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옷 입음

by 【고동엽】 2022. 7.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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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베소서 4:17-24)

그러므로 내가 이것을 말하며 주안에서 증거하노니 이제부터는 이방인이 그 마음의 허망
한 것으로 행함같이 너희는 행하지 말라 저희 총명이 어두워지고 저희 가는데 있는 무지함
과 저희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 저희가 감각 없는 자
되어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여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되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를
이같이 배우지 아니하였느니라 진리가 예수 안에 있는 것같이 너희가 과연 그에게서 듣고
또한 그 안에서 가르침을 받았을진대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집이 깨끗하지 못한 집에 갈 때에는 이것이 또한 문제가 됩니다. 왜냐하면 바닥을 제대로
손질하지 못해서 여기 저기에서 흙이 나옴으로 저야 아무 것도 묻어도 상관이 없지만 주인
되시는 분은 그저 제 옷에 무엇이 묻을까봐 어쩔 줄을 몰라하는 것이란 말입니다. 그럴 때
이면 "괜찮아요. 낡은 옷입니다."하고 저는 마구 앉는데 주인으로서는 여간 미안해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가능하면 이런 집에 갈 때에는 이런 옷을 입고, 저런 집을 갈 때에는 저런 옷을
입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만 은 그렇다고 하루에 몇 번씩 옷을 바꾸어 입을 수
는 없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특별히 어려운 때가 종종 있는 것은 아침에는 장례식에
갔다가 조금 뒤에는 어린아이의 돌집에 가게될 때입니다. 그러니까 장례식을 위해 새까만
넥타이를 매었었는데 이제는 어린아이의 생일 집에 가야하는 것이란 말입니다. 그 때문에
넥타이를 가지고 다녀야 되는데, 이것 역시 옷입니다.
이와 같이 옷이라는 것은 그 분위기, 그 사람의 마음가짐, 그 당시의 기능적 역할 등에 전
부 관계가 되는 것입니다.
이에 오늘 본문 말씀은 일상 생활 속에서 그 누구에게나 있는 것을 비유로 하여 우리에게
진리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새 옷을 갈아입을 때마다 본문이 주시는 바 우
리의 마음도 새로워지는 상징적 의미를 살려갈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옛 사
람을 벗어버리고 새 사람을 입으라고 말씀합니다. 이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언제나 낡은
옷은 벗고 새 옷을 입는다는 마음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당시의 문화적인 배경을 보면 특별히 히브리 사람들에게 있어서 옷이란 귀한 것이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전해지는 이야기에 의하면 옷 하나를 가지고 할아버지가 입고 나면 아버지
가 입고, 다시 그것을 받아서 아들이 입는, 그러니까 3대를 입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죽은 사람이 있으면 그 시체로부터 옷을 벗겨 입을 정도였다고 하니 그 얼
마나 옷이 귀했겠습니까? 그 때문에 옛날에는 옷이 하나의 귀한 보화였던 것입니다. 생각해
보면 우리만 하더라도 이렇게 좋아진 것이 얼마 되지 않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 만큼 옛날
에는 옷이 귀한 것이었습니다.
다음으로 생각할 것은 옷은 신분을 말해주는 것이라고 하는 점입니다.
요즈음 우리들은 민주화를 해보겠다며 이런 저런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그 결과 잘 잘못을 떠나 구석구석에 많은 변화가 있는 것으로 보여집니다. 그 가운데 하
나가 바로 옷을 입는 양상입니다. 여기에는 귀천이 없습니다. 돈 많은 사람들이 비싼 옷을
입느라고 야단들을 합니다 만은 제가 보기에는 별로 비싼 것 같지도 않거니 그렇다고 특별
하게 멋있어 보이는 것도 아닙니다. 그렇게 비싸다는 옷이나 시장에서 값을 깎아가면서 싸
게 산 옷이나 그저 그게 그것처럼 비슷하게 보일 뿐 크게 차이나 보이는 것도 아닙니다. 이
는 그만큼 옷이 민주화된 것이라 하겠습니다.
