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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 목양 단상[1,073]〓/사도신경.주기도.십계명

(13편)사도신경 강해

by 【고동엽】 2022. 3. 7.

사도신경 강해 - 임영수 목사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

 

 

요일 4 :7~15 설교자 : 임 영 수

 

 

오늘 말씀의 내용은 사도신경의 첫 번째 고백의 명제인 하나님과 관련된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입니다. 아마도 여러분 가운데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가부장 제도에 대해 거부감을 가지고 있는 분, 여권신장에 특별히 관심을 가진 분은 하나님에 대해 아버지라는 호칭을 붙이는데 대해 매우 못마땅하게 생각하실 것입니다. 왜 하필 아버지 하나님이냐, 어머니 하나님도 되지 않느냐고 이의를 제기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한 이의에 대해 저는 반박하기보다는 충분히 이해합니다.

 

그러나 사도신경에서 하나님에 대해 아버지라는 호칭을 사용하는 것은 가부장적 권위나, 남성 우월주의에서 나온 것은 아닙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인간과 교제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속성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인간의 교제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속성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인간의 교제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속성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인간의 교제에 있어서, 그 교제는 주인과 종, 왕과 신하, 기업주와 노동자, 장교와 사병의 관계와 같은 것이 아닙니다. 이러한 관계들은 사회 질서에서 생겨난 기능적 역할들입니다. 이러한 관계에는 친밀, 사랑, 생명은 없습니다. 이러한 관계는 표면적인 것이기 때문에 자기 주장, 요구, 경계, 이익추구가 있을 뿐입니다.

 

하나님과 인간의 교제에는 유보의 장벽, 숨긴 것, 일방적인 요구, 강요된 복종, 체념, 생계유지를 위한 수단, 성공을 위한 인연 맺기 같은 것들이 개재되지 않습니다. 하나님과 교제에는 친밀함, 사랑, 자족, 희망, 신뢰, 생명이 내재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과 교제에는 이 세상에서 이루어지는 많은 교제에서 경험하는 결핍, 고갈, 갈등, 무의미, 무시당함, 상호 의존성, 불만 같은 것들이 없습니다. 하나님과 교제에서 이러한 경험은 하나님은 생명,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요즈음 시중 서점에서 잘 팔리고 있는 조창인의 장편소설 "가시고기"가 있습니다. 작가는 그 소설에서 한 아버지의 순수하고 애틋한 '부성'을 그리고 있습니다. "백혈병으로 고통 당하고 있는 아들을 바라보고 있는 아버지, 그 아버지는 아들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으로 받아들이면서, 그 아들을 위해 무엇이든지 대신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무엇이든지 대신할 수 있겠는데, 그렇지 못해 안타까워 하는 순수한 아버지의 부성애를 그려 놓았습니다." 이 작품에서 그러한 아버지의 사랑을 "먹지도 잠자지도 않고 새끼를 돌보는 가시고기"로 상징화시키고 있습니다. 백혈병으로 고통 당하는 아들과 아버지를 맺어주는 본질적인 힘이 무엇인가? 그것은 경제적 이해관계, 명예심도 아닙니다. 그것은 오직 아버지의 사랑입니다.

 

요즈음처럼 상하고, 왜곡된 부성에 길들여져 있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에 대해 아버지라는 호칭은 잘 이해가 안될 것입니다. 오히려 부정적인 아버지 상 때문에 아버지라는 호칭은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데 큰 장애물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왜곡된 아버지 상으로 고통당하고 있는 사람의 경우 하나님 안에서 참 아버지를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자신의 부성을 극명하게 드러내신 자리가 어디인가입니다. 그것은 "십자가와 부활"입니다. 여기에서 드러내신 하나님 아버지의 부성(Fatherhood)은 다음의 몇 가지로 요약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 친밀감입니다. 독일의 신학자 요하킴 예레미아스는 예수님이 하나님을 "아바"(Abba)라고 부르신 호칭의 기원을 연구해 보았습니다. 연구결과 그러한 호칭은 옛날 아람 사람의 가정에서 아주 천진난만한 어린 아이들이 아버지를 부를 때 사용했던 호칭임을 찾아냈습니다. 어린 아이들이 "아바"라고 부를 때 거기에는 그 어떤 서먹서먹한 거리감, 이질감도 없습니다. 아주 가까운 관계입니다.

 

십자가에서 자신을 드러내신 하나님은 우리에게 매우 가깝게 계시는 분이십니다. 그는 우리에 대해 조금도 거리감을 갖지 않습니다. 그 분은 존경과 경외의 대상이면서 우리에게는 아주 친밀하신 분이십니다.

 

두 번째, 아버지 하나님은 인간에게 요구만 하시는 분이 아니라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가 우리에게 주시는 것은 자기자신입니다. 대부분 이방신들은 사람에게 공포와 두려움의 대상이면서 많은 것을 요구합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신'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때때로 그분으로 인해 이미 가진 것을 포기할 때도 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더 좋은 것을 담기 위한 포기이지 강요는 아닙니다.

 

셋째, 아버지 하나님은 용서하시는 분이십니다. 그의 용서는 우리를 옛것에서 해방시켜 주고, 우리의 상한 심령을 치유하고 우리의 심령을 소생시켜 주는 용서입니다. 그러므로 그의 용서는 용서받은 우리 자신에게만 머물지 않고 이웃에게로 흘러 나가게 하는 용서입니다. 이웃에 대해 닫혀진 마음을 열게 하는 용서, 우리 자신을 받아들이게 하는 용서, 다른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게 하는 용서입니다. 그분의 용서는 새 삶을 만들어 가는 용서입니다.

 

넷째, 아버지 하나님은 우리를 찾고 계시는 분이십니다. 십자가에서 아버지는 자신이 우리를 찾고 계시는 분이심을 드러내셨습니다. 십자가에서 아버지에게 도망하여 숨어버린 인간을 찾고 계시는 하나님 아버지를 만나게 됩니다.

 

다섯째, 십자가에서 우주적이면서 지극히 개인적인 아버지를 만나게 됩니다. 십자가에서 우리가 만날 수 있는 아버지는 세상 전체를 사랑하시면서 세상에 있는 자녀 한사람 한사람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지고 얼굴과 눈을 마주 대해 바라보시는 아버지이십니다. 예수께서는 이 자상한 아버지에 대해 이렇게 소개해 주셨습니다.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다 세신바 되었나니"(마 10:29~30)

이 말씀은 아주 세심한 아버지의 사랑, 돌보시는 아버지의 관심을 표현한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시라는 것은 우리의 생명의 기원, 원천, 목적이 그 분으로부터 왔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육신의 아버지가 있기 때문에, 우리가 세상에 태어났습니다. 그러나 생명은 육신의 아버지가 준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왔습니다. 이 아버지는 전능하신 분이십니다.

 

저는 지난 날 하나님이 전능하신 분이라는데 대해, 그 전능의 뜻을 마술적 힘, 분노와 의분의 힘, 강압적이고 파괴적인 힘으로 이해한 때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에 대해 원망도 많이 했습니다. 아버지 당신은 전능하신 분이신데, 왜 나에게 있는 이러한 고통을 그대로 방관 하십니까? 당신은 너무 무능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당신은 전능하신 분이신데 나쁜 사람들을 왜 한꺼번에 때려 부수지 않으십니까? 전능하신 아버지는 제가 고통스러워 할 때 너무 침묵만 하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십자가와 부활에서 보여주신 아버지의 전능은 저의 이해와는 너무 다른 것이었습니다. 거기에 나타난 아버지의 전능은 악한 사람을 때려 부수는 전능이 아니라 그들을 용서하시는 전능입니다. 갈보리 언덕 위에서 드러낸 아버지의 전능은 저의 고통을 무엇이나 없애 주시는 전능이 아니라 그것을 받아드리게 하고 죄를 회개하게 하고, 온전한 사람으로 치유해 가는 전능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아버지의 전능은 우리를 폭력, 증오, 파괴부터 해방시키고 새로운 미래를 내다보게 하는 전능입니다. 폭력, 증오는 전능이 아니라 약함, 비열함, 열등감입니다. 아버지의 전능은 그러한 전능이 아닙니다.

 

아버지의 전능은 파괴적이며 냉혹한 삶의 방식을 추구하게 하는 전능이 아닙니다. 아버지의 전능은 체념, 운명론, 절망으로부터 동터오는 새로운 희망의 아침을 보게 하는 전능이십니다.

 

아버지의 전능은 타락한 세상을 보기하고, 단념하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을 받아들이고, 타락했음에도 불구하고 세상을 보존하시고, 유지해 가는 전능이십니다.

 

우리가 전능한 아버지를 가까이에서 이해해 갈수록, 조급함, 과격, 흥분에서 벗어나게 되고, 인내, 소망 안에서 살게 됩니다. 인도의 '간디'의 비폭력도 그 근원을 캐보면 역시 하나님의 전능하심에 도달하게 됩니다. 인류 역사를 돌이켜 보면 하나님께 신실했던 사람들의 공통점이 어떤 사회적 문제를 해결해 가는데 총, 칼, 폭력 대신에 '비폭력'을 원칙으로 했습니다.

 

그러나 윤리관은 전능하신 아버지를 신뢰했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우리 아버지는 전능하신 분이라고 믿는 자녀들은 그 누구보다도 아버지의 전능이 무엇임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그 전능하심에 자신을 위탁하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이 세상을 보기하지 않는 그 근거도 역시 아버지의 전능에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지워진 삶의 짐을 지고 가면서 아버지께 감사하고 그 분을 찬양하는 것은 그 분이 전능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부활 주일에 말씀드린 양팔이 없고, 한 쪽 다리가 짧은 아이를 낳은 부모가 자신의 운명을 저주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이거나, 아이를 내다 버리지 않은 것은 아버지의 전능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의 전능은 레나 마리아를 인간의 최악의 불행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사람으로 만들었습니다.

 

전능하신 아버지를 믿는 사람은 환상, 영웅심에 사로잡혀 살지 않습니다. 그들은 생에 있어서 진지합니다. 끈기가 있습니다. 그리고 단호하고 확고합니다. 왜, 아버지가 전능하신 분이심을 믿고 고백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을 믿습니다." 아멘하는 것은 우리의 아버지가 그러한 전능자이시기 때문에 아-멘 합니다. 만약 전능하신 아버지가 히틀러나 변덕스러운 마술사라고 할 때 우리는 아-멘 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일상적인 삶에서 우리의 믿음의 관점을 매 순간 순간 바르게 세워가면, 이 전능하신 아버지를 보다 진지하게 대면해 갈 수 있습니다. 거기서 "나는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을 믿습니다." 아-멘 하게 됩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를 빌라도에게로 데리고 와서 십자가에 못박도록 강요했을 때, 빌라도는 최종적으로 예수를 군중들 앞에 세우고 "보라 이 사람을"(Ecce homo)이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이 사람을 보라." 이 말을 다른 말로 바꾸어 표현하면 "이 아버지를 보라." "너희들의 전능하신 아버지를 보라."입니다. 그가 전능하신 분이기 때문에 자기 자녀들의 죄를 걸머지고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그 분을 보라." 그 전능하신 분은 죄와 죽음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셨습니다. "전능하신 아버지를 보라."(요 19:4)

 

사도 요한은 이 아버지는 사랑이시라고 증언합니다. "사랑에 묶여 있는 전능하신 아버지를 보라."고 사도는 증언합니다. 그 아버지는 사랑의 한계 가운데서 전능한 일을 이루어 가시는 분이십니다.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파괴와 분열이 아닌 지속적인 창조를 이루어 가십니다. 그 분은 세상을 창조하셨고, 범죄한 인류에게 파멸이 아닌 다시 사는 영생의 길을 마련해 주셨습니다.

 

사도 요한은 이 전능하신 아버지의 자녀들은 아버지를 닮아가야 한다고 했습니다. 아버지를 닮는 길이 서로 사랑하는 일입니다. 사도 요한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람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7)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10)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어지느니라,(12)

 

아버지가 아들을 세상의 구주로 보내신 것을 우리가 보았고 또 증언하노니,(14)"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을 우리의 아버지로 모시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 아버지는 우리와 깊은 교제를 원하십니다. 이 아버지는 우리를 그의 창조의 동역자로 부르고 계십니다.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

 

 

시 104 : 24 ~ 31 설교자 : 임 영 수

 

 

지난 주일에 말씀드린 내용은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에 대한 고백이었습니다. 오늘은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에 대한 고백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이 아버지는 전능하신 분이십니다. 이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이 천지를 만드셨습니다.

 

J.M. 로호만(Jan milic Lochman) 교수는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홀로 있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함께 있으려 하고, 새로운 현실을 일으키려는 결심을 지니고 있다. 그것이 바로 모든 존재하는 것들을 총괄하는 하늘과 땅이다. 그래서 세계가 있다. 세계는 전능하신 아버지 상을 지향하고 있기 때문에, 창조는 혐오스럽고 속이는 현실이 아니라, 현실적인 창조, 선한 창조이다. 창조자의 관점에서 창세기의 보고가 명백하게 확인하고 있듯이, '이렇게 만드신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좋았다.' (창 1:31)

 

사도신경에서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을 창조주로 고백하는 데에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먼저 신학적으로 삼위일체 되신 하나님 이외에 모든 것을 다 비신화화 하고, 모든 가치와 상태의 절대화를 거부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 이외에 이 세상에 있는 그 어떤 것에 대해서도 신격화 하거나, 그것의 가치나 조건을 절대화할 수 있는 것이 없을 뿐 아니라, 이 세상에 있는 그 어떤 것도 그것 자체가 영원하거나 절대적인 것, 영원히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창조된 세계는 무질서하게 변덕스럽게 자기들 멋대로 되어가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이 전체의 시간을 지배하면서, 형성하면서, 목적을 결정하면서, 완성하면서 그 모든 것을 포괄해 가십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하나님의 창조는 그것 자체로서 마지막이 아니라 만물을 새롭게 하시는 창조의 시작입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하나님의 창조는 종말론적 의미를 갖습니다. 시편이나 예언서에서 이 세상에서 되어지는 일들에 대해 깊이 탄식하면서도, 희망 가운데서 하나님을 찬양하며 기뻐하는 것은 하나님의 창조가 최초의 세상 창조로 끝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의 그 한 날이라는 목표로 향해 계속 형성되어가며, 완성되어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러한 의미가 없다면 하나님의 부르심이나, 그 분에 대한 응답, 그 분의 영광과 승리에 대한 찬양은 있을 수 없습니다. 성서에서 보여주는 희망은 창조된 세상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는데 있지 않습니다. 죄로 이 창조된 세상이 한없이 피폐해지고, 파괴되어 가고 있지만 하나님의 창조는 중단되지 않고 지속된다는데 있습니다.

 

우리는 그러한 사실을 노아 시대에 있었던 하나님의 홍수 심판 사건에서 보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그 시대에 사람들의 죄가 세상에 가득함과 그들이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그가 창조한 모든 것을 지면에서 쓸어버리기로 작정하고, 물로 심판을 하셨습니다. (창 6:1-8)

 

창세기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심판 그 자체보다도 그러한 심판으로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이 다시 혼돈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혼돈을 넘어서 새로운 창조에로 나아가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혼돈의 대지 위에 무지개는 바로 그러한 사실에 대해 우리의 시선을 집중시키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창조주이심을 고백하는 사람은 언제나 어두움 가운데서 그러한 하나님의 희망을 보게 되기 때문에 하나님이 창조주이심을 고백하며 그 분을 찬양하게 됩니다.

 

다음 우주론적인 의미에서 하나님의 창조는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모든 것을 다 포괄합니다. 천지라는 말은 하늘과 땅을 의미합니다. 하늘은 보이지 않는 것을 의미하며 땅은 실제로 존재하면서 보이는 모든 것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보이지 않는 것은 천상 세계를 의미할 뿐만 아니라 정신 세계도 의미합니다. 보이지 않는 천상 세계에는 천사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보이지 않는 정신 세계에는 철학적인 이념과 신화의 세계, 초자연적인 힘이 있습니다.

 

사도신경에서 창조주로서 하나님 고백은 이러한 모든 것들도 역시 피조된 것이지 그것들 자체가 영원한 것은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것들이 창조주 하나님과 동등할 수 없다는 사실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여기서 창조에 대해 우리의 눈을 새롭게 열어주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창조는 이 땅 위에 있는 눈에 보이는 것들에 국한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해하고 있는 창조는 반드시 눈에 보이는 어떤 새로운 사건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창조는 눈에 보이지 않는 영역에 속한 것도 포함합니다. 심지어 땅 위에 있는 모든 것들이 다 소멸되고 없어진다고 해도 하나님의 창조는 끝나는 것은 아닙니다.

 

베드로 후서에서 사도 베드로는 이러한 사실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가 있는 곳인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노라." (벧후 3:12-13)

 

이 땅위에 모든 것이 다 녹아 없어져 버릴 때 하나님의 창조는 끝이라고 단정해 버릴 수 있습니다. 그러한 관점은 하나님의 창조에 대한 고정관념 때문입니다. 창조는 반드시 눈에 보이는 어떤 형태들을 이루어 가는 것이라고 단정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도신경에서 하늘과 땅을 만드신 창조주에 대한 고백은 창조에 대한 그러한 제한된 인식에 갇혀 있는 우리를 해방시킵니다.

 

하나님의 창조를 반드시 눈에 보이는 것에 한정시키므로, 교회에서 조차 눈에 보이는 어떤 실증적인 사건들이 일어나지 않으면 성령의 역사가 중단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교인들이 많이 몰려들지 않고 헌금이 많이 걷히지 않고, 교회 건물이 크게 지어지지 않으면 성령의 역사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오늘의 한국 교회의 성령의 창조 역사는 반드시 내 교회의 양적 팽창 가운데만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고정관념이 교회됨을 더욱 더 포기케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창조는 눈에 보이지 않는 가운데서도 진행되고 있습니다.

창조는 과학기술에 의해 유전공학이 발전하고, 우주선을 발사해서 미지의 은하계를 정복하는 것만이 아닙니다. 이러한 창조개념은 인간의 삶의 상황을 더욱 더 황폐하게 하고 위협적으로 몰아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창조는 반드시 유물론적인 것만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창조는 일차원적인 것을 넘어서 눈에 보이지 않는 차원의 영역도 포함합니다.

 

우리의 신앙 고백은 그러한 의미에서 유물론적 차원을 넘어섭니다. '하늘과 땅을 만드신 하나님을 믿습니다.'고 고백할 때 그것은 이미 다 되어진 세상을 돌아보며 그 사실을 확인하는데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또 이 고백은 하나님의 창조가 지금 우리의 현실 세계에서 과학의 힘에 의해 계속 인간의 삶을 개선시키고 있고, 앞으로도 인간에게 행복을 가져다 줄 것을 확신하는 가운데서 고백도 아닙니다. 이 고백은 하나님 이외에 또 다른 정신세계가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도 아닙니다. 이 고백은 하나님만이 유일한 창조주시며, 하나님의 창조는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를 다 포괄한다는 믿음의 고백입니다.

 

그 다음으로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고백에는 인간학적인 의미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종교 개혁자 루터의 교리 문답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습니다.

 

"나는 모든 피조물과 함께 나를 창조한 하나님을, 내게 몸과 영을, 눈․귀와 모든 지체들을, 이성과 모든 감각을 주셨고 보존하신 하나님을, 거기에 의복과 구두를, 음식과 음료수를, 집과 뜰을, 아내와 자녀를, 토지와 소와 그리고 모든 선물들을 주신 하나님을 그리고 무엇보다 모든 악에서 지켜주시고 보존하시는 하나님을 믿는다."

 

하나님이 하늘과 땅을 만드신 분이라는 고백은 인간은 맹목적인 운명에 내던져져 있지 않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인간의 운명을 지배하고 다스리는 것은 하늘의 별이나 달, 해가 아닙니다. 오직 창조주 하나님이 인간의 주인이십니다. 예언자 예레미아는 이 창조주 하나님이 인간에 대해 가지고 계시는 생각은 "재앙과 심판이 아니라 평안과 희망"(렘 29:11)이라 했습니다.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은 그가 창조하신 세상 전체를 사랑으로 돌보고 계실뿐만 아니라, 그 중에서도 특별히 인간에 대해 평안과 희망의 계획을 가지고 계시는 분이십니다.

 

창조주 하나님에 대해 이러한 믿음을 가졌던 예언자들을 이스라엘이 절망 가운데 있을 때 언제나 분연히 일어나 자기 백성을 위로할 수 있었습니다. 예언자들이 이해한 이스라엘의 미래는 바벨론과 같은 강대국들의 손에 있지 않고 오직 창조주 하나님께 있다는 사실을 믿었기 때문에, 좌절 가운데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로할 수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이 바벨론 포로로 잡혀가 절망 가운데 있을 때 예언자 이사야는 이스라엘의 운명이 바벨론 왕의 손에 있지 않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예언자는 그의 백성을 향해 다음과 같은 위로의 말을 할 수 있었습니다.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사 41:10)

 

이러한 믿음은 한 공동체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한 개인에게도 적용됩니다. 시편 기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나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여호와는 너를 지키시는 이시라. 여호와께서 네 오른쪽에서 네 그늘이 되시나니, 낯의 해가 너를 상하게 하지 아니하며 밤의 달도 너를 해치지 아니하리로다." (시 121:1-2, 5-6)

 

사람의 운명을 주관하는 것은 해와 달, 별이 아닙니다. 창조주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아버지 하나님을 창조주로 고백하는 신앙에서는 궁합, 이사, 택일, 토정비결, 점, 굿 같은 것들이 다 의미없는 것이 됩니다. 그 이유는 우리의 생명의 주인은 창조주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고백하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에 대한 고백에는 하나님이 왜 세상을 창조하셨는가? 에 대한 문제도 포함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속성에 관한 문제로서 창조의 목적과 관련됩니다. 로호만 교수의 말대로 하나님은 홀로 있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함께 있으려 하고, 새로운 현실을 일으키기를 좋아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의 속성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신 것은 그의 사랑 때문입니다. 사랑은 언제나 선한 것, 보기 좋은 것을 만듭니다. 하나님이 하늘과 땅을 만드시고 보시기에 좋았다고 하셨습니다. 그 보시기에 좋은 창조는 이미 있는 어떤 것을 가지고 만들지 않았습니다. 아무 것도 없는 가운데서 있게 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다음과 같은 기도문이 있습니다.

 

아버지,

세상 속을 걷노라면

때로 벅찬 감동에 휩싸일 때가 있습니다.

당신이 지으신 세상이기에

어느 곳에 머물든지 아름다움을 느낍니다.

 

당신을 그토록 아낌없이 주시는 분이 되게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당신을 그토록 사랑을 베푸시는 분이 되게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당신께 아무 것도 드리지 않는 저희이거늘

사랑 그 자체가 아니라면

무엇이 당신으로 하여 저희를 그토록 사랑하게 하십니까?

 

아버지

당신의 이름은 사랑입니다.

당신의 힘은 부드러운 연민입니다.

-조 만나스-

 

오늘 본문에서 시인은 창조주 하나님에 대해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여호와여 주께서 하신 일이 어찌 그리 많은지요. 주께서 지혜로 지으신 것들이 땅에 가득하나이다. 거기에는 크고 넓은 바다가 있고 그 속에는 생물 곧 크고 작은 동물들이 무수하나이다. 그곳에는 배들이 다니며 주께서 지으신 리워야단이 그 속에서 노나이다."

