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감사하다! (골 3:15-17)
감사절을 앞두고 감사절을 바로 지키자는 주제로 설교를 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걱정이 됩니다. 여러분이 내용이 너무 뻔하다가고 여길 것 같고 ‘또 감사 헌금을 많이 내라는 말이겠지.’ 하고 속단할 것 같기 때문입니다. 충분히 그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분별해야 합니다. 모든 생각이 여러분의 생각이 아니고 심지어는 마귀가 주는 생각도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잠언 4장 23절에서 “무릇 지킬만한 것 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 했습니다. 내 생각이 성령으로부터 온 것일까, 마귀로부터 온 것일까? 잘 분별해야 합니다. 우리 생명이 살고 죽는 문제가 달려있기 때문입니다. 감사절이 왔을 때 여러분 마음이 굳어지는 것이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각일까 분별해 보면 깜짝 놀라게 됩니다.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이지?’ 여러분의 생각이라고 속으시면 안됩니다. 예수님은 여러분 안에 와계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무엇이라고 하실까 꼭 들어보아야 합니다.
빌립보서 2장 5절에서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하였습니다. 우리가 살 일은 항상 주님의 마음을 품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예수님의 마음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품느냐 안 품느냐 하는 것이 굉장히 중요한 차이를 가져옵니다. 예수님께서 ‘너 그래도 감사해!’라고 말씀하셔도 내가 그 말씀을 안 품으면 하나님이 주시는 복된 삶을 살지 못합니다.
감사절을 맞아 주님은 무엇이라고 하실까요? 당연히 “힘을 다하여 감사하라.”고 하십니다. ‘솔직히 부담스러운데, 어려운 일이 많은데! 감사할 형편이 못되는데!’ 하는 생각이 들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너는 감사절을 지키지 않아도 된다.” 하시는 분이 계시면 제게 연락주시기 바랍니다. 반드시 “그래도 감사하라.” 하실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여러분 안에서 이번 감사절을 계기로 여러분 인생 전체를 새롭게 하시고 복주시려고 하십니다.
본문 15절에도 보면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하시고는 “너희는 평강을 위하여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나니, 너희는 또한 감사하는 자가 되라”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우리 마음을 이끌게 되면 우리는 반드시 하나가 되고, 또 감사하는 사람이 된다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늘 감사하는 분이셨습니다. 복음서에 보면 도무지 감사할 수 없을 때에도 예수님은 놀랍게 감사하셨습니다.
요한복음 6장 11절에 보면 5천 명이 넘는 무리들 앞에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시고 하나님께 감사하며 기도하셨습니다. 여러분, 실제 상황이라고 생각해 보십시오. 5천명이 넘게 밥을 먹어야 되는데 김밥 한줄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감사 기도가 나옵니까? 통곡이 나옵니까? 정상적인 상황에서는 통곡이 나와야 합니다. 걱정 충만한 것입니다. 김밥 한줄로 5천 명이 넘는 사람이 어떻게 다 먹습니까? 그러나 예수님께서 감사 기도를 드리시고 오병이어의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요한복음 11장 41절에 보면 나사로가 죽어 나흘이 지나 썩은 냄새가 나는 무덤 앞에서 하나님께 감사 기도를 드리셨습니다.
마태복음 11장 25절에 보면 수많은 병자를 고치고 귀신들린 자를 깨끗하게 한 마을 사람들이 오히려 회개하지 않는 것을 보실 때, 하나님께 오히려 감사기도를 드리셨습니다.
누가복음 22장 17절, 19절에 보면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기 전날 밤에 제자들과 만찬을 나누면서 자기를 버리고 부인할 제자들에게 떡과 포도주를 주시면서 하나님께 감사 기도를 드리셨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도무지 감사할 수 없는 상황에서도 계속 감사 기도를 하나님께 드렸다는 것입니다.
그 예수님께서 우리 안에 와 계십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예수님, 어떻게 해야 될까요? 너무 힘들고 어려워요. 이번에는 감사절 도무지 지킬 수가 없을 것 같아요. 감사 헌금은 고사하고 먹고 살기도 힘들어요.” 이럴 때 예수님께서 “그래도 감사하라!” 말씀하시는 것이 당연합니다.
지금도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주님은 “그래도 감사하라.” 하십니다.
오늘 본문 말씀 16절, 17절을 보면 우리가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 보면 주님은 계속하여 감사하라! 감사하라! 고 말씀하신다고 하였습니다.
