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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 속으로 〓/성경 교육 지침

세상 속의 그리스도인지은이 : 쟈크 엘룰 출판사 : 대장간

by 【고동엽】 2022. 3. 4.

세상 속의 그리스도인

지은이 : 쟈크 엘룰 출판사 : 대장간

 

요약(발췌)

*하나 세상 속의 그리스도인

 

대부분의 사람들은 신앙생활을 한다고 하면서 세상과 천국 사이에 윤리, 혹은 문화라는 다리를 놓고 그 한 가운데 안주하려고 한다. 그러나 윤리나 문화와 같은 인위적인 것으로써 신앙의 걸림돌을 제거하려는 이 노력은 선택 가능한 여러 방법 중 가장 반기독교적인 태도다.

 

그리스도인은 반드시 세상 속에 있어야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세상에 예속되어서는 안된다. 그들은 다른 주인에게 속하여 있으므로, 생각과 삶과 마음이 세상의 지배를 받아도 안되고 세상을 의지하여서도 안된다.

 

그리스도인이 예수 그리스도와 교제한다는 것은 무엇보다도 그가 세상의 영적 세력과 대적함을 의미한다.

 

그리스도인들이 그들의 삶 속에서 세상의 소금이 되기만 한다면 그것은 그들의 어떤 외형적 행위보다도 세상을 보존하는 데 기여하게 될 것이다.

 

빛은 어두움을 몰아낸다. 그것은 생명과 죽음을 분리시킨다. 그것은 선의 표준을 제공한다(마 5:14-16에서 빛에 대한 말씀 다음에 ‘선행’에 관한 말씀이 뒤따르는 것이 바로 이 때문이다.) 엄격히 말해서, 빛이 없으면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지 알 수 없다. 그리고 빛은 세상 역사의 의미와 방향을 제시해주고 설명해준다.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양의 역할을 담당하기보다는 이리가 되고자 한다. 그러나 세상은 이 희생의 산증인 없이는 생존할 수 없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영적인 의미에서 이리, 즉 다른 사람들을 지배하려고 애쓰는 인간이 되지 않도록 극히 주의하여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다른 사람들의 지배를 기꺼이 받아들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과 연합된 산 제사를 매일 드려야 하는 것이다.

 

우리의 선행으로 우리의 죄를 감할 수 있다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 우리가 세상을 개선할 수 있다거나, 인간을 행복하게는 못해주어도 최소한 좀 더 좋게 만들 수 있다는 믿음을 버려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가 진정 그리스도인이 처한 이 상황을 심각하게 받아들인다면, 세상에 대하여 자포자기하여서도 안된다. 즉, “우리는 그것에 대하여 아무것도 할 수 없어!”라고 말해서는 안된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이 세상의 임금을 도와주는 격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율배반적인 두 숙명 가운데 묶여 있는 듯하다.

 

신학기 세상을 향한 메시지를 재발견한 수 있기 위하여 요구되는 인간적 조건을 평신도가 이 삶 속의 긴장을 부둥켜안고 온 몸으로 살아나가는 것이다. ...오늘날 신학자가 세상을 향하여 할 말이 없는 이유는 교회에 진정한 평신도가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성령은 인간이라는 도구를 통하여 활동하신다. 이 인간적 도구가 거의 없기 때문에 복음이 선포되어도 세상에까지 미치지 못하는 것이다. 복음이 세상에 전달되는 통로는 앞에서 말한 긴장을 경험하는 평신도여야 한다.

 

기독교 윤리에 입각해서 행한 행실은 예수 그리스도의 관점에서 참된 선행으로 드러나야 한다는 것이다. 세상 스스로는 이 선행을 인식하지 못하며,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빛이 비추어야만 가능하다. ...우리의 윤리가 세상과 씨름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되지 않는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을 것이다. ...기독교 윤리가 말씀의 선포로부터 분리될 수 없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그 행위가 바로 사탄의 공작을 파괴시키고 이 세상에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도록 돕기 때문이다.

