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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부모를 공경하라 (에베소서 6:1-3)

by 【고동엽】 2022. 3.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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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네 부모를 공경하라   (에베소서 6:1-3)

어느 날 어떤 부부가 행복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아내가 남편에게 물었습니다.
"당신은 이 세상에서 가장 좋아하는 사람이 누구야? 한번 순서대로 번호를 매겨봐."
남편이 대답했습니다. "음, 1번은 당신이고, 2번은 딸, 그리고 3번은 당신 같은 예쁜 딸을 낳아주신 장모님이고, 4번은 우리 집 강아지 톰이고, 음 5번은 우리 어머니야."
그런데 이 부부의 대화를 밖에서 시어머니가 듣고 말았습니다. 다음날 아침 시어머니가 식탁 위에 메모를 남겨놓고 집을 나가셨습니다.

"1번 보아라. 5번은 외출한다."

이 이야기는 그냥 우스개 말입니다만, 그냥 웃고 지나갈 수만 없는 이야기인 것은, 가정에서 노부모님들의 위치가 그만큼 보잘 것 없는 것이 오늘날의 현실이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얼마 전에 서울 고덕동의 한 야산에서 어느 노부부가 사체로 발견되었는데, 늙고 병든 노부부가 마땅히 의지할 곳도 없는데다가 생활고를 이기지 못하고 동반자살을 한 것으로 발표되었습니다. 그런데 더 안타깝고 씁쓸한 것은 그분들에게 멀쩡한 자식이 둘이나 있었다는 것입니다. 대학을 나와 어엿한 직장을 가진, 그런대로 살만한 두 아들은 서로 부모를 모시지 않으려고 하고, 일년에 한 번 명절날 외에는 연락도 하지 않고 살았다고 합니다. 그 노부부를 죽음으로까지 몰아간 것은 경제적인 어려움 보다는, 그보다 더 고통스러운 외로움이었습니다. 이 사건을 보면서 다시 한번 부모님에 대해서 생각하게 됩니다. 여러분들의 부모님이 살아계시다면 혹시 자식들에 대한 그리움과 외로움으로 고통당하고 있지는 않은지 되돌아보는 시간이 되시길 바랍니다.
지금 파고다 공원이나 약수터에는 오갈 데 없는 노인들이 서성이고 있습니다. 몸이 아파도 적절한 진료를 받을 수 없는 노인들이 우리 주변에 많습니다. 이들이 누굽니까? 우리들을 낳아주고 키워주셨을 뿐만 아니라, 6.25등 많은 고난을 겪으면서도 피와 땀을 흘려 열심히 노력한 결과 오늘날의 경제대국을 만든 장본인들입니다. 그렇다면 이들의 노후를 책임져야 할 이들은 그 아랫 세대, 곧 우리 젊은이들일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부모님에 대해서 따뜻한 마음으로 격려하고 보살펴 드려야 할 것입니다. 어버이 주일인 오늘 우리는 '부모 공경'을 명령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이 시대에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새로운 '효'의 의미는 무엇인지 되새겨보고자 합니다.

1. 우리나라의 효 전통을 지켜야 합니다.

