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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우리가 드리는 예배 -레1:1-9

by 【고동엽】 2022. 7. 4.
오늘 우리가 드리는 예배
레1:1-9
(2013/1/13, 봉헌주일)

[주님께서 모세를 회막으로 부르시고, 그에게 말씀하셨다.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라. 너는 그들에게 다음과 같이 일러라. 너희 가운데서 짐승을 잡아서 나 주에게 제물을 바치는 사람은 누구든지 소나 양을 제물로 바쳐라. 바치는 제물이 소를 번제물로 바치는 것이면, 흠 없는 수컷을 골라서 회막 어귀에서 바치되, 나 주가 그것을 기꺼이 받게 하여라. 제물을 가져 온 사람은 번제물의 머리 위에 자기의 손을 얹어야 한다. 그래야만 그것을 속죄하는 제물로 받으실 것이다. 그런 다음에 제물을 가져 온 사람은 거기 주 앞에서 그 수송아지를 잡아야 하고, 아론의 혈통을 이어받은 제사장들은 그 피를 받아다가 회막 어귀에 있는 제단 둘레에 그 피를 뿌려야 한다. 제물을 가져 온 사람이 그 번제물의 가죽을 벗기고, 고기를 저며 놓으면, 아론의 혈통을 이어받은 제사장들이 제단 위에 불을 피우고, 그 불 위에 장작을 지피고, 아론의 혈통을 이어받은 제사장들이, 고기 저민 것과 그 머리와 기름기를 제단에서 불타는 장작 위에 벌여 놓아야 한다. 제물을 가져 온 사람이 내장과 다리를 물에 씻어 주면, 제사장은 그것을 모두 제단 위에다 놓고 불살라야 한다. 이것이 번제인데, 이는, 제물을 불에 태워서 그 향기로 나 주를 기쁘게 하는, 살라 바치는 제사이다."]

• 멈춤과 나아감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주현절 후 첫째 주일인 오늘 우리는 봉헌주일예배를 겸하여 드리고 있습니다. 저는 올 한 해 우리 교회가 지향해야 할 내적 목표를 두 가지로 정했습니다. 첫째는 모든 교우들이 서로를 정성스럽게 대하는 태도를 회복하는 것이고, 둘째는 예배를 회복하는 일입니다. 히브리어로 예배禮拜를 뜻하는 단어는 '샤하' 혹은 '아보다'입니다. 샤하는 '엎드려 절하다', '굴복하다'는 뜻이고, 아보다는 '봉사, 섬김'을 뜻합니다. 하나님 앞에 엎드리는 것과 헌신이야말로 예배의 두 요소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오늘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기 위해 나왔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예배는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우리의 능동적 행위가 먼저가 아니라, 하나님의 부르심이 먼저 있어야 가능하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지금 원근각처에서 이곳에 모였습니다. 기대와 설렘을 안고 온 이도 있을 것이고, 습관적으로 나온 이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우리가 여기에 있는 것은 하나님의 부르심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사실입니다.

출애굽기의 마지막 대목은 주님의 영광이 회막을 덮고, 주님의 영광이 성막에 가득 찬 광경을 보여줍니다. 지금 우리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광경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함이 나타난 그곳은 모세조차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출40:35). 그 거룩하고 장엄한 광경은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의 유한함과 죄성을 절감하게 만들었을 것입니다. 일찍이 호렙산의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서 나타나셨던 하나님은 다가오는 모세에게 "네가 서 있는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너는 신을 벗어라"(출3:5) 하고 명령하셨습니다. '신'은 몸과 마음에 배어 든 삶의 습속이나 자아를 상징하는 것이었을 겁니다. 하나님의 거룩함 앞에 나아가는 사람은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라든지, 어떠한 분이어야 한다는 생각을 떨쳐버려야 합니다. 우리 욕망대로 하나님을 조작하거나 조정하려고 하면 안 된다는 말입니다. 이사야도 하나님의 현존을 경험한 후 "재앙이 나에게 닥치겠구나! 이제 나는 죽게 되었구나!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인데, 입술이 부정한 백성 가운데 살고 있으면서, 왕이신 만군의 주님을 만나 뵙다니!"(사6:5) 하고 탄식했습니다.