 

오늘의 세상은 그리스도인들이 뿌린 씨앗을 거두고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영적인 위협에 처하여 육체적 무기로 무장하고 싸웠다. 그래서 육적인 차원에서는 승리하였으나 영적으로 패배하였다. 그리스도인들만이 영적인 전쟁을 수행할 수 있으나, 그들은 싸우지 않았다.

 

 

둘 기독교의 혁명성

그리스도인의 삶이 혁명적인 이유는 그들이 혁명의 길을 선택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믿고 의지하는 예수가 혁명적인 생명의 근원이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혁명적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지금의 세계 문명을 결정적으로 지배하고 있는 가치들은 다음과 같다. 생산의 우선성, 국가권력의 지속적 성장과 민족국가의 성립, 기술의 자율적 발달 등. 이것들은 생산수단의 소유나 그 어떠한 전체주의적 교리보다도 훨씬 더 중요한 현대 세계의 구성요소들이다.

 

사물과 세상을 다스려야 할 인간이 사실들의 노예가 되었다. 이 노예 상태는 그 어떤 총명한 독재자가 꿈꾸었던 것보다도 더 완전하다. 물질세계를 지배하기 원하였던 인간은 사실로 표현된 사물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그러므로 그의 생각, 생활, 감성의 모두가 경험, 사실의 통제하에 들어갔다.

 

그리스도인도 마찬가지다. 그는 다른 왕국의 시민이므로, 그의 사고방식과 행동 및 감정은 그곳에서 연유된다. 그의 마음과 생각은 다른 곳에 가 있다. 그는 다른 나라의 신하로서 이 세상에 사신(고후 5:20)으로 와 있다. 즉 그는 자기 주인의 요구를 대변하고 두 나라 사이의 관계를 설정하지만, 세상 편에 가담할 수는 없는 것이다. 사신이 자기 나라의 이익을 옹호하는 것처럼, 그는 자기 주인의 이익을 대변한다. 좀 다른 시각에서보면, 그는 첩자라고도 할 수 있다. 그리스도인의 상황이 실제로 그렇다. 그는 주인을 위하여 세상의 심장에서 비밀리에 활동하며, 세상 속에서 주인의 승리를 준비하고, 하나님나라가 영광 중에 임하도록 이 세상 속에 토대를 쌓고 비밀을 탐지한다.(수 2:1; 히11:31 참조). 그는 확실이 세상에 있으나, 그의 모든 연분은 다른 곳에 있다. 그의 모든 사고의 기반, 진실, 그리고 신용은 주인에게 달려 있으며, 세상에는 충성해야 할 아무런 의무도 갖고 있지 않다. 우리가 '이 세상'을 말하면서 지칭하는 바는 민족, 국가, 가정, 일 등 구체적 실체들이다. 이 모두에 대해서 그리스도인은 무조건적 충성을 맹세할 수 없다. 그의 첫번째 의무는 주인에 대한 충성이다(마 10:37).

 

그리스도인이 속한 두 왕국은 결코 같지 않으며, 그는 그 어느 쪽도 포기해서는 안 된다. 그는 죽은 다음에 본래의 고국으로 돌아가기를 고대할 수는 있지만, 이 땅에 살아 있는 동안에는 그 어느 쪽도 부인 할 수 없다. 동시에 그는 또한 근본적 이원론에 안주할 수도 없다.....

 

그리스도인이 비록 정치적으로 큰 업적을 남기거나 혁명적 능력을 과시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리스도를 힘입어 산다면, 즉 하나님나라의 도래를 현실화시킨다면 진정한 혁명가인 것이다. 그는 초역사적 사실로 현재를 심판한다. 재림의 사건을 현재에 침투시키는 길만이 현문명의 생명력을 짓누르고 있는 정치 사회적 구조들 배후에서 작용하는 죽음의 세력을 몰아내는 방법이다. ....우리는 소망을 믿음으로 구원받았고(롬 8:24), 이 소망은 정확히 말해서 현세계에서 종말론적 희망을 갖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것은 그리스도인이 세상에서 산다는 것은 곧 혁명적인 삶을 사는 것임을 드러내는 신학적인 근거가 되는 것이다.