 

땅위에 있는 모든 것이 그의 창조물입니다. 이 모든 창조물은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존재해 가고 보존되어 갑니다.

 

"이것들은 다 주께서 때를 따라 먹을 것을 주시기를 바라나이다. 주께서 주신즉 그들이 받으며 주께서 손을 펴신즉 그들이 좋은 것으로 만족하다가, 주께서 낯을 숨기신즉 그들이 떨고 주께서 그들의 호흡을 거두신 즉 그들은 죽어 먼지로 돌아가나이다."

 

하나님의 창조는 처음 창조한 것으로 모든 것이 끝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창조는 계속됩니다.

 

"주의 영을 보내어 그들을 창조하사 지면을 새롭게 하시나이다. 여호와여 영광이 영원히 계속할지며 여호와는 자신께서 행하시는 일들로 말미암아 즐거워하시리로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하늘과 땅을 만드신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을 믿습니다. 그분이 우리의 생을 주관하고 계십니다. 그분의 나라와 권세는 영원 무궁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분만을 예배하고, 그분만을 찬양하고, 그분만을 영화롭게 해야합니다.

 

하나님의 창조는 일회적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창조는 우리 인간들이 만들어 가는 혐오스럽고 속이는 현실이 아닙니다. 그분의 창조는 선한 창조입니다. 하나님 창조의 궁극적인 목표는 만물을 새롭게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창조의 사역을 위해 우리를 그의 동역자로 부르고 계십니다. 우리가 우리의 현실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에 우리의 귀를 기울이는 것은 그분의 선한 창조가 계속 진행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오늘의 우리의 혐오스러운 현실을 바라보며 때때로 실망도 하고, 좌절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현실에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그분에게 영광을 돌리는 것은, 이러한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선한 창조가 지속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희망은 오직 만물을 보기 좋게 창조하시고, 만물을 새롭게 하시는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께 있습니다.

 

 

 

 

 

 

■■유일하신 아들 주 예수 그리스도■■

 

 

마 16:13~20 / 히 1:1~3 설교자 : 임 영 수

 

 

오늘 우리는 드디어 사도신경의 중심부에 도달하게 되었습니다. 신학자 오스카 굴만(Oscar Cullmann)은 "기독교 신앙의 출발점과 중심점은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이다."라고 했습니다. 우선 순위로 볼 때 분명히 첫 번째 명제인 하나님이 먼저이며, 그 다음이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성령입니다. 그러나 신앙의 출발점에서는 예수 그리스도가 먼저입니다. 그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 성령에 대한 신비의 빛이 드러나게 되고 고백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기독교 신앙을 가진 사람들, 기독교에 입문하려는 사람들 가운데 사도신경의 첫 번째 명제인 하나님에 대한 고백에는 별로 갈등을 느끼거나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데, 두 번째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내용에 대해서는 신앙의 갈등과 걸림돌로 느끼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한 문제는 오늘 우리들 시대에서만 아니라 초기 기독교 시대에서도 그러했습니다. 사도 바울 자신도 이 대목이 유대인에게는 걸림돌이요, 헬라 사람들에게는 어리석은 것이라고 시인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전능하신 천지를 창조하신 아버지 하나님에 대한 신앙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그들에게 큰 걸림돌이 됩니다. 헬라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 사건은 그들의 철학적 지성에 맞지 않는 어리석은 것이었습니다. 지난날의 역사에서나 오늘의 현실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신앙에 걸림돌이나 어리석음이 되는 것은 기독교 신앙에서 말하는 구원에 대한 이해의 부족에서 생긴 것입니다.

사도신경에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명제는 정교한 조직신학적 체계가 아닙니다. 여기서는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가를 서술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우선 저는 사도신경에 명시된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가를 말씀드리기 전에 기독교 신앙에서 말하는 구원이 무엇인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먼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종교적 구원은 심신의 수양을 통해서 육체적, 정신적 속박에서 벗어나 어떤 신비의 경지에 도달하는 것입니다. 구원에 대한 이러한 이해에서 구원은 "육체 밖에서, 세상 밖에서, 인격 밖에서" 일어나는 사건입니다. 제가 지난 날 이해한 구원도 이 세상에서 좋은 일하며 착하게 살면 죽은 후에 천당 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러한 구원의 이해에서, 금욕적인 삶은 최고의 미덕이었습니다.

 

그러나 사도신경에서 말하는 구원은 그것과는 반대입니다. 사도신경에서 구원은 세상, 역사, 인격을 다 포함하고 있습니다. 사도신경에서 구원은 인간 스스로의 심신 수련으로부터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 구원은 외부로부터 옵니다. 이것은 외부로부터 와서 잠자는 심령을 깨워 일어나게 해서 믿음, 소망, 사랑을 갖게 합니다. 로흐만 교수는 "기독교 신앙에서 구원은 벗어남이 아니고 창조물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의 이행이다."라고 했습니다.

 

다음으로 일반 종교와 철학에서 이해되고 있는 구원은 역사 안에서가 아니라 역사로부터 구원입니다. 이러한 구원은 이 현실에서 모든 재앙, 실패, 고난으로부터 면제받는 것입니다. 그런데 기독교 신앙에서 구원은 역사 안에서 구원입니다. 사도신경에서 하나님은 역사의 현실을 멀리 떠나 저 피안의 세계에 숨어 계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그는 인간이 살고 있는 이 역사의 현실로 직접 찾아오시는 분이십니다. '임마누엘'이라는 뜻은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계시는 분이시라는 뜻입니다.

 

시편 11편에서 시인이 경험한 현실은 너무 살기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시인은 자기 시대의 상황을 "악인이 활을 당기고 화살을 시위에 먹임이여 마음이 바른 자를 어두운데서 쏘려 한다."(2절)고 표현했습니다. 그러한 상황에서 시인의 친구들은 시인더러 산으로 도망하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시인은 그것을 거절하고 자기는 "하나님께 피했다."고 했습니다. 시인이 하나님께 피했다는 것은 현실 도피가 아닙니다. 하나님과 함께 현실의 고난을 직접 대면해 가면서 투쟁하며 싸워 나가겠다는 뜻입니다.

 

사도신경의 하나님은 무감정의 하나님, 피안의 세상에서 승리해서 들어오시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신경의 하나님은 죄와 불법, 악이 있는 현실에서 그것들과 마주 대면하셔서, 투쟁하시며 승리해 가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기독교 신앙에서 구원은 개인이 하나님을 찾아 나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개인의 삶의 역사에 개입하시는 것입니다.

 

다음은 일반 종교에는 그 종교의 창시자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석가모니, 마호멧과 같은 종교 창시자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인간 스스로가 종교적 수련을 통해 구원에 이르는 길을 안내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그들은 종교적 선각자들입니다.

 

그러나 기독교 신앙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기독교의 창시자가 아닙니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인간에게 구원을 주시기 위해 역사 안으로 들어오신, 그 자신의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십니다. 그래서 초대교회 사도들은 그들의 설교에서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 받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행 4:12) 하였습니다.

 

사도신경의 두 번째 고백의 명제는 "나(우리)는 그의 유일하신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입니다.

 

여기서 먼저 그리스도에 관한 말씀드리는 것이 바른 순서라고 생각됩니다. 그리스도는 헬라어이며 히브리어로는 메시아입니다. 메시아는 유대 민족이 고대하던 구세주입니다. 특히 그들이 고난 가운데 있을 때 이 메시아에 대한 기대는 절정에 달했습니다. 그들은 이 메시아가 오면 그들이 현재 당하고 있는 개인적인 문제, 사회적인 문제가 다 해결될 것을 기대했습니다. 그가 오심으로 새 역사가 시작될 것이라 기대했습니다.

 

신구약 성서에서 그리스도는 새 일, 새 역사, 새 삶으로 동일시됩니다. 사도 바울은 그의 서신에서 '그리스도 안에'라는 말을 자주 사용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 '그리스도 안의 삶'(딤후 1:1), '그리스도 안에 있는 존재'(롬 8:1)등, 이러한 표현들은 모두 그러한 의미로 사용된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에서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은 그리스도 안에서 새 삶, 새 운명, 새 목표, 의미, 가치를 가지고, 그리스도의 사역에 참여한 사람을 의미한다.

 

그리스도인이란 예수 믿고 이 세상에서 잘 살다가 내세에 천당에 가는 사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의미 가운데 있는 사람을 뜻합니다. 이 그리스도가 누구냐? 라는 물음에 대해 사도신경에서 "그리스도는 예수"라고 말합니다. 예수는 그리스도입니다.

 

그 다음으로 예수입니다. 예수라는 이름은 신구약 성서에서 유일하게 그리스도에게만 붙여진 이름이 아닙니다. 그리스도 이외에 여러 사람에게 이 이름이 명명되어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모세 다음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가나안으로 인도한 여호수아입니다. 예수는 히브리어로 여호수아입니다. 그 뜻은 '구원자'입니다.

 

성서에서는 이름이 매우 중요시됩니다. 우리 나라 풍습에서 이름은 장차 어떤 사람이 되어가라는 뜻에서 신중히 고려해서 이름을 짓곤 합니다. 그러나 성서에서 이름은 그 사람의 성품, 인격, 행동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한가지 예를 들면 자선사업을 많이 하고, 덕과 사랑이 있는 사람으로 모든 사람에게 널리 알려져 칭찬과 존경을 받는 사람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그가 누구인가를 알고 싶어합니다. 그러한 일을 하는 사람과 일치되는 이름으로 "덕애 - 덕과 사랑이 있는 사람 - 라고 소개됩니다. 사람들은 그 이름을 통해 그가 어떤 일을 하는 사람임을 알게되고, 그가 하는 일을 통해 그의 이름을 생각하게 됩니다."

 

예수라는 이름은 그러한 의미의 이름입니다. 그가 이 세상에 오셔서 매우 구체적인 구원의 일을 하셨습니다. 그러한 구원의 일을 행하신 분이 누구인가? 에 대해 복음서에서 그 분이 바로 예수라고 말합니다. 그 예수가 구원의 하나님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예수라는 이름은 구원 그 자체입니다. 구원의 하나님이 예수라는 이름의 얼굴을 가진 한 인격으로 이 세상에 찾아오신 것입니다. 영원히 이 현실 속으로 들어온 것입니다. 시간 개념으로 크로노스 안으로 카이로스(하나님의 시간)가 들어온 것입니다.

 

다음으로 주(主)입니다. 이 주는 신약 성서에 무려 600번 정도 나오는 매우 보편적인 호칭입니다. 주라는 말의 본래 뜻은 '소유주'입니다. 사도신경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주시라고 말합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몸, 마음, 영혼의 소유자일 뿐만 아니라, 이 세상 만물을 만드시고 보존해 가시는 주인이시라는 뜻입니다.

 

그리스도인은 현재와 미래에 오직 그 분만이 역사와 우리의 삶의 주인이심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주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이십니다. 그 분 외에 다른 이는 없습니다. 그래서 그 분을 향해 그리스도인은 나의 주로 고백하게 됩니다.

 

기독교 역사를 돌이켜 보면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주로 고백하는 것 때문에 많은 믿음의 선배들이 고통을 당했습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아닌 다른 대상을 주로 고백할 것을 강요당하고, 채찍에 맞고, 옥에 갇히기도 하고, 사자굴에 던져지기도 하고, 십자가에 달리기도 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주에 대한 고백은 피안의 세계에서 이루어지지 않고 현실의 역사 안에서 되어집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역사 안에서 다른 대상을 주로 고백하는 것을 모두 배격합니다.

 

마지막으로 "유일하신 아들"입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번역에는 그 외아들, 신약 성서에는 "독생자"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번역에는 문제가 있습니다. 외아들, 독생자는 생리적으로 부부관계에서 태어나는 아들, 혈통을 이어받은 독자를 의미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러한 의미에서 아들이 아닙니다. 영어로 'His only Son'입니다. 유일한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역시 라틴어로도 같은 뜻으로 되어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유일한 아들이란 의미를 그리스도의 역사 가운데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1) 예수 그리스도가 유일한 아들이라는 것은 그리스도의 내적 차원과 관련된 것으로, 예수와 아버지와의 유일한 관계를 표 현한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와 아버지의 의지, 행동, 본질의 일치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점에서 그는 유일한, 누구 와도 비교할 수 없는 유일한 아들입니다. 그는 하나님 안에 있고, 아버지는 그 안에 있습니다. 그는 자신을 가리켜 "나 와 아버지는 하나이다."라고 했습니다.

 

(2) '유일한 아들'은 하나님과 본질이 같으셨지만 하나님과 같이 되려고 하지 않으시고 스스로 종의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종의 모습에서 그가 하나님의 유일한 아들임이 더욱 분명해 졌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고 계신다는 사실 을 그의 유일한 아들에게서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그는 종 의 삶을 통해서 그 자신이 오직 이스라엘 민족만을 위한 분 이 아니고 전 인류를 위한 분이심을 분명히 드러내셨습니다.

 

(3) 이 유일한 아들은 섬김을 받는 자리에 홀로 있지 않고, 섬김 의 자리에서 자기 자신을 대속물로 내 놓으셨습니다. 그가 자신을 대속물로 내놓으므로 하나님과 인간의 화해를 이루 었습니다. 그 화해로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는 사람들과 형제의 관계를 이루었습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마지막 때에 이 아들을 통해서 하나님이 말씀하신다고 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나사렛 예수의 역사 안에서 우리를 찾고 있는 분으로, 우리를 기다리시는 아버지로, 우리를 섬김의 자리로 불러내시는 분으로 찾아오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과 신자가 아닌 친구가 함께 대화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그래 자네 그리스도인이 됐다지?"

"그렇다네." "그럼 그리스도에 대해 많이 알겠군, 어디좀 들어보세. 그리스도는 어디서 태어났지?"

"모르겠는 걸."

"몇 살 때 죽었지?"

"모르겠네."

"설교는 몇 차례나 했나?"

"몰라."

"아니, 그리스도인이 되었다고 하고선 그리스도에 관해 아는게 없잖아!"

"자네 말이 맞네, 아닌게 아니라 난 아는게 없어서 부끄럽네. 하지만 이 사실 하나는 분명히 알고 있지. 3년 전 난 주정뱅이요 빚도 많았고, 내 가정은 산산조각이 돼가고 있었지. 저녁마다 처자식들은 내가 집으로 돌아오는 걸 무서워 했지. 그러나 이젠 술도 끊었고, 빚도 갚았고, 우리 가정은 화목해졌네.

저녁마다 아이들은 나를 목이 빠져라고 기다리게 되었거든, 이게 모두 그리스도께서 나에게 주신 축복일세.

 

또한 그 분이 나를 사랑하고 계심을 나는 알고 있다네, 이것이 내가 그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이라네."

 

예수님은 우리에게 너는 나에 관한 신학적 지식을 갖고 있느냐? 묻지 않습니다. 너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물으십니다. 예수님은 그의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물으셨습니다. 그 때 베드로는 "주는 그리스도시오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예수께서 그 고백(반석) 위에 교회를 세우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그를 "그의 유일하신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것은 내세 문제가 아닙니다. 현실의 문제입니다. 현실의 역사 안에서 우리가 어떤 사람으로 살아가느냐? 하는 문제와 관련된 것입니다. 이 현실에서 나의 주, 나의 생명, 나의 목적, 나의 의미, 나의 가치가 무엇이냐? 이 문제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고백과 관련됩니다. 현실에서 나는 구원을 받은 사람으로 살아가고 있느냐? 다시 말씀드리면, 나는 하나님과 화해 가운데 살고 있는가 입니다.

 

 

 

 

 

■■성령으로 잉태 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시고 ■■

눅 1:26~38 설교자 : 임 영 수

 

사도신경에서 제일 논란이 많은 부분이 "성령으로 잉태되어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셨다"는 명제입니다. 이 대목은 실제로 예배에 참석하여 신앙고백을 하는 신자들 간에도 침묵으로 그냥 지나쳐 버리곤 하는 부분이기 합니다.

 

이 명제에서 논쟁점, 걸림돌이 되는 것은 예수가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셨다."는 내용입니다. 과연 남자 없이 여자 혼자서 아이를 낳을 수 있는가? 라는 생물학적 문제가 논란의 주된 내용입니다. 특별히 오늘과 같은 과학주의 시대에서 이 문제는 더욱 더욱 크게 걸림돌이 됩니다. 저는 이 논란의 문제에 대해 답변을 제시하고자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한 시도는 무의미한 시간 낭비일 뿐만 아니라 사도신경의 근본 의도와는 다릅니다. 이 명제는 하나님이 인간 세상으로 찾아오실 때 하나님 스스로 택하신 신비입니다.

 

사도신경에 이 명제가 고백의 내용으로 포함된 것은 동정녀가 잉태하는 것이 가능한가, 불가능한가를 문제로 제기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이 명제에서 제시하는 근본 핵심은 "하나님의 성육신" (Incarnation)입니다. "그는 성령으로 잉태 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신 것을 믿습니다."라고 고백할 때 그것은 "하나님이 순수한 인간이 되사 우리 가운데 찾아오신 것을 믿습니다."라는 뜻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택하신 그의 방법을 그대로 존중하고 받아드린다는 의미가 포함됩니다. 이 명제에서 분명히 밝혀지고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인간 역사 속으로 들어오실 때 거의 모든 과정에서 인간이 전 과정을 다 받아드리신 한편 그렇게 하는데 있어서 선제권은 전적으로 그가 갖고 계셨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만약 사도신경에서 이 명제가 빠진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 그의 부활은 없습니다. 이 명제는 십자가와 부활의 명제를 사실화시키는 전(前)사건입니다. 이 명제는 상징도, 비유도 아닙니다. 이것은 구체적인 사건입니다. 이 사건은 인간에 의해 이루어진 사건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사랑하셔서 스스로 자신을 낮춘 사건입니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하나님의 자기비하 사건입니다.

 

로흐만 교수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구원은 하늘과 땅 사이 어느 곳에 머물지 않고 인간의 세계로 들어온다. 인격적인, 집단적인 역사 안에 살고 있는 우리의 세계로, 그러므로 하나님의 아들의 헌신 안에서 우리와 그 사이의 무조건적인 연대성, 동일성, 인간됨이 문제인 것이다."

 

사도신경에서 중요한 명제로 다루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구원이 어떻게 구체적으로 인간의 현실 안에서 시작되었는가 입니다. 다시 말씀 드리면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의 헌신 안에서 우리와 그와 연대성, 동일성이 이루어졌는가? 이러한 물음에 대해 사도신경에서 주는 답변은 "성령으로 잉태 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심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말합니다.

 

오늘 본문은 성화를 그리는 화가들이 그림의 소재로 즐겨 택하는 내용입니다. 본문의 내용은 "수태 고지"입니다. 이 본문을 한 폭의 그림으로 상상해 볼 때 그림에서 지시하는 핵심은 동정녀가 아이를 낳는 기적에 초점을 맞추고 있지 않습니다. 여기서 지시하는 방향은 보라! 하나님의 아들이 한 여인의 몸을 빌려 인간으로 이 세상에 오실 것이라는 데 있습니다. 그러한 하나님의 창조의 일에 은혜를 입은 여인이 약혼한 여자로서는 너무나 위험스러운 일임에도 불구하고 겸허하게 받아드리고 있습니다. 그렇게 하므로 그는 인류 역사에서 최초로 하나님의 아들을 영접하는 사람이 됩니다.

 

이 명제에는 그것이 지시하고 있는 몇 가지 중요한 뜻이 있습니다. 그것들을 정리해서 말씀드리면 다음과 같습니다.

 

먼저 "성령으로 잉태 되사"에서 "잉태되다"는 어떤 근원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새로운 역사의 궁극적인 수태, 그 참된 주도권이 전적으로 창조의 영이신 성령에 의해 이루어졌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의 시작이 인간의 선제권이나, 인간의 능력에 의존하지 않고 전적으로 창조의 영이신 성령에 의해 이루어졌습니다.

 

본문에서 그러한 사실을 확인하게 됩니다. 천사가 마리아에게 찾아와 그가 아들을 낳을 것이라고 알려줍니다. 그 때 "마리아는 자신이 아직 남자를 알지 못한다"고 합니다. 천사는 그러한 일이 남자의 도움 없이 성령의 능력으로 이루어질 것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지나칠 수 없는 분명한 한 가지는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이 되셔서 오심으로, 예수의 역사는 하나님의 역사이며, 동시에 인간의 역사가 되었습니다. 이 역사는 하나님에게서 인간으로, 하늘에서부터 땅으로, 영원한 근원에서부터 우리의 시간 안으로 라는 변경될 수 없는 방향으로 전적으로 하나님의 역사이고, 전적으로 인간의 역사입니다.

 

그 다음으로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시고"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구체적으로 인간의 몸으로 인간의 역사 속으로 들어오실 때 어떤 길을 선택하셨다는 것을 말해주는 내용입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인간됨에 관한 중요한 대목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에 나게 하셨다." (갈 4:4)

 

이 말씀은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의 본질적 차원에 모두 참여하셨다는 의미입니다. 인간의 본질적 차원으로 역사적, 생물학적, 종교, 문화적 차원이 있습니다. 인간의 본질은 이러한 차원을 떠나서 태어날 수도 없고 살아갈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이 모든 것에 다 참여하셨습니다. 이것이 인간됨의 중심되는 실상입니다. 이 중심 되는 사건이 사도신경에서 고백됩니다.

 

우리 모두와 같이 예수는 이 세계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인간으로 어머니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는 종교적 차원, 문화적 차원에 참여하셨습니다. 실제로 예수 그리스도가 인간으로 태어나는 것을 시작으로 새로운 역사가 시작되었습니다. 그 역사와 함께 새로운 문화가 형성되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역사는 이 세상의 차원에 머물지 않고 그가 오신 영원에로 그 목표를 향하고 있습니다. 쿠르트 마르티(Kurt. marti)의 시 가운데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탄생의 울음소리에

신상들을 부순 그 때

마리아의 다리 사이에는

주름 투성이의 붉은 빛

갓난아이가 누워 있었다."

 

이 시에서는 예수가 살과 피를 가진 인간으로 이 세상에 오셨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사도신경에서 단지 성령으로 잉태되었다는 내용만 있고, 마리아에게서 태어났다는 것이 삭제될 때, 예수의 탄생은 순수한 한 인간으로서 탄생이 될 수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의 신화나, 상상으로 끝나게 됩니다. 그래서 반드시 마리아에 관한 내용이 포함되어야 합니다. 만약 인간의 경험이나 상식에 어긋난다고 하여 이 부분을 삭제하게 될 때 그것은 정직하지 못합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에 참여하는 방식에 관한 문제입니다. 칼바르트는 "하나님의 계시가 일어나는 처음 시작에 인간의 이성, 행동, 경건성이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 자신의 문제다. 거기에 하나님 자신이 현존한다."고 했습니다. 동정녀 탄생의 동기에서 중요한 것은 이것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구원의 역사를 위해서 주도적인 역할을 할 어떤 동역자, 협력자를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구원의 역사에 참여 방식에는 인간을 높이고, 그의 업적을 돋보이는 것이 본질적 요소로 되어지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에서 인간은 받아들이고, 듣고, 봉사하는 과제를 수행할 뿐입니다. 여기서 인간의 역할은 매우 수동적입니다. 인간은 오직 선행하는 하나님의 의지에 복종할 뿐입니다. 본문에 이러한 사실에 대해 이렇게 말씀합니다.

