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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강) 복음으로 승리한 사도들! (행 5:27-42)

by 【고동엽】 2022. 3. 10.

(제16강) 복음으로 승리한 사도들! (행 5:27-42)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을 바라보면서 절망적인 말을 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나라에 정치와 경제와 사회를 보면서 많은 사람들이 절망을 말합니다. 어떻게 보면 근거가 있는 말이요, 이유가 있는 말들입니다. 그러나 우리 믿음의 사람들은 희망을 먹고사는 존재입니다.
'마틴루터'는 '이 세상을 움직이는 힘은 희망이라'고 했습니다. 그랬습니다. 경제 가가 세상을 움직이지 않습니다. 정치가가 세상을 움직이지 않습니다. 환경이 세상이 움직이지 않습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을 믿는 믿음에서 나온 희망이 있는 한 이 세상은 움직여 나갈 것입니다. 희망을 가진 하나님의 사람이 이 땅에 있는 한 이 시대도 희망이 있는 것을 믿습니다.
오늘의 본문의 그 시대도 희망이 전혀 없어 보입니다. 이스라엘을 식민 통치하고 있는 로마 제국은 날로 강대해져서 점점 그 세력을 더 뻗어 나가고 있고 이스라엘의 희망은 보이지 않는 가운데 있었습니다. 그들이 믿으려고 했던 종교 지도자들마저도 타락했습니다. 교권 주의에 빠져서 서로 물고 뜯고 싸우는 그런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시대도 희망은 있었습니다.
성령이 오심과 함께 영혼의 불길처럼 퍼져 나가고 있는 복음이 바로 그 시대의 희망이었습니다. 성령의 오심과 함께 세워진 하나님의 교회가 그 시대의 희망이었습니다. 무엇보다 복음을 들고 담대하게 거리마다 나가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그 복음을 가진 하나님의 백성들이 그 시대의 희망이었습니다.
그렇게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골목마다 거리마다 이 사도들을 따라왔던 것입니다. 왜? 거기에 희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초대 예루살렘 교회는 사도들이 행하는 표적과 기사 그리고 능력 있는 설교를 통하여 성도들이 하루에 3000명도 영접했고, 5000천명도 영접했습니다. 큰 부흥의 불길이 타오른 것입니다.
초대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에 의한 공동체 생활을 했는데 백성들에게 칭송을 받을 만한 일들을 했습니다. 그들은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하는데 열심히 있었고, 특히 각종 병자들이 사도들의 안수 기도를 통하여 고침 받는 역사가 일어나자 예루살렘에 사는 사람들 뿐 아니라 근동에 사는 사람들이 병든 자와 귀신들은 자들을 사도들에게 데리고 옴으로 치유에 역사가 신속히 일어난 것입니다.
이러한 예루살렘 교회의 부흥은 유대교 지도자들인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불안과 시기심을 안겨 주었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사도들을 잡아다가 다시 감옥에 쳐 넣었습니다.
이 사건은 유대교 지도자들이 그리스도 교회에 대한 두 번째 박해였습니다. 당시 대제사장은 안나스였습니다. 그는 사두개파 출신입니다. 당시 사두개파는 유대교의 제사직을 담당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귀족들과 장로들과 제휴하여 산헤드린 공회를 장악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그들은 유대의 종교적, 정치적, 사법적, 실권을 행사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성전 구내의 매점과 환전소를 두어 막대한 이익을 착복하고 있었으며 유대 백성들로부터 십일조를 징수하여 부를 축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사두개인들에게 있어서 신흥종교인 기독교가 부흥되는 것은 그들의 종교적 기득권과 물질적 이권에 큰 위협이 되기 때문에 결코 방치해 둘 수가 없었습니다. 사두개파는 천사니, 부활이니 하는 신적 존재를 믿지 않는 자들로서 사실상 하나님의 존재를 믿지 않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이 가장 두려워하고 있는 것은 사도들을 통하여 그리스도 교회가 부흥되는 것이었고, 결과적으로 예수를 죽인 책임이 그들 자신에게 돌아오게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결사적으로 기독교를 박해했습니다.
오늘 본문의 배경은 사도들이 두 번째로 감옥에 갔으나 주의 사자가 그들을 끌어내 주었습니다.
19절 "주의 사자가 밤에 옥문을 열고 끌어내어 가로되" 왜 하나님은 사도들을 풀어주었습니까? 그 풀어준 목적은 무엇입니까? 안전하게 도망가라고 구해주신 것입니까? 아닙니다.
성경은 분명히 '가서 성전에 서서 이 생명의 말씀을 다 백성에게 말하라'고 했습니다. 천사의 명령은 20절에 나옵니다. 어디로 갑니까? 성전입니다. 그들이 체포당한 환난의 장소입니다. 하나님은 저들을 다시 그곳으로 보냈습니다. 그리고 서서 생명의 말씀을 외치라고 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명령대로 순종했습니다. 한편 유대교에서는 난리가 났습니다. 감옥 문은 굳게 닫혔는데 죄수들이 없습니다. 찾아보니 그들은 성전에서 또 다시 예수님을 전하고 있습니다. 함부로 다루다가는 큰일나게 생겼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백성들이 폭동이 일어날까 입니다. 26절 "성전 맡은 자가 관속들과 같이 가서 저희를 잡아 왔으나 강제로 못함은 백성들이 돌로 칠까 두려워함이러라" 여기서도 하나님의 보호의 손길이 느껴집니다. 이때는 백성들이 두려워서 함부로 손대지 못하고 타협적으로 임의 동행 식으로 다시 재판장 앞에 끌려온 것이 오늘 본문의 배경입니다. ◀제목소개!▶