그러면 누가 감히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습니까? 오늘 레위기의 첫 대목이 그 질문에 대한 답입니다. "주님께서 모세를 회막으로 부르시고, 그에게 말씀하셨다."(레1:1)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실 때입니다. 자칫하면 오해의 소지가 있는 말입니다. 그렇지만 예배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인간의 응답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기에 예배조차 우리의 공적일 수 없는 겁니다. 그것은 마치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의 선도적 사랑에 대한 응답이라고 가르쳤던 요한의 교훈과도 일치됩니다(요일4:10).

• 예물을 바친다는 것
레위기는 거룩한 백성이 되기 위해 하나님께 바쳐야 하는 제사에 대해 가르칩니다. 제사를 예배 의식으로 대체한 우리들로서는 레위기에 등장하는 제사법이 아주 낯설게 느껴지는 것이 사실입니다. 재미도 없고 알쏭달쏭하고 복잡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그래서 큰 맘 먹고 성경을 통독하던 이들도 레위기의 제사 규정에 이르면 인내심의 한계에 도달하곤 합니다. 번제, 소제, 화목제, 속죄제, 속건제에 대한 규정은 까다롭기 이를 데 없습니다. 가끔은 그 대목을 건너뛰고 싶은 유혹이 듭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불편해도 건너뛰면 안 됩니다. 때로는 건너뛰고 싶은 그 말씀을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깨달음을 주시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이들은 누구나 예물을 가지고 나아갔습니다. 제사의 성격에 따라 제물이나 제물을 바치는 방법이 달라졌습니다. 하나님께 바칠 예물 혹은 제물을 가리키는 히브리어 단어는 '코르반'(qorban) 입니다. 코르반은 '가까움' 혹은 '사이가 가까움을 나타내는 물건'를 뜻하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예물을 바친다는 것은 잃어버렸던 친근함을 회복한다는 표지인 셈입니다. 그런데 코르반의 명사형 어근인 케렙(qereb)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단어는 인간의 내장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나중에는 이 말이 지정의를 뜻하는 말로도 사용됩니다. 여기서 유추할 수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 예물을 바치는 행위는 자신의 심장과 창자를 바치는 행위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자기 생명을 바치는 행위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이런 마음으로 예배를 드린다면 멀뚱멀뚱, 혼곤한 마음으로 앉아 있을 수는 없습니다.

오늘은 번제燔祭(holocaust)에 대해서만 살펴보겠습니다. 번제는 제물 전체를 불에 살라 바치는 제사입니다. 번제에 사용되는 제물은 소나 양 가운데서 흠 없는 수컷이어야 합니다. 번제를 드려려는 사람은 제물을 이끌고 회막 어귀로 나아갑니다. 그리고 번제물의 머리 위에 자기 손을 얹습니다. 자기 죄를 제물에게 전가한다는 상징행위입니다. 손을 얹으며 봉헌자는 빠르게 자기 삶을 돌아볼 것입니다. 아등바등 살아가느라 잊고 있었던 자기의 허물과 죄가 주마등처럼 스쳐갈 것입니다. '아, 내가 이렇게 살아왔구나!'. 부끄럽고 참담한 마음이 들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손을 얹는 의례가 끝난 후에 제물을 가져온 사람은 그 짐승을 직접 잡아야 했습니다. 제사장이 잡는 것이 아닙니다. 전문가가 대행해 주는 것도 아닙니다. 살아있는 동물의 숨을 거둔다는 것, 어질고 착한 눈빛을 하고 있는 가축을 잡는다는 것, 그것도 나의 죄를 대신 뒤집어 쓴 짐승을 잡는다는 것은 참 아찔한 일이었을 겁니다. 바다 낚시를 해서 건져올린 물고기가 상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아가미 부분을 칼로 찔러 피를 빼야 하는 데, 그걸 할 때마다 여간 곤혹스럽지 않았던 기억이 납니다. 하물며 네 발로 걸어다니는 짐승을 잡는다는 것은 그렇게 만만한 일이 아니었을 겁니다.

