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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1강) 스데반의 죽음! (행 7:51-60)

by 【고동엽】 2022. 3. 10.

(제21강) 스데반의 죽음! (행 7:51-60)

 

어느 교회에서 권사님이 설교를 듣고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말씀 중에 성령의 감동이 오기를 "네가 끼고 있는 반지 바쳐라'는 음성이 들리는 것입니다. 이 권사님이 고민하다가 '이것은 자신의 60순 잔치에 자녀들이 해 준 것인데 바칠 수 없지' 하고는 그 음성을 거부했습니다.
그런데 헌금시간이 되어 헌금을 하는데 또 음성이 들여오더랍니다. 그래서 반지를 뺏다가 다시 끼면서 속으로 생각하기를 '다음에 다시 이런 음성이 들리면 해야지' 하고 는 예배를 마치고 집으로 가는 모퉁이를 들어서는데 난데없이 강도가 칼을 들이대고는 "있는 것 다 내놔" 하더랍니다. 그래서 엉겁길에 자신의 반지를 빼들고는 "이게 전부입니다. 살려 주십시오"하고 외쳤다는 것입니다.
강도가 물러 간 뒤에 생각해 보니 '아 그래서 바치라고 했구나'는 생각이 들자 그 권사님이 크게 깨닫고 회개했다는 간증을 읽었습니다. ◀제목소개!▶

 

스데반이 공회에 붙잡히게 된 배경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성전을 모독한 죄'요, 또 하나는 '율법을 가감하는 죄'(6:14)입니다. ▶여기에 대하여 스데반은 구약 성경을 들어 유대인들에게 바르게 복음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스데반의 설교의 요점은 '성전 건물이 중요한 것이 아니요, 또 율법을 행하므로 구원받는 것이 아님'을 구약의 아브라함과 모세와 야곱을 들어 설명을 해 주었습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 이삭과 야곱은 유대인들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들로 그들은 성전이 없을 때의 사람들이었지만 하나님을 만난 자들이었다고 말합니다.
건물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율법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음으로 구원을 받고 순종함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사실을 잘 설명해 주었습니다. 즉 믿음과 순종이 중요한 것이지 건물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또 율법이 구원을 주는 것이 아님을 강조한 것입니다.
율법은 우리의 죄를 깨닫게 하는 도구이지 구원을 주는 것은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롬3:20-22절에서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성전도 율법도 다 그리스도의 그림자요, 그림자는 실체가 오면 사라지는 것입니다. 스데반의 설교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설교를 하고 있습니다. 또 스데반은 유대인들을 향하여 '유인들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반복하여 하나님을 거역하는 죄를 짓고 있다'고 책망했습니다.
모세 때는 금송아지를 만들어 하나님을 반역했으며, 아모스 시대에는 몰록 신과 레판의 우상을 쫓았으며 예부터 선지자들을 계속 핍박해 왔다고 지적하고 있을 뿐 아니라 너희들이 하나님이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죽였다고 책망했습니다.
스데반의 설교는 처음부터 끝까지 성경에 뿌리를 내렸고, 출발하고, 진행하고 끝을 맺고 있습니다. 성경은 모든 성도들이 하나님을 만나는 현주소입니다. 성경은 거룩한 성령 역사의 현장이고, 성경은 모든 설교자의 살아 있는 강단입니다. /아멘!/
그러므로 예수님은 요5:39절에서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할/
오늘 본문은 크게 두 단락으로 나누어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51-53절까지는 설교의 끝을 맺는 부분으로 유대인들을 날카롭게 지적하고 있으며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 받지 못한 사람들아!' 강하게 질책하자 이 말에 유대인들이 깊은 상처를 받아 마침내 노기가 폭발하여 돌을 들어 스데반을 쳐죽이는 결과까지 가게 됩니다. 그러니까 51-53절은 책망이요, 54-60절까지는 스데반의 '순교사'를 기록한 것입니다.

