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장 죄론과 은혜론, 그리고 관련된 교리들
1. 교부시대의 인간론
1) 인간론적 문제들의 중요성
인간론적 문제들은 죄와 은혜, 자유의지, 신적인 예정과 같은 문제들인데 이런 문제들이 제대로 해결되지 않은 곳에서는 참된 경건이 많이 나타나지 않았고, 참된 경건이 약해지면 인간론의 오류가 늘 나타났다.
2) 헬라 교부들의 인간론
(1) 헬라 교부들의 죄론
그들은 아담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되었을 때에 인간의 윤리적 완전성은 거기에 포함되어 있지 않았고, 단지 인간 본성이 도덕적으로 완전해질 수 있는 가능성만이 포함되어 있었다고 강조했다. 아담은 범죄할 수 있었고 실제로 범죄하였기 때문에 사탄과 죽음과 죄악된 타락의 세력 아래 놓이게 되었다. 이런 육체적 타락은 인류 속에서 유전되었지만 그 자체가 죄는 아니고, 인류가 죄책 가운데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도 않았다. 즉 엄밀한 의미에서 원죄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들은 인류가 아담과 육신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은 인정했지만 이 연결은 아버지로부터 아들에게로 유전되는 육신적이고 감각적인 본성에만 적용되고, 모든 경우에 있어서 더 높고 이성적인 인간 본성에는 적용되지 않는다. 즉 영혼은 하나님이 직접창조하셨다. 죄는 언제나 인간의 자유로운 선택에 유래하고, 연약함과 무지의 결과다. 유아들은 오직 육체적 타락만 물려받았기 때문에 죄책이 있다고 할 수 없다. 그래서 유아가 죽으면 지옥에 가지 않는다. 카톨릭은 유아림보, 알미니우스는 지옥에 간다고 함.
(2) 오리겐의 인간론
오리겐은 모든사람이 태어날 때에 유전적인 부패를 가지고 나오는 것을 인정하고, 그것을 출생 이전에 혹은 시간 이전에 영혼이 타락하였기 때문이라고 설명함으로 원죄론에 접근했다.
(3)헬라 교부들의 은혜론
중생에서 주도권을 쥐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라 인간의 자유의지이다. 의지가 중생과정을 개시하기는 하지만 하나님의 도움이 없이는 그 과정을 완성할 수 없다. 하나님의 능력은 인간의 의지와 협력하여 인간의 의지가 악에서 떠나고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것을 행할 수 있게 해준다. 헬라 교부들은 자연인이 행할 수 있는 선과 성령의 능력의 개입이 반드시 요구되는 영적인 선을 항상 분명하게 구별하지는 않는다. 웨슬리는 이것을 선행은혜와 칭의시키는 은혜로 연결시켰다.
3) 서방 교회에서 또 다른 견해의 점진적인 출현
(1) 라틴 교부들의 인간론
주후 3,4세기에 터툴리안, 키프리안, 힐라리, 암브로시우스의 저작들에서 점진적으로 출현했다.
(2) 터툴리안의 공헌
터툴리안은 헬라신학의 창조설 대신에 영혼 유전설을 주장하였다. 그는 영혼이 유전되면서 죄도 유전된다고 했다. 하나님은 몸과 영혼으로 이루어진 일반적 인간 본성을 창조한 후에 그것을 생식과정을 통해서 개별화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 과정에서 일반적인 인간 본성은 그 독특성을 잃지 않고 모든 시점에서 개별화된 인간 존재 안에서 계속해서 지적이고 자발적이기에 이성적이고 책임있는 활동을 한다. 본래 인간 본성이 지닌 죄는 모든 개인들에게서 죄로 남는다. 유아들은 자범죄로부터 자유롭다고 보지만 자유의지를 완전히 부정하지 않는다. 종종 중생과 관련된 협력설을 풍기는 표현을 사용한다.
(3) 키프리안, 암브로시우스, 힐라리
키프리안의 저작에는 인간의 본래적인 죄성과 오직 하나님의 능력에 의한 영혼의중생과 관련된 가르침을 향하여 점점 더 나가는 경향이 존재한다. 원죄의 죄책은 자범죄의 죄책만큼 크지 않다고 본다.
암브로시우스와 힐라리는 모든 사람이 아담 안에서 범죄하였기 때문에 죄 가운데서 태어난다는 것을 분명하게 가르친다. 인간의지가 전적으로 타락하지는 않았기 때문에 중생과 관련된 협력설을 지지한다.
