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자료 18,185편 ◑/자료 16,731편

발트 신학의 문제점들

by 【고동엽】 2022. 3. 5.

발트 신학의 문제점들
                                                                        서철원(총신대, 교의신학)

  카알 발트 (1886-1968)는 교황 요한 23세가 규정하였듯이 우리 시대 최대의 신학자이다. 그는 자유주의 신학을 깊이 배웠으나, 칼빈과 다른 개혁 신학자들을 공부하여 신정통주의자가 되었다고 하지만, 정통개혁 신학은 전혀 아니어서, 그의 신학을 받을 수 없다. 발트 신학에 있어서 중요한 몇 가지 점들만을 살펴  봄으로 그의 신학이 어떤 것인지를 알 수 있다.

  1. 성경관
    
  발트에 의하면 성경은, 그 자체로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고, 하나님의 계시가 아니다. 성경은 일어난 계시의 기록이다(KD 1/1, 104). 또 성경은 교회가 일어난 계시를 회상하는 회상물이다(KD 1/1, 110). 교회는 일어난 계시를 회상하는 것은 성경을 통해서이므로, 하나님의 계시를 교회가 회상하는 구체적인 형식이다(KD 1/1, 103). 성경은 일어난 계시가 아니라 교회가 그 계시를 회상하는 구체적인 수단이다(KD 1/1, 114).
  또, 발트에 의하면 성경은 그 자체로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므로, 하나님의 말씀, 혹은 일어난 계시의 증인이다. 즉 성경은 일어난 계시가 아니므로 하나님의 계시를 증거하는 증인이다. 증인은 본래 타자를 증거하는 봉사에 그 임무가 있다. 그런데 성경을 계시와 일치시키는 것은 성경에 나쁘고 합당하지 않은 명예를 입히는 것이 된다(KD 1/1, 115).  
  성경은 그 자체로 하나님의 계시가 아니므로, 교회가 기록된 성경을 정경으로 갖고 있지만 성경으로 기록됨(Schriftlichkeit)만으로는 규범이 되지 못한다는 것이 발트의 제시이다(KD 1/1, 109). 왜냐하면 성경은 그 본문에 있어서 근동의 한 종족의 종교의 역사의 문서이고 그 종족의 헬레니즘적인 외도자의 종교의 문서일 뿐이기 때문이다(KD 1/1, 171). 성경 본문에는 많은 양의 비정경적인 전통이 들어있고 이런 것들이 또 교리로 확정되었다(KD 1/1, 109).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는 역사적으로도 확인하기가 어려우며 확인을 해도 다른 종교설립자보다 더한 정도이고 또 나사렛의 랍비이다(KD 1/1, 171). 또 성경의 기적들도 해석될 때는 하나님의 말씀의 증명으로보다는 달리 해석되는 경우가 많고 세상성(Welthaftigkeit)으로 해석되고 그것을 벗어나기가 어렵다(KD 1/1, 171). 이렇게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그 자체로 하나님의 말씀 아닌 형상들로 갖고 있다(KD 4/l, 171-2).
  이렇게 발트는 성경을 직접 계시 혹은 하나님의 말씀과 일치시킬 수 없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일치시킬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인지를 말할 수 없고 간접적으로 말해야 한다고 그는 주장한다(KD 4/1, 136). 그래도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 되는 사건을 통해 하나님의 계시가 된다는 것이다(KD 1/1, 116; 120).

  개혁신학 : 성경 =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

  만일 성경은 단지 일어난 계시의 회상이고 문서일 뿐이면,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 될 수가 없다. 하나님의 말씀이 되는 사건을 통하여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 되면, 하나님의 말씀은 공중에 뜨게 되어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일 수가 없게 된다. 그러면 성경을 읽어도, 혹 발트의 말대로 하나님이 그렇게 성경을 사용하실 때에만 하나님의 말씀이 되므로, 어디서 그런 하나님의 말씀되는 사건을 기대할 수 있을 것인가? 그러므로 발트의 논리적인 전개는 매력적이어도 그의 성경관을 결코 받을 수 없다.
  모든 기독교 신학과 신앙은 다 성경에서 유래하였고 성경에 근거되어 있다. 그런데 성경이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고, 공중에 뜨게 되면 어디서 바른 신앙을 얻고 가르침을 받을 것인가? 누가 성경에서 이것이 바른 하나님의 말씀이고, 교리라고 지정해 줄 것인가?