 

▶51절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가 항상 성령을 거스려 너희 조상과 같이 너희도 하는도다."
스데반은 지금까지는 유대인들의 마음을 자극시키는 표현은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그들을 책망하고 있습니다.
⑴'목이 곧고'는 자기 고집으로 가득한 사람을 가리킴이요 아집과 교만으로 가득한 자를 가리킵니다. 자기 고집대로 사는 사람은 부모의 말씀도, 하나님의 말씀도 순종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은 출애굽 길에 광야에서 뚝하면 모세를 대적하고, 하나님을 배신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들에게 '목이 곧은 백성'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신9:13절 "내가 이 백성을 보았노라 보라 이는 목이 곧은 백성이니라"
인간은 자기의 잘못을 깨닫고 뉘우치는 자가 복을 받습니다. 깨닫는 것이 은혜입니다. 그런데 당시 이스라엘 최고 종교지도자들이라고 자처하는 그들은 그들의 조상들같이 목이 곧은 백성이라고 책망을 받습니다. 한마디로 '교만하고 타락한 자임을 경고'하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어떤 사람이 하나님을 의지할 수 있습니까? 자신의 연약함만을 깨닫는 자만이 하나님을 의지할 수 있고, 그럴 때 하나님께서 순종할 능력까지도 주십니다. /믿/
⑵'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는 바로 '목이 곧은 이유'를 말하고 있습니다. '목이 곧은 것'은 곁으로 드러난 것인데, 그렇게 된 이유는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할례는 선민의 표식입니다. 유대인들은 할례 받은 백성이라고 얼마나 자부심이 강한지 모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생후 8일 만에 할례 받는 자만이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생각했고, 할례 받지 않은 이방인들은 짐승으로 취급했습니다.
결국에는 유대인들의 할례 관은 극도로 의식화되어서 교만해 지고 부패해졌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롬2:28-29절에서 "대저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라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찌니 신령에 있고 의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
할례를 행하는 것은 성별하고 깨끗하게 살라는 표식입니다. 다시 말하면 거룩하게 살라는 명령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할례의 깊은 의미를 상실해 버리고 그 할례를 자랑으로 삼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세 가지 할례를 받아야 합니다.
⑴혀의 할례를 받아야 합니다. 출6:12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명하여 바로에게 가라고 할 때 모세가 대답하기를 '나는 입이 둔한 자'라고 했는데, 히브리 원어로는 '내 입술이 할례를 아직 받지 못하였나이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사6장에 보면, 이사야 선지자가 성전에서 기도하다가 여호와의 스랍을 보고 "화로다! 나는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자로다"라고 하자, 이때 스랍 하나가 화저로 재단에 불을 들고 이사야의 입술을 찢었다고 말합니다. 즉 입술에 할례를 받은 것입니다.
우리가 입술에 할례를 받는 다는 것은 우리 입술이 거룩하고, 순결하고, 정직하고, 의로운 입술이 되어 우리의 말을 네 이웃에 믿을 수 있고 신용할 수 있어야 됨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말의 권위를 잃어버리면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사람들이 내 말을 믿어주지 아니하면, 신용하지 아니한다면 그 이상 비참하고 불행한 일도 없습니다.
우리의 말에 진실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약고보 장로님은 '혀의 재갈을 물리라!'고 했습니다.
⑵귀의 할례를 받아야 합니다. 렘6:10절 "내가 누구에게 말하며 누구에게 경책하여 듣게 할꼬 보라 그 귀가 할례를 받지 못하였으므로 듣지 못하는 도다"
오늘 본문에서 스데반이 책망한 말도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입니다. 이스라엘이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하였으므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없다고 하신 말씀입니다.
노아가 120년 동안이나 복음을 전했지만 단 한 사람도 그 말을 받아들인 사람이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들을 귀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주님은 성경을 통해서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계2:29/3:6/13:9)라고 하십니다.
사람들은 진리의 말씀보다는 구부러진 말을 더 좋아하고 거짓으로 아첨하는 말에 더 흥미를 가집니다. 듣는 귀가 복된 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듣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⑶마음의 할례를 받아야 합니다. 레26:41절에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향하여 "할례 받지 못한 마음을 낮추라"고 했습니다. 성경은 '만물 중에 가장 더러운 것이 사람의 마음'이라고 했습니다. 요엘 선지자는 '옷을 찢지 말고 너희 마음을 찢으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산상보훈에서 '마음이 가난한 자, 마음이 온유한 자, 마음이 깨끗한 자가 복이 있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바울은 롬2:29절에서 '할례는 마음에 할찌니'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참 할례는 마음에 해야 합니다. 스데반은 유대인들을 향하여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자'들이라고 책망합니다.
③"너희가 항상 성경을 거스려 너희 조상과 같이 너희도 하는도다"
엡4:30절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속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
성령을 근심하게 하는 것은 하나님 안에 죄지만, 성령을 거스리는 것은 용서받을 수 없는 죄입니다. 주님은 마12:32절에서 "또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 스데반의 이 책망이 당시 유대인들에게만 해당된 것이 아니라 오늘날 우리에게도 주시는 경고의 말씀입니다. /믿/

