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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산의 수고

by 【고동엽】 2022. 7.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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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디아서 4:17-20)

저희가 너희를 대하여 열심 내는 것이 좋은 뜻이 아니요 오직 너희를 이간 붙여 너희로
저희를 대하여 열심 내게 하려 함이라 좋은 일에 대하여 열심으로 사모함을 받음은 내가 너
희를 대하였을 때뿐 아니라 언제든지 좋으니라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 내가 이제라도 너희와 함께 있어
내 음성을 변하려 함은 너희를 대하여 의심이 있음이라.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는 데에는 해산의수고가 있어야 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해산이란 반드시 고통을 수반하는 것으로 인간이 겪을 수 있는 고통 중
가장 큰 고통과 동시에 가장 의미 있는 고통이기도 합니다. 이 세상에 있는 이 많은 고통들
이 해산의 수고와 같이 의미가 있는 것이라면 아마도 그 고통을 마다할 사람이 없을 것입니
다. 해산을 하는 여인들을 보면 죽느니 사느니 하면서 그야말로 목숨을 걸고 아이를 낳습니
다. 그 때문에 고통이 있는 순간에는 다시는 안 낳겠다는 맹세를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거
기에는 다른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의미가 있는 것이기에 그 뒤에도 둘, 셋을 계속 낳게
되는 것입니다.
그만큼 해산의 고통은 최대의 고통이요, 최고의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장 자랑스럽고 가장 보상이 큼 고통이 해산의 고통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에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라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이는 엄청난 고생을 한다는 것임과 동시에 거기에는 그만한 의미가 있음을
뜻하는 말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이 지금 말하고 있는 해산의 수고란 처음 태어나는 그 출생을 위해서
수고를 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에서 말하는 바는 낳는 것은 복음으로서 이미 낳았
습니다. 즉, 말하자면 이미 중생은 되어졌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 중생이란 원래 단회적인
것이요, 신비로운 역사입니다. 그리고 순간적인 것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는
마치 어느 한 순간 나도 모르게 땅에 떨어진 씨앗이 있었고, 그로 인해 싹이 나서 꽃이 피
고 열매를 맺는 것과도 같습니다. 여기에서 씨앗 하나가 땅에 떨어진 유일회적이면서도 순
간적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하여 출생된 생명이 성장을 하는 데에는 긴 시간을 필요로 합니다. 마찬가
지로 단회적인 역사로 중생된 생명이 성장해 나가는, 즉 신학적인 용어로 성화 되어 나가는
데에는 많은 시간뿐만 아니라 그를 위한 수고가 또 다시 해산의 수고로 따라야 한다는 것입
니다. 그러니까 여기에서 말하는 해산의 고통은 처음 생명을 출산하는 의미에서의 고통이
아니라, 이미 태어난 중생한 심령이 자라가야 하는 과정에 필요한 고통의 수고를 말하고 있
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본문은 더욱 중요한 의미를 가지게 됩니다.
태어난 생명은 반드시 성장의 과정을 필요로 합니다. 그리고 이것 역시그 리스도의 역사
요 복음과 성령의 역사이면서 플러스 알파(plus alpha)인 전도자의 수고가 있습니다. 생명은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것이지만 생명이 태어나게 하고 자라가게 하는 데에는 전도자의
수고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특별히 오늘 본문은 고통 하여 낳은 다음 자라게 하는 데에
도 그에 못지 않은 어머니의 수고가 뒤따라야 함을 가리켜서 해산의 수고라는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와 같은 수고를 하는 성장 목표는 어디까지인가 할 때 그 목표는 그리스도의 형
상이 이루어지기까지라고 하였습니다. 그 마음, 그 인격, 그 영혼, 그 삶 속에 그리스도의 형
상이 이루어지기까지 해산의 수고와 같은 그런 수고가 계속되어야 하겠다는 말입니다. 사실
생리적으로 아이를 낳았으니 어머니가 되는 것까지는 그렇게 대단한 특권이 아닙니다.
