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기뻐한다는 것 신16:9-12 (2015/7/5) ["그로부터 일곱 이레를 세는데, 밭에 있는 곡식에 낫을 대는 첫날부터 시작하여 일곱 이레를 세십시오. 그리고 주 당신들의 하나님이 당신들에게 주신 복을 따라,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예물을 가지고 와서, 주 당신들의 하나님께 칠칠절을 지키십시오. 당신들은 주 당신들의 하나님이 그의 이름을 두려고 택하신 그 곳에서, 당신들과 당신들의 아들과 딸과 남종과 여종과, 성 안에서 같이 사는 레위 사람과 떠돌이와 고아와 과부까지도 함께 주 당신들의 하나님 앞에서 즐거워해야 합니다. 당신들은 이집트에서 종살이하던 것을 기억하고, 이 모든 규례를 어김없이 잘 지키십시오."] • 일곱 이레를 세라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한 해의 절반이 지나고 7월의 첫 주를 맞이했습니다. 뭔가에 쫓기듯 허둥지둥 달려온 것 같습니다. 에덴의 동쪽 땅에서 바장이며 사느라 조금은 지쳤습니다. 날이 조금씩 무더워지고 있습니다. 작가 미상의 기도시 하나가 마음에 와닿습니다. "길고 긴 더운 날들…/삶은 느리게 흘러가고…/그늘 아래서 쉬며 여유를 즐길 시간…//신이시여,/님의 서늘한 그늘 아래서 잠시 쉬어가게 하소서./제 들뜬 마음을 늦추게 하시고/님의 모든 백성을 향한 따뜻한 연민으로 채우소서." 도시는 우리로 하여금 쉴 틈을 허락하지 않고, 우리 또한 왠지 모를 조바심에 떠밀려 종종걸음 치며 살고 있습니다. 시인은 더운 날을 일러 '그늘 아래서 쉬며 여유를 즐길 시간'이랍니다. '그런가?' 하고 쓸슬하게 웃는데 그 다음 대목에서 옷깃을 여미게 됩니다. "신이시여,/님의 서늘한 그늘 아래서 잠시 쉬어가게 하소서". 그렇지요. 우리의 진정한 쉼은 주님의 은총 안에 머무는 것입니다. 그 그늘 아래 머물 때 들뜬 마음은 차분해지고, 다른 이들을 향한 연민의 마음이 조금씩 조금씩 우리 속에서 자라게 됩니다. 오늘은 많은 교회가 맥추감사주일로 지키는 날입니다. 맥추절은 보리 수확과 관련된 절기입니다. 우리 나라의 경우 보리는 가을에 씨를 뿌려 초여름에 거두게 됩니다. 농사를 짓지 않는 이들은 그런 자연의 리듬이 낯설기만 합니다. 보리가 익어서 거둘 만하게 된 계절 혹은 익은 보리를 거둠질 하는 일을 일러 '보릿가을'이라 합니다. 보리와 가을을 합쳐놓은 말입니다. 초여름이지만 '수확의 계절' 하면 사람들이 가을을 떠올리기에 이런 조어가 생긴 것 같습니다. '보리누름'이라는 단어도 있습니다. 보리가 누렇게 익는 철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계절을 1월, 2월 하는 숫자로 표현하지 않고 이렇게 자연의 리듬을 따라 인식할 수 있다면 삶이 한결 여유로워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맥추절은 칠칠절(feast of Weeks, feast of harvest) 혹은 오순절이라고도 불립니다. 유월절 둘째 날부터 일곱 주간을 헤아린다고 하여 칠칠절이라 하고, 유월절로부터 헤아리면 50일 째 되는 날이라 하여 오순절이라 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전통적으로 유월절 둘째 날 보리의 첫 열매를 거두어 하나님께 바쳤습니다. 초실절을 지키라는 말이 자로 이것을 가리킵니다. 보리 한 오멜을 하나님께 가져가야 했는데, 오멜(omer)의 문자적 의미는 '보리 한 묶음'이라는 뜻입니다. 오멜은 그래서 한 묶음의 보리를 탈곡할 때 얻을 수 있는 분량으로 대략 2.2리터에 해당된다고 합니다. 그때 보리가 영글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칠칠절 혹은 오순절은 수확의 절기였기에 사람들의 마음이 좀 흔흔해지기도 했던 모양입니다. 