  2. 삼위일체

  발트는 전통적인 삼위일체 교리를 전적으로 부정한다. 하나님은 한 위격적 한 하나님이다(KD 3/1, 204; 205; 105; 208; 1/1, 379; KD 4/1, 55). 세 위격은 하나님 내에 있을 수 없다. 그러면 개혁신학에서 말하는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 간에 이루어진 구원협약은 전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러면 하나님 아버지와 하나님 아들 간에 체결된 발트가 말한 은혜언약은 두 하나님을 하나님 안에로 들여오는 것이다(KD 4/1, 69; 64). 그러므로 성육신하실 로고스를 상정하는 것은 사람이 스스로 만든 우상 형상을 경배하는 것이다(KD 4/1, 55).
  그러면 발트가 말하는 삼위일체는 무엇인가? 삼위일체 교회는 계시에 뿌리를 가지고 있음으로 계시에 의해 생각되어져야 하는 것이다. 즉 그것은 계시과정일 뿐이라는 것이다. 계시에 있어서는 계시자가 있고 계시작용이 있고 계시된 내용이 있다. 이것은 서로 구분되나 분리되지 않는다. 이것이 삼위일체이다(KD 1/1, 315). 계시자는 아버지에, 계시 작용은 아들에, 계시 내용은 성령에 상응한다(KD 1/1, 386, 403). 계시자로서 하나님은 계시와 일치되고 계시내용과 또 일치된다(KD 1/1, 321, 324,; 401-2).

  전통적 기독교 : 삼위일체 하나님

  기독교의 첫째 교리가 바로 삼위일체교리이다. 이 삼위일체 교리는 사람의 머리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신비이다. 그 교리를 전부 합리적인 해석을 하여 삼위일체 교리를 없애므로 기독교가 기독교가 되지 못하고 자유주의 기독교가 되었다. 발트도 동일하게 전통적인 삼위일체 교리를 배척하고 자기대로 새로운 해석을 하였고 하나님은 한 위격적 한 하나님으로 유대교와 같은 신관을 전개하였다. 전통적인 삼
위일체를 배척하면 그때부터 기독교이기를 그친다.

  3. 예수 그리스도

  발트의 삼위일체론에 의하면 성육신할 하나님의 위격적 존재가 없다. 예수 그리스도는 시간 내에서 나서 살다가 죽으므로 끝이다(KD 4/1, 50-51) 그는 창조 세계에 속한다(KD 4/1, 50, 51, 53). 즉 피조물이란 말이다. 그러면 왜 그를 하나님이라고 부르는가? 그가 구원 곧 화해를 이룬 자이기 때문이다(KD 4/1, 20, 22, 25, et passim). 그는 순전히 역사적인 인물로서 구원을 이루었다(KD 4/1, 55)  따라서 그를 삼위일체의 제2 위격으로 일치시킬 수 없다(KD 4/1, 55). 하나님의 제2 위격은 구속주 하나님과 일 수 없다(KD 4/1, 55). 따라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것은 인간 예수를 말하는 것이지, 영원한 로고스로 연결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KD 4/1, 70).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성육신이 아니고 삼위일체의 제2 위격으로 일치시킬 수 없으면 예수가 왜 그리스도인가? 발트에 의하면 창조의 원형과 근거로 하나님의 경륜 속에 존재하였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로 삼위일체의 제2 위격으로 선재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창조목표로 하나님의 경륜 안에 선재한다. 하나님은 사람을 창조하시고 교제하신 후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의 피조물을 자기의 존재에 동참하도록 하는 작정을 하셨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는 만뚤 전에 하나님의 생각 속에 존재하였다. 하나님은 창조 이전에 이미 사람을 만드시고 그를 자기의 존재에 동참하도록 연합하기로 작정하였다 신인이 연합하는 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지게 하셨다. 신인 연합이 화해인데 이 화해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다. 그러므로 그가 하나님의 유일한 말씀이고, 또 참 하나님이다 (KD 4/1, 51, 54).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화해를 이루기 때문에 그가 창조에 있어서 하나님의 의지의 처음이고 그 내용이며 목표이다. 이 의미에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첫 번째이고 영원한 말씀이다 (KD 4/1, 52, 53).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화해가 만물의 시작이고 전제이므로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천지를 창조하셨다고 발트는 주장한다 (KD 4/l, 51). 예수 그리스도가 화해, 곧 신인합일을 이루었다. 그러므로 그가 역사적인 인물이지만, 하나님의 영원한 아들이다. 영원한 아들을 전통적인 신학이 말하는 로고스 아살코스(Logos asarkos, Logos Incamandus), 곧 삼위일체의 제 2 위격으로 일치시키는 것을 발트는 한사코 반대한다. 그런 삼위일체의 제 2 위격은 화해자 하나님일 수 없다는 것이다(KD 4/1, 55) 제 2 위격은 숨겨진 하나님이고 사람이 만들어낸 신들의 형상이다(KD 4/1, 50-70)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는 인격적 하나님으로 영원부터 계신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예정 안에 선재한다. 그 면에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로 불리우게 되는 것이다(KD 4/1, 70)

