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까지 함께 가야 합니다! (행 27:37-44)
지난 주간 부흥회를 갔더니 시간 시간 당신 교회 찬양을 들으시고 그 교회 담임 목사님께서 어디를 가도 그 찬양대보다 잘하는 찬양대는 본 적이 없다고 하셨는데, 저는 이해가 잘 안되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저도 가만히 우리 찬양대를 보니까 세계에서 우리 교회 찬양대보다 잘하는 데가 없습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립니다.
제 설교 계획에 의하면 오늘은 사도행전의 마지막 장인 28장으로 가야 하는데, 성령님께서 27장에서 더 전할 말씀이 있다고 붙잡으셔서 오늘 그 말씀을 여러분과 함께 나누려고 합니다.
성령께서 제 마음에 강하게 주신 말씀은 44절 ...마침내 사람들이 다 상륙하여 구조되니라 였습니다.
사도 바울을 싣고 로마로 가던 배에는 276명이 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배가 유라굴로 광풍을 만나 14일 동안 말할 수 없는 고생을 하고 다 죽게 생겼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사도 바울 때문에 배에 탄 모든 사람들을 구원하여 주셨습니다. 여기에 매우 중요한 교훈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배에는 별의 별 사람이 다 있었습니다. 다 좋은 사람들은 아니었습니다. 선원들은 환락가가 있는 큰 항구에서 겨울을 나려고 위험한 줄 알면서도 무리하게 항해를 강행했었습니다. 사람을 죽이는 일은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는 로마 군인들도 있었습니다. 전쟁터에서 수많은 사람을 죽이는 일을 했고 사람 죽이는 것에 마음이 무디어진 사람들이었습니다. 압송되는 죄인들 중에 정말 죄질이 나쁜 사람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마음은 그 모두를 다 살리는 것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22절에서 담대하게 그 배에 타고 있던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뜻을 전합니다.
이제는 안심하라 너희 중 아무도 생명에는 아무런 손상이 없겠고 오직 배 뿐이리라 외쳤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응답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24절) 바울아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항해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 하였으니
사실 276명이 다 살았습니다. 처음에는 한 사람도 살 것 같지 않았던 대단히 위험한 상황이었는데도 다 살았습니다.
그러나 배에 탄 모든 사람이 다 구원받기 까지 두 번의 고비가 있었습니다.
한번은 30-32절에서 배가 풍랑을 만나서 다 죽게 생겼으니까 사공들이 배를 버리고 자기들만 살려고 구명정을 내려 도망하려고 했던 일이 있었습니다. 그 때 사도 바울이 이 사람들이 배에 있지 아니하면 너희가 구원을 얻지 못하리라 하며 적극적으로 막았습니다. 그래서 그 선원들이 도망가지 못하고 그 배에 같이 있게 되었습니다.
또 한번은 42-44절에서 배가 섬에 가까워서 난파되었을 때, 죄수들이 도망갈까봐 로마 군인들이 죄수들을 다 죽이려고 했었습니다. 로마 군인들은 죄수들을 끝까지 로마로 데리고 가는 것이 그들의 책임인데 죄수들이 도망갈까 봐 아예 죽여버리자고 백부장에게 제안을 했습니다. 그 때 백부장 율리오가 사도 바울도 죽을까봐 모든 죄수들을 살려주라고 하였던 일입니다. 너희들이 헤엄칠 수 있으면 마음껏 섬에까지 헤엄쳐 가라, 그러지 못한 사람은 널빤지나 배에 있는 그 어떤 기구라도 붙잡고 너희들이 살 수 있는 방법을 다해서 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다 구원받았다고 하는 내용입니다.
주님은 이 사건을 통하여 우리가 가정이나 교회나 나라라는 공동체를 어떻게 지켜야 하는지, 또 서로 서로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를 교훈하시고 계십니다.
