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자와 천국문, 낙타와 바늘귀
- 청빈론은 무엇이며, 청부론은 무엇인가 -
이광호
1. 서론
최근들어 한국기독교에 청빈론(淸貧論), 청부론(淸富論)1)에 대한 토론이 일고 있다.2) 도대체 성경이 청빈론을 가르치고 있다는 말인가, 아니면 청부론을 가르치고 있다는 말인가?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부자가 되고 싶어하며 가난하게 살기를 싫어한다. 그 이유는 죄와 경험과 욕망 때문이다. 부자가 되고 싶어하는 이유도 그렇고 가난하게 살기 싫은 것도 동일한 이유 때문이다. 우리는 그 이유를 명확히 알고 있어야만 부로 인해 교만하거나 부의 추구를 최고선으로 여기지 않을 것이며, 가난한 현실에 대해서도 비굴해지거나 그것 자체를 자랑거리로 삼지 않을 수 있게 될 것이다.
물질적 축복관이 주류를 차지하고 있는 한국교회 가운데서 물질관에 대한 새로운 논의가 시도되고 있는 것은 일면 다행스런 일이라 할 수 있으나 명확한 신학적 확인을 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왜냐하면 자칫 본질적인 논의를 벗어나 현상적인 문제에 매달릴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지난해 말부터 한국교회의 목회자 생활비에 대한 논의가 시작되었다.3) 서울의 대형교회의 목회자들 가운데는 일년 연봉이 수억, 많게는 수십억에 이른다는 말이 헛소문이 아님이 드러났으며, 동일한 시대 동일한 국가 안에서 목회를 하고 있는 어떤 목회자들은 연봉 천만원에도 훨씬 못미치는 생활비를 받고 있다는 점을 고려할 때 목회자들 사이의 빈부격차는 심각하다고 할 수 밖에 없다.
결국 그로 인해, 청빈론에 대응하는 말로서 청부론이라는 신조어까지 등장하여 논쟁이 되고 있는 것이다. 청부론이란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돈을 많이 벌어 부자로 살면서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논리이다. 그러나 성경의 본질적인 면을 간과한 그에 대한 논의는 엉뚱한 다툼에 머물뿐 아니라 일부 교인들에게 예기치 않은 명분만 제공할 위험마저 있다. 즉 부유한 사람들이 자신의 부를 하나님의 축복이라 여기거나 그것을 바라는 사람들에게 신기복주의 사상4)에 빠져들게 하는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성경은 물질에 대하여 어떻게 가르치고 있는지 점검해 보고자 한다. 이를 위해 한국 기독교인들의 일반적인 물질관과 구약성경 중 시편112편 및 마태복음에 기록된 두 본문(마19:21-26; 6:24)에 대한 주해, 그리고 성경에서 교훈하는 물질관과 성도의 자세를 살펴봄으로써 주제에 대한 논의를 시도해 보고자 한다.
2. 한국 기독교의 일반적인 물질관
한국 기독교인들의 물질적 축복관에는 문제가 많다. 예수를 믿으면 사업이 잘되고 부자가 될 것이라는 가르침은 한국 교회 가운데 어느 정도 일반화 되어 있다. 한편으로는 청빈을 이야기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부자가 되기를 바라는 것은 이율배반적일 수 밖에 없다. 부자이면서 그것이 불편해 가난한 채 하기도 하고, 반대로 가난하면서도 그것이 자존심이 상해 부자인체 하기도 해야 하는 우리의 형편을 부인할 수 없다. 따라서 겉으로는 청빈을 이야기 하면서 속으로는 물질적 축복을 강조하는 한국교회의 이율배반적인 가르침에 대해 본질적인 새로운 해석이 필요하다. 기독교인인 우리 역시 다 부자가 되고 싶어하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므로 신앙을 통해 물질적 축복을 받기 원하는 것이다. 부자가 되어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주고 좋은 일을 많이 하겠다는 것이 어린 성도들의 소박한 이유일 것이다. 그러한 마음을 가지는데 대해서는 예외가 없으리라 생각한다.
뿐만 아니라 구약성경에는 물질적 축복을 받은 많은 사람들이 있다고 가르치는 지도자들도 있다. 아브라함의 가족이나 다윗의 가정은 물질적 축복을 받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가르침은 성경의 가르침을 잘 못 이해하고 있는데서 출발한다. 사실 그러한 가르침과 사상들이 기독교의 물질적 축복관을 정당화시키는 요인이 되고 있다.