발트의 신학대로 하나님이 성육신하지 아니했고 예수 그리스도는 단지  역사적인 인물이면 그 기독교는 전통적 자유주의이다. 역사적인 인물이 예수 그리스도가 화해자 하나님이고, 영원한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는 순전히 역사적인 인물이므로 피조물이다. 그것은 바로 아레안 이단이 주장한 하나님의 아들을 시간 전에 창조된 피조물로 보는 것과 동일하다. 또 발트가 예수 그리스도를 창조의 목표이고 그 내용이라고 한 것은 구 자유주의의 대변자인 알브레흐트 릿츌(Albrecht Ritschl)의 주장과 같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으로서 선재할 수 없고 만물이 향하는 목표로 창조되었다고 릿츌이 말하였다. 그리스도는 그 인격적 존재로 선재한 것이 아니고 만물의 목표이기 때문에 만물에 선행한다(die chrisuiche Lehre von der Rechfertigung und Verso "hnung 3, 1884, 375).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과 같은 것을 말하는데 그리스도의 도덕적 완전성 때문에 하나님으로 치는 것뿐이다. 따라서 예수를 주라고 하는 것은 그가 인간으로서 우월한 것을 표기한 것이다(Rechfertigung unto Verso "hnung 3, 376).
  
  전통적 기독교 : 예수 그리스도 = 하나님의 성육신  

  전통적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성육신이라는 진리 위에 세워져 있다.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성육신이 아니면 기독교는 무너진다. 하나님이 성육신 교리가 기독교의 두 번째 가장 중요한 교리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성육신이 아니면 역사상에 나타난 훌륭한 종교가들 중의 하나이고 윤리 교사일 뿐이다. 그러면 무엇 때문에 기독교를 믿어야 할 것인가?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성육신을 부인하면 바로 기독교이기를 그친다. 발트도 근세 자유주의와 동일한 신학관을 가지고 있다.  