16-17절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
그러므로 우리가 정말 예수님을 모시고 사느냐는 것은 “그래도 감사하는 것”을 보고 알 수 있습니다. 지난 세월이 힘들고, 어렵고, 눈물 나는 일이 있었어도 감사하는 사람이 구원 받은 사람입니다. 지금 현재 살아가는 순간순간이 힘들고 어려워도 감사하는 사람이 구원 받은 사람입니다. 예수님이 그 마음을 주장하고 계신 사람입니다.
살전 5:18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우리가 정말 예수님 안에 있다면 반드시 모든 일에 감사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내 주님이시라는 증거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감사절을 지키게 하시는 것은 우리의 감사 생활에 문제가 많기 때문입니다. 이런 절기까지 주시면서 감사를 가르쳐야 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어려워도 고통스러워도 감사하라.” 하시지만, 우리는 좋은 일이 있어도 은혜를 받아도 감사하지 않습니다.
힘들어서 감사하기 어렵다고 생각하지만, 좋은 일이 생기면 당연히 감사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감사는 ‘내가 받은 것을 받았다고 말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떤 좋은 것을 받고도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는 것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목사님, 받은 것이 없어서 그렇지, 하나님이 제게 좋은 것, 복을 주시면 왜 감사를 안하겠어요?”하실 분이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 말은 여러분 자신도 모르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실제로 받은 것이 많아도 너무 크고 귀한 은혜를 받아도 우리는 감사를 정말 못합니다.
여러분 모두는 다 구원을 받으셨습니다. 그런데 받은 구원을 얼마나 감사하십니까? 솔직히 무덤덤하지는 않습니까? 어떤 교인이 “예수를 믿었지만 복은 별로 받은 것이 없습니다.”하는 기가 막힌 말을 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솔직히 이 말이 더 설득력있게 들리지 않습니까?
존뉴튼 목사님은 자신의 묘비에 다음의 글귀를 적어달라고 유언했습니다.
“한 때 이교도였으며 탕자였고 아프리카 노예상이었던 존뉴튼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풍성하신 긍휼로 말미암아 용서받고 크게 변화되어 마침내 성직자가 되었으며 자신이 그토록 오랫동안 부인했던 바로 그 믿음을 전파하며 버킹검에서 16년 간, 올니교회에서 27년 간을 섬겼다." 그는 평생 구원받은 은혜에 감격하며 살았습니다.
여러분도 존뉴튼 목사님처럼 평생 구원받았다는 감격으로 살고 계십니까? 한번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구원을 여러분에게 주시지 않을 수 있으셨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주변을 돌아보십시오. 구원받지 못하고 죽어가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나보다 훨씬 뛰어난데 예수 믿지 못하고 구원받지 못하고 죽어간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데 왠 일인지 무슨 까닭인지 저와 여러분은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놀랍고 감격스러운 일입니까?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내 공로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멸망 당하는 사람과 비교하여 우리가 무엇이 잘한 것이 있습니까? 정말 은혜로 구원받은 것입니다. 왜 하나님이 나는 택해주셨고 저 사람은 그냥 죽게 하셨는지 모릅니다. 정말 생각하면 평생 감격스러운 일입니다.
그런데 그 감격이 벌써 다 식어져 버렸습니다. 이런 일 저런 일 때문에 마음에 불평과 낙심과 좌절이 있다면 하나님이 정말 좋은 것 주시면 감사하는 것 맞습니까? 세상에 구원 보다 더 놀라운 큰 복이 어디 있습니까? 그런 복을 받고도 감사와 감격은 다 식어져버렸지 않습니까?
문제는 이런 감격이 없다는 것입니다. 돈 백만 원이 공짜로 생긴 것 보다 기쁘지가 않습니다. 백만원 공짜로 생긴 사람은 지금 얼굴에 표시가 날 것입니다.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지옥 갈 자가 구원받은 이런 은혜는 처음 예수 믿을 때 감격으로 끝나고, 지금은 그냥 짜증만 나!” 이런 분들은 상상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지만, 감사는 못하는 사람입니다. 은혜를 모르는 사람입니다.