2. 펠라기우스와 어거스틴의 죄론과 은혜론
1) 어거스틴과 펠라기우스
(1) 어거스틴의 초기의 삶
어거스틴은 도덕과 신앙의 길에서 멀리 떠나 방황하면서 마니교에서 도피처를 구하다가 덫에 걸려 넘어질 뻔 하다가 마침내 그리스도께로 돌아왔다. 그의 회심은 밀라노의 한 정원에서 깊은 고뇌와 통곡과 기도 후에 일어났다. 395년에 히포의 감독이 되었다.
(2) 어거스틴과 펠라기우스의 비교
펠라기우스는 불타는 야심이나 신비주의와는 상관없는 조용한 사람이었다. 영국의 수도사로서 엄격한 삶을 살고 흠 없는 성품과 한결같은 기질을 지닌 인물이었기에 어거스틴이 겪었는 영혼의 갈등, 죄와의 싸움, 모든 것을 새롭게 하는 은혜에 대한 깊은 체험 같은 것에 낯설었다.
2) 펠라기우스의 죄론과 은혜론
(1) 죄론
펠라기우스는 아담의 원래의 상태는 거룩하지도 죄악되지도 않으며, 선할 수도 악할 수도 있는 중립의 상태였다. 선과 악 중 어느쪽도 선택할 수 있는 자유롭고 전혀 결정되어 있지 않은 의지를 지니고 있었다. 자신의 의지로 범죄할 수도 있었고 범죄를 피할 수도 있었다. 선악과를 먹고 안먹고는 죽음과 상관이 없었다. 그는 원래 죽을 수 밖에 없는 존재로 창조되었다. 아담은 범죄했어도 자신 외에 어느 누구에게도 해를 입히지 않았고 인간 본성도 전혀 타락하지 않고 변함이 없었다. 아담의 죄로 말미암은 유전되는 부패성은 없었다. 인간의 본성에는 필연적으로 죄를 지을 수 밖에 없는 악한 성향이나 욕구 같은 것은 없다. 단지 아담은 후손들에게 나쁜 선례를 보였을 뿐이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선한 것을 행하라고 명령했다는 것은 인간이 선을 행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다. 인간은 자신의 능력 한도 내에서 책임을 진다. 죄가 보편적이라면 잘못된 교육, 나쁜 모범, 범죄의 습관 때문이다. 이런 사상은 불신자들의 많은 호응을 얻어서 일반 교육의 전제가 되었다.
(2) 은혜론
악에서 선으로 돌이킬 때에 인간은 하나님의 은혜에 의존하지 않는다. 여기서 말하는 은혜는 의지를 불러일으키고 인간이 선을 행할 수 있도록 힘을 주는 성령의 감화를 말한다. 펠라기우스가 말하는 은혜는 단지 인간의 이성적 본성, 성경속의 계시, 예수 그리스도의 모범 같은 외적인 은사들과 천부적으로 수여받은 것들을 말한다. 펠라기우스는 유아세례를 받아야 한다고 한다. 그것은 성별의식내지 장래의 죄 사함을 앞당겨 미리 선포하는 것이다. 아이들은 영생이라는 낮은 차원의 복된 삶으로 갈 수 있지만 천국으로부터는 배제된다고 했다. 아마도 자발적인 복종을 할 수 없었기 때문일 것으로 추측된다.
3) 어거스틴의 죄론과 은혜론
어거스틴은 죄의 자발적 성격을 강조한다. 죄로 인해 영혼은 하나님에게서 끊어져서 악할 수밖에 없는 상태에 놓이게 되었다고 믿는다. 죄의 결과로 인간은 하나님의 사랑에 뿌리를 둔 참된 선에 대한 의욕을 더 이상 가질 수 없고 자신의 참된 운명을 실현할 수 없으며, 속박의 상태로 점점 더 빠져들어간다.
