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을 감동시킨 기도들
이동원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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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아브라함의 기도
2. 모세의 기도
3. 한나의 기도
4. 솔로몬의 기도
5. 다윗의 기도
6. 이사야의 기도
7. 하박국의 기도
8. 바울의 기도
9.예수님의 기도(1)
10. 예수님의 기도(2)
11. 예수님의 기도(3)
<저자소개>
이동원 목사는 바람직한 목회자(현 지구촌교회 담임목사)로, 그리고 성경 교사, 방송설교 및 상담목사, 저술가, 새생활 세미나 주강사로 잘 알려져 있으며 미국 Willam Tyndale College에서 성서신학을 전공하였고, Southeastern Baptist Seminary에서 신학(신학석사)을, 고려대학교 대학원에서 상담심리학(교육학 석사)을 전공하였고, 미국 시카고에 있는 TrinityEvangelical Divinity School에서 선교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1 아브라함의 기도
창세기 18장 22-33절
"그 사람들이 거기서 떠나 소돔으로 향하여 가고 아브라함은 여호와 앞에 그대로 섰더니 가까이 나아가 가로되 주께서 의인을 악인과 함께 멸하시려나이까 그 성 중에 의인 오십이 있을지라도 주께서 그곳을 멸하시고 그 오십 의인을 위하여 용서치 아니하시리이까 주께서 이같이 하사 의인을 악인과 함께 죽이심은 불가하오며 의인과 악인을 균등히 하심도 불가하나이다 세상을 심판하시는 이가 공의를 행하실 것이 아니니이까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만일 소돔 성 중에서 의인 오십을 찾으면 그들을 위하여 온 지경을 용서하리라 아브라함이 말씀하여 가로되 티끌과 같은 나라도 감히 주께 고하나이다 오십 의인 중에 오인이 부족할 것이면 그 오인 부족함을 인하여 온 성을 멸하시리이까 가라사대 내가 거기서 사십오인을 찾으면 멸하지 아니하리라 아브라함이 또 고하여 가로되 거기서 사십인을 찾으면 어찌하시려나이까 가라사대 사십인을 인하여 멸하지 아니하리라 아브라함이 또 가로되 내가 감히 내 주께 고하나이다 거기서 이십인을 찾으시면 어찌하시려나이까 가라사대 내가 이십인을 인하여 멸하지 아니하리라 아브라함이 또 가로되 주는 노하지 마옵소서 내가 이번만 더 말씀 하리이다 거기서 십인을 찾으면 어찌하시려나이까 가라사대 내가 십인을 인하여도 멸하지 아니하리라 여호와께서 아브라함과 말씀을 마치시고 즉시 가시니 아브라함도 자기 곳으로 돌아갔더라."
어느 교회 청년회원들이 기도 모임을 갖게 되었습니다. 우선 청년회를 지도하시는 전도사님이 "그 동안 우리들의 기도는 너무나 이기적 관심에 매여 있었던 것 같습니다. 앞으로 우리들은 기도할 때 자신들만을 위해서 기도하지 말고 자신의 영역을 넘어서서 기도하기를 힘써야겠습니다. 예컨대 부모님을 위해서도 기도하시고 나라의 지도자를 위해서도 기도하시고 국가와 민족을 위해서도 기도하십시다"라고 말씀한 후 각자의 기도가 시작되었습니다.
죽 차례대로 기도하는데 어떤 자매 차례가 되었습니다. 이 자매는 이렇게 기도했다고 합니다. "하나님, 그 동안 저는 너무나 자신만을 위해서 기도해왔습니다. 용서해 주옵소서. 오늘은 저의 부모님을 위해서 기도합니다. 제 부모님에게는 무엇보다도 좋은 사위가 필요합니다. 좋은 사위를 맞이하여 그들의 딸이 행복한 것을 보게 하옵소서." 이 에피소드는 우리의 기도가 이기적 영역을 넘어선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풍자해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드릴 수 있는 여러 유형의 기도 가운데 가장 비이기적인 기도가 있다면, 가장 순결한 기도가 있다면 그것은 중보기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웃들을 위해서 드리는 기도인 중보기도, 이것은 가장 고상한 기도 형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암울한 시대, 이 고통의 시대를 맞이해서 우리는 어떻게 기도하면 좋을까요? 이런 시대에 주 앞에 나아가는 우리들의 마땅한 기도 자세는 무엇일까요? 우리는 그 대답을 27절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말씀하여 가로되 티끌과 같은 나라도 감히 주께 고하나이다." 참된 기도는 내가 누구인가 하는 인식에서부터 출발합니다. 인간에게 "나는 무엇인가?" 하는 질문보다 더 중요한 질문이 어디 있겠습니까? 본문에 나타난 아브라함의 고백을 보십시오. "티끌과 같은 나라도." 이것이 아브라함의 자기 인식입니다. 원문에서 읽어 보면 티끌이란 단어는 "먼지"를 말합니다. "먼지와 같은 나라도." 우리의 원재료가 먼지라는 사실을 아십니까? 우리는 흙에서 취함을 입었습니다. 그리고 어느날 우리는 다시 그 흙으로, 먼지로 돌아갑니다. 이것이 피조물성(被造物性)의 인식입니다. 우리가 이 인식을 한다면 주 앞에 겸비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분을 날마다 의존하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다는 인식, 이것이 기도가 출발하는 자리입니다. '겸비하다'는 것은 열등감과 다릅니다. 열등감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기도하지 않습니다. "내가 기도한들 하나님이 들으실까? 아니, 내가 나라를 위해서 민족을 위해서 기도한들 세상이 달라질 수가 있겠는가?" 이런 영적인 열등감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절대로 기도하지 않습니다. 겸비한 사람들은 자기의 피조물성의 본질을 의식하면서도,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을 의지할 줄 아는 사람들입니다. 본문 27절에서 "티끌과 같은 나라도 감히 주께 고하나이다"라고 했습니다. 31절에서도 "감히"라는 단어가 한 번 더 강조됩니다. "겸비한 태도로 그러나 담대하게." 이것이 기도자의 자세입니다.
우리가 만일 본문을 피상적으로만 관찰한다면 이 아브라함의 기도는 결국 소돔과 고모라 사람들을 살려 달라는 인간적 기도라고 생각될지 모릅니다. 그러나 좀 더 깊이 성찰한다면 이 아브라함의 기도는 단순히 인간의 필요에 초점을 맞춘 기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필요에 초점을 맞춘 기도임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아브라함은 조카 롯이 살고 있던 그 도시, 그 민족 가운데 하나님의 의(義), 그리고 하나님의 자비가 부어지도록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민족을 위한 우리의 기도가 응답받으려면 "이 민족 잘살게 해주시고 통일되게 해주소서"하는 정도의 기도 가지고는 안 됩니다. 그렇다면 주께서 기뻐하시는 기도는 어떤 기도일까요? "이 민족 가운데 하나님의 공의를 이루어주옵소서. 그리고 오늘 이 땅 가운데 이 민족 가운데 하나님의 긍휼을 그리고 자비를 부어 주시옵소서." 이런 기도가 필요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필요를 위한 기도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기도는 무엇보다 하나님 자신의 기대와 요구가 이루어질 수 있는 기도입니다. 아브라함은 바로 거기에 초점을 맞추어 다음 두 가지를 구했습니다.
첫째, 하나님의 공의의 실현
"가까이 나아가 가로되 주께서 의인을 악인과 함께 멸하시려나이까"(23절).
"주께서 이같이 하사 의인을 악인과 함께 죽이심은 불가하오며 의인과 악인을 균등히 하심도 불가하니이다 세상을 심판하시는 이가 공의를 행하실 것이 아니니이까"(25절).
"세상을 심판하시는 하나님, 하나님은 공의를 마땅히 행하시는 하나님이 아니시겠습니까"라고 아브라함은 지금 하나님의 의에 호소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그 의로 그 땅에 역사하시도록 기도하고 있습니다.
경영학에서 사용하는 법칙 가운데 「80대20」이라는 법칙이 있다고 합니다. 우리가 생산하는 모든 생산의 80%는 20%의 사람을 통해 생산되며, 또 우리가 소비하는 대부분의 소비, 곧 80%의 소비도 20%의 사람들이 소비한다는 법칙입니다. 한 예로 직장에서 보면 80%의 전화를 20%의 사람들이 다 써버린다고 합니다.
일본의 어느 학자가 개미를 연구했습니다. 개미는 근면과 성실의 상징이지요? 그러나 이 학자는 개미를 연구해보니까 실제로 개미 가운데 열심히 일하는 개미는 20%에 불과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열심히 일하는 20%의 개미가 나머지 80%를 먹여 살리는 것입니다. 제가 그 애기를 읽으면서 이런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오늘 한국 사회에서 그리스도인이 차지하는 인구 비율이 얼마나 됩니까? 약 20%입니다. 만약 이 땅 인구의 20%를 차지하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인답게 산다면,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기를 추구한다면, 주님의 기대처럼 소금으로 빛으로 살아간다면 우리의 역사, 우리의 사회는 얼마나 달라질까요? 오늘날 이 땅의 그리스도인들이 우리 역사의 중요한 시점에 책임을 다 못하여 훗날 이 민족이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다면 누가 책임을 져야 합니까? 우리가 이 땅의 민족을 위해서 이 현실을 위해서 드려야할 많은 기도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기도가 있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 이 땅에 하나님의 공의가 이루어지게 하시고, 원컨대 의롭다 함을 입은 내가 의인답게 살 수 있도록 삶 속에 하나님의 은혜를 베풀어 주시사 주의 말씀을 붙들고 살게 해주시옵소서." 이 얼마나 필요한 기도입니까?
둘째, 하나님의 자비의 구현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자비, 하나님의 긍휼이 소돔과 고모라 땅에 부어지도록 기도합니다. 그런데 본문에 나타난 아브라함의 기도를 피상적으로 관찰하면 이런 생각을 할 수도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소돔과 고모라에 사는 의인들에게만 관심이 있었지 악인들에게는 관심이 없는 것이 아니냐? 그 악인들은 망해도 좋은가?" 그러나 좀 더 깊이 본문을 관찰해 보십시오. 예컨대 24절 말씀을 보기 바랍니다. "그 성 중에 의인 오십이 있을지라도 주께서 그 곳을 멸하시고 그 오십 의인을 위하여 용서치 아니하시리이까." 이것이 의인만을 위한 기도입니까? 아니지요. 오히려 "그 의인을 보시고 나머지 사람들도 용서해 주시지 않겠습니까"하는 기도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을 때 매우 중요한 삶의 소명 하나도 받았습니다. 그것은 그가 다른 사람들에게 축복이 되는 존재로 살아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창12:2). 의인은 악인들에게도 축복이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아브라함 가문에, 그 신앙 가문에 하나의 전통으로 내려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흠모하고 추구해야 할 삶의 양식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기독교적 삶을 산다는 것은 결코 냉혹한 정의만을 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사랑 없는 정의, 긍휼 없는 정의는 정의 없는 사랑보다 훨씬 더 악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여기 아브라함은 그 도성의 용서를 위해서 엎드려 기도합니다. "하나님, 이 도성의 백성들이 하나님을 실망시켜 드리고 죄 가운데 빠져 있어 하나님 보시기에 진노를 피할 수 없다는 그 악한 현실을 잘 압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비로우신 하나님, 주님의 긍휼과 사랑에 근거하여 이 도성의 백성들을 용서해 주시옵소서."
오늘 우리 역사 속에도 이런 기도가 얼마나 절실하게 요청됩니까?
아브라함의 기도는 부분적으로만 응답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아브라함이 중보자로서 완전하지 못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하나님께서 롯의 가족을 구출하심으로써 구속(救贖)의 역사는 계승되었지만 그 도성 전체가 구원을 얻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나 먼 훗날 아브라함과 비교될 수 없는 절대적 중보자 한 분이 역사 속에 찾아오셨습니다. 하나님의 의, 공의와 사랑을 완벽하게 가지고 이 땅에 공의와 사랑의 역사를 이루기 위해서 오셨던 분, 누구였습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은 인간이 하나님의 저주와 심판을 피할 수 없는 죄 가운데 빠져 있는 것을 보셨습니다. 하나님이 만약 인류를 향해 진노하신다면 끝장일 수밖에 없는 것을 불쌍히 여기시고 예수께서는 자신의 몸으로 인류의 죄를 담당하셨습니다. 저는 오늘 우리 민족에게 희망이 있다면 다시 우리가 십자가의 복음 앞에 서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갈보리 언덕 십자가에 서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의와 긍휼의 화신이었던 예수 그리스도 앞에 엎드려 그분을 이 민족의 구세주로 그리고 이 땅의 삶의 주인으로 받아들이고 그분 앞에 회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하나님의 피할 수 없는 저주, 임박한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그 현실을 바라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을 구합니다. 주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에게 긍휼을 베풀어 주셨던 주님, 한 번 더 이 땅에 주님의 자비를 내려 주시옵소서." 이것이 십자가의 복음입니다.