은혜가 주어져도 감사가 없으면 은혜가 은혜가 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은혜 받았습니다.” “은혜 받았습니다.” 하며 살고 있습니다. 말씀 들을 때, 간증들을 때, 찬양들을 때, 다른 사람의 신앙 생활을 보면서 “은혜 받았습니다.” 수도 없이 말했습니다. 그런데 그 많은 은혜가 기억이 나십니까? 어떤 은혜를 누구로부터 언제 받았는지 기억이 나십니까? 그래서 은혜는 많이 받았지만 믿음이 자라지 않고 삶은 변화되지 않는 것입니다.
사람에게 어떤 은혜를 받았다면 언제 누구에게서 무엇을 받았는지 기억나게 되어있습니다. 만날 때마다 감사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은혜도 모르는 사람일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주신 은혜에 대하여는 언제, 누구로부터, 무슨 은혜를 받았는지 기억 나지 않는다면 이상한 일입니다. 정말 받은 것이 맞습니까? 받았으면 기억되어야 합니다. 누구에게서 무슨 좋은 것을 받았다면 기억나게 마련입니다.
그런데 기억나지 않는다면 은혜 받았을 때 즉시 감사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 17장에 보면 열 명의 나환자가 고침을 받았습니다. 여러분, 나병은 지금 암보다도 더 무서운 천벌에 가까운 병입니다. 그 당시 생각으로는. 그런 나병은 고쳐지지도 않습니다. 불치병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고쳐주셨습니다. 세상에 이보다 놀라운 은혜가 어디 있겠습니까? 기가 막힌 것은 예수님께 돌아와 감사한 사람은 사마리아 사람 한 사람 뿐이었습니다. 그것도 유대인들이 사람 취급하지 않는 사마리아 사람 한 사람만 돌아와서 예수님께 감사하다고 했습니다. 다른 아홉 사람은 어디 갔겠습니까? 자기 몸이 나병이 고침 받은 것을 알고 펄쩍펄쩍 뛰면서 좋아서 집으로 갔을 것입니다. 아내도 만나고 자식도 만나고 부모님도 만나고 “내가 고침 받았습니다.” 그랬을 것입니다. 그 좋은 기분이야 충분히 이해가 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감사해야 되겠다는 생각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아홉 명은 나병에서 고침 받고도 곧 받은 은혜를 잊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아홉 명은 나병은 고침 받았지만 더 큰 문제인 죄사함을 받는 복은 받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예수님께 즉시 돌아와서 감사를 드렸던 사마리아 사람 한 사람만 나병도 고침 받았고 죄사함도 받았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내게 은혜를 주셨을 때 “하나님, 제가 이런 은혜를 받았습니다.” 하고 감사하는 것은 얼마나 놀라운 일인지 모릅니다. 은혜가 계속해서 은혜가 되는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기가 막힌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놀라운 은혜를 받고 살면서도 당연한 일인 줄 여기고 넘기는 현실이 우리 문제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엄청난 은혜를 받고도 ‘당연한 일’로 여깁니다.
여러분, 숨 쉬고 사는 것이 당연합니까? 병원에 가 보세요. 산소 호흡기에 의존해야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본인도 그렇고 주변에 있는 사람도 그렇고 숨 한번 제대로 스스로 쉬기를 얼마나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고 있는지. 오늘 숨 쉬게 해달라고 그렇게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고 매달렸지만 숨이 끊어져서 장례 치르게 된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숨 쉬는 것이 당연한 것입니까? 그러니까 감사가 안되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 얼마나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있는지를 전혀 모르는 것입니다. 은혜가 없어서 은혜를 모르는 것이 아닙니다.
일터에서 돌아온 남편, 학교에서 돌아온 자녀들이 ‘저녁 때가 됐으니 들어왔구나.’라고 생각하십니까? 아침에 집을 나갔다가 사고로 저녁에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당연한 것입니까?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은혜 속에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것입니다.
군대 가면 당연히 휴가 나오고 제대하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오늘 우리가 이 예배당에서 예배드리는데, 예배드리는 것이 발각되면 죽어야 하는 이들도 많고, 예배 드릴 건물이 없어서 고통 당하는 교회도 많습니다. 이 땅에도 예배당 짓다가 중단이 되어서 예배당이 없어서 오늘 처럼 비가 오는데 눈물로 기도하는 교인들도 많습니다. 말할 수 없는 은혜입니다.