죄는 어떤 적극적인 것이 아니라 결여 혹은 결핍이다. 죄는 선의 결핍이다. 하나님의 사랑을 자기애로 대체해 버린 것이 죄의 뿌리가 된 원리다. 인간의 타락은 이성과 반대되는 육욕과 같은 감각적니 욕구들이 인간의 영혼에서 횡행하게 된 것이다. 죄의 결과로 죽음이 왔다. 인간은 죽지 않는 존재로 창조되었다. 하나님께 순종했다면 거룩함 속에서 견고해졌을 것이고 범죄하지 않고 죽지 않을 능력(posse(부정사, 명사는 potestas) non peccare et mori)의 상태로부터 범죄할 수 없고 죽을 수 없는 능력(non posse peccare et mori)의 상태로 옮겨갔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범죄했고, 그 결과 범죄하지 않을 수 없고 죽지 않을 수 없는 능력(non posse non peccare et mori)의 상태로 들어갔다.
아담은 타락한 본성을 죄책과 부패와 더불어서 그의 후손들에게 물려준다. 온 인류는 아담 안에 배아로 존재했기 때문에 아담 안에서 실제로 범죄했다. 이것이 실재론적 의미다. 인류는 개인들로 구성된 것이 아니라 유기적으로 아담 안에 존재했던 원래의 일반적 본성의 유기적 부분들인 수많은 개별화된 존재들도 구성되어 있다.
죄의 결과로 인간은 전적으로 타락하여서 어떤 영적인 선도 행할 수 없다. 어거스틴은 인간의 의지가 어느 정도의 본성적인 자유를 지니고 있다는 것을 부정하지 않는다. 인간의 의지는 자연적으로 선한 행위들, 칭찬받을 만한 일을 할 수 있다. 동시에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어 있고 죄책을 짊어지고 있으며 악의 지배아래 있기에 하나님 보시기에 선한 것에 대한 의욕을 가질 수 없다고 본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의 동기에서 나오는 것만이 하나님 보시기에 선하다.
(2) 은혜론
인간의 의지는 새롭게 될 필요가 있고 이는 오직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이다. 어거스틴이 불가항력적인 은혜라는 말을 할 때, 인간의 의지를 강제한다는 것이 아니라 은혜가 인간의 의지를 변화시켜서 인간이 자발적으로 선한 것을 선택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은혜는 모든 선의 원천이다. 어거스틴의 중생론은 철저하게 하나님 단동력적(monergistic)이다. 그는 은혜를 세 단계로 나누었다. 선행적 은혜(prevenient grace)에서 성령은 율법을 활용해서 죄의식과 죄책감을 낳고, 작용적 은혜(operative grace)에서 복음을 사용하여 칭의 및 하나님과의 화목을 가져다 주는 그리스도와 그의 속죄사역에 대한 믿음을 낳으며, 협력적 은혜를 통해서 인간의 새로워진 의지가 하나님과 협력하여 일생에 걸친 성화 사역에 참여하게 된다. 은혜의 역사는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완전히 새롭게 하는 것과 죄인이 성도로 영적인 변화를 일으키는 것을 포함한다.
(3) 예정론
어거스틴은 하나님의 은혜를 구원의 유효한 원인이라고 설명하였다. 처음에 그는 예정을 하나님의 예지에 의해서 일어나는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예정은 실제로 예지된 인간의 자유의지에 종속되어 버렸다. 그러나 후에 성경구절들을 통해서 인간이 선을 선택하고 그리스도를 믿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의 효과라고 보았다. 예정은 영원의 관점에서 바라본 죄인의 구원이라고 하였다. 택함받지 못한 자들은 하나님께서 은혜베푸시는 것을 간과하기로 작정했다고 하였다. 유기는 의도된 결과를 확보하기 위한 하나님의 어떤 직접적인 개입이 수반되지 않기 때문에 선택과는 다르다. 그러나 어거스틴은 중생의 은혜는 다시 상실될 수 있다는 주장도 했다. 그는 중생하고서 끝까지 신앙을 지킨 자들과 중생의 은혜를 상실한 후에 다시 회복한 자들만이 최종적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택함받은 자들은 중생되지 못한 상태로는 결코 죽지 않는다고 하였다.
4) 펠라기우스 논쟁과 준펠라기우스 논쟁
동방교회는 운명 같은 이교적 사상에 반대하여 인간 본성에 있어서의 자유의 요소를 강조하기를 좋아했다. 그들은 인간의 의지가 부패하여, 사탄과 감각과 관련된 시험이나 유혹들, 죽음에 종속되게 하였고, 세례를 통해서 새로운 삶이 전해진다는 것을 인정하였다. 대체로 헬라 교부들은 은혜와 자유의지를 나란히 열거하는 것으로 만족했다.
