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무오에 관한 7대 오해/권성수 교수
*성경무오의 정의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 < 신구약 성경은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며,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신앙과 행위의 규칙이다>, <성경의 권위는 어떤 인간이나 교회의 증언에 의존하지 않고 성경의 저자이신 하나님에게 의존하고 있다>, <성경의 자증과 성령의 내증이 이를 입증한다>고 하였다.
이러한 성경관은 구프린스톤학파에게로 넘어가는데, 워필드가 대표적이다. 그의 큰 공헌은 성경의 영감교리이다. 워필드는 <성경은 성령의 영감으로 된 하나님의 무오한 말씀이면서 동시에 영감된 인간 저자들의 개성이 그대로 살아 있는 인간의 책이다>라고 주장하였다. 그는 성령과 인간 저자들의 ‘동류적’ 작용이 오류를 절대 불용하였다. Carson은 “하나님께서 그의 주권 속에서 우리가 성경이라고 부르는 자유롭게 작성된 인간의 저작들을 감독하사 그 결과로 성경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며 전적으로 참되다”라고 말한다. 물론 워필드는 성경이 동류적 작용을 통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성경의 原本(autographs)을 두고 한 말이다.
워필드의 성경무오 사상은 “성경무오에 관한 시카고 성명”에서 잘 나타난다.
1. 자신이 진리이시며 진리만을 말씀하시는 하나님은 자신을 상실된 인류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창조자, 주,구속자, 심판자로 계시하시기 위해 성경을 염감하셨다.
2. 성경은 하나님 자신의 말씀이며 성령에 의해 준비되고 감독된 사람들에 의해 쓰여진 것으로 그것이 다루는 모든 문제들에 있어서 무오한 신적 권위서이다. 그것은 그것이 주장하는 모든 것에 있어서 하나님의 교훈으로 신앙되어야 하며, 그것이 요구하는 모든 것에 있어서 하나님의 명령으로 복종되어야 하며, 그것이 약속하는 모든 것에 있어서 하나님의 보증으로 수납되어야 한다.
3. 성령의 신적 저자이신 성령은 그의 내증에 의해 그것을 우리에게 확증하시고 우리의 마음을 열어 그 의미를 깨닫게 하신다.
4. 성경은 전체적으로, 또 축자적으로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개인생활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구원적 은혜 면에 있어서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창조행위와 세계 역사의 사건들과 하나님 하에서의 그 자체의 문헌적 기원에 대한 진술 면에서, 즉 그 모든 가르침에 있어서 오류나 결함이 없다.
5. 이런 전체적 신적 무오성이 어떤 방식으로든지 제한되거나 무시되거나, 성경 자체에 위배되는 진리관에 상대화되면, 성경의 권위는 피할 수 없이 저해된다. 이런 탈선은 개인과 교회에 심각한 손실을 안겨준다.
이상에서 정의된 성경 무오에 관한 7대 오해가 있다.
1. 가현설적 성경관(Docetic)이라고 오해한다.
예수님의 인성을 부인하고 신성만 주장하는 설이다. 인간이 전혀 노력하지 않고 성경을 하나님이 하늘에서 떨어뜨려준 것이라고 생각함으로써 성경의 인간저자들을 무시한 성경관인 것이다. 성경전체에는 인간의 개성이 들어 있다.
워필드는 ‘동류설’을 주장한다. 그는 ‘구술설(dictation theory)’을 부인한다. 그가 신적 저자와 인간저자들의 동류적 작용을 지적한 것은 구술설이 들어설 자리를 없앤 것이다. 윌리암 아브라함은 우필드의 동류설과 구설술이 구별이 없다고 비판하였다. 윌리암 아브라함은 하나님에 대한 모든 말은 유추적이 말이며 하나님이 누구를 여감한다는 말은 스승이 학생을 영감한다는 것과 유추가 된다고 보았다. 이 마은 학새이 스승의 가르침의 핵심은 충실하게 전하면서도 자신의 능력의 제한 때문에 비의도적으로 왜곡하고 의식적으로 개작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성경저자를 영감시켰지만 성경저자들은 오류를 범한다고 주장하므로써 동류설이 구술설과 다를바 없다고 하였다.