언젠가 한상익 장로님께 들은 이야기가 떠오릅니다. 인턴 시절 하루는 응급실에서 근무하고 있는데, 물에 빠졌던 사람이 앰뷸런스에 실려 왔더랍니다. 심폐소생술을 비롯한 모든 조치를 다 해보았지만 그는 결국 죽고 말았습니다. 생명을 살리지 못했다는 사실도 당황스러웠지만, 더욱 당황스러웠던 것은 지금 밖에서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는 가족들에게 그의 죽음을 알리는 일이었습니다. '내가 과연 한 존재의 죽음을 선언할 자격이 있는가?' 그것은 정말 깊은 충격이었습니다. 삶과 죽음 사이에서의 흔들림입니다. 예배드리는 우리에게 이런 마음이 있습니까?

제사장들은 제물의 피를 받아다가 회막 어귀에 있는 제단 둘레에 뿌렸습니다. 또 제물을 가져 온 사람이 번제물의 가죽을 벗기고, 고기를 저며 놓으면 제사장은 그것을 가져가 제단 위에서 다 태웠습니다. 내장과 다리를 물에 씻어 주면, 제사장은 그것도 제단 위에서 다 불살랐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기억하고 계시지요? 제물 곧 코르반은 바로 우리들의 심장이나 창자라는 사실 말입니다.

• 거룩한 삶의 봉헌
그런데 예배는 제물을 바치는 데서 그쳐서는 안 됩니다. 제물을 바치는 행위도 반복되다 보면 '틀에 박힌 일'(routine)이 될 수 있습니다. 제사를 바치는 것으로 사죄가 완수되었다고 생각한다면 그건 큰 오산입니다. 이사야는 삶의 변화가 수반되지 않는 제사에 대해 신랄하게 비난했습니다.

"무엇하러 나에게 이 많은 제물을 바치느냐? 나는 이제 숫양의 번제물과 살진 짐승의 기름기가 지겹고, 나는 이제 수송아지와 어린 양과 숫염소의 피도 싫다. 너희가 나의 앞에 보이러 오지만, 누가 너희에게 그것을 요구하였느냐? 나의 뜰만 밟을 뿐이다!"(사1:11-12)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갈 때 가지고 가야 할 또 다른 예물은 우리의 거룩한 삶입니다. 거룩한 삶은 이웃과의 관계를 통해 드러나게 마련입니다. 하나님께 예배를 드린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을 이웃과 세상에 흘려보내는 통로가 되어야 합니다. 이웃 사랑은 관념이 아니라 일상에서 실천해야 할 구체적인 삶입니다. 밭에서 난 곡식을 거두어들일 때 밭 구석구석까지 거두어들이지 않는 것, 떨어진 이삭을 줍지 않는 것, 이웃을 속이지 않는 것, 이웃을 억누르거나 이웃의 것을 빼앗지 않는 것, 품군의 삯을 가로채지 않는 것, 듣지 못하는 사람이라 하여 저주하지 않는 것, 보지 못하는 사람 앞에 걸려 넘어질 것을 놓지 않는 것, 재판을 공정하게 하는 것, 남을 헐뜯지 않는 것…. 이 목록은 한 없이 늘어날 수 있을 겁니다.

