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를 뛰어넘는 도전
눅 6:22-23, 요 15:18-19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 할 것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
요 도리어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택하였기 때
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기독교는 수난의 종교이고 세상으로부터 핍박을 받는 종교입니다. 지난 2천년의 역사를 보면 기독교는 수난 받는 종교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지난 2천년 동안 기독교는 끊임없이 도전받고 핍박받고 고난받아왔습니다. 도전뿐 아니고 견제도 받았고 피 흘림도 당하고 죽임도 당해왔습니다. 기독교는 한마디로 수난의 종교입니다.
왜 그러냐 하면 오늘 본문에서 그 이유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6장22절을 보면 “인자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고 멀리하고 욕하고 너희 이름을 악하다 하여 버림을 받는 사람은 복이 있다”고 했습니다. 예수 때문에 너희는 핍박을 받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요한복음15장18절을 보면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 보다 먼저 나를 미워하는 줄 알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들이 세상에서 핍박을 받고 미움을 받을 일이 없습니다. 그것은 순전히 내가 예수를 믿는다는 이유 때문에 미움도 받고 고난도 당하고 질시도 받는 것입니다. 세상이 예수를 싫어하는 이유는 한가지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빛이시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빛을 싫어하십니다. 어두움을 좋아합니다. 적당히 살아가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예수는 진리이시고 공의이시고 빛이십니다. 그래서 예수가 싫은 것입니다.
역사를 보면 모두 예수 때문에 고난을 받고 수난을 받았던 일들이 많이 나타나 있습니다. 역사까지 말하기 이전에 여러분의 지난날의 생활만 되돌아보아도 알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이 믿음생활을 처음 시작할 때 어떻게 시작했습니까. 처음 시작할 때는 누구나 다 어려운 상황에서 시작했을 것입니다. 어떤 분은 성경책을 불태움 받기도 했습니다. 어떤 분은 쫓겨나기를 수도 없이 했습니다. 또 어떤 분은 이혼 당할 위기까지 가기도 했습니다. 그런 과정을 통해서 마침내 기독교가 그 집안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핍박하던 분들이 지금 이 자리에 앉아있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그렇게 핍박하는 분들이 뭘 알고 핍박하는가 하면 아는 것도 없습니다. 알지도 못하고 무조건 핍박하고 박해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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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도 일생동안 내내 도전을 받으셨습니다. 가족들의 몰이해로 도전을 받았습니다. 가장 가까운 가족들로부터도 거부당했습니다. 동네사람들의 몰이해로 도전받았습니다. 같은 동족 유대인들, 바리새인들, 제사장들로부터도 박해와 비난과 핍박을 받고 결국에는 자기 동족에 의해서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그렇게 죽임을 당하고 죽으신 후 부활하는 과정에서 또 얼마나 거센 도전을 받습니까.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임당하고 무덤에 묻히고 그러다가 우여곡절을 거치면서 부활하십니다. 그러고 나서 그 부활을 부인하려는 무리들이 얼마나 거세게 나타나서 방해를 했습니까. 로마 군인들로부터, 바리새인들, 제사장들, 서기관들 모두가 나서서 부활을 부인하고 덮으려 했습니다.
또 그 후에 신학자들 까지 나서서 부활을 부인하려는 교묘한 학설을 내놓지 않았습니까. 그 대표적인 학설이 몇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도난설입니다. 예수께서 무덤에 묻히신 후 야음을 틈타서 제자들이 몰래 시체를 훔쳐가곤 부활했다고 전파했다는 것입니다. 또 가사설도 있습니다. 예수는 십자가에서 죽은 것이 아니고 잠간 기절했는데 사람들은 예수가 죽은 줄 알고 무덤에 장례를 치렀는데 얼마 후 무덤 속에서 기절에서 깨어나 도망가고는 부활했다고 말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환상설도 있습니다. 예수 사후 제자들이 예수님을 너무 사모하다가 환상을 보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죽으신 예수께서 부활했다고 전파했다는 것입니다. 또 신화설도 있습니다. 애초부터 예수도 없었고 부활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허무한 신화를 만들어 전파했다는 것입니다.
