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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해편◑/정통 교리사

교리사 제 6장 속죄론

by 【고동엽】 2022. 3. 5.
 
 

 

제 6장 속죄론


1. 안셀무스 이전의 속죄론
1)헬라 교부들의 신학

(1) 사도 교부들의 구속론
디오그네투스에게 보내는 편지- 인간의 죄는 형벌받아 마땅하다. 하나님이 죄를 위한 대속물로 자기 아들을 주셨다. 그 결과 그리스도의 의로 말미암아 죄가 덮어졌다. 마귀의 세력으로부터 구속을 가져다 주는 구속주로 묘사된다.
영지주의 체계들 속에서는 그리스도의 구속은 어둠의 나라, 물질의 세계로부터의 구속이다.
마르시온- 그리스도의 죽음은 사랑의 하나님이 세상의 창조주로부터 사람들을 살 때에 지불한 댓가다.
(2)이레니우스의 속죄론
인간이 어둠의 권세에 의해서 종이 되었다고 봄. 구속은 부분적으로 사탄의 권세로부터 건져내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켜서 인간을 해방시키는 것이다. 발생반복설(총괄갱신설-recapitulation theory)을 주장함. 그리스도는 아담이 하지 못했던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을 감당하기 위해서 사람으로 태어나셔서 말씀에 순종하시고, 아담이 순종하지 못함으로 받아야 하는 형벌을 감당하심. 자신의 순종으로 영생을 얻어서 사람들에게 선사함. 아담은 그러하지 못하고 사망을 사람들에게 초래했음.
(3)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와 오리겐의 속죄론
클레멘스는 그리스도의 죽음을 인간의 빚을 갚은 것이자 속전이라고 설명함. 교사의 그리스도가 참된 지식을 주어서 사랑과 의의 삶을 살도록 고무시킴을 통해 사람들을 구원한다고 함.
오리겐- 그리스도는 성육신을 통해서 인성을 신적인 것으로 만들고, 자기희생의 지고한 모범을 제시해서 사람들로 하여금 자기와 비슷한 삶을 살게 함, 자신의 목숨을 속전제물로 드려서 사람들을 사탄의 권세로부터 구원함.
사탄배상설을 주장함. 그리스도는 자신을 사탄에게 속적으로 바쳤고, 사탄은 그리스도의 신적 능력과 거룩으로 인해 자기가 그리스도를 손댈 수 없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 채 그 속전을 받았다. 사탄은 그리스도의 인성이라는 미끼를 덥석 물었다가 그리스도의 신성이라는 바늘에 코가 꿰어버렸다. 그리스도가 의로운데도 불구하고 죽였기 때문에 참소자로서 불의를 저질렀기 때문에 사탄이 오히려 배상을 하게 되었는데 그 배상은 자신이 소유했던 아담의 후손들 전체였다. 특별히 예수를 믿는 모든 자를 돌려주어야 했다.
(4) 아타나시우스의 속죄론
로고스는 죄로 인해 상실되어 버린 하나님을 아는 참된 지식을 인간에게 회복시키기 위해서 성육신하게 되었다. 성육신한 로고스는 죄의 형벌을 견딤으로써 인간의 빚을 대신 갚은 것으로 묘사된다. 배상적 속죄의 필요성은 하나님의 공의가 아니라 진실성이었다. 그리스도는 그의 말씀과 모범을 통해서 인간의 마음에 역사한다.
(5)닛사의 그레고리와 나지안의 그레고리의 속죄론
닛사의 그레고리는 자신의 작품인 대요리문답에서 사탄이 자기가 속음으로써 합당한 응징을 받은 것 뿐이다. 둘째, 이 속임수를 통해서 사탄 자신도 구원을 받게 되었다고 주장했다.
나지안의 그레고리는 사탄배상설을 경멸하였다. 성부 하나님이 속전을 요구했다는 사상도 거부했다.
알렉산드리아의 시릴은 신적 위격의 죽음인 그리스도의 죽음이 지닌 무한한 가치를 강조하였다.
(6)다메섹의 요한의 구속론
그는 구원이 성육신의 직접적인 결과 혹은 인간에게 주어진 새로운 계시, 혹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로 말미암은 새생명을 인류에게 전해준 것으로 본다. 다른 한편 구원은 희생제사를 통해서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킨 것, 혹은 사탄에게 지불된 속전등과 같이 객관적인 조건들을 성취한 결과로 본다. 사탄배상설은 헬라 교회에서 대단히 통속적인 속죄론이었다.

