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스탄틴 시대의 교회사
[순례하는 교회]
Andrew Miller
소위 콘스탄틴이 회심하기 전까지의 종교생활에 대해 우리가 알고 있는 바는 그가 열심이지는 않았지만 외견상 이교도였다는 것이 전부이다. 유세비우스도 콘스탄틴이 회심하기 전에 어떤 종교를 택할지를 주저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그의 장래의 종교적 경력을 결정하게 한 주된 요소는 정치, 미신, 위선, 신성한 영감 등이었다. 그러나 콘스탄틴의 신앙고백과 공개적인 선언이 단지 고의적이고 의도적인 위선에 불과하다고 추정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본다. 그의 신앙적 노선과 교회적 노선에는 보다 더 높은 수준의 타당한 설명이 필요하다. 우리는 그의 정오의 환상이나 한밤중의 꿈에 신성한 영감에 가까운 무언가가 있다고 믿을 수 없다. 어쩌면 그의 상상이 태양이나 구름 가운데 나타난 어떤 이상한 징후를 불가사의한 십자가의 표적으로 바꾸었을지 모르며, 극히 흥분된 상태에서 다른 징후가 꿈으로 과장되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모든 이야기는 이 위대한 황제에 대한 아첨으로 가득한 우화로 간주될 수 있으며, 그에 대하여 찬사의 글을 쓴 유세비우스에게는 매우 만족스러운 것이 될 것이다. 오늘날 믿을만한 역사의 기록으로 여길 수 있는 것은 거의 없을 것이다.
콘스탄틴의 마음을 변화시키는데 정치와 미신적인 사고가 크게 관여했다는 사실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는 젊을 때부터 그리스도인들이 박해를 당하는 것을 목격했으며,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에는 핍박자들의 권능을 능가하며 모든 다른 체제가 몰락하는 가운데서도 살아남는 생명력이 있음을 보았음에 틀림없다. 또한 그는 기독교의 원수들로 알려진 황제들이 차례로 끔찍한 죽음을 맞이하는 것을 보았다. 오랫동안 황제들이 모두 기독교를 박해했지만, 기독교를 보호한 콘스탄틴의 아버지만이 명예롭고 평안한 죽음을 맞이했다. 이 같은 놀라운 사실이 틀림없이 콘스탄틴의 미신적인 마음에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게다가 그는 정치적인 기민함을 발휘하여 기독교의 도덕적 영향력과 정부에 온건히 순종하려는 성향과 제국의 절반 가까이나 되는 사람들의 마음에 분명히 거대한 위력이 있다는 점을 알았을 것이다.
황제의 동기는 교회사의 한 부분이 아니므로 더 이상 관심을 기울일 필요는 없다고 본다. 다만 우리는 교회사에서 매우 중요하고 위대한 전환점이 된 이 시대를 알기 위하여 콘스탄틴이 교회를 세운 주후 313년과 죽음과 함께 떠난 주후 337년의 교회의 상태를 살펴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콘스탄틴이 세운 교회
이때까지 교회는 국가로부터 완전히 자유롭고 독립된 상태로 있었다. 교회는 하늘로부터 온 신성한 체제를 갖고 있었으며, 세상 밖에 있었다. 교회는 모든 적대 세력에 대항하여 국가의 후원이 아닌 하나님의 권능으로 그 길을 걷고 있었다. 처음부터 교회는 정부의 도움을 받는 대신에 완고하고 유해한 사교(邪敎)로 간주되어 박해를 받았다. 마귀는 교회를 대적하여 전 로마세계를 선동했지만, 그 때마다 패배를 고백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만일 교회가 자신들의 사랑을 고백한 날과 “일찍이 아무도 자기 육체를 미워한 적이 없고, 오히려 양육하고 소중히 여기기를 주님께서 교회에게 하심과 같이 하나니”라고 말씀하신 분의 사랑을 기억했다면(엡 5:29), 결코 그리스도에 대한 충성을 버리면서까지 콘스탄틴의 보호를 받아들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교회는 이제 세상과 섞이게 되었고 첫사랑에서 멀어졌다.
이미 앞에서 보았듯이 사도시대부터 교회는 세상을 사랑하고 외적으로 과시하고자 하는 성향이 점점 커왔다. 주님께서는 사랑 안에서 사탄에게 핍박을 허락하심으로 우리 모두에게 너무나 자연스러운 이러한 성향을 억제하셨다. 그러나 교회는 이 시험을 주님의 손으로부터 온 징계로 받아들이고 자신들의 세속성을 인정하는 대신에 배척당하는 처지와 행보에 점점 싫증을 내고, 변함없이 주님을 기쁘시게 하며 또한 그분을 섬긴다고 생각하며 세상의 햇빛 속을 걸었다. 콘스탄틴은 자신이 하는 일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지만, 사탄은 그를 이용하여 교회를 미혹하는데 성공했다. 밀만(Milman)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회심의 동기야 어떠했든지, 분명한 것은 그가 투쟁을 계속하기 보다는 부자와 지식인과 재산이 아니면 제국의 인구를 나누었던 적과 동맹을 맺는 지혜롭고 분별력 있는 정책을 택하였다는 것이다.”