그것은 누구나 결혼을 해서 아이를 가지게 되면 낳게 마련이고, 그렇게되면 어머니는 자
연적으로 되는 것입니다. 심하게 말하면 원하든 원치 않든 어머니는 쉽게 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겪어서 아는 대로 가장 어려운 것은 낳은 자식을 키우는 일입니다. 이를
두고 어머니의 입장을 생각해 보아도 낳은 어머니야 자기가 낳은 자식을 얼마든지 고아원에
내다 버리는 것이고 보면 낳는다는 것은 아무래도 쉬운 일입니다. 하지만 낳은 자식을 훌륭
하게 키워나가자면 그 어려움이 참으로 큰 것입니다. 그러기에 훌륭하게 자식을 키워놓은
어머니들께 낳을 때의 수고와 키울 때의 수고 중 어느 편이 더 어려웠던가를 한번 물어 보
십시오. 낳는 일이야 비록 고통스럽다 하더라도 몇 시간동안만 꼬박 고생하면 되지만, 키우
는 일은 이 십 년 삼 십 년을 키우면서 계속 마음 졸이며 고생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수고, 곧 계속적인 해산의 수고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성장 목표는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까지입니다. 에베소서 4:13에서는 "그
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아무개, 누구만큼, 혹은
어느 목사, 장로만큼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가 자라야되는 모교는 어디까지나 그리스도
의 형상이요,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인 만큼 누구보다 조금 낫고 못하고를 가지고 평가하
거나 만족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면 이제 그리스도인이 되는 과정을 놓고 생각해 볼 때 갓 태어난 상태, 그러니까 중
생 하자 마자의 단계는 역시 유치한 단계입니다. 이 유치한 단계를 에베소서 4:14 말씀에서
묘사한 것을 보면, 사람의 궤술과 간사한 유혹에 빠져 모든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하는
것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사실 어렸을 때에는 순진하고 깨끗한 것까지는 좋으나 아무래도
판단력이 없고 어리석기 때문에 이리 흔들리고 저리 흔들리게 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를 믿는 것도 처음 믿어 연조가 깊이 못한 사람은 이 말 저 말에 흔들리
기가 쉽고 특별히 이단 사설에 유혹되기가 매우 쉽습니다.
아직도 기독교 교리에 대한 이해와 확신이 없는 가운데 신앙 체험도 갖지 않은 상태라면,
그 신앙은 참으로 위험한 상태에 있는 것입니다. 그런 상태에서는 이 말을 들으면 이 말이
옳은 것 같고, 저 말을 들으면 저 말이 옳은 것 같아서 계속 요동하게 됩니다. 제가 가끔 교
역자로서 어려운 질문을 받을 때가 바로 그런 경우입니다. 어떤 이상한 교단이나 교리에 대
한 책을 읽고서는 "목사님 그것도 그럴듯하던데요."하고 말하는 것인데 거기에 대한 저의
대답은 "그럴듯하니까 사람들이 따라가는 것이겠고, 예수 믿은 지 1년 밖에 되지 않은 당신
의 눈에는 그럴듯하지 않은 것이 어디 있겠소?"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처음 단계, 이 유치한 단계는 이와 같이 분별력이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단계에서는 스스로 먹지를 못합니다. 그 때문에 입에다 먹여주어야 됩니다. 먹
여줄 뿐만 아니라 부드럽게 씹어서 먹여 주어야 됩니다. 조금 미안한 이야기입니다만 은 어
떤 때 시골에서 보면 치아도 좋지 않은 할머니들이 밤 같은 것을 까서 씹었다가 꺼내서는
손자의 입에 넣어주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렇게 하면 며느리들은 비위생적이라며 군
소리를 하지만 사실은 알고 보며 가장 위생적인 것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짐승 중에는 자
기가 먹은 것을 토해서 먹이는 짐승이 많이 있을 뿐만 아니라, 다 씹었고 침도 섞였으니 위
에 들어가기만 하면 바로 소화가 되게 되어있는 것이란 말입니다. 그 때문에 이빨도 없는
어린아이들이 넣어주는 대로 꿀꺽하고 삼키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하
게 되느냐하면 그것은 유치한 단계에 있기 때문입니다.