2)라틴 교부들의 신학
(1)터툴리안의 구속론
그는 어느정도 이레니우스의 총괄갱신설을 채택하지만, 성육신이 주로 교훈과 모범을 통해서 인류에게 영향을 미친 것으로 이해한다. 그리스도의 죽음이 그의 사역의 절정이자 종결로 본다. 죄책, 배상적 속죄, 공로와 같은 법률적 용어를 신학에 도입한 것이 그의 공로다. 세례 이후에 범한 죄를 속하기 위해서 회개와 선행을 해야 한다고 함으로써 카톨릭의 고해성사의 기초를 마련했다.
(2)힐라리와 암브로시우스의 구속론
힐라리는 그리스도의 죽음을 하나님께 드려진 배상적 속죄로 보았다. 그리스도는 인간이 받아야 할 형벌을 대신 받기 위해 자발적으로 죽음을 택했다. 이런 배상적 속죄의 필요성을 하나님의 공의가 아니라 하나님의 진실성에서 찾았다. 하나님의 진실성이란 창 3:15에 있는 것처럼 너의 후손이 뱀과 원수가 되어 뱀의 머리를 깨뜨린다는 언약과 나는 너의 하나님이 되리라는 약속의 실현을 위한 속죄가 아닌가 추측된다.
암브로시우스는 그리스도가 사탄에게 속전을 지불하여 사탄을 속였다는 오리겐의 견해를 되풀이 한다. 동시에 그리스도의 죽음이 하나님에 대한 희생제사였다는 사실을 매우 강조한다. 즉 이 희생제사는 죄악된 인류에 대해 내려진 하나님의 사형선고에 대한 배상적 속죄라고 본다.
(3)어거스틴의 속죄론
그는 다양한 견해를 제시했다. 성육신을 통한 인간의 본성이 윤리적으로 신성화되었다는 것과 사탄배상설에 의해 사탄의 권리는 무효화되었다는 것도 있다. 그의 구속론의 중심은 원죄, 은혜로 말미암는 칭의, 그리스도의 희생세자에 의한 화해라는 개념이 새로운 것이다. 그는 칭의의 토대를 종종 예수 그릿도에 의한 죄책의 제거가 아니라 거룩하게 하는 성령의 능력에 두기도 한다. 이런 그의 견해는 칭의와 성화를 혼동하는 카톨릭 신학의 토태가 되었다.
(4)대 그레고리의 구속론
인간은 자발적으로 타락하여 죄와 사망의 지배 아래에 들어갔고, 오직 희생제사만이 그런 죄를 소멸할 수 있었다. 짐승 희생제사로는 속죄를 완전히 이룰 수 없고 사람의 희생제물이 있어야 했다. 그러나 죄없는 사람은 없어서 하나님의 아들이 성육신해서 우리의 본성을 입어야 했다. 죄성은 입지 않았다. 이 희생제물은 그의 인성 덕분에 우리를 대신해 죽을 수 있었고 그의 의 덕분에 우리를 깨끗하게 할 수 있었다. 그는 자신의 죽음으로 우리의 형벌을 담당했다. 즉 우리의 죽음의 빚을 지불하였다.