 

세상에서 충성이라고 불리는 것이 알고 보면 습관이나 고집에 불과하다. 그리스도인은 자기가 사는 시대에 따라 당시의 관점에서 하나님의 뜻에 부합되는 것으로 보이는 입장을 취하여 좌익이 될 수도 있고 우익이 될 수도 있으며 자유주의자가 될 수도 있고 사회주의자가 될 수도 있다.

 

우리의 현실주의의 생명력은 그 판단기준이 성공적인 ‘결과’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주권’이라는 사실에 기인한다.

 

 

 

셋 현대인의 우상

 

현대인들은 부지런히 활동하고 있으나 그 활동의 목적을 상실한 채 살아가고 있다. 그들은 이제 목적에 관심을 가지고 생활하는 것이 아니라 목적 달성하기 위한 수단을 우상으로 섬기면서 살아가는 우상의 노예들일 뿐이다.

 

수단이 확대되고 목적이 관념으로 매도될수록, 목적은 날로 퇴조하여 더 이상 문제시되지 않는다....지금은 아무도 목적이 무엇인지, 혹은 우리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묻지 않는다. 목표가 수단이 연결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방향을 잡을 수가 없다. 인간의 활동, 주의를 끄는 것 그리고 흠모의 대상이 오직 수단으로 제한되어 버렸다.

 

무능력하나 목적은 수단을 창조하지 못한다. 예전에는 수단이 목적을 위하여 창조되었으나, 지금은 목적이 영감을 불어넣지 못하고 있다. 그것은 단지 단어에 불과하며 신화에도 못 미친다. 목적이 아무것도 만들지 못하므로 수단 창조의 체제가 달라졌다. 수단이 수단을 낳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목적과 수단의 분리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의 출발점은, 하나님의 사역은 수단과 목적이 동일하다는 것이 되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가 현존하면 하나님 나라는 우리에게 ‘임한’것이다. ....우리의 문명에서는 수단이 목적을 삼켜 버렸다. 그러나 하나님의 행동에 있어서는, 수단은 목적이 실현된 현존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마지막 때에 오게 되어 있는 하나님 나라라는 목적은 유일한 중재자인 신적인 수단이 이 세상에 현존할 때 이미 현존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모든 사역은 수단을 통하여 목적을 실현하는 것이다.

 

교회와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수단’이므로, 그들은 하나님나라라는 ‘목적’의 현존이어야 한다. 따라서 우리 자신 밖의 대상에 눈을 돌릴 필요가 없다. 만물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성취되었다. 오히려 우리 안에서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신 목적을 수행하여야 한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위임한 사명, 즉 목적과 수단의 일치를 세상에 나타내 보여주어야 한다. 목적 자체를 세우는 것은 인간이 할 일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다.

 

성경은 의인이 있어야 정의가 넘치는 세상이 된다고 가르친다. 여기서 의롭다는 것은 물론 그리스도에 의해 의롭게 됨을 의미한다. 그렇기때문에 의인은 그리스도의 의를 힘입어 사는 것이다. 의가 현존하기 때문에 인간이 의롭게 된다. 따라서 의란 도달해야 할 목표나 균형을 맞추기 위한 도구가 아니라 하나님이 값없이 주시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선물이다....우리는 세상에 평화를 가져오기 위해 힘과 지혜를 짜낼 필요가 없다. 우리 자신 각자가 평화로운 인간이 되면 자연히 평화로운 세상이 되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선한 목적은 우리들이라는 수단을 통하여 실현되는 것이다.

 

진정한 기독교 윤리에는 거룩해지기 위한 노력 같은 것은 있지도 않다. 윤리의 목표는 목적을 달성하는 것이 아니다. 단지 우리에게 선물로 주어진 은혜와 평화, 사랑과 성령 등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며 또한 우리 안에 기적적으로 내재하도록 하시는 목적을 나타내는 것이다.