간혹 어떤 이들은 성경 읽는 것을 싫어하고 또 읽어봐야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면서 꼭
설교만 좋아하는가 하면 그것도 주로 부흥사들의 설교를 좋아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제
가 가끔 부흥회를 인도하려 가거나 하면 우리 교인으로서 그 자리에 와서 듣는 분이 있습니
다. 그런 후에 그분이 저를 보고 하는 말이 "목사님! 본 교회에서 말씀하실 때보다 여기에서
하시는 것이 참 재미있고 좋습니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제가 우리 교회에서 25분 설교하던
것을 거기 가서는 대상이 다르니 만큼 같은 주제를 가지고도 필요에 따라 긴 설명을 하고
보니 그것이 좋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섞여 있는 다른 것이 많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부드럽고 소화가 잘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거기에는 불순물이 많이 섞여 순도가 낮은 것이
란 말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직접 대하는 것은 100%의 순도라고 한다면, 설명을 붙여서 받
아들이게 될 때에는 이해가 잘되는 것까지는 좋으나 순도에 있어서는 그 수치가 떨어지게
된다는 것을 알아야합니다. 흔히 우리는 부흥회를 다녀온 사람으로부터 은혜가 많더라는 이
야기를 많이 듣습니다. 그럴 때에 은혜가 어떻더냐하고 물어보면 "참 재미있습니다. 그 때문
에 시간가는 줄을 모르겠습니다."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재미가 있다는 것과 은혜와는 같
은 것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이것이 재미있는 것으로 보아지는 이유는 바로 유치한데 있는
것입니다. 그 때문에 그저 부흥회만 한다면 보따리 싸들고 어디이고 찾아다니며 이것저것
주워 먹고는 결국은 소화불량이 걸려서 또 고생을 하는 것이란 말입니다.
이와 같이 유치한 나머지 세상 풍조에 밀려서 이리 저리로 흔들리며 스스로 먹지도 못하
고 서지고 못하며 활동도 할 수가 없습니다.
다시 본문으로 돌아가 그 맥락을 생각해 보면, 갈라디아 교인들은 사도바울을 통하여 복
음을 받아 예수를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바울이 떠난 후에 유대인들이 와서 유혹하기
를 예수를 믿고 비록 그리스도교가 진실한 종교라 하더라도 율법을 엄수하며 할례를 받아야
구원을 얻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바울이 이러한 것을 가르치지 않는 것은 그가
참된 사도가 아니기 때문이라며, 십자가의 구속을 반대하고 나오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자
갈라디아 교인들은 이쪽 저쪽을 왔다갔다하며 그렇다면 할례를 받아야 되나보다 하고 할례
를 또 받는 것입니다. 그야말로 요동하는 무리가 되어 갈팡질팡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시험은 다른 사람이 아닌 베드로에게도 있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2장 11절 이하에 보면, 베드로가 안디옥에서 예수 믿는 이방 사람들과 식사를 하다가 할례
자인 유대인들이 들어오자, 두려워하는 마음에서 일어나 가버리는 것을 보고 비록 베드로가
선배이기는 하지만사도 바울이 책망을 하고 나오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리하여 사도 바울
은 모든 사람 앞에서 베드로를 향하여 "네가 유대인으로서 이방을 좇고 유대인답게 살지 아
니하면서 어찌하여 억지로 이방인을 유대인답게 살게하려느냐?"며 크게 책망을 합니다. 이
는 이방 사람과 앉아서 식사를 했으면 끝까지 할 것이지 할례를 받은 유대 사람들이 들어온
다 하여 무엇 때문에 두려워하여 일어나서 나가느냐? 왜 이렇게 흔들흔들 하느냐는 말입니
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 믿는 것이 다 같은 것 같아도 교리적으로 바른 이해를 하고 믿는
것과 그와 같은 아무런 지식이 없이 믿는 것과는 크나큰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유치한 신앙이란 신학적으로 아직 체계가 잡히지 않았기 때문에 어떠한 유
혹적인 다른 말이 들어오면 그대로 이리 저리 흔들리게됩니다. 그러나 성숙한 신앙인이 되
어 성서적으로나 신학적 혹은 교리적으로 체계 있는 이해를 하고 나면, 그 뒤에는 그 누가
무슨 말을 하여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바로 여기에 유치한 단계와 성숙한 단계의 차이가 있
습니다.
