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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복되어야 할 도인, 이판 행13:49~52 10.07.18.설교녹취
아래 2가지가, 선교 1백주년을 넘어서(지금은 125년 경과)
선교2백주년으로 향해 나아가는, 저희 100주년 기념교회의 미래 비전이다.
◑1. 도道, 도인道人
▲말씀이 육신이 되셔서 이 땅에 오셨다.
요1장은 이렇게 막이 오른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라..’
‘요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여기에서 ‘말씀’이란, 헬라어 로고스를 우리말로 번역한 것이다.
▲그런데 과거의 성경은 로고스를 ‘도’로 번역했다.
한국 개신교 역사상 최초로 한글로 번역된 신약성경은
1887년 만주 봉천(현재의 심양)에서 출간된 <예수성교전서>이다.
당시 그 성경을 선교사 로스가 주도했다고 해서 <로스역 성경>이라고도 불린다.
그 <예수성교전서>는
위 요1장 첫머리를 이렇게 번역하고 있다.
요즘 철자법으로 바꾸어 읽어보면 다음과 같다.
‘처음에 도道가 있되, 도가 하나님과 함께 하니, 도는 곧 하나님이라.
이 도가 처음에 하나님과 함께 하매, 만물이 말미암아 다 지었으니
지은 바는 하나도 말미암지 않고 지음이 없느니라...’
우리가 현재 사용하고 있는 한글성경은,
헬라어 로고스를 ‘말씀’이라고 번역하는데 비해서,
123년 전에 번역된 한글성경은, 로고스를 ‘도道’ 즉 ‘삶의 길’이라고 번역했다.
태초부터 하나님은 생명의 도 되시고, 그 도가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그 도를 구체적으로 인간들에게 보여주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말씀’보다는 ‘도’라는 번역이 더 좋다.
제/설교자는, 헬라어 로고스를, 현재 우리가 통용하는 ‘말씀’ 보다는,
‘도’라는 단어에서 더 깊은 통찰력을 얻는다.
그 이유는, ‘말씀’이라는 단어는, 우리에게 대단히 친숙하지만
그러나 이 단어는 어떤 차별성이 없다.
나보다 연장자거나, 나보다 직책이 높은 사람의 말은, 다 내게 ‘말씀’이 된다.
내가 아무리 보잘것없는 인간이라도, 심지어 내 말도 내 자식에게는 ‘말씀’이 된다.
이처럼 ‘말씀’에는 차별성이 없다.
그러나 ‘도’라는 단어는, 아무에게나, 아무렇게나 사용하는 단어가 아니다.
‘도’는 철저하게 구별된 단어이다.
‘도’라는 단어 자체가, 이 세상 그 누구가 강요하거나 요청하지 않더라도,
도라는 말 앞에서 사람들이 흐트러진 자세를 정돈하는 것은,
오랜 세월동안 바른 도를 추구해왔던, 우리 선조들의 문화 때문이다.
▲크리스천은 ‘도’를 믿고 따르는 ‘구도자’
하나님이 ‘도’시오,
그 ‘도’가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믿는다면,
크리스천은, 구도자요, 도인일 수밖에 없다.
어느 길이 바른 길인지 알지 못해서,
길목마다 기웃거리고 서성거리는 세속적 의미에서 향방 없는 '구도자'가 아니라,
태초부터 계셨던 생명의 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우리에게 분명히 보여주셨던 그 도를,
흔들림 없이 좇는 진정한 의미의 구도자求道者, 도인道人이 바로 원래적 의미의 크리스천인 것이다.
▲도인道人은, 자연히 삶을 수반한다.
크리스천이, 하나님의 도를 좇는 도인이라는 사실을 깨달으면,
크리스천인 우리는 숙연함을 느낌과 동시에, 말할 수없는 소망을 품게 된다.
우리의 삶이 수반되지 않으면, 도인이 될 수 없기에,
우리에게는 도인이 될 자격이나 능력이 전혀 없음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나를 그 도로 인도해 내셨기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 분을 힘입기만 하면, 우리 역시 도인으로 살 수 있다.
도이신 하나님께서, 도인으로 사는 우리를 통해, 친히 역사하실 것이기에,
보잘 것 없는 우리 역시, 도인으로 사는 소망을 품게 되는 것이다.
