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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개혁사

by 【고동엽】 2022. 2. 19.

 

1) 전통적인 견해
16세기 종교개혁은 당시 오래 전부터 교회 안에 만연해 있던 악습들 때문이었다고 보는 것이 전통적인 입장이다. 이것은 일종의 도덕적 설명으로서 루터나 에라스무스의 글 속에서 발견되어진다.
면죄부 판매가 가져온 스캔들은 1517년의 직접적인 도화선이 되었고, 1520년부터 루터는 교황을 적 그리스도라고 공격하였다. 종교개혁은 교회에 대한 불만이 건전하고 거룩한 반동을 야기한데서 비롯되었다.

2) 사상적 설명
역사적인 것보다는 철학적인 선입 개념에서 출발한 결과, 헤겔은 개신교의 폭발 속에서 세계정신의 해방을 향한 운동으로 보았으며, 프랑스의 역사가 Michelet도 종교개혁과 르네상스를 연결시키고 루터의 반란 속에서 정신 해방의 시작으로 보았다. 범 게르만주의 시기에 국가지상주의자들은 루터의 종교개혁과 독일정신의 각성을 일치시켰다.
트뢸취는 개신교란 지적 필요에 부흥한 기독교의 형태로 보았으며, 이것이 후대(18세기) 해방을 싹트게 한 종교개혁이라고 했다. 이러한 해석은 종교 개혁자들의 반전과 그들이 떠난 교회의 모습 사이에서 도덕적 대립을 추구했던 전통적 해석에서 멀어진 견해다.

3) 경제-사회적 설명
마르크스주의의 등장과 더불어 종교 개혁의 성격을 경제적으로 해석한 것을 말한다. 이런 관점에서 종교개혁은 16세기에 돌출하여 빨리 도달한 세계에 자본주의적 경제를 강요한 새로운 경제형태이다. 이것은 유물론적 관점에서의 해석이다. 이들 마르크스주의자들에게서 주목을 끄는 것은 토마스 뮌쳐를 대표로 하는 한 반란의 흐름이다. 부르조아적 종교개혁자인 루터와 하층민의 혁명가 뮌쳐를 대비시킴으로서 "군주들의 개혁"과 "노동자들의 종교개혁" 사이의 대립을 극대화시킴으로서 농민전쟁이야말로 유럽이 경험한 최초의 사회혁명으로 등장시킨다.

4) 종교 신학적 설명
역사적 현상으로서 신성한 것은 한 번 등장하여 하나의 질서를 이루다가 곧 의심되고 비판되면서 이내 사라지고 또 사라지기가 무섭게 또 다른 신성한 것의 다른 현상이 나타난다. 유대 기독교의 출발 시부터 갖고 있던 비신성화 작업은 15, 16세기 종교개혁 전야에 다시 이루어졌다. 이것은 신앙의 문제로서 교회가 잘못 믿고 가르친데서 유래한다. 종교개혁의 기독교 역시 문화적으로 표출될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종교적 사회질서를 갖는다. 종교개혁의 이데올로기는 sola fide, sola scriptura, sola gratia이다. 종교개혁자들은 이것 위에 새로운 사회질서를 형성하게 되는 것이다.

2. 16세기 성찬론 논쟁과 칼뱅의 역할에 대해 논하시오(마르부르크 회담의 배경과 결과, 칼뱅의 교회 일치 운동의 노력과 결과, 그리고 그의 성찬론)

마르부르크 회담은 츠빙글리와 루터의 성찬론에 관한 논쟁을 타협하고자 필립이 추진하여 이루어졌다. 필립은 황제와 합스부르크 왕가를 견제하고 이에 대항할 세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신교의 통일이 매우 필요했다. 루터는 성찬에 임할 때 포도주와 떡에 그리스도의 임재가 육체적으로 임재한다는 것이고, 츠빙글리는 그리스도의 육체적 임재를 부인하고, 그리스도의 영적 임재를 시인하였다. 회담이 잘 되다가 성만찬의 다른 견해로 인하여 결별하는 결과를 맞이하게 되었다. 칼뱅은 이 두 사람의 중간에 위치한 성만찬을 천명했다. 즉 그리스도의 몸이 하늘에 있는 것과 땅에서 행하는 성찬의 연결은 성령의 역사에 의해 연결된다고 하였다. 칼뱅의 성만찬은 순수하고 상징주의적인 것도 아니요, 실재론적인 것도 아니며 본질적으로 영적인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결국 칼뱅은 루터와 츠빙글리의 성만찬 모두를 비판하였다.