워필드의 동류설은 인성과 신성의 문제와 결부시켜 설명되어야 한다고 하였다.
핵심적인 문제는 신적 요소와 인적 요소의 동류(concurrence)를 어떻게 균형있게 이해하는가 하는 것이다. 성경 무오를 가현설적이라고 비판하는 자들은 대체적으로 성경에 인적 요소가 있다는 것은 성경이 유오하다는 것을 필연적으로 내포한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유오성이 인간의 본질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가현설을 주장하는 사람은 인적요소를 강조하게 되면 인적 요소가 성경에 들어가게 됨으로 성경이 유오하게 된다고 생각하고 인적 요소가 성경에 들어가서는 안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문제는 유오성이 인간성의 본질이라는 전제에 문제가 있다. 인간이 필연적으로 오류를 범하는 존재인가? 그러면 타락하기 전의 아담은? 오류가 없었다. 또한 완전 상태에 들어갔을 때 인간은 오류가 없다.
카슨은 “인간들은 항상 유한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인간들이 항상 오류를 범하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인간성과 유오성을 필연적인 등식관계로 설명하는 것은 논리상의 모순이다. 그러기 때문에 가현설적 성경관이라고 비판하고 인적요소가 있기 때문에 오류가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논리상의 모순이다.
신적 요소를 강조하는 것을 <가현설적>이고 한다면, 인적 요소를 강조하는 것을 <자연신론적 Deistic)이라고 한다. 성경의 신적 성격을 부인하고 인적성격만 강조하는 이상의 입장은 자연신론적 성경관의 함정에 빠질 수 있다. 인적요소가 들어간다고 해서 절대로 오류가 있다고 보면 잘못이다.
Berkouwer는 성령과 인간 저자들의 유기적 관계를 적응과 원용을 구분함으로써 설명했다. ‘적응’( adaption)이란 하나님께서 계시하실 때 자기 자신을 인간에게 적응시키신다는 개념이다. 익것은 마치 아버지가 자녀의 수준으로 내려가는 것과 같다. 아버지가 자식에게 말하듯이 수준을 낮추어서 말하신다. (Baby talk) 물론 세련되지는 않았지만 불순한 것은 아니다. 원용이 아니다. 성경 무오 사상은 결코 가혀설적 성경관이 아니며, 오히려 그것이 가현설적 성경관이라고 하는 자들이 그 반대의 극단인 자연신론적 성경관의 오류에 빠져있다.
2. 학문적 황무지라고 주장한다.
둘째 오해는 성경무오를 받아들이게 될 경우 발전적 학문활동을 할 수 없고 그 결과로 학문의 황무지가 된다는 것이다. 성경무오는 인적요소를 무시하기 때문에 학문적으로 연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정말로 성경무오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학문적 황무지가 되었는가?하는 것이다. 오히려 가현설을 주장하게 되는 것이 학문적 활동의 마비를 가져오지 않겠는가?
실제로 성경무오를 주장하므로써 학문적 황무지가 아니라 더 많은 학문적 활동을 복음주의자들이 하고 있다. 시카고의 어느 자유주의 신학교는 학문적으로 무장되면서 신앙에 무장되지 않으면 학교 문을 닫게 된다. 그러니까 자유주의 신학교일수록 수준을 낮추게 된다. 현실적으로는 성경무오를 주장하는 쪽이 학문적으로 더 수준이 높아지고 있다.
결국 성경무오설을 받아들이게 되면 학문적 황무지게 된다는 오해는 잘못이다.
3. 연역적 성경관이라고 주장한다.
세번째 오해는 성경무오 사상이 “성경은 한나님의 말씀이다”는 명제를 전제해 놓고 이 명제로부터 연역해낸 성경관이라고 보는 오해이다. 성경의 현상을 주석적으로 관찰해서 귀납적으로 추론하는 대신에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하나님은 완전무오하시다, 따라서 성경은 무오하다는 식의 연역적으로 추론한 것이 성경무오설이라는 것이다. 결국 성경무오는 “주석적 왜곡”의 소산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성경의 현상을 조사하면, 역사적 사실의 왜곡과 비과학적 세계관과 서로 모순되고 충돌하는 진술들이 나타나므로 성경 현상의 바른 주석으로부터 성경무오를 도출할 수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성경무오가 연역적 성경관이라는 오해에 대한 폴 파인버그의 반론
1.성경무오를 주장하는 자들이 단일 방법론을 사용하지 않았다.