어찌 살아야 마땅한지를 잘 알면서도 우리는 이웃 사랑을 실천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만족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감사할 줄 모르기 때문입니다. 늘 자기의 결핍을 채우기에 급급하기 때문입니다. 욕망의 쳇바퀴를 돌리는 사람은 숨만 가쁠 뿐입니다. 전도서 기자는 "눈은 보아도 만족하지 않으며 귀는 들어도 차지 않는다"(전1:8)고 말했습니다. 사람 속에는 세상에 있는 것들로는 채울 수 없는 심연이 있습니다. 그 심연 앞에 설 때마다 우리는 현기증을 느끼거나 허무함에 사로잡힙니다. 에르네스또 까르데날은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사랑으로 인하여 마음속에 상처를 입고 태어난다. 하나의 목마름을 안고 태어난다"고 노래합니다. 그 목마름은 하나님이 아닌 것으로는 채울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전심을 다해 구해야 할 것은 세상의 '이런 저런 것들'이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물질주의에 포섭된 복음 전도자들은 '번영의 신학'을 가지고 사람들을 미혹하고 있습니다. 예수 믿으면 건강의 복을 받고, 물질의 복을 받고, 범사에 형통하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걸 전적으로 부정하자는 게 아닙니다. 그것이 복음의 전부인양 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그것은 신앙에 따라오는 부수적 결실일 뿐입니다. 하나님을 진실로 우리 마음에 모시면, 비록 건강하지 못하다 해도, 부유하지 못하다 해도, 실패의 연속이라 해도 낙심하지 않는 법입니다. 존 아반지니(John Avanzini)라는 은사파 목사는 <세상의 부>라는 책에서 사탄에 대항하는 싸움을 주문했습니다. 그런데 그가 말하는 싸움은 세상에서 자족하려고 몸부림치는 싸움이 아니라, "거짓 종교를 통해 그들의 소유가 충분하다고 믿도록 유혹하는 사탄에 대항하는 싸움"이었습니다(미로슬라브 볼프,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혀>, 국제제자훈련원, 2012, 220쪽). 그는 자족하는 마음을 가르치는 종교를 일러 ‘거짓 종교’, ‘사탄’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기가 막힐 일입니다. 더욱 속상한 것은 이런 가르침이 그렇게 노골적이지는 않지만 변형된 형태로 한국교회에서 유포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 오늘 우리가 드릴 예배
오늘 우리가 드리는 예배는 진정한 예배입니까?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나오고 있습니까? 우리의 심장과 지정의를 그분께 봉헌하고 있습니까? 삶으로 그분을 예배하고 있습니까? 시인 최승호는 삶의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 예배를 '자동세탁기'에 견줬습니다. 때묻는 옷을 자동세탁기 안에 집어던지듯, 일주일 동안 살면서 지은 죄를 교회에 오는 것으로 말끔히 씻었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바울 사도는 그리스도의 은총으로 구원을 받은 성도들에게 진정한 예배를 드리라고 요구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몸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십시오. 이것이 여러분이 드릴 합당한 예배입니다."(롬12:1)

예배는 우리 몸을 하나님께 거룩한 산 제물(holy sacrifice)로 바치는 것입니다. 그것이 합당한 예배이고 영적인 예배입니다. 영적인 예배는 몸을 통해서만 구현됩니다. 영적인 예배를 드리려는 이들은 이 시대의 풍조를 본받지 말아야 합니다. 돈이 말하는 시대, 승자 독식의 체제를 맥없이 받아들이는 시대는 악한 시대입니다.

엊그제 신문에서 삼성 이건희 회장의 72회 생일잔치에 대한 기사를 보았습니다. 기사는 그 잔치에 참여한 사람들이 누구인지, 그 일을 누가 주관했는지, 받은 선물이 무엇이고, 하객들에게 주어진 답례품이 무엇인지 상세하게 전해주었습니다. 기사를 읽다가 아차 싶었습니다. '아니, 이게 왜 기사거리이지?'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기자는 대체 무슨 생각을 가지고 그런 기사를 썼던 것일까요? 그들을 선망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대중들의 기호를 의식했던 것일까요? 돈이 말하는 시대가 분명합니다.

그런 기사를 작성하는 동안 이 땅에 살고 있는 고통 받는 이들의 사정은 사람들에게 가리워져 있습니다. 가난한 이들의 절망은 그저 늘 보던 풍경인양 도외시되고 있습니다. 홀로 고독하게 죽어간 사내의 시신이 20여일 만에 발견되어도, 냉방에서 혹한과 맞서는 사람들이 있어도, 거리로 내쫓긴 이들의 신음소리가 도처에서 들려와도 그들의 목소리는 국민들의 귀에까지 미치지 못합니다. 남수단에서 학살이 벌어지고, 시리아의 난민촌이 물에 잠겨도 그것은 우리와 무관한 현실처럼 인식됩니다. 그들의 처지를 외면하고 드리는 예배는 진정한 예배일 수 없습니다. 이 땅의 교회가 새로워지려면 진정한 예배가 회복되어야 합니다. 예배가 회복되면 우리는 서로를 정성스럽게 대할 수 있습니다. 교회가 세상의 빛과 소금인 것은 바로 서로에 대한 존중과 사랑의 기운을 세상에 퍼뜨릴 때입니다. 올 한 해 우리 교우들의 믿음이 진정한 예배를 통해 깊어지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등 록 날 짜 2013년 01월 13일 12시 13분 55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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