 

"주여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그러나 그러한 복종이 매우 소극적이고 정적주의가 아닌 역동적인 것이라는 사실을 마리아의 찬가에서 보게 됩니다.

 

"내 영혼이 주를 찬양하며 내 마음이 하나님 내 구주를 기뻐하였음은 그의 여종이 비천함을 돌보셨음이라.

보라 이제 후로는 만세에 나를 복이 있다 일컬으리로다.

능하신 이가 큰 일을 내게 행하셨으니 그 이름이 거룩하시며, 긍휼하심이 두려워하는 자에게 대대로 이르는도다.

그의 팔로 힘을 보이사 마음의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고, 권세 있는 자를 그 위에서 내리치셨으며 비천한 자를 높이셨고, 주리는 자를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으며 부자는 빈 손으로 보내셨도다." (눅 1:46~53)

 

이 본문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은총을 입은 인간성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총을 입은 마리아는 매우 적극적이고 역동적입니다. 그리고 자기 자신에 대해 깊이 개의치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총에 그가 가담했다는 사실만으로 감사하고 기뻐합니다. 그리고 거기에 적극적으로 참여합니다. 매우 수동적이었던 마리아는 놀라울 정도로 적극적입니다. 거기에는 후회나 한탄이 없습니다. 그 사건을 통해서 자신의 이름이 널리 알려졌다는 것에 기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자기와 같은 비천한 여인을 돌보셨다는 데 그의 기쁨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는 자기에게 되어질 일이 얼마나 위대하고 큰일인가를 봅니다. 그 일이 마리아 자신에게 국한된 일이 아니며 그를 넘어서 마리아 자신이 존경의 인물 숭배의 인물로 부각되지 않습니다. 그는 오직 하나님의 은총을 입은 한 여인으로 참여한 바 되었습니다.

 

우리는 때때로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에서 우리의 지식, 의지, 힘, 교만이 얼마나 방해물이 되곤 한다는 것을 경험합니다. 그러한 것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보다는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우는 것을 봅니다.

 

이 마리아의 찬가는 "성령으로 잉태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셨다."는 사도신경의 명제가 역사적으로 이루어지는 과정에 참여한 여인이 그 사건을 이루신 하나님을 찬양한 노래입니다. 이 찬가는 사도신경의 내용과 같은 의미의 것입니다. 이것은 마리아의 찬양인 동시에 그의 고백이며, 간증입니다. 이 찬가는 성령으로 잉태되었다는 사도신경의 내용을 더욱 확고하게 해주는 주해서이기도 합니다. 이 찬가의 중심은 마리아 자신이 아닙니다. "능하신 이가 큰 일을 행하셨다."는 것입니다.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아버지 하나님이 큰 일, 새 일을 행하셨다."는 것을 노래합니다.

 

신학자 윌리엄 바클레이의 글에 "고독한 생애"라는 글이 있습니다. 이 글은 바클레이가 직접 쓴 것이 아니고, 그도 역시 다른 곳에서 얻은 자료입니다. 그 내용은 이러합니다.

 

"세상에 잘 알려져 있지 않은 마을에 유대인을 부모로 해서 태어난 한 사내가 있었다. 어머니는 농사꾼 여자였다. 그는 또 다른, 역시 세상에는 알려지지 않은 작은 마을에서 자라고 있었다. 그는 서른 살이 될 때까지 목수간에서 일하고 있었다. 그리고 나서는 지방을 떠도는 설교사가 되어 3년을 지냈다.

 

책 한 권도 쓰지 않았고, 일정한 작업장도 없었고, 자신의 집도 없었다. 가정을 이룬 적도 없었고, 대학에 들어간 일도 없었다. 큰 마을에 발을 들여놓은 적도 없었고, 자기가 태어난 마을에서 200마일 이상 바깥으로 나간 본 적이 없었다.

 

위대한 인물에게 흔히 따르게 마련인 깜짝 놀랄 만한 일은 한 가지도 하지 않았다. 남에게 보일 소개장 따위도 없었으므로 스스로 자기를 보아주기를 바라는 것에만 기댈 수밖에 없었다.

 

알몸뚱이 하나, 타고난 힘 이외에 이 세상과 관련된 것이라곤 무엇하나 없었다. 얼마 되지 않아, 세상은 그를 적대하기 시작하였다. 친구들은 다 도망쳐 버렸다. 그 중의 한 사람은 그를 배반하였다. 그는 적의 손에 넘겨졌고, 형식적인 재판에 끌려나가게 되었다.

 

그는 십자가에 못 박혔고, 두 사람의 도둑 사이에 세워졌다. 그가 죽음 직전에 있을 때, 처형자들은 그가 지상에서 가지고 있는 유일한 재산, 곧 그의 웃저고리를 놓고 제비뽑고 있었다. 그가 죽자, 그 시체는 내려졌고, 빌린 무덤에 눕혀졌다. 한 친구의 모처럼의 작별이었다.

 

오랜 열 아홉의 세기가 지나가 버렸다. 오늘날 그는 인류의 중심이며 전진하는 대열의 선두에 서 있다. 일찍이 진군한 모든 군대, 일찍이 건설된 모든 해군, 일찍이 개최된 모든 의회, 일찍이 통치한 모든 왕들 - 이것들을 모두 한데 모은다고 하더라도 인류의 생활에 끼친 영향력에 있어 저 고독한 생애에는 도저히 미치지 못하였다고 말하더라도 결코 잘못은 아닐 것이다.

 

이것은 예수의 생애에 대한, 참으로 아름다운 묘사입니다. 그는 진정 인류의 중심이며, 영원을 향해 달려가는 대열의 선두에 서 계십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저자는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예수를 바라보자"고 했습니다. 인간으로 오신 이 예수는 모든 사람의 희망이며, 기쁨이십니다. 그는 우리를 하나님의 영원한 보좌 앞으로 인도하십니다. 그는 길이요, 생명이요, 진리이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도신경의 이 명제는 성탄절의 역사이기도 합니다. 만약 인간 역사에 성탄절이 없었다면 이 역사는 진정 희망이 없었을 것입니다. 인류의 희망은 성탄절에서 새롭게 시작되었습니다. 이 날에서 역사, 문화, 종교가 새로운 목표를 지향해 가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시작된 역사는 영원을 지향해 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 역사의 대열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 성령으로 잉태 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셨다는 것을 고백합니다. 우리의 이러한 고백은 하나님의 구원이 하늘과 땅 사이 어느 것에 머물지 않고 인간의 세계로 들어오셔서 우리 인간과 같이 되셨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가 인간 세계에 찾아오셔서 무엇을 하셨는가에 대해 사도신경의 그 다음의 명제에서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다고" 말합니다.

 

 

 

 

 

 

 

■■빌라도에게 고난 받으사 ■■

 

 

눅 23:13 - 25 설교자 : 임 영 수

 

사도신경에 대표적인 두 인물이 등장합니다. 그들은 마리아와 빌라도입니다. 이들은 남성과 여성이라는 점에서 대조적일 뿐아니라 하나님의 구원사에서 그들의 위치와 존재 의미에 있어서 전혀 반대입니다. 마리아는 하나님의 구원사에서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이고, 순종하므로 하나님의 구원사에 참여했습니다. 그러나 빌라도는 자신의 야망과 자신의 권좌를 유지하기 위해 세상과 야합하므로 예수를 거부했습니다. 마리아는 자신의 것을 모두 포기하고 예수의 잉태를 받아들이므로 모든 것을 얻습니다. 그러나 빌라도는 예수를 거부하므로 모든 것을 다 잃어버렸습니다. 마리아는 하나님의 은총을 입은 지극히 존귀한 인간성을 대표합니다. 그러나 빌라도는 하나님의 은총을 거부한 비참한 인간성을 대표합니다.

 

빌라도는 AD26-36까지 팔레스타인을 다스린 로마 제국의 제5대 총독입니다. 그는 로마 총독으로서는 유일하게 예수를 직접 대면했습니다. 유대인 역사가 요세프스에 의하면, 빌라도는 로마기를 거룩한 도시로 가져와 유대인들을 불쾌하게 했다고 말해 줍니다. 그뿐만 아니라 그는 로마 신들의 이름과 형상이 조각된 황금 방패를 성전 안에 걸기도 했고, 수도를 건설하기 위해 성전세를 전유하기까지 했다고 합니다. 누가복음에 의하면 빌라도 치정하에서 유대인들이 성전에서 제사를 드릴 때 로마 병정들이 그들을 살해하는 잔인한 일까지 자행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눅 13:1)

 

그 당시 유대는 로마의 통치지역 가운데 시리아 지역의 한 부분이었습니다. 빌라도는 시리아 지역에 속한 유대 지역 행정 대리인으로 있으면서 그 지역 행정 책임과 재판권을 맡았습니다. 본래 그의 근무처는 가이샤라 빌립보에 있었습니다. 유대인의 명절인 유월절에 예루살렘에 와 있을 때 예수께서 유대 산헤드린 앞에서 심문을 받으신 뒤 빌라도에게 끌려오게 되었습니다. 그 때 빌라도는 예수를 대면하게 되었습니다.

 

유대인들이 빌라도에게 예수를 고소한 죄목은 모두 세 가지입니다.

○ 예수는 민중을 선동하여 반란을 일으키려 했다.

○ 로마 황제에게 세금을 바치지 말라고 했다.

○ 자칭 왕이라고 했다.

 

빌라도는 예수의 사건을 다룰 마음이 없어 그때 역시 예루살렘에 와있던 갈릴리 지방의 영주인 헤롯 안디바에게 예수를 보내 그에게 사건을 떠맡기려 했습니다. 헤롯은 오래 전부터 예수의 소문을 듣고 보기를 원하던 차에 예수를 직접 뵙고 매우 기뻐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예수를 뵙기를 원했던 것은 인간적인 호기심에서였습니다. 예수께서 그의 호기심을 충족시켜 주지 않자 조롱하고 모욕한 뒤 다시 빌라도에게 보냈습니다. 본래 빌라도와 헤롯의 사이가 좋지 않았는데 이 사건으로 인해 두 사람의 사이가 친구가 되었습니다. 이것은 세상의 왕들과 통치자들이 하나님이 기름 부으신 자에 대해 모의를 꾸몄다는 시편의 말씀이 성취된 것입니다. (시 2:2)

 

빌라도는 세 번씩이나 예수의 무죄를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무기력하게도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으라는 군중들의 압력에 무릎 꿇었습니다. 빌라도는 자신의 권좌를 유지하기 위해 예수를 포기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결국 빌라도 자기 자신을 포기하는 일이 되었습니다. 요세프스에 의하면 빌라도는 자살로 생을 마쳤다고 합니다.

빌라도에 관한 전설 두 가지가 있습니다.

빌라도는 당시 로마 황제였던 디베리우스에게 자신이 심문했던 예수의 행적, 그가 운명할 때 일어났던 놀라운 일들에 대해 자세히 보고했습니다. 그 보고를 받은 디베리우스 황제는 빌라도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네가 보고 한 대로라면 그는 유대인의 왕 그리스도임에 틀림없다. 너는 당연히 그를 죽이지 말고, 안전하게 나에게 데려 왔어야했다."고 했습니다.

그후 빌라도가 예수의 죽음을 확인하고 나서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저와 제 옆에 서있는 제 아내 프로클라(Procla)를 사악한 유대인들의 수에 넣어 계수하지 말아 주십시오. 당신은 당신이 십자가에 못박혀야 한다는 것을 예언했습니다. 그러나 저를 용서해 주십시오."

그때 하늘로부터 음성이 들렸습니다.

"모든 세대와 모든 이방의 가족들이 너를 복되다 할 것이다. 왜냐하면 너의 날에 나에 관해 예언된 모든 일이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너는 내가 다시 올 때 나의 증인으로 서야 할 것이다. 그때 나는 이스라엘의 열두지파와 나의 이름을 고백하지 않은 사람들을 심판할 것이다." 그리고 나서 빌라도는 자살하였고, 그의 아내도 함께 죽었습니다.

 

다른 하나의 전설은 다음과 같은 내용입니다.

스위스의 루체른이라는 도시는 매우 아름다운 도시입니다. 그 도시에 필라투스(Pilatus)라는 해발 2121m가 되는 높은 산이 있습니다. 필라투스라는 이름은 구름으로 덮여 있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빌라도와 관련된 것입니다.

 

황제 디베리우스가 병들었습니다. 그는 빌라도에게 그의 병을 낫게 하기 위해 예수를 로마로 보내 달라고 사자를 보냈습니다. 빌라도는 예수는 이미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다고 고백했습니다. 사자는 예루살렘에 사는 베로니카(Veronica)라는 여인을 만났습니다. 베로니카는 예수와 관련된 전설의 주인공으로 친절하고 자비심이 많은 여인이었습니다. 베로니카는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로 향해 가시면서 땀을 흘리는 것을 목격하고 그의 손수건을 예수께 건네주었습니다. 예수께서 그 손수건을 다시 베로니카에게 주었을 때 그 손수건에 예수님의 초상이 그려져 있었다는 전설이 있습니다. 그가 디베리우스 황제의 사자에게 그 손수건을 주었습니다. 디베리우스는 그 손수건으로 병이 나았습니다.

 

그리고 나서 디베리우스는 빌라도를 심문하기 위해 로마로 불러 들였습니다. 그때 빌라도는 예수님이 입었던 솔기없는 옷을 입고 디베리우스 앞에 나타났습니다. 빌라도의 모습을 보는 순간 빌라도에 대한 디베리우스의 분노는 다 사라졌습니다. 그리고 빌라도를 보냈습니다. 그후 다시 빌리도를 불러 그의 옷을 벗기고 그에게 사형을 언도했습니다. 그후 즉시 빌라도는 자살했습니다. 디베리우스는 빌라도의 목에 맷돌을 달아 티베르(Tiber) 강에 던졌습니다. 그러자 곧 풍랑이 일고 비바람이 일어났습니다. 다시 그 시신을 건져 비엔나로 보내 로네(Rhone) 강에 던졌습니다. 역시 똑같은 재난이 일어났습니다. 마지막으로 루체른(Lucerne)으로 보내 산으로 둘러 쌓여 있는 연못에 던졌습니다. 그 연못은 아직도 거품이 일고 끓고 있다고 합니다. 그 연못은 필라투스 산에서 내려다 볼 수 있습니다.

 

빌라도와 관련된 이러한 전설에서 우리는 빌라도 치정 때에 빌라도가 예수의 사건에 분명히 연루되어 있었다는 확증을 갖게 됩니다. 그리고 이 전설을 통해 예수의 사건이 공허하게 지어낸 이야기가 아닌 지난 역사의 한 시점에 분명히 닻을 내리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에 빌라도가 등장한 것은 매우 주목할 만한 일입니다. 초대교회 때부터 사도신경에 빌라도의 자리를 확보해 두고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니고, 매우 깊은 신학적인 배려가 함축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신앙의 역사적인 관계성 때문입니다. 기독교 신앙고백에서 무시간적인 일반 역사를 중요시하지 않습니다. 그 대신 일반 역사의 한 시대에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가 펼쳐졌다는 사실을 중요시 합니다. 그 구원사가 펼쳐진 그 때와 그 시대 상황은 도저히 무시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일반사 자체 때문이 아닙니다. 그 때에 있었던 하나님의 구원의 사건 때문입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일반 역사가 중요시 됩니다.

 

한 자연인이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하고 세례를 받을 때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 안으로 받아들여지고, 하나님의 백성의 계약의 역사 안으로, 해방의 역사 안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역사는 저 피안의 세계에서 전개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의 역사에서 일상적인 삶의 상황 안에서 전개됩니다.

 

사도신경에서 빌라도의 자리가 확보되어 있는 것은 바로 그러한 것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만물을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 해방의 역사가 이 현실의 역사 안에서 분명히 펼쳐졌습니다. 그것을 보증해 주고 확증해 주는 것이 빌라도입니다. 빌라도는 분명히 역사적인 인물입니다.

 

사도신경에서 빌라도 의미는 신앙과 역사의 관계에서 구원사의 시간을 확증시켜 주는 의미가 있는 동시에, 또 다른 의미가 있습니다. 그것은 기독교 신앙에서 하나님의 구원사에는 거룩하고 순결한 동정녀 마리아와 같은 사람만 관련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의 구원사의 무대에 지성인이나, 엘리트나, 신분이 있는 사람만이 출현하는 것도 아닙니다. 성서의 족보에 나타난 대로, 변변찮은 여자들과 남자들이 구원사의 무대에 등장합니다.

이러한 사실은 기독교 신앙은 역사를 꾸며 내거나, 비현실적인 세계를 지향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오히려 있는 그대로의 현실의 역사를 받아들이고, 그리스도안에서 현실 역사의 의미와 목적을 다시 이해해 가게 됩니다.

 

마지막으로 사도신경에서 빌라도와 연관되어 주목해야 할 중요한 의미 한 가지 더 있습니다. 그것은 빌라도는 자연인이 아니고 그 시대 세상을 지배하던 로마의 권세 아래서 한 지역을 다스리던 로마 총독이었습니다. 그러한 점에서 사도신경에 정치적인 영역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사도신경에서 빌라도는 "위로부터 온 권세"를 불행하게도 그 본래의 목적대로 사용하지 못하고 잘못 오용했습니다. 빌라도라는 한 인격에서 위로부터 온 권세는 매우 왜곡된 것이 되었습니다.

 

예수는 그 시대 로마에 항거한 열심당원도 아니며, 무정부주의자도 아니었습니다. 그는 가난한 자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구원의 소식을 전한 구원자였습니다. 빌라도는 질서를 수호하는 자로서 그 질서를 근본적으로 바르게 세우는 정의의 편에 서지 못하고, 오히려 그 질서를 파괴하는 불의의 세력과 손잡으므로 그의 권좌를 유지해 가려고 했습니다. 사도신경에서 빌라도에게서, 또는 밑에서라는 말에는 이러한 정치적 의미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 다음으로 "고난 받으사"라는 내용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헤롯과 본디오 빌라도의 통치 아래서 그들에게 시달림을 받으며 살았다거나 우울증 환자로, 금욕주의자로, 염세주의자로 살아가셨다는 뜻이 아닙니다. 예수께서 현실의 역사에서 어떤 삶의 방식으로 살아가셨다는 것을 반영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삶은 섬김의 삶으로 그를 세상에 보내신 하나님의 뜻을 완성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께서 고난을 받으셨다는 것은 예수의 삶이 무엇을 목적으로 하는 삶이었다는 것을 밝혀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우리는 예수의 고난의 삶의 역사에서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고난, 실패, 죽음의 현실에 내버려두시지 않으셨다는 것을 확증하게 됩니다. 예수의 고난에서 우리는 우리의 고난의 삶의 현실로 찾아 오셔서 우리와 함께 연대하고 계시는 하나님을 보게 됩니다.

 

기독교 신앙에서 예수 믿으면 고난, 질병, 죽음에서 면제받는다고 하지 않습니다. 그 대신 고난을 현실적으로 받아들이게 하고, 그 고난의 현장에서 시험에 들지 않고, 악에 빠지지 않고 하나님과 함께 승리해 가는 삶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약속이 있습니다. 기독교 신앙에서 중요시하는 회개는 현실을 인정하고 받아들이지 않는 삶에서 현실을 인정하고, 자신의 책임과 죄를 받아들이는 데서부터 시작됩니다.

 

예수가 고난을 받으셨다는 고백은 하나님이 우리를 비참한 현실에 내버려두시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고난 가운데 혼자 있지 않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무관심하고 무정한 하나님이 아니시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고난을 운명으로 받아들이거나, 고난 가운데서 자기 학대를 하지 않습니다. 고난 가운데서 희망을 갖고 하나님을 찬양하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기독교 신앙에서 구원의 근원은 인간 스스로 심신의 수양을 쌓아서 신비의 경지에 도달해 가는 무 시간, 무 역사에 근거하고 있지 않습니다. 우리의 구원은 지난 날 역사의 한 시점 빌라도의 치정 때에 빌라도 앞에서 심문을 받고 십자가에 달려 죽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그 분 안에서 우리를 해방의 삶으로 부르고 계시는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그 분 안에서 우리의 삶의 역사는 새롭게 전개되기 시작합니다. 우리는 그 역사 안에서 새로운 생의 패러다임을 갖게 되고, 삶의 새로운 원리들을 따라 살아가는 법을 배워가게 됩니다. 우리는 그 역사 안에서 낡은 것들을 하나 하나 벗어놓고 새로운 문화의 옷을 갈아입어 가게 됩니다. 그 새로운 역사의 지평에서 우리는 이 현실을 넘어서 영원한 본향을 우리의 생의 목적지로 삼게 됩니다.

 

이 현실의 역사 안에서 전개된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의 지평에는 막달라 마리아와 같은 창녀도 있고, 마태와 같은 세리도 있고, 베드로와 같은 어부도 있고, 바울과 같은 박해자도 있습니다. 좀더 거슬러 올라가서 라합과 같은 기생도 있고 다말과 같은 여인도 있습니다. 이들 모두 이 현실의 역사의 그 어느 한 때에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에 들어왔습니다. 그러나 빌라도는 이 구원사에 들어오지 못했습니다. 그 스스로 이 때를 거부한 것입니다. 이 세상의 역사의 한 시점에서 예수를 직접 대면한 빌라도는 예수보다는 자신의 야망과 안전을 더 중요시했습니다. 결국 그는 예수와 함께 그 자신을 잃어버렸습니다.

 

예수를 거부하는 것은 현재와 영원 모두를 잃어가는 것입니다. 예수를 거부하는 일은 결국 자신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죄인이며 자신이 하나님의 사랑이 필요한 사람이며, 자신이 구원 받아야 할 사람이라는 사실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예수를 거부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자기를 위해 약속하신 새로운 삶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예수를 거부하는 것은 참 인간이 되기를 거부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인간은 누구나 그가 살고 있는 이 현실의 생의 여정에서 의도적이건 우연이건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에 초대를 받게 됩니다. 하나님이 찾아오셔서 그의 마음의 문을 두드리십니다. 그 때의 선택은 그 자신에게 달려있습니다.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

 

사 53:4~9 / 고전 1:21~24 설교자 : 임 영 수

 

 

 

오늘은 사도신경 두 번째 명제 예수님에 관한 내용에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다."는 대목에 대해 말씀 드리겠습니다.

 

십자가는 고대 사회에서 너무나 잘 알려진 비극적인 형틀입니다. 고대 사회에서 십자가 형틀이 널리 사용되었던 국가들은, 이집트, 페니키아, 칼타고, 페르시아, 앗시리아, 인도, 그리스, 로마 등입니다.

 

십자가는 유대적인 형틀은 아닙니다. 본래 유대적인 사형집행 제도는 목매다는 것 (민25~4), 불살라 죽이는 것 (레20:14), 돌로 쳐 죽이는 것 (레20:27)등입니다. 유대 관습에서 사람을 나무에 달 때에는 죄지은 사람을 죽인 후에 나무에 매달았습니다. (신21:22~23) 그것도 "하나님께서 주신 기업의 땅을 더럽히지 않기 위해"(신21:23) 밤 동안 반드시 나무에 달린 자를 끌어내려 땅에 묻었습니다. 유대 관습에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은 자"(신명21:23)였습니다.

 

십자가 형틀은 고대 사회에서 매우 무섭고, 수치스러운 형틀이었습니다. 고대 사회에서 십자가형은 주로 정치법, 반사회적인 범에게 집행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죄목은 이미 말씀드린 대로 로마 황제와 로마에 반역한 죄였습니다.