 

▶27-28절 "저희를 끌어다가 공회 앞에 세우니 대제사장이 물어 가로되 우리가 이 이름으로 사람을 가르치지 말라고 엄금하였으되 너희가 너희 교를 예루살렘에 가득하게 하니 이 사람의 피를 우리에게로 돌리고자 함이로다"
성전 수비 대장과 그 관속들이 사도들을 예전처럼 강제로 연행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임의 동행이라는 방법으로 사도들을 정중하게 공회 앞으로 인도했습니다.
여기 공회 앞은 유대교의 최고 법정재판소를 말합니다. 산헤드린 공회로써 우리나라 국회와 맞먹습니다. 그러니까 국회 청문회에 끌려간 셈입니다. 공회의 의장은 대제사장 '안나스'입니다. 그가 사도들을 공회 앞에 세우고 심문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28절을 보면 세 가지로 심문합니다.
①예수의 이름으로 가르치지 말라는 경고를 어겼다는 것입니다. 행4:17-18절 "이것이 민간에 더 퍼지지 못하게 저희를 위협하여 이 후에는 이 이름으로 아무 사람에게도 말하지 말게 하자하고 그들을 불러 경계하여 도무지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 하니"
첫 번째 재판에서도 이 판결을 받았습니다. 왜 이 명령을 어겼느냐는 추궁입니다.
②어찌하여 예수교를 율법의 도시 예루살렘에 가득하게 하느냐?
③예수의 피 값을 우리에게 돌리려 하느냐? 유대교인들은 예수를 죽이기 위해서 빌라도 앞에서 뭐라고 했습니까? 마27:25절 "백성이 다 대답하여 가로되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릴지어다 하거늘" 그런데 오늘 그들의 심문은 아주 대조적인 모습입니다. 그들은 예수를 죽인 사유가 바로 자신들에게 책임지어지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실상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촉구한 것이 그들 자신이면서 백성들이 예수교를 믿은 후에 자신들을 예수의 피 값의 주동자라고 할까봐 두려워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유대교지도자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기보다는 세상 사람들이 두려운 것입니다. 거짓 교권주의자들의 모습입니다.
우리는 본문에서 심문의 의도를 분석해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매우 모욕적이고, 위협적인 태도로 사도들에게 심문하고 있습니다.
①먼저 사도들을 범죄자로 몰았습니다. '우리가 가르치지 말라고 언급했던' 명령을 범했으니 그들은 큰 죄인이라는 뜻입니다.
②복음의 가치를 격하시켰습니다. '이 이름, 이 사람의 피'라는 말은 그리스도의 복음이 천하 인간들이 만들어 낸 '사이비 이단 교리 수준밖에 안 된다'는 뜻입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속죄 사역을 모두 부인한 말입니다.
③복음을 매도했습니다. 그들은 사도들이 민심을 현혹하여 또는 선동하여 그리스도를 죽인 자신들에게 보복하려고 한다고 억지를 부리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협박과 위협과 억지에도 불구하고 사도들은 지혜롭게 대처하고 있습니다.