룻기에서 룻과 보아스의 로맨스가 시작되는 것도 이 계절입니다. 이 때는 밀과 보리만이 아니라 각종 실과들도 무르익기 시작하는 때이기에 오순절이 되면 사람들은 하나님이 주신 그 땅에서 난 귀한 열매들을 하나님께 즐겨 바쳤다고 합니다. 신명기 8장 8절은 약속의 땅을 일러 "밀과 보리가 자라고 포도와 무화과와 석류가 나는 땅이며, 올리브 기름과 꿀이 생산되는 땅"이라고 말합니다. 지금도 유대인들은 오순절이 되면 자기 집과 회당을 다양한 식물과 꽃들로 장식하고, 그 땅에서 나는 다양한 곡물과 과일들을 바구니에 담아 행렬을 이루어 성전으로 가져간다고 합니다.(변순복, <변순복과 함께 하는 성경 속의 절기를 찾아 떠나는 여행>, 탈무드에듀아카데미, 2015년 4월 30일, p.185-204 참조) • 하나님의 백성으로 거듭남 오순절은 수확의 계절이기도 하지만 토라의 절기이기도 합니다. 오순절은 히브리어로 즈만 마탄 토라테이누(Z'man Matan Toratenu)라고도 불리는데, 그 뜻은 '우리의 토라를 받은 시간'입니다. 애굽을 탈출하여 가나안에 정착한 유대인들은 농사를 지으며 정착생활을 하고 있던 가나안의 풍습에 따라 절기 축제를 지켰지만 거기에 자기들의 경험을 덧입혔습니다. 절기의 역사화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오순절은 탈출 공동체가 시내산에서 십계명을 받음으로써 하나님의 백성으로 거듭난 날이기도 합니다. 온갖 잡족들의 집합체였던 탈출 공동체는 야훼와 언약을 맺음으로써 한 나라로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제사장 나라'와 '거룩한 백성'이 되라는 소명을 받았습니다. 역사의 천더기로 취급받던 이들, 천부의 인권조차 인정받지 못한 채 강자들의 폭력에 속수무책으로 무너지던 이들에게 주어진 가슴 벅찬 소명입니다. 오순절은 바로 이런 사실을 상기하는 날입니다. 오순절에 하는 또 하나의 중요한 생사는 소년 소녀들의 성인식입니다. 소년들의 성인식은 바르 미츠바(Bar Mitzvah)라 하고 소녀들의 성인식은 바트 미츠바(Bat Mitzvah)라고 하는데, 굳이 오순절에 하는 까닭은 스스로 토라를 해석할 수 있는 연령에 이르렀으니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가는 책임적인 주체가 되라는 뜻입니다. 성인식에 참여할 아이들은 토라의 말씀 가운데 제비뽑기를 통해 자기가 해석해야 할 성경 말씀을 받습니다. 아이는 그 말씀을 깊이 묵상하고 또 연구하여 정해진 날 회당에 갑니다. 그곳에서 그는 어른들 앞에서 그 말씀의 의미를 풀어 설명합니다. 어른들의 날카로운 질문에도 답해야 합니다. 답변을 잘 하고 나면 어른들은 그 아이에게 축하의 인사를 건넵니다. 이제는 토라를 논하고 해석할 수 있을 만큼 성장했음을 공적으로 인정해주는 것입니다. • 우리 삶의 주인 오늘 본문을 읽어나가다 보면 '주 당신들의 하나님'이라는 표현이 반복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10절과 11절 사이에 무려 네 번이나 나옵니다. 이것은 우연도 아니고 표현의 미숙도 아닙니다. 이 구절은 오순절의 핵심이 무엇인지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주'라는 말은 이 땅에 몸붙여 살고 있는 모든 이들이 자기 삶의 주인이 누구인지를 제대로 알고 살아야 함을 상기시켜줍니다. 우리의 있음 그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최근에 많은 이들이 미국 대통령 오바마가 인종증오범죄로 희생된 이들을 추모하는 예배에서 행한 장례식 추모연설을 보고 감동하였습니다. 그는 찰스톤(Charleston) 시에 있는 이매뉴얼 아프리칸 감리교회에서 열린 클레멘타 핑크니(Clementa Pinckney) 목사의 장례식에 참석하여 추모 연설을 하였습니다. 