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제별 설교〓/설교.자료모음

신랑 신부 비유

by 【고동엽】 2022. 7. 11.
목차 되돌아가기
 

(에베소서 5:22-23)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됨이 그리
스도께서 교회의 머리됨과 같음이니 그가 친히 몸의 구주시니라 그러나 교회가 그리스도에
게 하듯 아내들도 범사에 그 남편에게 복종할지니라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
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같이 하라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 잡힌 것이나 이런 것
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와 같이 남편들도 자기 아내 사랑하기를
제 몸같이 할지니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자는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라 누구든지 언제든지
제 육체를 미워하지 않고 오직 양육하여 보호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보양함과 같이하
나니 우리는 그 몸의 지체임이니라 이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 이 비밀이 크도다 내가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 그러나 너희
도 각각 자기의 아내 사랑하기를 자기같이 하고 아내도 그 남편을 경외하라.

오늘 본문 말씀은 쌍방이 서로에게 비유로 통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와
교회와의 관계를 설명하기 위하여 신랑과 신부의 관계를 말하고 있으며, 동시에 신랑과 신
부의 관계를 설명하기 위하여 그리스도와 교회와의 관계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
는 그리스도와 교회, 그리스도와 우리와의 관계를 알기 위한 비유로서는 신랑과 신부의 관
계를 생각하게 되고, 또한 신랑과 신부의 관계, 아내와 남편과의 관계를 알기 위해서는 그리
스도와 우리와의 관계를 비유로 생각하게 됩니다. 이러한 관계란 참으로 신비로운 관계이기
에 32절 말씀에 보면 "이 비밀이 크도다 내가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라고 하
였습니다. 이는 그리스도와 교회와의 관계를 설명하기 위해 아내와 남편의 관계를 이야기하
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가 하면, 이 본문의 주제는 아내와 남편을 향하여 이렇게 하기를 바래서 주신 말씀입
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리스도와 교회와의 관계를 비유로 들어서 그 관계성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오늘 본문 말씀은 서로가 서로에게 비유가 되고 의미 전달의 내용이 되는 참으
로 오묘한 비유의 말씀입니다. 따라서 이 말씀은 그리스도와 우리와의 관계를 말함인 동시
에 아내와 남편과의 관계를 말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우리는 몇 가지 귀중
한 사랑의 원리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 원리 중 먼저 생각할 것은 사랑은 언제나 유기적인 관계가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흔
히 요즈음 사람들은 사랑이 없이도 살 수 있는 것으로 생각을 합니다 만은 그렇게 생각함으
로 문제가 복잡해지는 것입니다. 적어도 사랑의 문제를 놓고 사느냐? 죽느냐의 문제까지는
생각을 잘 해보지 않기 때문에 문제가 발생하게 되는 것입니다. 부부간의 문제를 보아도 이
사람을 사랑하지 않고는 내가 살수가 없다고 생각한다면, 처음부터 문제가 될 것도 없습니
다. 그러나 이 사람을 사랑하지 않고도 살수가 있을 것 같고, 그 보다는 사랑하지 않으면 더
잘 살 것 같기에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그 때문에 저는 결혼 주례를 하면서 신랑 신부에게 권면을 할 때마다 빠뜨리지 않고 꼭
한마디씩 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당신들을 서로 부부로 맺어 주셨으니
이제는 이 여자, 이 남자를 사랑하지 않고는 당신이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가 없고 기도할
수가 없다는 것을 잊지 말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언제 보아도 그 시간의 신랑 신부는 벌벌
떨고 있는 것이어서 그 말을 제대로 듣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어쨌든 이것은 매우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오늘 본문은 이 유기적인 관계를 머리와 몸의 관계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있는
손과 발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만은 경우에 따라서는 잘라 버릴 수가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그럴 바에야 차라리 죽어버리겠다 고도 하지만 정 죽을 지경이 되면 그것도 자르라고 합니
다. 두 팔, 두 다리를 자르고라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다른 지체들은 필요에
따라 다 잘라 버릴 수가 있지만, 어떤 경우에도 목을 자를 수는 없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사랑이란 바로 그런 것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떠나도 되는 것으로 생각을 하
기 때문에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망상입니다.