 

▶29절 "베드로와 사도들이 대답하여 가로되 사람보다 하나님을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니라"
얼마나 멋있고 확신 있는 대답입니까? 사도들은 사람 말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진리를 확신한 것입니다. 이 확신은 모든 시대에 핍박 받는 성도들을 승리로 이끈 황금신조입니다.

사람은 마땅히 하나님께 복종해야 합니다. 특별히 우리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은 사람 말보다 하나님의 말씀에 절대 순종하고 복종해야 합니다. /믿/
우리가 살길은 오직 순종하는 길 밖에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최고의 덕목은 순종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들에게 복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런데 모든 자녀가 순종의 터널을 건넌 자에게 허락하십니다.
모세는 외쳤습니다. 신30:20절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말씀을 순종하며 또 그에게 복종하라 그는 네 생명이시요 네 장수시니 여호와께서 네 열조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리라고 맹세하신 땅에 네가 거하리라" 순종하면 우리가 복을 받습니다.
신28:2절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면 이 모든 복이 네게 임하며 네게 미치리니" 또 눈물의 선지자 예렘미야는 렘26:13절에서 "그런즉 너희는 너희 길과 행위를 고치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목소리를 청종하라 그리하면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선고하신 재앙에 대하여 뜻을 돌이키시리라"
순종을 '헬'어로 '휘파쿠오'인데 그 뜻은 '아랫사람이 윗사람의 말을 발아래 끓어 앉아 듣는 것'을 말합니다. 즉 '경청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 말대로 따르는 것'을 말합니다.
성경은 순종하고 복 받은 사람들과 불순종하고 저주받은 사람들의 이야기로 가득 차 있습니다. '노아, 아브라함, 모세, 여호수아' 이들은 모두 순종하고 복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사울은 왕의 자리에까지 올라갔습니다만 그러나 불순종함으로 버림을 받았습니다.
삼상15:23절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다"고 했고, 26절을 보면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 왕을 버려 이스라엘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다"고했습니다.
하나님께 순종하면 복을 받고 불순종하면 저주를 받는다는 것을 사울의 사건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본문은 '사람보다 하나님을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32절에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성령을 주신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은혜를 받고, 성령을 받고, 복을 받으려면 순종해야 합니다. 사람보다는 먼저 하나님을 생각해야 합니다. 사람의 얼굴보다는 먼저 하나님 얼굴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사람에게 순종하기보다는 먼저 하나님께 순종해야 합니다. /아멘!/
사도들은 생명 걸고 주님 명령에 순종했습니다. 순종하는 자만이 오늘 본문의 고백이 나옵니다. '사람보다 하나님을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다!' 이 고백이 오늘부터 우리의 고백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소원합니다. /할/

 

▶30-31절 "너희가 나무에 달아 죽인 예수를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살리시고 이스라엘로 회개케 하사 죄 사함을 얻게 하시려고 그를 오른손으로 높이사 임금과 구주를 삼으셨느니라"
유대인들은 율법을 어긴 죄인들은 나무에 달아 죽이는 법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신21:22-23절을 보면 "사람이 만일 죽을죄를 범하므로 네가 그를 죽여 나무 위 에 달거든 그 시체를 나무 위에 밤새도록 두지 말고 당일에 장사하여"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죄 없는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았기 때문에 그들과 그 후손들이 저주를 받게 된 것입니다. 그들이 죽인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셨다는 것은 베드로의 위대한 신앙이며 메시지의 내용입니다..
예수님을 죽일 수는 있었습니다. 그러나 무덤에 가둬 둘 수는 없었습니다. 우린 여기서 하나님의 능력과 인간의 한계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문명문화의 황금기에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못 만들어내는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죽은 사람을 살리는 방법은 개발한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만 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죄로 죽을 영혼을 살리시는 것도 하나님만 하십니다. 죽어서 무덤에 들어간 사람을 살리시는 것도 하나님만 하실 수 있습니다. 주님은 '나사로를 살리셨고, 나인 성 과부의 아들을 살리셨고, 야이로의 딸'을 살리셨습니다 그 주님은 오늘 여기서 나를 살리시는 능력을 가지고 역사 하십니다. /믿/

