하나님을 경배하고 찬양하였습니다. 특히 앤더슨은 하박국서의 말씀을 인용한 농부의 간증에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그 농부는 깊은 감동을 품고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 찌라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라(합 3:17-18).”“저 귀한 성도는 진정한 기쁨의 비밀이 무엇인지를 발견하였구나!”라고 앤더슨은 생각했습니다. 돈으로 살 수 있는 좋은 물건에서 기쁨을 찾는 것이 잘못은 아니나 우리의 행복이 결코 그것들에 좌우되어서는 안 됩니다. 만일 우리의 성취감이 물질적인 소유로 인해 좌우된다면, 그것들을 잃었을 때 우리는 좌절게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님 안에서 기쁨을 찾는다면, 어떤 것도, 심지어 경제적인 빈궁조차도 그 기쁨을 파괴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알고 믿는 사람들은 가난 속에서조차 기뻐할 수 있습니다!

  어느 부잣집 노인이 말을 타고 행차하는 앞길에서 거지같아 보이는 사람이 흥겹게 춤을 추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노인은 그에게 물었습니다. "나는 돈이 많아도 춤출 일이 없는데 도대체 너는 무엇이 기뻐서 이렇게 춤을 추는 거냐?" 그러자 그 사람이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제가 기뻐서 춤추는 이유가 세 가지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께서 나를 가장 귀한 사람으로 지어 주신 것입니다. 둘째로, 비록 나는 절름발이 장애자나 세상에는 나보다 더한 장애자가 많기 때문입니다. 셋째로, 세상에서는 날 부러워할 사람이 없을 것이나 죽으면 하나님 품안에 있을 것을 생각하니 너무 기뻐서 춤을 추는 것입니다."

위대한 수학자요 천문학자이며 과학자였던 유명한 코페르니쿠스(Copernicus, Nicolaus)가 죽음을 앞에 두고 유언을 남겼다합니다. 그 유언을 따라 그가 묻혀있는 묘비에는 다음과 같은 글귀가 새겨져 있다합니다.“나는 바울이 가진 특권을 구하지 않는다. 나는 베드로에게 주신 능력도 구하지 않는다. 나는 다만 십자가에서 강도에게 주신 용서를 원한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인간으로서 누릴 수 있는 가장 커다란 기쁨은 용서받는 기쁨입니다.

출처/강성찬 목사 설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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