일단 결혼을 했으면 이유 불문하고 사랑하는 것 밖에는 없습니다. 거기에다 대고 이런 저
런 엉뚱한 소리를 한다면 그것은 복 받지 못할 마음인 것입니다. 그러고도 복을 받는다는
것은 어림도 없는 이야기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야곱이 기어이 라
헬을 맞이함으로 일생동안 고생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말씀은 그리
스도와 우리와의 관계, 남편과 아내와의 관계를 절대 떨어질 수 없는 사랑의 관계라는 점에
서 머리와 몸으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 관계가 끊어지고 파괴될 때 영적으로, 도덕
적으로, 인격적으로 완전히 죽어 버리게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머리와 몸과 같다는 이야기는 생명적으로 완전히 하나라고 하는 의미입니다. 탈무
드에 보면 머리가 둘이고 몸은 하나인 아이를 두고 이 아이가 두 아이인가? 한 아이인가 하
는 질문을 하게 됩니다. 그 때에 랍비가 대답하기를 이쪽 머리를 때려서 저쪽 머리의 아이
까지 울면 한 아이이고, 이쪽 머리의 아이가 울어도 저쪽 머리의 아이가 울지 않으면 한 아
이가 아니라고 말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제 우리 자신을 놓고 생각해 보십시다. 제가 울 때 진정 내가 함께 울었는지? 제가 아
파할 때 나 또한 아파했는지? 제가 기뻐할 때 나도 기뻤는지를 말입니다. 진정 함께 울고
함께 기뻐하는 바가 있다면, 그것은 사랑을 한다는 증거가 되겠으나 만약 그렇지 않다면 사
랑과는 거리가 먼 남남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이란 상대방이 아플 때에 차라리 내가 아
팠으면 하고, 제가 죽어갈 때 차라니 내가 죽으면 좋겠다고 하는 같은 아픔이 있는 것입니
다. 이것은 결코 슬픔의 감정이 아닙니다. 그저 이대로 마구 저와 같이 아파지고 싶은 그 자
체인 것입니다. 그것이 없다면 그 사이는 사랑하는 관계가 아닙니다.
머리와 몸 관계란 작은 손가락 하나만 곪아도 머리가 아프고 열이 나며 온 몸이 고통스러
워집니다. 그러기에 머리와 몸이 하나라고 하는 것이 얼마나 오묘한 말씀입니까? 따라서 몸
이 머리에게 복종하는 것은 하나이기에 하는 것이므로 여기에서 복종한다는 이 말은 조금도
부자연스러운 것이 아닙니다. 몸이 머리를 섬긴다고 해서 무엇이 그렇게 이상한 일입니까?
그런데 요즈음은 인권문제라 하여 자기 남편 섬기는 것도 굴욕적이고, 거북하게 생각하니
문제가 점점 복잡해져 가는 것입니다.
한 번은 미국 텔레비전방송에서 어떤 남녀 고등학생이 서로 연애를 한 나머지 결혼하겠다
고 하자, 남학생의 어머니가 여학생이 과연 자기 아들을 사랑하고 있는가를 시험해 보는 재
미있는 프로를 본적이 있습니다. 거기에서 보면 이제 고등학생인 이 여학생이 어느 날 남학
생의 집으로 찾아와서 결혼을 하겠다고 합니다. 그래서 왜 지금 결혼을 하려고 하느냐 하고
물어 보았더니 사랑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얼마나 사랑하느냐고 하였더니, 죽도록
사랑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 말을 들은 남학생의 어머니는 책망을 하는 대신 "그래 네가 내
아들을 그토록 사랑해 주어서 고맙다"하고서는 "사랑이란 그렇게 간단한 것이 아니다. 네가
정말 사랑을 하는 것인지 너도 너를 모르는 모양인데 나도 너를 모르겠다. 그러니 우리 실
험을 한번 해보자."고 한 다음 1주일 동안 결혼을 했다라는 가정 하에 나와 같이 살면서 한
번 지내보자고 하였습니다. 그랬더니 이 여학생이 자기의 짐을 꾸려 가지고 와서는 같이 지
내게 된 것입니다. 그러자니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식사준비도 같이 해야하고, 청소도 해야
하며 빨래도 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는 양말이며 속옷 등 아들이 빨래거리를 모두 내어주
며 빨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것저것 해야할 것들을 쭉 이야기해 주었더니, 이 여학생이
하루를 하고 나서는 결혼 안 하겠다며 달아나고 마는 것이었습니다.
