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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가모 교회 (계 2:12-17)

by 【고동엽】 2022. 7.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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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가모 교회  (계 2:12-17)

버가모는 아시아 최대의 수도로서 로마의 총독이 주재하는 도시였습니다. 또한 버가모는 도서관으로도 유명한 곳입니다. 당시 인쇄술이 발달되지 않아 손으로 쓰는 시대에 20만권 이상의 양피 두루마리 장서를 소장하고 있었다는 것은 참으로 굉장한 것이었습니다. 버가모에는 제우스 신전이 있었고, [아스클레피우스]라고 하는 뱀 신을 섬기는 신전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황제 숭배가 극렬한 곳이었습니다.

바로 이렇게 긴장된 지역에 세워진 버가모 교회입니다. 이런 지역에 존재하던 버가모 교회가 어떤 승리를 얻었으며, 어떻게 세속화되어 갔는지를 살펴보면서 우리 아름다운 교회가 나아갈 방향에 대해서 생각해 보는 것은 참으로 의미가 있는 일입니다. 교회는 성도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우리 구성원 한사람 한사람이 믿음으로 살 때 소망 교회는 주님으로부터 칭찬을 받게 될 것입니다. 아시아의 일곱 교회의 모습을 살펴보면서 그 시대에 존재했던 교회들의 장점만 갖추는 우리 교회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본문 12절에 "버가모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좌우에 날선 검을 가진 이가 가라사대"라고 했습니다. 여기의 “좌우에 날선 검”이란 주님의 전투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동양은 한쪽 칼날만 발달시키고 있지만 로마의 군인들은 '시카르'라고 불리 우는 좌우에 날선 검을 가지고 세계를 정복했습니다.
주님께서 양날의 칼을 들고 나선 것은 교회를 괴롭히는 원수들을 진멸하시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회개하지 않는 자들을 향하여 주님이 싸우실 것이라고 하십니다(16절). 이는 세상과 타협하고 잘못된 사상과 혼합된 그릇된 교리들이 만연한 시대 속에서 교회가 거기에 동화되고 물들어 버린다면 주님은 그런 잘못되고, 거룩치 못한 부분을 잘라 내기 위해 검을 사용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편 7편 12절에도 "사람이 회개치 아니하면 저가 그 칼을 갈으심이여 그 활을 이미 당기어 예비하셨도다"라고 했습니다.

본문 13절에 "네가 어디 사는 것을 내가 아노니 거기는 사단의 위(位)가 있는 데라 네가 내 이름을 굳게 잡아서 내 충성된 증인 안디바가 너희 가운데 곧 사단의 거하는 곳에서 죽임을 당할 때에도 나를 믿는 믿음을 저버리지 아니하였도다"라고 했습니다.
버가모 교회의 장점은 사단의 위가 있는 곳에 살면서도 주님의 이름을 굳게 잡고 주를 믿는 믿음을 저버리지 않은 것입니다. 여기 '위'는 보좌를 말합니다. 다시 말하면 사단의 본부가 있는 곳입니다. 사단의 위(位)[우상의 본거지]라는 말입니다.

버가모 교회는 이런 우상의 본거지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여기 '산다'는 것은 “잠깐 거하는 장소가 아니라 영구적으로 뿌리를 박고 산다”라는 뜻입니다. 아주 중요한 의미가 있는 말입니다. 박해(迫害)가 있고 타협주의와 혼합주의가 있어도 교회는 그곳을 회피하지 않고 그곳에 머물면서 의를 나타낼 책임이 있다는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성도는 누구나 하나님께서 그에게 허락한 그 위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 위치에서 충성해야 합니다. 철새 교인은 주님이 싫어하십니다. 교회 형편이 좋지 않아도, 내 맘에 들지 않아도 그 위치에서 항구적으로 있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요즘 대형교회들이 부흥하는 것은 전도를 받아서 교인된 사람들도 있겠지만 대부분 철새 교인들의 수평이동에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는 현재 우리사회가 얼마나 부패되어지고 편리주의에 지배되어져가고 있는가를 반증해 주는 모습이기도 합니다.