한국교회의 한편 저변을 차지하고 있는 청빈사상은 순수한 기독교 정신이 아니라 중세 수도원 전통과 유교에서 온 통합적 개념이다. 기독교에서는 의도된 청빈을 장려하지 않는다. 종종 기독교 지도자들 가운데 청빈하게 산다고 하는 이들을 보지만 그것은 엄청난 부자들만이 할 수 있는 일종의 특권일 따름이다. 가진 집이 없고 재산이 없는 것만으로 청빈한 삶이라 할 수 없다. 수중에 돈이 없어도 언제든지 누군가로부터 대접받을 만한 위치에 있는 사람들을 청빈한 삶과 관련짓는 것은 무리이다. 우리 주변에도 무소유를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가끔 있다. 아무것도 가지지 않은 무소유가 청빈인가? 그런 무소유의 생활을 하려면 엄청난 부자가 아니면 흉내낼 수 없는 일이다. 필자는 이러한 무소유를 ‘낭만적 무소유’라 일컫는다. 그런 식으로 전면에 제시된 무소유 뒤에는 엄청난 부가 존재하여 그 무소유를 강력하게 뒷받침 하고 있다. 그들은 소유한 재산이 없을지 모르지만 남들과는 도저히 비교조차 되지 않는 엄청난 재능과 능력을 배경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린 성도들 중에는 그것이 마치 실제적인 무소유인 것처럼 이해하기도 한다. 그래서 그런 자들을 존경하기도 하며, 목회자들을 비롯한 기독교 지도자들은 재산이 없어야 한다고 막연히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결코 가난이 곧 미덕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한국교회의 물질관 중 특이한 부분이 있다. 그것은 청빈사상이 일반적으로 목회자들이나 소위 지도급 인사들에게만 요구된다는 사실이다. 일반 성도들이 청빈하게 살아야 한다는 개념은 지극히 희박한데 반해 목회자들은 청빈하게 사는 것이 미덕이라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지도자들이 무책임한 경제활동을 하도록 조장하는 위험한 생각일 수 있다. 목회자들도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일상적인 삶에 있어서 다른 사람들과 차이나는 것이 전혀 없다. 그들도 남들처럼 부양해야 할 가족이 있으며 의식주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그러므로 목회자도 부자가 되기 위한 재산 축적이 목적이 아닌 범위 안에서 건전한 경제생활을 해야하며 저축도 해야 한다. 그래야만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웃이 있을 때나 자녀교육, 개인적 용도 등을 위해 필요에 따라 그 물질을 적절하게 사용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일부 목회자들이 그러하듯이 물질이 생길 때 마다 좋은 일을 한다며 주머니를 다 털어버리는 것은 지극히 무책임한 행동이다. 항상 빈주머니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 올바른 물질관을 소유한 사람의 삶의 태도라 볼 수 없다. 그런 삶을 살다가 보면 정말 자신에게 돈이 필요할 때 누군가가 돈을 채워주기를 바라는 잘못된 마음을 가지게 된다. 그러다가 돈이 생기면 하나님이 채워주신 것이라며 미성숙한 신앙적 자기 합리화를 꾀하게 되는 것이다. 한국 기독교식 청빈이란 정말 찌들고 가난하여 먹고 살기조차 어려운 사람들에게 해당되는 말이 아니라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부자가 될 수 있는데도 부자로 살지 않는 사람을 일컫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이미 가난한 사람이 아니다.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그런 자들의 청빈이란 부자 이상의 부자라 해도 될 것이다.
한국이 경제적인 발전을 하고 한국의 많은 성도들과 교회가 국가 경제와 맞물려 부유하게 됨으로써 그것을 하나님의 축복인양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게 되었다. 그러나 성도가 부유하게 되는 것이 하나님의 축복이라 생각하는 것은 가난한 많은 성도들을 하나님의 은혜와 무관한 자로 만들어 버리게 된다. 최근들어 회자되고 있는 청부론은 곧 ‘깨끗한 부자’를 중심에 둔 개념이다. 기독교인이 성실하게 열심히 일하면 부자가 될 수 있다는 주장을 포함하고 있다. 그런 생각은 성경의 구체적인 교훈과 실례들을 전반적으로 고려하지 않은 주장이다. 성경에는 신앙생활을 잘 한 사람을 하나님께서 부자로 만들어 주신 예를 거의 찾아볼 수 없다.5) 하나님을 잘 믿었기 때문에 부자가 된 것이 아니라 부자이던 사람이 주님을 믿게 된 예들은 종종 나타난다. 아울러 성경에는 신앙을 버리고 이방인처럼 제멋대로 살았던 사람들 중에 부자가 되고 성공한 예들이 많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하나님의 큰 은혜를 받았기 때문에 고등교육을 받아 그럴듯한 직업을 가지게 되어 남부럽지 않은 가정을 이룩하게 되었다고 주장한다면 그렇지 못한 사람들에 대해서는 어떻게 이야기해야 할까? 학교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해 변변한 직업을 가지지 못해 어려운 경제적 여건 가운데 살아가는 성도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지 못한 사람들일까? 가정생활에서 안락한 행복감을 누리지 못하는 성도들은 하나님의 은혜가 없기 때문이라 해도 좋을까? 만일 누군가 그런 생각을 한다면 그것은 자기중심적 사고일 따름이다.