사도 바울이 탄 배가 풍랑을 만났듯이, 가정도 교회도 국가도 풍랑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 문제가 크다는 것에만 초점을 둡니다. 여러분,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사람인 까닭에 우리는 어떤 어려운 일을 만나도 하나님은 문제보다 더 크시다는 사실을 분명히 믿어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아주 망할 문제는 없습니다. 어떤 문제도 하나님보다 크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은 반드시 우리를 그 문제 속에서 건지시고 오히려 그 문제가 변하여 놀라운 간증되게 해주시는 하나님을 믿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시험을 만나고 큰 어려움이 닥칠 때, 정말 조심할 것은 풍랑 보다도 그런 상황에서 역사하는 악한 영입니다. 환란이 크냐 작으냐 하는 것은 예수님을 영접한 우리에게는 아무 문제가 안됩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결코 큰 문제란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고전 10:13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그렇습니다. 어떤 시험을 만나도 끝까지 예수님을 믿고 따르면 풍랑은 잠잠해지고 모두는 다 구원을 받게 됩니다. 그런데 믿음이 분명치 않으면 문제 속에 그냥 묻혀버리고 맙니다.
문제는 상황을 급박하게 만들어서 우리로 하여금 더욱 이기적이고 서로 적대적이게 만들려는 악한 영의 역사입니다.
어려울수록 더욱 예수님의 마음을 품어야 합니다.
빌 2: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왜냐하면 마귀가 무섭게 역사하기 때문입니다.
어려움이 생길 때, 자세히 보십시오. 분열의 영이 역사하기 시작합니다. 공동체를 깨뜨리는 것입니다.
오늘 풍랑을 만났을 때 하나님의 계획은 배는 잃어버리겠지만 사람들은 다 구원받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일이 중간에 벌어집니까? 유라굴로 광풍을 만났을 때, 선원들을 자기들만 살겠다고 구명정을 타고 도망가려고 했듯이, 가정에서도 교회에서도 이기적인 행동이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나만이라도 살아야지 다 살기는 글렀네.’ 로마 군인들이 죄수를 죽여버리자고 했듯이, 로마 군인들 생각에는 죄수들의 목숨은 목숨도 아닙니다. “저런 사람들은 사나 죽으나 마찬가지인데 이제 도망가면 어떻게 합니까? 아예 죽여버립시다.”어려운 일이 생기면 사람의 마음이 다 강팍해집니다. 서로 정죄하고 판단하고 배척하는 일이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악한 영의 역사입니다. 그러므로 정말 조심할 것은 어려울 때, 사람을 상대와 싸우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싸울 대상은 악한 영입니다.
어려운 일이 생겼을 때 재정적인 문제 건강의 문제 또는 어떤 여러 가지 시험거리가 생기면 성도들은 예수님의 마음을 정말 품어야 됩니다. 마귀가 공동체 안에 가족 안에 교회 교인들 안에 서로 이기적인 마음으로 ‘나라도 살아야지.’하는 마음으로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고 서로 판단하고 정죄하고 서로를 죽이려고 하는 마음을 갖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성령님은 절대로 그런 마음 주시지 않습니다. 성령님은 하나 되게 만드시는 분입니다.
영적 전쟁의 핵심은 하나가 되느냐 분열이 되느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할 일은 예수님의 마음을 굳게 품고 하나됨을 지키는 것입니다.
엡 4:3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우리 안에 계신 예수님의 마음을 품으면 어려운 일이 생길때일수록 하나 되는 쪽으로 항상 갑니다. 그러면 반드시 주님이 해결해 주십니다. 가정 문제, 교회 문제, 직장 문제, 나라 문제, 똑같습니다. 여러분, 어려운 일이 생길 때 아주 주의 깊게 보십시오,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 영적인 역사가 일어납니다. 자기만 살겠다는 사람이 생기고 서로 판단하고 정죄하고 죽이려고 하는 일들이 일어납니다. 그때 여러분이 주님의 마음을 품고 끝까지 하나 됨을 지키고 나가면 신기하고 놀랍게 기적과 같이 모두가 다 사는 역사가 일어나고 그때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은 정말 살아계시구나. 저 기독교인 사이에 진짜 하나님이 계시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됩니다.