하나님께서 오늘도 우리를 위하여 베푸시는 구체적인 은혜는 우리의 가장 든든한 후원자, 가족, 친구들이 해 주는 일을 다 합친 것 보다 몇 천배 몇 만배 많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그것을 감사하지 않고 살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감격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이것을 정말 안타깝게 여기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감사절을 주시는 이유는 우리의 감사 신앙에 문제가 있기 때문입니다. 환란이 있어도 그래도 감사하는 이 믿음은 고사하고 주신 은혜, 받은 복 조차도 감사를 제대로 못하니 말입니다.
여러분, 이번에 감사 카드를 기록해 보십시오. 그리고 앞으로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 앞에 무엇을 달라고 구하기 전에 이미 주신 은혜를 감사 기도를 먼저 드려보십시오.
이제부터 기도할 때 먼저 감사할 것부터 먼저 기도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기도해 보십시오. 생각나는 대로 해 보십시오. 얼마나 감사할 것이 많은지 깜짝 놀랄 것입니다.
여러분, 사람들 사이의 인간관계도 내가 무엇을 잘해 주었는데 찾아와서는 다짜고짜 달라고만 하는 사람 더 주고 싶은 마음 없지 않습니까? “감사합니다. 지난 번에 이렇게 해주셨지요. 지난 번에 이런 도움을 주셨지요.” 감사부터 먼저 드리고 그 다음에 “제가 이번에 또 이런 어려움이 있습니다. 도움을 받고 싶습니다.” 해야 도움을 얻게 됩니다. 감사는 도움을 받는 문을 여는 것입니다.
하물며 하나님께는 더욱 그렇습니다.
여러분, 감사 기도를 드리기 위해서 생각나는대로만 감사하다가 정말 구해야 될 것을 구하지를 못했어요. 그러나 걱정하지 마십시오.
저도 이따금 그런 분들을 만납니다. 제게 찾아와서 “그저 감사합니다. 이것도 감사하고 저것도 감사하고...” 무슨 도움이 필요해서 오신 것 같은데, 제 스케줄이 안 맞아서 헤어져야 되면 제가 일부러 사람을 보내서라도 도대체 무엇이 필요하셔서 오셨는지 한번 알아봐 달라고 합니다.
하나님 앞에 간구, 꼭 해야만 하나님이 들으시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에 생각만 있어도 하나님이 다 아십니다. 문제는 우리에게 감사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영안이 열리면 감사하지 않을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정말 살아계시고 하나님께서 영원한 세상을 보여주시면 지금 힘든 세상 삶이 다 감사가 됩니다.
하나님께서 합력하여 선을 이루실 것을 보여주시면 지금 힘든 일이 감사가 됩니다.
하나님께서 결국 승리하게 될 것을 보여주시면 지금 어려운 일이 감사가 됩니다. 내가 지금 골리앗을 만났든지 환란을 만나도 감사가 됩니다. 왜? 이길 것이 분명하니까. 오히려 더 큰 문제가 생긴 것이 감사합니다.
시험이 여러 가지 겹친 것이 더 감사합니다. 큰 간증이 나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모든 것을 다 아시기에 감사할 수 있었습니다. 나사로가 죽었을 때 예수님은 나사로를 다시 살리실 것을 아셨기에 감사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처럼 하나님의 모든 것을 다 알지 못합니다. 눈 앞의 현실이 전부인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모든 일에 감사할 수 있습니까? 믿음입니다. 우리는 다 알지 못하지만 하나님은 살아계시고 하나님이 모든 것을 주장하고 계시다는 것은 믿습니다. 믿음으로 감사하는 것입니다.
하박국 3장 17~18절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
하박국의 감사는 믿음에서 나왔습니다.
감사는 믿음의 결론입니다. “그래도 감사하다!” 기적입니다.
손양원 목사님은 여수 순천 반란사건으로 사랑하는 두 아들을 잃었지만 아들 장례식에서 아홉 가지 감사를 고백했습니다. 교인들이 감사 고백을 할 때 눈물 바다가 됐습니다. ‘어떻게 저럴 수가 있을까?’ 예수님이 그 분 안에 계시고 하나님을 정말 믿었기 때문에 그렇게 감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가 믿음의 사람이라는 증거입니다. 그리고 정말 사랑의 원자탄이라는 별명을 얻으셨습니다.
감사하면 믿음이 증거가 됩니다. 믿으면 두려움이 없어지는데 그러나 여기까지는 믿음이 아닙니다. 감사까지 나와야 믿음입니다. 두려운 일이 생겼습니다. 내가 믿으니까 두렵지가 않습니다. 그러나 여기까지는 아닙니다. 오히려 그 일이 감사합니다 라고 까지 나와야 그것이 믿음인 것입니다.
