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자료 18,185편 ◑/자료 16,731편

사순절에 갖는 신앙의 각성 /마태복음 26:69-75

by 【고동엽】 2022. 3. 25.

마태복음 26:69-75

우리는 철학을 얘기하면 매우 어렵게 생각합니다. 임마누엘 칸트는 철학의 영역을 세계 시민적 의미에서 요약해서 얘기했습니다. 그 요약은 이렇습니다. "나는 무엇을 알 수 있는가? 나는 무엇을 해야하는가? 나는 무엇을 바랄 수 있는가? 그리고 인간이란 무엇인가?" 이 네 가지 질문을 통해서 모든 철학의 내용을 요약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철학의 요약은 세계시민이 똑같이 느낄 수 있고 생각할 수 있는 철학의 내용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결국에 가서는 네 번째에 문제가 되는 것이다. 즉 "인간이란 무엇인가? 이것이 근본적 차원에서 고찰되어져야만 우리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고 결국 철학이나 인간의 문제도 이런 인간학에 귀착된다." 결국 우리가 무엇을 알 수 있고, 무엇을 해야하고, 무엇을 바라는 것, 조차도 인간의 문제에 풀어진다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 하나님의 생각하면서 이렇게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과연 베드로는 누구인가? 베드로는 무엇을 알았으며 그는 무엇을 해야만했는가? 그리고 무엇을 바랄 수 있는가? 도대체 베드로라는 그 인간은 누구인가? 어떻게 이렇게 비참하게 비겁하게 처참하게 무너질 수 있겠는가? 우리는 이렇게 생각해보았습니다.
그는 주님 앞에서 장담했던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주님을 세 번씩이나 모른다고 부인하고 있습니다. 그 부인하는 모습을 성경에서 보면 점층적으로 점증적으로 점점도 확실하게 분명하게 예수님을 부인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성경을 보시죠. 69절에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베드로가 바깥뜰에 앉았더니 한 비자가
나아와 가로되 너도 갈릴리 사람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 이렇게 말할 때 베드로가 부인합니다.
70절에서 "베드로가 모든 사람 앞에서 부인하여 가로되 나는 네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겠노라 하며 앞문까지 나아가니.." 이렇게 말하고있습니다. 그러니깐 처음에 "너는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 갈릴리 사람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 그렇게 말할 때 그는 징집 모른 채 한 것입니다. 그리고 분위기를 바꾸려고 생각합니다.
"아∼그 무슨 쓸데없는 말하고 있어!" 쉽게 말하면 그렇게 말했다는 것입니다. "그런 말은 맞지도 않아, 그렇지 않아" 그러면서 그는 분위기를 바꾸려고 앞문으로 나아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또 부딪치게 되었습니다. "다른 비자가 저를 보고 거기 있는 사람들에게 말하되 이 사람은 나사렛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 하매" 72절에서
"베드로가 맹세하고 또 부인하여 가로되" 처음에는 부인만 했습니다. 두 번째는 맹세하고 부인했습니다.
이 말은 무슨 말이겠습니까? "내가 한말은 진짜다! 내가 하고 있는 말은 진짜다! 거짓이 아니다!"
처음에 부인은 징집 예수님을 모른 채 했다고 할 수 있지마는, 두 번째는 내가 지금 그를 모른다고 하는 말은 "진짜다 맹세코 진짜다" 이것은 법정에서 증거 하는 그러한 모습과도 같습니다. 두 번째 부인했습니다.
자 그런데 그 다음에 어떻게 됩니까? "조금 후에 곁에 섰던 사람들이 나아와 베드로에게 이르되 너도 진실로 그 당이라 네 말소리가 너를 표명하나다 하거늘" 74절에 "저가 저주하며 맹세하여 가로되 내가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생각해보십시다. 첫 번에는 부인하고 두 번째는 맹세하고 부인하고 세 번째는 저주하고 맹세하고 부인했습니다. 여기서 저주라고 하는 말은 악담을 한다는 것입니다. 매도해 버리는 것을 말합니다. 함부로 불경스러운 말을 쏟아놓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특별히 베드로가 저주했다고 하는 말씀은 자기 자신을 저주하는 것이고 자신의 저주를 위해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입니다.