우리가 환란을 만나고 어떤 시험을 당해도 하나 됨을 힘써 지키면 세상 가운데 예수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요 13:35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요 17:21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오늘 하나님은 그 말씀을 우리에게 꼭 주시고 싶으신 것입니다.
지금 우리 교회가 소속되어 있는 감리교회는 참 어려운 형편에 있습니다. 제가 얼마 전에 몇몇 목사님들과 함께 교단 일에 대하여 성명서를 발표한 적이 있었습니다. 이 일로 걱정하시는 분도 계시지만, 주님께서 교단의 어려움이 그 어떤 사람들 때문만이 아니라, 제 책임도 있다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처음 감리교 사태가 일어났을 때‘감리교회에 소망이 없구나, 차라리 감리교를 탈퇴하는 것이 낫지 않나?’하는 생각도 했었습니다. 지금도 그런 생각을 하는 목회자들도 많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아니라는 마음을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교회가 잘못이 있어도 욕을 먹어도 교회를 사랑하십니다. 교회에 어떤 문제로 인해서 싸우는 참 시험이 많지만, 하나님께서는 교회를 징계하실지언정 교회를 절대로 버리지 않으십니다.
한국 교회가 타락하는 모습을 보이자 심지어 “예수님께서 한국 교회를 떠났다.”고 극언을 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경종을 울리려는 의도는 알겠지만 정말 무서운 말입니다. 왜냐하면 사실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지금도 얼마나 놀라운 구원의 역사와 복음의 역사가 일어나고 있는지 모릅니다. 타락한 자녀에게 누가 찾아가서 “네 부모가 너를 버렸다.” 하면 그 부모가 고마워하겠습니까? 정말 분노하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가 어려울 때, 나라도 살아야겠다는 생각은 예수님의 마음을 정말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교회와 성도가 잘못하였을 때, 하나님으로부터 징계를 받을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결코 교회와 성도를 버리지 않으십니다.
사 49:15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하나님께서 교회를 징계하실 때가 있습니다. 그 때 “나는 잘못하지 않았어요! 다 저 사람들 때문입니다. 왜 내가 저런 사람들과 함께 고통을 당해야 합니까?” 하며 공동체를 떠나는 것은 하나님의 마음을 정말 모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매를 드셨다면 공동체와 함께 같이 매를 맞는 것이 정답입니다. “하나님, 저희가 잘못했습니다. 매 맞을 일을 했습니다. 매를 때려 주십시오.” 하는 것이 오히려 문제를 빨리 해결하는 길입니다.
맏이가 “제가 잘못 했습니다. 동생들이 무엇을 알겠습니까? 결국은 제가 잘못했습니다.” 또 동생들이 “형이 무슨 잘못이 있어요? 저희들에게 잘못이 있지요.” 그러면 부모가 매를 다 거두게 되어있습니다. 더 이상 매를 들 이유가 없습니다. 다 해결된 것이니까. 그런데 서로 “나는 아무 잘못 없어요! 나는 억울해요. 나 떠날래요.” 그러면 그 부모는 정말 속이 뒤집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끝까지 버리지 않으시지만 징계하실 때가 있는데, 그때 우리가 바로 깨달아야 됩니다. ‘아, 내 책임이구나.’ “하나님, 우리 전체의 문제입니다.” 그러면 반드시 풀어질 길이 열립니다. 다같이 가야 됩니다. 다 사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누구는 잘라내고 누구는 좇아내고. 그런 마음 가지면 계속 마귀에게 속는 것입니다. 영적 분별을 못하니까 제대로 판단을 못하게 되고 하나님의 마음을 읽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다른 사람에 대하여 함부로 말하면 안됩니다. ‘저 사람은 살려둘 가치가 없어.’ 로마 군인들이 죄수들을 향하여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이 아니지요? “저런 사람은 우리 교회에 안나오면 좋겠어.” 이렇게 하면 하나님을 너무나 마음 아프게 하는 것입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런 기준으로 대하셨다면 구원받을 자가 누가 있겠습니까?