성경은 감사하는 자에게 하나님께서 복을 더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저는 감사 헌금을 할 때 ‘100% 순수한 마음으로 감사하였는가?’ 생각해 보니 아니었습니다. 어느 정도 ‘하나님이 잘 보시면 더 큰 복을 주시겠지.’ 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또 그렇게 축복 기도도 합니다. 저는 이것이 하나님의 마음과 아주 어긋났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성경에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고후 9:6-7 “이것이 곧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 하는 말이로다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
감사는 당연한 것인데 하나님께서는 왜 감사하면, 풍성한 헌금을 드리면 복을 주시겠다고 약속까지 하셨을까요? 그렇게 해서라도 감사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감사가 살 길이기 때문입니다.
영국 웨스트민스터 채플의 담임 목사인 R.T캔달 목사님은 매해 새해 예산을 편성하기 전에 재정 지원 요청서를 받습니다. 심사가 어렵습니다. 너무 많은 요청서가 오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어느 것을 탈락시킬지는 쉽답니다. 감사 편지가 오지 않은 곳부터 탈락시킵니다. 이제 안 도와줘도 된다는 뜻으로 간주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그렇게 하지 않겠습니까? 누가 도와달라고 하지만 평소에 감사가 없었습니다. 계속 도와달라고만 합니다. 그러면 도와줄 마음이 없습니다. 그러나 “진심으로 감사합니다.”그런 사람은 또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실 때 정말 복을 받지 못하게 삽니다. 하나님이 복을 주실 수 없도록 삽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너무너무 안타까우신 것입니다. 감사를 못하면 죽는 것이고 감사를 해야 사는 것이니까. 그러므로 어떤 일이 있어도 감사를 놓치면 하나님의 은혜를 놓치는 것인 줄 명심해야 합니다.
우리는 정말 감사 모드로 살아야 합니다. 고난도 감사해야 합니다.
여러분, 감사는 우리 생각을 바꿉니다. 볼 것을 제대로 보게 해줍니다. 감사는 잘못 된 생각을 변화시키는 능력입니다.
감사해야 잘못된 생각이 바뀌게 되기 때문입니다.
저는 최근 마음이 많이 무거운 채 몇 주간을 보냈습니다. 너무너무 스스로도 힘들고 혼란스러워 금식을 하기도 하며 힘든 나날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감사절이 와서 감사절 설교를 해야 되는 것입니다. 감사를 주제로 설교할 기분이 아니었습니다. 제 형편이 모든 것이 너무 좋을 때 이 설교를 준비했다면 아마 얼굴이 더 환했을지 모릅니다. 감사 설교를 준비하기가 너무 어려웠습니다.
그런데 감사절 설교가 저를 구원함을 깨달았습니다. 감사하는 마음을 놓지면 판단이 어그러집니다. 살 길과 죽을 길이 눈 앞에 있는데, 죽을 길이 살 길처럼 보이면 끝난 것입니다. 살 길과 죽을 길이 명확하게 구분해 보여야 되는데 감사가 회복되지 않으면 100% 판단 다 어그러집니다. “그래도 감사하다”
여러분, 마음에 불평 원망 짜증 두려움 걱정이 있을 때 판단하고 결정을 내리면 안됩니다. 말 한 마디라고 지금 하면 안됩니다. 죽을 길로 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감사를 다시 회복하면 하나님이 역사하십니다.
슬플 때 감사하면, 어려울 때 감사하면 하나님은 더 기뻐하십니다.
살면서 깨달은 것이 고난과 시련, 혹독한 고생, 사람들의 인색한 평가가 언제나 괴롭지만 그것이 편안한 때보다 저에게 더 유익하였다는 사실입니다. 지나고 보니까. 어려움을 겪을 당시에는 몰랐습니다. 그 때는 단지 힘들어 하고 참고 울며 기도하였습니다. 생각해 봅니다. 만약 그 때 그래도 감사하였다면 더 큰 유익을 얻었을 것이라는 아쉬운 마음이 듭니다.