우리나라는 부모를 공경하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겨왔던 '효'의 나라입니다. 고구려의 태학(太學)이나 신라의 국학(國學)에서부터 '효사상'에 대해 교육하였고, 이는 지식인들의 기본 교양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인륜의 가장 으뜸되는 덕목'으로 가르쳐 왔습니다. 한 집에서 3-4대가 사는 대가족 제도 속에서 어른들을 섬기면서 사는 가정을 좋은 가정이라고 자연스럽게 여기며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서양 문물이 밀려 들어오고 산업사회로 급격하게 변화되면서, 전통적인 가족제도가 붕괴됨은 물론 '효사상'도 구시대적인 것으로 취급받아 퇴락하게 되었습니다.
서양은 기독교사상을 근간으로 해서 이루어진 나라입니다만 부모공경의 사상이 깨어진지 이미 오래 됩니다. 그것은 그들이 기독교 사상을 생활철학으로 하고 사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이 편한 대로 적용한 결과입니다. 분명 하나님께서는 성경 말씀을 통해 '효'의 중요성을 강조하셨건만, 서양의 문화는 이것을 놓쳐버리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빈틈을 채우고도 남을만큼 강한 효의 전통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가히 '세계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입니다.
서정우씨가 쓴 "명태"라는 작품이 있습니다. 시골에 사는 홀어머니가 장사를 하며 외아들을 서울에서 공부시켰습니다. 그 어머니에게 그 외아들은 보람이요 희망이요 꿈이었습니다. 방학을 하면 시골에 내려온 아들을 만나는 것이 큰 기쁨이었습니다. 아들이 내려오면 어머니는 꼭 동태찌개를 끓여 내놓았습니다. 가난한 어머니로서는 동태찌개가 최고의 요리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어머니는 언제나 몸뚱이는 아들에게 주고, 머리 부분만 드셨습니다. 그때마다 아들은 어머니가 몸뚱이를 잡수셔야 한다고 바꿀려고 했는데, 어머니는 한사코 만류하셨습니다. 그리고 "고기는 머리부분이 더 맛있단다. 그것을 어두진미라고 하는 것이다."고 하셨습니다. 그렇게 동태찌개를 먹을 때마다, 아들은 항상 몸뚱이를, 어머니는 항상 살도 별로 없는 머리만 드시곤 했습니다. 그후 성장한 아들은 대학을 졸업하고 결혼하여 의젓한 가장이 되었습니다. 첫 아이를 낳고 명절이 되어 아들이 어머니가 계신 시골에 온 식구를 다 데리고 내려왔습니다. 어머니는 역시 동태찌개를 준비했고 또 옛날처럼 "어두진미"라며 동태 몸뚱이를 아들에게 주고 당신은 머리를 잡수셨습니다. 그때 아들이 자기 국그릇과 어머니의 국그릇을 살며시 바꿔 놓으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어머니! 저도 이제 동태의 머리부분의 맛을 알게 되었습니다. 진작 이 맛을 알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어머니!"
그 말을 하는 아들의 눈에는 이미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습니다. 그 모습을 본 어머니 역시 흘러내리는 눈물을 주체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게 한참동안 어머니와 아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손을 맞잡은 채, 울고 말았습니다.
저도 이 글을 읽으면서 눈물이 핑 돌았습니다. 우리의 부모님들은 자식들을 위해 모든 것을 양보하시고 희생하시는데 우리들은 그것을 너무 늦게 깨닫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그것을 깨달았을 때, 부모님이 곁에 계시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효도란 이렇게 어머니의 국그릇과 우리의 국그릇을 바꿔놓는 마음가짐입니다. 지금 여러분의 부모님의 국그릇은 어떤지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이와 같은 우리 나라의 효 사상은 버리면 안됩니다. 이것을 버리면 한국은 모든 것을 버리는 것이 됩니다. 그것이 우리들의 정체성이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우리는 이러한 효 사상을 전 세계에 수출해야 합니다. 대한민국의 저력이 이러한 효 사상에서 나온다는 것을 알 수 있도록, 전통적인 부모공경의 모습을 회복해야 할 것입니다.

2. 우리는 예수의 부모공경의 도리를 배워야 합니다.

우리가 계승발전시켜야 할 것은 우리 나라의 전통적인 효 사상이긴 하지만, 그것은 유교적인 의미에서의 효가 아니라, 신앙적인 의미에서의 '효'입니다. 성경에는 곳곳에서 '부모 공경'에 대해 강조하면서 '효'야말로 신앙의 척도라고까지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통해서도 우리는 이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마지막 체포되기 직전에 감람산으로 기도하시러 가셨습니다. 그는 무릎을 꿇고 기도하면서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어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눅 22:42)라고 하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고 메시야임을 아시고 계셨는데, 어찌 십자가의 고난 앞에서는 이렇게 나약한 모습을 보이셨는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이렇게도 십자가의 고난을 두려워하셨단 말입니까?
예수님은 물로 포도주를 만들고,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푸시고, 물위를 걷기도 하시고,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실 정도의 기적을 일으킬 수 있는 하나님의 아들이었습니다. 그런 분이 십자가를 지는 일을 그렇게 무서워한다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예수께서 정말 그 십자가의 잔을 피하고 싶었던 이유는 십자가형이 고통스러워서라기 보다는, 자기의 어머니인 마리아 앞에서 비참한 십자가형으로 죽어가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만은 피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이미 구원을 이루기 위해 죽음을 각오하셨지만, 어머니 앞에서 처참하게 죽어가는 모습만큼은 보여주고 싶지 않으셨던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의 부모공경의 모습입니다.
예수께서는 부모공경을 이 세상 무엇보다 우선됨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면서도 '다 이루었다'고 하실 만큼 고통과 죽음에 대해 초연하셨지만, 모친 마리아에 대한 걱정만큼은 놓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십자가 위에서 그 모친에게 말씀하시기를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요 19:26) 라고 하시며 사도 요한을 아들 삼아 지내시기를 권고하셨습니다. 또 요한에게는 "보라 네 어머니라"(요 19:27)고 하시면서, 늙으신 어머니를 사도 요한에게 맡기셨습니다. 육신의 동생들이 엄연히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제자에게 마리아를 맡긴 것은 어머니의 노후를 믿을 만한 제자에게 부탁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이렇게 예수는 끝가지 효를 하셨습니다. 그 뒤 요한은 예수의 모친을 자기 집에 모셨습니다. 이것은 요한 개인에게만 부탁하신 것이 아닌 교회 전체에게 맡긴 것이었는지 모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효의 본거지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 교회는 현재, 매주 화요일마다 노인교실을 운영하면서 지역사회의 어르신들에게 보람있는 프로그램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효'의 본거지인 교회는 이러한 프로그램을 더욱 확대해야 할 것입니다. 앞으로 저희 교회는 교회신축을 마치면 주변에 주택을 구입하여 무의탁 노인들에게 거처를 제공하고자 기도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일련의 프로그램을 통해 우리 교회는 효의 실습장이 되어야 합니다.