 

가장 중요한 요점은 우리의 관심이 개인이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사실이다. 우리의 관심은 우리의 평화나 정의가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정의와 평화다. 따라서 수단에 대한 모든 논의는 개인에 대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관한 것이므로 자연히 집단적이다. 왜냐하면 이 행동의 통일성을 창조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시요, 우리 안에서 당신의 기쁘신 뜻대로 일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에게 중요한 것이 ‘행동’이 아니라 ‘존재’라는 것이다. 세상은 온전히 행동에 관심이 쏠려있다. 모든 것이 행동의 면에서 해석되고, 행동보다 아름다운 것은 없다고 생각되고 있다. ....모든 시간을 행동에 투자하는 사람은 더 이상 사는 것이 아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이 당면한 중심 과제는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에 있어서, 세상이 제시하는 수많은 행동 양식들 가운데서 취사선택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기독교가 세상과 세상 임금의 일을 모방만 하고 있는 데 대하여 아연실색하지 않을 수 없다.....우리는 진정한 행동의 의미를 잃어버렸다. 그 행동은 심오한 삶의 증거며, 마음으로부터 나오는 신앙의 산물로서, 신화나 선전, 혹은 맘몬의 결과가 아니다. 문제는 삶이지 행동이 아니다.

 

살아있다는 것은 인간의 모든 상황이 하나님 앞에 노출되어 있음을 의미한다.....‘영적인 삶’은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가 그 깊이를 헤아릴 수 없는 진리에 따라 사는 것이다. 즉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다. 하나님의 공의로 심판받고 정죄되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용서받고 구원받았다.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을 위하여 돌아가셨으므로, 인간은 유일하고 그 무엇과 바꿀 수 없는 창조물이다. 각 영혼은 거룩한 삶 안에서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누리도록 부름받았으므로, 진실로 ‘자유롭게’ 창조주의 영광을 위하여 산다.

 

혁명적 행동이란 다름 아니라 산다는 사실, 그리고 그것이 동반하는 모든 결과들을 말한다. 동시에 이것이 수단과 목적의 문제에 대한 해답이다.

 

 

넷 기독 지성인의 소명

 

지금은 유토피아를 찬양할 때가 아니며 정치적인 현실주의를 찬양할 때도 아니다. 지금은 뒤틀려진 세계를 바로 보게 하는 자각의 과정을 통하여 모든 인간에게 자유와 평화를 되돌려 주어야 할 때이다.

 

현대인의 지성은 더 이상 명상이나 현실에 대한 깨달음을 통해 성장하지 않는다. 오히려 인간들이 물질 세상을 지배하기 이해 고안해낸 수단들에 의하여 거꾸로 영향을 받게 디었다. ...인간의 지성을 해방시킬 것으로 기대되었던 기술적 방법론이 오히려 인간의 지성을 가장 심각한 방법으로 노예화시켜 버렸다.

 

현실 인식의 결여와 인간 지성이 기술적 수단의 노예가 되어버린 사실은 현대 지성인이 처해 있는 가장 심각한 상황을 만들어내고 있다....지성인의 진정한 존재 이유는 의사전달이며, 그것은 세상을 이해하는 기본 틀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지 않는 가치 있는 일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 편에서의 활동이 반드시 필요한 것이지만 하나님께서 그것을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로 변화시키지 않는 한 쓸모없는 노력이 되고 만다.

 

오늘날 기독 지성인들이 수행해야 할 의무 중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세상과 자신에 대한 자각이다. ....세상과 자신에 대한 자각을 통하여 나타나는 행동의 첫번째 요소는 신화들과 이전 시대의 지적 교리들, 예를 들면 정치 영역의 자유주의, 파시즘, 공산주의 등을 전극적으로 무너뜨리는 것이다. ....두번째 요소는 객관적 실재를 발견하려는 의지, 즉 삶을 구성하는 구체적 사실들을 발견하려는 의지다. ...세번째 요소는 이러한 실재는 무엇보다도 인간적 차원에서 파악되어져야 한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인간’을 추상적인 차원에서가 아니라, 우리의 이웃사람이라는 관점에서 생각해야만 한다. 사람들의 구체적 삶 속에서 신문, 정치, 선전, 텔레비전 등의 영향들이 어떻게 반영되어 나타나는가를 볼 수 있게 된다. ...현대 세계가 처한 상황에 대하여 분석하기 이전에 지성인은 먼저 인간, 즉 자기 자신에 대한 분석부터 시작하여야 한다. ...세상과 인간에 대한 자각을 통하여 나타나는 행동의 네번째 요소는 현대의 문제들을 가능한 한 깊이 들여다보고 또한 그 문제들을 있는 그대로 파악하는 것이다. ...현대 세계와 인간에 대한 지성인의 자각 과정을 통하여 나타나는 행동의 다섯번째 요소는 지성인들의 ‘참여’ 혹은 단호한 결단이다.