 

▶52절 "너희 조상들은 선지자 중에 누구를 핍박지 아니하였느냐 의인이 오시리라 예고한 자들을 저희가 죽였고 이제 너희는 그 의인을 잡아준 자요 살인한 자가 되나니"
스데반은 유대인들을 노골적으로 책망하고 있습니다. 너희 조상들도 선지자들을 핍박했고, 특히 메시야가 오신다고 예언한 선지자들을 잡아 죽였다고 책망합니다. 이사야 선지자를 가리킨 말입니다. 이사야를 궤짝 속에 넣고 톱으로 켜 죽였습니다. 또 예레미야는 구덩이에 쳐 넣고는 고생을 시켰습니다.
그리고 너희들은 그 선지자들이 예언한 대로 오신 예수그리스도를 잡아죽임으로서 너희들의 조상들의 죄보다 더 큰 죄를 지은 자들이라고 책망하고 있습니다.
여기 '의인이 오시리라'의 그 의인은 누구를 가리킨 말입니까? 바로 아브라함과 요셉과 모세가 광야교회의 성막과 솔로몬 성전을 통하여 예언한 예수 그리스도, 바로 그분입니다.
'그 의인'은 사도행전에 3번이 나옵니다. 한번은 베드로의 입을 통해서, 한번은 스데반의 입을 통해서, 또 한번은 바울의 입을 통해서입니다. 스데반은 '너희는 그 의인을 잡아준 자요 살인한 자'라고 책망하므로 그들의 죄악의 정수리를 바로 내리치고 있습니다.

 

▶53절 "너희가 천사의 전한 율법을 받고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하니라"
율법을 주실 때 천사를 통하여 주셨습니다. 갈3:19절 "그런즉 율법은 무엇이냐 범법함을 인하여 더한 것이라 천사들로 말미암아 중보의 손을 빌어 베푸신 것인데 약속하신 자손이 오시기까지 있을 것이라"
모세는 시내산에서 천사에게 받은 율법을 이스라엘에게 전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그 율법의 신성한 정신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지금 스데반은 유대인들이 율법주의자를 그렇게 율법, 율법 하는데 사실은 그들이 그 율법을 진짜로 지키지 않았다고 책망하는 것입니다. 율법을 진짜로 지켜보았다면 벌써 하나님 앞에 두 손들고 엎드렸을 것인데 그들이 하나님 앞에 두 손드는 자가 없다는 것입니다.
누구라도 진정으로 율법을 지키면 두 손을 들게 되어있습니다. 십계명 중 한 계명이라도 정해 놓고 전심으로 지켜보십시오, 이들이 진짜로 율법을 지켰다면 예수님을 믿지 않고는 베길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율법을 지켜보면 도저히 율법으로 하나님 앞에 갈 수 없음을 알게 되고 두 손을 들었을 텐데 유대인들이 율법을 지킨다고 하나 그들이 율법을 진정으로 지키지 않았기 때문에 예수님을 죽인 것이라고 책망하고 있습니다.