(1) 펠라기우스의 전파와 단죄
펠라기우스의 체계는 그의 제자였던 켈레스티우스에 의해서 북아프리카 교회에 소개되었다. 동시에 펠라기우스는 팔레스타인에서 자신의 견해를 전파했다. 주후 412년에 케레스티우스는 카르타고에서 이단으로 정죄되었고, 견해를 철회하지 않자 출교 당했다. 펠라기우스는 예루살렘과 디오스폴리스의 교회회의들에서 이단으로 고소되었지만 자신의 일부 발언들을 수정하고 그럴듯하게 해명해서 이단정죄에서 벗어났다(주후 414-416). 416년에 밀레브와 카르타고 교회회의에서 이단으로 단죄되었고 418년에 로마의 감독 조지무스가 재가했고 431년 에베소 회의에서 단죄되었다.
(2) 준펠라기우스주의(semi-Pelagianism)
준펠라기우스주의는 하나님의 은혜와 인간의 의지 양쪽이 모두 인간을 새롭게 함에 있어서 대등한 요인이라는 것들을 인정하고, 예지된 믿음과 순종에서 예정론의 통대를 찾음으로써 모든 난점을 비켜나가고자 했다. 인간의 부패를 부정하지 않았고, 인간의 본성이 타락에 의해서 치명적인 상처를 입은 것이 아니라 약화되었고 병들었다고 보았다. 타락한 본성은 자유의지의 요소를 갖고 있고, 이것 덕분에 은혜와 협력할 수 있다. 중생은 이 두 요인의 협력의 산물이지만 중생의 역사를 개시시키는 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인간이다.
(3) 교회에 의해 받아들여진 어거스틴주의
준펠라기우스주의를 받아들인 인물은 마르세이유의 대수도원장이었던 카시안과 레기움의 파우스트, 마실리아의 겐나디우스 등이었다. 그러나 오렌지 공의회에서 단죄되었다. 그래서 결국 어거스틴의 죄론과 은혜론이 서방교회의 인간론으로 채택되었다. 레오, 그레고리, 비드, 앨퀸 등과 같은 인물들이 어거스틴의 이론을 지지했다. 그러나 그들은 어거스틴만큼 강하게 유기자들의 간과(Preterition)와 유기를 단언하지는 않았다. 그들은 인간의 의지가 노예 상태라서 인간이 새롭게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은혜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을 대단히 강조했다. 예정에 의한 불가항력적 은혜에 대한 가르침은 성례에 의한 성례적 은혜에 관한 가르침으로 대체되었다. 아울러 이중 예정-악으로의 예정-도 주후 529년에 폐기되었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서 동방교회에서는 준 페라기우스주의가 견고하게 자리잡았고 서방교회도 헬라교회의 인간론을 채택했고 그 이후로도 그 인간론을 지지했다. 이중예정의 폐지는 결국 동방교부들을 깊이 연구하고 받아들인 웨슬리에 의해서 악마의 교리라고 비판하게 된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웨슬리는 알미니우스의 영향을 받고 예지 예정을 선택했다. 그리고 다른 면에서도 준펠라기우스주의와 유사한 면이 있지만 몇 가지 면에서 다르다.
3. 중세 시대의 인간론
1) 대 그레고리의 견해
주후 540년 경에 태어난 대 그레고리는 어거스틴, 제롬, 암브로시우스에게서 배운 부지런하고 성실한 연구자였다. 부친이 죽은 후 자기 재산을 좋은 일, 수도원짓는 데에 바쳤다. 주후 590년에 만장일치로 교황에 선출되었다. 어거스틴 다음으로 교회에서 가장 영향력이 큰 권위자다.
(1)인간론
그는 인간의 연약함으로 죄가 세상에 들어왔다고 했다. 아담이 범한 최초의 죄는 자유의지에 의한 행위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보다 영적인 맹목과 영적인 죽음에 굴복했다. 이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이 죄인이 되었고 정죄되었다. 그는 이 원죄로 인한 부패성을 죄책이라기 보다는 연약함이나 질병으로 보았고, 타락으로 인해 자유를 잃은 것이 아니라 의지의 선함만을 잃었다고 했다. 은혜 없이는 어떤 구원이나 공로도 없다고 했다. 구속의 역사는 은혜로 말미암는다. 선행적 은혜는 인간으로 하여금 선에 대한 의지를 갖게 하고 후속적인 은혜는 선을 행할 수 있게 만든다. 인간 속에서의 변화는 믿음을 생기게 하고 과거의 죄들이 지닌 죄책을 무효화시키는 세례에서 시작된다. 의지는 새로워지고, 마음은 하나님에 대한 사랑으로 가득하게 되어서, 인간은 하나님에게 공로에 의해서 뭔가를 얻게 된다.