세상은 어두워지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방향을 찾지 못하고 방황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네 삶의 모습을 주님 앞에서 보십시오. 내 이웃들의 삶의 모습을 지켜 보십시오. 방황하면서도 회개없이 살고 있는 이 민족, 이 민족이 고통 받고 있는 것은 이 땅에 하나님의 심판이 시작되었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이때야말로 주 앞에 엎드려 주님의 용서와 긍휼을 구할 때가 아니겠습니까? 우리 모두 주 앞에 엎드려 그분의 자비와 은총을 구합시다.
창조적 기도 생활을 위한 토의와 훈련
1. 중보기도에 대한 한국 교회의 통상적인 인식을 나누어 보십시오.
2. 나 자신의 중보기도에 사랑과 공의가 얼마나 균형을 유지하고 있는지 이야기해 보십시오.
3. 아브라함의 중보기도에서 특히 우리가 배울 점이 무엇입니까?
4. 잠시 우리 민족과 사회를 위한 중보기도의 시간을 갖도록 합시다.
2 모세의 기도
출애굽기 33장 12-16절
"모세가 여호와께 고하되 보시옵소서 주께서 나더러 이 백성을 인도하여 올라가라 하시면서 나와 함께 보낼 자를 내게 지시하지 아니하시나이다 주께서 전에 말씀하시기를 나는 이름으로도 너를 알고 너도 내 앞에 은총을 입었다 하셨사온즉 내가 참으로 주의 목전에 은총을 입었사오면 원컨대 주의 길을 내게 보이사 내게 주를 알리시고 나로 주의 목전에 은총을 입게 하시며 이 족속을 주의 백성으로 여기소서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친히 가리라 내가 너로 편케 하리라 모세가 여호와께 고하되 주께서 친히 가지 아니하시려거든 우리를 이곳에서 올려 보내지 마옵소서 나와 주의 백성이 주의 목전에 은총 입은 줄을 무엇으로 알리이까 주께서 우리와 함께 행하심으로 나와 주의 백성을 천하 만민 중에 구별하심이 아니니이까."
"너희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이르게 하려니와 나는 너희와 함께 올라가지 아니하리니 너희는 목이 곧은 백성인즉 내가 중로(中路)에서 너희를 진멸할까 염려함이니라 하시니."
그 백성들과 동행하시면서 말씀도 하고 책망도 하고 위로도 하시던 그 교제를 그만두시겠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철회하시겠다는 선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제 하나님과의 교제를, 다른말로 하면 하나님의 임재를 상실하게 된 것입니다.
오늘 이 시대를 사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임재를 상실한 채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그 사실이 얼마나 심각한 비극인지 알지 못합니다. 당장은 살아가는 데 별 지장이 없기 때문입니다. 또 나를 향한 하나님의 공급은 계속되고 있으니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내 삶의 도움이 되어 주시고 계속 내 필요를 채워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공급이라는 것은 신자들뿐만 아니라 불신자들에게도 계속됩니다. 성경에 보면 산상수훈 가운데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햇빛과 비를 의인과 불의한 사람에게, 선한 사람과 악한 사람에게 똑같이 주신다고 했습니다. 이것을 신학용어로 '보편은총' 또는 '일반은총'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이런 은혜를 누구에게나 주십니다. 이런 하나님의 보편적인 은총이 계속되기 때문에 하나님과의 교제, 하나님의 임재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잘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달랐습니다. 그들은 이것이 매우 무서운 비극인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어떤 반응을 보입니까? 출애굽기 33장 4절을 보십시오.
"백성이 이 황송한 말씀을 듣고 슬퍼하여 한 사람도 그 몸을 단장하지 아니하니."
그들은 슬퍼하기 시작했습니다. 참회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대표자격이었던 모세는 그들을 위하여 하나님께 나아가 중보기도를 드렸습니다.
모세의 중보기도
그 중보기도의 내용은 한마디로 하나님의 임재를 회복시켜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 제가 가나안까지 이 백성을 이끌고 가려면 그렇게 하셔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회복시켜 주옵소서. 그리하셔야 제가 다시 힘을 얻어 제 여정을 마칠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이 모세의 중보기도 내용을 세밀하게 보자면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첫째로, 함께할 자를 보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모세가 여호와께 고하되 보시옵소서 주께서 나더러 이 백성을 인도하여 올라가라 하시면서 나와 함께 보낼 자를 내게 지시하지 아니하시나이다"(22절).
다시 말하면 하나님 이 길은 저 홀로 가기에는 너무나 고통스럽고 어려운 길 아닙니까? 함께할 자를 보내 주시옵소서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많은 사람들과 부딪치지만 진실한 만남을 경험하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외롭습니다. 사람들은 인간 단절, 인간 소외의 비극을 경험하면서 인생을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얼굴과 얼굴이 만나지 못하고 마음과 마음이 만나지 못한 채 살아갑니다. 마치 얼굴 없는 사람들처럼 사람 사이의 진정한 만남이 없는 인생을 살고 있습니다.
모세의 생애를 연구해 보면 모세는 장점이 많은 사람입니다. 모세는 인간에 대한 실망을 경험했으면서도 인간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인생을 살아가려면 동역할 사람이 필요하다는 사실도 부정하지 않았습니다. 모세가 함께 갈 자를 보내달라고 산에 올라가서 기도하는 동안 모세의 동역자이자 형제인 아론은 산 아래서 무슨 일을 하고 있었습니까? 백성들을 충동질해서 우상숭배의 범죄를 하도록 유도하지 않았습니까? 그것은 모세에 대한 배신이었습니다. 이렇게 상처를 받았으면서도 모세는 여전히 인생은 홀로 살 수 없다 생각하고 함께할 자를 보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인생길에 반려자가 필요합니다. 동역자가 필요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참 진실한 믿음의 이웃들, 형제 자매들을 만나 그들을 통해 위로받을 때 거기서 하나님의 위로를 느낍니다. 그들을 통해 격려받으면서 하나님의 격려를 느낍니다.
둘째로, 은총의 표정을 보여달라고 기도했습니다.
"내가 참으로 주의 목전에 은총을 입었사오면 원컨대 주의 길을 내게 보이사 내게 주를 알리시고 나로 주의 목전에 은총을 입게 하시며 이 족속을 주의 백성으로 여기소서"(13절). 그리고 좀더 담대하게 이런 요청도 합니다. "모세가 가로되 원컨대 주의 영광을 내게 보이소서"(18절). 그래서 여호와께서는 "보라 내 곁에 한 곳이 있으니 너는 반석위에 섰으라"(21절)고 하셨습니다. "내가 지나갈테니까 너는 반석에 들어가 숨어 있으라. 내가 지나간다는 것을 조금이나마 느끼게 해주마"라는 의미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자신의 영광의 편린(片鱗)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분의 영광 전체를 계시하신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 영광 앞에 설 사람이 없다는 것을 아시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분의 영광 전체를 계시하는 것을 유보하셨습니다. 다만 "내가 너와 함께하고 네 곁에 지나간다는 표를 보여 주마. 나를 느낄 수 있도록 해주마" 라는 뜻의 기도 응답만 하셨습니다. 여기서 사실 모세는 하나님을 시험한 것이었습니다. 이 점이 매우 중요합니다. 성경은 우리가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을 금하였습니다. 그러면서도 우리가 나쁜 동기가 아니라 좋은 동기로, 시험을 위한 시험이 아니라 정말 좋은 동기로 하나님이 계신가 시험하거나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는가 시험하는 것은 허용하십니다. 예컨대 말라기서에서 "한번 십일조를 드리면서 내가 축복하나 안 하나 시험해 보라"(3:10 참조)고 하셨습니다.
인생길에는 확인이 필요합니다. 모세는 하나님이 살아계신 것을 알았습니다. 가나안까지 도달하는 동안 그 백성을 인도하시겠다는 약속도 잘 알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나를 기뻐하신다는 사실을 중간중간에 확인시켜 주시지 않으면 쉽게 시험에 들 것이기에 모세는 "내가 주의 은총 받은 사람이라는 징표를 보여 달라"는 기도를 드린 것입니다.
하나님의 신속한 기도 응답
모세가 하나님의 신속한 응답을 받았던 비결이 무엇이었을까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회개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진실하게 회개했습니다. 참회했습니다. 이 중요한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출애굽기 33장 4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을 반역하고 우상숭배하고 그 잠시를 견디지 못하여 하나님께 시선을 떼고 방황했던 범죄에 대해 그들은 진심으로 슬퍼하며 참회했습니다. 한 사람도 그 몸을 단장하지 않은 것은 단장하는 것이 죄라서가 아니라 외부에 신경 쓸 마음의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떠나 하나님을 반역하고 하나님을 근심시키고 진노케 했던 비참한 마음 상태를 바라보며 그들은 진정으로 경건한 참회를 했던 것입니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어떤 반응을 보이십니까?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기를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르라 너희는 목이 곧은 백성이다"(5절)라고 책망하셨습니다.
목이 곧다는 것은 목이 뻣뻣하다는 것입니다. 목이 뻣뻣하면 하나님이 사용하시기가 곤란합니다. 목이 부들부들해야 하나님께서 끌고 다니기 좋고 일 시키시기 좋은데, 목이 곧으며 쓰실 수가 없습니다. 교만한 사람은 하나님이 쓰실 수가 없습니다. 본문 10절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경배합니다. 경배하기 위해서는 자세를 낮추어야 합니다. 그들은 마침내 회개하여 주님 앞에 엎드립니다. 회개하며 엎드립니다. 이 회개가 드디어 하나님의 마음을 바꾸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신속한 응답이 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과연 어떤 응답을 받았습니까? 그날 모세가 중보기도하여 응답받은 내용의 정체가 14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응답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 "내가 친히 가겠다"
우리는 때로 하나님을 오해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우리의 편견으로 오해하게 되는 원인의 하나는 지나치게 경직된 신학적 교리, 소위 잘못된 도그마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하나님의 주권과 예정에 대한 공부를 할 때 마치 하나님이 어떤 프로그램을 가지고 인간을 다루시는 것처럼, 그리고 한 번 계획하면 요지부동으로 우리를 그리로 끌고 가시는 하나님으로 상상을 많이 합니다. 그러나 보십시오. 같이 안 가겠다고 말씀하셨다가도 백성들이 참회하며 회개하면서 기도했더니 그 뜻을 바꾸어 같이 가기로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융통성 없는 분이 아니십니다. 물론 하나님은 역사와 인생에 대한 큰 계획을 갖고 계십니다. 그리고 하나님 자신의 의지를 관철하실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생을 섭리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은 고착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아주 인격적인 분이십니다. 그분은 개인적으로 우리 삶에 간섭하시고 사랑과 긍휼로 우리 삶에 다가 오시사 우리와 더불어 교제하기를 기뻐하시는 하나님, 우리가 울며 호소할 때 마음도 바꾸시는 하나님입니다. 여기에 기도의 묘미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기도할 때 하나님은 생각을 달리하시고 우리에게 제2의 기회도 주시고 색다른 인생의 선택도 하게 하십니다. 이토록 부드러우신 하나님, 이런 인격적인 하나님이 바로 성경의 하나님이시오 당신의 하나님이신 것을 신뢰하기 바랍니다. 바로 그 하나님이 어떻게 말씀하십니까? "내가 친히 같이 가리라."
그런데 함께할 자를 보내 달라는 기도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이 기도만은 하나님이 제3의 인물을 보내 주시는 쪽으로 응답하지 않으셨습니다. 왜 그렇게 하셨을까 제가 생각해 보니까 하나님의 마음이 이랬을 것 같았습니다.
"바꿔 봤자 인생은 다 마찬가지다. 그냥 아론과 여호수아와 같이 가라."
우리는 인간 관계에서 갈등을 경험하면 종종 "한번 바꿔봤으면 좋겠다. 새로운 사람과 일해 봤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봐꿔 봤자 소용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바뀌는 것입니다. 내가 변화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내가 친히 함께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시면 어려운 상황 속에 주께서 개입하시면 그리고 주께서 우리를 장악하시면 우리는 다시 일어나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인생의 목표를 향해 달려갈 수 있는 줄로 믿습니다.
둘째, "내가 너로 편케하겠다."
모세에게 응답으로 주신 하나님의 첫째 약속과 두 번째 약속 이 두가지는 분리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 주께서 나와 더불어 같이 하신다는 이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한 사람들은 그 임재 안에서 안식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안식이란 것은 단순히 활동의 중단을 말하지 않습니다. 그저 쉬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진정한 안식은 '새로운 창조'(recreation)입니다. 또한 '새로워지는 것'(refreshment)입니다. 새로이 충전되는 것입니다.
신앙이 깊어지면 하나님의 백성들의 마음속에 이런 열망이 생깁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더 깊이 경험해 봤으면 좋겠다." 이런 생각이라도 해본 사람은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입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했으면 좋겠다. 하나님의 임재 속에 깊이 들어갔으면 좋겠다는 열망이 전혀 없다면 아직도 가짜일지 모릅니다. 참된 신앙인의 마음속에는 이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열망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갈망이 있습니다.