1) 루터의 자유 개념
그의 논문 "그리스도인의 자유"에서 그의 자유 개념을 파악할 수 있는 중요한 두 명제를 발견한다. "그리스도인은 전적으로 자유로운 만물의 주이며, 아무에게도 예속되어 있지 않다. 그리스도인은 전적으로 충실한 만물의 종이며, 모든 사람에게 예속되어 있다." 이 두 명제는 자유가 사랑의 관계 속에서 자리를 잡고 있음을 보여준다. 첫째 명제는 신앙인의 속 사람과 관련된 것으로,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근본적으로 자유인이 되기 때문에, 율법을 포함하여 만물로부터 그리고 만물에 대하여 자유롭다. 신앙은 그리스도와 하나되게 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롭게 한다. 둘째 명제는 신앙인의 겉 사람과 관련된다. 그가 행하는 의식, 율법, 선행은 신앙인이 그 자체에 따라서 행하는 것이 아니라, 신앙과 사랑에 따라 행함을 말한다. 그리스도인은 자신 안에서가 아니라, 그리스도와 이웃 안에서 사는 것이다.
이 자유는 영적이고 참된 자유이고, 모든 죄와 율법과 계명에서 인간의 마음을 해방시켜 준다고 루터는 말한다. 루터는 자유의 투쟁과 사랑의 실천을 동시에 말하는 변증법을 세운다. 루터의 자유개념은 사회 정의를 소극적인 것으로 만드는 인상이 있으나, 매우 복음적임은 부인할 수 없다. (기독교의 자유는 신분의 자유가 아니다. 기독교의 자유는 정치적 자유가 아니다. 기독교인에게는 자유의지가 없고, 노예의지가 있을 뿐이다. 이것은 루터의 종교개혁의 특징인데, 자유개념에서 비롯된다.)

4. 개혁파(츠빙글리와 칼뱅)의 개혁적 윤리를 일부 비폭력적 재세례파의 입장과 비교하시오(자유와 정의 실현에 있어서 폭력의 위치를 고려할 것).

개혁파와 비폭력적 재 세례파에서 두드러지는 차이는 "하나님의 정의"와 "인간의 정의"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으며,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에 논쟁의 핵심이 있다. 다시 말해서 츠빙글리와 칼빈은 인간의 정의가 하나님의 정의에 종속된다는 전제하에 하나님의 도구로서의 국가, 즉 세속 당국이 필요하며 우리가 현실에 살고 있는 한 구조와 체제를 벗어날 수 없으므로, 이 구조와 체제에 관심을 기울 수밖에 없으며 이것이 진정한 자유와 정의의 실현으로 가는 길목이라는 것이다.
칼빈은 하나님의 정의를 실현하는데 인간의 시각 교정도 필요하지만 실제적인 구조와 체제의 변화에도 깊은 관심을 기울인다. 그래야만 진정한 개혁이 실현될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는 국가가 자기 영토를 지키기 위해 요구한 군 복무는 인정했으며, 개혁신앙의 수호를 위해 적들에게 무력을 사용했다.
츠빙글리는 인간의 정의는 상대적일 뿐이요, 그리스도의 통치에 관계하여 언제든지 수정될 수 있다는 선택의 여지를 남겨두지만, 세속 당국의 통제하에서 개혁을 진행시키려 했고, 이 개혁에 반대하는 세력들인 재세례파를 무참히 사형시켰다.
이와는 반대로 재 세례파는 비폭력 절대 평화주의를 고수했다. 그들은 내면에 있는 하나님의 정의는 언제나 외면에 그대로 드러나야 한다는 것이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산상설교의 메시지를 개인적, 신학적 차원에서 머무는 것이 아니라 집단적, 사회학적 차원으로 나아가야 진정한 하나님의 정의의 실현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을 이루는데 세속 당국은 필요치 않다는 견해이다.

