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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2,922편)〓/성찬 설교

[예수정사기념예배]주의 만찬! (마태복음 26장 20~29)

by 【고동엽】 2022. 3.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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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정사기념예배]주의 만찬! (마태복음 26장 20~29)

 

 

오래 전에 미국 프로야구의 어떤 플레이오프 경기를 텔레비전으로 관람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그 경기의 홈팀은 이미 3연승을 거두고 1승만 더 추가하면 그 시리즈를 이기게 되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날 관중들 가운데 빗자루를 손에 들고 온 사람들이 많았는데, 그것은 빗자루로 먼지를 쓸어내듯이 상대팀을 아예 4연승으로 싹쓸이해버리자는 의미를 담고 있었습니다.
 그런 의미심장한 상징물이 된 빗자루를 들고 왔던 관중 중에 한 사람이, 이닝 사이에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서 그 빗자루를 어깨 높이 쳐들고 흔들면서 통로를 따라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역시 빗자루를 들고 왔던 다른 관중들이 그 사람 뒤를 하나씩 둘씩 따라붙으면서 삽시간에 빗자루 열댓 개의 행렬이 되었고, 이들이 관중석을 가로지르면서 경기장을 돌기 시작하자 모든 관중들이 그 장면을 보면서 순식간에 열광과 흥분의 도가니에 빠져 버렸습니다. ‘빗자루로 쓸듯이 저 상대팀을 확 쓸어버리고 4연승으로 이 시리즈를 오늘 밤 경기에서 깨끗이 끝내자.’라는 의미가, 그 관중석 사이를 줄이어 지나가는 빗자루들을 보면서 그 모든 홈팀의 관중들에게 전류가 통하듯이 강렬하고도 빠르게 공감되었던 것입니다. 그 ‘빗자루 응원’ 때문이었는지는 몰라도 결국 그 홈팀이 그 날 경기도 이기고 시리즈를 ‘싹쓸이(sweep)’하고 말았습니다. 많은 사람의 마음을 공감시키는 상징물 하나의 의미와 힘은 이처럼 강렬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유월절 만찬은 예수님께서 잡히시기 전날 밤에 제자들과 마지막 작별을 나누는 식탁이었습니다. 친한 친구와 같이 식사를 나누어도 마냥 즐겁고 사랑하는 연인과 데이트하면서 분위기 있는 식당에 마주 앉아 있어도 꿈처럼 황홀한데, 하물며 이 세상에 가장 완벽한 인간으로 오신 예수님을 모시고 함께 식사하게 된다는 것은, 실로 상상만 해도 부러운 자리가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 예수님께서는 그 유월절 만찬에 참석한 제자들뿐 아니라 오고 올 모든 당신의 제자들 역시 그 특별한 식탁의 은혜를 꼭 같이 누리도록 하기 위하여 ‘두 가지 상징물’을 남겨 놓으셨습니다. 비록 육신적으로 예수님과 마주 앉지 못한다 하더라도, 모든 시대와 장소를 초월하여 적어도 구원받은 택자라면 누구나 다 그것들을 보는 순간 마치 전류가 통하듯이 꼭 같은 강렬한 감동에 빨려 들어가지 않을 수 없게 되는 이 신비한 ‘떡과 잔’의 예식을 우리 주님께서 친히 제정해 놓으셨던 것입니다.
 과연 그 성찬식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지극히 평범하기 짝이 없는 이 한 조각의 떡과 한 잔의 포도주에 담겨 있는 그토록 깊은 공감대와 강한 감동력이 과연 어떤 것인지를, 오늘 우리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정사(釘死)기념예배의 자리에서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이 ‘주의 만찬’의 자리에서 우리 모두는 예수 그리스도만이 나의 ‘주님’이심을 진실로 고백할 줄 알아야 합니다.