▲본문 설명 주1)
◑1'. 이판 과 사판
▲이판 사판이라는 말이 있다.
어떤 일이, 뒤죽박죽으로 뒤엉킨 상태거나,
아니면 막다른데 이르기까지 서로 뒤엉켜 싸우는 형국을 나타내는 말이다.
그러나 이판사판이라는 말은, 본래 불교의 이판승과 사판승을 일컫는 용어다.
사판승은 요즘 말로 설명하면, 사찰의 모든 살림을 감당하는 '행정승려'를 의미하고,
이판승은 오직 수도에만 정진하는 '수도승려'을 일컫는다.
세상에서 간혹 불교가 썩었다고 말을 할 때,
바로 불교의 사판승들이 썩었다는 의미이다.
불교의 이권 다툼으로 싸우는 승려들은, 대부분이 사판승 들이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사판승들이 아무리 진흙탕 싸움을 벌여도
불교가 건재할 수 있는 것은, 불교에는 이판승들이 있기 때문이다.
깊은 산속에서, 산을 떠나지 않고,
일평생 불교의 정신을 구현하는 이판승들이 늘 있어 왔다.
이미 입적한 성철 스님이나, 법정 스님같은 이판승들은
불교도들은 말할 것도 없고, 온 국민으로부터 존경과 추앙을 받아왔다.
그와 같은 이판승들이 있기에,
세상에서 벌어지는 사판승들의 온갖 추태와 허물에도 불구하고,
불교의 정신은 굳게 지켜지고 있는 것이다.
▲설교자의 개인적 의견으로, 가톨릭교회에도, 이판과 사판이 있다고 본다.
겉으로 드러난 가톨릭교회를 행정적으로 사목하는 직제상의 신부는
다 불교에서 말하는 사판에 가깝기 쉽다. 안 그런 분도 계시겠지만.
가톨릭교회의 이판들은 수도원의 수도사들이다.
역사상 가톨릭교회의 수도원도 부패했던 적도 물론 있었다.
그러나 역사의 큰 흐름에서 볼 때,
가톨릭의 이판들이, 이판의 자리를 굳게 지켰기에
베드로 성당을 건축하기 위해서 면죄부를 판매하는 것처럼
가톨릭의 사판들이 심각하게 부패해도,
가톨릭의 이판들에 의해, 가톨릭의 본질은 오늘까지 지켜질 수 있었던 것이다.
▲이판의 특성 - 침묵
가톨릭의 수도사나 불교의 수도승이나
그 이판들 속에서는 공통점이 있다.
그 이판들에게는, 침묵수행이 필수적이다.
그 이판들은, 진리는 반드시 침묵이라는 그릇 속에만 담겨짐을 아는 것이다.
불교의 수도승이나, 가톨릭의 수도사들이
오직 수도에만 정진한다고 해서, 자신들의 경전을 소홀히 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가톨릭의 수도사들, 불교의 수도승들은,
그들의 경전인 성경과 불경을 누구보다도 열심히 읽는다.
그들은, 경전은 읽는 것만으로는 부족하고,
자신들이 읽은 경전의 내용을
침묵의 과정을 통해서, 자신들의 마음 판에 새시고, 또한 몸으로 실천한다.
그 침묵의 과정을 통해서, 가톨릭의 수도사로, 불교의 수도승으로
그들의 종교가 요구하는 이판으로 성숙해 가는 것이다.
이처럼 모든 종교에서, ‘이판’과 ‘침묵’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침묵을 거치지 않고는, 이판이 될 수 있는 길이 없다.
▲안타까운 것은, 16세기 초 종교개혁 당시에, 개신교회에서 이판들이 없어져 버렸다는 것이다.
그래서 지금까지 개신교회는 사판들만 (이를테면 판치고) 있다.
개신교회에는 영혼의 샘물을 공급해 주어야 할 이판,
즉 수도원이나, 수도사가 거의 없는 실정이다.
왜 종교개혁자들이, 분명히 존재하고 있는 이판을 없애버렸는지 밝혀주는 문헌은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그래서 저/설교자는, 좋게 해석하고 있다.
종교개혁자는, 이판과 사판을 칼로 무를 자르듯이 분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두 가지 면이 크리스천의 삶 속에서 한데 어우러져 있는 것으로 받아들였다고 말이다.