부자가 되어 좋은 일을 많이 하며 살겠다는 것은 그럴듯한 생각이기는 하나 그것 역시 자기 욕심의 발로일 수 있다. 돈을 많이 벌어 선행을 하며 살겠다는 것은 자기인생을 위한 치장논리 이상 되지 않는다. 열심히 일한 결과로 깨끗한 부자가 되어 세상에서 훌륭한 일을 함으로써 존경받고 만족을 누리며 사는 것이 바람직한 삶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지극히 위험한 생각이다. 결국 그 부유함은 이 세상을 살만한 즐거운 공간으로 이해하게 할 것이기 때문이다.6) 그렇게 되면 세상에서 출세하고 성공하는 것이 마치 성도의 삶의 의미를 표현하는 한 방편이 된다고 생각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의 외적인 성공이나 출세는 교회 가운데서는 아무런 의미도 없다.
3. 성경 본문을 통한 물질관을 살핌
우리가 성경적인 물질관을 논할 때는 전체적인 이해를 해야한다. 만일 어떤 사람들이 부분적인 문구를 인용하며 성경적 정당성을 이야기하고자 한다면 그것은 곤란하다. 성경에는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물질적 축복을 하신다는 내용이 나오는가 하면 그와는 반대되는 말씀도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필자는 구약에 기록된 성도의 물질적 축복에 대한 약속과 신약성경의 물질에 대한 경고의 말씀을 동시에 살펴봄으로써 성경적인 물질관을 정리해 보고자 한다.
1) 시편112편; 물질에 관한 해석과 메시아 사상
구약성경에는 물질적 축복을 언급하는 내용들이 많이 있다. 여러 내용 중 두드러지는 한 본문이 시편 112편이다. 거기에는 분명히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허락하실 물질적 축복을 언약으로 말씀하고 계신다. 그러나 우리는 구약성경의 말씀을 언약적 관점에서 해석해야할 필요가 있다. 즉 하나님께서는 본문을 통해 단순한 물질적 축복을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메시아로 인해 얻게되는 영원한 축복을 교훈하고 계신다. 예수님과 신약성경의 사도들도 결국 구약성경의 의미를 해석함으로써 그 참된 의미를 도출해 내었던 것이다.
시편112:1-3에는, “할렐루야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 계명을 크게 즐거워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그 후손이 땅에서 강성함이여 정직자의 후대가 복이 있으리로다 부요와 재물이 그 집에 있음이여 그 의가 영원히 있으리로다”고 노래하고 있다. 이 본문에는 언약의 땅에 거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복과 풍요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이 나타나 있다. 그리고 그 복은 후대의 집안에 까지 미치게 됨을 약속하고 있다. 그렇다면 여기서 말하는 복과 재물이 과연 물질적 축복에 머무르는 개념인가? 아니면 적어도 물질적 개념을 포함하고 있는가?
시편 112편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이 받게 될 축복과 악인들이 받게될 비참한 종말을 비교하며 노래하고 있다는 사실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즉 악인들의 자손이 이 세상에서 가난하게 살게될 것을 염두에 두고 하신 말씀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이 본문에서 말하는 복과 부요와 재물에 대해서도 물질적인 것에 국한시킬 수 없다. 이는 메시아 예언에 속한 시편으로 이해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리고 122:5에서는 “은혜를 베풀고 꾸이는 자는 잘 되나니 그 일을 공의로 하리로다”고 노래한다. 이 구절에서는 이미 부유한 자가 되어 있는 상태에서 어떻게 하면 될까 하는 점을 이야기 하고 있다. 말씀은 다른 사람에게 후덕하고 편안하게 물질을 꾸어주는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정당하게 대우하시겠노라 약속하고 있는 것이다. 이 말씀에서는 하나님의 자녀가 이 세상을 살면서 자기 욕심대로 살지 말 것을 요구하신다. 즉 이웃을 위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중심으로 자신을 포기하며 이웃을 긍휼히 여기는 가운데 살아가는 것이 성도의 기본적인 삶이다. 이는 가난한 이웃을 구제하며 살라고 요구하는 윤리적인 교훈이 아니다. 하나님의 뜻과 섭리를 바라보며 살아가고 있는 성도가 가지는 당연한 삶인 것이다.