 

▶54절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저를 향하여 이를 갈거늘"
옛날이나 지금이나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사람의 반응은 세 가지로 나타납니다.
①자신에게 주는 말씀으로 알고 회개할 것은 회개하고 새로운 결단을 내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②자신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것으로 생각하는 무관심의 사람이 있고, ③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강한 반발을 일으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 속에 유대 종교지도자들이 그랬습니다. 행2장에서 베드로의 설교를 들은 유대인들은 마음에 찔림이 왔습니다. 오늘 본문과 똑같은 현상이 왔습니다.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무슨 말을 들었습니까? 베드로가 전하는 성경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때 저들이 '어찌할꼬?' 하고 회개했습니다. 행2:22절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말을 들어라!" 말씀을 듣는 것이 이렇게 중요합니다.
'루터'가 이 말씀을 듣고 나서 변화되었습니다. '웨슬리'가 이 말씀을 듣고 영적으로 거듭나게 됩니다. '슈바이처'가 이 말씀을 듣고 변화를 받아서 아프리카로 들어갔습니다. 말씀이 능력입니다.
그런데 본문 속에 종교지도자들에게도 마음에 똑같은 찔림이 왔는데도 도리어 더 강퍅해져서 스데반을 향하여 이를 갈고 분하게 여겼습니다.
'이를 갈았다'는 말은 복음에 대한 저항심이 증오로 나타난 극한의 모습입니다. 그들은 마음에 찔림을 받았으나 하나님 앞에 굴복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스데반의 설교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지 않고 사람의 말로 받은 것입니다.
'저 주제에 우리를 보고 책망하다니!' 이런 마음을 가졌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마음에 찔리거든 고개를 숙입시다. 마음에 찔리거든 순종의 길로 가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하면 그 길이 복 받는 길이요 은혜의 길입니다. /아멘!/할/

 

▶55절 "스데반이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스데반은 이를 갈며 돌을 들고 자기를 치는 유대인들을 바라보지 않고 하늘을 바라보았습니다. 나를 미워하는 자를 보지 않았습니다. 나에게 돌을 던지는 이 세상을 보지 않았습니다. 고개를 들어 위를, 하늘을 보았습니다. 이것이 승리의 비결입니다.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으며 위를 보며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그 순간을 지켜보았던 사도 바울이 뒤늦게 골3:1절에서 고백하기를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어려울 때일수록 조건과 환경, 그리고 사람을 바라보지 말고 하나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도 항상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하늘을 우러러' 봤다고 했습니다. 조건과 환경, 그리고 사람을 바라보면 절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을 바라보십시오, 사랑의 하나님을 바라보십시오,
시42:11절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나는 내 얼굴을 도우시는 내 하나님을 오히려 찬송하리로다" /아멘!/

▶스데반 집사는 집사들의 모텔입니다. 그의 신앙 인격을 점검해 보겠습니다.
①믿음이 충만한 자입니다. 믿음은 담력입니다. 얼마나 당당합니까? 역사의 모든 신앙의 인물들은 모두 다 믿음의 사람들이었습니다. 아브라함, 모세, 다윗, 요셉, 바울, 루터, 칼뱅, 무디, 그들 모두 믿음의 주인공이었습니다.
연단하여도 없어지지 않을 금보다 더 귀한 것이 믿음입니다. 사람들은 잃은 '돈, 명예, 인기'를 찾으려고 애를 쓰지만 잃은 믿음을 찾으려고 하는 사람은 적습니다.
②성령이 충만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먹고 마시는 것에 있지 않습니다. 성령 충만한데 있습니다. 스데반은 집사로써 선택될 때, 성령이 충만했습니다. 그는 죽음 직전까지 성령이 충만한 자였습니다.
③그의 성령이 충만한 결과는 무엇인가?
⑴하늘을 우러러 주목했습니다. 성령이 충만한 자는 세상 것 보지 않습니다. 땅 아래 것에 만족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바라보고 그분과 교제하시기를 원합니다. 스데반이 바라보는 하늘이 어떤 하늘입니까? 우리가 가야할 인생의 영원한 본향 하늘나라입니다(요14:1-3). 그렇습니다. 성령이 충만한 사람들은 언제나 마음과 눈이 하늘을 향해 있습니다.
⑵하나님의 영광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여기 영광은 '광명, 광채, 위엄, 장관' 등의 뜻으로 바로 천국의 보좌를 보았다는 것입니다.
⑶예수께서 하나님의 우편에 서신 것을 보았습니다. 성경 여러 곳에서는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우편에 앉으셨다고 증거하고 있습니다(마26:64/막16:19).
그런데 본문에서 스데반은 하나님의 우편에 서신 것을 보았다고 했습니다. 학자들은 스데반의 순교적 신앙을 격려하고 그의 순교를 열납하는 주님 앞에 오는 것을 환영하기 위함이라고 합니다. 순교자들은 우리 주님이 일어 나서셔 맞이하신다는 것입니다.