스프로울의 경우
1)고백적 방법(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고백하고 믿음으로만 그렇게 인정하는 방법)
2)전제적 방법(성경의 자증대로 성경의 절대 권위와 무오를 전제하는 방법)
3)고전적 방법 (귀납적 연역, 외증과 내증을 겸한 방법)
따라서 모든 무오론자들을 연역적 성경관의 테두리 안으로 가두는 것은 불합리하다.
2.연역적 방법을 사용한 자들은 무조건 교조주의적이고 폐쇄된 자들이라고 매도할 수 없다. 이거은 마치 기하학의 공리들(axioms)을 사용하는 자들을 비학문적이라고 매 도할 수 없음과 같다. 기하학의 공리들과 같은 신학적 공리들을 전제하고 이것들로 부터 이론을 연역할 경우 이것을 교주주의적 이론이라고 매도할 수 없다.
3.성경무오설을 포함해서 일반적으로 복잡한 학문을 하는데 대부분 연역법과 귀납법을 동시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따라서 성경무오를 연역법적 성경관이라고 비판하는 것 은 지나친 단순화이다. 실제로 이론을 세울 때는 귀납법과 연역법이 미묘하게 상호 작용할 뿐 아니라, 이 이상으로 나가서 창조저 사고나 갑작스런 통찰 등으로 논리를 전개하기도 한다.
4. 프린스톤의 신고안
네째 오해는 성경무오가 구프린스턴의 新考案이라는 것이다.
샌디인은 그의 저서 <근본주의의 뿌리>에서 하지와 워필드가 성경 원본의 무오성 신앙을 일부 장로 교인들을 위한 교리적 차원으로 끌어 올림으로써 성경무오 교리를 창안했다고 했다. 그 결과로 성경무오 신앙은 보수주의적 복음주의자들에게 대단히 중요한 교리가 되었으나, 실상 웨스트민스터 고백의 작성자들과 칼빈등의 개혁주의 전통에 위배된다는 것이다. 로저스와 맥킴도 이 교리에 참여하였다.
이 주장에 대한 부당성은 카슨과 우드부리지가 주장하였다. “1500년이상 동안 하나님의 무오하게 영감된 책으로서의 성경의 권위와 진정성은 기독교의 고정되고 논란되지 않은 신앙이었다”
교부들도, 종교개혁시대에도 성경무오를 주장하였다. 성경역사 전체를 두고보면 구프린스톤의 주장이 아니고 전체역사의 주류였다는 사실이다.
결론적으로 성경무오 사상을 역사적으로 개관한 바에 의하면, 성경 무오가 프린스턴의 창안으로서 역사적 기독교 및 개혁주의 전통과 단절된 것이라는 샌디인과 로저스/맥킴의 주장은 타당하지 못하다.
5. 형식적 성경관이라고 오해한다.
성경 무오에 관한 다섯째 오해는 성경의 권위는 본래 ‘신앙과 행위’ 영역에만 국한되고 역사와 과학 등의 영역에는 해당되지 않는 것인데 성경무오가 바로 이 점을 무시한 사상이라고 하는 것이다. 로저스/맥킴은 성경의 기능(function)과 형식(form)을 엄격히 구분하고 성경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원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기능에 있어서■ㅡㄴ 절대적으로 믿을만하나, 무오한 기능이 무오한 형식과 연결된 것이 아니라고 하였다.
이들은 성경의 기능을 강조하는데 구원적 기능만을 강조한다. 구원적 기능면에서는 오류가 없지만 형식에는 오류가 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폴 파인버그는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1)성경무오는 문법규칙들을 엄격하게 고수하는 것을 요구하지 않는다.
2)성경무오는 비유법이나 주어진 문학 장르의 사용을 배제하지 않는다. (완서법, 과장법, 제유법, 의인법, 환유법 등) 기사, 비유, 예언, 시, 복음, 역사 등의 문학 장르도 사용되 고 있다.