 

지성인은 현대 세계의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으면 안되며 또한 구체적인 방법으로 현대 세계를 파악하고 있지 않으면 안된다. 더 나아가 그는 현대 사회 속에서 자신의 위치를 정확하게 볼 수 있어야 한다. 지성인은 진정한 의미의 삶의 현장에 개입하는 것이며 이론적이거나 수사학의 차원에서 분석자의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 아니다.

 

만일 우리가 현대 세계에 대한 정확안 인식에 이르려는 노력을 포기한다면 우리는 하나님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임무를 배반하는 것이 된다. ....이와 같은 인식 노력을 통하여 첫째, 현대 사회 안에서 이웃의 의미를 재발견하는 것, 둘째, ‘그 사건’의 의미를 재발견하는 것, 셋째, 거룩한 영역을 재발견하는 것

 

우리를 대적하는 사람들은 우리와 같은 인간이라기 보다는 ‘그리스도께서 위하여죽으신 우리의 형제’다. 모든 그리스도인이 가지고 있어야 하는 이와 같은 태도는 그의 믿음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로 기독 지성인에 의하여 새로운 차원에서 조명되고 검토되어야 한다.

 

오늘날 기독 지성인들이 수행해야 할 독특한 사역은 새로운 언어를 발견해내는 일이다. 즉 대중성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모든 사람이 서로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는 언어, 인간들로 하여금 그들의 절망적인 고독으로부터 벗어나게 해줄 수 있는 언어 및 이성의 진부함이나 주관적 감성주의를 피할 수 있도록 해주는 언어다.

 