 

▶본문을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①예수를 죽인 책임을 왜 우리에게 떠맡기느냐는 심문에 대한 대답입니다. 예수님은 죽은 자가 아니라 산 자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믿는 기독교는 산 자의 종교입니다. 그러기에 오늘도 기적이 있습니다. /아멘!/
②기독교는 정죄의 종교가 아닙니다. 사죄를 목표로 하는 종교임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로 회개케 하사 죄 사함을 얻게 하시려고 그를 오른손으로 높이사 임금과 구주를 삼으셨느니라" 그러므로 너희가 두려워하지 말고 회개하여 예수를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고 사도들이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의 설교를 보면 신학적으로 완벽한 설교를 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나무에 달아 죽인 예수를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살리시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흘리신 피는 무죄한 피였다는 것을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으로 입증하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신21:23절의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라'는 말씀을 인용하여 산헤드린 공회원들이 예수를 하나님의 저주받은 죄수로 취급하였음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살리셨다'는 것은 유대인들이 가장 존경하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 살리셨다는 것입니다.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너희들이 예수를 하나님이 저주하는 십자가에 못 박았으므로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그 예수를 살리셨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베드로는 '죽은 자의 부활을 믿지 않는 사두개인'들에게 충격적인 요법을 쓰고 있습니다. "그를 오른손으로 높이사" 유대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죄인으로 여겨 하나님의 저주를 받았다고 하였으나 하나님은 오히려 그를 높여 임금과 구주를 삼으셨다고 말합니다.
▶바울의 고백을 참고해 보겠습니다. 빌2:9-11절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여기 구주와 임금은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용어로 임금은 그리스도의 왕적 지위를 나타내는 것으로 하나님의 백성과 모든 피조물을 다스릴 통치자로 세우셨음을 의미하고 구주는 우리를 위한 구원의 창시자란 말로 메시야를 의미합니다. /할/

 

▶32절 "우리는 이 일에 증인이요 하나님이 자기를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주신 성령도 그러하니라 하더라"
여기서 사도들은 공회원들을 정죄하려는 것이 아니고 이루어진 사실로 예수님을 증거 하는 것이며 하나님을 순종하는 사람에게 주신 성령도 이 일을 증거 한다고 대답했습니다.
여기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주신 성령'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에게 성령은 함께 하신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성령의 감동과 성령의 인도를 뜻하는 말씀입니다. 반대로 불순종하는 자는 성령의 감동도, 성령의 인도도 없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성령이 없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여러분 성령님은 온 우주에 충만하십니다. 그런데 성령은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자들과 함께 하십니다. /믿/ 참으로 사도들은 확신에 넘친 용기에 사람들임에 틀림없습니다. 재판을 받는 상황 속에서도 '너희가 죽인 예수를 하나님께서 살리시고 구주로 삼았으니 우리는 이 일에 증인이라'고 전파하고 있습니다.
본문의 재판 과정을 보면 주객이 전도된 것과 같습니다. 재판관이 피고를 재판하는 것이 아니라 피고가 재판관을 책망하고 심문하는 것 같습니다.
베드로는 '메시아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죽인 너희가 죄인이 아니냐?' 그러나 '죄를 회개하면 사함을 받고 구원에 이를 것이다'고 설득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본문에서 배운 것이 무엇입니까? 사도들이 우리의 신앙의 표본이요, 전도의 모범이요, 모든 신앙생활의 모범을 보인 것입니다.
우리도 사도들과 같이 하나님만을 순종하며 성령을 충만히 받아 주안에서 강하고 담대히 주님을 증거 해야 할 것입니다. /할/
▶이제 33-42절까지는 산헤드린 공회 앞에서 선포된 복음의 위력이 나타나는 모습입니다. 먼저 복음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부류가 나타납니다.