특별히 학생들에게서 교복을 벗기고 머리를 기르게 한 것도 그렇습니다. 한창 자라는 나
이에 이런 저런 모습으로 변화를 부려보고 싶은 때인데, 이것을 군인처럼 제복을 입히고 머
리는 얼굴과는 어울리든 어울리지 않든 손톱 발톱 자르듯이 똑같이 잘라 놓았으니, 조금 잘
못하면 누가 누구인지조차 알아 볼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교복을 자율화하므로 민주
화에 대한 의식이 새로워지는 것은 물론 옷 자체가 민주화된 것입니다.
요즈음은 부하고 가난한 것이 옷에 의해서 구분이 되지 않습니다. 학생들의 교복을 자율
화하면서도 빈부의 차이가 옷으로 나타날까봐서 염려들을 하였습니다만은 처음에는 다소 그
런 현상이 나타날 수도 있었겠지만 결국은 청바지의 바람이 불고, 싼 옷을 멋으로 입는 청
소년다운 분위기가 조성되고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러한 현상이 남녀 노소에게 다같이
나타나는 것이고 보면 정말 옷이 민주화되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옛날에는 빈부 귀천 그 신분에 따라서 옷의 모양이나 질이 달랐던 것입니다. 또
한 갓이나 모자, 의관을 갖추는 모양이나 정도도 다 다른 것이어서 아무 것이나 자기가 쓰
고 싶다고 쓰거나 입고 싶다고 입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와 같은 현상은 옛날 우
리 나라에서 뿐만 아니라 로마나 헬라 사회에서는 물론 히브리 사람들에게는 더욱 엄격하게
나타났습니다. 그리하여 우선 제사장의 옷이 다르고, 왕과 왕족의 옷이 다르며, 귀족, 상민,
노예, 죄인 등 모두가 입는 옷이 다르므로 자연히 옷으로 신분을 구분하게 됩니다. 그러나
요즈음은 감옥에 가서 죄수들이 입은 옷을 보는 것 외에 군인들까지도 외출 시에는 사복을
하게 함으로 특별히 구별되는 것이 별로 없습니다. 군인에게는 분명 군인의 옷이 있음에도
외출 시에 사복을 하게 하는 것은 우리가 보아도 그렇습니다 만은 특별히 외국 사람들이 볼
때 일반 시내에 군인들이 왔다갔다하는 것을 봄으로 그들의 생각에 한국 시가지가 온통 군
인인 것을 보니, 그만큼 사회가 경직되고 전재의 위험 속에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공포와
혐오감을 가질 수 있다는 것에서 나온 발상인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이 얼마나 민주화가 된 것이겠습니까? 이제는 대통령의 옷이라고 해서 다른
데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여기 우리 중 조금 특별한 옷을 입는다고 해서 누구도 나
무라거나 상관할 자가 없습니다. 우리는 의식하지 못하고 있지만 그만큼 옷에 대한 우리의
의식도 문화도 민주화로 바뀐 것입니다.
그런데 옛날에는 옷이 신분을 나타내는 것이었기 때문에 더욱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옛 옷을 벗고 새 옷을 입으라고 하는 말은 바로 그 신분과 인격을 나타내고자 하
는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네 신분은 이러이러하니 지금까지 입었던 그 헌 옷을 벗어버리고
새 옷을 입으라는 말씀이 됩니다. 요한계시록에 보면, 이 옷에 대한 말씀이 많이 있습니다.
그리하여 3:5 말씀에 보면 그리스도인의 옷을 상징적으로 표현하여"흰옷"이라고 하였습니다.
또한 3:18 말씀에서는 "흰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라."고 하였습니
다. 여기 이 말이 뜻하는 바가 무엇이겠습니까? 이 흰옷은 곧 그리스도의 옷을 말하며 예수
로 말미암아 의롭다함을 얻는 의의 옷을 입어서 너의 죄악된 모습을 가리우라는 말씀입니
다. 사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에는 그런 의미가 있습니다.