야곱이 죽기 전에 열두 아들에게 축복하였는데, 유다는 유난히 큰 복을 받았습니다. 창세기 49장 8절을 보면 너는 형제들의 찬송이 되며 네 아비의 아들들이 네 앞에 절하리로다 했습니다. 물질적인 풍요와 번영만 아니라 왕권과 메시아가 그 후손에서 날 것이라는 엄청난 복을 주셨습니다. 이 때부터 성경은 유다의 후손 중심으로 전개됩니다.하나님께서 무엇 때문에 유다에게 이렇게 복을 주신 것일까요? 하나님의 마음에 가장 합했기 때문입니다.
유다는 다른 형제와 다른 점이 있었습니다. 유다는 하여튼 할 수 있는대로 다른 사람을 살려주려고 했던 사람이었습니다. 다른 사람의 허물을 자기가 품고 나가는 것입니다. 유다는 요셉을 죽음에서 구해줍니다. 요셉이 형들로부터 시기를 받아서 죽을 위기에 빠졌습니다. 그때 유다가 “우리 죽이지 말자. 죽이지 말고 저 미디안 상인에게 팔면 우리가 돈이라도 받을 수 있잖아.” 유다는 요셉을 어떻든지 살리고 싶었습니다. 첫째 아들 며느리 다말이 첫째 아들도 죽고 둘째 아들도 죽자 셋째 아들에게 시집을 보내줘야 되는데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다말이 자식을 낳아서 가문을 잇고는 싶은데 시아버지인 유다가 도무지 자신을 셋째 아들에게 시집을 안보내니 창녀로 변장을 해서 시아버지와 관계를 맺는 어처구니 없는 일을 저지릅니다. 며느리 다말이 아기를 갖게 되었을 때, 며느리를 간음했다고 그냥 죽여버릴 수도 있는 일인데, 그 충격적이고 부끄러운 일을 감추려고 하지 않고 자기 잘못이라고 말하고 다말이 자기보다 옳다고 하며 다말을 죽음에서 건져줍니다. 애굽에 곡식을 사러 가서 베냐민이 도둑 누명을 쓰고 붙잡히게 되었을 때, 유다는 베냐민이 돌아가지 않으면 우리 아버지는 죽습니다. 그러니 자기가 대신 종이 되겠다고 나섰습니다. 그렇습니다. 다른 사람을 살려낼 수 있다면 기꺼이 자기를 희생하려고 했던 것이 하나님의 눈이 들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정복 전쟁을 할 때, 맨 앞장 선 지파가 유다 지파입니다. 그 당시 전쟁만 나면 유다 지파가 맨 앞에서 희생을 했는데 신기하게도 나중에 인구 조사를 해보면 유다 지파의 수가 제일 많습니다. 하나님이 유다 지파에게 큰 복을 내리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우리도 똑같이 살면 됩니다. 교회 공동체가 위기를 만났을 때 명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이기적인 마음으로 자기만 살려고 하면 하나님의 복은 없습니다.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정죄하지 말아야 합니다. 할 수 있는대로 살려주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말할 수 없는 복이 임합니다.