교회와 국가의 연합
주후 313년 3월에 교회와 국가의 불경건한 연합을 이루는 칙령이 밀란(Milan)에서 공포되었다. 그날 공포된 칙령은 그리스도인에게 완전한 자유를 주었고, 기독교가 합법적으로 세워는 일에 앞장서게 하였으며, 다른 모든 종교보다 우위에 서게 하였다. 이 사실은 새로운 제국의 깃발인 ‘라바룸(Labarum)’에 완연히 드러났다. 그리스도의 첫 글자와 십자가의 상징 외에 금으로 된 황제의 형상이 있었다. 이런 표시와 모토는 그리스도인 군인과 이교도 군인의 경배의 대상이 되도록 의도된 것이며, 전투에서 그들의 사기를 북돋기 위해서였다. 그리하여 소위 위대한 그리스도인 황제라고 불리는 자는 공공연히 기독교를 우상에 접목시켰다.
그러나 우리가 콘스탄틴의 마음을 정확히 알아낸다면, 당시에 그가 마음으로는 이방인이요, 단지 군사적 동기에서만 그리스도인이라 주장하기를 주저하지 않을 것이다. 콘스탄틴이 기독교를 받아들인 것은 단지 미신적 군인으로서였다. 그 당시에 콘스탄틴은 세계적 제국을 세우기 위해서라면 어떠한 수호신의 힘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다. 어떠한 기독교의 흔적이나 새로운 회심자의 열심의 흔적도 찾아볼 수 없다. 그러나 기독교의 새로운 의복에서 이교(異敎)의 옛 미신적 관습을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형식적으로나마 기독교적인 것을 고려하지 않았더라면, ‘라바룸’은 감히 복된 주님을 모독하는 모습을 띠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일은 무지 가운데 이루어진 것이다. 그는 또한 이교도 군인들과 백성들의 마음을 얻고, 이들이 품고 있던 옛 종교를 온건히 신봉할 수 있는지 대한 두려움을 감소시키려고 애썼다.
콘스탄틴의 초기 칙령은 비록 기독교에 우호적이지만, 이교(異敎)의 권리나 자유를 해치지 않는다는 조심스러운 용어로 되어 있다. 그러나 기독교는 콘스탄틴의 호의로 점점 더 커갔다. 그의 친절과 관대함이 칙령보다 더 큰 목소리를 내었다. 콘스탄틴은 빼앗겼던 그리스도인들의 시민권과 신앙의 권리와 디오클레티안의 박해 때에 공공연히 몰수되었던 교회와 재산을 회복시켰을 뿐 아니라 후한 선물을 주어 모임을 위한 새로운 장소를 지을 수 있게 하였다. 그는 감독들에게 큰 호의를 베풀었고, 궁전에서에서나 여행하거나 전쟁에 나갈 때 함께 데리고 다녔다. 또한 그의 아들 크리스푸스(Crispus)의 교육을 고명한 락탄티우스(Lactantius)에게 맡김으로써 그리스도인에 대한 경의를 표했다. 그러나 콘스탄틴은 이 같은 모든 후원과 동시에 교회 문제에 관한 최고권을 주장했다. 그는 장로회에 호위병 없이 나타나서는 토론에 참여하고 종교 문제를 해결하는 것을 감독했다. 이때부터 교회에 보내는 모든 공문서에 ‘카톨릭’이란 용어가 계속해서 쓰이기 시작했다.
교회의 머리와 이교도의 대사제가 된 콘스탄틴
리시니우스(Licinius)가 완전히 패한 후, 전 로마제국은 다시 콘스탄틴의 지배 아래 한 국가가 되었다. 콘스탄틴은 제국의 동쪽에 사는 새 백성들에게 성명서를 발표하면서, 자신은 참된 믿음을 전파하기 위한 하나님의 도구이며, 하나님께서 온 우주가 그분의 방식에 따라 경배를 드리도록 하기 위하여 자신에게 모든 흑암의 권세를 이긴 승리를 주셨다고 선언했다. 그는 유세비우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이렇게 말했다. “위대하신 하나님의 섭리와 나의 사역을 통해 “자유”가 다시 회복되었고, 용이 국가 통치에서 쫓겨났다. 신성한 권능이 모든 이에게 나타났으며, 두려움과 불신으로 인하여 범죄한 자들이 이제 참 하나님과 그들의 생활을 인도하는 올바르고 참된 질서를 알게 될 것이다.” 콘스탄틴은 공공연히 자신을 “교회의 머리”로 자처했다. 동시에 그는 여전히 이교의 대사제직인 판티펙스 막시무스(Pontifex Maximus)를 가지고 있었다. 그는 결코 이 직무를 버리지 않고 교회의 머리요 이교의 대사제로 죽었다.
버가모 교회에 보낸 서신에서 슬프게 언급된 이 불경건한 연합은 이 위대한 역사적 황제의 이야기 가운데서 모든 행보마다 나타난다. 버가모 교회에 보낸 서신(계 2:12-17)에 대해서는 이미 설명했으므로 독자들이 진리와 역사를 경건한 마음으로 비교해보기 바란다. 교회사 가운데 이 주목받는 시대를 살피는데 있어서 이 같은 안내서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어떠한 긍휼인가!
세상의 유일한 황제가 된 콘스탄틴은 제일 먼저 그리스도인들을 적대한 리시니우스(Licinius)의 칙령을 폐지시켰다. 그는 지하 감방이나 광산이나 노예로 치욕스러운 일을 하던 모든 죄인들을 방면하였다. 군대나 공직에서 해직당한 이들을 모두 복귀시켰으며, 재산을 빼앗긴 사람들을 배상해 주었다. 모든 백성에게 칙령을 공포하여 복음을 받아들일 것을 권하되 결코 누구도 강요하지 않았다. 그는 이것이 스스로 자각하는 문제이기를 원했다. 그러나 높은 계급의 개종자들에게는 명예나 지위를 주고 가난한 이들에게는 돈을 주어 관심을 끌게 하였다. 유세비우스도 인정했듯이, 이러한 처사는 엄청난 수의 위선자와 회심을 가장한 자를 낳게 했다. 그는 어느 곳이든지 전체 주민을 수용할 수 있는 충분한 크기의 교회당을 세우라고 명령했다. 또한 그는 신상(神像)을 세우는 것을 금했으며, 성전에 자신의 상을 세우는 것도 허락하지 않았다. 모든 국가적인 제사를 금지시켰으며, 여러 방면에서 기독교를 발전시키고 이교(異敎)를 억압하는데 노력을 기울였다.