성경을 읽다보면 그런 얘기가 종종 나옵니다. "만일 이 일이 이렇게 된다면 하나님께서는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은 내게 벌 위에 벌을 내리시기를 원합니다. 이런 얘기들이 성경에 종종 나옵니다. 바로 그 얘기입니다. 내가 예수를 안다면은 , 내가 예수를 안다면 내가 저주를 받겠다라는 것입니다. 저주를 위해서 하나님의 이름을 부릅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 이렇게 표현한 글이 있습니다.
" May God strike me dead if I am lie." "내가 거짓말을 한다면 하나님이여 죽음으로 치소서" 해석하면 그렇습니다. 우리 식으로 얘기를 한다면 "내가 지금 거짓말을 한다면 벼락을 맞아 죽을 것이다." 베드로는 자기가 벼락을 맞아도 예수님을 모른다는 것은 진짜라는 것입니다. 완전히 부인했습니다. 아주 완벽하게 부인했습니다. 그는 주님께 열정과 신앙고백과 폐기와 용기, 이런 것이 어떻게 되어있는지 장담했던 일이 어떤 일인지 생각지도 못하고 이렇게 예수를 모른다고 했습니다. 어찌 이렇게 부인할 수 있겠습니까? 적어도 베드로는 다른 사람은 몰라도 우리가 기대를 너무 크게 하는 걸까요? 베드로만은 "아니오 내가 예수와 함께있었소" 분명히 그렇게 말했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는 알고도 알지 못했습니다. 할 수 있는데도 해야만 하는 것을 하지 못하고 바랄 수 있는 것을 바라지 못하는 불신의 사람이요, 부정의 사람이요, 실패의 사람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베드로를 실패자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오늘 이 말씀 속에서 희망을 갖게됩니다. 왜 희망을 갖게될까요? 베드로가 이렇게 처참하게 됐을지라도 그에게 믿음의 각성이 있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믿음의 각성을 우리는 회개라고 말합니다. 그의 회개의 모습을 본문은 이렇게 말씀하고있습니다. 75절을 보십시오"이에 베드로가 예수의 말씀에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 심히 통곡했다! 그것이 베드로에게 희망이요, 우리에게 용기요, 우리에게 하나님의 사랑이요, 위로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는 심히 통곡했습니다. 그런데 이 통곡이 가능케 하는 것을 본문은 이렇게 말하고있습니다. "닭이 울기 전에 닭이 곧 울더라." 닭이 우는 소리 때문에 그가 회개하게 됐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닭 우는 소리 때문에 회개했을까요? 마가복음 에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닭이 두 번째 울더라."그러면 첫 번째 닭 우는 소리도 들었지 않겠습니까? 그가 주님을 부인했을 때 어디선가 멀리서 아니면 가까이서 닭 우는 소리가 들려왔을 것입니다. 첫 번째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그래도 그는 부인했습니다. 세 번 부인했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 닭 우는 소리가 들릴 때 그는 정신을 차리게 되었습니다. 그 정신차림이 무엇일까요? 말씀을 듣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말씀이 생각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거기서 그에게 회개의 통곡이 있게되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닭 우는 소리가 바로 주님의 경고요, 회개의 촉구요, 죄인들에게는 위로가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합니다. 그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마다 우리가 무엇을 깨우치고있습니까? 말씀이 생각날 때마다 깨우침이 있습니까? 그 말씀이 있을 때마다 진정한 통곡이 우리에게 있습니까? 