 

복음서 기자들이 전하는 십자가 사건에 대한 보고는 어느 정도 차이가 있습니다. 마태가 전하는 십자가에 관한 기사에서는 예수께서 운명의 순간에 하나님과 단절로 깊은 고통을 느끼셨다는 것에 강조점을 두고 있습니다. 마태복음에 기록된 예수님의 십자가 기사는 다음과 같습니다.

 

 

"빌라도가 바라바는 놓아주고 예수는 채찍질한 뒤에, 십자가에 처형하라고 넘겨주었습니다. 그 때에 총독의 군인들이 예수를 총독 관저로 끌로 들어가서, 예수의 옷을 벗기고, 주홍색 옷을 입힌 다음에, 가시로 면류관을 엮어 머리에 씌우고, 오른손에 갈대를 들게 하였습니다. 얼마동안 예수를 희롱한 다음에 다시 예수가 입었던 옷을 갈아입히고, 십자가에 못박으려고 끌고 나갔습니다. 그들은 가다가, 시몬이라는 구레네 사람을 만나서, 강제로 예수의 십자가를 지고 가게 했습니다. 그들은 골고다(해골)라는 곳에 이르러, 포도주에 쓸개를 타서 예수께 마시게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 맛을 보시고 거절하셨습니다. 그들은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고, 그의 옷을 제비를 뽑아서 나누어 가졌습니다.

 

그 때에 강도 두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는데 하나는 오른쪽에, 하나는 왼쪽에 달렸습니다. 낮 열두 시부터 어둠이 온 땅을 덮어서, 오후 세 시까지 계속되었습니다. 세 시쯤에 예수께서 큰소리로 '엘리 엘리 라마사박다니'라고 외치셨는데 그 뜻은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입니다. 그리고 나서 예수는 운명하셨습니다. 그 때 성전 휘장이 위에서 아래까지 찢어졌고, 땅이 흔들리고, 바위가 갈라지는 지진이 일어났습니다.

 

날이 저물 때에, 아리마대 출신으로 요셉이라고 하는 한 부자가 빌라도에게 찾아가서 예수의 시신을 내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요셉은 예수의 시신을 가져다가, 깨끗한 삼베로 싸고, 바위를 뚫어서 만든 자기 새 무덤에 모신 다음에, 무덤 문에다 큰 돌을 굴려 놓고 갔습니다." 이상이 마태가 전해주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의 내용입니다.

 

사도 바울은 십자가에 못박혀 죽은 예수가 율법에 충성을 기울이고 있는 유대인들에게와 잘 계몽된 헬라 사람들에게는 어리석은 것이라 했습니다. 그러나 바울 자신은 그 어리석게 여겨지는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을 본다."고 하였습니다.

 

 

사도신경 고백에서 예수와 관련된 이 명제를 빠트리지 않고 고백에 포함시키고 있는 것은 십자가 사건이 단순히 한 인간 예수의 마지막 순간을 다룬 것이 아니라 거기에는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신경을 믿음으로 고백하는 사람들에게 십자가는 어리석은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능력이며,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오늘 저는 십자가를 통해 비춰지고 있는 그 신비스러운 능력과 지혜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만약 저의 눈에 십자가가 어리석은 것이었다면, 이 시간 이 자리에 설 수 없었을 것입니다. 저에게서 십자가는 희망의 문이며, 저의 미래입니다. 십자가가 없었다면 저의 삶은 희망이 없었을 것입니다. 십자가는 저에게만 아니라 모든 사람의 희망이며, 인류의 미래입니다.

 

먼저 십자가는 인간 예수의 생의 역사와 전기적인 면에서 그가 누구였으며, 그가 무엇을 목적으로 하고 살았는가? 를 말해주는 확증의 표식입니다. 로흐만 교수는, "나사렛 예수가 십자가에 처형된 사실은 역사적으로 잘 보증된 예수의 역사에 속한다." 고 했습니다. 예수가 완전히 인간이었다는 것은 이미 예수의 탄생에서 확증된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 예수의 십자가 사건에서 예수는 분명히 이 세상에서 한 인간의 생을 살았던 인물임을 더욱더 확증해 줍니다. 로흐만 교수는 "이제 예수의 십자가 처형과 그 죽음에서 그의 인간성과 인간 존재 자체가 엄숙히 궁극적으로 고려된다."고 했습니다.

 

이 예수의 십자가는 예수가 이 세상에 인간으로 오셔서 인간의 삶의 과정을 빠트리지 않고 연대하여 살아가셨다는 사실을 입증해 줍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십자가는 예수의 삶의 역사의 절정이 됩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예수가 어떻게 인간과 연대 가운데서 살아가셨는 가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해주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히4:15)

 

다른 사람을 도울 수 있는 사람은 인간이 겪은 모든 고난의 경험을 가진 사람이라야 할 수 있습니다. 경험만 가지고는 안됩니다.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이타적인 사람일 수록 다른 사람과의 연대 가운데서 그들의 고통에 참여합니다. 어린아이를 극진히 사랑하는 어머니는 어린 아이가 아플 때 함께 아픔을 느끼고, 아이가 기뻐할 때 같이 기뻐합니다. 그것은 아이와 사랑의 연대감 가운데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골고다 언덕의 십자가는 인간과 연대에서 살아가신 예수의 생의 역사에서 절정입니다. 십자가는 예수가 어떤 생을 살아 가셨다는 것을 가장 확실하게 보증해주고 있습니다.

 

하인리히 포겔(Heinrich Vogel)은 이 십자가의 의미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어떤 사람이 이 세상에서 가장 희망이 없는 자리가 어디인가?라고 물을 수 있다. 그러면 그는 불치의 병을 앓고 있는 병자들만 있는 병동, 아우슈비치와 같은 집단 수용소, 죽음의 가스실, 죽음을 기다리며 서있는 감옥의 행렬, 평생 앞을 보지 못하고 살아가는 히로시마의 희생자들, 혹은 가장 고통스럽고 절망스러운 다른 자리를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세상에서 가장 깊은 절망의 자리는 하나님을 그토록 전적으로 신뢰하던 그 인간이 하나님 자신으로부터 버림을 받아 달려있는 곳이다." 라고 했습니다.

 

십자가는 이 세상에서 가장 절망적인 자리입니다. 우리 인간의 생의 역사에서 그 누구나 이 절망의 자리를 피해갈 수 없습니다. 그 자리는 바로 하나님과의 단절의 자리며, 죽음의 자리입니다. 예수는 바로 그 자리에까지 내려가셔서 인간 존재의 삶과 자신을 연대시키셨습니다. 그 자리에서 예수는 철저히 하나님과 단절을 체험했습니다. 거기서 예수는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라고 절규하셨습니다.

 

예수에게 있어서 십자가는 전적으로 다른 사람을 위해 존재하는 삶의 표현입니다. 그러한 예수의 삶의 역사의 절정이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는 우연적이거나 돌발적이거나 예정된 것이라기 보다 인간 예수의 삶의 역사의 마감입니다.

 

그 다음 하나님의 구원사에서 '십자가'는 하나님과 화해의 자리며, 속죄의 자리, 새로운 희망의 문, 그 자체입니다.

 

어떤 여의사가 의과 대학생 시절부터 호기심에서 복용하던 마약이 나중에는 완전히 습관이 되어 거기서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그는 전문의가 되고 나서 점점 마약으로 깊이 빠져 들어가는 자기 자신을 더 이상 숨길 수 없어 자살하기로 결심하고, 어느 비오는 날 저녁 강가로, 찾아갔습니다. 그는 깊은 절망과 좌절의 자리에서 죽음을 체험하며, 마지막으로 하나님께 살려 달라고 부르짖었습니다. 잠시 후 그에게 하나님의 은혜의 빛이 임하면서 자신이 마약의 힘에서 풀려남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그후 그는 평생을 마약 중독자 갱생을 위해 헌신하며 살고 있습니다.

 

십자가는 절망과 단절, 죽음의 자리입니다. 그러나 한편 골고다 언덕의 십자가는 부활의 아침이 내다보이는 자리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십자가 없는 부활은 없고, 부활 없는 십자가는 있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제2차 대전 때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많은 유대인들이 가스실에서, 십자가 형틀에서 죽어갔습니다. 그 절망의 자리에서 유대인들은 하나님이 자신들을 완전히 버리셨다고 단정해 버리거나 그는 사랑의 하나님이 아니라고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엘리 비젤은 그 절망의 자리 십자가에서 하나님 자신이 바로 그 십자가에 달려 고통하고 계신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그들이 고난에서 찾은 해답이었습니다.

 

골고다 언덕 위의 십자가는 우리의 삶의 한 부분입니다. 인간은 그 자리를 피해갈 수 없습니다. 인간의 삶의 그 어둡고 절망적인 부분을 체험해가며 살아가는 인간들이 유토피아를 꿈꾸기도 하고, 깊은 허무와 좌절에 빠지기도 합니다. 십자가는 유토피아와 허무주의 사이에 놓여있는 매우 좁은 생명의 길입니다. 우리는 유토피아나, 허무주의라는 허구적인 생의 환상의 길에서 가 아닌 , 십자가의 좁은 길에서, 우리를 찾아오신 하나님, 우리를 기다리고 계시는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로흐만 교수는, 십자가는 유일한 우리의 필요이며, 우리의 희망을 세우는 곳이라고 했습니다 .그는 "십자가의 희망은 권력의 사랑 안에 있지 않고 세상을 이기는 사랑의 능력 안에 있다."고 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윤리적인 관점에서 십자가는 우리가 본받아야 할 희생적 삶, 자기를 내놓는 삶,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의 표현입니다. 인간의 현실적 삶을 숙명적으로 받아드리고 체념 가운데서 살아가는데서 십자가의 삶은 불가능합니다.

 

십자가 삶은 악, 불의, 억압에 대해 저항하고, 의의 길을 걸어가고자 하는 결단의 삶, 그리고 가난한 자 억눌린 자, 고통 가운데 있는 자들의 삶과 자신을 연대시키는데서 이루어집니다. 기독교 역사를 돌이켜 보면 교회가 계속해서 불의에 대해 저항해 오고, 디아코니아를 포기하지 않는 것은 바로 그러한 이유에서입니다.

 

에쿠아돌의 로메로 신부는 매우 사색적이며, 독서를 즐기며, 조용히 살아가는 명상적인 사람이었습니다. 그러한 그가 그 지역을 담당하는 주교직 책임을 맡아 현실에 동참했을 때, 그의 앞에 전개된 세상은 도저히 침묵할 수 없는 현실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의 정의, 공의, 사랑, 회개를 외쳤습니다. 그는 군사 독재 치하에서 무참히 죽어가며, 고통당하는 민중들과 함께 했습니다. 결국 그는 암살되었습니다.

 

골고다의 십자가는 모든 사람이 본받아야 할 삶의 모범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인류의 희망이며, 미래입니다. 성 금요일은 인류 역사의 동터오는 부활의 새 아침을 알리는 거룩한 날입니다.

 

사도신경에서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히셨다는 것만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그 다음 반드시 죽으셨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복음서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는 십자가에서 잠깐 기절하신 것이 아니라 완전히 죽으셨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이 세상에서 예수의 하나님께 복종의 삶, 헌신의 삶, 사랑의 삶의 마지막 마감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는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심으로 이 세상에서 그의 삶을 끝냈습니다. 예수는 이 세상에서 인간의 마지막 것까지 감수하심으로 그의 생을 마감하셨습니다.

 

이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은 결국 그의 사랑하는 아들이 십자가에 못박히고 죽는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그 이상 더 다른 어떤 것을 요구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자기 희생이십니다. 하나님 자신이 십자가에 자신을 내놓으신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발견한 사도 바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끓을 수 없으리라. (롬 8:38-39)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십자가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분명히 어리석은 것입니다. 십자가의 도가 어리석게 여겨지는 것 자체가 인간이 누구인가를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이 누구인가를 모른 다는 것은 인간의 문제가 무엇인가를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은 어떤 사람의 생각대로 고상하지도 않고, 지혜롭지도 않고, 도적으로 완전하지도 않습니다. 십자가라는 절망의 자리는 우리 인간 실존의 궁극적인 자리입니다. 십자가는 우리 인간이 하나님을 떠나 있다는 것, 우리는 결국 죽음을 면할 수 없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 죽음 앞에서는 인간의 모든 의미 있는 것들이 허무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가 이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우리는 새로운 미래를 갖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이 십자가는 새로운 삶의 시작의 자리가 되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기다리고 계시는 아버지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사흘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셔서

 

고전 15:1~11 설교자 : 임 영 수

 

사도신경의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명제에서 이 부활의 내용은 십자가와 함께 매우 중요합니다. 이 시간 저는 역사적 사건으로서 부활에 대해 말씀드리고, 그 부활의 의미, 그리고 마지막으로 부활이 현실의 삶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신학자 윌리엄 바클레이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의 중심은 부활이다. 부활이 없었더라면, 우리는 십자가의 참 뜻을 몰랐을 것이다. 부활이 없었더라면, 십자가는 한 사람의 착한 어른이 비극적 죽음을 마친 것으로 끝나 버리고 만다. 그 소문은 몇 세기를 거쳐 오늘날까지 전해졌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이상의 일은 없었을 것이다. 아니, 그런 소문은 쉬 사라져 버렸을 것임이 틀림없다. 우리가 십자가를 알고 있는 것은 부활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를 그리스도답게 하는 일은 부활이다."

 

로흐만 교수는, "믿음으로부터 부활이 정초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부활에서부터 믿음이 정초 된다." 고 했습니다. 저는 이 견해에 전적으로 찬동합니다. 기독교 신앙에서 부활에 대한 믿음, 부활 의식, 개념이 먼저 있었고, 그것이 나중에 살아나서 부활에 대한 케루그마가 생겨난 것이 아닙니다. 그와는 반대로 먼저 부활이 역사적 사건으로 있었고, 믿음이 그 사건에 기초하게 되었습니다.

 

특별히 사도 신경에서 "장사된 지 사흘만에"를 강조하는 것은 역사적 사건으로서 부활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고 장사된 후 사흘이라는 시간은 예수를 따르던 사람들에게, 좀더 나아가서 역사적으로 매우 어두운 밤이었습니다. 이러한 사실에 대해 사도신경의 내용과 복음서의 내용이 일치합니다.

 

 

복음서 기자들이 강조하는 것이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장사되고 나서 사흘이라는 시간은 매우 절망적이며 어두운 밤이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를 따르던 제자들은 모두 깊은 절망감에서 그들의 앞날을 위한 대책을 강구하기 시작했고, 일부는 고향 길에 오르기도 했습니다. 예수를 따르던 여인들은 예수의 시신을 잘 보존하기 위해 준비한 향품을 가지고 무덤으로 찾아갔습니다. 그들은 가면서 누가 그들을 위해 무덤 문에서 돌을 굴려 줄 것인가를 염려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사흘만에 그러한 어두운 밤이 새로운 역사의 아침으로 바뀌었습니다. 예수의 부활 소식을 접한 제자들은 놀라기도 하고, 의심하기도 했습니다. 한편 기뻐하기도 했습니다. 예수의 부활이 몇몇 목격자들의 놀라움과 기쁨의 경험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예수의 부활이 있은 후 몇 가지 괄목할 만한 역사적 사건이 생겨났습니다.

 

교회가 생겨났습니다. 예수가 부활하기 전까지만 해도 교회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수의 부활 후 부활의 신앙에 기초한 성도들의 공동체인 교회가 생겨났습니다.

 

주님의 날이 생겨났습니다. 주중의 첫 번째 날인 일요일이 부활을 기념하는 주님의 날(주일)로 바뀌었습니다.

 

부활을 목격하고 경험한 제자들의 삶에 극적인 변화가 생겼습니다. 그들은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 다시오심을 증거 하는 증인들이 되었습니다.

 

본문에서 사도바울은 역사적 사건으로서 예수의 부활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다.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사,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두 제자에게와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그 중에 지금까지 대다수는 살아 있고 어떤 사람은 잠들었으며, 그후에 야고보에게 보이셨으며 그 후에 모든 사도에게와,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

 

공관복음서와 요한복음에 기록되어 있는 부활 사건에 대한 기사 배열에 다소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예수의 부활 그 자체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거나 견해를 달리 하지는 않습니다. 복음서 기자들이 전해주는 예수의 부활은 분명히 역사적 사건이면서 동시에 역사를 초월합니다.

 

복음서 기자 마태는 예수의 빈 무덤을 강조합니다. 죽은 자와 산 자의 관계는 다른 어떤 것보다 무덤과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예수께서 무덤에 장사된 후 분명히 돌로 무덤 문을 막고 밀봉까지 하고 로마 병사들이 그 무덤을 지켰습니다. 그런데 그 무덤이 빈 무덤이 되었습니다.

 

누가의 경우 부활하신 예수의 실체를 강조합니다. 예수의 제자들 가운데 두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한 삼십리쯤 떨어진 엠마오라는 동네로 가던 도상에서 예수를 만나게 됩니다.

 

요한은 예수의 부활의 역사성과 초월성을 강조합니다. 제자들이 함께 모여 있을 때 문을 모두 닫아 걸었는데 그 자리에 예수께서 나타나셔서 손과 옆구리를 보여주시면서 자신이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확증시키셨습니다. 요한은 예수의 부활 사건이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사건임을 강조합니다.

 

 

그 다음으로 부활의 의미에 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예수의 부활은 십자가 이전의 삶의 관계들의 회복, 죽은 시신의 환생, 부활 이전 것의 연장이 아닙니다." 부활은 마지막 것들의 드러남입니다. 여기서 마지막 것들이란 죽음 이후의 인간의 생에 관한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 최종적인 것들은 인류의 운명을 포함해서 모든 피조 세계의 운명입니다. 예수의 부활은 "만물을 새롭게 하시는."하나님의 그 미래의 시간들 가운데 감취어져 있는 것을 드러내신 것입니다.

 

잠시 저의 개인적인 신앙 경험을 말씀드리겠습니다. 현재 저의 신앙의 패러다임은 만물을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약속에 있습니다. 이패러다임에 도달하기까지 여러 차례 신앙의 재구성이 있었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기독교 신앙에서 성장하면서 형성된 저의 하나님과 인간 이해는 여러 차례 새롭게 재 구성되는 과정들이 있었습니다. 그러한 과정에는 방황, 좌절, 아픔, 당황이 수반되곤 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저의 영혼의 닻은 "만물을 새롭게 하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에 내려지게 되었습니다.

 

저는 이 소망의 약속에서 저의 개인적인 삶의 통합, 통합적인 목회 비젼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세상의 미래를 긍정적으로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이 소망의 약속은 저의 개인의 경건, 개인적인 업적이 아니고 하나님의 영원한 약속이기 때문에 더 이상 흔들림이 없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저는 이 소망의 약속이 무엇인가에 대해 한 동안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그것에 대한 해답을 예수의 부활에서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예수의 부활을 통해서 하나님의 새로운 미래의 시간 안에 있는 저 자신의 미래를 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새로운 미래 가운데 있는 저의 모습은 하나님께로부터 온전히 용서되고, 받아들여지고, 화해되고, 치유되고, 보상된 나 자신이었습니다.

 

그 후부터 그 약속의 소망을 바라보며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시험에 들거나, 혹시 좌초해서 넘어질 때 저는 깊이 좌절하거나, 깊은 심연의 골짜기로 떨어져 저를 억압하거나, 학대해서 만신창이가 되지 않습니다. 그 대신 "나는 하나님의 희망의 약속 가운데 있는 사람"이라는 희망과 확신 가운데서 넉넉히 다시 일어나고도 남음이 있었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저는 이 세상을 에덴동산에 비추어 보지 않고 하나님의 그 완성의 시간 안에서 보게되었습니다.

 

예수의 부활은 만물을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새로운 미래의 시간들에 대한 시작입니다. 사도바울은 그 새로운 시간의 시작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후5:17)

여기서 말하는 새로움은 일반적인 것, 추상적인 것이 아닙니다. 지금 현실적으로 가능해진 것, 하나님의 전적인 새로운 세계에서 가능해진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의 부활을 통해 비춰진 인류의 미래는 심판과 저주가 아닙니다. 평강과 희망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희망, 기쁨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는 부활의 지평 위에서 무엇이 거짓이며, 참인지를 분명히 보게 됩니다. 진정한 희망과 환상을 구별할 수 있습니다. 부활은 모든 어두움의 실체를 그대로 다 폭로합니다. 우리는 죽음이 생의 마지막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죽음 앞에서는 모두 무릎을 꿇습니다. 사탄은 죽음을 앞세워 우리를 협박하군 합니다. 그러나 예수의 부활로 그것이 얼마나 거짓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 세상에서 교회의 희망과 비전은 교회 자체의 크기나 재정적 풍부나, 교인들의 지적 수준에 있지 않습니다. 교회의 희망과 미래는 하나님의 새로운 시간에 있는 그 미래입니다. 그것이 교회가 지향해 가는 목표입니다.

 

 

마지막으로 부활이 우리의 현실에 끼치는 영향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궁극적인 운명이 죽음이나 지옥이 아니라는 사실을 예수의 부활에서 파악하게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희망 가운데 있는 자녀들이라는 엄연한 사실을 부활을 통해서 받아드리게 됩니다. 부활이 과거의 삶의 연장이 아니고 새로운 미래의 시간이라는데서 우리는 현실을 운명으로 받아드리지 않게 됩니다. 이 문제에 대해 여러분의 이해를 돕기 위해 지극히 일반적인 이야기 하나를 소개해드리겠습니다.

 

"일찍 부모를 여의고 할아버지 손에서 자란 에드워드 보크라는 소년이 있었습니다. 그는 집이 너무 가난하고 어려웠기 때문에 눈물을 흘리면서 고향을 떠나야만 했습니다. 그의 고향은 조그마한 섬이었습니다.

섬을 떠날 때 할아버지는 어린 에드워드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너한테 꼭 일러주고 싶은 말이 있다. 너는 이제부터 어디를 가든지 너로 말미암아 네가 있는 곳이 어떤 모양으로라도 보다 나아지도록 힘써야 한다. 이것이 너에게 주는 유일한 밑천이다. 너는 이것을 명심해서 실천하며 살아라.' 하며 아픈 마음을 달래면서 어린 손자를 보내었습니다.

 

돈 한 푼 없이 미국 본토에 상륙한 에드워드는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가장 손쉬운 신문팔이를 시작하였습니다.

그는 많은 사람이 오가는 거리 한 모퉁이에서 신문을 팔면서,

'나는 지금 보스턴이라는 도시 길모퉁이에서 신문을 팔고 있다. 이 길가를 무슨 모양이라도 보다 나아지게 해야겠다.'하고 에드워드는 생각했습니다.

 

 

그는 신문을 파는 틈틈이 모퉁이에 뒹구는 종이 조각과 담배 꽁초를 집어 치우기도 하고 조그만 빗자루를 마련해서 때때로 쓸기도 했습니다. 손님들은 그 곳에만 오면 틀림없이 신문을 살수 있다는 기쁨과 길거리가 한결 깨끗해진데 대해 에드워드에게 감사하지 않는 사람이 없게 되었습니다.

 

에드워드는 그 뒤 몇몇 다른 직장을 거쳐서 커트스 출판사의 사무실과 서적 판매장을 청소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내가 오기 전보다 여기가 좀더 깨끗해져야 한다. 서적과 잡지도 좀더 많이 팔려야 한다."는 다짐과 함께 할아버지의 교훈을 생각하군했습니다.