진정으로 사랑을 한다면, 그를 위한 수고가 즐겁고 기뻐야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
데 이것이 어쩌다가 이 팔자가 되었나하고 생각하게되었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닌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음도 뜻도 하나가 되어서 몸은 머리를 섬기고, 머리는 몸을 사랑하고 아끼는 거
기에 사랑이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복종이라는 말을 씀으로 수직적 관계를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만은 "복종"과 "사랑"이라는 말은 단어는 다르게 표현되었으나 매우 신비로
운 관계를 가지고 있는 말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은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주심같이 사랑
하라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사랑이란 자신을 주되 이는 부분을 주는 것이 아니라 전체를
주는 것입니다.
자기 운명, 자기 명예, 자기 일생을 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
위에서 자신을 다 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 또한 그리스도를 위하여 자신을 다 바치는 거기
에 진정한 사랑의 만남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 말씀은 특별히 사랑을 강조하면서 "티나 주름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깨끗하고 정결한 사랑을 요구
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또한 28절 말씀에 보면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자는 자기를 사랑하
는 것이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것은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것과 자기를 사랑하는 것을
하나로 연결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따라서 사랑이라는 것은 상대방을 사랑하는 것 같으나
결국은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 된다고 하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남편이 아내를 사랑하면 결국은 자기를 사랑한 것이 되고, 아내가 남편을 높이
고 존경하면 아내인 자신이 높아진다는 이야기입니다. 이것은 사랑만이 갖는 신비입니다.
그 다음으로 생각할 것은 "이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합하여"라는 말씀입니
다. 이 말씀에 비추어 우리 풍속에는 새롭게 지켜 나가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보
면, 결혼을 시킨 후에 내어 보내기는 내어 보내는데 집안 분위기도 익히고 정도 들 겸 몇
년 동안 데리고 있다가 내어 보내겠다는 생각을 많이 합니다. 그러나 저는 그 반대로 이야
기합니다. 먼저 내어 보냈다가 필요하면 그 다음에 들어오게 하는 견해입니다. 왜냐하면 이
것이 성서적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에는 분명히 "부모를 떠나 아내와 합하여"라고 하였습니
다. 그런데 이것이 제대로 안 되는 때문에 가만히 보면 부모님 눈치 보느라고 좋은 며느리
좋은 아들은 되는데, 좋은 아내 좋은 남편은 못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당
사자가 아닌 어른들, 시댁 사람들에게는 잘한다고 애를 썼으나, 진작 자기남편에게는 소홀했
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어떻게 보면 아직도 부부가 한마음, 한 뜻으로 하나가 되어 사는 오
리엔테이션이 되지 않았다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결혼 생활이 아직 시작도 되지 않
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옛날 우리의 풍속을 놓고 보면 결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시집을 가는 것이었습니
다. 다시 말하면 신랑과의 결혼이 아니라 그 집과 결혼을 해서 가는 셈인데, 이것이 바로 우
리 나라의 유교적 풍속입니다. 여기에서 비롯된 문제가 변화를 거치면서 어쨌든 오늘까지
전통적으로 이어져온 것인데, 이제 이것이 핵가족이라고 하는 시대적인 풍속과 가치관에 부
딪히게 되니 어쩔 수 없는 충돌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합하여"라는 말을 분명히 새겨 두어야 합니다. 결혼한 사람이 둘이 사랑하는 것
외에 다른 생각을 많이 한다면, 이미 그 만큼 사랑에 방해를 받고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아
직도 떠날 것을 못 떠났기 때문입니다. 사랑이란 순수하게 직선적으로 만날 수 있어야 됩니
다.