 

2. 안셀무스에서 종교개혁까지 속죄론
1)안셀무스의 속죄론

인간의 구속을 위해 속죄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그 필요성의 궁극적인 근거는 하나님의 존귀하심이다. 인간은 반역으로 하나님의 존귀하심을 짓밟음으로 하나님께 빚을 졌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신의 존귀하심을 회복하기위해 형벌에 의하거나, 배상에 의한 방법을 택해야 했다. 그러나 형벌이란 방법을 택하면 인류가 멸망해야 하므로 배상의 방법을 택하셨다. 따라서 인간은 하나님께 빚진 자발적인 순종을 자원해서 하나님께 드려야 하며, 하나님을 욕되게 한 것에 대해서 배상함으로써 그들이 실제적으로 지고 있던 빚에 대해 뭔가를 지불해야 했다. 그러나 무한하신 하나님을 대적한 배상은 이 세상에서 찾을 수 없었다. 따라서 하나님만이 적절한 배상을 할 수 있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신의 아들을 봉헌해서 그 배상을 하기로 작정하셨다. 하나님은 인간이 되셔서 빚을 진 인류의 일원이자, 자신은 빚을지지 않은 인간이 되었다. 즉 신인이 되어 하나님의 존귀하심을 회복시킬 수 있었다.
신인은 인간이 하나님께 드리지 못했던 순종을 드리셨고, 고난을 당하고 죽음으로써 하나님에게 무한한 영광을 돌렸다. 이 죽음과 고난은 인간의 죄의 과오들을 상쇄시키고 남았고, 인류에게 그 혜택이 돌아갈 수 있는 초과적인 공로를 지닌 행위였다. 공의의 법에 따르면 그렇게 자신을 거저 내어주는 행위는 상을 받아야 한다. 그러나 성자는 필요한 것이 없었으므로 성부는 그 혜택을 성자를 믿는 성도들에게 주셨다. 그래서 신자들은 죄사함과 장래의 지복, 즉 영생을 받게 되었다.
평가: 몇 가지 결함이 있다.
첫째, 그리스도가 그의 고난 속에서 죄에 대한 형벌을 감수했다는 사상이 들어갈 여지가 없다. 이는 카톨릭의 보속개념이 그리스도의 사역에 적용된 것이다. 그리스도가 드리는 자발적인 봉헌이 인류의 과오를 상쇄키시는 초과적인 공로라고 본 것이 그것이다.
둘째, 구속의 근거를 오직 그리스도의 죽음에서 찾고 그리스도의 삶이 지닌 속죄적 의미를 부정함으로써 일방적이다.
셋째, 그리스도의 공로가 죄인들에게 적용되는 것을 단지 외적인 거래로 설명하고 그리스도와 신자들 간의 신비적 연합에 관한 암시가 없다는 것.

2)아벨라르의 속죄론
하나님은 사랑이어서 그 어떤 배상적 속죄 없이도 얼마든지 죄를 사할 준비가 되어 있다. 하나님이 요구하는 것은 죄인의 회개가 전부다. 하나님은 회개하는 자를 용서할 준비가 되어 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본성을 입고 우리의 스승이자 모범으로서 죽기까지 인내함으로써 하나님의 사랑을 드러내었다. 이 큰 사랑은 죄인의 마음속에 응답하는 사랑을 요구하고 일깨운다. 이 응답하는 사랑이 죄사함의 근거가 된다. 탕자가 아버지의 사랑을 깨닫고 돌아온 것이 죄사함을 받을 수 있는 전부였던 것과 같다. 새롭게 일깨워진 사랑은 우리를 죄의 권세로부터 해방시킴으로써 우리를 구속하고 하나님의 아들들의 자유로 인도함으로써 우리가 사랑의 동기에서 자유의지로 하나님께 순종하게 만든다. 죄사함은 우리 마음 속에 불붙여진 사랑의 직접적인 결과이고, 오직 간접적으로만 그리스도의 죽음의 열매다. 아벨라르는 비록 사랑이 불붙여졌다고 해도 세례를 받지 전까지는 죄사함이 실제로 일어나지 않는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벨라르는 그리스도가 우리의 죄를 짊어졌고, 그의 죽음은 우리의 죄에 대한 희생제사였다고 말하기도 했다.
평가: 일종의 도덕감화설이다. 사랑이 하나님의 중심적인 속성이라고 보고 하나님의 공의와 거룩에 의한 요구를 무시한다. 그리스도가 고난받아야 했던 적절한 이유를 설명하지 못한다.