 

 이 만찬을 베푸신 ‘주인’이 누구이신지부터 바로 깨달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본문 마태복음 26장 20절부터 25절까지의 말씀에 「저물 때에 예수께서 열두 제자와 함께 앉으셨더니 / 저희가 먹을 때에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에 한 사람이 나를 팔리라 하시니 / 저희가 심히 근심하여 각각 여짜오되 주여 내니이까 / 대답하여 가라사대 나와 함께 그릇에 손을 넣는 그가 나를 팔리라 / 인자는 자기에게 대하여 기록된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나지 아니하였더면 제게 좋을 뻔하였느니라 / 예수를 파는 유다가 대답하여 가로되 랍비여 내니이까 대답하시되 네가 말하였도다 하시니라」고 기록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유월절 식사 도중에 「너희 중에 한 사람이 나를 팔 것이다」라고, 실로 괴로운 심정을 토로하셨습니다. 다른 사람도 아닌 ‘너희 중의 한 사람’, 즉 삼년 동안을 그처럼 가까이 지내왔던 열두 제자들 중의 한 사람이 당신을 배반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은 예수님에게는 더할 수 없는 고통이었고, 제자들에게는 그야말로 ‘폭탄선언’과도 같은 것이었습니다.
22절에 보니, 그 말씀을 들은 제자들은 모두 심히 「근심하면서 각각」 「주여, 내니이까」라고 물었다고 했습니다. 여기의 ‘내니이까’라는 말은, 제자들 자신이 스스로 그런 배반자가 되지 않을까 미리 걱정해서 한 말은 아닙니다. 이 말은 영어 성경에 ‘Surely not I, Lord?’라고 번역되어 있는 것처럼, ‘저는 아니지요?’라는 뜻입니다. ‘아무리 우리 열둘 중에 하나가 주님을 파는 일이 생긴다 해도, 설마 그 말씀이 저를 두고 하는 말씀은 아니지요? 그렇지요?’라는 의미인 것입니다.
 능청스러운 것은 가룟 유다의 반응이었습니다. 다른 모든 제자들이 진심으로 걱정하면서 그렇게 말하자, 이미 예수님을 팔아넘기기로 짜놓고 기회만을 기다리고 있던 그도 따라서 시치미를 뚝 떼고 「내니이까」라고, 즉 ‘저는 아니지요?’라고 한 것입니다. 하지만 이 25절에 기록된 가룟 유다의 말에는 다른 열한 제자들의 말과 비교해 볼 때 한 가지 결정적인 차이점이 있었습니다. 다른 제자들은 「주여, 내니이까」라고 물었지만, 오직 가룟 유다만은 「랍비여, 내니이까」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물론 유대 사회에서 어떤 사람을 「랍비」 즉 선생님이라고 부르는 것은 최상의 존칭 중에 하나임은 틀림없습니다. 하지만 ‘주님’이라고 부르는 것은 ‘랍비’라고 부르는 것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최고의 존칭인 것입니다. 이것은 한 가지 예를 들자면, 유대인들이 하나님을 호칭할 때 ‘주’라고는 부르지만 결코 ‘랍비’라고 부르지는 않는 것만 보아서도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일견 사소한 차이 같지만, 열한 제자들이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른 것과 가룟 유다만 「랍비」라고 부른 것은 매우 의미심장한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삼년 동안 예수님과 함께 지내면서 그 예수님을 이제는 하나님의 아들로, 구세주로 믿게 된 열한 제자들은 이제는 예수님을 가리켜 ‘선생님’ 어쩌고 하는 정도로는 도무지 부를 수 없게 되어 있었습니다. 오직 입버릇처럼 그저 ‘주님’이라고, 그야말로 하나님을 호칭하는 이름으로밖에 달리 부를 수 없게 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가룟 유다는 달랐습니다. 그의 마음에는 그때까지도 여전히 예수님에 대한 확실한 믿음이 들어가지 못했고 여전히 그저 좀 훌륭하신 선생님 정도의 존경의 대상밖에 되지 못했던 것입니다. 