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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곽선희 목사 설교

날리는 낙엽의 소원(욥기 13장 20절~28절)

by 【고동엽】 2024. 1.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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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리는 낙엽의 소원(욥기 132028)

 

오직 내게 이 두 가지 일을 행하지 마옵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주의 얼굴을 피하여 숨지 아니하오리니, 곧 주의 손을 내게 대지 마옵시며, 주의 위엄으로 나를 두렵게 마옵실 것이니이다. 그리하시고 주는 나를 부르소서. 내가 대답하리이다. 혹 나로 말씀하게 하옵시고 주는 내게 대답하옵소서. 나의 불법과 죄가 얼마나 많으니이까. 나의 허물과 죄를 내게 알게 하옵소서. 주께서 어찌하여 얼굴을 가리우시고 나를 주의 대적으로 여기시나이까. 주께서 어찌하여 날리는 낙엽을 놀래시며 마른 검불을 따르시나이까. 주께서 나를 대적하사 괴로운 일들을 기록하시며, 나로 나의 어렸을 때에 지은 죄를 받게 하시오며, 내 발을 착고에 채우시며, 나의 모든 길을 살피사 내 발자취를 한정하시나이다. 나는 썩은 물건의 후패함 같으며 좀먹은 의복 같으니이다.

 

그 푸른 하늘에

당신을 향해 쓰고 싶은 말들이

오늘은 단풍잎으로 타 버립니다.

밤새 산을 넘은 바람이

손짓을 하며, 나도 잘 익은 과일로

떨어지고 싶습니다. 당신 손안에

…………

누구나 한번은 수의를 준비하는

가을입니다. 살아온 나를 고마워하며

떠날 채비에 눈을 씻는 계절

--두에게 용서를 빌고 약속의 땅으로

뛰어 가고 싶습니다.

 

이 시는 이해인 수녀의 가을 편지라는 장편시 중의 한 부분입니다.

지금 가을의 막바지에 서 있는 우리 모두에게 한 번쯤 옷깃을 여미게 하는 시이기에 소개해 드렸습니다. 봄은 화사한 계절입니다. 무엇인가 희망스러운 일이 일어날 것 같아 무작정 아름다운 생각을 하면서 가슴으로 영접하는 계절입니다. 여름은 정신없이 일하는 계절입니다. 뜨거운 햇볕 속에서 가을의 열매를 기대하며 땀흘리며 열심히 일하는 활동의 계절입니다. 그리고 가을은 열매 맺는 결과를 보고 떨어지는 낙엽을 보면서 깊이깊이 생각하는 사색의 계절입니다. 여기 강단에 장식되어 있는 감나무의 가지에도 잎은 떨어지고 열매인 감만 달려 있는 것을 봅니다. 이 감이 익기 전에 잎이 무성했음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감나무 잎이 없이 감이 맺힐 수 없듯이 우리는 땅에 뒹구는 낙엽을 보면서 이 낙엽으로 인하여 맺어진 열매를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제 다시 봄을 생각해 봅니다. 나는 무엇을 기대하며 어떤 씨앗을 심었습니까? 심은 대로 거두므로 가을 추수에서 봄에 뿌린 씨를 다시 묻게 됩니다. 또한 여름 동안 얼마나 열심히 성실하게 일하고 가꾸었는가도 함께 생각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제 하나님 앞에서 물어야 합니다. 가을의 심판대 앞에서 진실하게 자기 존재를 물어 볼 수 있는 이 계절이 되었으면 합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나는 욥은 우리 인생의 대표자라 말할 수 있습니다. 특히 수난의 대표자로 가을 인생의 모델입니다. 그는 동방의 제일 가는 부자였고 열 남매를 가진 다복한 가정의 가장이었습니다. 그에게는 자녀들의 재롱을 즐기며 희망에 벅찼던 아름다운 봄의 계절이 있었고 그 많은 재산과 더불어 무럭무럭 자라나는 자녀들의 성장 과정에서 풍요와 번영을 누리는 여름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은 욥의 가을 인생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자신을 날리는 낙엽과 마른 검불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그는 이제 가을의 길목에 서서 죽음의 저편을 내려다보며 가장 절실하고도 진실하게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욥의 깊은 고뇌로 드리는 이 진지한 기도를 우리 함께 생각해 보겠습니다.