그런데 그리스도와 나와의 만남, 사랑의 정도가 어떠합니까? 아직도 자기의 명예, 자존심,
물질에 대한 욕망 등 떠나야 할 것이 많다면, 그 사랑은 결코 완전해 질 수가 없습니다. 예
수님 친히 말씀하시기를 한 사람이 두 주인, 즉 물질과 하나님을 겸하여 섬길 수가 없느니
라고 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분명히 둘, 셋을 섬기고 있으니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간음하지 말라는 말씀을 계명으로 대하게 됩니다. 이 간음이란 남편 혹
은 아내를 전혀 사랑하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라 남편, 아내 외에 또 사랑하는 다른 대상이
있다는 말입니다. 참된 사랑이란 그와나 사이에 다른 어떤 것도 있을 수 없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특별히 부모 된 입장에서는 오늘 본문에서 주신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합하
여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라는 말씀을 잘 생각하여 딸이든 아들이든 그대로 내어 보냄이
좋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부터는 효도도 둘이 합하여 해야하는 것이므로 과거의 효도와는
이미 그 의미가 다른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이제는 부모에게 속하는 것이 아니라 부모를
모시는 입장으로 그 의미가 바뀐 것입니다. 그런데, 결혼을 시켜 놓고도 여전히 내 아들을
붙들고 있다는 생각을 함으로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아무튼 진정한 사랑의 가정을 이루기
위해서는 아무 것도 거리끼지 않는 1대 1의 만남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합하여"라는 말은 연합을 뜻하는 것으로 한 몸이 되고, 한 운명, 한 명예, 한 생
활을 하게 되는 신비로운 연합을 말합니다. 그 때문에 가정에 있어서 제일 중요한 문제는
정말 하나가 되었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가만히 보면, 아직도 하나가 되지 못한 채 모든 면
에서 비밀이 너무 많고 심지어 돈주머니, 땅문서도 따로 가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그
렇게 하고서는 완전한 하나라 볼 수가 없습니다. 특별히 명예와 자존심에 있어서 하나가 되
지 못한다면, 그것을 하나된 사랑의 관계로는 말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흔히들 요즈
음의 가정에 대해서 "동숙자는 있어도 가정은 없다."라고 말하는 것을 들을 수 있습니다. 다
시 말하면 같이 사는 것이지 그것이 어디 가정이냐고 하는 말입니다. 이와 같이 진정으로
한 몸, 한 뜻, 한 생활이 된 가정은 귀하다고 하는 말입니다.
이제 다시 본문 말씀을 보면 "이 비밀이 크도다"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비밀이란 말은
헬라 원어로는 '무스테리온' 이라 하고 영어로는 미스테리(mystery), 혹은 시크릿(secret)이
라는 말로서 너무 심오하여 사람이 깨달을 수 없는 신비로움을 뜻하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말로 표현할 수도 없거니와 다른 사람이 보고 알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가 흔
히 밤낮 싸우면서 사는 사람을 보고는 저렇게 밤낮 싸우면서 무슨 재미로 사나? 아예 치워
버리고 말지 하는 말을 하기도 합니다 만은 그것은 모르는 소리입니다. 알고 보면 그 사람
들은 그 재미에 사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한 번씩 싸웠다가는 화해하느라고 근사한 데서 외
식도 하고 여행도 하며, 선물도 사오는 것이고 보면,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불행한 것 같
으나 사실은 그렇게 해 가면서 정이 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한가지 분명히 알아야 되는
것은 여기에는 비밀스러움이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다른 사람의 눈에 비친 그
대로라면 어떻게 살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거기에는 우리가 알 수 없는 또 다른 비밀이
있는 것이란 말입니다.
그러면 그 비밀이 어떤 것이냐고 할 때 다 주는 것 같은데 다 얻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곧 사랑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에게로 나아가 그리스도와 연합하게 될 때 우리는
그리스도의 의를 힘입게 됩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고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
됩니다. 나로서는 다 주는 것 같고 엄청난 희생을 지불하는 것 같으나 오히려 다 받고 있다
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의 가정 생활이 사랑 없이 엮어져 나간다면 그 얼마나 기가 막힌 일이겠습니까?
여자는 아이를 낳아 기르면서 일생 동안 일을 하여도 단 한 푼의 월급도 받지 못하고 죽도
록 수고만 합니다. 그런가 하면, 남편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요즈음 같이 월급 봉투도 없이
온라인으로 처리가 되고 나서는 한달 내내 온갖 스트레스를 받아가면서 일을 하고도 돈 한
푼 만져보지 못하고 고스란히 아내가 가진 통장으로 들어가 버리고 맙니다. 그런데도 그것
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거나 자신이 비참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결국 그
주머니가 내 주머니이고 내 주머니가 그 주머니이며, 오히려 나는 못 믿어도 그는 믿을 수
있으니까하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내와 남편의 하는 일이 사랑없이 행해
지는 것이라면 세상에 그 이상의 비참한 일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러나 사랑함으로 하는
일이기에 큰 희생이 있는 것 같으나, 그것은 희생이 아닌 가장 위대한 영광이 되는 것입니
다.