그가 온 뒤 그 회사는 티 하나 없이 깨끗해졌고 판매원들의 일까지 도와주었기 때문에 판매활동도 한결 원활해졌습니다. 그는 그 회사에서 점원이 되고 판매부장이 되고, 경제부장, 편집국장 지배인 등의 직위를 거쳐 중역이 되고 사장으로까지 성장하였습니다.

 

에드워드는 '나는 지금 미국의 유력한 시민이며 경험도 경제력도 가졌으며 국민에게 영향을 미칠 출판물도 갖고 있다. 나는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이 미국을 보다 좋은 나라로 만들어야만 한다.'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그 할아버지가 준 인생 철학을 마음 깊이 새기면서 국내에서 여러 사회운동과 문화사업을 벌렸고, 각종 출판물을 값싸게 농촌까지 보급시키는 정열을 불태우다가 1925년 은퇴했습니다."

 

"너는 이제부터 어디를 가든지 너로 말미암아 네가 있는 곳이 어떤 모양으로라도 보다 나아지도록 힘써야한다."

저는 에드워드의 할아버지의 교훈과 그것을 그대로 실천하며 살아간 에드워드의 삶에서 부활의 빛을 보게 됩니다.

 

어두움 가운데 부활의 빛이 침투할 때 현재보다 더 나은 세상을 보게 됩니다. 더 소망스러운 미래를 갖게 됩니다. 그러면서 그 소망의 삶이 현실로 나타나게 됩니다. 그래서 부활 신앙이 불의, 독재, 거짓, 폭력을 거부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것이 참된 것이 아님을 알고 새로운 미래를 향해 일어서게 됩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부활은 현재부터 시작되는 새로운 시간입니다.

 

본훼퍼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그리스도 부활의 기적은 죽음의 우상화를 근본적으로 폐기시킨다. 죽음이 최종적인 말을 하는 곳에서는 지상적인 것이 모두 무(無)로 된다. 지상적인 것을 영원한 것이라고 강변하는 것은 생을 가볍게 취급하는 놀이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은 생에 대한 냉담한, 경멸 적인, 발작적인 긍정이다. 새 인간, 향상되어져야 할 새로운 세계, 새 사회가 말해지지만, 그 새것이 생과의 아무런 관련성을 갖지 못할 때, 죽음의 우상화는 다시 현저히 나타난다. 죽음의 힘은 이미 꺽여졌다. 부활과 새로운 삶의 빛이 죽음의 세계 위로 비치는 것이 인식되는 곳에서는, 삶으로부터 영원성이 요구되지 않는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우리는 삶으로부터 전부를 받아드리느냐, 전부를 거절하느냐가 아니다. 우리는 선과 악을, 중요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들을 선택하고, 기쁨과 슬픔을 받아들인다."

 

라기츠(Leonhard Ragaz)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사건이든, 인간이든, 개인이든, 국민이든 간에, 짓밟혀 으스러진 모든 것의, 죽여진 모든 것의 부활을 믿는다. 그리스도의 열려진 무덤을 통하여 끝없는 부활과 삶의 빛이 세계 안으로 흘러 들어온다. 이것이 부활이고 부활 신앙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고, 사흘 만에 죽은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음을 고백합니다.

 

 

이러한 고백에는 이전 것이 지나가고 새 것이 된 존재로 산다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더 이상 죽음의 권세 아래에 있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우리는 부활의 새 생명을 가진 사람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한숨, 탄식 대신에 부활의 노래가 있어야 합니다.

 

프랜시스 쉐이퍼(Francis Schaeffer)는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오직 한 가지 과제만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어떻게 부활의 삶을 살아내느냐이다."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는 어떻게 율법을 잘 지켜 구원을 얻느냐에 있지 않습니다. 이미 부여받은 새 생명의 삶을 어떻게 살아가느냐에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영원한 새 생명이 약속으로 주어져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새 하늘과 새 땅이 열려져 있습니다. 우리는 그 약속을 받은 자녀들답게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의 사랑, 헌신, 섬김이 구원을 쟁취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그러한 삶은 부활의 새 생명을 가진자로서 살아가는 삶의 방식입니다. 우리는 소망이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우리의 미래에 대한 확실한 보장을 받고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담대할 수 있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죽은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이것은 그가 다시 환생하셨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능력과 영광 가운데 있는 새로운 존재로 자신을 드러내신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의 그 부활을 통해서 진정한 새 것이 어떤 것인가를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그 새 것에 대한 약속을 갖고 있습니다.

 

 

 

 

 

 

■■하늘에 오르사 ~ 심판하러 오시리라 ■■

 

 

행 1:6~11 / 히 8:1~6 설교자 : 임 영 수

 

오늘 말씀드릴 내용은 사도신경의 예수 그리스도와 관련된 명제에서 마지막 "하늘에 오르사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거기로부터 살아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입니다. 이 진술은 그리스도인들에게 풍부한 신화적인 상상력을 불러 일으키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여기서 예수께서 하늘에 오르는 장면을 저 우주 공간에 있는 어떤 별들 가운데 하나에로 올라가는 모습으로 상상할 수 있습니다. 그곳에 하나님의 화려한 보좌가 있고, 예수께서 그 보좌에 앉으셔서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를 내려다 보고 계십니다.

 

우주 공간 어느 별에 올라가 계시는 예수께서 하시는 일은 주로 인간의 잘못된 일을 감시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상상하게 되는 동기는 그 다음에 "그가 다시 심판하러 오시리라."는 것 때문입니다. 그가 다시 오실 때에는 무서운 형벌의 시간입니다. 그러한 이해에서 하나님은 공포의 대상이 됩니다. 예수의 승천에 대한 이러한 신화적인 상상은 우주 과학이 발달하면서 점점 어려워집니다. 요즈음 신앙을 갖는 것이 옛날 보다 더 어렵게 느껴지는 것은 우리 나름대로 상상의 날개를 펴서 머무를 수 있는 신화의 공간이 없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칼 융은 자기에게 찾아오는 환자들 중 많은 수의 환자가 정신질환과 관련된 것 보다 종교적인 문제와 관련된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한 종교적인 문제로 천당과 지옥의 개념이 없어졌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사람들은 과학이 발달하면서 과거에 가지고 있던 천당, 지옥 개념이 무너지면서 마음의 안정을 잃어버렸다고 했습니다.

 

사도신경에서 문제시하는 것은 잃어버린 천당, 지옥의 개념을 다시 세워갈려는 것이 아닙니다. 또는 예수께서 은하계에 있는 어느 유성에 올라가셨다는 것을 규명하려는 것도 아닙니다.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예수의 존재 방식을 말하려는 것입니다. 여기서는 예수께서 부활하시기 전과 후 그의 존재 방식과 사역이 어떻게 바뀌었는가를 진술하고있습니다.

 

히브리서에 기록된 대로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그리고 영원토록 동일하십니다." (히13:8) 그러나 그의 존재 방식과 사역의 형태는 부활하기 전과 후에 완전히 다릅니다. 부활하시기 전에는 성육신 하셔서 십자가의 삶을 사시다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 그의 지상의 사역을 완수 하셨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신 후 그는 "하늘에 오르사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거기로부터 살아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는 것으로"바뀌었습니다.

 

사도신경 이 대목에 "오르다. 앉다. 오시리라."는 세 개의 동사가 있습니다. 이들 동사의 시제는 다 각각 다릅니다. 과거, 현재, 미래로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각 동사가 독립된 동작으로 끝나지 않고 처음 동작이 그 다음 동작으로 이어집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첫 번째 동사가 그 다음의 동사의 동작을 지시합니다. 이것은 존재 양식의 변화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 오늘, 영원토록 변함이 없습니다. 그렇지만 그의 존재 방식과 사역의 형태는 바뀌었습니다. 어떻게바뀌었는가? "오르시고, 앉으시고, 오시는" 것으로 바뀌었습니다.

 

먼저 "하늘에 오르사"는 "지옥으로 내려가셨다."는 진술과 서로 대칭됩니다. 이것을 고대 사회 사람들이 가지고 있었던 세계관으로 문자적 해석을 한다면 예수께서 땅속에 있는 지옥으로 내려 가셨다가 천상 세계로 올라가신 것입니다.

 

 

고대 사람들은 이 세상이 하늘, 땅, 지옥의 삼층천으로 되어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러한 고대시대의 세계관에서 이 진술을 이해한다면 지옥과 하늘은 엄연히 대조적인 장소입니다. 예수는 아주 음산한 지하의 감옥과 같은 곳에 계시다가 저 천상의 세계로 옮기워져 가신 것입니다. 사도신경의 이 대목을 그러한 개념으로 받아드릴 때 예수는 오늘과 같은 우주시대에서 우주비행사들과 같은 분으로 상상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그러나 이미 말씀드린 대로 사도 신경에서 지옥이나 하늘은 공간 개념이 아닙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 방식과 사역의 형태와 관련된 표현입니다. 예수께서 지옥으로 내려 가셨다는 표현은 인간과 연대하셔서 인간의 가장 어두운 삶의 부분까지 경험하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하늘로 오르셨다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과 영광에 참여하셨다."는 것을 의미 합니다. 그러므로 오르셨다는 동작은 곧바로 하나님 우편에 앉으셨다는 동작으로 이어집니다. 이것은 변화의 구체적인 상태를 표현하는 것입니다. 구약의 개념으로 하나님 우편은 하나님과 동등한 권위를 가진다는 뜻입니다.

 

로흐만 교수는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께서 하나님의 오른편으로 오르심은 피안의 천공의 세계로 들어가심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하나님과 함께 있는 예수의 존재, 하나님의 차원에서 예수의 능력과 영광 안에 계시는 그의 존재를 의미한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으로부터 하나님의 존재 양식에서 우리와 함께 계신다. 상징적으로 표현한다면, 그는 우리의 중보자로서 하나님과 함께 계신다. (히7:25)"고 했습니다.

 

부활하시기 전의 예수의 존재 방식은 '종의 모양으로 이 세상에 오셔서, 사람들을 섬기며, 십자가를 지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후에 그는 하나님의 능력과 영광에 참여하는 영원한 대제사장으로 계십니다. 이미 말씀드린대로 "하나님 아버지 우편에 앉아 계신다."에서 하나님 아버지 우편은 장소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예수에게 부여된 하나님과 동등한 권위를 의미합니다. 만약 예수께서 이러한 존재 양식으로 계시지 않는다면 우리의 미래는 얼마나 암담했을지 모릅니다. 구약 시대 대제사장은 본래 인간이 이 세상에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하나님께로 가지고 나와 해결을 받고자 할 때 그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는 역할을 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영원한 대제사장으로 계신다는 것은 그 분이 우리의 생의 문제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우리를 돌보아 주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우리 인간의 문제는 이 세상의 그 어떤 것으로도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영원한 대제사장으로 모신다는 것은 그의 삶이 이 세상에 속한 삶이 아니며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속해 있음을 의미합니다. 사도 바울은 그것을 "하늘에 있는 시민권자"로 표현했습니다. (빌3:20)

 

히브리서 저자는 이 희망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계시니 승천하신 이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 지어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히4:14~16)

 

부활하신 예수께서 대제사장으로 계시면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현실에 존재해 가시는 구체적인 존재방식과 사역의 한 형태가 교회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이 세상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구체적인 존재방식과 사역의 한 형태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는 예수께서 보여주신 종의 모습으로 이 세상을 섬기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 사람들이 교회를 바라볼 때 예수 그리스도를 연상하게 됩니다. 교회는 이 세상에 있지만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며, 예수 그리스도께 속해 있으며,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함께 계십니다. 교회는 현실에 있지만 영원 가운데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심판하러 오시리라."입니다. 이 진술에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중요한 의미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첫째 모든 피조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 아래 있다는 의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 밖에 있는 것은 없습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최후의 승리를 의미합니다. 사도 바울은 이 문제와 관련해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빌2:10~11)

 

그래서 입을 가진 자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고 시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없이는 결국 죽음에 삼킨바가 되고 말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 이외에 다른 길이 없습니다. 강요에 의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무지, 오만, 반항 가운데 더 이상 얽매어 있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소설 '벤허'의 작가 루 윌리스 는 미국 인디애나 주 브룩빌에서 태어나 법률을 전공하던 중 멕시코 전쟁이 일어나자 지원병으로 군대에 입대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남북 전쟁 때 육군 소장으로 북군을 지휘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처음에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이 거짓말이라고 주장하는 글을 쓰기로 결심하고, 그 내용을 제1장에 쓰고, 이어서 제2장 첫 페이지를 쓰다가 도저히 부인할 수 없는 사실 앞에 무릎을 꿇고 '당신은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라고 부르짖으며 예수 그리스도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임을 증명하는 소설 벤허를 썼습니다. 사실 벤허는 주인공 벤허의 이야기라기보다 예수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둘째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신다."는 진술은 이 세상에 사는 우리들에게 삶의 가치, 목적, 윤리의식을 부여해줍니다. 만물을 새롭게하시는 하나님의 궁극적인 목적이 아직 드러나지 않고 있습니다. 이러한 때 우리는 가만히 앉아서 그 때를 기다리면서 텔레비전에 넋을 잃고 있을 때가 아닙니다. 아직 우리에게 남아있는 일을 해야합니다.

 

사도행전 본문 말씀에 제자들이 예수께 하나님 나라를 회복할 때가 이 때입니까? 라고 물었을 때 때와 시기에 관한 것은 너희에게 속한 사항이 아니라고 말씀하시고 오직 증인의 임무를 충실히 해가라고 하셨습니다. 증인의 삶은 분명한 삶의 가치, 목적, 윤리적 책임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기간 동안 특별히 기뻐하며 모든 사람들에게 관용을 나타내 보이라고 했습니다.

 

"주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빌4:4~5)

 

관용의 삶은 서로 나눔의 삶이며, 돌봄의 삶입니다. 주께서 오신다는 이 진술은 우리로 하여금 이기심, 욕심에서 해방시킵니다. 그 대신 다른 사람에게 사랑과 관용을 베푸는 삶으로 나타납니다.

 

이것은 마지막 심판 때가 어둡고 암울한 저주스러운 시간이 아니며, 기쁨과 영광의 시간임을 뜻하는 것입니다. 이 희망, 기쁨, 영광을 극히 제한된 특별한 사람들만이 아닌, 모든 사람이 공유할 수 있도록 이 세상에 알릴 책임이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습니다.

 

세째 우리에게 마지막 때를 기다리며 살아갈 수 있는 희망이 아직도 남아 있다는 것은 이 현실에서 참되고 신실하게 살아가게 하는 동인이 됩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이 세상을 긍정할 수 있는 동인이 됩니다. 사도 바울은 이 문제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끝으로 형제들아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사랑 받을 만 하며 무엇에든지 칭찬 받을 만하며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든지 이것들을 생각하라." (빌4:8)

 

무엇에든지 삶을 긍정할 수 있는 동인은 그 분이 다시 오신다는 희망에 있습니다. 이 날은 궁극적인 해방의 날입니다. 이 날은 경건한 자들이 쌓아 올린 공적의 결과가 아닙니다. 이 날은 예수의 산상 수훈 팔복에 나타나 있는 가난한 자, 우는 자, 온유한 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자비한 자, 마음이 깨끗한 자, 평화를 만들어 가는 자, 의를 위해 박해를 받는 자들에게 최후의 날, 최종적인 해방의 날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사에서 이 마지막 때에는 성공한 자들, 자신의 뜻을 관철한 자들, 세상에서 승리의 월계관을 쓴 자들의 실체가 드러나는 시간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자들이 교회에서 까지 득세하며, 칭찬과 영예의 갈채를 받는 현실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최후의 날에는 그렇지 못합니다. 모든 세상적인 가치가 전도되는 날입니다. 그들이 오히려 슬퍼울며 탄식하는 날이기도 합니다. 예수가 다시 오신다는 이 약속은 의를 위해 고난 당하며,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들에게 보다 큰 희망과 용기와 격려를 주는 약속입니다.

 

마지막으로 이날은 모든 것이 파멸해버리는 허무의 시간이 아닙니다. 만물을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과 영광이 온전히 드러나는 완성의 시간이며, 새로운 시작의 시간입니다. 기독교 신앙에서 마지막은 모든 것의 끝이 아니며 시작입니다. 이 시작은 이 세상으로 다시 환생해서 지나간 옛것의 삶을 다시 시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 시작은 하나님의 영광 가운데서 이루어지는 새 차원의 시작입니다. 개인적으로는 하나님과 온전히 화해된 삶, 용서된 삶, 치유된 삶, 보상된 삶으로서 시작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히 변함이 없습니다. 그는 지금도 대제사장으로서 하나님 우편에 계시면서 우리를 위해 중보자의 역할을 담당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그를 힘입어 언제나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해 하나님께 담대히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는 우리가 당하는 모든 고난을 다 경험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우리를 깊이 이해하실뿐만 아니라 우리를 도우실 수 있습니다. 그를 통해서 우리에게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길이 새롭게 열렸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구원사에서 볼 때 지금은 밤이 깊어가고 낮이 가까워 오고 있습니다. 이 문제에 대해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둠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하거나 술취하지 말며 음란하거나 호색하지 말며 다투거나 시기하지 말며, 오직 주 예수그리스도로 옷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롬13:12-14)

 

여기서 우리가 분명히 확인하게 되는 것은 어둠의 시간이 물러가고 하나님의 시간이 점점 가까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시간은 저주와 심판의 시간이 아닌 해방의 시간입니다. 그 해방의 시간을 기다리는 우리는 좌절하거나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기뻐하며 감사하며 모든 사람에게 관용을 나타내 보이며 그때를 기다려 야 하겠습니다.

 

 

 

 

 

 

■■나는 성령을 믿습니다 ■■

 

행 2:1~13 설교자 : 임 영 수

 

오늘 사도신경의 세 번째 명제인 "성령"에 대해 말씀 드리겠습니다. 우리에게 성령과 관련해서 회상되는 몇 가지 인상들이 있습니다. 그러한 것들은 부흥사, 열광하는 신도들, 방언이나 예언기도, 간증등입니다.

 

저는 저의 성장과정에서 어느 한 때 성령을 부흥사들의 전유물로 생각한 때도 있었습니다. 그것과 연계해서 성령은 인간을 흥분시키는 어떤 신비스러운 물질로 오해한 때도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성령 체험을 몹시 열망했습니다. 제가 성령체험을 갈망한 것은 성령 받았다고 하는 사람들이 교회 내에서 특별한 사람들처럼 대우받고 선망의 대상이 되곤 하였기 때문입니다.

 

제가 지난 날 한때 이해한 성령에 대해서 한편의 글을 쓴다면 상당한 분량이 될 것 같습니다. 성령은 부흥사들의 전유물도 아니며, 인간을 흥분시키거나 자극시키는 신비스러운 물질도 아닙니다. 우리가 성령에 대해서 잘못 이해하게 될 때 우리의 삶은 신앙을 갖지 아니한 만 못할 정도로 혼미한 상태에 빠지게 되고, 정신적으로 병들게 될 수도 있습니다.

 

사도신경에서 말하는 성령은 '창조의 영', '생명의 영', '하나님의 영"인 동시에 "그리스도의 영"이기도 합니다. 성령은 인간의 종교적 체험의 대상이 아닙니다. 성령은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삶 가운데서 임마누엘 하시는 힘이요, 그 하나님을 우리의 하나님 아버지로 고백하게 하고 받아드리며, 그에게 복종해가게 하는 능력이십니다.

 

 

우리가 "나는 성령을 믿습니다."고 할 때 성령은 창조의 영, 생명의 영, 하나님, 그리스도 영으로서, 그 분이 하시는 새 창조의 사역을 믿습니다. 라는 뜻이 됩니다. 성령이 하시는 일에는 성령이 지향해 가는 분명한 목적이 있습니다. 성령이 지향해 가는 목표는 하나님의 새 창조입니다. 저는 이 시간 사도신경에서 "나는 성령을 믿습니다."고 할 때 그것이 구체적으로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가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먼저 성령은 지금까지 우리가 듣고 이해한 사도신경의 첫 번째 명제 하나님, 그리고 두 번째 명제 예수 그리스도를 현재적 사건이 되게합니다.

 

사도신경 첫 번째 명제가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입니다. 이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이 인간에게서 멀리 떨어져 계시지 않고 인간 세계로 들어오셔서 "임마누엘" 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하나님이 어떻게 우리와 함께 계시는가? 그것이 어떻게 가능한가?라는 질문을 던지게 됩니다. 거기에 대해서 일찍이 예언자 이사야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사7:14)했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통해서 우리 가운데 계십니다. 하나님이 그러한 방식으로 우리와 함께 계시도록 하는 힘이 성령입니다.

 

로흐만 교수는 이렇게 말합니다.

"성령은 친밀하게 가깝게 계시는 하나님이시다. 이미 구약에서 하나님의 영은 놀라움을 일으키고, 기뻐하게 하는 하나님의 현존으로 나타낸다.

 

하나님은 시작과 마지막의 주이실 뿐 아니라 현재의 주이시며, 하나님은 높이와 깊이의 주이실 뿐 아니라, 나의 영혼의 주이시며, 피조물의 하나님이실 뿐만 아니라 개인적인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내가 내 자신에게 가까이 있는 것보다 더 가까이 계신다. 그는 바꿀 수 없는 나의 하나님이시다."라고 했습니다.

 

한편 하나님은 우리에게 가장 가까이 계실 뿐만 아니라 우리 인간과 교제를 원하시고, 우리 인간을 그의 교제의 상대로 부르고 계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 인간을 그의 창조의 동역자로 부르고 계십니다. 성령은 우리 인간이 하나님과 교제를 갖게하고, 그의 창조의 사역에 참여하게 하고, 그의 뜻에 복종해가게 하십니다.

 

그 다음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이 현재적 사건이 되게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사건은 분명히 지난 역사에 있었던 역사적 사건입니다. 그러나 그 사건은 현재적이며 미래적인 성격을 갖습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 죽으셨고, 부활하셔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계십니다. 그가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셨지 만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역사에는 여전히 죽음, 질병, 전쟁과 같은 온갖 어두운 일들이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여기에서 한 가지 질문이 제기됩니다.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사역은 예수께서 하늘로 올리워 가신 것으로 끝났는가?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그의 사역이 이 역사의 현장에서 계승될 수 있는가? 이러한 질문에 대해서 사도신경에서는 세 번째 명제인 성령으로 답변해주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이후,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서 영원히 사라지지 않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면서 시공을 초월해서 하나님의 새 창조의 사역을 계속해 가십니다. 그리스도의 사역은 그가 하늘로 올라가신 후 단절된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일에는 공백이 있을 수 없습니다.

 

오히려 그리스도께서 하늘에 올라 가셔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므로, 그리스도의 사역은 전 인류로, 전 피조물로 확대되게 되었습니다. 예수께서 그의 제자들에게 이별을 하시고 이 세상을 떠나신 것은 그리스도께서 세계 속으로 새롭게 진군해서 들어오시는 시작이었습니다. 그 일이 주님의 영이신 성령을 통해서 계승되어지고 있습니다.

 

성령에 의해서 이루어지고 있는 새로운 창조의 일은 인간의 깊은 내적인 세계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성령은 정처 없이 허공에 떠다니는 영이 아닙니다. 성령은 먼저 인간의 내적 세계에 깊이 관여하는 분이십니다. 사도 바울은 성령의 이러한 특성과 관련해서 "우리의 몸은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는 성전"(고전3:16) 이라고 했습니다.