 

▶33절 "저희가 듣고 크게 노하여 사도들을 없이하고자 할새"
'크게 노하여 사도들을 없이 하고자'하는 부류가 생겼습니다. 절대 다수였습니다. 복음에 대한 완전 거절, 정면 도전하는 행위입니다. 그들은 분노하면서 죽여 없애버리자는 극단적인 무리들이었습니다. 한마디로 사두개파 사람들이었습니다.
사도들이 증거 한 말로 인하여 자신들의 죄가 더욱 드러났고, 예수 그리스도는 더욱 높아졌으며 자신들의 권위가 떨어지게 되었음으로 사두개파 공회원들은 크게 노하고 사도들을 죽여 버린다고 격한 말로 흥분했습니다.
여기까지 보면 사도들이 정말로 위기에 빠진 것 같습니다. 그런데 다음절부터 보면 하나님은 그 상황에서도 바리새인들을 가르치는 가말리엘을 통하여 사도들을 변호하게 하십니다.

 

▶34절 "바리새인 가말리엘은 교법사로 모든 백성에게 존경을 받는 자라 공회 중에 일어나 명하사 사도들을 잠간 밖에 나가게 하고"
그러니까 원수들 중에 가장 영향력 있는 사람을 감동하여 사도들을 도와주게 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가말리엘'에 대하여 알아야 합니다.
당시 바리새파 중에는 율법 해석에 있어 강건 노선을 걷고 있는 무리와, 온건 노선을 걷고 있는 무리가 있었습니다. 가말리엘은 그 중 온건파로서 '힐렐'의 손자로서 유대인들의 교법사들 중에 가장 훌륭한 자들에게 주는 '라반'이라는 칭호를 받은 7인 가운데 한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백성들로부터 존경을 받았으며 그의 인품 또한 훌륭해서 산헤드린 공의회의 분위기도 그의 말 한마디로 바꿀 수 있는 정도의 대단한 위인이었습니다. 그는 율법학자로서 오랫동안 율법 문제의 고문 격으로 공회에 몸을 담고 있었으며 한때는 산헤드린 공회의 의장직을 맡기도 했습니다.
그는 사도바울의 스승이기도 합니다(행22:3). 당시 최고의 율법학교의 교장선생입니다. 서울대 교장쯤으로 이해하면 될 것 같습니다. 전승에 의하면 그는 만년에 기독교로 개종하였다고 합니다.
'교법사'는 율법을 가르치는 선생입니다. 이 가말리엘이 사도들을 옹호하고 나섰습니다. ▶하나님은 그를 움직인 것이지만 당시 분위기로 보면 두 가지 측면이 있습니다.
①정치적인 이유 때문입니다. 산헤드린 공회는 사두개인들과 바리새파들로 구성되었는데 대부분이 사두개파에서 차지하고 있었으며 바리새인들은 소수만이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비록 바리새인들이 소수였지만 당시 유대사회에서는 사두개인들보다 바리새인들이 더 많은 영향력과 존경을 받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근본적으로 서로 다른 입장을 취하고 있는 경쟁관계였습니다. 이러한 갈등 구조 속에서 가말리엘은 바리새인의 대변자 자격으로 사두개인들에 의해서 고조되었던 분위기를 진정시키고 수세에 몰린 바리새파에 영향력을 증건 시킬 필요가 있었습니다.
②종교적인 이유 때문입니다. 그들은 예수를 죽이는 일에는 함께 결탁하였지만 종교적인 입장은 전혀 다른 반대 입장을 취하고 있었습니다.
즉 사두개인들은 부활이나, 영생이나, 천국이나, 지옥이나, 영적 존재를 믿지 않았으나 바리새인들은 이를 철저히 믿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바리새인들에게는 사도들의 부활교리가 율법 상의 전통을 파괴하는 것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았습니다.
어째든 당시 유대 사회에서 가장 존경받고 산헤드린 공회에서도 중요한 위치에 있었던 가말리엘은 문제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중재에 나선 것입니다. ▶가말리엘의 중재는 35-39절까지 나옵니다.