성령께서 인간들 사이에 의사소통의 가능성을 열어주셨고 서로간의 분리를 극복할 수 있도록 해주셨다. 성령께서만 이것을 가능케 하실 수 있다. 성령께서만 이웃과의 관계를 회복시킬 수 있다. 성령께서는 우리의 눈과 귀를 여시고 계시된 진리를 깨닫게 해줄 뿐만 아니라 인간들을 사랑할 수 있게 하실 수 있다. 그러나 인가은 성령께서 행하시는 그 일에 인내를 가지고, 삶의 현장 속에 동참해야 한다. 만일 현대 문명 안에서 인간이 상호 의사소통을 가능케 해줄 언어를 재창조하지 않는다면 성령의 사역을 가능케 할 기반이 만들어지지 않게 되고 또한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날 수 있도록 해주는 인간적 통로가 없게 된다. 이 언어에 의미와 진리와 효율성을 줄 수 있는 유일한 분은 성령뿐이시지만 그 언어를 발견해내는 것은 인간의 작업이다. ....그러나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이 일에 관심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오히려 비그리스도인들이 그 언어들 만들어내려고 노력하고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성령께서는 그와 같은 노력이 결실을 보도록 역사하시지 않고 계신 것이다. ...이 일에 모든 노력을 기울여야 하며 이와 같은 노력은 계층, 그룹 및 정치적 분열을 넘어서 인간 자체를 이해하기 위한 수단을 재발견해내는 유일한 방법이다. 그와 같은 언어를 발견해내는 일이야말로 인간들을 서로 분리시키는 사회학적 경향을 바꾸고 사랑에 기초한 진정한 인격적 관계를 회복하는 유일한 길이다. ....만일 우리가 이러한 언어를 발견해내지 않는다면 사람들이 사랑에 관한 우리의 모든 설교들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그 사건’을 믿는다는 것은 ‘그 사건’을 통해 재조명될 수밖에 없는 인간 역사에 대한 이해를 받아들인다는 의미다. ....그리스도 사건을 근거로 우리는 모든 인간들에게 삶을 인격적으로 경험하고 삶의 의미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와 생명 사이에 연결해놓으신 관계의 의미를 재발견하도록 권면할 수 있는 것이다.....세상과 인간에 대한 인식이 가능하게 되는 것은 오직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뿐이다. 왜냐하면 예수께서는 현상계의 모든 그림자들 한복판에 계시며, 인간 역사의 수많은 사건들의 소용돌이 한가운데 계시기 때문이다. ...그리스도 사건을 중심으로 정치 사회적 영역 및 다른 모든 영역에 다시 한번 방향성을 제시하고 그리스도 사건 안에서 몽상이 아닌 진정한 희망을 발견하도록 도와주는 일이다. ....인간 지석을 그 기술적 수단으로부터 해방시키는 일이 어렵게 되어버렸다. 또한 우리는 인간 지성이 유일한 표현 수단 즉 가장 효과적인 표현 수단을 가지고 있는 한 그 수단과 결별할 수 없으며 또한 세상 안에서 다른 방법으로 표현될 수도 없게 되었고, 결국에는 인간 지성의 해방이 또 다른 표현 수단을 인위적으로 창조한다고 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님을 살펴 보았다. ...인간의 지적 활동은 거룩한 영역의 경계선까지에 국한되는 것이며 그 너머로 침범해서는 안된다. ....거룩한 영역을 재발견하고 인간의 지성을 극대로 활용하는 것, 그러나 인간 지성이 거룩한 영역을 침범할 위험이 있을 대 자발적으로 멈추는 것, 이것이 지적 탐구의 가장 중요한 기능이다.

 

 

다섯....어떻게 살 것인가

 

지금의 세상은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고 있을 뿐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의지하면서는 살 수 없는 우상의 시대다. 그러므로 이 시대를 올바르게 분석하여 세상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신뢰하게 하고 예수를 믿음으로 살 수 있는 예수사회를 창출해가는 일이야말로 그리스도인의 당면과제라 할 수 있다.

 

현대의 교회생활 혹은 기독교 운동을 생각할 때 가장 두드러지게 부각되는 사실은 아마도 복음사역의 근본적인 취약성일 것이다. 기독교문명을 갖고 있다고 인정되는 나라들이 빠른 속도로 세속화되어 가고 있으며, 사람들은 교회의 메시지에 점전 더 귀를 기울이지 않고 있다. ...사탄의 전략은 복음을 중립화 또는 무력화시키려는 것이라는 점이다. ...교회가 해야 할 일은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이 복음의 말씀을 진정으로 들을 수 있게 하는 일이다.

 

교회가 수행해야 할 가장 효과적인 사역은, 교회는 세상 안에서 존재해야 하는 당위성으로 말미암아, 세상과 구별되는 삶의 방식을 창조해내는 일이 가장 우선되는 것이다. ....

 

자신의 신앙을 직업 현장에서 실천하려는 노력은 결국 새로운 삶의 방식을 창조하기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그와 같은 삶의 방식을 창조하는 일을 집단적 차원 뿐만 아니라 개인적 차원 모두에서 진행되어야 한다. 그것은 개개의 그리스도인들이 그의 구체적 삶의 현장 속에서 자신의 신앙을 표현하고 그에 따라 실제적으로 살려는 노력을 보이는 것이다. 그것은 또한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공동체로서 감당해야 할 과제이기도 하다.

 

우리는 기독교공동체 안에서 그리스도인의 삶을 재건하려는 노력을 새롭게 기울여야만 한다. 그러한 일을 통해서 사람들은 성령의 열매가 무엇인지 새롭게 배울 수 있을 것이다.

출처 : 행복충전소 † 대명교회
글쓴이 : DMsp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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