함께 예수님을 따라 다녔고 이제 함께 예수님과 마지막 저녁 식탁을 나누는 자리에까지 왔지만, 그 만찬을 베풀어 주고 계시던 예수님을 알고 믿고 있는 정도와 수준에 있어서 다른 열한 제자들과 이 가룟 유다 사이에는 그처럼 큰 차이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차이는 결정적인 차이였으며 치명적인 차이였습니다. 바로 그 차이 때문에 한쪽은 최악의 배반자로 전락하고 다른 쪽은 교회의 기초를 이루는 사도들이 되었습니다. 바로 그 차이 때문에 한쪽은 「차라리 나지 아니하였더면 더 좋았을」 저주받은 인생이 되었고, 다른 한쪽은 재림하실 예수님과 「아버지의 나라에서 새것으로 함께 마시는」 영원한 축복의 잔치자리까지 같이 가게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들도 외견상으로는 모두 꼭 같은 자리에 앉아 있는 듯이 보일 것입니다. 주일마다 꼬박꼬박 예배당에 나와 성도의 회중 가운데 앉아 있고 늘 예수님을 같이 찬양하고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도 같이 하는, 바깥 불신자들이 보기에는 꼭 같이 예수님의 제자 무리에 들어 있는 사람으로 비치고 있을 것입니다. 실제로 우리의 생활은 한 교회를 중심으로 영적으로 ‘한솥밥’을 먹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영원한 생명의 한솥밥까지 같이 나눌 수 있기 위해서는 먼저 이 귀한 만찬에 초청해 주신 그 주인이 얼마나 고귀하신 분이신지를 바로 알고 있어야만 합니다.
 제가 미국에 있을 때 교인이라 하면서도 교회와 목사에 대하여 함부로 말하는 사람이 차려 준 식탁에 어쩌다 함께 하게 된 적이 있었습니다. 정말이지 눈앞에 아무리 맛있는 음식이 차려져 있어도 젓가락질조차 하고 싶지 않고 이미 먹은 음식도 목구멍으로 다시 올라오는 기분이었습니다. 하지만 정말 신앙 좋은 친구들이나 정말 존경스러운 선배 목사님들께서 초청해 주시는 식탁은 즐겁고 행복하기 이를 데가 없습니다.
 우리가 이 ‘주의 만찬’의 주인(host)이 누구이신지를 바로 깨달아야만 이 성찬은 실로 은혜로운 식탁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 주인을 주님(Lord)으로 고백하면서 이 자리에 앉아야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 어, 아주 훌륭한 인격자이시고 고매한 철학자이시지.’라는 정도나, ‘예수님 그 분은 인류 역사상 보기 드문 성인이시지.’라는 정도로는 그 ‘주의 만찬’에 초대받은 감격을 맛볼 수 없습니다. 그 정도는 예수님을 배반했던 가룟 유다조차도 가졌던 마음이었습니다. 예수님을 그저 존경스러운 ‘선생님’ 정도로 알고서는 그야말로 어림도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예수님을 오직 ‘하나님의 아들 되신 높으신 주님’으로, ‘나의 현세와 내세의 생명까지 온통 주장하시는 유일한 주님’으로 고백할 줄 알아야만 합니다. 초대 교회의 성도들이 세상의 군주인 로마 황제에게 쓰기를 거부하다가 결국 순교까지 당했을 정도로 고귀하게 여겼던 칭호,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만 붙일 수 있다고 굳게 믿고 그렇게 불렀던 바로 그 칭호로 우리 예수님을 부를 수 있는 자들만이 이 성찬에 참예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이 ‘주의 만찬’을 차려 놓으신 ‘주인’ 되신 예수님을 나의 유일하고도 영원한 ‘주님’으로 먼저 믿고 고백함으로써, 그처럼 높고 고귀하신 분께서 나 같이 낮고 천한 죄인을 초청해 주신 이 은혜로운 성찬을 감사와 기쁨으로 함께 받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2. 이 ‘주의 만찬’을 통하여 우리 모두는 그 주님의 대속적 죽음 때문에 영생하게 된 것을 뜨겁게 공감할 줄 알아야 합니다.