황제의 호의가 가져온 결과
이제 여러 가지 신조와 민족과 성향을 가진 사람들에게 커다란 역사적 문제가 되어온 점을 살펴보고자 한다. 즉 국가의 명령에 의해 세상적인 방법으로 기독교를 발전시키려 하는 국가와, 합법적인 폭력으로 기독교를 적대하는 세상의 권세 중 어느 쪽이 이 땅의 교회와 하나님의 백성에게 더 큰 해를 끼치는가 하는 점이다. 많은 이들이 주장하듯이, 우리는 모든 악한 관습을 법적으로 억압하는 사회는 언제나 큰 축복을 받았고 큰 유익을 얻었음을 인정한다. 그러나 왕실의 호의는 항상 하나님의 교회의 참된 번영에 치명적이었다. 교회가 탄압을 받지 않는 것은 큰 긍휼이다. 그러나 군주에게 보호를 받지 않는 것은 더 큰 긍휼이다. 그리스도인의 참 특징은 이 세상에서 낯선 자요 나그네라는 것이다. 하늘에 계신 그리스도를 소유하는 것은 이 땅의 모든 것을 변화시켰다. 그들은 하늘에 속한 자들이며 이 땅에서는 나그네이다. 그들은 세상에 속하지 않았지만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종들이다. 그들의 본향은 하늘이다. 그들에게 이 땅에는 영구한 도시가 없다. 주님을 못박은 세상에서 교회가 무엇을 기대하겠는가? 그러한 세상에서 교회가 무엇을 받아들이겠는가? 이 땅에서 교회의 참 몫은 고난과 배척이다. 사도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주를 위하여 종일 죽임을 당하며 도살당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롬 8:36) 주님께서는 그의 백성을 보호하시지만, 만약 시험이 오더라도, 우리에게 어떤 이상한 일이 일어난 것처럼 생각해서는 안 될 것이다.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겪게 되나”(요 16:33)
역사의 증거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를 위해 고난을 받는 것이 왕의 궁전에서 대접을 받으며 왕의 호의로 보호받는 것보다 더 유익하다는 사실은 역사에서도 증명할 수 있다고 본다. 그 예로서 디오클레티안(Diocletian) 때의 커다란 핍박의 역사와 콘스탄틴 때의 가장 밝았던 역사의 한 페이지를 제시하고자 한다. 이 두 가지 역사에 대한 예로 우리는 성직자에게 편파적이라고 의심받지 않을 성 바울 대학 학장이었던 고(故) 밀만(H. H. Milman)의 말을 인용하고자 한다. 우리는 신실한 자에 대해서만 언급하고자 한다.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그리스도인의 모임들이 크게 증가한 후에 발생한 핍박에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비록 상대적으로는 적은 숫자이고 그들 중 많은 이들이 나중에 회개했지만) 시험의 때에 신실하지 못했던 것으로 입증되었다.
“핍박은 6, 7년 간 지속되었다(A.D. 309년). 그러나 세상 어느 곳에서도 기독교는 부패의 징조를 보이지 않았다. 기독교는 사람의 마음 깊이 뿌리내렸고, 매우 광범위하게 퍼져있었으며, 매우 활력있게 조직되어서 난폭하지만 효과가 없는 핍박을 견디어냈다. 공적 예배가 금지되면 믿는 이들은 비밀리에 모이거나, 결코 박해자가 파괴시킬 수 없는 그들의 마음 가운데 절대적인 양심의 권리를 품고 있었다. 물론 핍박은 그리스도의 몸 가운데 가장 뛰어난 이들에게 가혹하게 가해졌다. 감히 찬사를 보내지는 못하지만 감탄을 감추지 못하는 군중 앞에서 그들은 죽음에 이르기까지 그들의 신앙을 생생하게 보여주었다. 여인들이 순교자들의 옷 가두리에 입 맞추기 위해 모여들었으며, 열성적인 무리들은 흩어진 재나 묻히지 않은 뼈들을 몰래 가져갔다.”
갈레리우스(Galerius) 황제는 임종하는 자리에서 핍박을 중지하라는 칙령을 공포했으며, 그리스도인들에게 자유롭고 공공연히 신앙 활동을 할 수 있도록 허용되었다. 이러한 숨 돌릴 수 있는 시간은 단지 수개 월 동안만 지속되었다. 그러나 그 다음 장면은 얼마나 장엄하였던가! 기독교의 진리와 권능의 증거는 어떠하였던가! 밀만은 계속해서 이렇게 말한다.
“핍박이 중단되자 즉시 그 핍박이 얼마나 광범위하게 자행되었는가가 알게 되었다. 감옥 문들이 열리고, 광산에서 죄수로 일하던 자들이 방면되었다. 어느 곳에서나 허물어진 자기 교회를 향해 발걸음을 재촉하거나 이전에 헌신을 드렸던 거룩한 곳을 찾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의 긴 행렬을 볼 수 있었다. 공공대로, 거리, 마을의 시장은 해방을 감사하는 시편을 찬양하는 긴 행렬로 가득했다. 극심한 시험 가운데서 믿음을 지킨 자들은 형제들에게 사랑이 넘치는 축하 인사를 받았다. 그러나 이 고난의 때에 실패한 자들은 서둘러 그들의 실패를 고백하고 이제 기뻐하는 무리 안으로 다시 영접되고자 했다.”