첫째, 그의 기도는 삶이 끝난 자의 기도입니다. 낙엽과 검불은 다 끝났음을 의미합니다. 꽃피는 계절이나 성장기가 아닙니다. 즉 꿈이 있는 계절이나 일할 수 있는 시기가 아니란 말입니다. 이제 생명의 시기가 끝나고 황혼 길에 서서 두 손을 들고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습니다. 햇빛에 진액이 다 증발해 버렸고 찬바람에 다 시들고 말았습니다. 효력도 능력도 지혜도 정력도 다 되어 이제 떨어지는 낙엽, 아니 곤 불태워 버릴 낙엽의 존재인 자기를 보고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느 재벌이 임종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일생동안 돈도 벌었고 권세도 가졌었습니다. 이제 임종을 맞아 아들딸들을 다 모아놓고, 장자의 손을 붙잡으며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아들아, 너는 지금 이 세상에서 가장 비참한 실패자의 손을 붙잡고 있느니라." 아들은 깜짝 놀라서 "아닙니다. 아버님은 사업에도 성공하셨고 인생에도 성공하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아버님을 존경하고 부러워하고 있습니다"라고 아버지의 말씀을 가로막았습니다. 아버지는 다시 설명하셨습니다. "아니다. 나는 이 재산을 모으기 위해 친구를 잃었고, 부를 얻기 위해 가정을 돌보지 않았다. 그리고 이 영광과 권세를 위해 진실을 포기했으며, 하나님의 뜻마저 외면하고 예수님을 버렸다. 이제 아무 쓸모 없는 재산만 불잡고 있는데 그것마저 놓아버려야 할 시간이 왔구나. 철저하게 실패한 이 아버지를 불쌍히 여겨 다오." 여러분은 지금 무엇을 얻고 있습니까? 무엇을 얻기 위하여 무엇을 버렸습니까?

둘째, 욥은 자기를 잃은 자의 기도를 드리고 있습니다. 사면을 둘러보아도 출구가 없습니다. 그는 전쟁으로 인하여 재산을 잃었고, 재난으로 인하여 가정을 잃었습니다. 이것은 욥의 잘못이 아닙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쳐들어와 그 많은 재산을 탈취해 갔기에 그로서는 속수무책이었습니다. 또한 열 남매가 모여 잔치하는 중에 돌풍이 불어 집이 무너져서 전부 몰사했으니 누구를 원망해야 합니까? 또한 그는 가난으로 친구까지 잃게 되었습니다. 그가 부할 때에는 친구도 많고 반겨 주는 이도 많았습니다. 방문객도 끊임없이 있었습니다만 이제 거지가 되어 비참하게 되자 누구도 그를 반겨 주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질병으로 인하여 명예를 잃었습니다.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내가 병들면 아무도 가까이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또한 설사 위로가 있다 해도 그것이 위로되지 않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병든 다음에 명예가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심지어 많은 사람들이 손가락질하는 것 같고 조소하는 것처럼 느끼게 됩니다. 건강을 잃게 되면 화려했던 나의 모든 것들이 함께 빛을 잃어 가고 맙니다. 욥에게서 특히 심각했던 것은 의를 잃어버렸다는 것입니다. 이 엄청난 고통 때문에 의를 잃어버렸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욥에게 그렇게 말하는 것 같았고 자신도 그게 사실인 것 같았습니다. 얼마나 죄가 많으면 저런 천벌을 받을까?---많은 친구들이 찾아와서 위로한답시고 하는 말들이 그에게는 조금도 위로가 되지 않았습니다. 실제로 그의 친구들이 한 말을 보면 "가만히 생각해 보라. 무슨 큰 죄가 있었던 게 아니냐"고 하는 내용이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비난하는 것 같았고 자신마저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의 참을 수 없는 고통이었습니다. 건강의 자유를 상실했고 의를 잃어버린 절대적인 고독을 느끼는 순간이었습니다. 이 고독은 누구도 위로할 수 없고 충족되지 않는 갈증이기에 그는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셋째, 그는 폐기된 자의 기도를 드리고 있습니다. 이제 그는 사용 가치가 전혀 없는 존재입니다. 돈이 있어 사업을 하겠습니까, 건강이 있어 일을 하겠습니까, 또는 지혜가 있어 무슨 일이든 도울 수가 있습니까? 이 세상에서는 아무 쓸모가 없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심지어 사랑하는 아내마저도 그를 저주하고 나가 버립니다. 마침내 그늘 자기 생을 저주하며, 왜 어머니가 나를 낳았으며 젖을 먹이고 돌보았는가고, 자기 생 자체를 철저하게 부정하고 있습니다. 이 폐기된 자의 고통 속에서 하나님께 부르짖고 있습니다.