그는 미국 남부에서 처음으로 흑인들을 예배에 참석시킴으로 자유와 정의의 초석이요 인권과 인간 존엄의 상징과도 같은 그 교회에서 벌어진 참극을 아파했습니다. 인종 증오의 감정에 사로잡힌 무모한 한 청년이 성경공부 모임을 하고 있던 이들에게 총기를 난사하여 9명이 희생되었음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오바마는 그 사건을 상기하면서 범인은 증오에 눈이 멀어 핑크니 목사와 성경 공부 그룹을 에워싸고 있는 하나님의 은총과 사랑의 빛을 보지 못했다고 말합니다. 범인은 공포와 보복, 폭력과 의혹, 분열을 획책했지만 하나님은 신비스러운 방법으로 일하고 계시다고 말했습니다. 이매뉴얼 아프리칸 감리교회의 신도들은 범인에게 증오를 보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오히려 그 젊은이의 어긋난 삶을 아파하며 그를 용서한다고 말했습니다. 오바마는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크고 놀라운지를 고백합니다. 그는 은혜는 획득하는 게 아니고, 우리가 누릴 만한 자격이 있는 것도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자유롭고 자비로우신 호의라는 것입니다. 증오에 증오로 맞서지 않은 그들의 용기와 믿음에 감격하면서 그는 자기가 즐겨 부르는 찬송가를 불렀습니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워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 얼마 후 이 찬송가는 합창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물결이 그 거룩한 공간에 흘러 넘쳤습니다. 증오와 미움은 그곳에 발을 붙일 수 없었습니다. '주 당신들의 하나님'이라는 말의 반복을 저는 삶이 제 아무리 고달파도 하나님이 우리 삶을 이끌고 계심을 상기하라는 뜻으로 해석하고 싶습니다. 우리는 하박국서에 나오는 한 대목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무화과나무에 과일이 없고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을지라도, 올리브 나무에서 딸 것이 없고 밭에서 거두어들일 것이 없을지라도, 우리에 양이 없고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주님 안에서 즐거워하련다. 나를 구원하신 하나님 안에서 기뻐하련다. 주 하나님은 나의 힘이시다. 나의 발을 사슴의 발과 같게 하셔서, 산등성이를 마구 치닫게 하신다."(합3:17-19) 늘 부족한 것 투성이여도 하나님의 구원받은 백성이라는 기쁨은 절대로 포기할 수 없습니다. 세상은 우리를 보고 '루저'라고 말할지 몰라도, 우리는 그들이 알지 못하는 기쁨을 누리는 사람들입니다. 진리 안에서 우리는 자유인입니다. 우리 속에는 흔들리는 않는 기둥 하나가 있습니다. 예수의 마음이 그것입니다. 기둥이 바로 서면 어떤 인생의 무게가 얹혀져도 무너지지 않는 법입니다.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칠칠절은 바로 이런 사실을 상기하는 절기입니다. • 모든 이들의 축제 본문은 하나님이 당신의 이름을 두려고 택하신 곳에서 절기를 지켜야 한다고 말합니다. 절기의 의미는 공동체적으로 구성되는 것임을 가르치시려는 것입니다. 순례의 절기를 통해 사람들은 자기 삶이 하나님을 중심으로 하여 다른 이들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다시금 자각하게 됩니다. 이 축제는 지주들이나 귀족들만의 축제가 아닙니다. 누구도 이 즐거움에서 배제되어서는 안 됩니다. "당신들과 당신들의 아들과 딸과 남종과 여종과, 성 안에서 같이 사는 레위 사람과 떠돌이와 고아와 과부까지도 함께 주 당신들의 하나님 앞에서 즐거워해야 합니다."