어느 목사님께 88 되신 어머님이 계셨는데 하루는“어머니, 이제 돌아가실 때도 되셨잖아요.”했더니“그러게 말이다.”하시더랍니다. 그러나 그 후 말 수가 줄어드셨답니다. 마음에 서운하셨나 하는 생각이 드신답니다. 교인 중에 늘“목사님, 나 그만 살고 죽도록 기도해 주세요.”하시던 연세 많으신 권사님이 계셨답니다. 하루는 심방을 갔는데 “아이구 바쁘신데 우리 집에는 심방 안 오셔도 되는데 오셨군요.” 하더랍니다. 마음에도 없는 말이지요. 그래서 목사님께서“권사님 빨리 죽게 해달라고 기도하러 왔지요.” 했답니다. 농담이었는데, 그 다음부터 목사님과 말을 하지 않으신답니다.
농담, 정말 조심해야 합니다. 농담조차 남을 죽이는 농담을 하지 말고 살려주는 농담을 해야 합니다. 우리가 농담한다고 너무 사람들을 깍아내리고 또는 죽이는 농담을 합니다. 정말 조심할 일입니다.
'죽은 시인의 사회'라는 영화에 보면 닐이라는 학생이 나옵니다. 미국 아이비리그 대학만 진학시켜온 명문 고등학교에서 자신이 진정으로 하고 싶은 것은 바로 연극이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친구들에게“내 인생 처음으로 내가 뭘 원하는지 알아냈다!”고 소리쳤습니다. 그러나 닐의 아버지는 닐이 명문 대학을 나와 의사가 되길 바랐습니다. 아버지는 연극을 하는 닐을 군사학교로 전학시키기로 결정합니다. 그날 밤, 닐은 부모가 모두 잠든 사이에 아버지 책상 서랍에서 권총을 꺼내들었습니다. 총소리를 듣고 달려온 아버지가 죽은 아들을 보고 통곡하였습니다. 나는 사랑한다고 했는데, 그 아이를 죽이는 일을 한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서로를 죽이고 살아갑니다.
예수님의 마음은 다른 사람들에 대하여 존중하고 배려하는 마음입니다. 마귀의 마음은 자기만 생각하고 교만하고 배타적인 마음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해서든지 예수님의 마음을 품어야 합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입니다. 살아도 같이 살고 죽어도 같이 죽는 한 몸입니다.
예쑤니은 그렇지 않으면 전체를 살려낼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우리 전체를 살리는 것입니다. 우리를 통해서. 얼마든지 그렇게 하실 수 있고 또 실제로 그렇게 하셨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눈에는 환락가만 찾아다니는 선원들이나 생명을 아무렇지도 않게 여기는 로마 군인들이나 말할 수 없는 죄질이 나쁜 죄수나 다 사랑하십니다. 그들을 다 구원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마음을 품어야 그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그 절박한 상황에서 성찬식을 했던 것입니다.
(35절) 떡을 가져다가 모든 사람 앞에서 하나님께 축사하고 떼어 먹기를 시작하매
성찬이 무엇입니까? 예수님과 우리가 하나 됨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귀로 듣는 것만이 아니라 손으로 만지고 입 안에 넣으며 목 안으로 넘깁니다. 참으로 우리의 부족한 믿음을 돕기 위하여 주님이 세우신 제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지시기에 앞서 그의 제자들에게 이 성찬을 베푸셨습니다. 왜 하셨을까요? 제자들은 이제 예수님을 떠날 것입니다. 심지어 예수님을 부인하고 저주하기 까지 할 것입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은 완전히 분리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의 관계에 큰 위기가 닥쳐올 것입니다. 이 때 예수님께서 놀라운 일을 행하셨습니다. 제자들의 몸 속에 미리 예수님 당신의 살과 피를 섞어 두신 것입니다.
제자들이 배반하고 도망가고 부인해도 예수님은 그들을 결코 버리지 않으시고 떠나지 않으시겠다는 분명한 약속을 미리 해놓으신 것입니다.
성찬을 받는 모든 이들이 이런 은혜를 받는 것입니다. 떡이 우리 몸에 들어와 우리 몸과 하나가 된 것 같이, 예수님과 우리는 도저히 분리시킬 수 없이 하나가 되었다는 약속, 그래서 어떤 잘못을 하였을지라도, 나는 너를 모른다고 하지 않으시겠다는 예수님의 약속입니다.