 

▶56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대"
더욱 담대해진 스데반의 말입니다. 스데반이 너무도 확신에 차서 말한 것입니다.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성경에서 하늘 문이 열린 것을 다섯 번이나 기록하고 있습니다.
⑴겔1:1절에 보면 ‘하늘 문이 열린 것’을 에스겔이 보았습니다.
⑵주님에게 열렸습니다(마3:16/눅3:21/요1:51).
⑶행10:11절에서 베드로에게,
⑷계19:11절에서 사도요한에게,
⑸본문에서 스데반에게 하늘 문이 열렸습니다.
▶내려오는 순교의 이야기들이 많이 있습니다. 로마 네로 황제 때, 예수님을 믿는 성도들을 잡아죽이는데 불에 태워도 죽이고, 물에 빠뜨려 죽이고, 얼음 구덩이에 빠뜨려 목을 쳐죽이기도 했습니다. 한 번은 네로 황제의 어명으로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아다가 죽이는데 예수님을 부인하면 살려 주라고 명을 내렸습니다.
한 군졸이 성도들을 얼음 구덩이에 집어넣고 목을 치고 있을 때, 성도의 목을 치면 천사가 내려와 영혼을 받아 생명의 면류관을 씌우고 하나님의 우편 보좌에 모시고 가는 모습을 보고 감탄을 했습니다.
'아! 나고 예수 믿고 저렇게 가야겠구나!' 생각하고 한 성도의 목을 치려는 순간, 그 성도가 벌벌 떨면서 주저하면서 생명을 살려달라고 애원하자 그 군졸이 말하기를 '당신이 내 옷을 입고 이 칼을 들고 내 목을 치시오, 나는 당신 대신 오늘부터 예수 믿고 내가 순교하겠소!'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주경학자 '벵겔'은 예수께서 스데반 집사를 환영하기 위하여 '일어서신 것'이라고 주석을 했습니다.
예수께서 서신 것은 '스데반아 어서 나 있는 곳으로 올라 오라'는 뜻입니다. 더욱 중요한 의미는 순교자가 죽는 아름다운 순간을 지켜보시고 벌떡 몸을 일으키실 정도로 기뻐하신다는 것입니다. 순교자를 환영하시는 자세입니다.
스데반이 위를 볼 때 하늘이 열리면서 '인자'를 보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인자로 고백합니다. 이 인자라는 말은 대단히 중요한 신학적 용어입니다. 그 '사람의 아들'이라고 글자 풀이를 해서는 안됩니다.
히브리 사람들의 신학에 있어서는 '인자'라는 말은 '역사의 종말에 하나님께서 친히 나타나시는 모습을 가르치는 대단히 중요한 용어'입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계실 때에 제자들은 주님을 향하여 언제나 '예수님, 그리스도, 메시아' 이렇게 불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을 지칭해서 '인자'라고 약 90회나 말씀 하셨는데 제자들은 예수님의 '인자' 그 정신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재판 받으실 때, 집요하게 묻습니다. 빌라도는 묻기를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하고 물었고 가야바는 집중적으로 묻습니다 "네가 메시아냐?" 그럽니다. 그럴 때에 예수님은 초연하게 대답하십니다. "인자가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보리라" 인자는 그렇게 높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제자의 입으로서는 스데반이 처음으로 '인자'로 고백합니다.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굉장한 신앙고백입니다.

 

▶57절 "저희가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일심으로 그에게 달려들어"
그들이 큰 소리를 치는 이유는 스데반이 전하는 복음을 방해하고자 큰 소리를 지른 것입니다. 귀를 막는다는 것은 듣지 않으려고 함이요, 일심으로 행동을 똑같이 하여 스데반에게 달려들었습니다.