또한 3:4 말씀에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 몇 명이 내게 있어"라는 귀한 말씀이 있습
니다. 이는 다른 사람은 그리스도인의 옷을 다 더럽혔는데 몇 명은 더럽히지 않고 그대로
깨끗하게 지켰다고 하는 말입니다. 이 말은 곧 그리스도의 신분, 그 신앙, 그 지조를 끝까지
지켰다고 하는 것을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말입니다. 그러고 보면 이 얼마나 귀하고 중
요한 말씀입니까? 뿐만 아니라 4 : 4 말씀에는 "이십 사 장로들이 흰옷을 입고 머리에 금
면류관을 쓰고 앉았더라."고 하였습니다. 여기 이 흰옷 역시 성도의 옷이요, 그리스도의 옷
이며, 그리스도인의 깨끗한 신분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 역시 로마서 13:14 말씀에서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로 옷을 입어 온 몸을 가리워 놓는 것입니다. 그것은 비록 천한 사람이
라 하더라도 귀족의 옷을 입으면 귀족처럼 보이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
은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을 입으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이어 탕자의 비유를 생각해 봅니다. 탕자에게는 탕자의 옷이 있습니다. 돼지우리에
서 지내던 냄새나고 더러운 그 남루한 옷이 탕자의 옷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 더럽고 추한
옷을 입은 탕자가 거지가 되어 지금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온 것입니다. 그 때에 아버지는
돌아온 아들을 반기면서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 입히라며 종들에게 명하는 것을 볼 수 있습
니다. 이것은 바로 내 아들이라는 것을 뜻하고 있는 말입니다. 어찌 생각하면 죄스럽기 그지
없는 탕자의 입장에서는 사양을 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아버지가 입으라고 하면 입어
야 하는 것입니다. 그 옷을 입음으로 꼼짝 못하고 아들이 되는 것이며, 이제부터는 탕자가
아닌 아들로서 옷에 걸 맞는 생각과 생활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복임인바 이
는 도덕적 수준에 의해서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그리스도로 옷 입히는 것을 의미하며,
그리스도의 의로 구원받는 그리스도인의 신분을 말해주는 상징적 내용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먼저 옛 사람을 벗어버리라고 하였습니다. 새 옷을 입으려면 먼저 헌
옷을 벗어버려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목욕까지도 깨끗이 하고 입어야 되는 것입니다. 마가
복음 10:46 이하에 보면, 소경 거지 바디매오의 이야기가 나오고 있습니다. 거기에 보면 길
가에 앉아있던 소경 거지 바디매오가 예수님이 지나가신다는 말을 듣고, 이때가 절호의 기
회라는 생각으로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며 소리를 지르게 됩니다.
그러자 많은 사람들이 왜 그렇게 떠들며 소리를 지르느냐고 꾸중을 합니다 만은 더욱 크게
소리를 지르면서 예수님을 부르게 될 때, 예수님께서 들으시고 머물러 서셔서 저를 부르라
고 하십니다. 그때에 옆에 있던 사람이 예수님께서 너를 부르신다고 하자, 성경에 보면 겉옷
을 내어버리고 뛰어 일어나 예수님께로 나왔다고 하였습니다. 얻어서먹는 거지인 바디매오
에게 있어서 이 옷은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언젠가 한번 다른 곳에서 목회를 할 때 그 일을 경험한 바가 있습니다.
어느 길목을 지나가면 언제나 한 사람이 남루한 옷차림으로 눈을 감고 앉아서 구걸을 하
고 있는 것입니다. 가며 오며 생각날 때마다 조금씩 도와주고는 하였는데 하루는 심방을 다
녀오다 보니 멀쩡한 신사가 되어 부인과 함께 걸어오고 있는 것입니다. 참으로 어이가 없는
일이지만 피할 수도 없이 정면으로 만나게 되자, 자기도 나를 여러 번 본터이라 "아이구 목
사님 미안합니다."하고 인사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 보세요, 도대체 이것이 어떻게
된거요?"라고 하였더니 "그때 입었던 그것은 제 직업이예요."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옷을 입고야 얻어먹을 수 있지 않느냐고 하는 말입니다. 사실 얻어먹는 사람의 옷은 따로
있습니다.
그런데 소경으로서 얻어먹는 사람인 바디매오가 겉옷을 내어버리면 어떻게 하겠다는 것입
니까? 그러고 보면 바디매오는 믿음이 대단한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이제 예수를 만나면 나
는 확실히 눈을 뜬다는 것이며, 다시 이 옷을 입지 않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과
거로 다시 돌아갈 생각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겉옷을 내어버리고 달려가는 것입
니다. 이 버렸다는 이야기가 우리에게 그렇게도 충격을 줍니다.