예수님과 우리가 이처럼 한 몸이기에 주님이 죽으심으로 우리 죄가 사함을 받은 것입니다. 주님과 우리가 하나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주님이 십자가에 죽으신 것을 우리가 죽은 것으로 여기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주님과 함께 죽었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 때 주님과 우리가 하나 되어 부활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셨듯이 우리도 예수님의 생명으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이 사랑이 집 떠나는 탕자를 받아준 것입니다.
간음하다 붙잡혀 온 여인도 받아 주었습니다.
손가락질 받던 세리도 받아 주었습니다. 예수님과 다 한 몸이 되었기 때문에 구원받을 길이 열렸던 것입니다.
제가 군목 훈련 중 부상 당했을 때, 저는 회심을 체험하였습니다. 진정으로 죄를 회개하며 예수님을 영접하였고 하나님의 종으로 나를 드렸습니다. 그 날의 영적 감격은 정말 뜨거웠습니다.
그런데 그 은혜가 그리 오래 지속되지 못하였습니다. 얼마 못 가 제 심령은 다시 무디어지고 죄는 다시 나를 넘어뜨렸습니다. 구원의 감격에 눈물 흘리고 회개하고 하나님 뜻대로 살고 싶었는데 이게 무슨 일입니까? 저는 너무 당황하고 안타까왔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습니다. 그 때 은혜를 회복하게 해 준 것이 성찬식이었습니다.
그전까지 성찬은 제게 형식적인 의식이었을 뿐입니다. 아무런 은혜도 감동도 감격도 없었습니다. 예문에 의하여 참회의 기도가 있었지만, 진정한 참회의 기도를 드려 본 기억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 날은 달랐습니다. 성찬 중에 부족하고 죄 많은 나에게 ‘어떤 일이 있어도 나는 너를 결코 버리지 않겠다! 너와 나는 한 몸이다!’주님의 음성이 들리는데, 성찬을 받으려고 가기 전부터 쏟아지는 눈물을 가눌 길이 없었습니다.
저는 그 이후 성찬을 대하거나, 집례할 때마다 그 때의 감격을 느낍니다.
그러나 성도 여러분, 이 성찬식은 주님과 하나될 뿐 아니라 성찬을 받은 이들도 서로 하나됨을 확인시켜주는 의식입니다. 우리는 한 떡에 참여한 것입니다. 내가 주님과 하나가 되었다면 다른 사람도 주님과 하나가 된 것입니다. 우리는 한 성찬을 받은 사람입니다. 성찬은 우리를 하나 되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것을 잊으면 안됩니다. 우리 서로 서로는 잘하고 못하고를 다 나누어 갖는 것입니다.
같이 성찬을 받고도 여전히 남남인 이들이 있습니다. 하나라고 느껴지지 않거나 하나가 되기 싫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왜 이래?” 그 말은 자신과 교회가 하나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다른 교인에게 “나는 너와 달라!” 하면 이것은 성찬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찬을 사실은 모욕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성찬의 은혜를 깨닫기 전에는 성찬을 받으면서도 다른 성도들에게 비판적이었습니다. 싫은 사람은 싫은 사람이고 나쁜 사람은 나쁜 사람이었습니다. 교회 현실에 대하여도 나라에 대하여도 매우 비판적이었습니다.
그러나 성찬의 은혜에 눈이 뜨인 후, 그것이 바뀌었습니다.
어느 날 성찬을 받으면서 참회 기도를 하는데, 내 마음에 도무지 용납하지 못하는 사람들에 대한 문제가 생각났습니다. 그러나 그들을 용납하고 용서하고 사랑할 마음은 없었습니다. 용서가 안되고 사랑이 안되는데 어떻게 합니까?