 

성령은 "진리 영", "사랑의 띠", "자유의 영"이기 때문에 강요가 아닌 자유하는 가운데서 인간을 새로운 가치, 목적, 의미를 가지고 살아가는 부활의 희망의 지평 위에 올라서게 합니다.

 

"예수의 영이신 성령의 분명한 목적은 인간으로 하여금 그의 생명을 잃게 하는 것이 아니라, 얻게 하는데 있습니다. 둘째 아들의 비유에서 표현되어 있는 것과 같이 인간이 제 정신이 들고, 진정 인간일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독교 신앙에서 인간의 진정한 자기 실현은 성령의 내재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성령의 내재 가운데서 자신의 비참함을 보고, 좌절하면서, 하나님께서 그를 부르시고 계시는 새로운 삶의 지평으로 올라서게 되는데서부터 인간의 진정한 자기실현이 이루어집니다.

 

성령의 새 창조로 이루어지는 새로운 피조물인 인간에게서 제일 먼저 나타나는 새로운 현상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이 자신과 무관하지 않은 사건이 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 나의 아버지로 고백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와 가장 가까이 계시는 분, 우리를 찾고, 기다리시는 분, 우리를 용서하시는 분이심을 알게 됩니다. 그것은 예수께서 단순히 그렇게 말씀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삶 자체가 하나님을 그러한 분으로 드러내셨기 때문입니다.

 

제가 주일학교 학생시절에 전도사님으로부터 들은 감동적인 실화가 있습니다. 어떤 곳에 남편을 일찍이 여의고, 유복자로 키운 아들과 함께 살아가는 어머니가 있었습니다. 그 어머니는 다른 어머니와는 달리 얼굴 형체가 일그러져 있었습니다. 아들이 어린 유아시절이었을 때에는 어머니의 얼굴이 크게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아들이 자라 초등학교에 다니게 되면서부터, 아들에게는 그러한 얼굴을 가진 어머니가 부끄럽게 여겨졌습니다.

아들이 학교에 가면 아들의 어머니를 본 친구들이 일그러진 어머니의 아들이라고 놀려댔습니다. 하루는 아들이 울면서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와 가방을 내동댕이치면서 내일부터 학교에 가지 않겠다고 합니다. 어머니는 아들에게 그 사연을 물었습니다. 아들은 어머니의 얼굴 때문에 친구들에게 놀림감이 된다고 했습니다.

 

"어머니! 다른 친구의 어머니들은 다 예쁜데 어머니는 왜 그렇게 생겼어?"하고 아들은 더욱 슬프게 웁니다. 어머니는 아들의 말을 듣고 아무 대꾸도 하지 않고 장롱 서랍에서 앨범을 꺼내 첫장에 있는 젊은 부부의 사진을 아들에게 보여 주었습니다.

"얘야, 이 사진을 좀 보렴. 이 사진에 있는 여자가 이쁘냐, 미우냐."고 물었습니다.

"엄마, 이 여자 너무 예뻐." 아들은 대답했습니다.

"얘야, 이 여자가 바로 나란다." 고 대답했습니다.

그때 아들이, "엄마 그런데 지금은 왜 그렇게 미워."

어머니는 아들의 눈에 눈물을 닦아주면서 지금까지 숨겨왔던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너의 아버지는 내가 너를 뱃속에 배었을 때 그 해에 사고로 세상을 떠나시고, 나는 너를 아버지 없는 아이로 세상에 낳았다."

 

"어느 날 너를 안방에 재워놓고 집 앞에 있는 빨래터에 나가 빨래를 하고 있는데 갑자기 불이야 하는 소리를 듣고, 뒤를 돌아보니 바로 네가 누워 있는 우리 집에 불길이 휩싸여 있지 않겠니. 달려와 보니 동네 사람들이 와서 불을 끄고 있었고, 너는 그대로 방에서 자고 있었다. 나는 불길을 헤치고 방으로 뛰어 들어가 너를 이불에 싸서 밖으로 뛰어 나오다, 그만 불길에 이렇게 화상을 입게 되었단다."

 

어머니의 말을 다 듣고 난 아들은 그 다음부터 그의 어머니의 얼굴이 하나도 부끄럽게 여겨지지 않았습니다. 그 다음부터 친구들에게 용감하게 훌륭한 어머니를 자랑했습니다. 아들은 일그러진 어머니의 얼굴 모습에서 자기를 극진히 사랑하는 어머니를 보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와 가장 가까이 계실 뿐만 아니라, 우리를 극진히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길을 열어주신 우리의 구세주가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구주임을 고백할 수 있는 것은 성령이 그리스도의 영이기 때문입니다.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구주로 고백하게 할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신 하나님을 아버지로 고백하게 합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의 능력입니다.

 

성령의 새 창조의 일은 인간의 내면 세계에서부터 시작되지만, 거기에만 국한되거나, 머무는 것은 아닙니다. 성령의 운동은 인간 밖으로, 전 세계 안으로 들어가도록 자극하고 이것을 이루어 가십니다. 이것은 새로운 마음만이 아니라, 새로운 공동체, 새로운 영의 지평을 의미합니다.

 

성령은 형체가 없는 무 형체의 환영이 아니고, 성육신을 목표로 하는 그의 몸을 창조하는 창조의 영이십니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성령이 창조하는 몸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갈5:19~21)고 했습니다.

 

그리고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 절제" (22~23)라고 했습니다.

 

여기에 두 가지 대조적인 몸이 있습니다. 육적인 몸과 영적인 몸입니다. 육적인 몸은 음행, 호색, 우상숭배로 나타납니다. 여기서 음행, 호색과 같은 것은 관념이 아니고 구체적으로 나타나는 몸의 행위입니다.

 

그 것과 대조되는 영의 몸은 사랑, 희락, 화평의 열매입니다. 열매는 씨앗이 죽어 싹이 나고 그 싹이 줄기가 되고 그 줄기에서 잎이 생겨 꽃이 피고, 그 다음 열매가 됩니다. 열매는 씨앗의 구체적인 형체입니다. 성령의 열매인 사랑, 희락, 화평은 성령으로 이루어지는 구체적인 몸입니다. 성령으로 이루어지는 몸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의미합니다. 개개인이 지체라고 하면 그 지체가 모인 공동체가 곧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입니다. 이 교회는 성령이 계시는 장소입니다.

 

오늘 사도행전 본문에 성령 강림으로 이루어지는 그리스도의 몸의 탄생을 보게 됩니다. 그 몸은 이 세상의 몸과는 달리 사랑, 희락, 화평의 몸입니다. 성령 강림과 함께 그리스도의 몸이 세상으로 다시 들어왔습니다. 우리는 때때로 주님의 몸인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으로 나타나지 않는데서 오는 좌절과 실망, 갈등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성령은 교회의 포로가 아닙니다. 성령은 교회의 부정적인 면과 함께 소멸되지 않습니다. 성령은 그가 지향하는 목표를 향해 나아갑니다.

 

성령을 바람으로 비유하면 성령은 인간의 이기심, 종족주이, 지역적 편파성에 따라 불어가지 않고 그러한 장벽들을 허물고 새로운 관계로 이루어지는 새 백성, 새 사회를 이루어가는 방향으로 불어가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인간의 편파성과 이기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몸부림치는 교회의 모습에 묶여있지 말고, 성령의 바람이 불어가는 그 방향에 우리의 시선을 집중시키고, 그 방항을 따라 가야합니다. 거기에 생명이 있고, 희망이 있고, 자유가 있습니다. 그것이 이 세상에 있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선교입니다.

 

한편 성령은 이 세상에서 마땅히 구할바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우리를 위해 하나님의 뜻대로 간구하십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롬8:26)

 

우리의 희망과 기쁨은 여기에 있습니다.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해 기도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이 세상에서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주님의 몸인 교회 가운데 계시는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해 간구하기 때문에 우리는 살아 있는 주님의 몸으로서 하나님과 살아 있는 교제 가운데 있으면서 동시에 주님의 몸으로서 이 세상에서 선교적 사명을 수행해 가게 됩니다. 그것은 성령의 본질적인 특성 때문입니다. 성령은 하나님과 수직적인 관계를 맺어가면서 이 세상의 피조물과 수평적 관계를 이루어 가는 본질적인 특성이 있습니다.

 

성령은 기독교인의 전유물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의 선물을 항상 두렵고 떨림으로 바르게 사용하도록 성령의 인도를 받아야 합니다. 성령의 창조적 사역은 교회안에 만 국한되는 것은 아닙니다. 성령의 사역은 언제나 피조물이 압박 받고, 고통당하고 있는 그 삶의 현장, 역사의 현장에서 시작된군 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됩니다.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간구 한다는 것은 바로 그러한 사실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성령이 계시는 곳에는 기쁨, 평화,희망이 있는 반면, 탄식과 고통, 세상을 위한 눈물의 중보의 기도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개인화, 교리화, 제도화는 지양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성령이 목표로 하는 것은 개인, 교리, 제도화에 있지 않습니다. 성령이 지항하는 목표는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그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사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이 세계사의 목적 자체도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로흐만 교수은 이렇게 말합니다.

"성서의 비밀은 우리에게 새로운 세계의 상태를 지시한다. 첫째는 율법 아래있는 상태이고, 둘째는 은혜 안에 있는 상태이며, 셋째는 곧 다가오는 더 풍성한 은혜의 상태이다. 첫째는 노예적인 상태이고, 둘째는 봉사하는 삶이고, 셋째는 자유 안에 있는 상태이다. 첫째는 두려워하는 노예의 상태이고, 둘째는 신앙안에 있고, 셋째는 사랑 안에 있는 상태이다. 첫째는 종들의 상태를, 둘째는 자유의 상태를, 셋째는 친구의 상태를 뜻한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성령을 믿습니다."라고 고백합니다. 그것은 우리 가운데 계시는 하나님의 영, 그리스도의 영이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새 창조의 사역을 이루어가고 계신다는 것을 믿는다는 것입니다. 그 새 창조로 나타난 것이 거룩한 공교회입니다. 그리고 성령의 그 새 창조 가운데서 성도의 교제가 이루어집니다.

 

 

 

 

 

 

■■거룩한 공교회 ■■

 

엡 4:1~6 설교자 : 임 영 수

 

사람들은 누구나 그가 몸담고 살아갈 참된 공동체에 대한 목마름이 있습니다. 특별히 기독교인의 경우 이상적인 교회에 대한 목마름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 이상적인 교회 공동체를 찾기 위해 방황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세상에서 찾고 있는 이상적인 공동체나 교회를 발견하기는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아마도 평생 그러한 공동체를 만나지 못할 지도 모릅니다.

 

오랜 기간 스위스 보세이 인스티튜트에서 성서연구원으로 일했던 수잔 데 디트리히(Suzanne De Dietrich) 여사는 그의 "증거하는 공동체"라는 책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현대인은 웅성거리며 복잡한 세계에서 살고 있지만 이보다 더 고독한 삶도 일찍이 없었다. 가족이나 사회 공동체 모두가 구심력을 잃고 원심력에 의해 각자 뿔뿔이 흩어져 정신생활이 날로 공허해가고 있다. 오늘날 어디서든지 사람들은 '공동체'에 굶주리고 목말라 있다.

그러나 과연 공동체란 무엇을 뜻하는지 분명치 않다. 오늘날 교회의 사명 가운데 하나는 바로 이 전정한 공동체가 어떤 것인지를 사회에 보여주는 일이라 하겠다.

지금도 우리는 하나님의 사람으로서의 소명과 책임을 끊임없이 요청받고 있다. 교회는 이 세상에서 선발된 공동체요 증거의 공동체로서 이 세상으로 다시 파송 받는 하나님의 사람들인 것이다."

 

사도신경의 교회에 대한 명제는 바로 공동체와 관련된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것은 우리가 찾고 있는 그러한 이상적인 공동체가 바로 이 세상에 있는 교회이니 교회를 믿으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사도신경에서 말하는 것은 참된 공동체로서 지향해야할 방향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사도신경에서 제시하는 참된 교회 공동체는 "거룩한 공교회-거룩한 보편적 교회"입니다. 거룩하고, 보편적이란 교회의 본질을 규정하는 말입니다. 우리가 교회에 대한 고백을 할 때에는 현재 세속화 되어있고, 분열이 극심한 현실의 교회를 바라보며 충성을 다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고백은 하나님의 구원사에서 성령의 능력 가운데 있는 거룩하고, 보편적 교회를 희망 가운데서 바라보며 고백하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도신경의 교회에 대한 고백을 할 때마다 하나님의 부르심 가운데 있는 교회로 나아가고자 하는 새로운 다짐이 있게 됩니다. 이 고백은 우리가 "차지도 않고, 뜨겁지도 않은" 사교 집단과 같은 수준에 안주하려는 유혹을 뿌리치고, 하나님의 부르심에 적극적으로 응답해 가고자 하는 결의를 새롭게 하게 됩니다.

 

교회의 본질은 거룩성과 보편성에 있습니다. 교회가 이것을 망각해 버린다면 그 때 교회의 생명은 끝나게 됩니다. 거룩이라 할 때 그 의미를 교인들의 삶의 질로 파악할 수 있습니다. 특별히 우리의 문화적 전통에서 이 거룩은 점잖음, 윤리적 완전성으로 이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도신경에서 거룩은 그것이 아닙니다. 여기서 거룩한 교회는 세상으로부터 하나님에 의해서 부름 받았고, 현재 부름 받고 있는, 하나님께 속해 있는 무리들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러한 무리들에게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존재 과제가 있습니다. 교회에는 이 세상에서 그를 부르신 분의 부름에 어떻게 반영하며 살아가야 하는가에 대한 존재 과제가 있습니다. 얼마만큼 이 과제를 신실하게 바르게 파악해서 자기 자신을 표현하느냐에 따라 거룩한 교회로 되어갈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이 과제가 수행되기 위해서, 하나님께로부터 부름 받은 자들 가운데는 그의 삶을 거룩하게 하기 위한 끊임없는 운동이 일어나야 합니다. 그 운동은 성령의 능력으로 이루어집니다.

 

이 거룩한 교회 공동체가 지향해 나아가야 할 방향은 보편성입니다. 보편성은 종족, 계급, 지역을 초월해서 전 세계적으로 나아가는 것이며, 그리고 인간의 모든 이기적인 분리주의를 타파하고 일치를 추구하며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러한 존재 방식이 교회의 보편성입니다.

 

16세기 종교개혁 후에 카톨릭 교회를 '기독교 교회'(Christian Church)로 바꾸지 않고 계속해서 그대로 사용하는 것은 교회가 가지고 있는 본질인 보편성 때문입니다. 카톨릭이란 말 자체가 '보편적' 이라는 뜻입니다. 사도들의 사명 자체가 보편성을 갖고 있습니다. 사도를 세상에 보내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시며,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교회가 가지고 있는 사도적 특성은 시대에 따라서 그 본질을 손상시키지 않으면서 계속 계승되어야 합니다.

기독교 전 역사를 통해 교회가 지금까지 몸부림 치면서 고민해온 문제는 보편성의 문제입니다. 그것은 자기 형체와 일치의 문제 였습니다. 자기 시대에서 어떻게 자신의 존재 방식을 표현하며, 어떻게 서로 다른 존재 방식 가운데서도 분열하지 않고 일치를 이룰 수 있는가 라는 문제는 교회가 갖고 있는 가장 큰 과제입니다.

 

교회의 거룩성과 보편성에 관련된 이러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주일에 남아공화국에 있는 어떤 교회에 오직 백인만 예배에 참석할 수 있는 교회에 흑인이 들어갈려고 했습니다. 그 때 흑인이란 이유로 거절당했습니다. 그는 교회 뜰 한 구석에 앉아 있었습니다.

얼마 있다가 어떤 사람이 교회 마당에서 서성대고 있었습니다. 흑인이 그 사람을 자세히 보니 예수님이었습니다.

'아니 예수님, 왜 예배에 참석하지 않고 밖에 서 계십니까?' 라고 흑인이 물었습니다.

예수님은 '나도 백인이 아니어서 들어가지 못하고 있다.' 고 했습니다.

 

교회가 거룩성과 보편성을 포기해 버릴 때 거기에는 예수님도 역시 계시지 않는다는 것을 암시적으로 경고하는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교회를 믿는다."고 고백하는 것이 진실되고 참된 것이 되려면, 교회는 자기 시대에서 언제나 인간의 이기심, 분열과 맞서 싸우고, 정의와 평화를 인류 전체의 목표로 지향해 갈 때입니다.

 

그러면 거룩하고 보편적인 교회가 되게 하는 그 본질적 요소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예배입니다. 여기서 예배는 이 세상에서 "우리의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물은 종의 삶으로 표현되는 디아코니아(diakonia),즉 봉사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길입니다. 거룩한 교회의 길은 그리스도와 일치 이외에 다른 길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언제나 잊지 않아야 할 것은 우리의 "산 제사"는 "영적인 예배" 가운데서 드려져야 합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회개, 묵상을 통한 의식과 가치 및 행동의 철저한 변화와 영감이 수반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봉사의 삶에는 영적 고갈과 자신의 의를 드러내고자 하는 육적인 욕망이 뒤따르기 때문입니다.

 

언제인가 여러분들에게 소개해 드린 적이 있습니다 불란서에 장 바니에라는 사람에 의해 설립된 "악슈"라는 정신 장애인을 위한 공동체 마을이 있습니다. 그 곳은 장애인을 집단적으로 수용하는 시설이 아니고 그리스도를 위해 헌신하고자 하는 헌신자들과 장애인들이 몇 명씩 가정을 이루어 살아가는 공동체 마을입니다. 헌신자들은 그러한 삶을 동해서 그리스도를 섬기고 따르는 삶을 배우고, 장애인들은 그들을 통해 그들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알아가게 됩니다. 그 곳에는 신분의 차별이나 종족의 차별도 없습니다.

 

그런데 그 공동체 한 가운데에는 조그마한 채플이 있습니다. 그곳에는 헌신자들이나 장애자들이 무시로 들어가서 조용히 말씀을 묵상하며 영적 재충전을 합니다. 그들이 그렇게 하는 것은 헌신의 삶에 파고드는 무의미성과 영적 고갈, 인간적인 욕망을 극복하기 위해서 입니다. 저는 그러한 모형의 공동체를 보면서 거룩한, 보편적인 교회 공동체 상을 상상해볼 수 있었습니다.

 

로흐만 교수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사도신경의 의미에서 교회는 자기 목적이 아니다. 교회는 자신에 만족하고, 자신에게만 관심을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는 예배의 프락시스 (praxis)에서 존재한다. 예배는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봉사를 하나님과 세계를 위한 기독교의 봉사를 의미한다. 이 두 의미에서 교회는 결코 교회 중심적으로 떨어질 수 없는 포괄적인 지평으로 내세워진다. 교회는 처음부터 외향적인 공동체이다. 그렇지 않으면 참된 교회일 수 없다."

 

신학자 칼 바르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교회의 예배는 지상에서 일어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것, 가장 절실한 것, 가장 영광스러운 것이다. 예배의 가장 중요한 내용은 인간의 업적이 아니다. 성령의 일이고 신앙의 행위이다."라고 했습니다.

 

거룩하고 보편적인 교회가 지향해 가는 목표는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예수께서 이 세상에 계실 때 그가 선포하신 것도 역시 오고 있는 하나님 나라였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교회보다 위에 있습니다. 교회 그 자체가 하나님 나라가 아닙니다. 교회가 잘못을 범할 수 있는 것은 자신을 하나님 나라와 동일시 할 때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기독교인들의 나라가 아닙니다. 기독교인들은 하나님 나라의 전망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들은 거기서 행동하고 고난을 받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교회의 미래며 교회의 미래는 세상의 미래이기 때문에 교회는 이 세상과 분리될 수 없습니다. 교회는 오고 있는 하나님 나라 안에서 새로운 인류의 시작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미래에서 그 운명이 규정지어진 무리들입니다. 교회는 하나님 나라를 기다리는 자들의 공동체로서 시간과 공간의 제한 가운데 있습니다.

 

이러한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교회는 세상에 있는 동안 어떤 제도나 규칙을 절대화 해서는 안됩니다. 이 세상에서 교회의 표준은 언제나 오고 있는 하나님 나라의 빛 가운데서 자신을 비춰봐야 합니다. 그 가운데서 교회는 모든 세상적이며, 인간적인 얽매임과 굴레를 벗어버리고 자유의 영역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하나님 나라의 지평에 서 있는 교회는 그 어느 순간도 이만하면 되었다고 자족할 수 있는 순간은 없습니다. 언제나 최선을 다한 후 "무익한 종"이라고 고백할 수 밖에 없습니다.

 

"자주 파선 사고가 일어나고 있는 어느 위험한 해안에 한때 볼품없는 작은 인명 구조대가 있었습니다. 건물이라곤 오두막 한 채뿐이었고 보트도 작은 것이 하나 있었을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헌신적인 몇 명의 회원들이 끊임없이 바다를 지켰고, 그들은 자신에 대한 생각은 전혀 하지 않은 채 밤낮으로 바다에 나가 유실된 자들을 찾아 다녔습니다. 많은 생명들이 이 훌륭한 작은 구조대에 의해 구조되었으며 그래서 이 본부는 유명해졌습니다.

 

구조된 자들 중 몇 사람과 또한 인근지역에 사는 여러 사람들은 이 구조대와 연관을 맺고 이 사업을 뒷받침하기 위해 그들의 시간과 돈을 제공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새로운 보트들을 더 구입했고 새로운 승무원들을 더 훈련시켰습니다. 작은 구조대가 점점 더 커지게 되었습니다.

 

인명 구조대에 가입한 새 회원들 중 어떤 사람들은 건물이 너무 볼품없고 시설이 빈약하다고 불만을 토로하였습니다. 그들은 바다로부터 구조된 사람들의 피난처가 되기 위해서라도 좀더 편안한 장소가 마련돼야 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비상용 간이 침대를 훌륭한 침대로 갈아치우고 확장된 건물 안에 좀더 훌륭한 가구들을 갖다 놓았습니다. 이제 그 구조대는 그 회원들을 위한 대중적인 회합 장소가 되어버렸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곳을 일종의 클럽처럼 사용했기 때문에 그곳을 아름답게 다시 치장했고 멋있게 꾸며 놓았습니다. 이제 회원들은 인명을 구조하는 임무를 위해 바다에 나가는 일에는 점점 관심을 잃게 되었고, 그래서 그들은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인명 구조원들을 새로 채용하였습니다. 그러나 인명 구조의 주제는 여전히 클럽 장식들 가운데서 돋보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클럽 가입식이 거행되는 방에는 여전히 예식을 위한 구조선이 있었습니다.

 

---그 다음 회합 때, 클럽 회원들 가운데서 불화가 생겼습니다. 대부분의 회원들은 클럽의 인명구조 활동이 별로 즐거운 일이 아닌데다가 클럽의 정상적인 생활에 방해가 된다고 생각하여 구조 활동을 그만두기를 원했습니다. 어떤 회원들은 인명 구조야말로 그들의 가장 중요한 목적이라고 하면서 계속 인명 구조대라고 불리워야 하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들은 투표 결과 결국 패배했으며, 만일 그들이 그 지역에서 조난 당한 사람들의 생명을 구조하기 원한다면 아래편 해안에서 그들 나름의 인명 구조대를 새로 세울 수 있다고 통보 받았습니다. 그들은 그렇게 하였습니다.