내게 주어진 나머지 인생을 어떻게 살기 원하십니까? 저는 무엇보다 모세가 기도를 통해 하나님 임재의 회복을 구했던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의 임재 안에 살아가기를 구했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사모하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당당하게 투명하게 순전하게 사십시오. 나를 둘러싼 환경이 얼마나 열악하든지간에 흔들림 없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며 기뻐하고 평안하며, 함께하시는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증언하는 삶을 사십시오. 이런 삶을 살 수 있는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하시기 때문입니다. 내가 주의 음성을 날마다 들으며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와 친히 함께하리라. 내가 너를 편하게 하리라. 내가 너에게 안식을 주리라." 이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안식과 임재 안에서 항상 승리하시기를 바랍니다.
창조적 기도 생활을 위한 토의와 훈련
1. 우리의 기도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것이 왜 중요합니까?
2. 우리의 기도에서 회개가 왜 중요한 요소가 됩니까?
3. 잠시 회개의 기도에 이어서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케 해달라는 집중적 기도시간을 가지십시오.
3 한나의 기도
사무엘상 1장 10-18절
"한나가 마음이 괴로워서 여호와께 기도하고 통곡하며 서원하여 가로되 만군의 여호와여 만일 주의 여종의 고통을 돌아보시고 나를 생각하시고 주의 여종을 잊지 아니하사 아들을 주시면 내가 그의 평생에 그를 여호와께 드리고 삭도를 그 머리에 대지 아니하겠나이다 그가 여호와 앞에 오래 기도하는 동안에 엘리가 그의 입을 주목한즉 한나가 속으로 말하매 입술만 동하고 음성은 들리지 아니하므로 엘리는 그가 취한 줄로 생각한지라 엘리가 그에게 이르되 네가 언제까지 취하여 있겠느냐 포도주를 끊으라 한나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의 주여 그렇지 아니하나이다 나는 마음이 슬픈 여자라 포도주나 독주를 마신 것이 아니요 여호와 앞에 나의 심정을 통한 것 뿐이오니 당신의 여종을 악한 여자로 여기지 마옵소서 내가 지금까지 말한 것은 나의 원통함과 격동됨이 많음을 인함이니이다 엘리가 대답하여 가로되 평안히 가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너의 기도하여 구한 것을 허락하시기를 원하노라 가로되 당신의 여종이 당신께 은혜입기를 원하나이다 하고 가서 먹고 얼굴에 다시는 수색이 없으니라."
한나에게는 어떤 고통이 있었습니까? 그녀는 불임증으로 자녀를 둘 수 없었습니다. 고대 세계에서 자녀가 없다는 것은 미래가 없다는 저주와도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불임이었던 한나에게 그보다 더 큰 고통은 남편에게 브닌나라는 다른 여자가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고통 이런 상처를 한나는 기도로 극복했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기도를 했길래 고통을 극복했을까, 이것이 우리의 질문입니다.
심정을 토하는 기도
"한나가 마음이 괴로워서 여호와께 기도하고 통곡하며"(10절).
한나의 기도는 자기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주님 앞에 토해내는 기도였습니다. 통곡으로 주님 앞에 아뢰었습니다. 그러나 한나는 통곡의 기도만 했던 것은 아닙니다. 한나는 속으로도 기도했습니다. 안으로 안으로 토해 내는 기도를 했습니다(13절). 어떻게 기도하느냐를 가지고 시비할 필요는 없습니다. 통성기도를 좋아하는 사람은 침묵기도를 배우기 바랍니다. 침묵기도를 좋아하는 사람은 때로 내 인생에 격렬한 통곡이 필요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배우기 바랍니다.
내 마음에 농축되고 가라앉아 있는 고통, 분노, 절망, 아픔, 눈물, 이런 모든 찌꺼기들을 주 앞에 있는 모습 그대로 투명하게 쏟을 수 있느냐가 중요할 따름입니다. 기도로 치유를 경험하기 위해서는 상처가 드러나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상처는 드러나지 않으면 치유될 수 없습니다. 우리 심정이 카타르시스(정화)를 거치지 않으면 치유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허구의 대상, 상상의 대상을 향해 털어놓을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살아계신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십니까?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시는 하나님입니다. 한나는 그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한나는 얼마나 기도했습니까? 12절을 보십시오. "그가 여호와 앞에 오래 기도하는 동안에." 한나는 오래 기도했습니다. 마음속에 있는 것이 다 주님 앞에 쏟아져 나올 때까지, 그리고 그 마음속에 있는 모든 것이 주님 앞에 다 드러날 때까지 기도했을 것입니다. 이런 기도를 드리고 나면 치료가 시작됩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내 삶을 붙잡는 것을 다시 경험하기 시작합니다. 나는 고통 때문에 하나님 앞에 달려갔습니다. 그렇다면 고통은 나를 하나님 앞으로 나오게 할 수 있는 축복의 통로인 줄 믿습니다.
욕구를 승화시키는 기도
11절에 나온 한나의 기도는 일종의 서원기도입니다.
"서원하여 가로되 만군의 여호와여 만일 주의 여종의 고통을 돌아보시고 나를 생각하시고 주의 여종을 잊지 아니하사 아들을 주시면 내가 그의 평생에 그를 여호와께 드리고 삭도를 그 머리에 대지 아니하겠나이다."
이 한나의 기도가 그저 "하나님, 아들 주십시오"하는 기도였다면 그것은 옛날 우리 조상들이 뒤뜰에 정한수 떠 놓고 드린 기복적 기도와 별다를 것이 없을 것입니다. 자기 필요에만 집중된 기도는 기복적 기도입니다. 그런데 한나의 기도는 그런 기도가 아니었습니다.
기복적 기도, 자기 욕심과 욕망에만 뿌리박고 있는 기도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기도가 아닙니다. 왜 그럴까요? 대부분의 인생에서 경험하는 고통은 사실 욕심과 관련됩니다. 내 욕심이 충족되지 못해서, 내 욕심대로 되지 않아서 좌절하고 고통 받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기도가 욕심의 한 표현이고 그 욕심만 증가시키는 것이라면 하나님이 기뻐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은 그런 기도는 응답될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자기의 필요를 위한 기도는 하지 말아야 할까요? 그것은 아닙니다. 어떤 사람들은 기복적인 기도를 비판한 나머지 아예 "나는 나의 필요를 위해서는 기도하지 않는다"고 하는데 이들은 대부분 기도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또다른 극단으로 나가는 사람들입니다. 나는 여전히 내 필요를 주님 앞에 아뢸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 필요, 내 욕구를 승화시킬 수 있어야 합니다. 다시 말해 내 필요가 하나님의 필요와 연결되어야 합니다. 삶의 목적이 하나님의 영광임을 믿습니까? 우리의 존재 목적이 하나님의 영광임을 믿습니까? 기도의 목적도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기도할 때 그 기도는 하나님의 영광과 연결되어야 합니다. 한나는 그런 기도를 드린 것입니다.
응답을 확신하는 기도
우리가 기도할 때 마음의 밑바탕에 상당한 욕심을 깔아 놓고 기도한다면 기도의 응답을 확신할 수 있을까요? 기도하다 보면 하나님이 이 기도 기뻐하실 것 같다는 감이 잡힙니다. 하나님이 이 기도 응답하실 것 같다. 주님이 틀림없이 이런 기도는 들으신다는 확신이 임하는 것입니다.
한나도 그런 기도를 드렸을 것입니다. 그 증거를 본문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엘리가 대답하여 가로되 평안히 가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너의 기도하여 구한 것을 허락하시기를 원하노라"(17절). 그러자 한나는 "가로되 당신의 여종이 당신께 은혜 입기를 원하나이다 하고 가서 먹고 얼굴에 다시는 수색이 없으니라"(18절)는 반응을 보였습니다. 근심이 다 떠나고 얼굴에 기쁨과 빛이 충만했습니다.
그런데 아들이 주어졌습니까? 임신의 기미가 보였습니다. 전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도 한나는 이미 기뻐했습니다. 내가 기도한 결과가 삶의 장에 임하지 않았어도 하나님이 이 기도를 들으신다고 응답을 확신한 사람은 인생의 발걸음이 이미 승리의 자리에 선 줄로 믿습니다.
참으로 응답받는 기도는 그 응답을 확신하고 드리는 기도입니다. 그래서 사도 야고보는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약1:6)라고 했습니다. 예수께서도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막11:24)고 하셨습니다. 기도 응답을 확신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기도하는 대로 하나님이 응답하실 때도 있지만 그대로 응답되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기도가 응답 안 된 것은 아닙니다. 나보다 나를 더 잘 아시는 하나님은 때때로 내 생각보다 더 좋은 방법으로 응답하기 위해 다르게 응답하실 때도 있습니다. 그것도 응답인 줄 믿기 바랍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어떤 기도든 하나님이 응답하심을 믿기 바랍니다. 때로는 내가 기대한 쪽으로 응답되지 않아도 여전히 전능하신 하나님을 신뢰하고 찬양하기 바랍니다. 나보다 더 선하게 내 필요를 아시고 내 삶을 사용하시는 하나님, 우리가 기도할 때 자신의 주권 가운데 내 삶에 그분이 역사하실 것을 믿기 바랍니다. 그때 하나님은 새로운 일을 시작하십니다. 이런 하나님은 영광스러운 축복의 도구로 사용하실 것입니다.
어떤 고통이 오늘 당신의 마음을 짓누르고 있습니까? 절망합니까? 아니면 기도합니까? 어떻게 기도합니까? 전능하신 여호와, 전지하신 하나님 앞에 나오십시오. 내 심정을 다 그분 앞에 털어놓으십시오. 그분의 도우심을 구하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도록 기도하십시오. 내 욕구를 승화시키는 기도를 하십시오. 하나님의 뜻을 따라 기도할 때 주님의 뜻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 앞에 정말 마음을 열고 기도할 때 한순간 가슴이 뻥 뚫리는 것처럼 주님의 자유와 성령이 임하십니다. 살아계신 하나님 앞에 내 고통의 문제를 아뢰면서 주님의 치유와 응답을 구하십시오.
창조적 기도 생활을 위한 토의와 훈련
1. 오늘 나의 삶에서 견디기 어려운 고통의 문제는 무엇입니까?
2. 한나의 기도의 특성들을 요약해 보십시오.
3. 기도 응답을 우리가 확신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4. 욕구를 승화시키는 기도를 어떻게 할 수 있습니까?
5. 심정을 토하는 기도를 지금 드려 보십시오.
4 솔로몬의 기도
이에 왕이 제사하러 기브온으로 가니 거기는 산당이 큼이라 솔로몬이 그 단에 일천번제를 드렸더니 기브온에서 밤에 여호와께서 솔로몬의 꿈에 나타나시니라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네게 무엇을 줄꼬 너는 구하라 솔로몬이 가로되 주의 종 내 아비 다윗이 성실과 공의와 정직한 마음으로 주와 함께 주의 앞에서 행하므로 주께서 저에게 큰 은혜를 베푸셨고 주께서 또 저를 위하여 이 큰 은혜를 예비하시고 오늘날과 같이 저의 위에 앉을 아들을 저에게 주셨나이다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종으로 종의 아비 다윗을 대신하여 왕이 되게 하셨사오나 종은 작은 아이라 출입할 줄을 알지 못하고 주의 빼신 백성 가운데 있나이다 저희는 큰 백성이라 수효가 많아서 셀 수도 없고 기록할 수도 없사오니 누가 주의 이 많은 백성을 재판할 수 있사오리이까 지혜로운 마음을 종에게 주사 주의 백성을 재판하여 선악을 분별하게 하옵소서 솔로몬이 이것을 구하매 그 말씀이 주의 마음에 맞은지라 이에 하나님이 저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것을 구하도다 자기를 위하여 수도 구하지 아니하며 부도 구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원수의 생명 멸하기도 구하지 아니하고 오직 송사를 듣고 분별하는 지혜를 구하였은즉 내가 네 말대로하여 네게 지혜롭고 총명한 마음을 주노니 너의 전에도 너와 같은 자가 없었거니와 너의 후에도 너와 같은 자가 일어남이 없으리라 내가 또 너의 구하지 아니한 부와 영광도 네게 주노니 네 평생에 열왕 중에 너와 같은 자가 없을 것이라 네가 만일 네 아비 다윗의 행함같이 내 길로 행하며 내 법도와 명령을 지키면 내가 또 네 날을 길게 하리라 솔로몬이 깨어 보니 꿈이더라 이에 예루살렘에 이르러 여호와의 언약궤 앞에 서서 번제와 수은제를 드리고 모든 신복을 의하여 잔치하였더라"
오늘날 우리는 소위 지식의 홍수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 시대를 가리켜서 '정보 고속도로의 시대'라는 표현을 많이 씁니다. 이런 시대에 아직도 가장 절실한 우리들의 필요가 있다면 저는 지혜라고 생각합니다. 지식은 많은데 지혜는 아직도 부족하다는 말입니다. '지혜'란 단어는 지식이란 단어와 공통점이 있지만 같지는 않습니다. 지혜는 단순한 지식이 아닙니다. 지식 이상의 것입니다. 한마디로 지혜를 정의한다면 주어진 정보를 가지고 상황을 잘 판단하는 능력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저는 성경에 나타난 가장 지혜로운 사람의 얘기를 하려고 합니다. 이 사람은 솔로몬입니다.