(2) 예정론
그는 예지 예정을 믿는다. 하나님은 구원받을 일정한 수를 정하는데 이는 그들이 복음을 받아들일 것을 아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기 자신이나 다른 사람이 선택받았다는 것을 아무도 알 수 없다.
2) 고트샬크 논쟁
(1) 고트샬크의 예정론
세비야의 이시도르도 어거스틴과 같이 이중예정을 주장했다. 그러나 7-9세기에는 그레고리의 영향으로 많은 사람들이 예지예정을 믿었다. 이때 고트샬크라는 인물이 이중예정, 멸망받을 자들의 예정과 구원받을 자들의 예정을 열렬히 주장했다. 그는 하나님의 일을 구속의 일과 거룩을 만들어 내는 일로 제한하고 죄는 허용의 작정으로 했다. 예지예정은 거부했다. 그것은 하나님의 작정을 인간의 행위들에 의존하게 만든다는 이유로 거절되었다.
(2) 고트샬크에 대한 반대
그의 가르침은 하나님을 죄의 원천으로 만들었다는 비난을 받았다. 주후 848년 마이앙스에서 단죄되었고 채찍질당하고 종신형에 처해졌다. 프루덴티우스, 라트람누스, 레미기우스는 이중 예정론을 옹호했고, 라바누스, 앨스의 앙크마르는 이중 예정론을 맹렬해 공격했다. 후에 이들은 결국 성례적 은혜라는 개념에 동의했고, 엄격한 예정론이 성례의 영적 가치를 빼앗아 버리고 단순한 형식들로 만들어 버릴 것을 두려워했다. 이들은 퀴어시의 교회회의와 발랑스의 공의회에서 다음과 같이 결정했다. “우리는 구원받은 자들의 택정에 있어서 하나님의 긍휼이 선한 공로보다 선행하며, 멸망받을 자들의 정죄에 있어서 악한 공로가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보다 선행한다는 것을 고백한다. 그러나 예정에 있어서 하나님께서 거저 베푸시는 긍휼이나 의로운 심판에 있어서 오지 그 자신이 행하고자 하시는 것들만을 결정하셨다...그러나 악인에 있어서 하나님은 악이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므로 하나님이 그 악을 예정하시는 것이 아님을 고백한다.
3) 안셀무스의 기여
(1) 죄론
원죄에서 원이란 인류이 기원이 아니라 현재의 상태에 있어서 개인의 기원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한다. 원죄는 본성적 죄다. 인간의 타락으로 인해서 죄책을 지니게 되고 부패하게 되었다. 이 죄책과 부패는 아버지로부터 자녀로 전해진다. 자범죄든 원죄이든 모든 죄는 죄책을 구성한다.
모든 아이는 아담 안에서 실제로 범죄했고 죄책이 있고 부패된 것이다. 죄악된 본성이 생식을 통해서 번식된다. 그는 직계조상의 죄는 아담의 죄가 전달되듯이 후손에게 전달되지 않는다고 했다. 그 이유는 설명하지 못했다.
(2) 자유의지론
자유는 범죄하거나 범죄하지 않을 힘, 혹은 양쪽 모두의 가능성으로 정의되지 않는다. 천사들은 완전한 도덕적 자유를 지니고 있지만 범죄할 수 없다. 외부의 강제없이 스스로 옳은 것을 행하겠다고 아주 단단히 결심하여서 옳은 길을 떠날 수 없게 된 의지는 자유롭다. 아담은 범죄의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에 범죄했다. 그는 옳은 것을 행하는 참된 자유가 없었다. 그러므로 아담의 타락 후에 참된 자유는 상실되었지만 의지의 능력은 상실되지 않았다. 의지의 참된 목적은 선을 택하는 것이다. 의지의 참된 자유는 거룰을 향한 의지의 자기결단에 있다. 잘못된 것을 선택하는 능력은 불법적인 선택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기 때문에 진정한 자유의 완전함으로부터 제외된다.