그러나 종교개혁 이후, 개신교회가 지난 5백년동안 철저하게 이판을 도외시한 결과,
전 세계 어느 곳을 가든지, 개신교인들은,
인간의 말과 소리와 소음만을 발하는 영적 경박성에서 탈피하지 못하고 있다.
주님의 은혜로, 교인은 되었지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힘입어 하나님의 도를 좇는
도인으로 살려하지는 않는 것이다.
▲이판성 회복이 절실히다.
그러므로 한국 교회의 미래를 위해서, 지금 필요한 것은
개신교회에서 없어져버린 이판을 회복하는 것이다.
위 ◑1.의 표현으로 하면, ‘도인道人’을 양성하는 것이다.
개신교인 개개인으로 하여금
침묵의 과정을 거쳐서 이판성을 회복하는 도인이 되도록 돕는 것이다.
그 구체적인 방안의 하나로,
침묵의 수도원 운동을 생각할 수도 있다.
그동안 한국교회는, 여러 곳에 기도원들과 수련관을 세웠다.
그러나 개신교회의 기도원과 수련관은,
하나님을 향해 인간이, 자기 소리를 발하기 위한 곳이지,
인간이 입을 다물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 침묵하기 위한 공간은 아니었다.
인간이 하나님을 향해 자기 소리를 발하는 것도 필요하다.
인간이 하나님을 향해 자기 소리를 발하는 것으로부터, 하나님과의 관계가 시작된다.
그러나 인간이 하나님을 향해 자기 소리만 발하면서, 침묵하고 하늘 음성을 듣지 않으면,
인간의 소리를 발하면 발할수록, 인간의 영성은 엷어지게 된다.
인간의 영성의 깊이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
하나님 앞에서 침묵하는 시간의 길이와 정비례한다.
그러므로 침묵의 수도원 운동을 통해서
누구든지 하루든, 이틀이든, 열흘이든, 한 달이든, 혹은 일 년이든
자신이 원하는 기간만큼, 침묵의 훈련을 거쳐서
이판성을 지닌 도인들이 늘어날 때
도 되신 하나님께서는, 그 도인들을 통해서
한국교회와 이 시대를 새롭게 하실 것이다.
(이렇게 이판과 사판이 조화를 이루어야 하겠다.)
◑2. 전도인의 양성 *전도인 : 자신이 먼저 도인이 되어, 자기 삶으로 도를 전하는 사람
침묵의 수도원 운동과 더불어 선교2백년을 향한 우리 교회의 또 다른 비전은
다시 말해서, 보다 성숙한 한국교회의 미래를 위해서 다져야 할 또 하나의 초석은,
전도인을 양성하는 것이다.
▲선교사는 많지만, (전)도인은 부족한 실정
2010년 1월 현재, 한국교회가 전 세계에 파송한 선교사의 숫자는
아시아 34개국에 1만2천여 명, 유럽 40개국에 2천 여 명
아메리카 대륙 25개국 3천여 명, 아프리카 중동 58개국에 2천여 명
남태평양 11개국에 7백여 명, 기타 1천6백 명 등
총 169개국에 1만2천여 명으로 나타나있다.
그래서 한국은, 미국에 이어, 세계에서 선교사를 가장 많이 파송한 선교대국이다.
그러나 미국 크리스천들의 숫자와 한국 크리스천들의 숫자를 비교하면,
한국은 크리스천 한 명당, 세계에서 가장 많은 선교사를 파송한 선교 1위국이 된다.
그래서 한국교회는, 이 숫자를 자랑하고 있고, 큰 자부심을 갖고 있다.
그러나 선교의 내용과 질이, 이 화려한 외적 숫자와 걸맞는 것은 아니다.
물론 선교지에서 훌륭하게 선교를 감당하는 헌신된 선교사도 많지만,
선교사역을 잘 감당하지 못하거나, 선교지에서 도리어 짐이 되는 선교사들도 매우 많다.
5대양 6대주에 문제 없는 선교지가 없는 실정이다.
거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가장 큰 이유는,
개신교인들은, 선교를 가벼이 여기는 경향 때문이다.
제 개인적으로는 선교라는 한글 용어는, 성경에 적합한 용어가 아니라고 본다.