그러므로, 다시 정리를 하면 유치한 신앙의 단계란 기초가 약하므로 유혹에 빠지기가 쉽
고, 다시금 세상 풍조에 끌려갈 가능성이 많습니다. 그리고 내적으로 다져지는 신앙보다는
형식적인 것, 곧 율법주의로 기울어지기가 쉽습니다. 이와 같이 유치한 단계의 정도를 아이
들에게서 생각해 본다면, 아이들이란 항상 사랑을 베풀어도 질과 양의 측면에서 말한다면
저들의 입장에서는 질보다는 양적인 것이 된다고 보아야 합니다. 예를 들어, 어머니로서 짧
은 시간에 아주 귀중한 사랑을 베풀었다하더라도 아이들로서는 그 깊은 사랑을 알 리가 없
는 것이며, 좋던 나쁘던 간에 어머니가 오랫동안 같이 있어 주기만을 바라는 것입니다. 왜냐
하면 아이들이란 그 깊은 의미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 때문에 아이들이란 누구이든지 자
기에게 잘해주는 사람에게 끌려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는 과자나 사탕을 주면서
하자는 대로 다 해주며, 어머니 아버지도 상관치 않고 어디든지 따라가고 마는 지극히 물질
적인 영향하에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깊은 의미에서의 사랑은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때리는 것이 사랑이
고 책망하는 것이 사랑일 수가 있습니다 만은 그 의미를 모르기 때문에 한 대만 때려도 아
예 때리지 않는 집으로 가버리고 마는 것이 아이들이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아이들이란 질
적인 사랑에 대해서는 이해가 없는 반면에 양적인 사랑, 불량적인 사랑에만 기울어지고 있
는 것입니다. 이러한 경우는 우리의 주위에서도 볼 수 있는 것들입니다. 가만히 보면, 성숙
한 사람은 사업에 실패했을 때에 오히려 시련을 통한 굳은 믿음과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기회를 주고 겸손하게 하시니 하나님 감사합니다하는 자세로 나옵니다. 그러나 믿음이 어리
고 약한 사람은 사업이 조금 잘 되면 복 받았다며 좋아하다가 조금 잘못되면 저주받았다며
울고불고 하는데, 이것이 다 유치한데서 비롯되는 소치이며 지극히 물량적인 증거입니다.
이와 같이 유치한 단계에서는 세속주의의 풍조에 밀리고 율법주의에 빠지며 변덕이 심합
니다. 아이들을 보노라면 그 얼마나 변덕을 잘 부립니까? 방금 웃다가, 방금 울다가 뿐만 아
니라 울다가 방금 웃으면서도 부끄러워하거나 체면 같은 것도 없이 그냥 또 웃습니다. 이렇
게 하기를 한시간에도 몇 번씩 하면서 변덕을 부리는 것인데, 그것은 모두 유치하기 때문에
나오는 행동인 것입니다.
이는 우리의 신앙 생활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한번 믿는다하고 시작을 했으면 끝까지 믿
고 나가는 것입니다. 우리 교인 가운데 예수 믿기 시작하여 처음 나온 그날부터 오늘까지 7
시 30분 예배에 3년 동안 개근을 한 분이 있습니다. 그런가하면 어떤 사람은 들쑹 날쏭 변
덕이 심하여 어떤 때에는 열심히 나오다가 어느 때에 보면 또 안 보이는 것입니다. 이런 것
이 모두 유치한 신앙을 가졌기 때문이며 그 결과 변덕이 심하고 내가 남을 도와주며 친절히
할 것을 생각하지 않고, 다른 사람의 친절과 도움만을 요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이가 몇 살이든, 몇 십 년을 믿었던 간에 다른 사람이 나를 알아주기를 바라
는 한 그것은 어린아이와 같은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 옛날 어떤 목사님의 설교 중에 "
친절한 교회를 찾아서 방탕의 길을 떠난 한국 교인들이여!"하는 말이 생각납니다. 어느 교회
가 더 친절한가하여 기웃거리며 다니고 있는데 교회가 무엇입니까? 교회가 곧 교인이 아닙
니까? 그렇다면 내가 친절을 베풀어야 내게도 베푸는 사람이 있는 것이거늘 베풀 사람이 따
로 있고, 받을 사람이 따로 있는 것이더냔 말입니다.