****** 프로테스탄트 원리를 요약하라
1) 하나님의 절대주권 2) 성경의 절대권위 3) 이신득의 4) 만인제사장

3. 종교 개혁사, 근대 교회사
1. 문제 칼빈의 종교개혁의 특징을 서술하라.(역사적 배경 법학공부 등과 접촉한 인물 등의 영향)이 근대 이후 칼빈주의 특징이 어떤 현상, 자유 민주주의 정치, 자본주의 시장 경제면 등으로 발전했는지 다른 개혁자들과 비교하여 서술하시오)

1. 청년 칼빈
(1)역사적 칼뱅
1523년부터 그가 고국을 쫓겨나 종교 개혁의 대변인 역할을 하기 시작하던 1535년까지의 연구는 칼뱅으로부터 전설적 내지는 신화적 모습을 벗겨 낼 수 있는 것이다.
1950년대부터 칼뱅의 계보적 뿌리를 찾는 연구가 프랑수아 방텔, 가녹지등의 노력을 통해 활발히 있어 왔다.
칼뱅은 플라톤주의자나, 스토아학파, 토미스트, 스코투스파, 또는 유명론파, 나아가 휴머니스트 등 어떤 체계에 사로잡힌 자로 결코 분류할 수 없다. 무엇보다도 바우스마의 최근 작품이야말로 역사적 칼뱅의 탐구 작품으로 칼뱅 전기에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고 있다.
미궁의 칼뱅과 심연의 칼뱅으로 두 칼뱅을 제시하면서 전향적인 인문주의자이자 모험적인 발견가인 전자는 중세 스콜라주의의 미궁의 혼잡한 미로를 도망쳐 나왔고 토마스아퀴나스로 대표되는 휘기 스콜라적 전통의 합리주의자요 학자이며 고정 원리의 인물이자 보수주의자인 후자는 심연이라고 표현된 공포에 의해 이끌렸다는 것이다.
바우스마 이후에도 맥그래스는 칼뱅을 레닌과 비교하면서 일반사에 끼친 개혁자의 영향을 그린 작품을 썼고, 올리비에 미에는 칼뱅의 모습을 르네상스의 수사학의 문맥 속에서 찾았다. 칼뱅 전기를 쓴 베르나르 코트레의 말대로 칼뱅은 변화하는 초상화를 받아 마땅하다.

(2)정치 신학의 형성
칼뱅이 파리에 왔을 때 나이 14살 (1523)이었고 바젤에서 기독교 강요를 출판할 때 나이는 27살(1536)였다.
이 기간 그는 파리에서 신학에 필요한 중등 교육을 마쳤고 오를레앙과 부르쥬에서 법학을 위한 고등 교육을 끝냈다. (1531) 그리고 다시 파리로 가서 고전어를 공부하면서 그의 처녀 작품인 [세네카의 관용론 주석]을 펴냈다(1532). 미래의 개혁자는 1533-1534년 사이의 갑작스런 회심을 경험한 뒤에 격문 사건을 거쳐 바젤로 도망하였고 프랑수아 1세에게 박해 받는 자들을 대변하는 변호 서간을 바쳤다(1535).
오르레앙과 부르쥬에서의 법학 공부와 왕정 학교에서의 공부가 칼뱅으로 하여금 기독교 강요의 서간 헌정문을 써서 왕에게 호소할 수 있게 했고, 나아가 기독교 사회에서의 권력과 정의 문제를 다룰 수 있게 하였다.
칼뱅의 [세네카의 관용론주석]도 단순히 고전 문학에 대한 그의 학문적 취미로만 여길 수 없게 된다. 그러므로 칼뱅의 최초의 작품은 프랑스의 정치적 맥락 속에서 해석되어야 할 것이다.