이제 갈레리우스가 죽은 지 약 20년이 지난 후 콘스탄틴 아래서의 변화된 상태를 보고자 한다. 성직자의 지위에 거대한 변화가 있음을 유의하여 보라.
“감독들은 정규 수행원으로 궁전을 출입하였으며, 기독교의 내적 불일치가 국가 문제가 되었다. 고위 성직자는 그리스도인의 미덕 안에 있는 탁월함으로가 아니라 자신의 직무에서 오는 절대적인 권위로 다스렸다. 그는 마치 영원한 축복을 허락하거나 거두는 것같이 교회의 문을 열고 닫았으며, 죄를 범하고 두려움에 떠는 자들을 멸망당할 이교도 가운데로 출교시키는 선언을 하였다. 성직자는 그리스도인의 성전 안에서 가장 눈에 띠는 자리에 앉았다. 비록 장로회 앞에서나 장로회의 이름으로 행하였지만, 큰 공동체의 머리로 인정받았으며, 위압적이고 두려움을 주는 지배력을 행사했다.”
지적이고 철학적인 질문이 복음의 진리를 대체하고, 믿음과 사랑과 하늘을 소망하는 마음이 형식적인 종교로 대체되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구주, 참된 회심, 오직 믿음으로 의롭게 됨, 세상과의 분리 등은 콘스탄틴이 전혀 알지 못한 주제였고, 아마 그 누구도 그 앞에서 꺼내지 않았을 것이다. “물질적 세계와 도덕적 세계의 관계가 일반적인 주제가 되었다. 그런 것들은 처음에는 대중적 종교의 주요한 진리였기에 당연히 대중의 열기를 도외시할 수 없었다. 기독교계 안에서 조차 사람들은 엄격한 유대교적 특성으로 돌아갔다. 언어에서 뿐만 아니라 영적으로도 구약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교회의 참된 특성이 사라지다
황제의 호의의 햇살이 아무리 상냥하다 할지라도, 그것은 각 그리스도인과 교회의 참된 특성을 파괴시키는 것이었다. 이 땅에서 배척당하신 그리스도와 하늘로 높여지신 그리스도에 대한 모든 증거는 사라졌다. 그리스도의 죽음에 연합하여 죽고 그리스도의 부활에 연합하여 다시 살아난 것과 같이 믿는 자들 대신에 침례를 받아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난 것은 세상이었다. 하나님의 말씀은 분명하다. “너희가 침례 안에서 그분과 함께 묻혔고, 또 그분을 죽은 자들로부터 일으키신 하나님의 행하심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침례 안에서 그분과 함께 일어났느니라”(골 2:12)
이 구절에서 침례는 죽음과 부활의 상징으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콘스탄틴 시절에 누구에게 이런 엄숙하고 신성한 의식(儀式)이 집행되었는가? 반복해서 말하거니와 로마제국이다. 권력에 아첨하는 성직자들은 그리스도를 믿음, 죄의 용서, 사랑하는 자 안으로 받아들여짐 등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신앙고백은 부와 명예로 가는 확실한 길이 되었으며 모든 계층과 계급이 침례를 받고자 신청했다. 부활절과 오순절 축제 때, 흰옷을 입은 수천 명의 개종자들이 교회당 주변에 운집하여 침례를 받고자 기다렸다.
그들의 수가 너무나 엄청나고 그 광경이 너무나 장대해서 많은 사람들은 이 흰 옷 입은 개종자들이 틀림없이 계시록이 언급하는 어린 양 앞에 흰 옷을 입고 서있는 수많은 무리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기록에 의하면, 로마에서만 일년 동안에 여자들과 유아들을 제외하고 12,000 명이 침례를 받았다고 한다. 황제는 가난한 계층의 모든 회심자에게 흰 옷과 금 스무 조각을 약속했다. 이 같은 상황에서, 이러한 매수하는 방법으로 이방 종교는 완전히 무너졌고 기독교는 로마제국의 왕좌에 앉았다.
슬프게도 우리는 사탄의 위(位)가 있는 곳에 교회가 있다는 주님의 말씀이 증거하는 슬픈 진리들을 분명하게 보았다. 콘스탄틴이 교회를 그곳에 놓았다. 그는 교회가 하늘에서 비추는 빛에 가린 채 광산, 감옥, 카타콤에 갇혀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리고 교회를 세상의 왕좌 위에 놓았다. 아직 교회사의 그림은 완성되지 않았다. 우리는 역사 속에서 다른 특징들을 주의하며, 교회에게 보낸 편지와 일치하는 것들을 찾아야 한다.
콘스탄틴의 통치는 교회가 사탄에 미혹되어 마땅히 있어야 할 자리를 빼앗긴 것과 타락하는 가운데 맺은 쓴 열매로 특징지을 수 있다. 오류, 부패, 분쟁의 씨가 급속히 싹텄고, 이제 공공연히 세상 앞에서 비판거리가 되었다. 어떤 경우에는 이교도 앞에서 비판거리가 되었다.