는 참으로 어리석은 생각을 하고 있음입니다. 본디 성장한 신앙이란 내가 누구를 도울까?
내가 다른 사람에게 어떻게 친절하게 할까하는 그런 문제에 신경을 쓰는 것이지 사탕만 준
다고 하면 아무에게나 따라가는 아이들처럼 누가 나에게 친절히 해주느냐하는 따위에는 신
경을 쓰지 않습니다.
그런데 성숙해 가는 데에는 일정한 단계가 있어서 젖을 먹을 때가 있는가하면 밥을 먹을
때가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 문제에 대해서도 다른 곳에서 세밀하게 이야기하고 있습니
다. 그러나 한가지 알아야 할 것은 어린아이들이란 수준이 낮기 마련이며, 그 낮은 수준에
대해서는 거기에 따라 부득이 낮게 대할 수밖에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어린아
이를 놓고 당장에 어른이 되라고는 할 수가 없는 것이며, 유치하다고 나무랄 것만은 아니라
는 말입니다. 그래서 애정과 통제, 율법과 은혜가 균형을 이루어야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유명한 제임스 더불류우 파울러(James, W Fowler)가 6단계로 구분한 신앙의 발달 단계에
의하면 유치한 단계인 맨 첫 단계를 직관적이고 투사적인 단계로 설정하고 있습니다. 첫 단
계에서는 하나님의 모습도 사람의 모습처럼 생각을 하게 되는데, 그것은 보이는 것만을 생
각하고 보이지 않는 것은 생각을 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모든 것을 보이는 것 안
에서 생각하려 한다는 것입니다.
아무튼 성장의 과정에는 유치한 단계가 있기 마련입니다. 이에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에
서 그것을 위한 대단히 중요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말씀의 내용이란 어린아이에 대한 문제는 어른이 책임을 져야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이 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볼 때 갈라디아 교회가 유치합니다. 그래
서 이런 저런 말로 책망도 해봅니다.
그러나 교회가 유치하기 때문에 이제는 부득불 그 책임을 내가져야 되겠다고 사도 바울은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사실이 그렇지 않습니까? 젖 먹는 어린아이가 잘못했다하여 거기에다 책임을 물
어 감옥에 보낼 수는 없는 것이란 말입니다. 그러므로 어린아이의 잘못은 어디까지나 그 부
모에게 달려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어린아이들이 대소변을 가릴 수 있는 시기는 2살 이
후에야 가능한 것인데, 그것을 미리부터 왜 못가리냐며 매질을 하고 겁을 주게되면 그 아이
는 그 일로 인해 의기 소침한 사람이 될 뿐만 아니라 조금 크면은 말더듬이가 된다고 하는
것이 심리학적인 해석입니다. 그러니까 아직 성숙하지 못한 것을 놓고 성숙하라고 한다해서
성숙해지는 것이 아니고 보면, 부득불 그 책임은 교육하는 이쪽에서 져야한다는 말입니다.
이에 사도 바울은 부득불 내가 다시 해산의 수고를 하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는 너희들
의 신앙이 유치한 것에 대한 책임을 내가 지겠다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갈라디아 교인들로
하여금 예수를 믿게 하기 위하여 수고했던 사도 바울이 이제는 성장에 대한 책임을 지기 위
해 필요한 희생을 지불하겠다는 고백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가만히 보면 어떤 사람들은 전
도를 해서 한번 교회에 나오는 것을 보면은 그 이후에는 그대로 내어 버려 둔 채 성장에 대
해서는 전혀 관심을 갖지 않는 것을 볼 수 있는데, 그것은 아주 잘못된 것이라 하겠습니다.
교회에 나오기를 시작했으면 이제는 신앙이 무럭무럭 잘 자랄 수 있도록 적어도 3년, 아니
면 세례를 받을 때까지 계속 잘 돌보아 주어야 합니다.