당시 로마 사람들은 '가이사는 우리의 주가 되신다'고 고백했습니다. 소위 황제 숭배가 극성했습니다. 그러나 버가모 교회는 이것을 거부했습니다. '가이사가 우리 주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주가 되신다'고 고백했습니다. 이것은 초대교회의 신앙고백이기도 합니다. 베드로는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면서 “이스라엘 온 집이 정녕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고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행 2:36)
이처럼 저들은 죽음 앞에서도 주님의 이름을 굳게 잡았습니다. 저들은 생명을 위협하는 사단의 본거지에서도 주님의 이름을 붙잡았습니다. 주님의 이름을 붙잡는 일은 참으로 중요한 일이며 그것은 주님께 칭찬받는 일입니다. 그러기에 주님께서는 빌라델비아 교회를 향하여 “... 네가 적은 능력을 가지고도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하지 아니하였도다”라고 칭찬을 해 주셨던 것입니다.(계 3:8)
이처럼 버가모 교회는 어려운 상황 가운데 있었지만 믿음을 굳게 지키었습니다. 이 일로 버가모 교회에 안디바라는 순교자가 나왔습니다. 성경에는 [안디바]라고 하는 인물에 대해서 기록이 없지만 주님은 그를 향해 '내 충성된 증인'이라고 했습니다. 여기 안디바는 헬라어로 '안티파스'인데 '안티'는 '엔타이'로 '반대하는 것'을 말하고, '파스'는 '모든 것'을 뜻하는 단어입니다. 다시 말하면 [안디바]라는 이름은 '모든 것을 반대하는 말'입니다. 즉 주님 외에는, 진리 외에는 모든 것을 반대했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이름을 붙잡고 모든 것을 반대하면서 신앙을 철저하게 지켰다는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신앙이 있어야 합니다. 영적인 일을 위해 세속적인 것을 반대할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을 위해서 세상 것도 포기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세상 것을 포기하지 못하면서 주님을 따를 수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마 16:24에서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고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날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말씀입니다. 이러한 믿음을 가지시고 주님을 따를 수 있어야 합니다.

본문 14절과 15절에 "그러나 네게 두어 가지 책망할 것이 있나니 거기 네게 발람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발람이 발락을 가르쳐 이스라엘 앞에 올무를 놓아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였고 또 행음하게 하였느니라 이와 같이 네게도 니골라당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지상의 교회는 결코 완전할 수가 없음을 보게 됩니다. 시종일관(始終一貫)한 모습으로 주님을 따른다는 것은 참으로 어렵습니다. 성령으로 시작했다가 육체로 마치는 인생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데마”와 같은 경우입니다. 데마가 처음부터 세상을 사랑했던 것은 아닙니다. 골 4:14에서 “사랑을 받는 의원 누가와 또 데마가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고 말할 정도로 데마는 누가와 함께 바울에게도 참으로 필요하고 유익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데마는 끝까지 신앙을 지키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딤후 4:10에서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 그레스게는 갈라디아로,디도는 달마디아로 갔고”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는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안타까운 일로 끝나면 되지만 결국 주님을 떠나는 자들이 많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빌립보교회의 성도들을 향하여 빌 2:12에서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 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고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버가모 교회는 외적인 핍박은 이겼지만 속으로 파고드는 유혹(誘惑)은 이겨내지 못했습니다. 순교자까지 배출한 교회가 이단 사상을 수용함으로 교회가 점점 썩어지게 되었습니다. 여기 발람(뜻: 백성을 파멸시키는 자)은 메소포타미아에서 예언을 하던 거짓 선지자였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은혜보다도 돈을 더 사랑하는 선지자였습니다. 그의 계략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 전체가 거의 다 망할 뻔했습니다. 이스라엘이 모압 지경에 가까이 왔을 때 모압 왕 발락이 제일 무서워했던 것이 이스라엘입니다.

발락은 발람이 돈을 좋아하는 것을 알고 그에게 뇌물을 주어 이스라엘을 저주하라고 요구했습니다. 참선지자라면 가지 말아야 하는데 돈이 탐났기 때문에 이스라엘을 저주하러 갔습니다. 그가 가는 길에 하나님의 사자가 칼을 들고 나타났지만 발람 선지자는 보지 못하고 나귀가 보고 피하려고 담 쪽으로 비껴가려고 하다 발람이 상처를 입었습니다. 이에 채찍으로 나귀를 때리자 나귀가 말을 하였습니다. "내가 네게 무엇을 하였기에 나를 이같이 세 번을 때리느뇨"(민22:28) 나귀와 대화하면서도 나귀와 말하고 있음도 알지 못하는 참으로 한심한 선지자였습니다. 결국 발람은 모압 왕에게로 갔고 그가 시키는 대로 제단 위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저주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신이 저주 대신 축복을 하게 했습니다. 하나님이 복주시려고 하는 사람을 감히 누가 저주할 수가 있겠습니까? 결국 세 번씩이나 실패하자 나중에 한 계략을 알려 주었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 우상 제물을 놓고 여인들을 두어서 그들로 우상 제물을 먹게 하고 그 여인들과 간음케 하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여인들은 애굽에서 종살이하고 이제 광야 길을 지내 왔기에 거친 피부를 가졌을 것이고 여자다운 면이 많이 상실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상 제물을 차려 놓고, 몸만 다듬은 모압 여인들의 나긋나긋한 춤과 노래는 이스라엘 남자들의 마음을 빼앗아 버리기에 충분했습니다. 모압 여인들의 황홀한 몸짓에 그만 정신을 잃게 되었습니다. 저들의 머리 속에는 모압 여인들의 야릇한 자태만 떠올랐을 것입니다. 그래서 민수기 25장 1절을 보면 "이스라엘이 싯딤에 머물러 있더니 그 백성이 모압 여자들과 음행하기를 시작하니라"고 고발하고 있습니다. 결국 이 죄로 염병이 돌아서 이스라엘 사람 2만 4천명이 죽음을 당했습니다(민25:9).