오늘 본문에서 말하고 있는 옛 사람을 옛날 성경에서 묘사하고 있는 것을 보면, 방임하고
포기하고 혹은 무지하고 허망하고 총명이 어두워지고 더러운 욕심에 버려진 것으로 되어 있
습니다. 그러니까 이와 같은 옛 사람, 옛 사람의 타락성을 깨끗이 벗어버리라고 하는 것이
며, 그런 이후에 새 사람을 입으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 새 사람을 입은 새 사람과 그가 입은 옷이 걸맞아야 합니다. 만약 그렇지 않을
때에는 문제가 많습니다. 제가 한 2년전 홍콩에 집회를 인도하러 갔다가 참 재미있는 방법
에 의해서 정확하게 중국 사람을 알아내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방법이란 옷 입는 모습, 특
별히 넥타이를 비뚤어지게 맨 모습을 보고 안다는 것입니다. 언제나 인민복만 입던 중국사
람들이 홍콩 나들이를 하면서 모처럼 양복을 입긴 입었으나 이것이 잘 맞지도 않거니와 생
전 처음 매어보는 넥타이인지라 제대로 맬 줄을 몰라서 전부 비뚤어져 있는 것입니다. 그것
을 보면서 정말 사람과 자기 옷이 맞지 않는구나 하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새 옷을 입으
면 새 옷에 맞는 거기에 어울리는 바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진정 그리스도의 옷
을 입으면 그리스도의 옷에 맞는 생각, 맞는 언행이 있어야 하는 것이지 옷만 입었다고 되
는 것이 아닙니다.
그 때문에 오늘 본문은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라고 하였습니다.
무엇보다도 가장 근본적인 것은 심령입니다. 이 심령이 새로워지고 생각과 사상이 새로워
지며 인격이 새로워지는 것과 더불어 새 옷을 입어야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옷만 새
옷이 아니라 그 새 옷이 담고있는 상징적 내용인 사람됨 전부가 새로워져야 한다는 말입니
다.
그런데 먼저 옷을 입으라고 하는 여기에 중요한 복음의 깊은 뜻이 있습니다. 바꾸어 말하
면 먼저 그리스도의 옷을 입은 다음, 그 옷을 입은 신분에 합당한 사람이 되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먼저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는 즉, 말하자면 세례를 먼저 받고 그리스도인이 된
다음 그리스도인답게 살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저는 20년 동안이나 예수를 믿었다고 하면서도 믿음이 좀 더 생기면 받겠다며 계속 세례
를 받지 않으려는 사람을 보았습니다. 심지어 토요일에 나와서 세례 문답을 하고 갔는데도
주일 아침에 오더니 "저 세례 그만 둘까보아요"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길래 제가 그분에
게 말하기를 "사랑을 완전히 하고서 결혼을 할꺼요? 결혼식하고서 사랑할꺼요? 결혼은 사랑
의 시작이지 끝이 아니요. 그저 결혼식하고 이제부터 사랑합시다."라고 하였더니 그 말씀이
맞는다고 하면서 세례를 받았습니다.
여러분! 그리스도로 옷 입는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 말입니까? 이는 솔선하는 그리스도
인으로 나타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새 사람, 새 옷을 입었으니 내 자신과의 관계에서
그리스도인이요, 이웃과의 관계는 그들이 나를 그리스도인으로 보고 있으며, 하나님 앞에 나
아갈 때에는 그리스도인으로, 예수 이름으로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로 옷 입는 사람인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로 옷을 입었다고 해서 단번에 완전한 변화가 오는 것은 아닙니다. 그 때
문에 옛날 이야기 중에 당시 가장 천민으로 대우받던 한 백정의 딸이 양반의 집으로 시집을
가서, 하루는 시아버지 점심상을 들고 가노라니 그날 따라 시아버지께서 문턱을 베고 주무
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어쩌나 하고 생각하다가 어머니가 일러준 말이 생각났습니다. 그 말이란
양반의 법도를 알 수 없는 어머니이기에 "양반들이래야 별거 없더라. 그저 '님'자를 자주 붙
이면 되느니라."고 한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 며느리가 시아버지를 향해 말하기를 "아버님
발님 들어갑니다.