  4. 구원관

  발트에 의하면 구원은 죄와 사망에서의 구출이고 영생을 선사받는 것 이 아니라 사람이 신이 되는 것이다. 발트에 의하면 하나님은 처음부터 사람을 창조한 후 교제를 나누고 그 교제의 당사자인 사람을 끌어 올려 자기의 존재에 동참하도록 하기 위해서 창조하셨다(KD 4/1, 5/6,8). 사람이 하나님의 존재에 동참하는 것이 구원이다 (KD 4/1, 7). 바로 사람을 창조하여 그의 존재에 동참하도록 하는 것이 그의 모든 사역에 선행한다. 즉 창세 전부터서 하나님은 이것을 목표하셨다(KD 4/1, 56). 이 하나님의 존재에 동참이 바로 구원, 혹은 화해인데,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발생 하였다(KD 4/1, 52). 이 일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발생하였으므로 그가 하나님의 말씀이고, 영원한 말씀이다(KD 4/1, 51, 54).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구원, 혹은 화해는 바로 하나님과 사람이 그 안에서 연합한 것이다(KD 4/1, 37). 이 연합을 통하여 하나님의 존재에 동참하도록 허락하신다(KD 4/1, 7). 하나님은 인간의 반역에도 불구하고 이 일을 이루신다(KD 4/1, 12-14). 그러므로 사람은 자기의 피조성을 벗고 하나님의 존재에 동참을 이룬다(KD 4/1, 44).
  발트는 자기의 교의학에서 직접적으로 신이 된다고는 말하지 않지만, 하나님의 존재에 동참하는 것은 바로 신이 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그러므로 그의 후계자들은 서슴없이 신이 되기를 말한다. 사람이 구원되는 것이 죄와 사망에서 구출되어 영생에 이름이 아니고 하나님의 존재에 동참하여 하나님과 같이 되는 것은 모든 이교 사상의 근본이다. 553년 콘스탄티노폴리스 공회의에서 오리게네스를 이단으로 정죄하였는데, 그것은 신자들이 바로 그리스도와 같이 되고 그리스도가 된다는 주장을 했기 때문이다. 발트의 견해는 오리게네스와 근본적으로 같고 그를 넘어서서 오히려 하나님의 존재에 동참하여 신이 되는 것이므로, 이것은 성경이 처음 원죄로 정죄한 것을 구원의 종국으로 삼으니 이것은 전적으로 불가하다. 모든 근세 신학은 다 사람이 하나님이 되는 것으로 정하였는데 발트도 동일한 선에 서 있다.

  5. 만인구원

  발트에 의하면 하나님이 인류를 하나님의 존재에 동참하도록 하는 것은 일부 선택된 자들에게만 국한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인류에게 허락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전통적 개혁신학에 말하는 선택과 유기는 전혀 타당하지 않다. 모든 인류가 그리스도 안에서 유기 되었고 예수 그리스도가 선택되었으므로 모든 인류가 선택되었다. 선택된 자들뿐이고 유기된 자들이 없다. 단지 차이점은 교회에 속한 자들은 이미 자기들의 선택을 의식하고 있지만 교회 밖의 사람들은 그것을 의식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들도 예수 믿도록 전도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도 선택되었음을 증거해주면 된다. 발트의 말로 그의 예정 교리를 들어보자.
  발트는 선택교리가 복음의 총화이고 핵이라고 주장한다(KD 2/1, 13). 이것은 두 문장으로 요약되는데, "예수 그리스도는 선택하는 하나님이다" 라는 것이다. 이 문장은 예수 그리스도가 선택된 인간이라는 문장과 연결되어 바르게 이해될 수 있다. 그러면 절대적 작정을 대치하게 된다(KD 2/1, 111). 예수 그리스도가 피조물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이고 작정이다. 즉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은혜의 선택이다(KD 2/1, 112). 예수 그리스도의 선택은 하나님의 영원한 선택이고 결정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선택하는 하나님인 데 그 외에 다른 신을 만날 수 없다. 그 자체대로의 하나님은 없다. 그러므로 절대적인 작정 (abso1utum decretum)도 없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의 의지와 다른 의지도 없다(KD 2/1, 123-124).
  예수 그리스도는 선택된 인간이다. 그는 사람으로서는 선택된 피조물이지만, 신성으로는 선택하는 하나님이다(KD 2/1, 124). 그는 선택된 인간과 선택하는 하나님이 하나이어야만 한다(KD 4/1, 125). 하나님은 인간 자체(den Menschen an sich)를 그런 자로 유기 하셔야만 한다. 그러나 선택된 인간 예수 안에서 그렇게 하신다. 또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인간 자체를 그리고 그런 자로 사랑하신다 또 예수 그리스도를 다른 사람들의 자리에서 선택하신다. 그에게 하나님의 진노 심판과 형벌이 임한다. 그 안에서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시고 선택하시는 하나님의 형벌이 그들이 아니라 예수에게 임한다(KD 2/1, 133). 하나님의 영원한 뜻은 예수 그리스도의 선택이다. 이 선택으로 전통적인 예정교리 곧 선택하는 하나님과 선택된 인간을 모르는 단위로 다루는 것을 떠나게 된다(KD 2/1, 157). 하나님은 의로우시고 자비로우심으로 악을 그 자체로 진지하게 다루고 심판하고 그 행한 자를 배척하고 저주하고 죽음에로 넘기시기 원하셨다 (KD 2/1, 182). 그러나 그는 자비하셔서 그런 악을 행한 자를 자기의 가슴에 담고 그의 유기와 정죄와 죽음을 자기자신의 유기와 정죄와 죽음에로 넘기시기를 원하셨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예정을 그 자체로 믿는 것은 사람의 비유기를 믿는 것이고 그의 유기를 믿지 않는 것이다. 인간은 유기되지 안 했다(KD 2/1, 182). 그러므로 이 하나님의 자기 양도는 그가 자기의 아들을 주고 보내어 그가 유기된 데 성립한다. 그리하여 우리가 유기되지 않는 것이다(KD 2/1, 182-183). 따라서 우리는 예정의 적극적인 내용과 상관하는데 하나님은 인간을 그의 영광의 증거와 행복과 영생에로 예정하셨다(KD 2/1, 185).
  예수는 유기된 자이다. 유기된 자이면서 또 선택된 자이다. 그의 선택에서 보면 그 외에는 유기된 자가 없다. 모든 유기된 자들의 선택을 위해서 그가 유기된 자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선택된 자들과 유기된 자들의 주와 머리이므로 그들이 선택된 자들과 유기된 자들로서의 대립에 있어서도 그들은 서로 형제들이다(KD 2/1, 389).
  교회는 이 선택을 증거한다. 각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그들을 그리스도안에서 선택하였음을 증거하고 그 선택을 거부하는 것이 잘못되었음을 증거한다(KD 2/1, 348-349). 하나님을 부인하고 미워하며 유기되었다고 여기고 사는 자들에게 그가 바로 예정된 자임을 증거한다(KD 2/1, 349). 하나님이 이런 불경건자를 의롭다고 하셨다. 하나님의 높은 작정에 있어서는 유기된 자에게 그리스도 안에서 은혜를 베푸셨고 그를 하나님의 선택된 자로 여기시려 하신다. 선택된 교회는 각 사람을 향하여 그도 선택된 자라는 약속을 전하는 것이다(KD 2/1, 349-350).