그런데 주님의 성찬 떡을 받아 먹는데‘나와 한 몸이 되는 것이 주님께는 얼마나 큰 고통이 될까?’하는 생각이 번뜩 들었습니다. 이것을 깨닫고 저는 울었습니다. 저는 그 동안 내가 주님과 한 몸이 되는 것만 기뻐하고 감사하였지, 주님의 고통은 생각하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그 때 다른 사람을 내 몸처럼 받아들이는 것이 고통스럽다는 생각이 사라졌습니다. "이런 사람이 다 있나?" 했던 사람이 "내가 그렇구나!" 하고 회개하게 되었습니다. 허물이 많지만 교회를 사랑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허물이 많은 우리 민족을 사랑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저는 성찬식을 통하여 문제가 많은 사람을 받아들이고, 사랑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성찬을 받고도 로마 군인들이 죄수들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들의 직책을 수행하려 했다는 점에서 문제가 없는 행동이었습니다. 그러나 성찬의 은혜를 아는 우리는 책임감 있게 일을 잘하는 데서 더 나아가야 합니다. 진정 하나님의 마음을 읽어야 합니다. 악한 자라도 끝까지 품는 마음입니다.
백부장 율리오가 죄수들을 다 살려주라, 마음껏 헤엄쳐 섬으로 가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어느 글에 캐나다 교육청 공무원인 한 교민의 이야기가 실렸습니다. 밴쿠버 시내 초등학교에 다니는 한국인 아이들끼리 다툼이 있었습니다. 한 학부모가 자기 아들과 다툰 학생을 찾아가 '같은 한국인끼리 똘똘 뭉쳐야지 그러면 쓰냐.'고 타일렀습니다. 그런데 학교 측에서 이 사실을 알고 그 학부모를 불렀습니다. '왜 한국인 학생이라고 하느냐? 우리 학교엔 한국 학생, 중국 학생, 캐나다 학생이란 건 없다. 같은 학생일 뿐이다.' 이 보고서를 읽으면서 우리에게 익숙한‘민족’‘애국심’이 남들 눈에는‘배타적’‘전체주의적’으로 비칠 수도 있겠구나 생각했습니다. 무슨 차이입니까? 예수님의 정신이 그 나라 사람들에게 어느 정도 깊이 자리잡고 있느냐 하는 차이입니다. 여러분, 우리 애국심이라는 것 조차도 예수님의 세례를 받을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이미 우리나라 사람들만 사는 세상에 살고 있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오늘 예수님의 마음을 품고 기도합시다! 가정도 교회도 끝까지 같이 가야 합니다!
여러분이 예수님의 마음을 품으면 반드시 여러분을 통해서 주님은 여러분의 가정, 교회, 여러분이 속한 공동체를 다 살려냅니다. 사도 바울을 통해서 다 살린 것처럼, 사도 바울이 성찬을 통하여 배 안에 있는 모든 이들이 예수님 안에 하나임을 선포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로마 군인들도 성찬을 받고도입니다. “죄수들은 죽여야지 뭐.”
여러분, 일을 똑부러지게 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책임감있게 똑부러지게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예수님의 은혜를 알고 성찬을 받은 성도들은 더 나아가야 됩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정말 읽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마음은 다 살리는 것입니다. 비록 그가 죄수라도 주님은 그를 살려내려고 하십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품으면 다 그렇게 됩니다.
오늘 이 시간에 기도하실텐데 여러분의 마음 깊숙한 곳까지 주님의 말씀으로 성령께서 역사하시도록 여러분의 마음을 여셔야 됩니다. 영적 분별을 하셔야 됩니다. 이것이 주님의 마음인가? 이것이 악한 영의 역사인가? 혹시 힘들고 어려울 때 ‘나라도 살아야지.’하는 이기적인 판단을 하고 계시지는 않습니까? 주님의 마음을 주십시오. 제가 다 살려내는 자가 되기 원합니다.
우리는 끝까지 다 함께 가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품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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