왜냐하면 선교宣敎는 포교, 즉 자신의 종교를 퍼트리는 것을 의미한다. (베풀 선)
(참고로, 영어 mission은 라틴어 '보낸다 mitto'에서 온 말.)
그러므로 기독교 선교 하면, (자신의 삶은 없이) 기독교의 제도나 형식,
혹은 기독교의 교리를 퍼트리는 것으로 생각하기 쉽다. 선교라는 말 자체가.
그 퍼트리는 사람이, 선교지에서 어떤 삶을 사느냐에 상관없이
그것을 마치 사업 확장 하듯이 넓게 퍼트리기만 하면, 유명한 선교사인 것처럼 간주될 수도 있다.
▲그러나 선교는 - 도인의 삶을 살면서, 도를 전하는 전도인이 되어야!
그러나 크리스천이 전해야 할 것은,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종교적 제도나 형식이 아니다. 어떤 딱딱한 교리가 아니다.
그것은 태초부터 계셨던 하나님의 생명의 도(로고스),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우리에게 보여주신 도를 전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도를 전하는 사람은, 선교사가 아니라 전-도인이 되어야 한다.
자기 자신이 먼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 도를 좇는 도인이 된 다음에야,
그 도를 자기 삶으로 전하는 전-도인이 되는 것이다.
오늘날 크리스천들은 사도바울을 가리켜 선교사라고 부른다.
그러나 엄밀한 의미에서 사도바울은, 선교사가 아니었다.
사도바울은 단 한 번도,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교를 전하려 한 적이 없다.
성경을 보면, 사도바울은 목숨을 걸고 지중해 세계를 누비고 다니면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그 생명의 ‘도’, 사랑의 ‘도’
진리의 ‘도’를 전하기 위해, 자신의 삶을 던졌다.
그는 선교사가 아니라, '전-도인'이었다. 몸소 도인의 삶을 보여주고, 전한 것이다.
▲선교 2백주년으로 가는 길목에서, 우리가 정비해야 할 비전
그러므로 선교2백년을 향한 비전을 바라볼 때
보다 나은 한국교회의 미래를 위해서
이 시점에 필요한 것은,
지구 반대편 어디에서도,
자신이 먼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도를 좇는 도인이 될뿐 아니라,
그 도를 자신의 삶으로 전하는 전도인 선교사를 양성하는 일이다.
만약에 그 일에, 한국교회가 힘을 기울이지 않는다면,
한국교회는 선교사 몇 명을 파송했다는 허황된 숫자놀음에서 탈피하기 어려울 것이고,
사판들로만 가득 차 있는 한국교회는, 세상을 새롭게 하는 사도행전적 교회가 되기도 어려울 것이다.
▲바울이 선교한 비시디아 안디옥의 사람들은 기쁨과 성령이 충만했다.
49 주의 말씀이 그 지방에 두루 퍼지니라
50 이에 유대인들이 경건한 귀부인들과 그 성내 유력자들을 선동하여
바울과 바나바를 핍박케 하여 그 지경에서 쫓아내니...
52 (비시디아 안디옥의) 제자들은 기쁨과 성령이 충만하니라. 행13:49~52
바울이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쫓겨나지만,
자신이 그곳에 있었음으로 인하여, 그곳의 수많은 사람들이
기쁨과 성령이 충만한 삶을 살게 되었음을 보면서,
비시디아 안디옥을 떠나는 사도바울의 마음 역시
기쁨으로 새처럼 날아올랐을 것이다.
그러므로 비시디아 안디옥의 크리스천들이
기쁨과 성령이 충만한 삶을 살았다는 위 본문 52절의 증언은
그곳을 선교한 바울이 먼저, 기쁨과 성령이 충만한 삶을 살았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바울은 약 16년 동안, 도인의 길을 먼저 닦았다.
바울은 원래 교회를 짓밟던 폭도였다.
그러나 그가 도인이 된 것은, 그의 다메섹 길에서 회심 이후
최소한 16년에 걸친, 침묵의 이판 과정을 거쳐서
주님의 도를 좇는 도인이 되었고,
그 도를 자신의 삶으로 전하는 전도인이 되었기 때문이다.
▲마치는 말
여러분, 우리는 성경을 읽기만 하는 독서인이 되어서는 안 된다.