  발트의 이 만인 구원설은 오리게네스의 만유 회복론과 같다. 오리게네스에 의하면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로 만유를 회복하므로 모든 인류가 다 구원될 뿐 아니라 마침내 사탄까지도 회복되어 원래 자리로 돌아간다고 주장하였다. 발트 자신은 그렇게 말하지 않지만, 그의 후계자들은 종말에 지옥이 그 기능을 다 하였으므로 없어진다고 까지 주장한다. 다 구원되면 무엇 때문에 예수 믿고 그렇게 애쓸 필요가 있는가? 만인이 다 선택되어 구원이 이르게 되면 전통적 기독교의 교회가 주장하는 인류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성육신이 필요가 없고, 그의 십자가 죽음도 필요 없게 된다. 그러므로 발트의 신학에는 하나님의 성육신도 없고 십자가의 대속적 죽음도 진리가 없다. 이 발트의 만인 구원설이 로마교회에 전달되어 바티칸 제 2 공회의 (1962-65)에서 종교 다원주의를 교리화하게 되었다. 즉 유대인들도 아브라함의 후손이므로 다 구원에 이르고 모슬렘들도 계시를 전달받았으니 다 구원에 이르고 이방 종교를 가진 자들도 상징의 빛 아래서 진리를 찾기 때문에 영원한 구원이 주어지고 보장된다. 만인이 다 선택되어 하나님의 구원에 동참하는 것에 도달하면 기독교는 무너진다. 또 존재할 필요도 없어진다.
  모든 인류가 다 선택되었으면 교회가 선택의 사실을 증거만 하면 되고 전도하고 선교할 필요가 전혀 없어진다. 교회가 전도하지 않으면 교회로 존속하지 못하게 되어 교회가 다 없어질 것이다.