 

▶58절 "성 밖에 내치고 돌로 칠세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이라 하는 청년의 발앞에 두니라"
성밖으로 몰아내고 돌로 쳐죽였습니다. 당시 유대 교권주의자들은 이미 스데반을 사형에 해당하는 죄목에 걸어 놓았고, 하나님을 모독하고 모세의 율법을 모독하고 이스라엘의 거룩한 성전을 더럽힌 자라고 저들 스스로가 규정했습니다.
신13:6-10절에 보면, 이 죄는 모세의 율법에 의하여 사형에 해당하는 죄였습니다. 이 죄목은 성립시키기 위하여 거짓 증인을 세우고 백성들과 산헤드린 공회를 소집하고 재판을 연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스데반을 죽인 것은 불법입니다.
이들은 당시 로마법에 따라 법적 절차를 거치지 않고 감정적으로 해결해 버린 것입니다. 그런데 스데반의 사형 형장에는 아주 귀한 인물 하나가 나오는데 누구입니까? 사울이라는 청년입니다.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이라는 청년의 발 앞에 두니라!" 여기서 보면 사울이 스데반을 죽이는데 모종의 큰 역할을 한 것 같습니다. 증인들의 옷은 지켜주는 일을 사울이 했습니다. 그러나 사울이 스데반의 모든 행동을 눈 여겨 본 줄로 믿습니다. '아! 어떻게 저렇게 의젓하고 담대할까?'

 

▶59절 "저희가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가로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스데반은 돌에 맞아 죽어가면서 먼저 자신을 위한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육신의 호흡은 끊어지지만 영혼은 불멸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그 불멸의 영혼을 누구에게 부탁할 것입니까? 주님께 의탁해야 합니다.
"저희가 돌로 스데반을 치니" 돌로 쳐죽이는 '사형'법입니다. 스데반은 복음을 전하다가 돌아 맞아 죽었습니다. 돌에 맞아 개죽음 당했는데 무슨 영광이냐, 아니 하나님이 살아 계신다면 '왜 스데반을 죽도록 내버려두느냐?' 이런 공격을 하는 무신론자들도 있습니다.
기독교를 비판하는 어떤 사람이 이 사건을 두고 어떤 설교자에게 '못된 유대인들이 돌을 들고 스데반을 칠 때 왜 하나님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냐'고 고함을 쳤습니다. 그때 그 설교자는 "하나님은 그때 가만히 있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스데반에게 돌로 치는 그 사람들을 용서하는 하늘의 능력을 주셨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는 능력을 주셨습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아니고서는 사람이 어떻게 이렇게 억울한 죽음을 당하면서도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라고 기도할 수 있었겠습니까?
스데반이 죽지 않을 수도 있었습니다. 반응을 보고 우회할 수도 있고, 중간에서 포기할 수도 있었지만 그는 자기 목숨을 내어놓고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는 복음 때문에 자신의 귀한 생명을 내어놓고 설교를 했습니다. 그리고 죽어갔습니다.
오늘날 예수 전한다고 우리를 죽이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욕하는 사람, 조롱하는 사람은 있습니다. 두려워하지 마십시요. 우리에게는 각오가 필요합니다.
'윌리암 케리'는 인도에 선교사로 나갈 때 "나는 영국으로 돌아오지 않을 각오를 하고 간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는 인도에서 뼈를 묻을 각오로 갔습니다. 그럴 때 그는 수많은 인도사람을 구할 수 있었습니다. 스데반 집사처럼 어떠한 환경 가운데서도 굳은 각오로 예수 복음을 전파하는 성도 여러분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스데반은 예수님의 십자가 기도를 그대로 본 받았습니다. 여기서 스데반의 위대한 신앙의 고백을 봅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자신의 생명의 주인 되심을 고백하고 부르짖은 것입니다. '내 영혼을 받으십시오.'라고 했는데 결코 그의 영혼은 죽지 않고 살아 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스데반은 돌에 맞아 죽는 그 처절한 그 순간에 이런 기도를 드릴 수 있다는 것에 우리는 감격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저녁에 잠들기 전에 기도할 때도 '잠 잘 자게 해 주시고 가족들 지켜주시고 건강하게 내일 아침 일어나게 해 주시라'고 기도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사람녁에 기도할 때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라고 기도한답니다. 차원이 있는 기도입니다.