도대체 솔로몬은 어떤 기도를 했길래 놀랍고도 탁월한 지혜의 삶을 살 수 있었을까요? 본문은 그의 기도의 특성을 세 가지로 보여 줍니다.
지속적인 기도
솔로몬은 결정적인 필요의 순간 혹은 위기의 순간에만 기도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어느 날 솔로몬은 자기가 왕이 되어 이 왕이라는 막중한 국가 최고 수반의 책임을 수행하려면 지혜가 필요하다 생각했을 것이고, 따라서 그는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관심을 갖고자 하는 것은 솔로몬이 왕이 되기 전에도 기도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언제나 기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본문 4절에서 "이에 왕이 제사하러 기브온으로 가니"라고 했습니다. 이 기브온은 예루살렘에서 서북쪽으로 약 10킬로미터 떨어진 고원 지대 언덕입니다. 현대 지명으로는 '엘집'(Eljib)인데 고고학자들이 이 지역에서 장막이라든지 놋제단을 발굴했습니다. 그것들은 솔로몬 시대의 것으로 판명되었습니다. 솔로몬이 여기서 하나님을 예배하고 기도했다는 흔적을 지금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성경은 그가 여기서 1,000번제를 드렸다고 했습니다. 제사를 1,000번 드렸다는 말이 아니라 1,000마리의 제물을 주께 바쳤다는 것입니다. 굉장한 제물들이 주 앞에 바쳐졌습니다. 이 정도의 제물을 소화해 내는 제사를 드리려면 상당히 여러 날이 필요합니다. 솔로몬은 여러 날 계속적으로 예배하고 기도했던 것입니다.
그러데 제가 강조하려는 더 중요한 것은 3절에 있습니다. "솔로몬이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부친 다윗의 법도를 행하되 오히려 산당에서 제사하며 분향하더라" 솔로몬이 "산당에서 제사하며 분향했다"고 했습니다. 이것을 정확히 옮기면 '계속해서 분향한다', '계속해서 예배한다', '계속해서 기도한다'는 뜻인데 이렇게 기도할 수 있었던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3절에서 첫째로 강조된 것이 솔로몬이 여호와를 사랑했다는 사실입니다. 솔로몬은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기도한 것입니다. 또한 솔로몬은 계속 기도했을 뿐 아니라 그 부친 다윗의 법도를 행했습니다. 솔로몬의 아버지 다윗이 아들에게 남긴 가장 값진 유산이 무엇이었습니까? 다윗의 삶에서 가장 두드러진 특성은 무엇입니까? 시편에서 다윗이 쓴 시들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 시들은 기도입니다. 다윗은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 또한 그 시들은 찬양입니다. 다윗은 찬양의 사람이었습니다. 다윗이 기도와 찬양의 사람이었던 것처럼 그 아들 솔로몬도 기도와 찬양을 즐겨했던 모습을 여기서 볼 수 있습니다. 부전자전(父傳子傳)입니다.
지혜가 필요하십니까? 기도하십시오. 부족한 제 경험입니다만 열심히 진지하게 기도하다 떠오른 아이디어나 생각은 거의 잘못되는 일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즉흥적인 생각이나 아이디어는 실패하기 일쑤였습니다. 솔로몬의 엄청나고 탁월한 삶, 그 시대가 흠모했고 그 시대의 모든 열방 지도자들이 흠모했던 놀라운 지혜, 그것은 그의 기도 생활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그는 지속적으로 기도했습니다. 지혜로운 삶을 구하십니까? 지속적으로 기도하기 바랍니다.
겸손한 기도
솔로몬의 기도 생활은 겸허했습니다. 사람들이 왜 기도하지 않을까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가장 중요한 점은 겸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왜 기도가 부족할까요? 겸손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기도는 겸허한 사람들의 몫이라 할 수 있습니다. 자기 연약과 자기 무지를 모르기 때문에 사람들은 기도의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 것입니다. 솔로몬의 고백을 들어 보십시오. 그가 얼마나 겸허한 사람이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7절). 솔로몬은 자기가 올바로 처신할 줄 모르는 사람이니 도와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자기 무지를 아는 사람, 자기 한계와 자기 연약을 아는 사람, 이런 사람들은 엎드려 기도하게 되며 이런 사람들이 하나님 보시기에 지혜로운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가정에서, 직장에서, 교회에서 삶의 장(場)에서 지혜로운 사람으로 살아가기 원합니까? 자신을 낮추십시오. 자기 부족, 자기 연약을 아십시오, 자기 무지를 직시하십시오, 엎드려 기도하며 주 앞에 도움을 구하기 바랍니다. 겸손한 기도의 사람이 되기 바랍니다.
이타적 기도
솔로몬의 기도는 이타적이었습니다. 그 반대는 이기적 기도입니다(5절). 그는 단순히 자기 이익을 위한 기도는 하지 않았습니다.
불행하게도 오늘날 소위 이 땅의 그리스도인들의 기도 생활조차도 '자기'(自己)라는 영역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이방 종교처럼 기복적 종교로 변질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자기 자신을 위해 기도하지 말라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자기 자신을 위해 기도해도 그 기도의 차원이 달라야 합니다. 솔로몬은 자기에게 주어진 사명을 수행하고 하나님이 맡기신 백성을 잘 섬기기 위한 지혜를 구했습니다. 결국 하나님은 지혜를 주셨습니다. 그리하여 그 유명한 솔로몬의 재판 사건에서 그는 탁월한 지혜를 발휘했습니다(왕상3:1-28).
하나님의 응답
솔로몬의 기도에 하나님이 어떻게 응답하십니까? 13절을 보십시오. 하나님께서는 부와 영광까지도 주셨습니다. 또 "네가 만일 네 아비 다윗의 행함같이 내 길로 행하며 내 법도와 명령을 지키면 내가 또 네 날을 길게 하리라"(14절)고 하셨습니다. 장수와 건강도 주신 것입니다. 구하지 않은 삶의 일상적 필요도 아시고 다 채워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필요에 무관심한 분이 아닙니다. 그러나 구할 것을 먼저 구해야 합니다. 바로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것입니다(마6:33).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한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 나라의 핵심은 하나님 나라의 백성입니다.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섬기는 일입니다.
한국 기독교 신앙의 결정적으로 부족한 취약점은 수평적 차원입니다. 이웃들을 섬기는 것을 잘하지 못합니다. 이웃들을 섬기고 돌아보고 인간 관계를 잘하는 것은 수직적 차원인 하나님과의 관계가 무관하다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사람하신 사람들을 나도 사랑하고, 하나님이 관심을 가지신 사람들에게 나도 관심을 갖고, 연약한 사람들을 돌보고, 복음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그들을 세워 주는 것이 하나님의 일입니다.
하나님을 제대로 섬기면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기 원합니까? 하나님이 맡겨 주신 사람들을 잘 섬기기 원합니까? 그러나 나는 내 연약성을 압니다. 내 한계를 압니다. 내 부족함을 압니다. 그렇다면 내 부족함과 연약성과 한계를 가지고 엎드려 주님의 지혜를 구하는 사람들이 되십시오. 주님 주신 지혜로 멋지게 이웃들을 섬겨 가며 더불어 함께 아름다운 삶을 누리기를 바랍니다.
창조적 기도 생활을 위한 토의와 훈련
1. 지식과 지혜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2. 겸손과 기도는 어떤 상관 관계가 있습니까?
3. 솔로몬의 기도의 특성을 정리해 보십시오.
4. 나의 기도 생활은 이타적인 것과 이기적인 것 사이에 어디로 기울어져 있는지 나누어 보십시오.
5. 이타적인 기도만을 앞으로 10분 동안만 드려 보십시오.
5 다윗의 기도
역대상 29장 10-17절
"다윗이 온 회중 앞에서 여호와를 송축하여 가로되 우리 조상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는 영원히 송축을 받으시옵소서 여호와여 광대하심과 권능과 영광과 이김과 위엄이 다 주께 속하였사오니 천지에 있는 것이 다 주의 것이로소이다 여호와여 주권도 주께 속하였사오니 주는 높으사 만유의 머리심이니이다 부(富)와 귀(貴)가 주께로 말미암고 또 주는 만유의 주재가 되사 손에 권세와 능력이 있사오니 모든 자들 크게 하심과 강하게 하심이 주의 손에 있나이다 우리 하나님이여 이제 우리가 주께 감사하오며 주의 영화로운 이름을 찬양하나이다 나와 나의 백성이 무엇이관대 이처럼 즐거운 마음으로 드릴 힘이 있었나이까 모든 것이 주께로 말미암았사오니 우리가 주의 손에서 받은 것으로 주께 드렸을 뿐이니이다 주 앞에서는 우리가 우리 열조와 다름이 없이 나그네와 우거한 자라 세상에 있는 날이 그림자 같아서 머무름이 없나이다 우리 하나님 여호와여 우리가 주의 거룩한 이름을 위하여 전(殿)을 건축하려고 미리 저축한 이 모든 물건이 다 주의 손에서 왔사오니 다 주의 것이니이다 나의 하나님이여 주께서 마음을 감찰하시고 정직을 기뻐하시는 줄 내가 아나이다 내가 정직한 마음으로 이 모든 것을 즐거이 드렸사오며 이제 내가 또 여기 있는 주의 백성이 주께 즐거이 드리는 것을 보오니 심히 기쁘도소이다."
고대 중국 철학자 한 사람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사람이 고난을 당하면 소인 일수록 현재를 생각하고 대인일수록 장래를 생각한다" 인간은 고통에 직면하면 본능적으로 고통 그 자체에 빠져들게 됩니다. 그래서 어떻게 고통을 면할 수 있을까, 어떻게 고통을 피할 수 있을까 일차적 관심의 초점을 둡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 생의 궁극적 목표나 방향을 잃어버릴 수 있습니다. 생각하는 사람은 고통이 올수록 고통 너머에 있는 생의 궁극적 목표를 생각합니다.
오래전 영국에서 신앙의 자유가 제한되던 때 국가의 허가를 받지 않고 설교했다는 이유로 감옥에 수감된 젊은이가 있었습니다. 무려 12년 동안의 감옥 생활 중에 아내 메리가 죽었습니다. 소경이었기 때문에 거지로 살던 아내가 죽자 나머지 세 자녀도 생존을 위해 싸워야 하는 고아의 처지가 되었습니다. 이런 비참한 상황 속에서도 그는 감옥에서 어느날 이런 기도를 드렸습니다.
"하나님, 너무너무 고통스럽습니다. 그러나 주를 위해서 제가 아직도 할 일이 있을까요? 만약 제가 해야 할 그 일만 볼 수 있다면 저는 절망하지 않겠습니다." 이때 주께서 마음속에 자꾸만 이런 감동을 주십니다. "너는 글을 써라. 나는 너에게 글 쓸 수 있는 달란트를 주었다." 기도하면서 주 앞에 엎드린 그에게 환상이 보였습니다. 주님의 나라를 향해 걸어가는 한 사람의 모습이 보였습니다. 이 사람이 바로 그 유명한 존 번연이며 이 사람이 쓴 책이 「천로역정」입니다. 다윗 왕의 말년도 결코 순탄하지만은 않았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주 앞에 엎드렸습니다. 그리고 존 번연과 똑같은 기도를 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마음속에 성전 건축에 대한 열망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미 다윗 왕을 통해서는 성전을 짓지 않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아들 솔로몬을 통해 성전이 세워진다면 그 성전을 통해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믿음을 통해서 이스라엘은 복된 미래를 개척해 나가리라는 소망 때문에 그는 성전 건축 준비 운동을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이 운동을 시작한 그때가 개인적으로나 민족적으로나 아주 어려운 시기였습니다. 14절 첫부분에서 "환난 중에 여호와의 전을 위하여"라고 했습니다. 아주 어려운 때에,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개인적으로나 어려운 시기에 다윗은 하나님의 전을 건축하기 위한 준비를 시작했습니다. 그때 먼저 그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이렇게 호소했습니다. "금, 은 그릇을 만들며 공장(工匠)의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쓰게 하였노니 오늘날 누가 즐거이 손에 채워 여호와께 드리겠느냐"(대상29:5). 다음 9절을 보십시오."백성이 자기의 즐거이 드림으로 기뻐하였으니 곧 저희가 성심으로 여호와께 즐거이 드림이며 다윗 왕도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하니라."