(16:11) 사회적 약자들을 배제한 기쁨은 기쁨이 아닙니다. 그들까지도 하나님 앞에서 즐거워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들이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존중되어야 하고 아픈 사정이 있다면 신원되어야 합니다. 바로 그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출애굽 사건은 경제적 잉여가 만들어낸 계급적 차이 때문에 존중받지 못하던 사람들을 보며 하나님은 마음 아파하심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하나님은 강제 노역에 시달리던 이들을 찾아오셨고, 지배자와 피지배자가 갈리지 않는 평등 공동체를 이루라고 꿈을 심어주셨습니다. 사회적 약자들을 돌보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의 마땅한 의무입니다. 그것을 소홀히 하는 것은 하나님의 택하심에 대한 배신입니다. 그렇기에 오늘 본문도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당신들은 이집트에서 종살이하던 것을 기억하고, 이 모든 규례를 어김없이 잘 지키십시오."(16:12) 흔히 사람들은 살림살이가 좀 나아지면 구질구질하던 시절의 기억을 다 씻어내고 싶어합니다. 과시적 소비를 통해 자기 속에 있는 열등감을 지워버리려 합니다. 그런데 어느 신학자는 생활을 위한 도구를 바꾸는 순간 사람은 하나님까지도 바꾸고 만다고 말했습니다. 사람은 생각하는 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고 말한 이도 있습니다. 이게 어쩔 수 없는 인간입니다. 그렇기에 자꾸만 오만해지기 쉬운 자기 마음을 하나님께로 가져가야 합니다. 일렁이는 버릇이 있는 물은 바다에 이르러야 고요해진다지 않습니까. 오늘 우리가 누리고 있는 모든 것들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임을 자각할 때 우리 삶은 건강해집니다. 우리 주변에 있는 사회적 약자들에게 자꾸 시선을 돌리고, 그들이 기쁘게 살 수 있도록 배려하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하나님께 바칠 진정한 예배임을 잊지 마십시오. 우리 앞에 열리는 한 해의 또 다른 절반이 주님의 은총을 더욱 깊이 자각하는 나날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또한 우리 믿음의 분량이 더욱 커져서 하나님이 하시려는 일에 기꺼이 동참할 수 있기를 빕니다. 증오와 폭력이 날로 증대되는 세상이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가 더욱 본질적이라는 사실을 증언하도록 부름을 받았습니다. 들뜨고 부풀었던 마음을 이제 하나님의 그늘 아래 내려놓고, 새로운 연민과 사랑을 회복하는 나날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
|
등 록 날 짜 | 2015년 07월 05일 12시 15분 28초 |
'◑δεδομένα 18,185편 ◑ > उपदेश सामग्री 16,731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우리가 만들어가는 신앙 이야기 -살전1:1-10 (0) | 2022.07.06 |
---|---|
악인의 등불은 꺼진다 -잠24:15-20 (0) | 2022.07.06 |
은혜는 사람을 가리지 않는다 -행15:6-11 (0) | 2022.07.06 |
다시는 수치를 당하지 않을 것이다 -요엘2:18-27 (0) | 2022.07.06 |
부르심은 철회되지 않는다 -롬11:25-36 (0) | 2022.07.06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