어쨌든 그 유치한 단계를 놓고 본인에게 책임을 돌려서는 아니 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때로는 떠 먹이기도 하고 일일이 가르치기도 하며 본을 보이기도 해야
합니다. 그 때문에 전도자의 책임이 중요한 것입니다. 따라서 그 사람의 신앙 성장은 그를
전도해준 사람의 신앙만큼 자란다는 것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만약 전도를 한 사람
이 낮 예배, 저녁 예배, 새벽 기도 다 나오는 사람이면 전도를 받은 사람도 예수 믿는 것은
이런 것인가 보다 하고 처음부터 그렇게 형성이 되어 나갑니다. 그러나 나를 전도한 사람이
주일 낮에 한번 나오는 사람이라면 나 또한 그런 정도의 신앙으로 형성이 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다른 사람을 전도하고 인도한다는 것은 매우 중요하니 만큼 그 책임도 큽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를 가리켜 해산의 수고라는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어린아이
를 낳는 수고와 같은 의미가 있는 수고인 동시에 그만큼 고통스러운 수고라고 하는 말입니
다. 그럼에도 사도 바울은 이 수고, 이 고통을 내가 계속적으로 지불하겠다고 말합니다.
여기에 최고의 고통, 최고의 사랑, 최고의 가치가 있음이니 이 얼마나 놀라운 이야기입니
까?
여러분! 젖 먹는 어린아이에게 잘못했다하여 책망하며 매질하는 것을 보았습니까? 그가
어린아이인 동안 매질도 안 하거니와 실망도 하지 않습니다. 어린것이 발버둥치며 운다고
하여 저 녀석이 아무래도 성격이 나쁜가 보다라고 말하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그와는 반대
로 많이 우는 아이를 두고는 "커서 음악가가 될려는가 보다"라거나, 한참 울고 돌아가면 "고
집이 있는 것을 보니 큰 사람이 되겠는데."라며 되도록 좋은 해석을 하는 것이 바로 어른들
의 생각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처음 예수를 믿는 사람들의 유치함을 놓고 어떻게 평가를 해야 되겠습니
까? 여기에 해산의 수고를 하는 전도자의 기본 자세가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잘 아는 말씀
입니다 만은 쿼바디스라는 영화에서 보면 베드로가 예수 믿는 사람을 죽이려고 하는 박해를
피하여 로마에서 빠져 나와 도망을 가려고 성밖을 나서게 됩니다. 로마를 향하여 걸어오고
계시는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이에 깜짝 놀란 베드로가 주님 어디로 가십니까하고 물을
때에 예수님께서는 "네가 버리고 가는 로마에 너 대신 가기 위하여 내가 지금 로마로 간
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때에 베드로가 "아닙니다. 내가 가겠습니다."하고 돌아서서 다시 로
마로 들어가 훗날 거꾸로 십자가에 못을 박혀 죽었다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는 비
록 전설로 전해지고 잇는 이야기이지만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이야기입니다.
이와 같이 오늘도 예수님께서는 교회를 배신하는 사람, 그리고 그리스도를 배신하고 도망
가는 배신자들을 위해서 다시 십자가에 못 박히는 고통을 겪고 계시는 것입니다. 잘못된 신
앙의 소유자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오늘 또 다시 해산의 수고를 하시는 것이란 말입니다. 한
심령이 그리스도인으로 태어나서 그리스도인으로 성숙해 가는 데에는 이처럼 많은, 실로 엄
청난 희생을 필요로 합니다. 그 누군가 그를 위해서 대단한 수고를 하지 않고는 그가 자랄
수 없습니다. 그를 위해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셨고, 말씀이 전해지고, 성령이 감화
하며, 그리고 전도자, 교역자, 친구, 이웃할 것 없이 누군가가 해산의 수고를 해야 합니다.
해산의 수고를 한 사람 가운데 대표적인 사람이 있다면 바로 어거스틴의 어머니 모니카가
온갖 방탕한 일을 다 하면서 어머니의 마음을 아프게 하였지만 끝까지 낙심하지 않고 기도
하면서 해산의 수고를 하므로 마침내 성 어거스틴을 만들어 낸 것입니다. 이와 같은 일을
위해 사도 바울은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라고 말합니다.

출처/곽선희목사 설교자료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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