4) 로마 카톨릭의 인간론이 지닌 특징들
(1) 원의론
인간이 창조될 때, 육신과 영혼으로 구성되었는데 육신에 있는 육욕이 영혼의 이성과 양심을 거스리는 상태였다. 이때 영혼이 육신의 야수성을 지배할 수 있도록 주신 초자연적인 은사가 있는데 이것이 원의다.
(2) 원의의 상실에 대한 견해
아담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원의는 상실되었다. 그리고 육신과 영은 다시 갈등상태로 빠져들었다.
(3) 원죄론
아담은 모든 후손들의 대표자요, 후손들은 모두 아담 안에서 범죄하였고 원죄를 짊어진 채 세상으로 들어온다. 원죄는 원의의 결여이다. 아담의 원죄는 보편적이고 자발적인 성격을 지닌다. 원죄는 육욕이나 인간 속에 있는 악한 욕망이나 정욕들과 동일시되어서는 안된다.
(4) 신인협력설
인간은 영혼을 영적으로 새롭게 함에 있어서 하나님가 협력한다는 설. 인간은 주입된 의라 불리는 칭의의 은혜를 받기 위해서 스스로를 준비시킨다.
4. 종교개혁시대의 인간론
1)종교개혁자들의 인간론
(1) 아담과 그의 후손들의 관계에 관한 견해
베자는 아담의 본성에 있어서 인류의 자연적인 머리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인류와 맺은 언약의 대표자였고, 그 결과 그의 최초의 죄는 그의 모든 후손들에게 죄책으로 전이된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모든 사람이 아담 안에서 죄책을 지기 때문에 그들은 부패된 상태로 태어난다.
(2)죄론
원죄는 아담의 죄일 뿐아니라 인간 본성의 전적부패다. 원죄는 영혼과 육체 전체에 자리잡고 있다. 부패성으로서의 원죄는 단순히 죄의 연료가 아니라 죄다. 그것은 죄책이 있고, 정죄를 받게 만드는 내주하는 죄들이다.
(3) 전적 타락설
타락의 결과로 어떤 영적인 선을 할 수 없고 회복을 위해 나갈 수 없다. 그러나 중생하지 못한 자라도 여전히 시민적 의, 즉 사람들의 사회적 관계들 속에서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의를 행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멜란히톤은 인간이 시민적 의를 행하게 해주는 하나님의 보통은혜가 존재한다고 말했다.
(4) 은혜의 필요성
루터, 칼빈, 쯔빙글리는 인간이 중생하기 위해 하나님의 은혜가 전적으로 필요하다고 했다. 멜란히톤은 의지가 일정정도의 실질적인 자유가 있어서 중생시에 하나님과 협력할 수 있다고 하였다.
(5) 예정론
루터는 유기에 관한 가르침을 부정하거나 유기는 예정에 의한 것이라고 하기도 했다. 쯔빙글리는 유기를 유효한 작정이라고 하였다.
언약개념은 불링거, 폴라누스, 고마루스, 크로펜부르크, 코케이우스의 저작들에서 나타났다. 아담은 본성적으로 인류의 머리일 뿐 아니라 하나님이 인류와 맺은 언약의 머리, 그의 모든 후손들의 도덕적 법적 대표자였다. 대표자의 죄로 인한 죄책은 후손들에게 전가되고 부패된 채로 태어난다. 실재론은 루터파에서 여전히 인기가 있지만 개혁파에서는 일반적으로 폐기되었다.
2)소시누스의 입장
하나님의 형상은 단지 피조물에 대한 인간의 지배권을 의미한다. 인간의 의와 거룩이 아니다. 아담의 타락은 인간의 도덕적 본성을 손상시키지 않았다. 인간이 죽는 것은 아담의 죄 때문이 아니라 죽을 존재로 지음받았기 때문이다. 아담의 잘못은 후세에게 나쁜 모범을 보였다는 것이다. 사람은 아담과 같은 상태로 태어난다. 죄는 하나님의 진노를 불러일으키지 않는데 하나님은 인간의 연약함을 알고 그들이 회개하는 마음으로 나오면 언제든지 죄를 사할 준비가 되어 있다.
3)알미니우스주의자들(알미니안들)의 인간론
(1)죄론
아담의 죄로 인한 부패는 대물림되지만 죄책은 전달되지 않는다. 부패는 죄가 아니고 질병이나 연약함이다. 전적부패를 믿는 척하지만 실제로 믿지 않고, 인간은 자유의지, 즉 영적으로 선한 일을 할 수 있는 능력을 자기속에 지니고 있어서 스스로 하나님에게서 돌이켜서 하나님의 뜻을 행할 수 있다고 함.