 

 이제 그 ‘만찬’의 주제가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깨달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마태복음 26장 26절 이하 29절에 기록하기를 「저희가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을 주시며 가라사대 받아 먹으라 이것이 내 몸이니라 하시고 / 또 잔을 가지사 사례하시고 저희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 그러나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이제부터 내 아버지의 나라에서 새것으로 너희와 함께 마시는 날까지 마시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고 했습니다.
 그날 밤 예수님께서는 그 특별한 만찬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당신의 제자들에게 분명하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떡과 포도주를 나누어 주시면서 「이것은 내 몸이니 받아 먹으라」 하시고 또한 「이것은 내 피니 받아 마시라」고 하셨습니다. 물론 이 말씀은 제자들의 입으로 들어가는 떡과 포도주가 문자 그대로 예수님의 살과 피로 바뀌게 된다는 뜻은 절대로 아닙니다. 이 말씀은 어디까지나 은유(隱喩)적으로 하신 비유일 뿐이었습니다. 떡을 떼시고 나누어 주신 것은 예수님 당신의 살이 바로 우리를 위하여 찢기게 됨을 나타내는 것이었습니다. 포도주를 따라서 나누어 주신 것 역시 예수님의 피 흘리심이 우리 죄를 위한 대속(代贖)제물이 되었음을 상징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십자가의 대속 사역으로 말미암아 ‘새 언약’이 성립되었다고 28절에서 선언하셨습니다. 구약의 언약은 하나님께서 율법을 통하여 명령하시고 사람은 그것을 순종해야만 성립될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사람은 아담으로부터 시작하여 모두가 다 그 율법을 준행하는 일에 실패만을 거듭했고, 그처럼 그 언약을 스스로 파기해 버린 죄로 인하여 사망의 벌을 피할 수 없게 되어 버렸습니다.
 이처럼 자신의 의로써는 도무지 구원 언약을 성사시킬 길이 없었던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이전과는 아주 딴판의 언약을 세워 주셨습니다. 그 전에는 ‘사람 쪽에서 율법을 준행하면’ 그 다음에 ‘하나님 쪽에서 구원을 베풀어 주신다’라는 것이었고, 따라서 ‘사람 쪽에서 율법을 온전히 준행하지 못하면’ 그 다음으로 ‘하나님 쪽에서는 영벌의 저주로 갚는다.’라는 것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그 ‘사람 쪽’에서의 조건은 아예 없어져 버리고 ‘하나님 쪽’에서 일방적으로 사람을 용서해 주시고 무조건적으로 구원해 주시는, 참 희한한 언약을 만드신 것입니다.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 사역이 그 사람 쪽의 조건을 ‘대신’ 충족시켜 주었기 때문에, 사람은 여전히 죄인이고 악인임에도 불구하고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이 신기한 언약, 사람 쪽에서는 아무 조건을 충족시킬 필요도 없고 그저 일방적으로 사람에게 유리하기만 한 ‘새 언약’이 성립된 것입니다.
 우리는 ‘주의 성찬’을 통하여 바로 이 ‘새 언약’의 은혜와 감격을 맛볼 수 있어야만 합니다. 십자가를 통한 이 고마운 ‘새 언약’이 없었더라면 저나 여러분이나 이 고질적인 죄악으로부터 헤어날 길이 전무했습니다. 죄에 대하여 무력하고 못난 꼴을 보이는 데에 있어서는 그 구약에서 같은 죄를 반복하던 이스라엘 사람들이나 오늘날의 우리들이나 정말이지 조금도 다름이 없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아침마다 각오해도 저녁마다 또 부끄러워지는 날들이 저와 여러분이 지내고 있는 하루하루가 아니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이 고질적인 연약함을 너무나도 잘 아시고 너무나도 너그럽게 대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그래, 너희들이 아무리 말씀대로 살고 죄 짓지 않으려고 노력해 보아도 본성이 그러니까 결국 안 되지. 그렇다면 내가 너희들의 죄를 위하여 대신 죽어서 너희들의 지난날의 모든 죄와 앞으로 지을 죄까지 한꺼번에 다 해결해 주겠다. 이것이 바로 나와 너희들 사이에서 맺는 새 약속이다.”라고 하시고는 십자가를 향해 가셨던 것입니다. 바로 이 십자가 대속을 통한 새 언약 때문에 저와 여러분은 자신의 죄 때문에 지옥 가지 않아도 될 길이 열리게 된 것입니다. 정말 얼마나 고맙기 짝이 없는 일입니까?