3)성경무오는 역사적 혹은 의미론적 정밀성을 요구하지 않는다.
4)성경무오는 현대과학의 전문술어를 요구하지 않는다. 성경은 현대 과학적 경험주의의 용어를 사용하지 않고 통속 용어 혹은 관찰용어를 사용한다.
5)성경무오는 신약의 구약인용에 있어서 여자적 정확성을 요구하지 않는다. 성경기록당 시에는 인용부호, 생략, 괄호, 각주 등을 정확하게 기록할 필요가 없었다.
6)성경무오는 예수님의 말씀은 그가 쓴 정확한 단어들과 정확한 음성과 정밀하게 일치 해야 함을 요구하지 않는다.
7)성경무오는 어떤 하나의 기록이나 관련되고 결합된 기록들의 철저한 포괄성을 요구하 지 않는다.
8)성경무오는 성경 저자들이 사용한 자료들의 不誤나 無誤를 요구하지 않는다.
성경이 과학의 교재나 연대기적 역사 교재가 아니므로 이런 기준에서 성경현상을 보고 성경유오 운운하는 것은 성경의 본질을 오해한 결과이다. 그러나 성경이 역사나 과학 문제를 다루는 한도 내에서 무오하다.
성경이 구원적 기능면에서는 무오하나 과학과 역사 면에서는 유오하다는 것은 기능과 형식을 분리하는 이원론적 전제를 깔고 있다는 점이다. 이런 이원론은 부당하다. 구원적 기능이 성경의 형식을 통하여 제시되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경의 기능과 형식을 떼어놓을 수 없는 것이다.
성경의 신적 저자의 영감으로 성경이 구원 문제에 무오한 기록이라면 그외 문제에 그의 초자연적인 무오보장이 왜 없었겠는가? 이런 의미에서 로저스/맥킴의 성경의 무오한 기능과 유오한 형식 구분은 하나의 오해에 불과하다.
6.과학적 도구(scientific tools)무시한다고 오해한다.
여섯째 오해는 성경무오를 주장하는 자들이 과학적 분석의 도구들을 무시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역사비평(historical-critical method)과 관련된 오해이다. 성경무오론자들은 역사비평에서 다루는 학문의 도구들을 무시한다는 오해이다. 역사비평가들은 성경무오론자들의 글을 두고 원시인으로 취급한다. 결국 이 오해는 성경이 구원 기능으로서만 무오하고 과학이나 역사에 있어서는 유오한 인간의 작품이기 때문에 역사비평의 도구로 얼마든지 분석된다고 보았다. 그런데 이들은 도구라는 개념을 착각하였다. 기계공의 연장은 그 자체로서 아무런 사상의 영향이 없는 것이지만, 문학적 도구는 중립적인 것이 아니다.
예)구조비평이란 도구를 써서 예수님의 비유를 해석할 경우.
거짓 존재로부터 벗어나서 참존재에로의 결단을 내려야 한다는 식으로 실존주의에 오염된 주석을 발견할 수 있다. 이런 경우 실존주의에서 출발해서 구조비평의 도구로 성경을 분석한 다음 결국 성경의 옷을 입힌 실존주의 사상을 읽어내는 것이다. 따라서 중립적이라고 하는 ‘도구들’이 과연 그런지 주의해야 한다.
문학적 도구들은 성경을 밝히는데 도움이 될 경우, 사용해야 한다. 그러나 계몽주의 소산으로 인간의 자율이성을 만물의 척도로 삼는 비성경적인 사상으로 오염되어 있는 도구들의 오염을 제거하고 사용해야 한다.
예) 편집비평의 경우
건드리는 그의 마태복음 주석에서 마가복음과 Q의 내용과 다르거나 거기에 덧붙인 내용이 마태복음에 있을 때, 그 내용은 역사성이 없는 미드라쉬로 보았다. 이는 성경의 권위를 부인해서가 아니라 성경의 현상을 심각하게 취급함으로써 성경의 권위를 살리기 위한 것이라고 했다.