(2)은혜론
가. 선행적 은혜, 보통은혜 나. 복음적 순종의 은혜 다. 견인의 은혜가 있다.
성령은 모든 사람에게 부패의 효과를 상쇄시키고 중생에 있어서 하나님과 협력할 수 있게 해주는 충족적 은혜를 수여한다. 중생하고 못하고는 본인의 의지가 하나님의 은혜와 협력하느냐 하지 않느냐에 달렸다. 충족적 은혜를 잘 사용하면 유효한 은혜의 대상이 되고, 순종하면 복음적 순종의 은혜를 받고, 여기에 순종하면 견인의 은혜를 받고 순종하면 견인된다. 은혜에 순종하는 것은 전적으로 인간의 책임이므로 중생하고 못하고는 인간에 달렸다.
(3)예정론
이들은 선택과 유기를 믿지 않고 믿음과 순종과 견인을 예지하여 선택하고, 불신앙, 불순종, 죄 안에 머무는 것을 예지함으로 예정하는 유기를 주장했다.
4) 도르트 교회회의의 입장
1618년에 84명의 정식회원과 18명의 총대로 구성된 총회, 48명은 네덜란드, 나머지는 영국, 스코틀랜드, 독일의 팔츠, 헤센, 블멘, 나사우, 엠덴, 그리고 스위스를 대표하는 외국인들이었다. 총 154번의 회의가 있었다. 알미니우스주의의 주장을 거부함.
(1) 예정론
선택과 유기는 둘 다 절대적이다. 선택은 아담의 죄로 인하여 정죄아래에 있는 인류 가운데서 선택이고, 유기는 그들의 죄로 인한 멸망과 정죄 가운데 내버려 두는 것이다.
(2) 원죄와 인간의 타락
아담은 모든 후손들의 법적 대표자였음로 죄책과 부패성이 후손에게 전달되었다. 모든 부분이 부패되었고 어떤 영적 선도 행할 수 없고 본인들의 힘으로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할 수 없다. 그러나 자연적인 희미한 빛이 있어서 선악을 약간 분별할 수 있고, 미덕, 사회의 선한질서, 단정한 외적인 행실을 유지할 수 있다. 그러나 구원에 이르게 할 수 없다.
(3)중생론
중생은 철저하게 하나님의 단독사역이다. 선택된 자들을 성령께서 중생시켜서 내적 소명을 듣게 하심으로 중생되어 회심에 이른다. 그러나 외적 소명도 진지하게 의도된다.
도르트 회의 결정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작성하는데 결정적으로 영향을 미쳤다.
5) 소뮈르 학파의 입장
아미랄두스는 보편적이고 조건적인 작정을 통해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를 통해서 보편적 구원을 마련하였고, 제한적이고 무조건적인 작정을 통해 택한 자들에게 믿음과 회개를 위해 필요한 위한 은혜를 주기로 하였다고 주장했다.
플라카이우스는 아담의 죄가 후손들에게 직접 전가되는 것이 아니고 아담으로부터 부패한 죄성을 끌어오고 이것이 후손들에게 죄책으로 전가된다고 주장했는데 1644년에 샤량통 교회회의에서 거부되었다. 이 두 사람의 주장에 대항하여 스위스 일치신조가 하이데거, 투레틴, 게넬러에 의해 작성되었다.
5. 종교개혁 이후의 인간론적 견해들
1) 종교개혁의 가르침과 다른 견해들
(1)웨슬리파 알미니아니즘
가. 이들은 원죄는 실제로 죄며, 인간이 죄책을 갖게 만든다고 본다. 이 죄책은 후손에게 전가된다. 그러나 이 죄책은 그리스도의 공로로 모든 사람 안에서 무효화되었다.
나. 구원을 위해서는 하나님의 은혜가 절대로 필요하다. 구속의 보편적 은혜에 의해서 각 사람에서 구원받기에 충분한 선행은혜를 주신다. 그러므로 이 은혜에 협조하면 구원받을 수 있다. 선행은혜는 원죄의 용서, 자범죄를 확신시키는 은혜, 하나님의 뜻을 행할 능력, 양심이라고도 불린다.