이제 그는 하나님 앞에 생명을 갈망하는 진실한 기도를 드립니다. 그의 기도의 내용을 보면----

첫째, 지혜와 지식을 구하는 기도를 드리고 있습니다. "하나님! 고통 당하는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왜 고통을 당해야 하는지를 모르겠습니다.

왜 이 재난이 내게 있어야 하는지를 모르겠습니다. 죄 때문이라면 무슨 죄 때문입니까? 태어날 때부터 오늘까지 은혜로 살아왔는데 이제 와서 죄를 살피신다면 살아남을 자가 어디 있겠습니까? 처음부터 끝까지 긍휼이요 은혜뿐인데 어찌하여 오늘에 이르러 어렸을 때부터 지은 죄를 기억나게 하십니까? 하나님이여, 무슨 죄 때문입니까? 어찌하여 주의 얼굴을 가리우시고 나를 주의 대적으로 여기시나이까? 불법과 죄가 얼마나 많으니이까? 나의 허물과 죄를 알게 해 주옵소서. 그리고 이 고난에 대한 보상은 무엇입니까? 이 고난 끝에는 어떤 일이 이루어지는 것입니까, 아니면 여기서 끝나는 것입니까?" 그는 환경을 바꾸어 달라거나 고난에서 해결해 주십사는 기도를 하지 않았습니다. 단지 이 고난의 의미를 알게 해 달라고 부르짖고 있습니다. 풀턴 쉰(Fulton Sheen)이라는 설교가가 그의 글 가운데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한 것이 있습니다. "가장 큰 신비는 인간이 무엇 때문에 괴로워하느냐가 아니라 인간이 괴로워할 때에 무엇을 놓쳐 버리고 있느냐이다." 여러분! 여러분은 괴로움을 당하고 나서 무엇을 놓쳤는가 한번 자문해 본 일이 있습니까? 고난을 거치면서 잃은 것은 재산만이 아닙니다. 용기를 잃었습니다. 병든 것만 문제가 아니라 의도 잃었습니다. 소망까지도 잃어버린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사실, 일생 동안 살아가면서 무엇인가 잃어버릴 때가 있습니다마는 그것으로 인하여 얻는 것이 더 클 수만 있다면, 잃어버리는 것을 두려워하거나 기피하거나 슬퍼할 일이 아닙니다. 문제는 고난의 의미를 알고 싶은 것입니다. 고난의 과거적 의미, 현재적 의미, 미래적 의미, 종말론적인 의미를 알고 싶은 것입니다. 욥은 무지에서 깨어나 고난의 의미를 알게 해 달라고 하나님께 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둘째, 대화를 갈망하는 기도를 드리고 있습니다. 현대를 가리켜서 대화가 없는 시대라고 말합니다. 언어가 단절되고 가치관이 단절되었으며 도덕관이 단절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인간과 인간의 관계가 단절되고 있습니다.

오늘 욥은 특별히 그의 가까운 친구와 아내와 단절되고 있음을 봅니다. 친구들이 찾아와서 위로하는 것이 조롱으로 들렸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의 고통입니다. 건강한 사람이 병든 사람에게 "인생은 어차피 한번 왔다가 가는 것입니다"라고 위로한다고 해서 위로가 되겠습니까? 더군다나 욥과 같은 가을 인생에서 누가 위로할 수 있겠습니까? 아내입니까, 친구입니까? 어느 누구도 어떤 말로도 위로되지 않는 것입니다. 제가 잘 아는 분이 운영하는 어느 목재소가 하루아침에 불에 타 버린 일이 있었습니다. 다행히도 가족들은 무사히 피신할 수 있었지만 재산은 다 없어졌습니다. 이제 목재소 주인의 친구들과 교인들이 찾아와서 위로합니다. 무슨 말들로 위로할 수 있겠습니까? 기껏 한다는 소리가 재산은 탔지만 식구들이 무사하니 얼마나 다행이며, 나무들은 다 타버렸지만 이 땅이 있으니 다시 시작할 수 있지 않느냐고 말해 주었습니다. 그분은 사고 뒤에도 열심히 새벽 기도에 나와 기도를 했습니다. 다른 교인들이 다 간 다음에 그는 큰소리로 혼자 열심히 기도를 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본의 아니게 그의 큰 기도 소리 때문에 기도의 내용을 들을 수가 있었습니다. "하나님, 이렇게 고난을 당했더니 친구들이 와서 위로하기를, 재산이 다 없어졌지만 식구와 땅이 남았으니 얼마나 다행이냐고 위로해 줍니다. 하나님,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도 나 같은 일을 좀 당하게 해 주세요." , 이게 웬 말입니까? 전혀 위로 받지 못했음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여러분, 위로 받지 못하는 한순간이 있습니다. 이 순간에 진정으로 대화할 수 있는 대상은 하나님입니다.