또한 112:9에서는 “저가 재물을 흩어 빈궁한 자에게 주었으니 그 의가 영원히 있고 그 뿔이 영화로이 들리리로다”고 예언적인 노래를 하고 있다. 이 말씀 역시 인간 존재는 자신을 위해 살아가는 존재가 아님을 교훈해 주고 있다. 가진 재물을 가난한 이웃과 더불어 나누었으니 그것이 결코 자신에게 손해가 되는 일이 아니었음을 밝혀주고 있는 것이다. 인간이 이 세상에 살면서 누리는 만족이나 즐거움이 값어치가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궁극적으로 공급하시는 영화로움이 훨씬 본질적인 것임을 보여주고 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백성은 이에 대한 깨달음이 있을 때 온전한 성도의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시편 112편에는 하나님께서 언약의 민족인 이스라엘 백성에게 허락하실 물질적 축복을 언약으로 말씀하고 계시는 것이 틀림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 말씀을 오늘날 우리 시대 하나님을 경외하는 성도들에게 물질적 축복을 하고 계시는 것은 아니라고 이해한다. 우리는 구약성경의 말씀을 언약적 관점에서 해석해야할 필요가 있다. 예수님과 신약성경의 사도들도 결국 구약성경의 의미를 해석함으로써 참된 의미를 도출해 내었다. 따라서 시편 112편이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는 바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성도들에게 오실 메시아를 약속하신 것이다. 그가 오심으로 인해 그의 백성들에게는 모든 풍요와 부가 영원히 가득하게 되었다. 주님이 오심으로 그의 몸 된 교회에 속한 우리 성도들이 그 약속을 풍요롭게 누리고 있는 것이다.
2) 마태복음 19:21-26; 부자와 낙타에 대한 이해
예수님께서는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놀라운 교훈을 주셨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하시니 그 청년이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가니라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 다시 너희에게 말하노니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신대 제자들이 듣고 심히 놀라 가로되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으리이까 예수께서 저희를 보시며 가라사대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할 수 있느니라”(마19:23-26)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본문의 의미를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경우를 종종 본다. 우선 21절의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라’는 말씀이 선행을 요구하는 말로 잘못 알고 있는 자들이 있다. 예수를 믿는 자들은 소유한 재산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줌으로써 이웃 사랑을 실천해야한다는 것이다. 즉 소유한 재산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는 행위가 온전하게 되는 조건이 된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위 본문 말씀은 그것을 말하고자 함이 아니다. 가난한 사람을 구제하는 것이 기독교인의 일차적인 덕목임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부차적인 현상이어야 할 뿐 대화의 주된 요지는 아닌 것이다.
그리고 23-24절 말씀의 의미로 보아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많은 애씀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다. 즉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 보다도 더 어려우니’ 라고 했으니 그만한 어떤 준비를 갖추어야 한다는 것이다. 즉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바늘귀를 늘리든지 낙타의 몸통을 줄이든지 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자신의 부유한 몸통을 줄여야 하므로 가난한 자들을 구제함으로써 그만큼 애써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구절은 구제나 절제를 교훈하는 말씀이 아니다.