*역사비평 -자연주의적 전제에서 초자연을 거부한 상태에서 성경도 비판되어야 한다. 또한 유추에 의해서 비판해야 한다. 우리의 경험에 의해서 비판해야 한다. 또한 인과율에 의해서 비판해야 한다. 원인과 결과에 의해서, 그러면 기적이 없어진다.
*자료비평 -성경 이전에 기록된 문서에 초점을 맞춘다. 성경은 이전 문서의 편집에 의해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자료에 초점을 맞춘다.
*양식비평 - 성경 이전의 자료들, 이전의 구전 상태에 관심을 갖는다. 입에서 입으로 전달되는 상태에 관심을 갖는다. 어떤 사건을 전달할 때, 소 단위로 전달되는데, 탄생설화, 기적, 비유같은 것을 수도 있다. 그런 구전상태의 유니티는 삶의 정황을 보여주고 있다.(Sita im Leben) 그 당시의 상황을 연구한다.
*편집비평 - 저자가 어떤 각도에서 썼는가에 초점을 맞춘다. 마태의 특징, 마가의 특징, 누가의 특징들을 다룬다.
*구조비평 - 마태복음이면 마태복은 전체의 구조를 연구하는 비평이다.
*청중비평 - 성경을 받아 들였던 청중을 연구한다.
*전승비평 - 어떤 문제가 나오면 구약부터 입에서 입으로 전승된 과정을 추정하는 것이다.
*독자반응이론 - 본래의 말씀이 주어졌을 때, 최초의 독자가 어떤 반응을 이루었느냐 하는 것이다. (포스트모드니즘에서 연구)
인간이성의 기준을 가지고 비평을 하면 학위를 취득하기가 쉽지만, 학문하는 사람들은 그렇지 않다.
우리는 전제를 받을 수 없다. 또한 이런 비평들이 내용을 비판할 때 받아 들일 수 없다. 그러나 그것이 성경의 내용을 밝히는데 이용될 수 있을 때, 받아들일 수 있다. 예를 들면, 양식비평에 관심을 가지는데, 옛날에는 비유라는 양식에 관심이 없을 때는 알레고리로 해석해 버렸다. 왜 그런가? 비유라는 양식을 몰랐기 때문이다. 계시록에서 왜 세대주의가 나오는가? 묵시라는 양식을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편집비평에서 저자의 특징을 연구한다. 과거에는 마태,마가,누가의 복음을 하나로 묶어서 하나로 주석해 버린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지 않다. 조화시키면 통일성을 살리지만, 예각을 죽인다. 그러므로 따로 따로 쓴다.
마태복음의 ‘기름은 성령이다’는 말을 성경전체에 사용해서는 안된다. 마태가 쓰는 기름과 바울이 그의 서신서에서 쓰는 기름이 다르기 때문이다. 저자의 상황 속에서 특징적으로 사용되는 것에 살아나도록 해야 한다. 청중비평도 필요하다. 독자반응이론도 필요하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을 때, 독자가 어떤 반응을 일으켰는가? 하는 것을 연구해야 한다.
그러나 인간이성을 전제하거나 성경내용을 뒤엎는 것은 받아들일 수 없으나, 과학적인 도구는 받아들일 수 있다. 이 비평에는 기계적인 과학적인 도구들이 아니라, 자기의 전제들이 깔려있음을 주의하지 않으면 안된다. 문제를 가진 도구일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분별하며 사용해야 한다.
편집비평을 보면, 건드리가 마태복음을 주석했다. MK도 없고 Q없는 것이 MT마태복음에 나온다. 그러면 그것은 미드라쉬(유대들은 자신의 신학을 말하기 위해서 역사를 뜯어 고친다는 것)라는 것이다.
동방박사의 방문사건을 두고 (마태는 이제 유대목자의 방문을 이방인 마고의 방문으로 바꾼다) 건드리는 역사적인 사건으로 보지 않고 뜯어 고친 사건으로 보고 있다. 이것이 유대인 미드라쉬라는 것이다. 편집비평이니까 마태복음의 특징이라는 것이다. 유대인들의 반응을 이방인 방문으로 뜯어 고침으로 이방인들을 구원하고자 했다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의 주석은 인정할 수 없다.