(3)박해 받는 자들의 교회
프랑스에 루터파이단에 대한 박해가 시작된 것은 1525년 10월 3일부터다. 프랑수아 1세기 스페인에 포로로 잡혀 있던 틈을타 의회는 소르본의 압력에 밀려 이 신신학에 대한 박해를 결정한 것이다. 이러한 결정는 1521년부터 개혁 의지를 가지고 포랑스 감독제의 폭넓은 엽합을 꿈꾸는 모 교구의 지도적 인물들을 3파로 나눠 놓았다.
첫째는 모의 감독인 기욤 브리소네요
두 번째는 감독 대리로서 학식있는 개혁 주모자인 르페브르 데타플이고
세 번째 르페브르의 급진적 제자인 파렐이었다.
칼뱅은 이 3파의 입장을 차례로 밟고 있지 않는가 여겨진다. 브리소네, 르페브로, 파렐로 이어지는 흐름은 종교 개혁으로 가는 칼뱅을 이해하는 데 있어 핵심 부분을 이룬다 하겠다. 이기간(1525 - 1535)은 정확히도 점점 커져 가는 박해의 기간이었다. 16세에서 26세에 이르기까지 칼뱅은 이 증가되는 박해를 목격하면서 자신의 성경 신학을 발전시킨다. 하나님의영광, 성령의 은밀한 공작, 하나님나라의 성장, 우상 숭배의 위험, 적그리스도의 권세 등은 그의 성경 신학에 있어 초석이 되는 주제가 된다.
칼뱅은 1535년 프랑수아 1세에게 바친는 서간문에서 이 박해 받는 무리들의 교회관을 이렇게 서술한다. : 그들(로마카톨릭)이 그토록 강하게 우리를 압박하는 것은 다음 두가지 것을 우리에게 고백케 하려는 것 외에 아무것도 아닙니다. 곧 교회가 지난 수년 동안 죽어벼렸다는 것과 이제 우리가 교회를 대항해서 싸운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확실한 것은 그리스도께서 하늘 아버지의 우편에서 다스리시는 한 그리스도의 교회는 살아 왔고 또 사랑갈 것인데 이 그리스도의 손으로 교회는 지탱되며 이 그리스도의 보호로 교회는 무장되며 이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교회는 힘을 얻는 것입니다. 이러한 교회관은 제네바에서 개신교의 지도자의 길을 가면서 서서히 바뀐다.

2. 지도자 칼뱅
(1)새로운 교회로의 모험
칼뱅의 모험은 근대 문명으로 향하는 모험이다. 칼뱅의 종교 개혁이 가져온 것이 무엇인가? 칼뱅이 가장 큰 성공은 그가 제네바에서 후에 근대 문명이 될 새로운 개혁파 인간 형태를 형성했다는 데 있다. 1541년부터 칼뱅은 본격적으로 제네바 교회를 조직한다. 물론 그가 이 지도자의 길을 걷기까지 초기 사역의 실패와 스트라스부르 3년 기긴의 준비가 선행되었다.
보이는 교회는 제도를 갖는다. 칼뱅은 새 교회 제도를 위해 보다 민주화된 형태를 성경에서 끌어왔다. (롬12장, 고전12장, 엡4장) 이것이 곧 교회의 4중 사역 개념으로 지금까지 개혁파 (장로교)교회 제도의 근간을 이루고 있다. 91541년 교회법은 목사, 교사, 장로, 집사의 교회 사역에 대해 자세히 규정하고 있다. 칼뱅이 세운 새 교회는 새 신앙 고백을 바탕으로 하는 새 질서를 갖는다.
이 새 교회의 또 하나의 특징은 목사와 평신도(장로)로 이뤄지는 권징의 행사에 있다. 칼뱅이 바랐던 권징 행사의 기관은 제네바 형태가 아니라 프랑스 개혁교회 대회, 총회 형태이다.