이 건축 사역이 시작되는 그리고 준비가 계속되는 과정을 성경이 묘사하면서 계속 강조하는 단어 하나가 있습니다. 바로 "즐겁게 드렸다"입니다. 다윗은 즐겁게 드리도록 호소했고 백성은 즐겁게 응답해서 즐겁게 헌신했습니다. 부담스러워하지 않고 즐거운 마음으로 드렸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즐겁게 주 앞에 바치는 백성들을 바라보면서 다윗은 감격을 이기지 못해 주님을 행해 감사 기도를 드렸습니다. 환난 중에도 건축운동을 시작하면서 주 앞에 기쁨으로 드렸던 백성들, 그들을 보며 다윗이 하나님 앞에 드린 감사 기도문이 바로 본문의 내용입니다.
환난 중에도 즐겁게 헌신할 수 있었던 이유
첫째로, 모든 소유가 하나님의 소유임을 철저히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내 삶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 또 내 소유에 대한 하나님의 소유권을 겸손히 인정하면서 이제 동일한 믿음과 동일한 신앙고백으로 환난 중에 주께 드린 백성들을 생각하며 이어지는 다윗의 감사기도를 들어 보십시오(14절).
둘째로, 존재의 순간성을 인식했기 때문입니다. 잠깐 있다가 없어지는 인생의 본질을 의식하게 될 때 두가지 반응이 나올 수 있습니다. 가장 보편적인 반응은 이 허무라고 짤막한 생애에 무엇을 남길 것인가 생각하는 것입니다.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무슨 방도로든 자기 이름을 남기기 위해 몸부림 칩니다. 그만큼 인간에게서 자기 존재를 확인하고 남기려는 본능적인 욕구는 대단합니다. 그러나 다윗은 본문에서 어떤 반응을 보입니까? 그림자같은 인생, 잠시 있다 없어질 인생, 그 인생의 남은 날을 어떻게 쓰기 원한다고 고백합니까? "우리 하나님 여호와여 우리가 주의 거룩한 이름을 위하여 전을 건축하려고 미리 저축한 이 모든 물건이 다 주의 손에서 왔사오니 다 주의 것이니이다"(16절) 그는 자기 이름을 남기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이름을 위하여 자기 인생이 쓰여지기를 원했습니다. 내 삶의 주인이 하나님이심을 참으로 믿는다면 참으로 고백한다면 주인 되신 하나님, 그 하나님의 이름을 위해 사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삶의 이유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나님의 이름을 위하여"말입니다.
셋째로, 가치 있는 꿈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성전 건축에서 중요한 것은 건물이 아닙니다. 건물은 별로 의미가 없습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임재가 없다면 그리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들이 없다면 건물은 아무런 의미를 지니지 못합니다. 이 건물 안에서 이루어질 일들이 얼마나 가치 있는 것이냐가 중요합니다.
다윗은 어디에 더 큰 관심이 있었을까요? 성전 건축에 대한 다윗의 진정한 동기를 발견하기 위해 역대상 22장을 볼 필요가 있습니다. 아들 솔로몬을 향한 유언 같은 말입니다. "내 아들아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하시기를 원하며 네가 형통하여 여호와께서 네게 대하여 말씀하신 대로 여호와의 전을 건축하며 여호와께서 네게 지혜와 총명을 주사 너로 이스라엘을 다스리게 하시고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율법을 지키게 하시기를 더욱 원하노라"(11,12절).
여기서 중요한 구절이 "더욱 원하노라"입니다. 다윗이 더욱 원하는 것은 건물 자체가 아니라 건축된 성전을 통해 하나님을 예배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그 말씀대로 살아가는 일이었습니다. 그 안에서 이루어질 일의 가치가 다윗의 마음속에 감격을 주었던 것입니다. 다윗은 그 백성들이 성전을 볼 때마다 하나님을 생각하고 돌아오며 회개가 이루어지고 구원이 이루어질 수 있기를 원했습니다. 또 19절도 보십시오. "또 내 아들 솔로몬에게 정성된 마음을 주사 주의 계명과 법도와 율례를 지켜." 다윗의 궁즉적 관심은 성전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말씀을 사랑하며 말씀 가운데 견고하게 세워지는 그 백성들의 변혁이었습니다. 다윗이 마음속에 기대하던 바가 그랬기에 이 가치있는 꿈, 가치 있는 비전을 위해 백성들은 환난 가운데도 그들의 생애 속에 하나님이 주신 축복을 즐겁게 주님 앞에 드릴 수 있었습니다. 모든 위대한 꿈, 위대한 비전을 성취한 배후에는 희생이 있었습니다. 대가(對價)의 지불 없이 비전이 성취된 경우는 역사 가운데 그 사례를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모든 아름다운 것, 모든 위대한 것, 모든 가치 있는 것, 모든 보람있는 사역의 배후에는 눈물과 희생과 땀이 있었던 것입니다.
살아있는 교회는 요구하는 것이 있습니다. 성장하는 교회는 요구하는 것이 있습니다. 꿈이 있는 교회는 요구하는 것이 있습니다. 하지만 성장을 중단해 버리고 꿈을 잃어버린 교회는 더 이상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습니다. 현상유지만 하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비전을 가지고 꿈을 가지고 살아 있는 교회는 요구합니다. 저는 감히 위대한 내일의 비전을 위해서, 이 땅의 역사를 바꾸는 하나님 나라와 복음의 위대한 도전을 위해서, 다윗 시대 하나님의 백성들이 환난 중에 즐거움과 기쁨으로 주 앞에 자기들의 소유를 드릴 때 했던 다윗의 고백을 본받고 싶습니다(대상29:16,17).
짧은 인생길 우리가 이 땅에 무엇을 남기고 갈 수 있겠습니까? 덧없는 욕심을 버리고, 하나님 나라와 그 비전의 실현을 위해 즐겁고 기쁘게 자신을 바치는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창조적 기도 생활을 위한 토의와 훈련
1. 다윗이 환난 중에서도 성전 건축 준비에 즐겁게 헌신할 수 있었던 이유들은 무엇입니까?
2. 본문의 다윗의 기도에서 가장 중요하게 강조된 사상은 무엇이며 그것이 강된 까닭은 무엇입니까?
3. 다윗의 기도와 우리들의 일상적 기도의 차이점은 무엇입니까?
4. 본문의 다윗의 기도문에서 특히 자신에게 감동되었던 내용을 나누어 보십시오.
6 이사야의 기도
이사야서 6장 1-8절
"웃시야 왕의 죽던 해에 내가 본즉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는데 그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하였고 스랍들은 모셔 섰는데 각기 여섯 날개가 있어 그 둘로는 그 얼굴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그 발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날며 서로 창화(唱和)하여 가로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이같이 창화하는 자의 소리로 인하여 문지방의 터가 요동하며 집에 연기가 충만한지라 그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때에 그 스랍의 하나가 화저로 단에서 취한바 핀 숯을 손에 가지고 내게로 날아와서 그것을 내 입에 대며 가로되 보라 이것이 네 입에 닿았으니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 하더라 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은즉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그때에 내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사실 인생을 살아가는 데 가장 중요한 삶의 명제가 있다면 "무엇을 위하여 살 것인가"입니다. 이것은 '사명'의 문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좀더 기독교적 표현을 빌리자면 '소명'(misson 혹은 calling)의 문제입니다.
북구라파의 기독교 철학자 키에르케고르가 스물두 살 때 자기 일기장?이런 글을 남겼습니다. "온천하가 무너져도 내가 붙들고 놓칠 수 없는 이것을 발견해야만 한다. 이것을 위하여 살고 이것을 위하여 죽을 수 있는 나의 사명 말이다."
스위스의 사상가 칼 힐티도 "내 인생 최고의 날이 있다면 나의 사명을 자각하는 날일 것이다. 하나님께서 나를 이 목적을 위해 쓰시겠다고 작정하신 그것을 깨닫는 일 말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어떻게 이 사명을 발견할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구약성경을 읽어 보면 혹은 교회 역사를 보면 하나님께서 귀하게 쓰신 사람들은 거의 예외없이 기도 중에 소명을 받았습니다. 본문에 나타난 이사야의 경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내일의 국가 운명을 전혀 예측할 수 없던 불확실의 시대에 이사야는 조국의 운명을 짊어지고 성전에 들어가서 기도하다가 그가 평생 해야 할 사명을 발견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그를 선지자로 부르시는 소명을 깨달았습니다. 바로 그 장면이 본문의 내용입니다. 그 날 자기 인생의 목적과 사명, 곧 그 소명을 발견하도록 이끈 이사야의 기도는 어떤 기도였을까요? 그 이사야의 기도를 통해 우리도 평생의 소명을 발견하기 위한 기도를 어떻게 드려야 하는지 깨달을 수 있습니다. 나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은 무엇입니까?? 그것을 위해 살고 그것을 위해 죽을 수 있는 소명을 발견하기 위해 우리는 어떤 기도를 드려야 할까요?
참회의 기도
사람이 일생을 통해 경험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사건 두 가지는 구원의 사건과 소명의 사건입니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질문이 두 가지 있는데 이 질문에 확고하고 명확한 대답을 할 수 없으면 아직 인생을 제대로 살고 있지 못한 것입니다. 구원받았습니까? 이것은 성경의 가장 중요한 질문입니다. 당신의 사명은 무엇입니까? 이 두 질문에 대한 대답을 경험하는, 그 중요한 사건이 바로 구원의 사건, 소명의 사건입니다. 구원받는 사람이나 소명 받는 사람이나 어떤 특별한 기도를 하게 되는데 그것이 참회의 기도, 용서의 기도입니다. 구원받을 때 "하나님 저를 용서하시고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 주십시오"라고 반드시 기도하게 됩니다. 이 기도를 하지 않는 사람은 구원받지 못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소명받을 때도 그런 참회의 기도를 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그런 기도를 하게 하시는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로, 우리가 구원을 받거나 소명을 받는 것은 하나님을 만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사야는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눈의 초점이 맞추어지는 순간 그는 다시 자신을 발견하고는 거꾸러지면서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하나님, 저는 부정한 사람입니다. 입술이 부정하고 마음이 부정합니다."
이것은 거룩한 하나님 앞에 섰을 때 상대적으로 거룩하지 못한 나를 발견하는 체험입니다. 마치 투명하고 깨끗한 거울 앞에 서면 자신을 더 잘 볼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말입니다. 거울 앞에서도 그런데 하물며 완전하신 하나님, 절대자이신 하나님 앞에 서는 체험은 어떨까요? 하나님 앞에 서는 사람마다 자신의 추한 모습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둘째로,하나님께서는 어떤 사람을 구원하거나 소명을 주실 때 언제나 거룩함을 요구하시기 때문입니다. 거룩해야 하나님이 쓰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쓰시지 못할 사람은 없지만 그러나 단 한 가지 그릇이 더럽혀져 있으면 쓰실 수 없습니다. 깨끗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어떤 사람을 쓰시기 전에 하나님 자신의 거룩을 보여 주심으로써 상대적으로 자신의 거룩하지 못한 모습을 보게 하시고 하나님의 은혜로 깨끗함을 얻도록 도와주십니다. 이것이 바로 이사야의 체험입니다. 이제 용서의 선언 직후 어떤 일이 전개됩니까? 하나님이 이사야를 부르십니다. 깨끗함을 받은 자, 쓸 수 있는 자로 준비된 것입니다. 소명 받을 준비가 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내 인생의 소명을 발견하기 원합니까? "하나님이 나를 위해 무엇을 준비하셨을까"하고 인생의 소명과 사명을 발견하기 원하는 사람은 먼저 자신이 하나님이 쓰시기에 얼마나 형편없는 자리에 있는가 깨닫도록 하나님 앞에 서십시오. 거룩한 절대자 앞에 서십시오. 당신의 하나님을 보십시오, 그 하나님의 눈으로 자신을 보십시오, 그리고 참회의 기도를 드리십시오. 그 기도 속에 당신은 다시 태어날 것입니다. 그것이 소명의 시작입니다.
순종의 기도
로마 교회를 향해 바울이 쓴 편지이자 위대한 책인 로마서 1장 1절에서 바울은 자기 자신을 로마 교회 앞에 이렇게 소개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바울이 자신만 부르심 받았다고 고백하고 있을까요? 6절을 보십시오. "너희도 그들 중에 있어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입은 자니라." 하나님께서는 성직자만 부르시는 것이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다 부르십니다. 그러므로 나름대로 각자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통해 성취하시고자 하는 어떤 일이 있는 것입니다.
죄사함 받고 주님 앞에 깨끗함 받으면 하나님은 그 사람을 즉각적으로 쓰실 준비를 하십니다. 죄사함을 체험한 이사야를 향해 하나님은 즉각적으로 다음에 어떻게 부르시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부르심의 음성을 들어보십시오. 본문 6장 8절입니다. "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은즉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이 어둡고 암울한 시대를 향해 누가 우리를 대신하여 가서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의 위대하고 영광스러운 메시지를 전할 것이냐는 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자마자 이사야는 어떻게 대답합니까?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하나님은 순종하는 자를 쓰십니다. 하나님이 쓰시지 못할 사람은 없습니다. 준비만 되어 있으면 크든 작든 나름대로 쓰임을 받습니다. 하나님은 소명을 준비하시고 그 사람을 사용할 위대한 계획을 가지고 그 삶의 장(場)에 다가오십니다.