- 앤드류 밀러(Andrew Miller) 著 『Short Papers on Church History』에서 발췌.(이 책은 “성경의 예언적 관점에서 본 교회사”(전도출판사)란 제목으로 출간되었음) -
[순례하는 교회]
Andrew Miller
소위 콘스탄틴이 회심하기 전까지의 종교생활에 대해 우리가 알고 있는 바는 그가 열심이지는 않았지만 외견상 이교도였다는 것이 전부이다. 유세비우스도 콘스탄틴이 회심하기 전에 어떤 종교를 택할지를 주저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그의 장래의 종교적 경력을 결정하게 한 주된 요소는 정치, 미신, 위선, 신성한 영감 등이었다. 그러나 콘스탄틴의 신앙고백과 공개적인 선언이 단지 고의적이고 의도적인 위선에 불과하다고 추정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본다. 그의 신앙적 노선과 교회적 노선에는 보다 더 높은 수준의 타당한 설명이 필요하다. 우리는 그의 정오의 환상이나 한밤중의 꿈에 신성한 영감에 가까운 무언가가 있다고 믿을 수 없다. 어쩌면 그의 상상이 태양이나 구름 가운데 나타난 어떤 이상한 징후를 불가사의한 십자가의 표적으로 바꾸었을지 모르며, 극히 흥분된 상태에서 다른 징후가 꿈으로 과장되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모든 이야기는 이 위대한 황제에 대한 아첨으로 가득한 우화로 간주될 수 있으며, 그에 대하여 찬사의 글을 쓴 유세비우스에게는 매우 만족스러운 것이 될 것이다. 오늘날 믿을만한 역사의 기록으로 여길 수 있는 것은 거의 없을 것이다.
콘스탄틴의 마음을 변화시키는데 정치와 미신적인 사고가 크게 관여했다는 사실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는 젊을 때부터 그리스도인들이 박해를 당하는 것을 목격했으며,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에는 핍박자들의 권능을 능가하며 모든 다른 체제가 몰락하는 가운데서도 살아남는 생명력이 있음을 보았음에 틀림없다. 또한 그는 기독교의 원수들로 알려진 황제들이 차례로 끔찍한 죽음을 맞이하는 것을 보았다. 오랫동안 황제들이 모두 기독교를 박해했지만, 기독교를 보호한 콘스탄틴의 아버지만이 명예롭고 평안한 죽음을 맞이했다. 이 같은 놀라운 사실이 틀림없이 콘스탄틴의 미신적인 마음에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게다가 그는 정치적인 기민함을 발휘하여 기독교의 도덕적 영향력과 정부에 온건히 순종하려는 성향과 제국의 절반 가까이나 되는 사람들의 마음에 분명히 거대한 위력이 있다는 점을 알았을 것이다.
황제의 동기는 교회사의 한 부분이 아니므로 더 이상 관심을 기울일 필요는 없다고 본다. 다만 우리는 교회사에서 매우 중요하고 위대한 전환점이 된 이 시대를 알기 위하여 콘스탄틴이 교회를 세운 주후 313년과 죽음과 함께 떠난 주후 337년의 교회의 상태를 살펴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콘스탄틴이 세운 교회
이때까지 교회는 국가로부터 완전히 자유롭고 독립된 상태로 있었다. 교회는 하늘로부터 온 신성한 체제를 갖고 있었으며, 세상 밖에 있었다. 교회는 모든 적대 세력에 대항하여 국가의 후원이 아닌 하나님의 권능으로 그 길을 걷고 있었다. 처음부터 교회는 정부의 도움을 받는 대신에 완고하고 유해한 사교(邪敎)로 간주되어 박해를 받았다. 마귀는 교회를 대적하여 전 로마세계를 선동했지만, 그 때마다 패배를 고백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만일 교회가 자신들의 사랑을 고백한 날과 “일찍이 아무도 자기 육체를 미워한 적이 없고, 오히려 양육하고 소중히 여기기를 주님께서 교회에게 하심과 같이 하나니”라고 말씀하신 분의 사랑을 기억했다면(엡 5:29), 결코 그리스도에 대한 충성을 버리면서까지 콘스탄틴의 보호를 받아들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교회는 이제 세상과 섞이게 되었고 첫사랑에서 멀어졌다.
이미 앞에서 보았듯이 사도시대부터 교회는 세상을 사랑하고 외적으로 과시하고자 하는 성향이 점점 커왔다. 주님께서는 사랑 안에서 사탄에게 핍박을 허락하심으로 우리 모두에게 너무나 자연스러운 이러한 성향을 억제하셨다. 그러나 교회는 이 시험을 주님의 손으로부터 온 징계로 받아들이고 자신들의 세속성을 인정하는 대신에 배척당하는 처지와 행보에 점점 싫증을 내고, 변함없이 주님을 기쁘시게 하며 또한 그분을 섬긴다고 생각하며 세상의 햇빛 속을 걸었다. 콘스탄틴은 자신이 하는 일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지만, 사탄은 그를 이용하여 교회를 미혹하는데 성공했다. 밀만(Milman)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회심의 동기야 어떠했든지, 분명한 것은 그가 투쟁을 계속하기 보다는 부자와 지식인과 재산이 아니면 제국의 인구를 나누었던 적과 동맹을 맺는 지혜롭고 분별력 있는 정책을 택하였다는 것이다.”