(2)새 정치 질서로의 모험
칼뱅은 그의 공화국에 3가지 성격을 부여했다.
첫째 : 입헌국가이다. 둘째 : 선거에 의해 이루어지는 국가
셋째 : 성격은 질문 형식으로 던져진다.
칼뱅이 민주주의를 만들었다고 말할 수는 없으나 1789년으로 향하는 민주화의 전망을 열어 놓았다고 결론지을 수 있을 것이다.

(3)새 경제 질서로의 모험
칼뱅은 생활의 필요를 만족시키려는 것이 아닌 돈을 빌린자가 돈을 빌려 준 자처럼 빌린 돈을 이용하게 하는 생산적 대여를 합법화했다.

3. 새 질서를 위한 투쟁
(1)종교적 민족주의 앙드레 비엘레는 이 고전적 민족주의 쿠테타의 특성을 7가지로 보았다.
첫째 : 이 쿠테타는 욕망있고 천한 출신의 신의들을 앞잡이로 삼았는데 이 들은 교양있는 엘리트 앞에서 그들이 바라는 사회의 첫항렬의 위치를 차지하기 위해 상향적 운동으로 권력에 뽑히는 것이 필요했던 인물들이다.
둘째 : 이 정치적 인물들은 정치적 편애주의를 사용하여 국가의 모든 기관에 그 기관을 그들이 만들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능력 없는 인물들을 앉혀 놓고 자기들에게 은혜를 입은 한 무리들을 형성해 놓았다.
셋째 : 그들은 자기 당우너들의 유익을 위해 정의를 부패시킨다.
넷째 : 민족주의의 커다란 심리적 무기는 외국것에 대한 증오에 있다.
다섯째 : 이 증오는 물결이 민중에 충분한 힘이 될 때그들은 세말하게 쿠데타를 준비한다.
여섯째 : 민족주의의 본의는 백성의 종교를 사용하여 그의 정치적 목적에 도달하는 것이다.
일곱째 : 민족주의는 최종 목적에 도달하기 위해 결정적으로 나라의 실제 이익을 멀리하는 일을 무릅쓰면서 외국에 간섭에 의뢰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4) 신정 정치의 위험
16세기에서는 카톨릭이건, 개신교이건 두 가지 원리가 지배하였다. : 하나의 오직 하나의 종교적 진리만이 존재하며 이 진리를 위해 싸운다는 것이고 둘째는 이 진리로 승리하기 위해서는 강제권을 사용하는 것이 합법적이다는 것이다.
313년 이후 서구 기독교 국가의 사회 이데올로기는 기독교였고, 신앙으로 살려는 기독교인이 충성의 문제를 위해 싸웠다면 정치인과 일반인은 안정을 위해 싸워다고 말할 수 있다.
카스텔리옹사건 - 1543
이 소송은 개혁자의 동료였던 카스테리옹이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를 문제시한 데서 비롯했다. 종교 개혁이 태동하는 때에 그런 태도는 치명적 위험이었다. 이것은 신학자들 사이에 있는 부수적 문제에 대한 견해 차가 아니다. 어떤 교회도 영적 권위 없이 존속 할 수 없다. 교황과 공의회의 권위를 성경의 권위로 대치한 종교 개혁이 그 권위를 상실할 경우 존재 의의가 없어진다. 또한 위협받은 것은 도시가 행사하는 정치적 자유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문제삼는 것은 곧 정치적 성격의 행동이기도 했다.
피에르 아모 와 볼섹 1546 - 1551
이들은 칼뱅이 내린 성경 해석(이중 예정) 에 반대해서 고소되었다. 아모는 1546년 4월 8일 하나님과 위정자 사역자 칼뱅을 나쁘게 말했다는 이유로 속옷 차림으로 도시를 한 바퀴 돌아야 했고 볼섹은 순수한 복음의 종교에 거슬러 말했다는 이유로 1551년 12월 22일에 추방되었다.
세르베투스 1553
1553년 8월 13일 칼뱅의 요구로 체포되었다. 당시의 사법관은 반칼뱅주의자였다. 바로 이 사실이 이 소송이야말로 가장 정치적 사회적인 성격을 가졌음을 증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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