또한 26절 말씀에서 하나님의 기적을 가르치는 것이라는 생각하는 자들이 있다. 부자는 과연 천국에 들어갈 수 없는가? 위의 말씀에서 부자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고 말하고 있다.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갈 수 없듯이 부자가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자칫 이 말씀을 하나님의 기적을 말하는 것으로 오해하기도 한다. 이는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할 수 있느니라’는 말씀 때문이다. 이 말씀은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불가능하지만 하나님은 하실 수 있다는 말처럼 들릴 수도 있다. 그렇다면 부자인 상태라 할지라도 하나님이 원하시면 그를 천국에 들여보낼 수도 있다는 말로 생각해 볼 수도 있는 문제이다. 그러나 이 말씀은 그런 의미라기 보다 하나님의 은혜로 인해 부자가 되는 것을 포기할 수 있다는 말로 이해하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은혜에 따라 세상의 모든 부유함을 포기할 수 있음을 말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본문의 가르침을 잘 깨달아 이해해야 한다. 21절 말씀은 세상에서 기댈만한 소망의 언덕(?)을 제거하라는 주님의 요구이다. 이 본문에서 우리가 관심을 기울여야 할 대목은 ‘너’와 ‘나’의 관계, 즉 부자청년과 예수님 사이의 관계이다. 예수님께서는 그 청년에게 ‘너의 재산을 의지할 것이냐, 아니면 나를 의지할 것이냐?’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만 한다는 것을 말씀하고 계시는 것이다. 소유한 재산과 예수님 둘 다 선택하여 따를 수는 없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주님께서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라’고 하신 말씀의 진정한 의미는 ‘너의 삶을 보장할 것이라 믿으며 네가 의지하고 있는 재산을 없애버림으로써 오직 나만 의지하고 따르라’는 말씀이다. 그렇게 할 때 ‘너에게 천국의 영원한 보화가 주어지리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이다. 예수님의 그 말씀을 들은 청년은 근심하며 떠나갔다. 그가 근심한 이유는 둘 다를 선택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가 생각할 때 그 중 하나라도 버리고 싶은 마음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자기의 재산을 선택한다는 것은 사실상 주님을 선택하지 않았다는 의미이다. 누구든지 그 둘을 동시에 선택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 보다 어렵다’(23-24)는 말씀의 의미는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 어려운 것이 아니라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는 듯이다. 주님께서는 분명히 그렇다고 가르치고 계신다. 과연 우리는 이 말씀을 어떻게 이해해야만 할까? 그것은 단순히 어렵다는 뜻이 아니라 불가능함을 의미하는 것이다.7) 정말 많은 재산을 가진 사람들은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는 이야기인가? 만일 그렇다면 왜 많은 기독교인 가운데 부자인 사람들이 태연자약할 수 있다는 말인가? 여기서 말하는 부자란 하나님 이외에 이 세상에 의지할만한 내용들을 보유하고 있는 자들을 포괄적으로 의미한다. 하나님 이외에 이 세상에서 의미화 되어 자기 삶을 어느정도 보장할 수 있다고 여겨지는 것들을 소유한 사람들은 모두 부자들이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유형, 무형의 재산인 학벌, 능력, 직업, 명예, 권력 심지어는 건강마저도 우리의 삶을 궁극적으로 보장할 수 없다. 그러나 그런 것들이 세상에서 큰 힘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위험한 생각일 수 있다. 썩어 없어질 세상의 것들로부터 삶을 보장받으려 하는 것은 우상숭배적 사고일 것이다. 그러므로 사도바울은 그런 것들을 ‘배설물’(빌3:7-9)로 여긴다고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구원은 오로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다.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할 수 있느니라”(26)는 말씀은 구원이 오로지 하나님께 속했음을 말씀하고 계시는 것이다. 구원은 인간의 노력에 달려 있지 않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구원을 위해 어느 누구와도 타협하거나 의논하지 않으셨으며 자기의 기쁘신 뜻에 따라 구원을 계획하시고 이루어 가신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은 하실 수 있다’는 말씀의 의미가, 낙타의 바늘귀 통과 여부를 말씀하시고자 함이 아니라 구원이 하나님께 속했음을 말씀하고 계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낙타가 바늘귀를 통과할 수 있느냐 아니냐 하는데 관심을 가지고 계신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자기 백성의 구원에 있음을 알아야 한다.
3) 마태복음6:24;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함의 의미
예수님께서는 상상보훈 가운데서,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8)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고 분명히 말씀하셨다. 우리 주변에는 이 말씀의 진정한 의미를 오해하는 이들이 많이 있다. 그들은 ‘재물을 섬긴다’는 말이 물질적 탐심을 지칭하고 있다고 한다. 여기서 재물이란 좁은 의미에서는 돈을 의미하지만 이 ‘세상’을 지칭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 말씀에서 교훈하고자 하는 것은 세상에서 가질 수 있는 탐심에 대한 경고성 의미를 가진다는 것이다. 이 말씀이 물질을 지나치게 탐하는 것에 대한 경고의 말씀일까? 돈을 탐하고 재산을 축적하려는 사람들에 대한 경고라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한편 이 말씀을 보며 이방인 처럼 돈을 섬겨서는 안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 가운데 자신은 돈을 섬긴다고 생각하는 자들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돈을 섬긴다고 하면 이방종교를 믿는 불신자들이 돈을 앞에 두고 절을 한다든지 하는 것을 염두에 두고 있을까? 우리 한국의 경우 고사를 지낼 때 돈에게 절을 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예를들어 고사를 지내거나 산신제를 지낼 때 삶은 돼지머리의 입에 돈을 꽂아두고 절을 하는 것은 일반적인 것이다.