 

▶35절 "말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너희가 이 사람들에게 대하여 어떻게 하려는 것을 조심하라"
"이스라엘 사람들아" '하나님의 사람들아!' 이 말입니다. 지금 말로 하면 '성도들아' 이 말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무슨 일을 처리할 때, 하나님의 백성답게 처리해야지 감정대로 하면 되겠느냐는 의도가 있었습니다.
"조심하라" 너를 위하여 너희 마음을 붙잡으라는 뜻입니다. 가말리엘은 신중하게 문제의 심각성을 다루고 있지만 실상은 사도들이 전한 복음을 시인하거나 그것을 변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다만 격분된 분위기를 가라앉히기 위해서 '조심하라'고 한 것입니다.
아주 권위 있고 신중한 그의 말에는 핍박 자들로 하여금 그의 말을 따르도록 하는 설득력이 있었습니다.

 

▶36절 "이전에 드다가 일어나 스스로 자랑하매 사람이 약 사백이나 따르더니 그가 죽임을 당하매 좇던 사람이 다 흩어져 없어졌고"
가말리엘은 '사도들에게 조심하라'는 그 이유를 구체적인 예를 들어 설명하기 시작했습니다. 즉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세상일과 같지 않아서 하나님의 뜻이 아닌 것은 곧 무너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첫 번째 '드다'를 예로 들고 있습니다. 요세푸스에 의하면 '드다'는 A.D. 44-45년경 '클라우디오'가 이스라엘을 다스릴 때에 일어났던 반란의 주동자로서 많은 사람들은 요단강으로 데리고 가서 '자신은 하나님이 보낸 선지자이며 요단강의 물을 갈라 사람들을 건너게 할 수 있다'고 선언하며 군중들을 동요시켰습니다.
그러자 당시 로마의 총독이 그 소요를 진압하고 '드다'는 사형을 당했습니다. 그러니까 '드다'의 혁명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기에 무너졌음을 상기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역사적인 사건을 들어 말하면서 당분간 두고 보면 그들의 정체가 드러날 것이므로 그들에게 성급하게 손을 대지 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37절 "그 후 호적할 때에 갈릴리 유다가 일어나 백성을 꾀어 좇게 하다가 그도 망한즉 좇던 사람이 다 흩어졌느니라"
두 번째는 '갈릴리 유다'를 예를 들고 있습니다. 로마는 이스라엘에게 세금을 부과시키려는 목적으로 인구조사를 했는데 유다의 반란은 로마에 반기를 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진정한 왕이시므로 로마 황제에게 순종하는 것은 곧 하나님을 반역하는 것이라고 역설하면서 자신은 하나님이 보낸 선지자라고 역설하고 있습니다.
그때 많은 사람들이 그를 좇았으나 유다가 체포되어 죽자 모두 다 흩어져 버렸습니다. 가말리엘 교법사는 이 두 과거의 사건을 예를 들면서 사도들의 사건을 주시해 보자고 설득하고 있는 것입니다.

 

▶38절 "이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사람들을 상관 말고 버려두라 이 사상과 소행이 사람에게로서 났으면 무너질 것이요"
"이 사람들을 상관말고 버려 두라" 여기 '상관말고'는 '손을 떼고 잊어버리라'란 뜻으로 '그대로 내버려 두라'는 뜻입니다.
'이 사상과 이 소행'은 그리스도의 복음과 예수 그리스도의 덧입는 권능을 의미합니다. '사람에게서 났으면 무너질 것이요' 앞에서 두 역사적인 사건을 예로 들었던 것처럼 지금 사도들이 하고 있는 사상이나 소행이 하나님의 뜻이 아닌 인간의 뜻대로 났으면 무너질 것이라는 것입니다

 

▶39절 "만일 하나님께로서 났으면 너희가 저희를 무너뜨릴 수 없겠고 도리어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가 될까 하노라 하니"
이 말씀이 진리입니다. '만일 하나님께로 났으면 너희가 저희를 무너뜨릴 수 없겠다'는 것입니다. 누가 하나님을 이길 수 있습니까? 저들이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것이면 인간의 힘으로는 절대로 무너뜨릴 수 없다는 것입니다.
더 귀한 진리는 '도리어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는 자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입니다.
본 절에서 보면 가말리엘은 사도들의 편에 서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뒤에 역사가들은 가말리엘을 '기회주의자로 혹은 우유부단한 성격을 소유한 인물로 평가되었다'고 합니다.