  6. 창조론

  발트는 그의 신학에서 창조는 그 자체 때문에 발생하지 안 했고(KD 4/l, 104) 언약 때문에 발생하였다고 주장한다. 그 언약은 하나님이 피조물을 향하여 나타내시는 사랑의 실현이다(KD 4/l, 104). 하나님은 사랑하시므로 자신의 사랑을 나타낼 대상을 갖기 원하신다. 이 사랑의 대상을 만들어 그와 교제한 후 그에게 자기의 은혜를 입혀 그를 자기의 존재에 동참하도록 하기 위해서 창조하셨다(KD 4/l, 104-105). 사랑의 교제를 나누려면 사랑의 대상이 있어야 하고 그 대상이 활동할 공간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사랑의 교제를 위해 창조를 이루신 것이다(KD 4/l, 105). 그리am로 언약이 창조를 선행한다. 발트의 말대로 창조는 언약의 외적 근거이고, 언약은 창조의 내적 근거이다(KD 4/1, Section 41). 창조를 이루시므로 그 의 사랑을 실현하고 활성화한다(KD 4/l, 105). 왜냐하면 하나님은 이 창조에서 자기의 사랑을 나타내시기를 원하시기 때문이다(KD 4/l, 104). 즉 하나님은 창조주로서 자기의 피조물을 위해 실재로 존재하기를 원하시다(KD 4/l, 104). 언약에서 하나님은 실제로 이 자기의 사랑의 성취를 실현하신다(KD 4/l, 105). 그 사랑의 실현은 자기 자신을 피조물에 연합시켜 그의 존재를 자기 자신의 존재에 동참하도록 끌어올리는 것이다(KD 3/l, 303).
  또 발트가 하나님이 창조를 하시기 원하신 것을 설명한 바에 의하면 창조를 이루심은 하나님의 존재에 기인한다. 하나님은 유일한 한 신적 존재이다. 즉 한 인격적 한 하나님이시다(KD 3/l, 204). 그러므로 짜기 자신 밖에 자기의 대칭을 가지시기 원하신 것이다(KD 3/1, 205). 왜냐하면 이 유일한 단 하나의 신적 존재는 홀로 이시기를 원하지 않고 자기에 상응하는 존재를 가지시려고 하셨기 때문이다(KD 3/l, 208)  이 한 존재가 그의 사랑의 교제에 인간 당사자를 가지시려고 하신 것이다(KD 3/1, 105). 이 사랑의 교제 곧 언약 관계를 위해 하나님은 인간을 자기의 당사자로 창조하시고 세계를 자기 당사자의 거주지로 창조하셨다(KD 3/l, 105). 하나님은 이 교제를 통하여 자기가 사랑이심을 증명해 보이고 그에게 자기의 사랑의 표로 피조물을 끌어 올려 자기의 존재에까지 동참하도록 하므로 인간을 위한 하나님이심을 증명하려고 하셨다 (KD 4/1, 39; 3/1,b303).  
  발트의 이런 창조의 설명과 개진은 실제로 창조가 발생한 것으로 하고 전개한 것인가? 그렇게 단정적으로 받을 수 없다. 물론 무적인 것, 곧 혼돈으로부터 창조를 이루었다고 말하므로(KD 3/1, 112, 5, 122) 실재로 발생한 창조를 전제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창조기사는 다 사가(saga)라는 것이 그의 단정이다.
  발트의 신학에 의하면 창조역사는 사실적 역사가 전혀 아니다. 그것은 주석적으로, 또 교리적 근거들에서 그렇게 확정해야 할 것이라는데 단호하다. 그러므로 그는 성경의 기사, 혹은 창조역사는 사실적 역사가 아니라고 반복한다(KD 3/1, 87-88). 성경은 많은 사가를 포함하고 있다. 사실적인 역사도 있다. 그러나 사가이다(KD 3/l, 88). 즉 둘을 포함하면 사실 역사와 사가의 혼합이라는 것이다(KD 3/l, 88-89). 그러나 문제의 심각성은 발트에 치하면 성경의 창조역사는 순수한 사가이다. 즉 사실적인 역사의 혼합도 전혀 아니라는 것이다(KD 4/1, 89). 그것은 오히려 점하고 시를 짓는 역사 사가이다(KD 3/l, 90) 성경의 창조역사들이 다른 성경적 증거들과 일치해도, 그 창조역사를 사가들이라고 받는 것에 혐오를 가질 필요가 전혀 없다는 것이 발트의 창조기사를 설명하고 난 후의 결론이다(KD 3/l, 90). 창조의 사건들, 가령 장녀를 만듬 등은 역사 이전이 것이다. 즉 순수한 사가들이다(KD 3/1, 91). 마찬가지로 낙원기사도 사가이다 (KD 3/1, 287). 왜냐하면 그런 것들은 사건들이어도 환상에 근원을 가진 것이므로 역사적으로 관찰할 수 있는 것이 전혀 아니다(KD 3/1, 287).