예수님께서 이 본문에서 말씀하시고자 하는 ‘물질을 섬김’에 대한 진정한 의미는 무엇일까? 우리 가운데 아무도 자기는 돈을 섬긴다고 생각하는 자가 없을 것이다. 교회에 출석하는 사람들 중에 돈에 절을 하거나 돈을 숭배하는 사람들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돈에 대한 궁극적인 탐심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들이 많이 있을 것이다. 그들도 자기는 돈을 섬기지는 않는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특히 현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이미 돈을 섬기고 있는지 모른다. 이런 반성적 생각을 할 수 있을 때 비로소 그 의미가 분명히 드러날 것이다.
이 본문에서는 하나님과 재물은 공존할 수 없는 것으로 분명하게 묘사되고 있다. 즉 서로 조화될 수 없는 반대편에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만을 섬겨야 한다. 하나님 이외의 것을 의지하고 그 위력을 인정하는 것은 이방인들의 행위이다. 따라서 돈을 섬긴다는 것은 돈의 위력을 인정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돈의 위력을 인정하고, 돈이 있으면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곧 돈에 굴복하는 것과 같다.
4. 성경에서 교훈하는 물질관과 성도의 자세
물질적 부에 대하여 구약과 신약은 서로 상반된 교훈을 하고 있는가? 앞의 시편 112편과 마태복음 19:21-26; 6:24을 보면 그 의미를 잘 알지 못할 경우 서로 상반되는 교훈을 하고 있는 것처럼 들리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언약사상을 알고 있다면 그 양자가 통일성 있는 조화되는 교훈을 하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구약의 시편 112편은 그 중심에 예수그리스도가 있으며 그가 곧 부의 상징인 것이다. 구약성경의 핵심개념은 ‘땅과 백성’이다. 하나님께서 조상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것이 곧 ‘그 땅과 백성’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 땅에 살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백성에게 풍요로운 축복이 약속되며 그것은 메시아의 오심을 통해 드러나게 된다. 따라서 신약성경에 나타난 부에 대한 개념은 그리스도 자신이 부요의 내용이며, 그 이외의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다. 아무런 의미없는 것에 집착하거나 그에 의지하는 것은 곧 우상숭배적 현상이며 하나님을 멀리 하는 것이 될 수 밖에 없다.
성도들에게 있어서 빈부 자체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성도에게 있어서 이 세상에서 부자냐 아니냐 하는 것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물론 부의 유무로 인해 좀 편리한 삶을 살수도 있을 것이며 좀 더 불편한 삶을 살게 되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 자체가 의미있는 것은 아니다. 교훈적인 측면에서 볼 때 성경에서 말하는 부자란 물질적 부자에 국한되지 않는다. 건강, 학벌, 능력, 외모, 직업, 재능, 명예 등 모두가 동일한 관점에서 설명될 수 있다. 우리는 이 세상을 누리며 살만한 조건들을 잘 갖추고 있는 것을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배워오고 있다. 중요한 것은 주님의 자녀답게 근면하고 성실하게 살아가는 삶의 자세이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주어진 각기 다른 환경과 여건 속에서 성실하게 일해야 하며 그 결과 얻은 물질을 잘 저축하며 지상에서의 삶의 성도로서의 온전한 삶을 살수 있도록 계획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부자에 대한 기준을 정하기가 애매한 것을 잘 알고 있다. 어떤 사람이 부자인가 하는 점을 이야기 할 때 우리는 그 기준을 잡기가 쉽지 않은 것이다. 일 천만원을 가지고 있으면서 부자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일 억원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가난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세상을 누리고 살만한 많은 조건들을 갖추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더 많은 것을 얻으려는 사람들도 있다. 그런 사람들은 아직도 자기의 삶에 만족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이 이 세상에서 더 많은 것을 얻어 누리려고 하는 것은 욕심에 기인한다.