 그런데 우리 예수님께서는 그런 은혜로운 새 언약을 세워 주셨을 뿐 아니라, 그것을 우리로 하여금 잊지 않고 잘 기억하도록 해 주는 기념물까지 만들어 놓으셨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진열해 놓고 구경만 하는 기념물이 아니라, 직접 받아서 먹고 한 사람 한 사람이 받아서 마셔야 하는 기념물입니다.
 더 솔직히 말해서 저나 여러분 모두는 본성적으로 얼마나 둔감한 사람들입니까? 이런 은혜로운 ‘새 언약’을 성취하기 위하여 예수님께서 죽으셨다는 말씀을 들으면서도 우리의 마음은 그리 쉽게 뭉클해지지 않습니다. “나는 이제 너희들을 대신해서 내 몸을 십자가의 희생 제물로 바치려고 간다.”라고 말씀하시는데도, 우리의 눈에서는 눈물 한 방울 나오지 않고 멀뚱멀뚱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예수님께서는 그처럼 십자가 아래 와서도 무심하게 앉아 있는 저와 여러분을 향하여 떡을 한 조각 떼어 주시면서 “너 이것을 받아 먹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저는 예수님 주시는 대로 받아 먹습니다. 그 떡이 제 잇새에서 씹히고 가루가 되어 제 목구멍을 타고 꿀꺽 넘어갑니다. 바로 그 순간 우리 주님께서는 “그것이 바로 내 몸이다.”라고 일러 주십니다. “지금 네가 씹고 있는 그 떡 조각이 바로 내 몸이다. 너 배고프면 밥 먹어야지? 너 하루라도 밥 안 먹으면 살지 못하지? 밥이 너의 목구멍으로 넘어가고 위장에서 소화되고 영양분과 에너지가 되어야 만이 네가 살 수 있지? 나의 살이 바로 그처럼 너의 생명을 살리는 양분이 되기 위해서 찢겨야만 했다. 지금 네가 삼키고 있는 그 떡이 바로 너를 살리기 위해서 내가 먹여 주는 내 몸이다.”라고 제게 말씀해 주시는 것입니다.
 정사기념예배 자리에 와서도 그저 딴 생각이나 하고 있는 우리에게 예수님께서는 일일이 포도주 한 잔을 건네주시면서 “이것도 받아 마시라.”고 말씀하십니다. 저는 주님 주시는 대로 받아 마십니다. 그 포도주의 향기롭고 달콤한 액체가 제 혀를 자극하면서 기분 좋게 목구멍 속으로 흘러들어갑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그것이 바로 내 피다.”라고 또 말씀하십니다. “너 목마르면 물 마셔야 살지? 하루는커녕 몇 시간만이라도 물 못 마시면 목이 칼칼해지고 갈증 때문에 아무 것도 할 수 없게 되지? 그때 물 한 잔 마시게 되면 정말 시원하고 상쾌하고 온 몸 구석구석에 생기가 나게 되지? 그처럼 너는 내 피를 그렇게 마셔야만 한다. 내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네 영혼은 당장 말라 죽을 수밖에 없기 때문에, 내가 지금 이 새 언약의 즙을 가지고 네 목구멍을 적셔 주는 것이다.”라고 말씀해 주시는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성찬식 때마다 어김없이 제게 ‘기억하라’고, ‘잊지 말라’고 말씀해 주고 계십니다. 이처럼 ‘씹을 맛’이 가득 담겨 있는 떡을 받아먹으면서도 그 주님께서 십자가를 통해 우리에게 베풀어 주시는 사랑의 단 맛을 어찌 못 깨닫겠습니까? 이처럼 ‘진한 액체’로 채워진 잔을 받아 마시면서도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은혜에 어찌 취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내가 너를 살리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었다는 사실을 꼭 기억하라.”