그런데 사단은 우상 숭배에 동참케 했고, 간음죄를 짓게 함으로써 이스라엘을 타락케 한 그 동일한 수법으로 지금 버가모 교회를 공격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에베소 교회는 니골라당의 행위를 미워함으로 칭찬을 받았는데 버가모 교회는 니골라당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생겼습니다.
니골라당의 교훈은 무율법주의자들입니다. 은혜의 시대에, 복음의 시대에 무슨 율법이 필요하느냐는 것입니다. 이것은 곧 무절제로 나아가고 방종으로 나아갑니다. 이는 구원파에서 주장하는 사람들과 같습니다.
교회나 성도는 어려운 핍박이 일어날 때 오히려 더 열심히 신앙을 지켜 가지만 박해가 없어지고 평안해지면 세상에 안주하려고 하는 것이 우리의 생리입니다. 우리는 어려울 때보다는 생활이 안정될 때 조심해야 합니다. 조금 씩 조금 씩 타협하다 보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만 하나님의 진노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경우에서도 올바른 신앙의 모습이 아닌 것은 결코 타협해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마귀는 우리에게 자꾸만 타협하게 만듭니다. 우리는 모세처럼 분별하는 지혜를 가지고 적당히 타협하는 것을 단호하게 거절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바로와 같이 유혹하는 마귀의 유혹을 거절할 수 있어야 합니다. “... 너희가 남정만 가서 여호와를 섬기라...”(출 10:10) “청컨대 나의 죄를 이번만 용서하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 구하여 이 죽음만을 내게서 떠나게 하라”(거짓 회개)(출 10:17)“... 너희가 가서 여호와를 섬기되 너희 양과 소는 머물러 두고 너희 어린 것은 너희와 함께 갈지니라...”(출 10:24)

본문 16절과 17절에 보면 "그러므로 회개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속히 임하여 내 입의 검으로 그들과 싸우리라.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감추었던 만나를 주고 또 흰 돌을 줄 터인데 그 돌 위에 새 이름을 기록한 것이 있나니 받는 자 밖에는 그 이름을 알 사람이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잘못되어 버린 버가모 교회를 향해 주님은 회개하라고 했습니다. 잘못된 길에서 돌아서라는 것입니다. 지금 이 순간부터 잘못된 삶을 뜯어고치라는 말입니다. 만약 회개치 아니하면 주님의 입의 검으로 싸우겠다고 했습니다. 주님은 버가모 교회를 향해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으라고 했습니다. 여기에 살 길이 있습니다. 회개할 뿐 아니라 성령이 교회에 하시는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만약 버가모 교회가 회개하면 주님께서는 두 가지 은혜를 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우리가 회개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세상에서는 잘못을 회개하여도 기회가 주어지지 않지만 사랑이 많으신 주님께서는 우리가 회개하기만 하면 용서해 주십니다. 그래서 행 8:22과 11:18에서 “그러므로 너의 이 악함을 회개하고 주께 기도하라 혹 마음에 품은 것을 사하여 주시리라... 저희가 이 말을 듣고 잠잠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가로되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도다 하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① 주님은 회개한 자에게 감추인 만나를 주시겠다고 했습니다. 만나는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40년 간 먹던 양식입니다. 이것은 또한 우상의 제물과 대조되고 있습니다. 만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 감추인 만나는 세상 사람들에게는 감추어진 그리스도를 나타냅니다.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 속에 사는 자는 만나로 만족을 누리며, 그리스도와 교제함으로 축복을 받습니다.
② 그리고 이기는 자에게 흰 돌을 주겠다고 했습니다. 흰 돌은 무죄를 나타내는 표시입니다. 당시 재판 때에 무죄와 유죄를 판결 내릴 때 흰 돌과 검은 돌을 사용했습니다. 유죄일 때는 검은 돌을 내밀고, 무죄일 때는 흰 돌을 내밀었습니다. 여기서 흰 돌은 어린양의 혼인 잔치에 들어갈 수 있는 표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버가모 교회는 주님의 이름을 붙잡고 믿음을 지킨 교회였습니다. 밖으로부터 몰려오는 핍박을 믿음으로 이겨낸 교회였습니다. 그러나 비진리가 은밀하게 교회로 밀려올 때 그것을 분별하지 못하고 비진리와 타협하고 동화되어 버린 교회였습니다. 세상의 쾌락이 우리의 신앙을 마비시킬 수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 버가모 교회의 약점을 극복하고 오직 예수 이름만으로 만족하며 사는 축복된 교회와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출처:한국교회 부흥설교 설교 정보수집 편집위원 협조와 추천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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