바로 베드로에게는 그것이 있었기 때문에 그가 회개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윌리엄 버클리는 베드로의 회개에 이렇게 증거해 주고 있습니다. 그것이 뭐냐하면 "주님께서 닭 우는 소리를 듣게 해 주시고 베드로 자신이 주님의 말씀이 생각나서 회개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주님을 부인했음에도 불구하고 베드로의 깊은 곳에는 주님을 사랑하는 사랑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회개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두 사람의 대표적인 배반자를 봅니다. 하나는 가롯유다입니다. 그는 책임을 졌습니다. 돈을 갖다 집어던졌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회개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오히려 목매달아 죽었습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사랑 앞에 있지를 못했습니다. 베드로는 그 중심에 주님을 사랑하는 사랑이 끊어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처참하게 무너지고 완전하게 부인한 베드로에게 주님의 사랑이 있었다는 증거가 무엇일까요? 베드로에게 돌아가 봅시다. 그는 멀리서 주님을 쫓아갔습니다. 어떻게 보면 겁쟁이 인 것 같지만 그래도 주님을 사랑하기에 주님을 쫓아갔습니다. 그리고 가야바의 법정 뜰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거기가 어디라고 들어가겠습니까? 공포의 자리입니다. 재판의 자리입니다. 숨죽이는 자리입니다. 원수들이 득실대는 자리입니다. 그래도 베드로는 그 안에 들어갔습니다. 왜? 주님을 사랑했기 때문에.. 주님과 가까이 있고 싶어서.. 들어갔습니다. 그는 세 번씩이나 지적을 당했습니다. "너도 그 사람이다. 그 당이다. 내 말씨가 그렇다." 세 번씩이나 다그치는데도 그래도 겁은 났지만 베드로는 물러서지 않고 아니라고 하면서도 그는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왜? 주님을 사랑했기 때문에. 그리고 그 사랑 때문에 통곡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사랑 때문에 주님의 말씀을 듣게 된 것입니다. 그 사랑 때문에 그냥 한 새벽에 울리는 닭소리가 닭소리로 들리지 않고 주님의 음성으로 들렸습니다. 그가 사랑의 자리에 있기를 원했고 사랑으로 주님과 함께 하기를 원했기 때문에 그 사랑 때문에 회개하고 통곡했다는 것입니다. 진정으로 주님을 사랑하는 자는 회개하고 진정으로 부모를 사랑하는 자는 그 부모를 생각합니다. 부모의 말을 듣습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가운데 때로 부족한 것도 많습니다. 혹 우리들이 부인했던 일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그래도 염치가 없지마는 " 주님, 주님을 사랑합니다. 회개합니다." 그렇게 고백하면서 주님 앞에 나올 수 있어야하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주님을 부인한 내용과 또 우리의 신앙에 대해서 어린아이들이 부르는 찬양가운데 귀한 찬양이 생각이 나서 오늘 이 말씀 속에서 이 말씀을 여러분들에게 드립니다. 제가 이 설교를 준비하다가 어린아이들이 부르는 찬양이 생각이 나서 소개해드립니다.
예수님 얼마나 슬프셨을까? 가야바법정에 제자 베드로 예수님 모른다 부인했을 때 예수님 얼마나 슬프셨을까?
예수님 얼마나 아프셨을까? 가시에 찔린 예수님 얼굴에 피와 땀방울마저 흘러내릴 때 예수님 얼마나 아프셨을까?
예수님 얼마나 기뻐 하실까? 주님을 섬기는 우리들 마음 십자가 그 사랑 감사 드릴 때 예수님 얼마나 기뻐 하실까?

내가 주님을 모른다고 할 때 주님은 슬프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시 "사랑합니다. 회개합니다" 할 때 주님은 기뻐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를 영접하실 것입니다. 오늘 이 예배와 성찬의 참여가 이러한 주님의 용서와 위로가 우리가운데 넘치는 그러한 은혜로 다가설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출처/정영택목사 설교 중에서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