중보의 기도
'선교사'라는 말의 영어 단어 'missionary'는 '파송받았다'는 뜻의 라틴어 'mitto'에서 비롯된 말입니다. '사도'(使徒)라는 말도 '파송받았다'는 뜻의 단어입니다. 모든 사람이 다 해외 선교사가 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다 선교사적 삶을 살아야 합니다. 내가 살고 있는 삶의 터전에서 주변의 이웃들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한평생 주변의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겠다 하면 그것이 그 사람의 사명입니다. 내 사명을 발견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 순종하는 그 순간부터 이미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았다는 것을 확신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그런데 부름 받은 사람에게 제일 중요한 것은 나를 어디로 보내시는가, 즉 누구에게로 파송받았으며 할 일은 무엇인가를 명확히 깨닫는 것입니다. 주로 하나님의 소명은 막연히 어떤 단체와 관련된 것이 아니라 사람을 섬기는 일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사람을 섬기도록 우리를 부르시고 보내십니다. 그렇다면 내가 파송받는 대상인 그 사람들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사야를 통해 말씀을 대언하게 하실 대상이 누구인가를 그에게 즉각적으로 보여 주셨습니다. 본문 6장 9,10절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대상이 어떠한가를 가르쳐 주시려 했습니다. "내가 너를 보내는 그곳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인 줄 아느냐? 그들은 눈이 감긴 사람들이다. 그들은 귀가 닫힌 사람들이다. 귀가 닫히고 눈먼 사람들에게 가서 너는 외쳐야 한다." 얼마나 답답한 일입니까? 눈이 감긴 사람, 귀가 안 들리는 사람을 향해 외쳐야 한다니 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입니까? 그래서 이 말씀을 듣자마자 이사야는 하나님께 질문했습니다. 기도 속에 하는 질문입니다. "내가 가로되 주여 어느 때까지니이까"(11절). 언제까지 그들의 영적 상태가 눈먼 상태로, 무관심의 상태로, 말씀을 전해도 듣지 못하는 상태로 있어야만 하느냐는 것입니다. 이사야는 벌써 중보기도를 시작한 것입니다. 자기가 파송받은 대상들을 마음에 품고 안타까운 마음으로 기도했으니 말입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이사야를 위로하셨습니다. 어떻게 위로하십니까? "그 중에 십분의 일이 오히려 남아 있을지라도 이것도 키운바 될 것이나 밤나무, 상수리나무가 베임을 당하여도 그 그루터기는 남아 있는 것같이 거룩한 씨가 이 땅의 그루터기니라"(13절). 이사야는 이 위로를 받았습니다. 이사야는 중보기도를 하며 벌써 자기가 말씀 전해야 할 그 대상들을 가슴에 품기 시작했습니다. 기도는 사역의 준비가 아니라 사역의 시작입니다. 그가 파송받은 백성들을 위해 기도하기 시작하는 순간 영광스러운 사역은 이미 시작된 것입니다. 기도는 사역의 준비가 아니라 사역의 시작입니다. 기도로 하나님은 세상을 변화시키기 원하십니다. 기도로 내 이웃들을 섬기기 원하십니다. 하나님이 맡겨주신 사람들을 가슴에 품고 내가 일해야 할 현장을 가슴에 품을 때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새 역사의 날은 열리기 시작합니다.
창조적 기도 생활을 위한 토의와 훈련
1. 이사야의 기도의 특성은 무엇입니까?
2. 각자의 삶의 소명을 무엇으로 느끼고 있는지 토론해 보십시오.
3. 소명을 감당할 때 중보기도가 왜 중요한지 토론해 보십시오.
4. 소명의 전제가 되는 참회의 기도시간을 집중적으로 가집시다.
7 하박국의 기도
하박국서 3장 1-3절, 16-19절
"시기오놋에 맞춘 바 선지자 하박국의 기도라 여호와여 내가 주께 대한 소문을 듣고 놀랐나이다 여호와여 주는 주의 일을 이 수년 내에 부흥케 하옵소서 이 수년 내에 나타내시옵소서 진노 중에라도 긍휼을 잊지 마옵소서 하나님이 데만에서부터 오시며 거룩한 자가 바란 산에서부터 오시도다(셀라) 그 영광이 하늘을 덮었고 그 찬송이 세계에 가득하도다 내가 들었으므로 내 창자가 흔들렸고 그 목소리로 인하여 내 입술이 떨렸도다 무리가 우리를 치러 올라오는 환난 날을 내가 기다리므로 내 뼈에 썩이는 것이 들어왔으며 내 몸은 내 처소에서 떨리는도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로 나의 높은 곳에 다니게 하시리로다 이 노래는 영장을 위하여 내 수금에 맞춘 것이니라."
자기를 둘러싼 상황이 어려워져만 갈 때, 우리에게는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질문이 중요하게 다가옵니다. 집안이 기울어 갈 때, 사업이 어려워질 때, 직장 생활이 불안할 때, 내 앞길이 매우 불투명하고 불안하게 보일 때, 그때 할 수 있는 가장 쉬운 일은 무엇일까요? 아마도 불평하고 원망하는 일일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으로서는 지극히 삼가야 할 일입니다.
본문은 하박국이라는 사람이 하나님께 드렸던 기도 내용입니다. 하박국이라는 말은 '포옹하다'라는 뜻입니다. 이 사람은 자기 시대의 고통을 끌어안았던 사람입니다. 그는 절망하기보다 기도했습니다. 원망하기보다 기도했습니다.
우리를 둘러싼 현실이 어두워질 때 드려야 할 기도
첫째로, 진노의 하나님께 긍휼을 구해야 합니다. 한 현대 신학자는 현대인들의 신관이 매우 주관적이고 선택적이라고 지적했습니다. 현대인들은 사랑의 하나님을 즐겨 이야기합니다. 평화의 하나님, 은혜의 하나님은 우리가 좋아하는 하나님에 관한 토론이 주제요 설교의 주제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심판의 하나님, 진노의 하나님이라는 주제에 관해서는 별로 듣고 싶어하지 않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의 진노를 계속적으로 언급합니다. 구약성경에서는 하나님의 진노라는 단어가 무려 375번이나 등장합니다.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에 대한 속성은 크게 두 가지로 성경에 강조되어 있는데 의로우시고 거룩하십니다. 의로우시기 때문에 불의한 모든 현실, 불의한 모든 대상을 향해 진노하십니다. 또한 거룩하시기 때문에 거룩하지 못한 것, 추하고 죄악된 모든 것을 향해 진노하십니다. 북방 이스라엘과 남방 유다로 이스라엘 민족이 분단되었을 때 갑자기 강대국으로 부상한 바벨로니아가 유다의 심장을 겨누기 시작하자 유다 왕국의 국가적 운명은 한순간에 기울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당황하면서도 기도하는 사람은 적었습니다. 이때 하박국 선지자는 이런 운명을 끌어안고 주님 앞에 나아가 성전에 엎드려 기도하다가 하나님의 계시를 접했습니다. 1장에서 하박국은 자조적인 원망을 했습니다. 그러나 3장에서 하박국의 기도는 질적으로 달라졌습니다. "하나님, 내가 깊이 생각하고 깊이 기도해 보니까 이 민족이 매맞고 바벨로니아의 짓밟힘을 받는 것이 어쩌면 당연한 일일 수 있겠습니다. 하나님, 그동안 많이 참으셨습니다. 이 민족의 어둠을 보시면서, 이 민족의 부도덕을 보시면서, 이 어려운 현실을 보시면서도 잘도 참으셨습니다. 하나님, 이제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대해서 저는 이의가 없습니다." 하박국은 이런 결론에 도달했으면서도 주님 앞에 엎드려 울며 호소했습니다. "여호와여 내가 주께 대한 소문을 듣고 놀랐나이다 여호와여 주는 주의 일을 이 수년 내에 부흥케 하옵소서 이 수년내에 나타내시옵소서 진노 중에라도 긍휼을 잊지 마옵소서." "깊이 생각하고 기도하면서 보니까 하나님이 옳습니다. 나는 그 부분에 대해서는 항의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하는 자세가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둘째로,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즐거워해야 합니다.
점점 더 깊이 기도하면서 하박국은 그 민족 앞에 다가오고 있는 두려운 현실의 정체를 직면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그의 눈은 하나님을 향하기 시작했습니다. 여기에 두 번째 시선이 있습니다.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 하박국서를 추적하면서 연구하던 우리 시대의 위대한 설교가 마틴 로이드 존스는 하박국서 전체의 주제를 설정하는 책 이름을 지으면서말하기를 "두려움에서 믿음으로"라고 했습니다. 하박국은 마침내 두려움을 넘어섰습니다. 두려움을 대신해 자기 마음속에 임한 하나님의 놀라우신 기쁨과 즐거움을 경험하기 시작했습니다.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던 하나님, 그리고 주실 수 있는 하나님이 아직도 나와 함께 계심을 그는 묵상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만 함께하신다면 나는 실망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의 구원되신 하나님, 역사의 주인이신 하나님, 내 삶의 주인이신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면 나는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겠습니다. 내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겠습니다. 이것이 하박국의 고백입니다.
셋째로, 희망의 하나님을 신뢰해야 합니다.
고통 속에서 기도하면 하나님은 반드시 버틸 수 있는 힘을 주십니다(19절). 하박국서는 항변의 기도로 시작되었다가 하프로 드리는 노래로 끝납니다. 참된 기도를 드리면 마지막에 찬양이 터져 나와야 합니다. 그것이 정상적인 기도입니다. 어떤 성경학자가 이 하박국서의 문헌학적 구조를 연구하면서 1장의 분위기가 마치 골짜기 같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3장은 언덕의 정상입니다. 그 정상에서 찬양하는 모습입니다.
하박국의 기도 중에 하나님이 다가오사 그분의 임재를 경험하게 하셨습니다. 주님의 위로와 사랑을 느꼈습니다. 2장 4절은 이 하박국서 전체의 주제가 되는 중요한 구절입니다.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의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니라 그러나 의인은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오늘 내 인생이 깊고 어두운 골짜기를 지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집니까? 끝날 것 같지 않은 깊은 골짜기, 그러나 기도하면 이 골짜기에 하나님의 기쁨과 하나님의 평강이 임합니다.
여기 이 골짜기에 내리시는 하나님의 성령이 계십니다. 주의 임재를 느껴 보십시오. 그 하나님을 신뢰하고 저 높은 언덕을 향해 계속 오르십시오. 마침내 내 발을 저 높은 곳에 세우실 하나님을 바라보십시오. 이 고통은 마냥 계속되지 않습니다. 곧 끝날 것입니다.
창조적 기도 생활을 위한 토의와 훈련
1. "진노 중에서라도 긍휼을 잊지 마옵소서"라는 하박국의 기도의 의미를 풀어서 설명해 보십시오.
2. 찬양으로 마무리되는 기도회를 한 번 해봅시다.
8 바울의 기도
에베소서 3장 14-21절
"이러하므로 내가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에게 이름을 주신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비노니 그 영광의 풍성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옵시며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우리의 온갖 구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에게 교회 안에서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이 대대로 영원 무궁하기를 원하노라 아멘"
바울 사도는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 안에서의 부요를 회복하는 놀라운 삶을 사는 것을 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위해 기도하고 편지를 쓴 것이 에베소서입니다. 에베소서를 보면 바울이 이 서신을 기록하게 된 동기를 설명하는 매우 중요한 단어인 "풍성"과 "충만"을 계속 접하게 됩니다. "풍성"이 양적인 강조라면 "충만"은 좀더 질적인 강조라 할 수 있습니다. 풍성하고도 충만한 삶, 그 삶의 회복을 위해 바울 사도는 에베소 교인들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속사람이 능력으로 강건하게 되기를 구함
"그 영광의 풍성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옵시며"(16절). 속사람이 강건해져야 합니다. 그런데 현대는 반대로 겉사람을 강조하는 시대입니다. 육체를 강조하는 시대입니다.
요즘 서점에 가면 베스트셀러 가운데 「뇌내혁명」(腦內革命)이라는 책이 잘 팔립니다. 일본의 하루야마 시게오라는 사람이 쓴 책인데 이 사람이 이 책을 쓰기 30년 전에 쓴 책을 보면, 그는 그때도 건강에 관심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건강의 6대 조건을 제시합니다. 첫째는 피곤하지 않게 사는 것, 둘째는 적절한 잠, 셋째는 식욕 절제, 넷째는 화내지 않는 것, 다섯째는 계속적인 두뇌의 사용, 여섯째는 운동입니다. 그리고 각각의 비중을 10-20%로 적절하게 배정했습니다. 그런데 30년 후 이 사람이 「뇌내혁명」을 쓰면서 정말 인간에게서 필요한 것 여섯 가지에 한 가지를 더 첨가했습니다. 그것은 마음의 평안입니다. 그리고 이 사람은 마음의 평화가 건강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55%로 보았습니다. 다른 모든 것보다 중요한 것은 마음의 평화라는 말입니다. 속사람의 부요는 중요합니다. 우리 영혼이 부요하지 못하다면 실제로 건강한 삶은 이루어질 수 없는 것입니다. 내 마음의 상태는 어떻습니까?