(2)뉴잉글랜드에서 나타난 개혁파 견해들의 수정
a. 하나님의 의지와 인간의 타락의 관계
조나단 에드워즈- 인간의 타락에는 하나님의 유효적 행위가 없다.
홉킨스, 에몬스, 드와이트, 테일러- 죄가 세상에 들어오게 된 것은 하나닙의 섭리와 모순되지 않는다. 하나님과 연관성이 있긴 하지만 최소한도다. 이성적인 피조물들은 자유의지가 있으므로 죄는 가능하지만 반드시 죄가 존재할 수 밖에 없게 된 것은 아니었다고 한다.
b. 인간의 자유의지
에드워즈는 도덕적 존재들의 자유는 섭리의 확실성과 모순되지 않는다고 하였다. 인간의 의지는 선과 거룩의 방향으로 결정되어 있었다. 이 진정한 자유를 죄로 말미암아 상실했다.
후대의 학자들은 정반대의 것을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은 자유롭고 책임있는 도덕적 존재의 한 속성이라고 했다.
c. 죄의 전이
에드워즈는 실재론을 선택했다. 가지들이 한 나무에 연결되어 있듯이 우리는 아담과 연결되어 있다. 그 결과 아담의 죄는 우리의 죄이기도 하기 때문에 우리에게 전가된다. 이런 견해는 루터파, 스미스, 쉐드 같은 개혁파 학자들에 의해서도 지지받고 있다.
우즈, 타일러는 프라이카이우스의 간접 전가설을 옹호해서 인간은 본성에 있어서 아담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부패성을 물려받고 이 부패성이 인간에게 죄책으로 간주되며 인간이 정죄되기에 합당하게 한다.
2)오늘날의 죄론
(1)철학적 죄론
라이프니츠-죄는 피조물이 지닌 필연적 한계의 자연스러운 결과물이라고 함.
칸트- 인간 속에는 근본적인 악에 이끌리는 소질이 있고 이것이 자유의지에 뿌리를 두고 있어서 죄책을 내포한다. 근본적인 악을 아담의 죄에서 왔다고 보지는 않는다.
헤겔- 원래 인간의 상태는 짐승과 같은 상태였다. 지식을 습득함에 따라서 인간은 이 상태에서 도덕적 상태로 이행되었다. 이 지식은 선악과를 먹음으로 가능했다. 자의식이 생기면서 자기중심적이 되며 악하게 되었다. 자기중심은 죄악된 것이지만 자기발전과정의 필수적인 것으로 자기중심성을 의도적으로 선택하기 전에는 죄책이 되지 않는다. 자기중심성과 싸우는 것이 덕으로 가는 길이다.
(2)신학적 죄론
슐라이에르마허- 죄는 인간의 육체적 욕구들이 영혼의 기능을 방해하고 주도적이 될 때 발견된다. 죄는 우리의 의식속에만 존재한다. 신의식에 대한 결핍감이 죄의식을 유발한다. 결핍감을 느끼는 것은 사람에게 구속의 기회를 주기 위함이다. 원죄는 단지 점진적으로 형성되어 온 획득된 습성이며, 자범죄의 원천이 된다.
율리우스 뮐러- 죄는 도덕법에 불순종한 의지의 자유로운 행위라고 한다. 죄의 기원을 조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원죄는 무시간적인 상태 혹은 시간 이전에 이루어진 의지의 결단에서 이루어졌고 인간은 그 때문에 죄책을 지니고 타락한 채 태어난다.
리츨- 죄는 일종의 무지라고 함. 완전한 선에 대한 무지 속에서 정반대의 것을 행한다. 즉 자범죄는 하나님의 나라를 대적하는 것이다. 이상을 아는 지식이 늘어갈 수록 죄의식도 늘어간다.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계시는 인간이 죄의식으로 말미암는 죄책을 극복할 수 있게 해준다. 하나님이 죄인에게 화가 나 계시다고 생각하는 것은 순전히 상상이다.
테넌트- 인간 안에 있는 야수적인 충동들과 욕구들은 죄의 재료일 뿐 죄가 아니다. 인간은 발전과정 속에서 결정되어 있지 않은 의지를 지닌 윤리적 존재가 되었고, 이 의지가 죄의 유일한 원인이다. 죄는 “개인의 양심, 선하고 옳은 것에 대한 개인의 관념, 도덕법과 하나님의 뜻에 대한 개인의 지식에 어긋나는 생각이나 말, 또는 행위를 통해서 표현되는 의지의 활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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