 

여러 해가 지나면서, 새로 생긴 이 인명 구조대는 옛날 구조대가 겪었던 똑같은 변화를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그 구조대는 일종의 클럽으로 발전해 버렸고 그래서 또 다른 인명 구조대가 새로 생기게 되었습니다. 역사는 계속 반복되었으며, 만약 우리가 오늘날 그 해안을 방문한다면, 우리는 그 해안에 서로 배타적인 수많은 클럽이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 바다에서는 여전히 파선 사고가 자주 일어나고 있으나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대로 죽어가고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데오도레 위델(Theodore Wedel)이 현대 교회의 실상을 비유로 설명한 것입니다. 이 비유의 요점은 봉사가 없는 교회의 모순을 말하려는 것입니다. 교회는 봉사를 위해 부름받았습니다. 그것이 교회의 "거룩"이며 축복의 근원이 되기 위해 축복 받은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교회는 성령의 첫 걸음 지며, 성령의 종착지점은 아닙니다." "우리는 교회를 믿는다고 계속해서 말하지 않고서는 성령에 관해서 말할 수 없습니다. 반대로 우리가 교회를 성령의 역사로서 전적으로 정립하려 하지 않고서는 교회에 대해 말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교회를 믿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믿는 교회는 거룩한, 보편적인 교회입니다. 그 교회를 움직이는 힘의 원동력은 성령의 능력입니다. 우리는 성령의 능력 가운데 있는 교회를 믿습니다. 성령의 능력 가운데 있는 교회는 세상에서 하나님과 세상을 위해 봉사하는 교회입니다. 우리는 교회에 대해 희망을 갖습니다. 우리의 희망은 교회의 크기, 재정의 풍부에 있지 않습니다. 우리의 희망은 거룩한, 보편적인 교회에 대한 희망입니다.

 

사도 바울은 본문에서 교회가 세상에서 그의 거룩성과 보편성을 지켜갈 것에 대해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받은 일에 합당하게 행하여,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몸이 하나요, 성령도 한 분이시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받았느니라, 주도 한 분이시오 믿음도 하나요 세례도 하나요, 하나님도 한 분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 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 아-멘

 

 

 

 

 

■■성도의 사귐을 믿습니다 ■■

 

행 2:42~47 설교자 : 임 영 수

 

지난 주에 교회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오늘은 "성도의 사귐"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사도신경에서 성도의 사귐은 교회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교회가 가지고 있는 가장 소중한 보화 세 가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말씀선포, 교제, 봉사입니다. 성도의 사귐은 두 번째 교제에 속합니다. 이 세 가지는 각각 독립적이면서 분리될 수 없는 것입니다. 교회가 세상 공동체와 다른 점은 이 세 가지가 교회에 있다는 것입니다. 성도의 교제는 단순히 믿는 사람들끼리 모여 인간적인 교제를 갖는 것이 아닙니다. 이 교제는 "우리 모두에게 주어진 거룩함에, 그리스도의 은총에, 성령의 은사에 참여하는 길입니다."

 

이 세상에 있는 공동체들은 인간이 고안해낸 어떤 사회적 이념, 경제적 이해관계, 정치적 이념, 학연, 지연으로 서로 얽혀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더욱더 분열, 갈등, 계층간의 적대감을 만들어 냅니다. 이 세상 공동체는 그 기반이 매우 취약합니다. 그러나 교회는 그러한 사회적, 인간적 관계를 넘어섭니다. 성도의 사귐은 '수직적'인 것에 그 뿌리를 내리고 있기 때문에 어떤 방해 요인도 극복해 갈 수 있습니다.

 

우리는 본문에 나타나 있는 초대교회 공동체에서 그러한 교제를 보게됩니다. 본문에 나타나 있는 초대 교회 공동체에서 몇 가지 특성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사도들로 말미암아 기사와 표적들이 많이 나타났습니다.

믿는 사람이 다 함께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했습니다.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누어 주었습니다.

성전에 모여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었습니다. 하나님을 찬미했습니다.

구원 받은 사람이 날마다 더 했습니다.

 

이상에 열거한 내용들이 모두 성도의 교제 가운데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만약 교제가 없었다면 이러한 일들은 나타날 수 없습니다. 표적, 물건의 통용, 소유의 분배, 떡을 뗌, 하나님 찬양은 외적으로 드러난 교제의 표현들입니다. 교회의 거룩성과 보편성은 성도들의 교제에 있습니다.

 

수잔 데 디트리히 여사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집니다.

"우리는 과연 성도의 교제로써 이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하여 우리를 보내신 하나님을 이 세상이 믿게 할 만한 공동체가 되어 있는가? 우리는 이 압제 당하는 세상 구조를 구할 만한 산 위에 세운 성이 되어 있는가? 우리도 예수처럼 '이 세상 속에서' 고통을 분담하며 짐을 져주는 일을 하고 있는가?

다른 한편, 우리는 하나님께서 바라시는대로, 이 세상에서 성별되어 '이 세상 것이 아닌' 그런 사람들인가? 직장생활, 정치생활, 성공 속에서도 믿음을 가지고 살며 은혜 속에서 살아가는 구속받은 공동체인가? 우리의 삶의 표준은 그리스도적인가?, 아니면 이 세상적인가?"

 

그러면 성도의 교제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가?라는 물음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성도'라는 말은 '거룩함'이란 뜻인데 이 말의 근본적인 의미는 '다르다'는 뜻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다른 사람과 다릅니다. 그런데 그 다르다는 것은 관련을 맺고 사는데서 나타나게 됩니다. 그리스도인이 관련을 맺는 것이 곧 성도의 교제입니다. 그 교제는 세상 사람들의 교제와는 다릅니다. 성도의 교제는 '시간과 죽음을 넘어서는 교제'요, 현실의 역사에서 '연대적인 형제관계'입니다.

 

폴 투르니어 박사는 그의 책 "고독으로부터 도피"에서 오늘 현대인의 삶을 대표하는 고독한 한 여성의 삶을 소개 합니다. 스위스 제네바 국제 복지기관에 비서로 일하는 한 외국인 여성이 있었습니다. 그는 하루의 일과를 마치고 잠자리에 들기 전 반드시 라디오에서 그 날 하루 방송을 마감하는 아나운서의 마지막 인사말, "오늘 밤이 당신에게 행복한 밤이 되기를 바랍니다."라는 말을 듣고 잠이 들곤 합니다.

 

그는 이 복지기관에 와서 근무한 지 여러 달이 지났지만 그의 상사를 비롯해서, 그 사무실에 찾아오는 어느 누구하나, 그에게 따뜻한 인간적인 말을 건네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는 매일 많은 사람을 대하지만 하루 생활 중 인간적인 대화는 그 날 라디오 방송 종료 시간에 듣곤 하는 아나운서의 인사가 전부였습니다. 그는 사무실과, 엘리베이터에서 만나는 많은 사람들, 그가 살고 있는 아파트로 돌아왔을 때 사람들이 주고 받는 많은 말을 듣고 살지만 그에게는 아무 상관이 없었습니다. 그의 고독은 더욱더 깊어만 갔습니다.

 

투르니어 박사는 현대인의 이러한 정신적 고통의 원인을 다음의 몇 가지 잘못된 정신 때문이라고 진단합니다.

의회주의 정신, 독립의 정신, 소유의 정신, 요구의 정신입니다.

 

성도의 교제는 이러한 병든 정신을 극복하고 성령의 능력 안에서 이루어지는 관계의 혁명입니다.

 

먼저 사도신경에 나타나 있는 성도의 교제는 이미 이 세상을 떠난 성도들과 교제입니다. 이 교제는 그들의 혼과 영교가 아닙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우리에게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다." (히12:1) 고 했습니다. 우리는 성도의 교제 가운데서 이미 영원의 시간 가운데 들어가 있는 많은 증인들을 회상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증인들이 살아간 삶의 모범을 받아드리게 됩니다. 특별히 우리의 영성생활에서 그들이 닦아놓은 영성의 길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하나님과 교제를 갖는데 좋은 등불이 되고 있습니다.

 

신구약 성서에 등장하는 아브라함, 이삭, 야곱, 모세, 예언자들, 사도들은 이미 오래 전에 살았던 성서의 인물들이지만 언제나 현재 살아있는 사람 보다 더 생생하게 우리 가운데 현존합니다. 그리고 기독교 역사에서 영원히 잊혀질 수 없는 성 어거스틴, 토마스 아 킴퍼스, 성 프랜치스코, 마틴 루터, 존 칼빈, 요한 웨슬레 같은 성인, 개혁자들은 언제나 우리 가운데 살아 있습니다.

 

다음으로 현재 살아있는 성도들과 종족, 문화, 혈연, 학연, 지연을 초월해서 갖는 교제입니다. 유대 사람들이 즐겨 사용하는 머리 둘을 가진 어린아이 비유가 있습니다.

 

"어떤 어머니가 아이를 낳았는데 머리는 둘인데 몸은 하나입니다. 그 아이를 놓고 논쟁이 벌어졌습니다. 이 아이를 한 아이로 보아야 하는가? 둘로 보아야 하는가? 라는 문제입니다.

그때 한 지혜로운 랍비가 해답을 제시했습니다.

'뜨거운 물을 주전자에 넣어 한쪽 아이 머리위에 부었을 때 동시에 다른 아이도 울면 하나고, 그렇지 않고 한쪽 아이가 울지않고 웃으면 그때는 둘로 보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이 이야기는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유대인들은 어디에 있든지 하나라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 지어낸 이야기입니다. 이 세계 어느 곳에 있는 유대인이 고통을 당하면 다른 곳에 있는 유대인들 역시 고통을 당한다는 뜻입니다.

 

성도의 교제는 개 교회의 범주를 넘어서서 이 세계에 있는 모든 그리스도인들과 한 하나님 아버지를 섬기는 형제 자매들로서의 교제입니다. 우리는 시간과 공간의 제약 때문에 서로 흩어져 있지만 어디에 있든지 우리는 주안에서 한 형제, 자매입니다. 우리는 서로, 서로 위로하고 격려하며, 서로를 위해 중보의 기도로 영적 교통을 갖습니다.

 

그리고 성도의 교제는 교회라는 울타리를 넘어서 소외되고 고통받는 가난한 자, 병든 자들과의 연대해 가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마지막 때와 관련해서 말씀하신 비유 가운데 의인과 악인을 구별해서 그들이 한 행위에 대해 책임을 묻는 내용이 있습니다. 그 때 의인들에게 예수께서 자신이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 마실 것을 주었고, 나그네 되었을 때, 영접했고, 헐 벗었을 때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 와서 돌아보았다고 했습니다. 의인들이 언제 자신들이 그렇게 하였느냐? 고 물었을 때,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라." (마 25:31~46)고 하셨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난한 자들과의 연대 가운데서 살아가는 것이 성도들의 교제에 포함됩니다.

 

초대 교회에 있었던 라우렌티우스의 전설을 소개하겠습니다.

 

"라우렌티우스(Laurentius)는 초대교회 집사로서 로마에서 빈민을 구호하는 일에 헌신적으로 종사했습니다. 258년 기독교 박해 때 그는 체포되었습니다. 그는 교회의 하늘의 보화를 관리한다는 혐의를 받았습니다. 황제는 그 보화들을 내놓으라고 명령했습니다.

 

라우렌티우스는 돌아가서 그가 돌보아준 사람들 중에 병인들, 불구자들, 마비된 자들, 절룩거리는 사람들, 간질병 환자들, 나병인들을 불러 모았습니다. 라우렌티우스는 그들과 황제 앞에 나아갔습니다. 황제께서 탐내는 황금은 수많은 범행의 원인입니다. 그 빛은 사람들을 속입니다.

 

진짜의 보화는 세계의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황제의 눈에는 이들이 비참함 무리로 보일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빛의 자녀들이고, 교회의 보화이고, 교회의 금, 진주, 보석입니다. 황제는 라루렌티우스를 쇠격자에 묶어 숯불로 천천히 구워 죽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에게서 고통을 거두셨습니다.

 

이 이야기는 성도의 교제의 방향을 지시합니다. 성도들의 공동생활이 어떤 현실적 관계를 가져야 하는가를 시사합니다. 기독교인의 연대적인 형제 관계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 이야기에 분명히 표현되어 있습니다.

 

로흐만 교수는,

"초대교회는 서로를 위해, 모두를 위해 살고 존재한다. 거기에는 모두를 위한, 즉 남자와 여자, 유대인과 이방인, 종과 자유인, 부자와 가난한 자의 자리가 있다. 이 형제적인 공동체는 자기 자신에게 관심을 집중한 공동체가 아니라, 구체적인 상황과 관계가 있는 가난한 자들, 실패한 자들, 버림받은 자들, 차별 대우를 받은 자들에게 구속력을 지닌 공동체이다. 이 공동체에서 이들은 교회의 보화들이다."고 했습니다.

 

이러한 성도의 교제는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형성되어 가는 교제에는 하나님과 교제가 포함됩니다. 그리스도인은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을 아버지와 교제 가운데 살게 됩니다. 이 교제는 이 현실 세계에서 뿐만 아니라 영원히 계속되는 교제입니다.

 

시인은 그가 하나님을 믿는 이유 한가지로서 하나님께서 그를 죽음의 골짜기를 넘어서 영원으로 인도하는데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이렇게 진술합니다.

 

"내가 비록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시 23:4)

 

사도 바울은 "이 세상에 있는 그 어떤 것들도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롬 8:39)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의미는 하나님과 교제 가운데 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과 교제 가운데 있다는 것은 이미 영원 가운데 있다는 의미입니다. 영원한 생명을 소유한 것입니다.

 

교회 생활에서 성도의 사귐의 약속의 현실이 가장 강하게 나타나는 장소가 성만찬입니다. 이 성만찬에는 성도의 사귐의 신비가 함축되어 있습니다.

 

(1) 이 성만찬은 거룩함에 참여입니다. 즉 그리스도의 운명, 성령의 사건에 참여입니다. 우리는 성만찬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사건을 현재의 사건으로 새롭게 경험하게 됩니다.

 

(2) 이 성만찬에서 우리는 구름과 같이 허다한 증인들도 함께 참여하는 미래의 하나님 나라의 축제를 바라보게 됩니다.

 

(3) 이 성만찬에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 자매들과 사귐을 갖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의 역사에서 사랑의 책임을 확인하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오늘의 현실 교회에서 믿음의 신비인 온전한 성도의 교제가 이루어지고 있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시인하고 받아드립니다. 그러나 이 성도의 교제에서 새로운 희망의 삶을 내다보게 됩니다. 오늘 우리의 삶의 문제의 해답에 대한 제시를 받게됩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약속으로 주어진 온전한 교제의 삶을 희망 가운데서 기다리게 됩니다.

 

수잔 데 디트리히 여사의 글을 다시 소개합니다.

"우리는 인간관계가 단절된 세계에서 살고 있다. 이것이 우리 일상생활에 있어서 엄연한 사실이다. 권력을 갖기 위한 몸부림과 자기 주장의 요구는 가정과 직장, 정치, 경제 사회에서 비밀리에 혹은 공개적으로 갈등을 일으키고 있다. 현대사회는 고통과 싸움, 그리고 패망과 죽음의 신호 아래 서 있다. 이 모든 것은 왜 일어나는 것일까? 우리는 창세기의 처음 몇 장에서 그 해답의 일부를 찾을 수 있다. '해답의 일부'라고 말하는 이유는 충분하고도 승리를 전할 해답은 신약성서에 주어져 있기 때문이다."고 했습니다.

 

신약성서에 주어진 해답의 일부가 '성도의 교제'입니다. 우리는 성도의 교제를 믿는다고 고백합니다. 우리의 그러한 고백에는 바로 그러한 교제에 우리의 생의 문제에 대한 해답이 있다는 의미가 포함됩니다. 오늘의 인간 소외 현상은 여러 가지 사회문제를 발생시키고 있습니다. 컴퓨터의 발달은 또 하나의 획기적인 생활혁명을 가져오기는 했지만 그 반면에 우리를 더욱더 소외의 늪으로 빠져들게 합니다. 특별히 오늘 우리시대의 날로 증가하는 가정붕괴, 가정의 역기능 현상은 인간생활에 가장 필요한 사귐의 능력을 상실해 가게 합니다. 이러한 현실에서 "성도의 교제를 믿는다."는 고백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죄를 사함 받는 것은 ■■

 

고후 5:14~19 설교자 : 임 영 수

 

오늘은 사도신경의 "죄 사함" 명제에 대해 말씀 드리겠습니다. 지금 이 시간 예배에 참석한 여러분에게 당신은 그리스도인 입니까? 라고 묻는다면, 주저하지 않고 '그렇습니다.'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그러면 당신이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구체적인 표식이 무엇입니까? 라고 묻는 다면, "나는 술, 담배를 하지 않는다든지, 주일에 반드시 예배에 출석하는 것."을 그리스도인 됨의 표식으로 내세울 수 있을 것입니다.

 

사도신경에서는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과 죄사함 받는 것이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우리가 "죄를 사함 받는 것을 믿습니다."라고 고백할 때 거기에는 "자신이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의미가 포함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것과 '죄를 사함 받았다.'는 것은 불가분의 관계입니다.

 

그러한 관점에서 '당신은 그리스도인 입니까?'라고 질문받았을 때, "예, 나는 그리스도인 입니다."라고 대답할 수 있습니다. 그 때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것은 "죄를 사함 받았다. - 세례를 받았다."는 의미가 됩니다. 초대 교회에서 죄를 사함 받았다는 것과 세례를 받았다는 것은 거의 동의어처럼 사용되었습니다. 오늘날에 와서도 교회에서 세례는 그러한 의미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세례를 받음으로 죄를 사함 받는 것이 아니라, 죄를 사함 받았다는 표식으로서의 세례입니다.

 

"죄를 사함받는 것"은 "구원을 받는 다는 것"과 같은 의미입니다. "당신은 죄사함 받았습니까?"라는 질문은 "당신은 구원 받았습니까?"라는 의미입니다. 죄사함이나 구원은 다 하나님의 선물이며 동시에 과제입니다. 이것은 우리 자신의 힘, 양심, 경험, 인격, 업적에 의하지 않고, 우리 자신밖에 있는 그 어떤 것으로 이루어집니다. 그 어떤 것은 우리를 의롭다 인정하시는 하나님의 선언입니다.

 

신학자 존 A. 맥케이는, "구원은 오히려 인생의 행로에서 행동하도록 힘을 부여해 주는 벨트"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일을 하거나 길을 걸을 때 우리 허리에 매는 벨트는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그것은 우리 몸 전체에 균형을 유지해주는 역할을 합니다. 구원도 그와 같습니다. 구원을 받아야 인생의 행로를 바르게 걸어 갈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힘있게 걸어갈 수 있습니다. 구원은 인생의 행로에서 바른 생의 목표를 향해 걸어가게 합니다.

 

우리 인간 편에서 구원에는 어느 정도의 시간적 차이가 있습니다. 먼저 인간 편에서 도움을 구하는 일이 있게 됩니다. 도움을 구한다는 것은 인생의 행로에서 자신에게 구원이 필요하다는 것을 인식하게 되는 것입니다. 거기서부터 도움을 구하게 됩니다.

 

그 다음 도움을 구하는 과정에서 십자가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 십자가에서 하나님께서 죄를 용서하시고, 화해의 길을 마련하셨다는 선언을 듣게 됩니다. 하나님의 선언이 선언으로만 남아있지 않고, 그 선언이 우리의 "내적 실체를 변화시키고, 우리에게 새로운 삶의 씨앗을 주며, 우리 안에 새로운 나를 세우며, 삶에 대한 우리의 태도와 우리의 삶의 현실을 갱신시켜 가는" 경험적 사건이 일어납니다. 그것이 곧 "거듭남"입니다. 그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이 구원 받았다는 것을, 그리고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것을 고백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사도신경의 "나는 죄를 사함 받는 것을 믿습니다."라는 고백이 "나는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것을 믿습니다."와 같은 뜻이 됩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새로운 삶으로 전환입니다. 그 전환은 옛 것에서 새 것으로의 전환입니다. 여기서 옛 것은 하나님 없이 살던 삶이며, 새 것은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입니다.

 

이러한 죄 사함의 문제가 가장 잘 표현되어 있는 곳이 누가복음에 기록되어 있는 '집을 나간 아들을 기다리는 아버지'의 비유입니다. 그 비유는 죄와 죄의 현실성, 그리고 새로운 삶이 어떤 것임을 잘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아버지와 함께 살던 둘째 아들에게는 언제나 아버지가 없는 다른 세계에 대한 동경이 있었습니다. 그는 아버지 없이 자신의 생을 실현해가고 싶었습니다. 어느날 그는 결단하고 자기 몫을 다 챙겨서 아버지를 떠나 그가 그리던 곳으로 떠나가게 됩니다. 둘째 아들에게 아버지 없이 사는 삶이 자유롭게 느껴졌고, 더 의미있게 생각되었습니다.

 

그러나, 결국 아버지를 떠난 삶의 결과는 돼지 우리에서 돼지들과 함께 지내는 비참함이었습니다. 거기에는 그가 갈망하던 자유, 자기 실현도 없었습니다. 오히려 그와는 반대로 절망, 속박 뿐이었습니다. 이 비유에서 우리에게 시사해주는 몇 가지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먼저 '죄(罪)가 무엇인가' 입니다.

첫째, 이 비유에서 말하는 죄란, 아버지를 떠나서 아버지 없이 살아가는 삶을 의미합니다. 둘째 아들은 아버지 없이 자신의 삶을 실현해 보고자 했지만 실패했습니다. 그 자신의 욕망대로 어느 기간까지 살 수 있었지만 그러한 삶은 결국 그에게 무거운 노예적인 속박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우리 인간이 하나님을 떠나서 자기 자신의 자아를 중심으로 자신의 삶을 실현해 가고자 할 때 그러한 노력은 결국 실패하고 맙니다. 그 이유는 우리의 자아 자체가 병들어 있기 때문에 병든 자아가 치유 받음 없이는 진정한 자기 실현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우리의 병든 자아가 치유받고 온전한 자아로 세움 받을 수 있는 길은 성령의 능력으로 가능합니다. 성령의 능력은 우리의 병들고 상처입은 자아를 치유합니다.

 

둘째, 죄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약속하신 희망의 삶을 거부하고 받아드리지 않는 것입니다. 비유에서 둘째 아들은 아버지가 그에게 허락한 둘째 아들로서 책임있게 살아갈 삶을 거부했습니다. 그대신 자기 자신이 구상하고 생각한 생의 모험의 길을 떠났습니다. 그러한 생의 여정에서 그는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마음껏 했을 것입니다. 결국 그가 도달한 곳은 희망이 없는 절망의 장소였습니다. 그 곳에는 죽음만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 다음 사함 받는 (용서) 문제입니다.

이 비유에서 죄의 용서는 아버지의 선물입니다. 둘째 아들은 비참한 삶의 자리에서 비로서 제 정신으로 돌아와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러한 절망적인 자리에서 자신의 삶을 청산하고 새로운 출발을 하려고 합니다. 그 때 둘째 아들은 자신에게는 새로운 출발을 할 수 있는 아무런 힘이 없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그 자리에서 그가 발견한 것은 가부장적인 엄격한 아버지가 아닙니다. 그가 보게된 것은 그를 이미 용서하고 기다리고 있는 자비로운 아버지입니다. 그는 용기를 내어 아버지께로 돌아갑니다.