고 일러 주시면서 오늘 밤에도 우리에게 나누어 주시는 이 ‘주의 성찬’을 통하여, 그 주님의 대속적인 죽음 때문에 우리가 영생하는 새 언약을 누리게 되었음을 진정 뜨겁게 공감하며 감격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 기독교인들에게는 사람들이 엎드려 입 맞추는 화려한 성물이나 높고 거대한 석탑 따위의 기념물이 없습니다. 그 대신에 우리에게는 ‘떡과 포도주’라는 기념물이 주어졌습니다. 참 얼마나 소박한 기념물입니까? 우리가 예수님을 기리는 기념물이란 그 어느 집에서나 볼 수 있는 밥과 음료수 한 잔인 것입니다. 하지만 지극히 단순한 기념물이면서도 너무나도 신비하기 짝이 없는 기념물입니다.
 사람들은 겨우 ‘빗자루’ 하나가 주는 상징을 통하여서도 홈팀 선수들을 응원하는 마음에 하나가 되고, 자기네 팀이 이루게 될 승리의 감격에 다함께 몰입하게 됩니다. 하물며 우리 예수님께서 남기신 이 ‘떡과 포도주’를 앞에 두고 있는 저와 여러분은 어떠하겠습니까? 이런 뜨거운 예식, 이런 눈물겨운 기념물을 남겨 주신 예수님이야말로 진짜 우리가 사랑하고 모셔야 할 유일한 ‘주님’이시라고 절로 고백되어지지 않습니까? 바로 이 ‘주의 만찬’을 함께 먹고 마시게 되는 까닭에, 우리 모두는 나 같은 죄인을 이 아버지의 집에서 벌어지고 있는 구원의 잔치에 초청해 주신 그 주님 앞에서 감격하며, 절로 얼굴이 붉어질 수밖에 없는 자신의 죄를 이처럼 깨끗하게 사해 주시는 그 사랑 때문에 뜨거운 눈물을 함께 흘리게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 성찬식의 주인 되신 예수님은 이처럼 ‘진한 분’이시고 이처럼 ‘뜨거운 분’이시며 이처럼 ‘충만하신 분’이십니다. 우리에게 무슨 예수님 사진이 필요하겠습니까? 우리가 무슨 예수님 동상 따위를 교회 뜰이나 제단 위에 세워 놓을 필요가 있겠습니까? 우리 한 사람 한 사람 모두가 이 ‘주의 만찬’을 통하여 이처럼 우리 예수님과 가까이 앉아서 친밀하게 교제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이 밤에도 바로 이 놀라운 ‘떡과 잔의 예식’으로 말미암아 전 세계의 참된 교회들이 하나가 되고, 서로 얼굴은 볼 수 없는 가운데서도 수많은 참된 성도들이 꼭 같은 마음으로 예수님을 만나며 꼭 같은 십자가 밑에서 예배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밤의 이 ‘주의 만찬’은 목사가 나누어 주는 것이 아니고 배병 배잔 위원들이 나누어 주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바로 이 시간 이 자리에서 여러분과 저의 주님 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나누어 주시는 떡과 잔입니다. 이 떡을 받아 먹고 이 잔을 받아 마시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주님’으로 함께 고백하고 그 십자가의 ‘대속 공로’에 함께 감사함으로써, 장차 그 주님과 이 성도들과 같이 ‘아버지의 나라에서 새것으로 마시는’ 그 ‘천국의 주의 만찬’에까지 함께 초대받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 아 멘 -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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