 

▶40절 "저희가 옳게 여겨 사도들을 불러들여 채찍질하며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는 것을 금하고 놓으니"
가말리엘의 충고는 대제사장과 사두개파 사람들의 주장과 격양된 분위기를 진정시키기에 충분했습니다.
"저희가 옳게 여겨" 설득을 당한 것입니다. 받아들인다고 직역할 수 있습니다. 산헤드린의 공회의 대제사장들과 사두개인들은 가말리엘의 충고에 설득을 당했지만 그들의 분노의 감정은 가라앉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채찍질하여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는 것'을 금하고 석방했습니다. 그런데 '헬'어 성경에 '채찍질한다'는 말은 그 의미가 보다 리얼하게 설명이 되었습니다. 그것은 '가죽을 벗긴다'는 말입니다. 그 당시 채찍은 보통 소가죽으로 만들었습니다. 가죽끈 끝에 쇠뭉치를 달았습니다, 그 쇠뭉치에 송곳 같은 삐쭉삐쭉한 것을 달아 후리쳐서 당기면 피부껍질뿐 아니라 살점이 찢겨져 나옵니다 정말 고통스러운 채찍입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이런 고통도 감수했습니다. 신25:1-3절에 보면 재판하여 악인에게 태형을 내릴 때에는 채찍으로 40대 이상을 연속해서 때릴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교묘하게 39대를 때리고 쉬었다가 또 39대를 때립니다 그것을 반복합니다.
사도 바울은 고후11:24절에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즉 모두 195대를 맞은 것입니다, 그리고 세 번 태창으로 맞고 한번 돌로 맞았습니다. 그래도 복음을 전하는 일을 막을 수가 없었습니다. 바울은 맞으면서도 여전히 복음을 전했습니다.
오늘 우리는 복음을 전하다가 붙잡혀 가보았습니까? 복음을 전하다가 맞아보았습니까? 복음을 전하다가 욕을 먹거나 비웃음과 조롱이나 멸시를 당해 보았습니까? 그것은 영광입니다 그것은 곧 하늘나라에서 받을 영광의 복입니다. /할/
가말리엘의 충고를 받은 대제사장과 사두개파 사람들이 사도들을 놓아주기는 놓아주는데 실컷 때리고 놓아주었습니다. 그러면서 다시는 예수가 죽었다가 살아났다는 말을 하지 말라고 위협을 하고 놓아주었습니다. ▶그러나 사도들은 어떻게 했습니까?

 

▶41절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
"그 이름을 위하여" 이것이 예수 정신이고 예수 사상입니다. 예수 때문에 받는 축복, 예수 때문에 받는 고난, 예수 때문에 받는 모든 것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 이것이 예수 정신이고 예수 사상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복음입니다. /할/
본문의 사도들은 '예수의 이름 때문에 능욕 당한 것을 기뻐하고 법정'을 떠났습니다. 사도들은 확신에 넘쳐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산상설교에서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또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
히12:28절에 보면 "우리가 진동치 못할 나라를 받았다"고 말합니다. 이 세상은 하나님께서 한번 흔드시고 진동하면 없어집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는 아무도 흔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 세상의 그 어떤 사상으로도 흔들 수 없습니다. 예수를 위하여 핍박받는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것, 이것이 진동치 못할 나라를 유업으로 받은 비결입니다.
히11장에 보면 믿음으로 살면서 '희롱과 채찍질과 결박과 옥에 갇히는 것과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에 죽는 것과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으면서도 당당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치 못합니다. 이것이 예수 정신을 가진 사람입니다. 세상이 감당치 못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42절 "저희가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쉬지 아니하니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날마다 전도했다는 것입니다. 사도들은 전도사역을 일시라도 중단할 수가 없었습니다. 얼마나 뜨거운 열정입니까?
'날마다' 매일 하루 종일을 의미합니다. 그들의 복음의 핵심은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의 핵심입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께서 보내신 메시아요 구세주라는 뜻입니다.
사도들은 이것을 가르치지 말라는 조건으로 석방되었지만 오히려 더 크고 담대하게 주님을 증거 했습니다. 이 모습을 우리가 배워야 합니다. /아멘 입니까?!/할/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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