  낙원은 열심히 일할 자리임을 지시한다 (KD 3/1, 316). 따라서 지구상에서 한 점을 지적하고 이곳이 바로 낙원이라고 말할 수 있는 자리가 아니다(KD 3/1, 286-288). 창세기 저자는 셈계이므로 그 때 알려진 지구 상에 낙원이 한 자리인 것처럼 말한 것뿐이다(KD 3/l, 288, et passim). 그것은사실상의 역사 (Historie)가 아니고, 그런 역사 이전의 역사 (praehistorische Geschichte)를 말한다(KD 3/1, 287). 여기의 문제의 기사는 사가 (Saga)여서 (KD 3/1, 287, et passim), 순전히 상상의 장소를 말할 뿐이다(KD 3/l, 318). 따라서 에덴 동산은 이스라엘이 출애굽 이후 광야에서 가졌던 모든 경험을 역투사한 것일 뿐이다 (KD 3/1, 305). 즉 낙원에 물이 흘러 넘치고 풍성한 과일이 맺히는 기술은 단지 이스라엘이 광야생활에서 경험한 절박한 물의 요청, 채소와 과일을 먹지 못해서, 그렇게도 먹기 바란 것이 에덴의 역사에로 역 투사된 것이지 사실의 기록이 아니다. 그러므로 발트는 창세기 2장의 기사를 원인론적인 신화이거나 사가, 즉 북유럽풍의 전설, 혹은 무용담으로 본다 (KD 3/l, 347).
  발트의 창조 설명은 역사적 창조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성경의 창조기사를 설명하고 있는 것뿐이고, 그런 기사는 다 사가이지 역사적 사실이 전혀 아니다. 그러면 발트의 신학에는 역사적 창조가 전혀 없다.  발트가 낙원에서 인간이 하나님과 언약을 맺고 하나님과 교제 관계를 시작했다는데 그의 모든 초점을 모으면서, 창조기사와 낙원기사를 단지 신화나 사가로 치부하면 일반 자유주의자들의 견해와 무엇이 다른가? 그러면 창세기 1장에 나오는 창조기사와 2장의 기사도 다 신화 발트의 표현대로 사가이면 창조는 사람과 하나님 관계를 위한 환상의 산물이 아니고 무엇인가? 단지 창세기에 기록되어 있으므로 위에서와 같이 설명하고 있는 것뿐이다.

  이상과 같이 간략하게 발트의 신학을 살펴보았는데, 그의 신학의 진목면이 이러하므로 한국교회가 발트의 신학을 신정통주의라고 하는 이름으로 표기되었다고 해서 전혀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발트를 신정통주의라고 하여 자유주의와 다르다고 하지만, 다른 점은 전통적 자유주의는 성경 속에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있다고 주장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찾으려고 애쓴 데 반해서, 발트는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
이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한낱 역사적 인물이지만 하나님이라고 칭하는 것을 주저하지 안 했다는 점뿐이다. 예수에게서 하나님의 계시가 이루어졌고 그를 통해서 하나님이 이루시고자 하는 신인의 합일이 이루어졌다고 믿기 때문에 예수가 순전히 역사적인 인뿐이어도 그를 하나님이라고 자주 호칭한 것뿐이다.  ♣

'◑ 자료 18,185편 ◑ > 자료 16,731편' 카테고리의 다른 글

교회론  (0) 2022.03.05
복음적 설교  (0) 2022.03.05
서양 고대철학사  (0) 2022.03.05
중세철학  (0) 2022.03.05
근세 철학사-서철원교수  (0) 2022.03.05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