또한 미국이나 유럽 등 선진국에 사는 사람들은 양심의 거리낌이 없이 부유하게 살 권리가 있고 가난한 나라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그렇게 할 권리가 없는 것인가 하는 점도 생각해 보아야 할 문제이다. 이것은 부나 가난에 대해 객관적 기준을 제시할 수 없다는 말이기도 하다. 이 말은 곧 절대 다수의 많은 사람들이 나름대로 상대적 부자이기도 할 것이며 동시에 많은 사람들이 상대적으로 가난한 사람일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가난의 일반적 기준은 먹고 살만한 음식이 부족하고 질병에 걸려도 병원에 갈만한 형편이 되지 못하며 몸을 편안하게 눕혀 살만한 집이 없는 사람들이 정말 가난한 사람들일 것이다. 그런 관점이라면 적어도 이 글을 읽는 사람들은 자발적으로 가난해 질 수 없다. 만일 어떤 사람이 그런 삶을 의도적으로 고집한다면 그것은 비신앙적 고행주의자일 따름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느 선까지가 부자이며 어느 선까지가 가난한 자인가 하는 점에 대해 객관적 잣대를 제시할 수 없다. 그러므로 현재 한국 땅에 살아가고 있는 성도들은 특별한 경우들을 제외한다면 웬만하면 다 부유한 자 일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이다.
성도의 삶의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가 하는 점은 명확하다. 성도는 이 세상에서 부자일 수도 있고 가난할 수도 있다. 물질적으로 부유하거나 가난할 수 있으며 다른 능력이나 무형적인 면에서 부유하거나 가난할 수도 있다. 사도바울은 성도의 삶이 가난에 처할 줄도 알고 부에 처할 줄도 아는 자신의 삶을 표준으로 제시하고 있다(빌4:11,12). 그러나 부자가 되는 것이 중요하냐, 아니면 가난하게 사는 것이 미덕이냐 하는 것 자체로서는 성도의 삶에 있어서 별 관계가 없다. 성도가 주어진 환경 가운데서 어떤 자세로 살아가야 하는가 하는 점이 중요할 따름이다. 성도가 부유하게 사는 것은 결코 자랑거리가 될 수 없다. 그것을 두고 하나님의 은혜니 축복이니 하는 것은 신앙적 미성숙의 표현일 따름이다. 히브리서 11장에 나타난 신앙의 선진들 보다 더 크고 많은 축복을 누리며 살고 있다고 할 수 있는가? 성도가 부자일 때는 그렇지 못한 다른 이웃에 대해 자랑이 아니라 도리어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 만일 부유한 삶이 하나님의 축복이라 여긴다면 자랑거리가 되어 미숙한 삶을 살 수 밖에 없을 것이다.
5. 결론
예수님께서 과부, 억눌린 자, 장애자 등과 가까이 하시게 된 것은 그들에게는 세상에 기대할 만한 소망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 땅에 살아가는 성도가 천국에만 소망을 두고 살아가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그러므로 이 땅에 다른 소망을 이룩해 갈만한 다른 요소들을 축적하여 부자가 되려고 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결국 천국의 소망과 이 땅에서의 소망을 혼돈함으로써 세상을 탐닉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부는 결국 천국에 들어가는 소망을 없애버리거나 약화시킬 것이다.
사도바울은 디모데에게 편지하면서, 돈은 일만 악의 뿌리라고 말하고 있다. “돈을 사랑하는 것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 자기를 찔렀도다”(딤전 6:10). 디모데후서3:1,2에서도,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면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라고 말하고 있다.
돈을 사랑하는 자들은 돈의 위력을 알고 그 위력을 인정하는 자들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능력은 상징적 능력이며 돈의 위력은 실제적인 능력이라 믿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개인 뿐 아니라 집단도 마찬가지이다. 타락한 교회는 그와 동일한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돈의 위력을 실제적인 능력으로 인정하여 하나님의 능력을 관념화 시키는 것은 죄악이다. 그것은 사람을 눈멀게 하며 망하게 한다. 부자와 천국은 서로 반대편에 서 있다. 부자는 세상을 즐거워하고 누리는 동안 천국을 소망하지 못할 것이다. 이 세상이 충분한 즐거움을 제공하는 터에 굳이 천국의 즐거움을 바랄 이유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 가운데 놓여 있는 것이 곧 돈이다. 돈을 가지고 있으면 많은 공부도 할 수 있고, 큰 사업을 벌일 수도 있다. 돈을 통해 즐거움과 안락함을 누릴 수 있을 것이며 자녀를 소위 훌륭하게 키울 수도 있다. 입으로는 하나님의 능력을 이야기 하지만 결국 돈이 해결사역할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 글을 읽는 대다수는 이미 부자들이다. 우리시대는 전반적으로 부요한 시대가 되어 있다. 그래서 성도들이 올바른 신앙을 유지하며 살기가 쉽지 않은 시대가 되어 있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고등교육을 받았을 것이며 다수는 남들이 보기에 부러움을 살만한 좋은 직장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대개는 좋은 건강을 유지하고 있을 것이며 건실한 생활을 함으로써 가정생활도 무난할 것이다. 경제적인 궁핍도 별로 느끼지 않는 사람들이 대다수일 것이다. 교회나 사회에서도 어느 정도 필요한 사람으로 인정받아 제 역할을 하며 살고 있을 것이다. 우리는 이미 부자가 되어 있다. 이제 어떻게 할 것인가?