내가 읽은 성경 말씀을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음성을 듣기 위하여
이 시대를 위한 하나님의 뜻을 분변하기 위하여
입을 다물고, 하나님 앞에 귀 기울일 줄 아는, 침묵의 이판들이 되자.
하나님의 일을 하려하기 이전에
먼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도를 좇아 사는 도인이 되고,
그 하나님의 도를 우리 자신의 삶으로 전하는 전도인들이 되자.
(*전도인: 자기가 먼저 도인이 되고, 자기 삶으로 도를 전하는 사람)
▲기도
도이신 주님은 이 땅에 오셔서, 친히 삶으로써 그 도를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로, 그 도에 이르는 통로가 되어주셨습니다.
누구든지 예수 안에 있기만 하면, 그 도를 좇는 도인이 되도록
친히 인도해주시는 구원자가 되심을 믿습니다.
하지만 도인이 되려하기 보다는, 예수님의 능력을 이용만 하는 이용꾼으로 살아왔습니다.
그래서 매주일 교회를 다니지만, 나의 삶속에서는 말할 것도 없고,
나로 인해 그 누구의 삶 속에서도 생명의 역사가 일어나지는 못했습니다.
나의 무지와 허물을 회개하오니 용서해 주십시오.
이제 우리 모두 하나님의 말씀을 읽기만 하는 독서인이 아니라,
그 말씀을 통해, 말씀하신 하나님의 음성에 귀기울이는 침묵의 이판들이 되게 도와주소서.
하나님의 일을 하기 이전에, 먼저 주님 안에서 생명의 도를 좇는 도인이 되고,
그 도를 우리의 삶으로 전하는 전도인이 되게 도와주소서.
우리 모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부여하신 사명, 한국교회의 미래를 위해,
한 사람이라도 더 많은 도인이 나오게끔, 충성을 다하는.. 이 시대의 사도바울이 되게 도와주소서.
앞으로 한국 교계에 이판들이 많이 나오게 하소서... 아멘.
▲'전도인 선교사'의 실제 사례 "남겨진 미망인 믿음의 영웅들" 2372
............................................ 더 읽으실 분 ........................................
주1) 본문 설명
버가에서 풍토병에 걸린 사도바울은,
목숨을 걸고 험산준령의 타우루스 산맥을 넘어 비시디아 안디옥으로 갔다.
바울은 그곳에 있는 유대인 회당을 찾아가서,
여전히 병약한 몸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다.
그러나 사도바울을 시기한 비시디아 안디옥의 유대교 지도자 무리의 방해로,
사도바울은 단 한 주만에, 더 이상 회당에서 설교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사도바울은 비시디아 안디옥을 떠나지 않고,
회당 밖에서 만나는 사람들에게 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 결과,
비시디아 안디옥 전역에 생명의 말씀이 스며들기 시작했다.
그러나 유대교지도자 무리는, 그와 같은 바울을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았다.
그들은 그 도시의 귀부인들과 유력자들을 선동해서,
그들로 하여금, 바울과 바나바를 박해하게 하여,
아예 두 사람을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쫓아내어버리고 말았다.
그래서 바울이 그렇게 쫓겨남으로 인해서, 풍토병에 걸린 병약한 몸으로,
그 먼 비시디아 안디옥까지 애써 찾아갔던 바울의 모든 노력이, 물거품으로 돌아가고 마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것이 결코 아니었다.
행13:52절을 보면, ‘제자들은 기쁨과 성령이 충만하니라.’
비록 사도바울은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쫓겨났지만,
사도바울로부터 복음을 전해 받은 그 도시의 수많은 사람들은,
사도바울이 그 도시를 떠난 뒤에도, 기쁨과 성령이 충만한 삶을 살게 되었다.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할 수 있었을까?
그것이 가능할 수 있었던 것은, 진리를 짓밟던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힘입어 하나님의 도를 좇는 도인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자도바울이 먼저 기쁨과 성령이 충만하니까,
그가 전한 복음을 들은 사람들 역시, 기쁨과 성령이 충만했던 것이다.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 부인과 자기희생을 통해서 하나님의 도를 좇는 도인이 되었을 때,
도 되신 하나님께서, 도인이 된 사도바울을 통해, 친히 역사하신 결과였다.
그래서 한 사람의 크리스천이 교인이 아니라,
하나님의 도를 좇는 도인됨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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