교회와 국가의 연합
주후 313년 3월에 교회와 국가의 불경건한 연합을 이루는 칙령이 밀란(Milan)에서 공포되었다. 그날 공포된 칙령은 그리스도인에게 완전한 자유를 주었고, 기독교가 합법적으로 세워는 일에 앞장서게 하였으며, 다른 모든 종교보다 우위에 서게 하였다. 이 사실은 새로운 제국의 깃발인 ‘라바룸(Labarum)’에 완연히 드러났다. 그리스도의 첫 글자와 십자가의 상징 외에 금으로 된 황제의 형상이 있었다. 이런 표시와 모토는 그리스도인 군인과 이교도 군인의 경배의 대상이 되도록 의도된 것이며, 전투에서 그들의 사기를 북돋기 위해서였다. 그리하여 소위 위대한 그리스도인 황제라고 불리는 자는 공공연히 기독교를 우상에 접목시켰다.
그러나 우리가 콘스탄틴의 마음을 정확히 알아낸다면, 당시에 그가 마음으로는 이방인이요, 단지 군사적 동기에서만 그리스도인이라 주장하기를 주저하지 않을 것이다. 콘스탄틴이 기독교를 받아들인 것은 단지 미신적 군인으로서였다. 그 당시에 콘스탄틴은 세계적 제국을 세우기 위해서라면 어떠한 수호신의 힘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다. 어떠한 기독교의 흔적이나 새로운 회심자의 열심의 흔적도 찾아볼 수 없다. 그러나 기독교의 새로운 의복에서 이교(異敎)의 옛 미신적 관습을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형식적으로나마 기독교적인 것을 고려하지 않았더라면, ‘라바룸’은 감히 복된 주님을 모독하는 모습을 띠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일은 무지 가운데 이루어진 것이다. 그는 또한 이교도 군인들과 백성들의 마음을 얻고, 이들이 품고 있던 옛 종교를 온건히 신봉할 수 있는지 대한 두려움을 감소시키려고 애썼다.
콘스탄틴의 초기 칙령은 비록 기독교에 우호적이지만, 이교(異敎)의 권리나 자유를 해치지 않는다는 조심스러운 용어로 되어 있다. 그러나 기독교는 콘스탄틴의 호의로 점점 더 커갔다. 그의 친절과 관대함이 칙령보다 더 큰 목소리를 내었다. 콘스탄틴은 빼앗겼던 그리스도인들의 시민권과 신앙의 권리와 디오클레티안의 박해 때에 공공연히 몰수되었던 교회와 재산을 회복시켰을 뿐 아니라 후한 선물을 주어 모임을 위한 새로운 장소를 지을 수 있게 하였다. 그는 감독들에게 큰 호의를 베풀었고, 궁전에서에서나 여행하거나 전쟁에 나갈 때 함께 데리고 다녔다. 또한 그의 아들 크리스푸스(Crispus)의 교육을 고명한 락탄티우스(Lactantius)에게 맡김으로써 그리스도인에 대한 경의를 표했다. 그러나 콘스탄틴은 이 같은 모든 후원과 동시에 교회 문제에 관한 최고권을 주장했다. 그는 장로회에 호위병 없이 나타나서는 토론에 참여하고 종교 문제를 해결하는 것을 감독했다. 이때부터 교회에 보내는 모든 공문서에 ‘카톨릭’이란 용어가 계속해서 쓰이기 시작했다.
교회의 머리와 이교도의 대사제가 된 콘스탄틴
리시니우스(Licinius)가 완전히 패한 후, 전 로마제국은 다시 콘스탄틴의 지배 아래 한 국가가 되었다. 콘스탄틴은 제국의 동쪽에 사는 새 백성들에게 성명서를 발표하면서, 자신은 참된 믿음을 전파하기 위한 하나님의 도구이며, 하나님께서 온 우주가 그분의 방식에 따라 경배를 드리도록 하기 위하여 자신에게 모든 흑암의 권세를 이긴 승리를 주셨다고 선언했다. 그는 유세비우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이렇게 말했다. “위대하신 하나님의 섭리와 나의 사역을 통해 “자유”가 다시 회복되었고, 용이 국가 통치에서 쫓겨났다. 신성한 권능이 모든 이에게 나타났으며, 두려움과 불신으로 인하여 범죄한 자들이 이제 참 하나님과 그들의 생활을 인도하는 올바르고 참된 질서를 알게 될 것이다.” 콘스탄틴은 공공연히 자신을 “교회의 머리”로 자처했다. 동시에 그는 여전히 이교의 대사제직인 판티펙스 막시무스(Pontifex Maximus)를 가지고 있었다. 그는 결코 이 직무를 버리지 않고 교회의 머리요 이교의 대사제로 죽었다.
버가모 교회에 보낸 서신에서 슬프게 언급된 이 불경건한 연합은 이 위대한 역사적 황제의 이야기 가운데서 모든 행보마다 나타난다. 버가모 교회에 보낸 서신(계 2:12-17)에 대해서는 이미 설명했으므로 독자들이 진리와 역사를 경건한 마음으로 비교해보기 바란다. 교회사 가운데 이 주목받는 시대를 살피는데 있어서 이 같은 안내서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어떠한 긍휼인가!
세상의 유일한 황제가 된 콘스탄틴은 제일 먼저 그리스도인들을 적대한 리시니우스(Licinius)의 칙령을 폐지시켰다. 그는 지하 감방이나 광산이나 노예로 치욕스러운 일을 하던 모든 죄인들을 방면하였다. 군대나 공직에서 해직당한 이들을 모두 복귀시켰으며, 재산을 빼앗긴 사람들을 배상해 주었다. 모든 백성에게 칙령을 공포하여 복음을 받아들일 것을 권하되 결코 누구도 강요하지 않았다. 그는 이것이 스스로 자각하는 문제이기를 원했다. 그러나 높은 계급의 개종자들에게는 명예나 지위를 주고 가난한 이들에게는 돈을 주어 관심을 끌게 하였다. 유세비우스도 인정했듯이, 이러한 처사는 엄청난 수의 위선자와 회심을 가장한 자를 낳게 했다. 그는 어느 곳이든지 전체 주민을 수용할 수 있는 충분한 크기의 교회당을 세우라고 명령했다. 또한 그는 신상(神像)을 세우는 것을 금했으며, 성전에 자신의 상을 세우는 것도 허락하지 않았다. 모든 국가적인 제사를 금지시켰으며, 여러 방면에서 기독교를 발전시키고 이교(異敎)를 억압하는데 노력을 기울였다.