3. 부모를 공경하는 자에게 약속된 복이 있습니다.

이 세상의 피조물 가운데 인간처럼 오랫동안 부모 밑에서 보호를 받는 동물은 없다고 합니다. 송아지는 태어난지 몇 시간 만에 일어나 걷습니다. 사자나, 다른 동물들도 거의 그렇습니다. 그런데 인간만은 그렇지 못합니다. 오랫동안 부모님의 보살핌이 필요합니다. 그 기간동안 부모님들의 희생은 말로 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우리는, 그러한 부모님들의 눈물과 희생이 없이는 우리가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결혼했다고 해서 부모님의 보살핌이 끝나는 것도 아닙니다. 손자, 손녀들까지 보살피느라 바쁩니다.
그런데 그런 부모님들에 대해 요즘 자녀들은 어떻습니까? 부모가 배운 것이 없다고, 재산이 없다고 별로 관심을 두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가정에서 소외 당하는 부모들이 우리 주변에 얼마나 많은 지 모릅니다. 그것은 한 가지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가정경제를 누구에게 가장 많이 지출합니까? 부모입니까? 부부입니까? 거의 모든 것을 자식들에게 쏟아붓고 있지 않습니까? 돈을 어디에다 가장 많이 쓰느냐에 따라 그 중요성이 짐작되는 것인데, 아이들을 위해서는 아낌없이 지출하면서도 부모를 위해서는 거의 지출하지 않는 것만 봐도 오늘날 가정에서부터 노인문제가 얼마나 심각한 지를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주신 계명을 통해, 이 땅에서 복 받는 것을 부모공경과 연관시켜 말씀하셨습니다. 십계명의 제 5 계명은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너의 하나님 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출 20:12)입니다. 에베소서에서는 부모공경이 "약속있는 첫 계명"이며, 형통과 장수의 복을 받을 만한 일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자식에 대한 사람은 본능적으로 부모는 누구나 있지만, 부모공경은 힘쓰지 않으면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미 핵가족화 된 오늘날 사람들은 자기 부부와 자식 외에는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 기독교인들은 부모공경이 복을 받는다는 것을 알고 최선을 다해서 부모를 공경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부모공경은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까요? 먼저 접촉입니다. 자주 찾아뵈어야 합니다. 찾아 뵙고는 손을 잡아주고 옷도 입혀드리고 안아드리기도 해야 합니다. 흔히 바빠서 부모님 찾아뵐 시간이 없다고들 말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바쁘다는 시간에 주로 뭘 해야 하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정말 바쁜건지, 아니면 바쁘다는 핑계가 제일 무난한 것인지 말입니다.
정 찾아뵐 시간이 없다면 전화라도 자주 해야 합니다. 핸드폰에 보면 단축다이얼이라는 게 있습니다. 긴 전화번호를 일일이 누르는 것이 번거로워 한 자리 숫자를 길게 누르면 입력해 둔 번호로 신호가 갑니다. 그래서 가족이나 친지, 주요 거래처 등을 0번, 1번, 2번에 입력해 두기도 합니다. 여러분의 부모님은 몇 번입니까? 처음에 유머에 나온대로 5번, 6번, 10번이 넘어가는 것은 아닙니까? 오늘이라도 집에 가셔서 부모님 전화번호를 0번이나 1번으로 바꿔주십시오. 비록 거래처보다 전화는 더 많이 하지는 않더라도 말입니다.
그 다음은 대화의 상대가 돼주는 것입니다. 노인의 외로움은 누가 말을 붙여주지 않는데 있습니다. "집에 노인이 한 사람이 있으면 보물이 하나 있는 것과 같다"는 말이 있습니다. 비록 노인들이 시대에 뒤쳐지는 면이 있더라도 오랜 경험에서 여러 가지 생활의 지혜를 가르쳐 주실 수 있기 때문에 사소한 것이라도 말씀드리고, 자문을 구한다면, 스스로 인정받고 있다는 생각으로 활기차게 생활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또 인정해 드려야 합니다. 사람은 스스로 쓸모 없다고 여기며, 존재 가치를 상실할 때가 가장 서럽습니다. 자녀들은 부모님들이 "나 빨리 죽어야 돼"하는 말씀이 나오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아버님, 어머님 오래 사세요. 두 분은 저희들의 큰 힘이 됩니다...살아계신 것만으로도 저는 힘이 납니다"라고 말할 때 부모님은 살 맛이 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부모공경은 '약속 있는 첫 계명'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효를 행하는 자에게 형통과 장수의 축복이 있을 것이라 약속해 주셨습니다. 우리 나라의 전통적인 미덕이기도 한 '효'를 다해서 여러분의 가정에 하나님께서 내려주시는 복이 넘쳐나기를 바랍니다.

처/전병금목사 설교자료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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