이와 같이 주어서 영광스러운 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교회를 봉사하는 것도 그렇습니다.
자기의 시간과 돈을 바쳐 몸소 수고를 하면서도 그저 좋아서 싱글벙글하는 것을 볼 수 있는
데, 희생에는 기쁨이 따라야 하고 그것이 곧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수고에 기쁨이 따르지 않
으면 그것은 부도난 사랑입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가만히 보면 교회
를 위해서 수고하는데 대한 불평이 조금 있어서 교회학교 선생님을 하든 성가대를 하든 때
때로 짜증스러움이 있는 것을 보게 되는데, 그렇게되면 그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정말 교회
를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모든 것이 다 영광인 것입니다. 그래서 그 일들이 그렇게 즐겁고
기쁜 것이란 말입니다.
그런가 하면 고통이라는 것도 기쁨으로 받아들여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사도 바울은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갈 6:17)고 말합니다. 그 누구이든 예수를 위해서
매맞은 흔적을 가졌다면 그것은 굉장한 훈장이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예수를 위해서 진정으
로 수고를 하고 그 수고한 자체를 기쁨과 영광으로 생각하여 훈장과도 같이 받아드릴 수가
있다면, 그것이 바로 순교적인 사랑이라고 생각합니다. 여기에 비밀이 있고 신비로움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이 볼 때에는 이해를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하나님과 관계를 하고 그리스도와 관계를 함에 있어서도 말로 할 수 없
는 깊은 사랑, 깊은 행복, 깊은 영광 등 모든 좋은 것들이 그 속에 다 담겨져 있는 것입니
다. 그러기에 사랑은 신비로운 것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랑의 신비를 체험한
사람은 사랑하는 일을 주저할 수가 없습니다. 이에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고후 5:14)라고 하였습니다. 이제는 내가 미쳐도 그리스도를 위해서 그 사
랑 때문에 미치는 것이란 말입니다. 생각해 보면 미친 사람이란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딱하
고 처절하지만 본인들로서는 이런 저런 걱정 없이 좋은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사랑에 미친 것도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정신이 없어 보이지만 본인들로서는
그 이상의 의미나 행복이 없는 것입니다. 어떤 때에 보면, 추운 겨울날 분명히 추울텐데도
밤늦은 시간에 한참이고 나무 밑에 둘이 웅크리고 서 있는 것을 보면 추운데 왜 저러고 있
나하여 동정하는 마음이 생기기도 합니다 만은 그것은 동정할 문제가 아닙니다. 거기에는
그들만이 가지는 기쁨이 있는 것입니다. 미친다는 것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곧
미친 짓이요, 사랑을 위해서 완전히 미칠 그 때가 중요한 것입니다. 그리고 한 번쯤은 그렇
게 미치는 것이 좋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순간이 일생 이어지지 않아서
걱정입니다.
그 때의 마음 같아서야 위해서 죽기라도 할 것 같던 것이 조금 변하게 되면 지참금도 안
내놓겠다고 하니 사랑의 비밀이 얼마나 놀라운 것입니까? 그렇기 때문에 사랑의 신비를 체
험한 사람은 사랑에는 무한한 능력과 무한한 행복이 뒤따르는 것임을 알게 됩니다.
이를 위해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을 통하여 부부의 관계를 말하면서 그리스도와 우리와의
사랑을 말하고, 또한 그리스도와 우리와의 깊고 영원한 사랑을 설명하면서 너희들이 맺고있
는 부부의 관계를 한번 생각해 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속에 있는 비밀한 것이 얼마나
많은가를 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오늘 우리가 결론 지을 수 있는 사랑이란 추상적이고 이론적인 사랑이
아니라 구체적이고 체험적인 것이며, 나아가서는 체험을 넘어서는 신비로움이 있는 사랑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사랑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고 이 사랑을 통해서 승리의
생활을 하게되는 것입니다.

출처/곽선희목사 설교자료 중에서

'〓주제별 설교〓 > 설교.자료모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열매 비유  (0) 2022.07.11
양자됨의 비유  (0) 2022.07.11
몽학선생  (0) 2022.07.11
농사 원리의 비유  (0) 2022.07.11
두 여인의 비유  (0) 2022.07.11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