3)베르나르
크레르보의 베르나르는 아담의 잘못된 모범이 우리를 죄인들로 만들지 못하고, 그리스도의 모범도 우리를 성인들로 만들지 못한다고 하였다. 그의 모범은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에 근거할 때만 위대성과 중요성을 지니게 된다고 보았다. 그리스도의 삶과 고난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이 드러났지만 구원을 위하여 그리스도 자신의 신성이 나타난 것이라고 보았다. 그리스도의 성육신된 삶은 인내와 사랑을 고취시켰다. 성부는 아들의 죽음을 요구하지 않았지만 아들의 죽음을 봉헌으로 받아들였다. 그 결과 아들의 죽음은 우리를 죄와 사망, 사탄에게서 구속하고 하나님과 화해하게 하였다.

4)혼합주의적인 속죄론들-안셀무스와 아벨라르의 견해를 혼합한 것을 말함
(1)피터 롬바르드
그리스도는 고난과 죽음을 죄인들을 위해 자원하여 받아들였다. 그 결과 죄인들이 죄, 형벌, 마귀로부터 구속받아 낙원으로 들어갈 수 있게 해주는 공로를 얻었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었다. 이 큰 사랑에 의해 우리는 감동받아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고 이 사랑으로 죄에서 놓여나서 의롭게 된다. 죄에서 놓여날 때 마귀로부터도 자유케 된다.
(2)보나벤투라의 속죄론
성육신이 꼭 필요하게 된 것은 배상적 속죄가 요구되었기 때문이다. 피조물로서는 인류전체를 위한 배상을 할 수 없었기에 이 속죄를 행할 자는 하나님이자 사람인 존재가 될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신인이신 그리스도가 그의 행위와 고난을 통해 얻은 공로에 의해 배상적 속죄가 이루어졌다. 배상적 속죄를 하나님에게 합당한 존귀를 돌려드리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 속죄는 하나님의 진노를 누그러뜨리기 위한 가장 적절한 수단이었다. 이럼으로써 하나님의 긍휼과 의가 나타났다. 그리스도의 고난은 인간속에 하나님에 대한 응답적 사랑을 불러일으키는 데 최적의 것이었다고 한다. 교회와 그리스도의 관계를 지체들과 머리의 관계로 보는 사상을 발전시킴으로써 그리스도의 축복이 어떻게 신자들에게 전달되는지 잘 설명한다.
(3)토마스 아퀴나스의 속죄론
모든 충만한 은혜가 그리스도의 인성에 거하고, 그리스도는 인류의 머리기에 몸의 지체들이 머리에 속하고자 한다면 그리스도의 완전함과 미덕은 그 지체들에게 흘러들어간다. 새로운 인간으로서의 그리스도는 새로운 인류의 원리이자 누룩이다. 또한 그리스도는 그의 가르침과 행위와 고난을 통해서 인류의 교사이자 모범이 되었다. 그의 고난은 하나님의 사랑을 좀 더 구체적으로 드러내고, 사람들의 마음 속에 응답적인 사랑을 일깨워준다.
하나님은 인류가 죄 가운데 멸망하도록 내버려둘 수도 있었지만 자비 때문에 구속하기로 하셨다. 하나님은 어떤 배상적 속죄를 요구함 없이도 인간을 구속할 수도 있었는데 왜냐하면 하나님 자신이 공의의 원천인 동시에 이 죄로 인한 피해 당사자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배상적 속죄를 요구하는 쪽을 선택하심으로 아들이 성육신 하는 것을 꼭 필요하게 만들었다. 무한한 하나님의 존귀함을 배상할 수 있는 인간은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삶에서 이루어진 모든 행위는 인간의 죄를 속하는데 기여하였다. 그리고 이것은 하나님께 배상적 속죄를 행할 때 요구되었던 것이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하나님의 큰 사랑을 나타내고, 인간에게 순종과 겸손과 변함없는 지조 등의 모범을 보여준다. 이 죽음은 우리를 죄에서 건져주고, 칭의의 은혜와 영원한 복을 얻게 해주고 죄를 피하고자 하는 강력한 동기를 제공해준다.
질문: 그리스도의 죽음이 어떻게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는가?