우리 중 다수는 이미 부유한 상태로 살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그 부가 아무것도 아님을 신앙적으로 깨달아야 한다. 내가 가진 모든 것을 지금 당장 다 빼앗긴다해도 별 아까움 없이 덤덤하게 받아들일 수 있어야만 한다. 이 세상에서 소유하고 살아가는 모든 것들은 다 배설물과 같은 것들이기 때문이다. 내가 가진 그 모든 것들이 일시에 무너지고 상실되면 삶의 의미가 없어지는 듯하고 인생을 실패한 것 처럼 느껴진다면 아직 어린 신앙인이거나 천국밖에 서성이는 부자라 할 수 밖에 없다.
그러면 가난한 사람들은 그 가난함이 천국을 보장하는가? 물론 아니다. 물질적으로 가난할 뿐 아니라 배우지 못하고 능력이 없고 건강이 약한 사람들도 많이 있을 수 있다. 천국은 과연 그렇게 사는 사람들의 것인가? 만일 그런 사람들이 다른 부유한 사람들을 부러워하거나 그런 부자가 되기를 바라고 살아간다면 그들 역시 ‘부자’에 속한다. 세상에서 기댈 언덕을 끊임없이 추구해감으로써 천국의 의미를 알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현재의 형편에 관계없이 ‘가난한 자’로 살아가야만 한다. 남들이 눈에 비쳐지는 바나 스스로의 생각에 따른 부와 가난에 관계없이 진정으로 가난하게 사는 의미를 깨달으며 살아가야 한다. 지금 논의되고 있는 청부론은 자칫 부자들을 잘못된 신(新)기복주의적 축복론과 함께 스스로 합리화할 수 있는 빌미를 제공할 위험이 있으며 따라서 교회내의 가난한 자들을 부끄럽게 할 것이다. 지금의 청부론이 일부 부유한 사람들에게 명분을 주는 일이 없기를 바란다. 동시에 청빈론이 일부 가난한 사람들에게 부유한 사람들을 냉소하거나 비난할 수 있는 빌미로 이용되어서도 안된다. 부자들은 자기의 형편에 따라 청부론을 지지하고 가난한 자들은 자신의 모습을 보며 청빈론을 지지한다면 큰 문제다.
참 부자는 하나님의 은혜만으로 풍성함을 누리는 자들이다. 그들에게는 이 세상에서 더 이상 잃어버릴 것이 없다. 설령 자기가 소유한 모든 것들을 일시에 상실 당한다 해도 여전히 주님의 풍요를 누릴 수 있는 자들이 진정한 부자들인 것이다. 성경에서 말하는 성도의 물질관은 결국 부자가 되어야 하느냐, 아니면 가난하게 살아야 하느냐에 대한 문제가 아니라 성도의 가치관의 문제이다. 즉 부유하면서도 그것이 진정으로 아무 것도 아님을 알며 살아가는 성숙한 성도들이 있을 수 있을 것이며 가난하면서도 물질에 가치를 둠으로써 천국문을 통과하지 못하는 자들이 있을 수 있다. 그리고 자기의 수입을 잘 분배하고 나누는 것이 성도로서 마땅히 해야할 행위로 여기고 그것을 마치 ‘자신의 의’인 것처럼 생각하는 자가 있다면 그는 바늘귀를 통과할 수 없는 낙타처럼 천국문을 들어갈 수 없는 부자일 것이다.
'◑ 자료 18,185편 ◑ > 자료 16,731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성경해석과 이단 (0) | 2022.01.28 |
---|---|
빛과 소금을 상실한 한국교회 (0) | 2022.01.28 |
참과 거짓(이단, 거짓 선지자)을 구별하는 법 (0) | 2022.01.28 |
에쿠메니컬 운동 (0) | 2022.01.28 |
카톨릭 (0) | 2022.01.28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