그리스도가 우리의 마음을 주장하시기를 구함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마음을 온전히 지배하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그것이 17절 말씀입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 여기서 "게신다"는 단어는 존재만 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영원히 거한다', '온전히 전체를 다 소유한다', '주인이 되어 거한다'는 의미입니다. 주님은 우리 안에 오실 때 손님으로 오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그분은 내 마음의 모든 영역, 내 생각의 모든 영역들을 온전히 지배하는 주인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기를 구함
18절에서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라고 할 때 여기서 "안다"라는 말은 예수님을 단순히 지식적으로만 안다는 뜻이 아닙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주님이 나를 사랑하신 것을 압니다. 그러나 그 피상적인 앎, 표면적인 지식 그것만 가지고는 만족하지 못합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의 사랑의 넓이와 길이와 높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알기를 원합니다. 주님의 이 사랑을 알게 된다면 그 주님이 내 삶과 내 사고의 모든 영역에 당연히 주님이 되실 것입니다. 그러면 사랑의 넓이는 무엇이고 사랑의 길이, 높이, 깊이는 무엇입니까? 한 신학자는 "이 모든 것은 십자가로 설명될 수 있다. 십자가야 말로 그 사랑의 넓이, 길이, 깊이 높이를 우리에게 자명하게보여 주지 않는가"라고 말했습니다. 여기서 예수님의 십자가에 나타난 이 사랑의 네 가지 차원을 한 번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 그리스도의 사랑의 넓이
그리스도는 모든 사람을 위해 돌아가셨습니다. 그분이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 사랑의 넓이는 온 세상을 포함합니다.
둘째, 그리스도의 사랑의 길이
그리스도는 한 번 사랑하면 영원히 사랑하겠다고 선언하십니다. 그분은 우리를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십니다. 이 사랑의 영원함을 생각해 보십시오.
셋째, 그리스도의 사랑의 깊이
그리스도는 우리의 허물과 죄를 담당하시고 지옥까지 내려가셨습니다. 저 죄악의 깊은 심연, 지옥의 저주를 받아 마땅한 나를 위해서 음부까지 내려가시사 나를 끌어올리신 사랑의 깊이를 생각해 보십시오.
넷째, 그리스도의 사랑의 높이
에베소서 2장 6절을 보면 그리스도는 우리를 구원하신 다음에 우리를 자신의 하늘의 보좌에 함께 앉도록 하십니다. 나를 구원만 하신 것이 아니라 자신의 보좌에 함께 앉혀놓고 함께 교제하기를 기뻐하시는 그리스도의 사랑의 높이를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의 모든 충만으로 우리를 채우기를 원하시는 그 하나님의 임재와 그 하나님의 사랑속에 빠져 보십시오. 그래서 바울은 마지막에 어떤 기도를 합니까? 이 강렬하고 영광스러운 기도를 보십시오. 그것은 차라리 우리를 향한 선언입니다. 우리 가운데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우리의 온갖 구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그분께 영광을 돌리십시오. 하나님의 모든 충만으로 우리를 채우기를 기뻐하시는 하나님, 그분은 오늘도 우리 곁에 다가오십니다.
창조적 기도 생활을 위한 토의와 훈련
1. 우리 삶에서 하나님의 부요가 나타나기를 소망하는 바울의 기도의 핵심적 내용들은 무엇이었습니까?
2. 우리의 속사람이 강건해지기 위한 실제적인 방안들은 무엇입니까?
3. 나의 삶에서 그리스도가 온전히 주님 되시지 못한 영역들에 어떤 것이 있는지 고백해 보십시오.
4. 주님과의 더 깊은 사랑을 체험하기 위한 기도를 피차에 나누도록 합시다.
9 예수님의 기도
요한복음 17장 1-5절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가라사대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자에게 영생을 주게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음이로소이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 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
인생은 마라톤 경주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후회없이 완주하는 인생은 많지 않습니다. 한점 후회없이 인생의 경주로를 완주한 유일한 분이 있다면 그분은 아마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라 할 수 있습니다. 본문에서 예수님이 최후의 순간에 했던 고백의 음성을 들어보십시오.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17:4).
아버지께서 주신 일을 이루어 아버지를 영화롭게 했다는 이 고백 직후에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시고 "다 이루었다"는 말씀을 남겼습니다. 본문은 바로 그런 생애의 아름다운 완성의 순간을 앞둔 예수님의 기도문입니다. 본문의 기도는 예수님의 마지막 기도입니다. 이 기도에서 우리는 예수님이 생애의 아름다운 완성을 향해 걸어오실 수 있도록 이끈 삶의 중요한 동기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인 우리의 삶도 후회없이 아름답게 완성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인식과 확신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때에 대한 인식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가라사대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1절). 여기서 "때"는 물론 구원역사의 완성의 때를 말합니다.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시는 때, 그분이 이 땅에 오신 사명을 성취하심으로 이제 죽으셔야 하는 때를 말합니다. 예수님은 이때를 결코 잊으신 적이 없습니다. 전생애를 통해 언제나 이때를 바라보고 의식하면서 한걸음 한걸음 다가가셨던, 철저하게 계획된 삶을 사셨습니다.
그리고 제대로 살기 위해 제일 중요한 것은 시간 관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 시간 관리의 핵심은 긴급한 일과 중요한 일의 차이를 헤아려 아는 것입니다. 정말 인생을 제대로 살려면 중요한 일이 중요하게 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러려면 중요치 않은 일은 과감하게 거절할 수 있는 용기가 인생에 필요합니다. 그래야 이 짧은 생애를 통해 정말 하나님이 의도하신 일들을 아름답게 성취해 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때를 인식한다는 것은 죽음의 때를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이 내가 무엇을 해야 할 때인가를 인식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에 대한 인식
하나님이 일이란 무엇입니까? 본문 4절을 보면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다"고 예수께서 고백하셨습니다. 그 하라고 주신 일이란 무엇일까요?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자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음이로소이다"(2절). 여기서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라는 말씀이 바로 답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에게 위임하신 일은 사람들에게 영생을 주는 일이었습니다. 구원하는 일, 영생을 허락하는 일이었습니다. 기독교 사역에서 해야 할 일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일,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이 없는 일은 사람들에게 영생을 얻게 하는 일입니다. 영원한 생명, 그것은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생명입니다. 하나님의 생명이기 때문에 영원합니다. 그리고 이 하나님의 생명은 그리스도 안에 주어진 생명입니다. 예수님 안에서 발견할 수 있는 생명, 거룩한 생명, 아름다운 생명, 충만한 생명, 의로운 생명입니다. 영생은 단순히 오래 사는 것만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질적인 생명을 말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영생을 얻는다, 영생을 누린다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영생은 곧 유일하신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3절).
이것이 예수께서 정의하신 영생입니다. 쉽게 말하면 영생은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이 보내신 예수님을 아는 것입니다. 여기서 안다는 것은 지적 인식이 아닌 체험적 인식을 말합니다. 오늘날 이 땅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삶에 대해 쉽게 말할 수 없는 갈증을 느끼는 것은 한마디로 하나님을 모르고 예수님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자기도 모르는 갈증 때문에 늘 허덕이고 있습니다. 권력만 취하면, 돈만 취하면, 지위만 취하면 만족할 것 같지만 그렇지 못한 인생을 우리 주변에서 얼마든지 볼 수 있습니다. 한평생 후회없이 살려면 편안하게만 사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하나님의 때, 하나님이 허락하신 삶의 기간 동안 함으로써 쓰임 받는 감격을 누리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방법에 대한 인식
하나님의 일을 하는 방법에 대한 분명한 확신과 인식이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 일을 맡기실 때는 분명히 능력을 수십니다. 그냥 일을 맡기시지 않고 그 일을 감당할 능력을 공급하십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을 둘씩 짝지어 보내실 때도 그들에게 권세를 주셨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예수께서는 말씀을 전할 수 있는 권세와, 전도하다 만난 병든 자를 위해 기도할 때 그들이 고침 받을 수 있는 권세를 주시고 제자들을 보내셨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일을 할 때 그분이 주신 권세를 어떻게 사용하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에게 만민 만유를 다스릴 권세를 주신 것은 영생을 주게 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나님이 주신 권세를 사람들이 영생을 얻게 하는 데 사용하셨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그 권세를 어떤 방법으로 사용하셨습니까? 본문에는 "권세"라는 말과 함께 거듭 반복되는 단어가 있는 "영화"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영화는 결코 자기 만족이 아닙니다. 영화의 핵심 의미는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 자신을 십자가에 드리는 십자가의 길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는 방법은 한마디로 십자가입니다. 나를 죽이는 것입니다. 내가 죽을 때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납니다. 오늘 이 시대가 진통하는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권세를 가진 사람들이 문제입니다. 권세는 어디서 주어집니까? 지식이 있을 때, 지위가 있을 때, 돈이 있을 때 권세가 생깁니다. 권세가 주어진 목적을 생각하지 않을 때 그 권세는 부패하고 타락합니다. 권세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이웃들을 섬기고 영원한 삶으로 인도하기 위해 하나님이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영광을 위해, 이웃을 위해, 자신을 죽이는 것, 십자가에 자신을 내어놓는 것이 진정한 의미에서 영화를 누리는 것입니다.
후회없이 영광스럽고 아름답게 내 인생을 완성하려면 하나님의 때를 아십시오. 내게 맡기신 하나님의 일을 하십시오. 그리고 자신을 부인하며 하나님의 일을 하십시오. 자신을 드러내는 사람은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없습니다. 인정받으면 일하고 인정 못 받으면 일하지 않는 것은 자기 부인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일을 할 때는 나를 숨기고 나를 죽여야 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고 이웃들이 영생을 얻어 새로운 삶을 체험하는 감격 때문에 기뻐할 줄 아는 사람, 그는 눈감을 때 이렇게 주님처럼 말할 수 있습니다. "아버지께서 하라고 주신 그 일을 이루어 아버지를 영화롭게 했습니다."
창조적 기도 생활을 위한 토의와 훈련
1. 예수님의 생애의 아름다운 완성을 가능케 한 세 가지 인식은 무엇입니까?
2. 나의 인생의 남은 기간이 "의미 있는 삶"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지 이야기해 보십시오.
3. 주님이 나에게 주신 "하나님의 일"이 무엇인지 나누어 보십시오.
4. 섬김의 삶을 위한 기도를 드립시다.
10 예수님의 기도(2)
요한복음 17장 11-19절
"나는 세상에 더 있지 아니하오나 저희는 세상에 있사옵고 나는 아버지께로 가옵나니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내가 저희와 함께 있을 때에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전하와 지키었나이다 그 중에 하나도 멸망치 않고 오직 멸망의 자식뿐이오니 이는 성경을 응하게 함이니이다 지금 내가 아버지께로 가오니 내가 세상에서 이 말을 하옵는 것은 저희로 내 기쁨을 저희 안에 충만히 가지게 하려 함이니이다 내가 아버지의 말씀을 저희에게 주었사오매 세상이 저희를 미워하였사오니 이는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같이 저희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을 인함이니이다 내가 비옵는 것은 저희를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오직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같이 저희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삽나이다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이니이다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같이 나도 저희를 세상에 보내었고 또 저희를 위하여 재가 나를 거룩하게 하오니 이는 저희도 진리로 거룩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이다."
예수께서는 십자가를 지시기 전날밤 제자들을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그분이 우리를 위해 기도하신다는 것은 우리에게 기대가 있다는 말입니다. 내가 어떤 사람을 위해 기도한다는 것은 그에 대한 기대가 있다는 말입니다. 그를 위한 나의 기도가 중단되었다는 말은 그를 향한 내 기대를 포기했다는 뜻일 수 있습니다. 본문을 자세히 관찰해 보면 기쁨(13절), 보전(15절), 거룩(17절)이라는 중요한 단어들이 발견됩니다. 이 세 단어는 바로 주께서 십자가로 가사 그 몸을 버려 죽으시고 부활하신 사건을 통해 우리에게 주시고 싶었던 삶의 내용을 보여줍니다. 주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고 부활하심으로 우리에게 선물하고 싶었던 삶, 그 삶은 어떤 삶일까요?