 

▶60절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가로되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주여 저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스데반은 자신에게 돌을 던지는 자들의 죄를 주의 심판에 맡기지 않고 '주여 저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간절히 기도하고 용서를 빌면서 죽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무엇을 느낍니까? 예수님의 죽음의 모습을 느끼지 않습니까? 성경에서 가장 길게 그리고 자세하게 기록된 죽음의 장면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과 스데반의 순교의 장면입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죄를 제일 먼저 십자가상에서 용서했습니다. '아버지여 저들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말씀하신 후, 마지막으로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그런데 스데반은 반대로 했습니다. 이것은 스데반의 겸손한 신앙의 모습을 보여준 것입니다. 스데반은 감히 예수님처럼 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영혼 다음 죄 용서를 구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예수님을 닮은 스데반의 신앙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스데반의 위대한 믿음은 용서의 기도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이 기도는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웃을 용서해 달라는 기도는 아무나 하지 못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예수를 믿음으로 죄에서 용서함을 받은 자들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주님의 용서함을 받은 확증은 내가 남을 용서하는데서 나타납니다. 남을 용서할 수 있는 사람만이 예수님으로부터 용서를 받은 자입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무슨 말입니까? 나를 해치고, 죄 지은 자를 용서해 주어야만 우리의 죄가 용서받은 확증을 얻는다는 이야기입니다. '다른 사람을 용서하지 못하면서 이 기도를 드리면 다른 사람을 용서하지 못한 것같이 나도 용서받지 못하고 죽게 하옵소서!'
주님은 마6:14-15절에서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면 너희 천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
스데반이 돌에 맞는 순간 그의 온 몸은 피투성이가 되고, 상처를 입고, 몸을 제대로 가루지 못하는 최악의 상태였습니다. 그는 누워서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그런데 용서를 비는 기도는 있는 힘을 다해 벌떡 일어나서 무릎을 꿇고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용서하는 자에게는 안식이 있습니다. "이 말을 하는 자니라!" 이 말은 고된 일이 끝난 다음에 오는 참 안식과 평안을 의미합니다. 이 말은 다시 깨어날 찬란한 부활 소망의 약속입니다. 스데반은 기도로 순교했습니다.
바로 이러한 스데반의 기도가 있었기에 기독교 2천년 사에서 수많은 순교가 주의 백성들에 의해서 계속되고 있습니다. 주기철 목사님의 최후의 기도, 손양원 목사님이 이린 기도를 드렸습니다.
어거스틴은 말하기를 '스데반의 기도가 아니었더라면 기독교가 바울을 소유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순교자 스데반! 언뜻 보기에는 그의 죽음은 실패한 것처럼 보입니다. 젊은 나이에 죽었습니다. 그의 사역의 성과도 선명하게 드러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오히려 이를 가는 분노와 함성과 폭력과 돌이 날아왔습니다.
그러나 실상은 성공한 삶이요, 위대한 신앙의 종자가 된 것입니다. 그는 지상 교회에 영원히 없어지지 않는 축복의 유산을 남겼습니다. 바로 충성스런 집사 상을 남긴 것입니다. 순교는 주의 종들의 특허만이 아니라 지상에서 주님을 사랑하는 모든 자가 누릴 수 있는 축복임을 알려 주었습니다.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스데반을 보세요! 돌에 맞아 죽는 순간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힘이 성도의 힘입니다. /아멘!/ 그 순간에 자기를 죽이는 사람들 그것도 전혀 무죄한데 죽이는 원수들을 향하여 이런 기도를 하는 것은 성령 충만한 사람만이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이렇게 순교하는 스데반의 모습을 '잔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성도의 죽음은 잠시 후 영생의 부활이 있습니다. /믿/ 그러므로 성도는 당당하게 살아야 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아멘!/
초대교회는 스데반의 순교를 통해서 새로운 사명자가 하나 탄생하는 데 그가 바로 바울입니다. 스데반의 순교는 4대 충만이 나타나는데 '성령 충만, 신앙 충만, 소망 충만, 사랑 충만'입니다. /할/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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