본문에서도 "하나님이여, 나를 부르소서. 내가 대답하리이다. 혹 나로 말씀하게 하옵소서"라고 자기의 기도가 하나님께 상달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믿는 자에게 가장 큰 고통은 기도가 막히며, 하나님의 응답을 듣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가장 불쌍한 사람은 교회 밖에 있는 사람이기보다는 지금 이 자리에 나와 앉아 있으면서도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지 않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을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구제 불능입니다. 가장 무서운 심판입니다.

욥은 우선 자기 기도가 하나님께 상달되기를 원했습니다. 우리도 경험하고 있듯이 한두 시간씩 엎드려 기도하고 또는 밤새우며 기도했다 해서 그 모든 말이 다 기도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푸념과 원망만 늘어놓다가 끝내는 경우도 있습니다. 또한 정말 하나님께 들려지는 기도가 안될 때에는 소리만 높게 올라가서 경건은커녕 고함만 지르다가 끝나는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욥은 "하나님이여 말 좀 하게 해주소서"라고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는 "내게 응답하소서"라고 기도의 응답을 원하고 있습니다. 가령 하나님께서 "내가 너를 사랑한다. 이 고통은 더 큰 축복을 위한 것이다. 더 크고 소중한 것을 주기 위하여 변변치 않은 것을 잠시 거두었느니라"고 말씀하시거나 아니면 "네 죄를 사했다. 내가 너를 사랑하는 증거가 여기 있느니라"고 한 말씀만 해 주신다면 무엇을 주저하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과의 이 교통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어서 욥은 답답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셋째, 하나님과의 단절로부터의 회복을 원하는 기도를 드리고 있습니다.

본문에서 "어찌하여 얼굴을 가리우시고 나를 주의 대적으로 여기시나이까?"라고 안타깝게 회복을 원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그는 은혜의 대상이요 사랑하는 자로 주께서 많은 축복으로 인도하셨는데, 오늘에 와서 왜 원수같이 취급하느냐고 묻고 있습니다. 물질을 잃은 고통, 가정을 잃을 고통, 건강을 잃은 고통, 친구와 아내와 단절되는 고통 등은 다 참을 수 있지만 하나님과의 사이가 단절된다는 것은 참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대적하시나이까!" 간절히 기도하고 있습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그 어떤 것을 통하여 나에게 주시는 바가 있다면 그 어떤 것을 빼앗기는 문제를 감수해야 합니다. 인생은 어차피 낙엽입니다. 그러므로, 열매를 맺어 사명을 다하고 나면 유감없이 사라지는 뜻있는 낙엽, 그래서 다시 새 봄, 은혜의 아침을 바라보는 낙엽이 되어야 합니다.

욥의 간절한 기도는 드디어 엄청난 역사를 이루게 됩니다. 욥기 42장에 보면 욥이 말하기를 "전에는 내가 멀리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얼굴을 봅니다."---그 고난을 통하여 하나님을 보게 된 것입니다. 이 하나의 진실을 위해서 하나님은 놀라운 역사를 이루셨습니다. 여러분, 여러분들이 지금 이 자리에 있기까지, 또한 하나님 앞에 나와 진실하고 겸손한 기도를 드리기까지 그 순간을 위하여 하나님은 얼마나 큰 역사를 이루셨는지 아십니까? 만약 탕자가 거지로 전락하지 않았다면 아버지께로 돌아왔겠습니까? 다윗이 환난 중에 있지만 않았다면 하나님께 그렇게 간절히 무릎을 꿇었겠습니까? 하나님은 우리들과 종말적인 직선적 관계를 맺기 위하여 버리지 못하는 모든 것을 버리도록 역사하시고, 그리고서 소중한 것, 영원한 것을 우리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이 순간을 위하여 하나님은 얼마나 많은 것들을 버리게 하시는지 모릅니다. 우리는 은혜로 태어나서 은혜로 사라집니다. 귀한 열매를 맺고 사라지는 낙엽에서 하나님이 내게 주신 음성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전에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더니 오늘은 하나님의 얼굴을 봅니다."----이 아름다운 간증이 우리들에게도 있으시길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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