그리스도의 고난이 죄인들에게 구원을 가져다주는 방식 네 가지
첫째, 고난의 공로를 통해서 구원의 축복들을 얻어서 죄인들에게 넘겨줌으로
둘째, 초과적 공로를 지닌 배상적 속죄를 이룸으로써 그 혜택을 신비적 연합에 의거해서 믿는 자들에게 전해줌으로써
셋째,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자발적인 희생제사를 통해서
넷째, 죄인들을 노예상태와 형벌에서 구속함으로써

인간은 마귀의 영적 노예로 전락하였지만 마귀는 그렇게 할 수 있는 정당한 권리를 지니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그 속전을 받을 수 없었다. 그리스도가 행한 초과적인 공로를 지닌 배상적 속죄는 세례와 회개 없이 인간을 구원하지 못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신비적 몸안에 들어갈 수 없기 때문이다.
평가: 안셀무스보다 더 나은 점은 형벌을 통한 속죄사상에 접근했다는 것,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과 수동적 순종을 구별하는 계기를 만들었다는 것, 신비적 연합을 통해 그리스도의 공로가 신자에게 전달된다는 것을 설명한 점.

5)둔스 스코투스의 속죄론
둔스 스코투스는 프란체스코회의 신학의 창시자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속죄 자체, 속죄가 지닌 성격, 속죄가 가져온 효과가 모두 하나님의 자의적인 의지에 의한 것이라고 보았다. 속죄를 행할 자가 반드시 하나님이거나 피조 세계 전체보다 더 큰 자여야 할 필요도 없었다. 아담의 한 경건한 행위만으로도 그가 지은 첫 번째 죄를 속하는 데 충분했을 것이다. 하나님은 한 천사의 행위를 충분한 속죄로 받아들였을 수도 있다. 예를 들면 욥 33:23-24다. 만일 일천 천사 가운데 하나가 그 사람의 중보자로 함께 있어서 그의 정당함을 보일진대 24 하나님이 그 사람을 불쌍히 여기사 그를 건져서 구덩이에 내려가지 않게 하라 내가 대속물을 얻었다 하시리라.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자의적인 의지에 달려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고난을 통해 구원하기로 영원 전부터 예정하셨다. 둔스 스코투스는 그리스도의 공로는 결국 유한한 인간본성의 공로라는 이유로 그 공로의 무한한 가치를 부정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의로 그리스도의 공로를 충분한 것으로 받아주셨다. 하나님은 인간이 지은 빚에 걸맞지 않게 너무도 형편없는 공로를 기꺼이 받아 준 것이므로 이 교설은 인정설(acceptlation theory)라고 불린다.

 

3. 종교개혁시대의 속죄론
1)안셀무스의 견해를 개선한 속죄론

칼빈은 속죄의 필연성은 절대적인 것은 아니었고 인류의 구원을 결정한 신적 작정에서 흘러나온 것이라고 했다. 하나님 아버지는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을 결정하셨다.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을 통한 속죄는 신적 지혜에 지극히 부합되고 적절했다. 그리스도를 통한 속죄는 하나님의 공의를 온전히 만족시켰다고 강조했다.
죄는 하나님의 명예에 대한 침해라기보다 하나님의 법을 어긴 것으로 죄책이 있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키는 형벌적 희생제사다. 즉 형벌을 통한 배상이다. 그리스도의 고난은 형벌적이고 대리적이었다.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과 수동적 순종에서 전자는 후자와 마찬가지로 속죄사역의 일부다. 그의 속죄는 과거의 범죄들을 수동적 순종을 통해서 배상한 것만 아니라 행위언약의 조건이었던 법을 대리적으로 지킨 것이다. 그리고 이 공로는 신자들에게 전가된다. 즉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의 행위로 그리스도의 순종의 공로는 신자에게 전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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