요즘 특별 새벽 기도회때문에 불평하는 이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피곤해 죽겠는데 힘들어 죽겠는데 무슨 새벽기도야! 아주 죽이려고 작정했구나.’ 나오지 않는 사람이 더 불평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지나고 보십시오! “내가 그때 새벽기도회 나가느라고 코피 쏟고 그렇게 힘들었는데도 그 새벽 기도회가 나를 살렸다. 나 혼자서는 도무지 기도하는 자리 나가지 못하는데, 교회에서 특별 새벽기도회한다고 속장님이 전화해서 안 나갈 수도 없고 해서 나갔는데, 그 기도가 나를 살렸다.” 이런 간증할 날이 반드시 옵니다. 모든 것이 감사한 것입니다.
헬렌 켈러(Helen Keller, 1880~1968) 여사는 3중고 장애자였습니다.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고 말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대학에 들어가 우등생으로 졸업했고, 많은 책을 저술했고, 세계 곳곳을 다니면서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불어넣어 주었습니다. 그는 88세까지 장수했는데, 노년에 한 신문 기자가 물었습니다. “당신은 보통 사람들이 상상하기 조차 어려운 고통 속에서 일평생을 살아왔습니다. 그것 때문에 하나님께 원망하신 적은 없었습니까?” 그때 헬렌켈러는 단호히 말했습니다. “없습니다! 나는 하나님께서 내게 베풀어주신 은혜를 생각하면서 감사하기에도 시간이 부족한 사람입니다. 원망할 시간이 없었습니다.” 그녀가 임종 때, “아! 참으로 나의 인생은 아름다웠다.”고 고백했습니다.
마지막 임종 순간에 이렇게 고백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한평생 3중고의 고통 속에서 살았으면서도 이렇게 고백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가 감사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뇌성마비 장애인 송명희 시인은 어려서부터 비참한 생활을 하였고 몇 번이나 자살을 시도했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17살 때 “하나님이 계시다면, 왜 나를 이렇게 만들었습니까? 이런 몰골로 어떻게 세상을 살아가라는 것입니까?”라고 부르짖다가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는 시인이 되었습니다. 그런데도 여러 번의 좌절이 있었습니다.
한번은 극한 좌절에 빠져 방바닥에 엎드려서 부르짖었습니다. “하나님, 나는 아무 것도 없어요! 친구도, 집도, 휠체어도 아무 것도 없어요.” 하며 통곡할 때, 주님의 말씀이 임하였습니다. “내가 말하는 대로 쓰라.” 송명희 시인은 왼손에 조막 연필을 쥐고 울면서 알아볼 수 없는 글씨로 시를 썼습니다.
‘공평하신 하나님이 나 남이 가진 것 나 없지만 공평하신 하나님이 나 남이 없는 것 갖게 하셨네.’ 너무나 엉뚱하신 말씀에 기가 막혀서 도저히 쓸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 공평해 보이지가 않아요! 내겐 아무 것도 없잖아요!” 그러나 주님은 책망하셨습니다. “시키는대로 공평하신 하나님이라고 쓰라.” 그리고 계속하여 써내려갔습니다. “나 가진 재물 없으나, 나 남이 가진 지식 없으나, 나 남에게 있는 건강 있지 않으나, 나 남이 없는 것 있으니, 나 남이 못 본 것을 보았고, 나 남이 듣지 못한 음성 들었고, 나 남이 받지 못한 사랑 받았고, 나 남이 모르는 것 깨달았네.” 그리고 눈물이 터져나왔습니다. 그 유명한 ‘나’ 라는 시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이 시를 읽으면서 울었고 주님께 감사를 회복하였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주님의 품으로 돌아왔습니다.
여러분, 여러분 안에 이 놀라운 이름 예수 그리스도가 있습니까? 진정 자기 안에 예수 그리스도가 있는 사람이라면 가난해서 힘들다, 병들어서 힘들다, 실패해서 힘들다, 사람 때문에 힘들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래도 감사하다.”고 말하게 됩니다. 그리고 기적을 이루며 살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여러분 안에 계신 것이 맞습니까? 그렇다면 주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에게 살 길을 주시는 분입니다. 주님은 지금 여러분의 형편과 처지에서도 ‘그래도 감사해!’ 하십니다. 감사가 내가 사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감사할 때부터 나는 하나님을 믿는 증거가 됐고 하나님은 내게 은혜에 은혜를 더하여 주시게 됩니다. 감사를 잃어버리면 다 잃어버립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말할 수 없는 은혜를 받고 있으면서도 다 잃어버립니다.
이번 추수감사절이 여러분 심령에도, 우리 교회에도 기적의 감사절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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