황제의 호의가 가져온 결과
이제 여러 가지 신조와 민족과 성향을 가진 사람들에게 커다란 역사적 문제가 되어온 점을 살펴보고자 한다. 즉 국가의 명령에 의해 세상적인 방법으로 기독교를 발전시키려 하는 국가와, 합법적인 폭력으로 기독교를 적대하는 세상의 권세 중 어느 쪽이 이 땅의 교회와 하나님의 백성에게 더 큰 해를 끼치는가 하는 점이다. 많은 이들이 주장하듯이, 우리는 모든 악한 관습을 법적으로 억압하는 사회는 언제나 큰 축복을 받았고 큰 유익을 얻었음을 인정한다. 그러나 왕실의 호의는 항상 하나님의 교회의 참된 번영에 치명적이었다. 교회가 탄압을 받지 않는 것은 큰 긍휼이다. 그러나 군주에게 보호를 받지 않는 것은 더 큰 긍휼이다. 그리스도인의 참 특징은 이 세상에서 낯선 자요 나그네라는 것이다. 하늘에 계신 그리스도를 소유하는 것은 이 땅의 모든 것을 변화시켰다. 그들은 하늘에 속한 자들이며 이 땅에서는 나그네이다. 그들은 세상에 속하지 않았지만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종들이다. 그들의 본향은 하늘이다. 그들에게 이 땅에는 영구한 도시가 없다. 주님을 못박은 세상에서 교회가 무엇을 기대하겠는가? 그러한 세상에서 교회가 무엇을 받아들이겠는가? 이 땅에서 교회의 참 몫은 고난과 배척이다. 사도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주를 위하여 종일 죽임을 당하며 도살당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롬 8:36) 주님께서는 그의 백성을 보호하시지만, 만약 시험이 오더라도, 우리에게 어떤 이상한 일이 일어난 것처럼 생각해서는 안 될 것이다.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겪게 되나”(요 16:33)
역사의 증거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를 위해 고난을 받는 것이 왕의 궁전에서 대접을 받으며 왕의 호의로 보호받는 것보다 더 유익하다는 사실은 역사에서도 증명할 수 있다고 본다. 그 예로서 디오클레티안(Diocletian) 때의 커다란 핍박의 역사와 콘스탄틴 때의 가장 밝았던 역사의 한 페이지를 제시하고자 한다. 이 두 가지 역사에 대한 예로 우리는 성직자에게 편파적이라고 의심받지 않을 성 바울 대학 학장이었던 고(故) 밀만(H. H. Milman)의 말을 인용하고자 한다. 우리는 신실한 자에 대해서만 언급하고자 한다.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그리스도인의 모임들이 크게 증가한 후에 발생한 핍박에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비록 상대적으로는 적은 숫자이고 그들 중 많은 이들이 나중에 회개했지만) 시험의 때에 신실하지 못했던 것으로 입증되었다.
“핍박은 6, 7년 간 지속되었다(A.D. 309년). 그러나 세상 어느 곳에서도 기독교는 부패의 징조를 보이지 않았다. 기독교는 사람의 마음 깊이 뿌리내렸고, 매우 광범위하게 퍼져있었으며, 매우 활력있게 조직되어서 난폭하지만 효과가 없는 핍박을 견디어냈다. 공적 예배가 금지되면 믿는 이들은 비밀리에 모이거나, 결코 박해자가 파괴시킬 수 없는 그들의 마음 가운데 절대적인 양심의 권리를 품고 있었다. 물론 핍박은 그리스도의 몸 가운데 가장 뛰어난 이들에게 가혹하게 가해졌다. 감히 찬사를 보내지는 못하지만 감탄을 감추지 못하는 군중 앞에서 그들은 죽음에 이르기까지 그들의 신앙을 생생하게 보여주었다. 여인들이 순교자들의 옷 가두리에 입 맞추기 위해 모여들었으며, 열성적인 무리들은 흩어진 재나 묻히지 않은 뼈들을 몰래 가져갔다.”
갈레리우스(Galerius) 황제는 임종하는 자리에서 핍박을 중지하라는 칙령을 공포했으며, 그리스도인들에게 자유롭고 공공연히 신앙 활동을 할 수 있도록 허용되었다. 이러한 숨 돌릴 수 있는 시간은 단지 수개 월 동안만 지속되었다. 그러나 그 다음 장면은 얼마나 장엄하였던가! 기독교의 진리와 권능의 증거는 어떠하였던가! 밀만은 계속해서 이렇게 말한다.
“핍박이 중단되자 즉시 그 핍박이 얼마나 광범위하게 자행되었는가가 알게 되었다. 감옥 문들이 열리고, 광산에서 죄수로 일하던 자들이 방면되었다. 어느 곳에서나 허물어진 자기 교회를 향해 발걸음을 재촉하거나 이전에 헌신을 드렸던 거룩한 곳을 찾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의 긴 행렬을 볼 수 있었다. 공공대로, 거리, 마을의 시장은 해방을 감사하는 시편을 찬양하는 긴 행렬로 가득했다. 극심한 시험 가운데서 믿음을 지킨 자들은 형제들에게 사랑이 넘치는 축하 인사를 받았다. 그러나 이 고난의 때에 실패한 자들은 서둘러 그들의 실패를 고백하고 이제 기뻐하는 무리 안으로 다시 영접되고자 했다.”