 

그때 아버지는 그를 거절하지 않고 두 팔을 크게 벌려 그를 끌어 안았습니다. 아버지를 배반하고 집을 나갔음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는 둘째 아들을 맞아들여 다시, 그의 잃어진 자리에 앉힙니다. 아버지의 용서는 무조건적입니다. 아버지가 아들의 죄를 잊어버린 것이 아닙니다. 아들의 지난 날의 모든 그릇된 행적을 다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아들을 받아드렸습니다.

 

이 비유에서 말하고 있는 '사함',즉 용서는 전적으로 하나님 아버지의 선물입니다. 그 선물은 아버지의 아픔, 고뇌, 사랑 가운데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아버지의 용서는 단지 지난 날의 잘못된 행위의 묵인이 아닙니다. 은혜의 선물입니다. 은혜의 선물은 죄를 능가하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죄의 용서는 단지 과거의 극복만이 아니라, 창조적인 새로운 삶으로 출발입니다. 둘째 아들에게서 그러한 삶의 새 출발은 자기 자신의 비참함에서, 그렇게 된 것이 다른 사람 때문이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 그것에 대한 책임을 지는 데서부터 시작됩니다.

 

둘째 아들은 아버지께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아들이 아버지게 이르되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눅15:21)

 

우리 인간은 상처입고 병든 자기 자신과 직접 대면하는 것을 두려워 합니다. 그래서 가급적이면 그 책임을 부모, 가정, 사회에 전가시키려 합니다. 우리에게 언제나 자아 발견은 무거운 짐이 되고 있습니다. 신학자 판넨벌그는 "죄의 고백은 언제나 자신에 대한 고백이며, 책임을 지려는 준비의 표현이다. - 죄의 고백은 자유의 행동으로서의 표현이다. 왜냐하면 참된 자유는 책임적인 자유이기 때문이다."고 했습니다.

 

사람들 가운데는 평생 자기 자신의 자아와 정면으로 대면하고, 그것을 받아드리지 못하고 살아가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한 사람들에게 생의 실패, 고난은 모두 다른 사람들 때문입니다. 그러한 사람들에게 죄의 고백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죄의 고백이 없는 삶에서 새로운 삶의 시작은 없습니다. 그러한 사람에게 "악순환으로부터의 탈출"은 불가능합니다.

 

그리고 죄를 사함 받는 것은 단순히 개인적인 문제에만 국한되지 않고 사회적 관계에서 새로운 창조적 관계를 이루어가는 시금석이 됩니다. 주기도문에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용서 한 것 같이 우리 죄를 용서해 주옵소서."는 가장 가깝고, 또 먼 이웃을 용서해 주는 것을 거부하는 삶은 예수의 사죄의 능력이 역사하는 곳으로부터 이탈되는 삶이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로흐만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진실성과 참됨은 거부하지 않았고, 해서도 안 될 용서와 화해에서 결정된다."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이웃을 용서한다는 것은 이웃의 죄를 잊어버리거나 갈등을 억누르거나 숨기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잊어버릴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약속으로 허락하신 새로운 삶으로 나아가기 위해 용서할 수 있습니다. 용서는 새로운 삶으로 나아가는 발걸음입니다. 역사의 현실에서 우리는 어떻게 새로운 출발을 할 수 있는가?라는 물음 앞에서, 우리의 해답은 용서입니다. 용서로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습니다. 용서는 단절된 역사를 진행시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사함을 받는 데서 시작해서 사함을 향하여 사는 것이다."고 로흐만은 말했습니다.

 

저는 빌리 브란트 서독 수상이 그의 재임시 폴란드를 방문해서 이차대전 때 희생된 유대인의 묘지 앞에 무릎을 꿇고 사죄하는 장면을 보았습니다. 이차대전 후 유럽의 역사가 다시 새로운 미래를 향해 나아갈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서로의 사죄와 용서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유럽의 역사는 계속해서 악순환의 연속이었을 것입니다. 사죄와 용서는 역사의 악순환의 고리를 끊습니다.

 

1898년 미국 시카코의 한 노동자 계급 가정에서 10남매 중 여덟째로 태어난 데이지라는 여성이 있었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술 주정뱅이였습니다. 아버지는 밖에서 술을 마시고 집으로 돌아와 아직 어린 아기인 남동생과 여동생을 방바닥 저쪽 끝까지 발로 차버리거나 어머니에게 행패을 부리는 때가 빈번했습니다.

 

그 때마다 어린 데이지는 방 한쪽 구석에 쭈구리고 앉아 온 몸을 떨면서 마음 속으로 아버지를 몹시 증오하군 했습니다. 어린 데이지는 아버지의 그러한 모습을 보면서 자기는 절대 아버지와 같은 사람이 되지 않겠다고 마음속으로 깊이 다짐하군 했습니다.

어느날 아버지는 어머니를 내쫓았습니다. 아이들은 집을 나가는 어머니의 뒷 모습을 보면서 한없이 울었습니다. 그 후 형제들은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어느덧 세월이 흘러 데이지의 형제들은 결혼하여 가정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데이지 역시 결혼하여 여섯 아이의 어머니가 되었습니다.

데이지는 어린 시절 결심대로 아버지 처럼 되지 않을려고 술 한방울 입에 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아이들을 양육하면서 아이들에게서 조그마한 실수나 잘못을 발견했을 때 크게 놀라며 아이들에 혹독하게 매질을 하거나 욕을 하군 했습니다. 데이지는 아이들의 행동에서 조금이라도 그의 아버지의 모습이 비쳐지면 소스라치게 놀라면서 그것을 받아드리지 못했습니다.

 

그의 딸 마가렛은 어머니의 그러한 모습을 보면서 자기는 이 다음에 절대로 어머니 처럼 되지 않겠다고 거듭 거듭 결심을 하군했습니다. 마가렛 역시 자라서 결혼을 하여 네 자녀의 어머니가 되었습니다. 그 역시 그의 어머니와 마찬가지로 아이들에게서 조그마한 잘못이라도 발견하면 용서를 못하고 혹독하게 꾸짓거나 매질을 하군했습니다. 그는 그의 아들 마이클이 그 연령의 다른 남자 아이들 처럼 행동하는 것을 받아드릴 수 없었습니다.

마가렛의 아들 마이클은 집을 나가게 되었고 그는 대마초와 환각제에 빠져들게 되었습니다. 그는 세 번씩이나 결혼을 했지만 모두 실패했습니다. 데이지는 그의 아버지 처럼 되지않겠다고 했지만 그의 가문에서는 계속해서 아버지와 같은 삶이 대물림했습니다. 결국 비 은혜의 사슬은 끊켜지지 않고 계속된 것입니다.

 

왜 데이지의 가문에서 그러한 비은혜의 사슬이 대물림할 수밖에 없었는가?라는 질문을 해볼 수 있습니다. 거기에 대한 답변은 용서가 없었었기 때문이라는 답변 외에 다른 답변은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죄를 사함 받는 것을 믿습니다."라고 고백할 때 그것은 죄의 용서만이 비 은혜의 사슬을 끓어버리고 새로운 삶을 만들어 갈 수 있다는 것을 믿는다는 의미입니다.

 

죄의 문제는 단순히 개인적인 문제만은 아닙니다. 사회적 문제이기도 합니다. 둘째 아들이 아버지를 떠나 다른 지방으로 갔을 때 그 곳은 그가 계속해서 잘못된 삶으로 빠져들 수밖에 없는 환경이었습니다. 그는 거기서 희생자로서, 유혹자로서 함께 참여했습니다.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에서 유혹의 객체와 주체로서 함께 참여해 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의 전체의 삶, 그중에서도 십자가와 부활은 우리가 죄의 상황에 주저앉아 죄를 숭배하고 죄의 힘에 굴복하는 것을 거부하게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은 무자비에 대한 사랑의 승리, 사탄의 권세에서 벗어남, 죄, 지옥, 죽음의 권세의 극복을 의미합니다.

죄사함은 이러한 것과 관련됩니다. 우리가 "죄를 사함 받았다는 것을 믿는 다"는 고백은 우리 인간이 죄의 권세 아래 계속 매여 살 수밖에 없도록 우리의 미래가 닫혀져 있지 않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믿음과 소망, 사랑으로 살아갈 수 있는 새로운 피조물의 길이 열려져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약속입니다. 우리는 그 사실을 믿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 했습니다. 새로운 피조물로서의 삶의 시작은 죄를 사함 받는데서, 새로운 피조물의 삶은 사함을 지향해 가는데서 이루어집니다.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습니다.■■

골 3:1~4 설교자 : 임 영 수

 

오늘로서 사도신경의 마지막 진술에 도달했습니다. 사도신경의 마지막 진술인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문제는 우리 인간에 관한 문제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관련되지 않고는 이러한 고백이 불가능 합니다. 어디까지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이러한 희망적인 믿음의 고백이 가능합니다. 이것은 단지 고백으로만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열린 새로운 운명에 대한 약속이기 때문에 그 실재가 반드시 있다는 것을 믿음으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와 그리스도 밖에 있을 때 우리의 삶의 가치는 너무나 다릅니다. '나'라는 한 인간의 존재는 변함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와 밖에 있을 때 "나"라는 한 인간의 가치는 큰 차이를 갖게 됩니다. '그리스도 안'이라는 말은 괄호 안에 있는 수의 값어치를 바꾸는 괄호 밖의 기호로 비유할 수 있습니다. "나"라는 한 인간은 유한한 존재로서 괄호 안에 있는 어떤 수와 같습니다. 그러나 그 괄호 앞에 어떤 기호를 붙이느냐에 따라 괄호 안의 수의 값어치가 달라집니다. 그와 같이 '나'라는 유한한 한 인간 존재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가, 밖에 있는가에 따라 큰 차이를 갖게 됩니다.

 

사도신경의 이 마지막 진술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게 될 때 생을 보는 관점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본 생의 전망은 죽어 무덤에 들어가서 썩어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본 생의 미래는 하나님과 함께 영원한 친교 가운데 있는 희망의 미래입니다. 그래서 사도신경을 고백하는 사람에게는 언제나 미래가 열려져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자신의 생을 살아갈 때 무덤만 보고 살아가는 사람과 무덤 저편 영원한 생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사람과는 너무나 큰 차이가 있습니다.

 

아프리카에 어느 부족을 거느리고 있는 추장이 병으로 자신의 운명이 점점 다해 감을 알고, 어느 날 세 아들을 불렀습니다. 추장은 세 아들에게 과제를 주었습니다.

"얘들아, 우리가 살고 있는 이곳에서 멀리 바라다 보이는 저 산이 있지 않느냐, 너희들은 그 산에 올라가 너희들에게 가장 소중히 생각되는 것 한가지씩 갖고 오라."고 했습니다.

 

세 아들은 아버지의 명을 받아 각기 아침 일찍 집을 떠나 산에 올랐습니다. 저녁 해가 거의 다 져가는 때 세 아들은 아버지께로 돌아 왔습니다.

아버지는 첫째 아들에게 물었습니다.

"너는 무엇을 가지고 왔느냐?"

"네, 아버지 저는 산에서 아주 신기한 돌을 발견하고 그것을 가져 왔습니다."

아들은 돌을 아버지 앞에 내놓았습니다.

"그래, 그것 참 신기하구나." 아버지는 말했습니다.

 

둘째 아들에게 "너는 무엇을 발견 했느냐?"

"네, 저는 이 평지에서는 볼 수 없는 신기한 식물을 발견하고, 그것을 가져 왔습니다."

아버지는 둘째 아들이 가져온 식물을 받았습니다.

 

마지막으로 셋째 아들에게

"너는 무엇을 발견했느냐?"고 물었습니다. 셋째 아들은 매우 송구스러운 태도로 아버지께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버지 저는 산에서 형들처럼 아무 것도 찾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한가지 보고 온 것이 있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그것이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아버지 저는 저 멀리 보이는 산꼭대기에 올라가서 비로서 산너머를 볼 수 있었습니다. 그 산너머에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이곳에 비할 수 없는 광활하고 비옥한 초원이 펼쳐져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아버지 우리가 살고 있는 곳은 너무 좁습니다. 우리 부족이 그곳으로 옮겨 살지 않는 한 우리에게는 희망이 없습니다." 고 했습니다.

 

그 때 아버지는 셋째 아들의 손을 꽉 붙잡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렇다. 네가 바르게 보았다. 나는 너에게 우리 부족을 맡기겠다."고 했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이 세상에 유한한 존재로 태어납니다. 그러나 그 유한성은 타고난 운명이지만 가변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유한성 그 차체로 끝날 수도 있고, 그것을 훨씬 넘어서 영원한 지평으로 이어질 수도 있습니다. 영원한 지평으로 이어지는 길은 그리스도 안에서 가능합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게 될 때 그 유한의 장벽을 넘어 영원한 삶을 약속으로 받게 됩니다.

 

인류의 정신사에 인간의 죽음이라는 유한성을 넘는데 대한 두 가지 견해가 있습니다.

그 하나는 고대 사회로부터 내려오는 '영혼 불멸'입니다. 다른 하나는 성서에 근거한 죽은 자의 부활입니다. 전자는 인간에게는 불멸의 요소인 영혼이 있다고 믿는 것입니다. 이 영혼은 인간이 태어나기 전에 이미 있었고, 인간이 태어나면서 인간의 몸에 갇혀 있다가 인간이 죽으면 감옥과 같은 몸에서 분리되어 자유롭게 된다고 믿는 것입니다. 이러한 믿음에서는 전생, 이승, 내생으로 인간의 생을 나눕니다. 이러한 견해에서는 인간의 육체는 감옥과 같은 것입니다.

 

다른 한편 후자인 죽은 자의 부활은 영혼 불멸이 아닙니다. 저는 어린시절 영혼 불멸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들어 왔습니다. 인간의 육체는 결국 흙으로 다 돌아가며, 오직 영혼만이 영구 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영혼을 구원받도록 힘써야 한다는 것입니다. 영혼이 구원받기 위해서는 생전에 좋은 일을 많이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도신경의 마지막 진술에서는 영혼 불멸을 말하지 않습니다. 죽은 자의 부활을 말하고 있습니다. 성서적 관점에서 죽음은 하나님과의 관계 단절이요, 생명은 하나님과 화해 가운데 있는 것입니다. 죽은 자의 부활은 우리의 삶이 죽음으로 폐기되지 않고, 하나님에 의해 새로운 삶으로 창조 된다는 믿음의 확신입니다.

 

사도신경에서 우리의 육체가 살 것을 믿는다고 말하지 않고 몸이 다시 살 것을 믿는다고 한 것에는 우리가 이해하고 있는 통속적인 삶에 대한 이해를 바꾸어 놓습니다. 성서적 관점에서 우리의 영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선물입니다. 그것은 불멸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 영혼은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에 의해 보존됩니다. 그리고 영은 각기 자신의 몸을 갖게 됩니다. 우리의 몸은 영혼을 가두는 감옥이 아니라 영의 형체입니다.

 

영은 구체적인 관계를 형성합니다. 그 관계는 자기 자신, 이웃, 자연, 그리고 하나님과 관계입니다. 이러한 관계 가운데서 하나의 인격을 형성해 갑니다.

 

이렇게 몸으로 형성되어 가는 삶이 죽음을 끝으로 모두 폐기 처분되는 것이 아닙니다. 비록 육체 (살과 뼈)는 빠져 버리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그와는 다른 차원의 몸으로 바뀌어 영원한 교제의 삶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그 영원한 교제의 삶에는 눈물, 한숨, 질병, 고통, 죽음이 없습니다. 오직 사랑 안에서 누리는 영원한 삶입니다.

 

사도신경에서 고백하는 부활의 삶은 그 누구가 지어낸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후 그의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에게서 듣고, 보고, 경험한 것입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후 그를 따르던 제자들은 그것으로 예수의 삶도 끝났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예수께서 사흘만에 무덤의 권세를 깨트리고 부활하신 후 제자들은 예수의 삶이 죽음으로 인해 손상되거나 폐기되지 않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영원한 차원 가운데 있는 그의 부활의 몸, 그의 부활의 삶을 목격했습니다.

 

부활하신 후의 예수의 모습은 형체가 없는 여기저기 떠 다니는 유령과 같은 실체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분명히 몸을 가진 한 분의 인격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몸은 다른 몸이었습니다. 비록 그의 옆구리에 창자국이 있고, 손, 발에 못 자국이 있었지만 그것이 그의 몸에 조금도 장애가 되지 않았습니다.

 

성서에서 증언하고 있는 부활의 몸은 하나님 앞에 서게 되는 몸입니다. 그 때의 몸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온전히 화해되고, 용서되고, 치유되고 보상된 몸입니다.

 

제가 어린 시절에 들은 이야기들 가운데 기억하고 있는 것은, "기독교인은 교통사고, 수술, 화장을 하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로는 부활시에 육체가 다시 살아나기 때문에 손상입은 육체는 그때에도 손상된 것으로 나타난다는 이유입니다. 이러한 상상적인 이야기들이 전적으로 허무맹랑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사도신경의 몸의 부활은 그러한 의미가 아닙니다.

 

이 세상에서 평생을 장애인으로 살던 사람이 부활 후에 그가 이 세상에서 사는 동안 장애인이었기 때문에 당한 고통, 결핍, 아픔이 부활의 몸으로 다시 살아날 때, 실현되지 못한 아픔, 결핍은 치유받고, 보상 받기 때문에, 이 세상에 있을 때와는 다른 온전한 몸을 가진 인격으로 하나님 앞에 섭니다. 그에게는 한, 증오, 적대감, 슬픔, 후회, 두려움과 같은 것이 없습니다. 그는 오직 사랑 가운데 있게 됩니다. 그에게는 충만, 기쁨, 희망이 있을 뿐입니다.

 

사도신경의 마지막 진술은 바로 이러한 믿음의 확신 가운데서 바라보는 희망의 미래에 대한 고백입니다. 그러한 미래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주신 약속입니다. 우리는 그 약속을 선취해 갖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게 될 때 우리의 생의 과거, 현재, 미래가 어떻게 달라지는가에 대해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 졌음이라." (3)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 (1~2)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 (4)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생은 이 현실의 생으로 마지막이 아닙니다. 우리의 생은 죽음을 끝으로 모두 폐기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영원하신 하나님 앞에 또 다른 몸을 가진 인격으로 서게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서게 될 때 우리의 일생이 그 분 앞에 그대로 다 드러나게 됩니다. 우리의 지나온 생은 실패, 결핍, 수치감, 상처등 실현되지 못한 생 그 자체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설 때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서 이미 용서되고, 치유되고, 보상된 생으로 서게 됩니다. 우리는 그러한 사실을 예수의 부활의 몸에서 보게 됩니다. 부활하신 후의 예수의 몸에 그대로 남아 있는 창자국, 못자국은 바로 그러한 사실을 의미합니다.

 

예수의 몸의 상처는 우리가 살아온 지난날의 어두운 현실입니다. 그것이 하나도 없어지지 않고 그대로 드러납니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에게 수치감, 좌절, 후회를 더해주는 것이 아니라 이미 말씀 드린대로 모두 용납되고, 치유된 삶에서 그러한 지나온 삶을 보게 되기 때문에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거기서는 찬송, 감사, 환희, 기쁨, 사랑만이 있습니다.

 

계시록에서는 실패한 인간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마지하는 "영원한 삶에는 눈물,사망, 애통, 곡하는 것,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않다."고 했습니다. (계21:4) 그것은 우리의 도덕적인 의, 공적, 자기 실현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이루어집니다.

 

영원히 산다는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영원한 교제 가운데 산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 교제는 오직 사랑 그 자체입니다. 성도 여러분 몸이 없는 영이 있을 수 없고, 영이 없는 몸도 불가능합니다. 몸은 영의 형체요, 영은 구체적인 몸을 형성해 갑니다. 그러나 부활 후의 몸은 부활 전의 몸과는 다릅니다. 하나님과 영원한 교제 가운데 있는 몸, 썩지 아니할 것으로 되어 있는 몸입니다.

 

우리는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습니다. 죽음이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새로운 피조물의 삶을 폐기시키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사랑 안에 있는 삶을 그 어떤 피조물도 와해시킬 수 없습니다. 영원 가운데 있는 우리의 삶은 시집도, 장가도 가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부족함이 없습니다.

 

"죽음을 바라보며"라는 기도문을 읽어드리는 것으로 저의 설교를 마칩니다.

 

 

 

제게 손을 놓는 법을 가르쳐 주십시오.

 

이승의 삶을

부여잡으려는

저의 환상과

두려움과 집착과 열망을

당신은 너무나 잘 알고 계십니다.

 

저는 믿습니다.

당신께서 보시기에 가장 좋을 때

당신께서 저를 부르실 것이라는 것을.

저는 믿습니다.

당신 사랑이 제가 미처 끌어안을 수 없는 기쁨을

제게 마련하시리라는 것을.

 

저는 알고 있습니다.

당신께서 저의 모든 잘못들을 용서하시리라는 것을.

 

그런데, 그런데, 아직도

부서진 장난감을 손에서 놓지 못하는 아이처럼

저는 손을 놓기를 주저하고 있습니다.

알지 못하고 낯선 까닭에 무섭습니다.

당신이 제게 빛을 약속하신 그곳에서

저는 단지 어두움만을 바라봅니다.

 

참 삶이 시작되는 그곳에서

저는 단지 삶의 끝장만을 바라봅니다.

 

당신은 저의 인간적인 집착을 이해하십니다.

저의 불안전한 감각을 이해하십니다.

저를 지으시고 자라게 하신 분은 바로 당신이시기에.

제게 느낌과 환상을 주신 분도 바로 당신이시기에.

 

당신은 보고 계십니다

제가 붙잡혀서, 이끌려서

제가 알지 못하는 길을 따라 걸어가야 함을.

 

저의 기력은 쓰러지고

저의 총명도 소용이 없습니다

저를 사랑하는 사람들도 저와 함께 갈 수 없습니다.

 

당신만이, 오로지 당신만이

끝없는 사랑이시기에

늘 그러하셨듯이 제 곁에 함께 계실 것입니다

인생이라는 고독한 여정의 황혼에서.

 

당신께서 저를 붙잡으시고

저를 이끄시며,

저를 받아들이시고

저의 부서진 형체를 다시 맞추실 것입니다.

 

저는 아무런 비밀이 없습니다

두려움이나 부족한 답변을 감추지 않습니다

이상하게도

약함과 힘없음과 두려움이

당신 앞에서는 아무 문제가 아닙니다

아무것도 부인할 필요가 없습니다

 

저는 다시 태어나기를 원합니다

당신 팔 안에 잠들기를 원합니다

그리하여, 영원한 빛 안에서 깨어나기를.

 

저는 알지도 이해하지도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무한히 자비하신 나의 하나님

저는 믿습니다

사랑이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것을

눈이 볼 수 없고

귀가 듣지 못하는 것을

당신께서 죽음 너머에 저를 위해 마련해 놓으신 것을.

 

당신 이름 안에

저는 내어놓습니다, 생의 남은 시간을.

가장 좋은 것은 아직 오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여기 대령하였나이다

저의 마지막 여정에 내내 함께 하여 주십시오

그리고, 저를 데려가 주십시오

영원히 당신과 함께 머무를 집으로.

 

-조 만나스-Joe Mannath-

출처 : 목회자의 요람 한서노회
글쓴이 : 다비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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