기쁨의 삶
"지금 내가 아버지께로 가오니 내가 세상에서 이 말을 하옵는 것은 저희로 내 기쁨을 저희 안에 충만히 가지게 하려 함이니이다"(13절). 내 기쁨이 저들 안에 있어서 저들의 기쁨이 충만한 삶, 그 삶을 위해 주께서 기도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이 13절 말씀에서는 특별히 "세상에서"라는 단어가 강조됩니다. 이것은 세상을 떠나시기 전의 말씀이라는 강조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또한 제자들이 세상에 사는 동안 기쁨의 삶을 살 것을 기대하신다는 것을 뜻합니다. 세상 떠날 때 천국의 기쁨이 약속되었을 뿐 아니라 이 어둠의 골짜기를 지나는 오늘 여기에서도 우리는 주님이 주신 기쁨의 삶을 누릴 수 있습니다.
예수님에게는 많은 별명이 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예수님을 슬픔의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그분이 슬픔의 사람이 된 것은 우리를 기쁨의 사람이 되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님의 생애를 묘사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히12:2). 예수님은 앞에 있는 즐거움,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해 십자가를 견디셨습니다. 십자가를 지는 것은 고통이지만 자기 몸을 드려 자신을 십자가에 내어줌으로써 구원받게 될 수많은 사람들, 그들이 새로운 소망과 새로운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할 수 있기에 십자가는 주님에게 견딜 만한 것이었습니다. 삶에 분명한 목적이 있고 오늘 내가 당하는 고난이 어떤 의미가 있다면, 그 고난이 가져다 주는 고통과 아픔에도 불구하고 내 마음속에는 세상이 빼앗아갈 수 없는 기쁨이 있게 됩니다. 이 기쁨을 부활의 주님이 주셨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그러므로 우리에게 이 기쁨을 주시기 위해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주님을 찬양하십시오. 그리스도인들이 이 땅에서 경험하는 대부분의 고통은 사실 믿음의 시련입니다. 믿음의 테스트라 할 수 있습니다. 그 시련을 통해 내 믿음은 강해지고 순수해질 것입니다. 내 믿음은 성숙할 것입니다.
보전(保全)의 삶
"내가 비옵는 것은 저희를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오직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15절). 여기서 "보전"이라는 단어가 중요합니다. 보전이라는 단어는 두가지 의미로 쓰이고 있습니다.
첫째, 구원의 보전 내가 한 번 예수님 앞에 나와 예수 믿고 죄사함 받아 구원을 얻게 되면 그 구원은 결코 잃어버려지지 않고 보전됩니다(12절). 주께서는 제자들이 예수를 메시아로 믿고 따라 왔을 때 그들에게 영생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구원은 그들에게 보전되고 있다고 하셨습니다. 주께서 친히 그것을 지켜 주신다고, 그 중에 하나도 멸망치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내 믿음이 보전되고 내 구원이 보전되고 있는 것이 내 의지가 견고해서라고 착각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둘째, 악으로부터의 보전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에게 그 구원은 한 번 경험하면 결코 잃어버릴 수는 없지만 하나님의 자녀들도 언제나 악에 오염될 가능성은 수다합니다. 악으로 가득찬 세상에서 우리는 더렵혀질 수많은 유혹의 가능성 앞에 노출되어 인생을 살아갑니다.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악의 배후에는 사단이 있습니다. 사단 마귀는 우리를 끊임없이 넘어뜨리려 합니다. 그래서 주께서는 우리에게 주기도문을 가르치실 때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라는 기도를 드리도록 가르치셨습니다. 주께서는 우리를 보전하기 원하십니다. 타락하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일시적 타락 중에 다시 일으키기를 소원하십니다. 보존의 은총 때문에 우리는 보존된 삶을 오늘도 살고 있습니다.
거룩의 삶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이니이다"(17절). 여기서 거룩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거룩의 의미와 조금 다릅니다. 이것은 단순히 도덕적 정결을 뜻하는 단어가 아니라 영적인 의미에서의 '성별케 함'입니다. 헬라어 원어의 뜻은 '구별하다', '분리하다'입니다. 어떤 특별한 목적으로 사용하기 위해서 따로 떼어놓는다는 의미입니다. 구별된 삶, 거룩한 삶이란 쓰여지는 삶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삶이 쓸모없이 낭비되는 것을 원하시지 않습니다. 분명한 목적, 확실한 목적 그리고 뚜렷한 목적을 위해 쓰여지는 그런 쓸모있는 인생이 되기를 주께서는 소원하십니다. 그래서 주께서는 이 거룩한 삶, 구별된 삶을 우리에게 주기를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당신은 삶에 분명한 목적을 갖고 있습니까? 목적 없는 인생은 공허한 인생입니다. 그러나 삶의 주인을 만나면, 구세주를 만나면 당신은 달라집니다. 10대, 20대의 인생에서 저는 하늘의 별을 바라볼 여유가 없었습니다. 인생은 너무나 캄캄한 어둠이었습니다. 그러나 주께서 찾아오신 그날부터 이상하게 어둠은 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삶은 놀라운 감동이었고 내 생애에는 뚜렷한 빛이 다가오기 시작했습니다. 살아계신 주님을 만난 사람마다 이런 경험을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면서도 예수님을 바라보지 못하고 살아갈 때 나는 어둠속을 방황할 수 있습니다. 다시 주님을 향해 시선을 돌리십시오. 그분은 당신을 위해 죽으셨고 당신을 위해 다시 사셨습니다. 엠마오 길에 찾아오셨던 그 주님은 당신의 인생길에 다가오십니다. 실망과 좌절 속에 있는 당신의 손을 잡고 생명의 길로 인도하기 위해 그분은 다가오십니다. 살아계신 주, 나의 참된 소망이신 그분을 만나십시오.
창조적 기도 생활을 위한 토의와 훈련
1. 본문에 나타난 예수님의 기도에서 예수님이 우리에게 선물하고 싶었던 삶은 어떤 것이었습니까?
2. 성경에 나타난 거룩의 의미는 단순히 깨끗하다는 이상의 의미를 지니는데 그 뜻은 무엇입니까?
3. 예수 안에서 쓰임 받고 싶은 자신의 삶을 간증하고 그것을 위하여 서로 기도하십시오.
11 예수님의 기도(3)
요한복음 17장 20-26절
"내가 비옵는 것은 이 사람들만 위함이 아니요 또 저희 말을 인하여 나를 믿는 사람들도 위함이니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저희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곧 내가 저희 안에,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저희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같이 저희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 아버지여 내게 주신 자도 나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어 아버지께서 창세전부터 나를 사랑하시므로 내게 주신 나의 영광을 저희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옵나이다 의로우신 아버지여 세상이 아버지를 알지 못하여도 나는 아버지를 알았삽고 저희도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줄 알았삽나이다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저희에게 알게 하였고 또 알게 하리니 이는 나를 사랑하신 사랑이 저희 안에 있고 나도 저희 안에 있게 하려 함이니이다."
본문은 지상에서의 예수님의 마지막 기도문입니다. 제자들을 위한 이 기도의 결론 부분에서 주님은 그들의 하나됨을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그것이 마지막까지 주님의 부담이 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그 시대 예수님의 제자들은 왜 하나가 되어야만 했을까요? 그리고 이 시대의 제자인 우리들은 왜 하나가 되어야만 합니까?
하나님의 연합을 본받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은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로 존재하십니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하나님은 하나이십니다. 이 교리를 가리켜 삼위일체라고 합니다. 성부 성자 성령은 각각 독립된 인격, 구별된 인격이십니다. 그런데도 하나로 연합되어 존재하십니다. 이 삼위 하나님의 연합, 특별히 아버지 하나님과 아들 하나님의 연합이 제자들의 연합의 모델이 되었습니다. 성부 성자의 연합은 바로 성도들의 연합의 궁극적인 모델이 되어야만 한다는 사실을 가르치신 것입니다. 아버지와 아들의 연합,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의 연합, 그 연합의 가장 중요한 특성을 가리켜 우리는 '영적 연합'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더 큰 은혜를 경험하기 위함입니다
주님 앞에 나아갈 때 하나님께서 주시는 놀라운 선물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 가운데 참여하게 되는 것입니다(22절). 여기서 "영광"이란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하나님 자신이십니다. 하나님의 임재 자체가 영광입니다. 주의 영광이 내게 임할 때 하나님의 영이 나를 지배하십니다. 성령이 역사하시는 그곳에 하나님의 영광이 있는 것입니다. 주의 영광은 주님의 임재 그 자체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임하면 사람들은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사람들은 저절로 하나가 됩니다. 그러나 주의 영광이 떠나면 사람들은 다 자기 영광을 추구합니다. 그 어떤 이름으로, 명목으로 모여도 하나님의 영광이 떠난 그곳에는 사람들의 자랑만 있을 뿐입니다. 우리가 참으로 주님을 높일수 있다면, 정말 주님을 높이기 원한다면 내 삶과 내 존재의 가장 중요한 동기가 주님의 영광이라면 주님을 높이기 위해 얼마든지 나를 낮출 수 있습니다. 바로 그곳에서 형제 자매들을 높이는 참된 교제가 살아 움직일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될 때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게 주시는 놀라운 축복의 시작을 의미합니다. 과연 어떤 축복이 있을까요? 주님이 우리 안에 계셔 역사하실 때 온전함을 이룬다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하나된 곳에 온전함이 있습니다. "온전함"이라는 말은 "영적 성숙"으로 바꾸어도 무방합니다. 또한 영적 진보 외에도 한걸음 더 나가서 성경은 무엇이라고 약속합니까?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같이 저희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 하나된 사람들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의 증거가 나타날 것입니다. 하나됨의 교제가 있는 곳에는 영적 진보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의 역사도 나타납니다. 우리의 공동체는 진실로 사랑의 공동체가 될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놀라운 축보긔 시작입니다. 더 큰 은혜를 사모합니까? 더 큰 축복을 사모합니까? 그러면 우리들의 교제가 주 앞에 맑고 순수한 교제가 되기를 흠모하십시오.
하나님의 선교를 담당하기 위함입니다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12절) 세상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들인 것을 알게 하려면, 우리가 주님의 사랑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인 것을 알게 하려면, 우리는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증거하는 우리가 하나되지 못하고 서로 시기와 질투와 시샘으로 가득 차 있다면, 우리가 사랑의 하나님을 증거하고 전도할 때 이웃들과, 세상은 우리에게 어떤 반응을 보일까요? 우리끼리도 제대로 지내지 못하면서 세상을 향해 "하나님은 사랑이라"고 전도할 수가 없습니다. 저는 성도들이 하나되지 못하는 것이 하나님의 소명을 망각했기 때문인 점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거룩한 하나님의 소명에 자신을 던져 보십시오. 소명에 불타 보십시도. 외국의 독재자들이 나라를 통치하는 방법 중 하나가 내부적인 어려움이 생기면 전쟁을 벌이는 것입니다. 그러면 내부가 규합됩니다. 할 일이 있으면 싸우지 않습니다.
이 땅에 할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희어져 추수하게 된 밭을 바라보십시오. 하나님 나라의 전선을 바라보십시오. 복음을 필요로 하는 세계의 밭들을 바라보십시오. 할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선교에 미쳐 보세요. 복음 증거에 미쳐 보세요. 이웃들을 사랑해 보세요. 외롭고 고독하고 연약한 사람들을 끌어안아 보세요. 그럴 때 우리는 하나됨을 경험합니다.
초대교회는 성도의 숫자가 많지 않았지만 핍박받는 교회였습니다. 세상은 그들을 핍박했습니다. 그런데 사도행전을 보면 놀랍게도 초대교회는 세상에서 핍박받았지만 동시에 칭송도 받았습니다. 세상은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했고 주의제자들을 박해했습니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그들을 부정할 수 없는 한 가지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서로 사랑하고 있었습니다. 이 때문에 그들은 찬의 대상이었습니다. "보라 저들은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가!"
카타콤으로 쫓기고 핍박을 받으면서도 그들은 서로 사랑했습니다. 이 사랑이 세계를 바꿀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될 때 하나님은 우리를 쓰실 것입니다. 우리가 사랑할 때 우리를 통해 복음의 증거가 나타날 것입니다. 세상은 뒤집어질 것입니다. 그렇게 하시는 하나님을 기대하기 바랍니다. 또한 우리 안에서 하나됨의 거룩한 교제가 있기를 흠모하십시오. 그리고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놀라운 소명을 붙잡기 바랍니다. 우리는 고독한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친구들을 만나도 이웃을 만나도 마음속에 감격이 없습니다. 사랑이 없기 때문입니다. 형제 자매를 만날 때마다 사랑할 대상을 만나는 감격 속에 고통과 기쁨을 같이 나누는 사랑의 공동체! 하나님은 그 공동체를 통해 세상을 바꾸어 가십니다.
창조적 기도 생활을 위한 토의와 훈련
1. 예수께서 제자들의 하나됨을 기대하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2. 성도의 연합의 참되고 완전한 모본은 무엇이며, 또 왜 그런지 이유를 제시하십시오.
3. 성도의 연합이 어떤 면에서 선교에 기여하는지 말해 보십시오.
4. 내가 속해 있는 공동체에세 마귀의 '나누는 일'의 징후가 무엇인지 분별하고 그것을 위해 집중적으로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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