이제 갈레리우스가 죽은 지 약 20년이 지난 후 콘스탄틴 아래서의 변화된 상태를 보고자 한다. 성직자의 지위에 거대한 변화가 있음을 유의하여 보라.
“감독들은 정규 수행원으로 궁전을 출입하였으며, 기독교의 내적 불일치가 국가 문제가 되었다. 고위 성직자는 그리스도인의 미덕 안에 있는 탁월함으로가 아니라 자신의 직무에서 오는 절대적인 권위로 다스렸다. 그는 마치 영원한 축복을 허락하거나 거두는 것같이 교회의 문을 열고 닫았으며, 죄를 범하고 두려움에 떠는 자들을 멸망당할 이교도 가운데로 출교시키는 선언을 하였다. 성직자는 그리스도인의 성전 안에서 가장 눈에 띠는 자리에 앉았다. 비록 장로회 앞에서나 장로회의 이름으로 행하였지만, 큰 공동체의 머리로 인정받았으며, 위압적이고 두려움을 주는 지배력을 행사했다.”
지적이고 철학적인 질문이 복음의 진리를 대체하고, 믿음과 사랑과 하늘을 소망하는 마음이 형식적인 종교로 대체되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구주, 참된 회심, 오직 믿음으로 의롭게 됨, 세상과의 분리 등은 콘스탄틴이 전혀 알지 못한 주제였고, 아마 그 누구도 그 앞에서 꺼내지 않았을 것이다. “물질적 세계와 도덕적 세계의 관계가 일반적인 주제가 되었다. 그런 것들은 처음에는 대중적 종교의 주요한 진리였기에 당연히 대중의 열기를 도외시할 수 없었다. 기독교계 안에서 조차 사람들은 엄격한 유대교적 특성으로 돌아갔다. 언어에서 뿐만 아니라 영적으로도 구약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교회의 참된 특성이 사라지다
황제의 호의의 햇살이 아무리 상냥하다 할지라도, 그것은 각 그리스도인과 교회의 참된 특성을 파괴시키는 것이었다. 이 땅에서 배척당하신 그리스도와 하늘로 높여지신 그리스도에 대한 모든 증거는 사라졌다. 그리스도의 죽음에 연합하여 죽고 그리스도의 부활에 연합하여 다시 살아난 것과 같이 믿는 자들 대신에 침례를 받아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난 것은 세상이었다. 하나님의 말씀은 분명하다. “너희가 침례 안에서 그분과 함께 묻혔고, 또 그분을 죽은 자들로부터 일으키신 하나님의 행하심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침례 안에서 그분과 함께 일어났느니라”(골 2:12)
이 구절에서 침례는 죽음과 부활의 상징으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콘스탄틴 시절에 누구에게 이런 엄숙하고 신성한 의식(儀式)이 집행되었는가? 반복해서 말하거니와 로마제국이다. 권력에 아첨하는 성직자들은 그리스도를 믿음, 죄의 용서, 사랑하는 자 안으로 받아들여짐 등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신앙고백은 부와 명예로 가는 확실한 길이 되었으며 모든 계층과 계급이 침례를 받고자 신청했다. 부활절과 오순절 축제 때, 흰옷을 입은 수천 명의 개종자들이 교회당 주변에 운집하여 침례를 받고자 기다렸다.
그들의 수가 너무나 엄청나고 그 광경이 너무나 장대해서 많은 사람들은 이 흰 옷 입은 개종자들이 틀림없이 계시록이 언급하는 어린 양 앞에 흰 옷을 입고 서있는 수많은 무리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기록에 의하면, 로마에서만 일년 동안에 여자들과 유아들을 제외하고 12,000 명이 침례를 받았다고 한다. 황제는 가난한 계층의 모든 회심자에게 흰 옷과 금 스무 조각을 약속했다. 이 같은 상황에서, 이러한 매수하는 방법으로 이방 종교는 완전히 무너졌고 기독교는 로마제국의 왕좌에 앉았다.
슬프게도 우리는 사탄의 위(位)가 있는 곳에 교회가 있다는 주님의 말씀이 증거하는 슬픈 진리들을 분명하게 보았다. 콘스탄틴이 교회를 그곳에 놓았다. 그는 교회가 하늘에서 비추는 빛에 가린 채 광산, 감옥, 카타콤에 갇혀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리고 교회를 세상의 왕좌 위에 놓았다. 아직 교회사의 그림은 완성되지 않았다. 우리는 역사 속에서 다른 특징들을 주의하며, 교회에게 보낸 편지와 일치하는 것들을 찾아야 한다.
콘스탄틴의 통치는 교회가 사탄에 미혹되어 마땅히 있어야 할 자리를 빼앗긴 것과 타락하는 가운데 맺은 쓴 열매로 특징지을 수 있다. 오류, 부패, 분쟁의 씨가 급속히 싹텄고, 이제 공공연히 세상 앞에서 비판거리가 되었다. 어떤 경우에는 이교도 앞에서 비판거리가 되었다.
- 앤드류 밀러(Andrew Miller) 著 『Short Papers on Church History』에서 발췌.(이 책은 “성경의 예언적 관점에서 본 교회사”(전도출판사)란 제목으로 출간되었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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