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과로부터 자유하라
하나님을 비전으로 삼은 자는 자신의 행위에 대한 결과를 보고픈 유혹에서 자유하는 자입니다. 한국의 역대 대통령들은 자신의 재임기간 동안 가시적인 결과를 보려다가 모두 실패한 대통령이 되고 말았습니다. 자신이 정한 기한 내에 반드시 결과를 보고자 하는 것은 경제논리요 실적주의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크리스천은 달라야 합니다. 자신이 지금 행하고 있는 일의 결과를 자신의 생전에 직접 확인하려 하면, 그 사람은 결코 정도를 걸을 수 없습니다. 결과라는 우상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크리스천이란 영원을 사는 사람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지금 주님을 위해 행하는 일의 결과를 우리 생애에 못 볼 수도 있지만, 그러나 영원 속에서 주님과 함께 반드시 확인케 될 것입니다. 이 사실을 깨달을 때 우리는 결과의 유혹을 탈피할 수 있으며, 일평생 정도를 지킬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는 로마 복음화라는 하나님의 비전을 이루어 드리기 위해 자기 생을 걸고 로마로 건너갔습니다. 그러나 참수형을 당해 죽을 때까지 그가 로마에서 한 일이라곤, 감옥 안 죄수와 간수 몇 명에게 복음을 전한 것 외에는 그 어떤 가시적인 결과나 업적이 없었습니다. 고작 그 정도의 일을 위해 자신의 생명마저 던졌다면, 경제논리로만 따져볼 때 그는 완전무결한 실패자요 어리석기 짝이 없는 인간이었습니다. 만약 그가 주님을 위한 자기 헌신의 결과를 어떤 형태로든 자기 생애에 보기 원했더라면 가만히 앉아 참수형을 당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어떻게든 목숨을 부지하면서, 자신이 원하는 결과를 얻기 위해 온갖 수단을 강구했을 것입니다. 만약 그랬더라면, 그 개인적으로는 성공했을는지 모르지만 성경의 위인으로 살아남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정도를 외면한 그를 하나님께서도 외면하셨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는 결과를 보고픈 유혹에서 철저하게 자유했기에 정도에서 벗어나지 않을 수 있었고, 하나님의 비전을 위하여 자신의 생명마저 내어놓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참수형을 당한지 300년 만에 로마제국이 기독교 국가가 되는 것을, 다시 말해 자신이 뿌린 씨앗을 통해 하나님의 비전이 이루어짐을, 하나님 나라의 영원 속에서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이국 땅에서 종살이와 옥살이의 눈물겨운 과정을 거친 요셉은 하나님을 비전으로 삼았던 자기 삶의 결과를, 즉 자신을 통해 인류를 기근에서 구원하시는 하나님 비전의 성취를 자기 생전에 직접 보았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보지 못한 사람이었습니다. 요셉이 결과를 보았다고 해서 그가 결과에 집착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공통점은 결과에 대해 철저하게 자유했다는 것입니다. 영원하신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했기 때문입니다. 우리 역시 주님을 위한 우리 삶의 결과를 생전에 볼 수도 있고 보지 못할 수도 있지만, 결과를 보고픈 유혹에서 자유할 때에만 일평생 하나님의 비전을 추구하는 참된 섬김과 봉사의 목사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크리스천이란 영원을 사는 사람이요, 목사란 무엇보다 이 사실을 믿는 사람입니다. 그럼에도 굳이 생전에 자기 삶의 결과를 보기 위해 안달한다면, 어찌 그가 영원하신 하나님을 진정으로 믿는 목사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 위 글은 이재철 목사님의 <비전의 사람> (홍성사, 2004) p. 188~ 191에서 옮겨온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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