이런 식으로 이야기해 버리면 성경의 역사성이 없어진다. 성경이 믿을 만한 책이 될 수 없게 된다.
104 주 53) 편집비평 자체를 비평하는 것이 아니고 편집비평을 잘못했기 때문이다.
소위 과학적인 비평을 한다고 한면서, 성경을 꾸면낸 이야기라고 한다면 그것은 성경에 대한 도전이기 때문에 받아들일 수용할 수 없다.
주의할 것은 편집비평을 마치 도구라고 생각하고 작업했을 때, 건드리의 마음 속에 성경이 역사가 아니라는 전제가 깔려있다는 것이다. 마태가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건드리가 그렇게 본 것이다.
<편집비평 시험가능성 있음>
편집비평을 하는데, 객관적인 근거가 없는데 마태가 이런 식으로 했다고 하는 것이고
B는 편집비평 자체를 거부하고 있다. 성경 자체의 특징을 거부한다.
스톤하우스는 확실한 사실에서 출발해서 ,추측으로 나아가는 작업을 했다.
구약 전체를 관통하는 폼으로 언약을 잡아내서, 구약의 통일성 즉 언약이라는 것으로 전체가 통일 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딜라드, 구약의 공관문제, 사무엘, 열왕기서, 역대기서 동일한 본문에 대해서 저자의 시각이 다른다는 것이다.
쟝르비평> 성경을 밝히는 한도 내에서 비평을 쓰고 있다.
7. 해석학적 획일성이라고 오해한다.
성경무오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획일적인 내용이 아니면 무조건 반대한다고 하는 전제,
일곱째 오해는 그것이 해석학적 획일성을 요구한다는 것이다. 아마 이 오해는 극보수주의자들 편에서 발생하는 오해일 것이다.어느 귀절에 대한 특정해석만이 성경무오를 세워준다는 오해로서, 학문적 도구들을 사용하여, 혹은 해석자의 시각의 차이 때문에 생기는 해석의 다양성을 수용하지 못하는데서 야기되는 오해라는 점에서 여섯째와 무관하지 않다.
하나님의 말씀은 절대적이지만, 어떤 주석도 각도에 따라 달리 주석할 수 있다. 해석학적 획일성을 반드시 주장할 필요는 없다.
예1)실바는 민 25:9의 24,000명과 고전 10:8의 23,000명에 대한 세가지 해석을 소개했다.
1)개인들의 정확한 숫자 계산의 의도가 없을 때, 어림수를 제시하는 것은 전대미문의 것이 아니다. 바울은 하한선, 모세는 상한선을 제시한 것이다.(칼빈의 해석)
2)두 저자가 다 정확한 숫자를 제시할 의도가 없었다. 이것이 그들의 목적에 중요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림수가 하나님의 공의를 나타내는데 더 유리하다.(우드의 해석)
3)성경에 오류가 있는가? 우리가 그 저자들의 목적과 당시에 받아들일 수 있는 정확성 의 기준을 염두에 둘 때, 결코 오류가 없다. 그의 목적은 정확한 통계를 제시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부도덕을 경고하는데 있었다. 바울은 통계보다 부도덕을 강조한 다. 의도 - 목적 - 의도의 내용 (죄악성과 하나님의 공의)- 수사학의 원리, 당시의 정확성(주석학자들이 자기들 나름대로 깨닫는것을 인정하는 것이다)(마운스의 해석)
예2) 막 10: 17-18과 눅 18:18-19에서 ‘선한’과 ‘선한 일’에 대해서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선한’이 어디에 걸리느냐? 선한 선생님,
선한 (양쪽에 다 걸린다) 왜 내게 선하다고 하느냐, 왜 선한일을 묻는가
그렇다면 이들은 전체를 기록한 것이 아니라 부분을 기록하였다는 것이다.
결 론
지금까지 성경무오의 7대오해에 대해서 살펴보았는데, 성경무오가 무엇인지를 바로 알고 하라는 것이다. 복음주의자들에게 느슨한 자세가 있는 사람은 성경무오를 받아들이라고 권면하고 싶다. 이렇게 양쪽에 대해서 이야기하기를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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