대가리님 치우십시오."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제가 이 이야기를 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신분이 하루아침에 갖추어지는 것이 아님을 말
하기 위해서입니다. 지금 입고 있는 옷은 남의 옷을 빌려 입은 것이므로 힘이 드는 것임을
알아야 됩니다. 사실 나는 시원치 않는 사람인데 예수 믿고 직분까지 맡고 보니, 과거 같으
면 한 바탕 할 것도 못하고 물건 하나도 마음놓고 깍지를 못하고 하는데 이것이 자연스럽고
편합니까? 아니면 불편하고 부자연스럽습니까? 가끔 보면 예수 믿는다는 것을 아주 불편하
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런 사람은 그 옷에 영 걸맞지 않는 사람입니다.
이미 우리 모드는 그리스도인이라는 옷을 입은 사람들입니다. 그 때문에 믿지 않는 다른
사람들도 우리를 그리스도인으로 보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제는 그리스도인의 신분에 맞는
생각과 언행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탕자가 비록 거북스럽게 돌아오기는 하였지만, 일단
아버지가 주신 새 옷을 입은 다음에는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지금까지 수년동안 방탕하
던 사람이지만 이제부터는 깨끗이 아버지의 둘째 아들로서의 역할을 다해야 될 것이란 말입
니다. 아버지가 주신 제일 좋은 옷을 입고 다시 방탕의 길로 나가서야 되겠습니까? 새 옷을
입었으면 새로운 생활이 전개되어야 할 것입니다.
철인 소크라테스가 처형되는 날 그 사랑하는 제자 아폴로드로스가 마지막 길을 떠나는 스
승을 위해서 새 옷을 한벌 드리면서 이 옷으로 갈아입으시라고 하였습니다. 그랬더니 그 심
각한 시간에 소크라테스가 그 옷을 받아 들고 하는 말이 "자네 생각에는 내가 평상시에 입
고 있던 이 옷이 평상시에는 맞지만, 마지막 죽는 시간에 입은 옷으로서는 마땅치 않게 여
기는가?"라면서 그 새 옷을 갈아입고 처형을 당했다고 합니다.
여러분! 오늘이 나의 마지막 날이라고 한다면, 오늘 내가 주님 앞에 가야 된다고 하면 우
리는 어떤 옷을 입어야 될 것 같습니까? 가끔 어떤 분들이 저에게 "목사님, 새벽기도 나오
실 때도 보니까 꼭 넥타이를 매고 나오시는데 좀 아무렇게나 입고 나오시면 안 되는 겁니
까?"하고 물을 때가 있습니다. 물론 반드시 여러분들께서 저와 같이 정장을 하라는 말은 아
닙니다.
그러나 만일 여러분들이 귀한 손님을 만나러 간다는 생각을 하면 어떤 차림으로 가야 되
겠습니까? 결코 아무렇게나 하고 가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물며 하나님 앞에 기도
하러 나오는 시간인데 어떻게 해야되겠습니까? 그렇다고 해서 무슨 굉장한 의상을 따로 차
려입거나 흰옷을 입고 나와야 된다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가 최소한 어떤 어른
을 만나는 것보다는 나은 차림으로 하나님을 만나야 될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것이 곧 마음
가짐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나 주님 앞에 나아 올 때이면 오늘이 나의 마지막
날인 것처럼 생각하면서, 주님 앞에 가는 자의 마음과 몸가짐으로 단정하게 나와야 하는 것
입니다.
우리는 예수로 옷 입은 자들입니다. 따라서 그 옷을 입은 자에게 합당한 생각과 생활을
해야 합니다. 이것이 곧 기독교인의 윤리입니다. 오늘본문은 우리를 향하여 "썩어져 가는 구
습을 쫓는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
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입어야할 바 온전
한 새 사람을 입기 위해 옷을 벗고 입는 본 비유가 주는 의미를 깊이 생각해 볼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출처/곽선희목사 설교자료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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