이 이론은 모두 한편으로 치우친 신학자들이 만들어낸 이론입니다. 반기독교는 신앙 밖에만 있는 것이 아니고 안에도 있습니다. 교회 안에도 있고 신앙 안에도 있고 또 내 안에도 있습니다. 내 안에도 믿으려는 마음이 있고 불신하려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 두마음 중에 어느 마음이 더 크냐에 따라 나는 그리스도인이 되고 비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기독교는 성장해 오다가 로마로부터 가장 극렬한 미움과 도전을 받게 됩니다. 로마로부터의 핍박이 기독교 2천년 역사 중에 있었던 박해 중에서 대표적인 핍박일 것입니다. 그 때는 로마의 원형극장이 유일한 축제였고 볼거리였는데 그 볼거리들이 모두 잡혀들어 온 기독교인들이 맹수들에게 찢겨죽는 놀이였습니다. 그래서 기독교인들이 참다못해 땅속으로 파고 들어가 일생을 그 속에서 살고 아이들을 낳았고 그곳에서 일생을 마치고 죽었습니다. 그러기를 300년 동안 살았습니다. 참으로 참담한 삶이었습니다. 로마에 가 보면 지금도 그 굴이 그대로 보전되어 있습니다. 그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은 그러면서도 신앙을 버리지 않고 지켰습니다. 우리 기독교는 그런 신앙적 유산을 받은 신앙체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게 핍박을 받아오다가 기원 300년경에 기독교가 마침내 로마의 국교로 공인되면서부터 천 년간 자유를 누리게 됩니다. 있을 수도 없는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기독교가 그 거대한 로마를 점령하고 복음화 한 것입니다. 그러다 14-5세기에 와서 르네상스 시대를 맞이하게 됩니다. 그때부터 기독교를 핍박하는 양상이 힘이나 물리적인 방법에서 교묘하게 문화적으로 심리적으로 핍박이 가해지기 시작했습니다. 르네상스는 잘 아시는 대로 신본주의 시대에서 인간주의 시대로 전환하는 시기를 말합니다. 그때부터 신이 부정되고 기독교의 유산과 신앙들이 인간주의에 의해서 무시되고 뒤로 밀쳐지고 인간이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때부터 힘을 자랑하고 능력을 자랑하고 육체를 자랑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그때 올림픽이 만들어지고 인간의 벌거벗은 모습이 작품으로 만들어지고 신을 부정하는 문화와 예술과 책들이 쏟아지기 시작했습니다. 소리 없는 핍박이고 수난이고 짓밟힘이었습니다.
그러다 다시 기독교가 힘에 의해서 도전받는 시대가 옵니다. 그것이 세계 1.2차 대전입니다. 그 때는 힘에 의한 전쟁시대였습니다. 힘이 있는 나라가 약소국가를 지배하고 먹고 먹히는 때였습니다. 그때 히틀러 같은 독재자가 출현합니다. 그리고 구라파 전체가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 들어가고 히틀러의 유대인 말살정책이 이루어지고 기독교 탄압정책이 무섭게 대두되었습니다. 그때 유대인들은 600만 명이라는 가공할 숫자가 히틀러에 의해서 죽임을 당하였고 독일교회는 그 위협 앞에서 히틀러의 정권을 인준해 주고 히틀러를 찬양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리고 아시아에서는 일본의 군국주의에 의해서 무섭게 지배를 당합니다. 그때 얼마나 많은 기독교인들이 고난을 당하고 핍박을 당하고 감옥생활을 하고 처형당해서 순교를 합니까. 우리나라에서만도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수난을 당합니다. 그리고 공산주의에 의해서 또 얼마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수난을 당했습니까. 소련에서, 중국에서, 북한에서 공산당 치하 때 얼마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고난을 당합니까. 그때 우리 성결교단만 해도 순교자가 참 많이 발생했습니다.
철원교회의 박봉진 목사는 신사참배를 거부하다가 1년간 고문을 받고 마침내 죽임을 당했습니다. 밀양의 함양교회 담임목사였던 김하석 목사도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고문을 받다가 대구 보인산에서 죽임을 당했습니다. 조치원교회 김동훈 전도사도 신앙을 지키다가 뭇매를 맞아 순교했고 신안주교회의 김지봉 집사는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경찰고문을 받다가 순교하였고 신학생 김은규는 5개월 동안 서대문 경찰서에서 고문을 받다가 순교하였고 전남 중동리교회에서 목회하던 문준경 전도사는 공산군에 의해서 중동리 해변으로 끌려 나가서 동네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무참하게 타살당해 죽었습니다. 그리고 논산의 병천교회는 66명이 주일날 예배를 드리다가 한꺼번에 모두 마당으로 끌려나와 공산군에 의해서 창에 찔리고 곡괭이에 찔려 한날한시에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렇게 일제 때와 공산군에 의해서 100여명이 죽임을 당하였고 수십 명이 납북되어 갔습니다.
그래서 독재와 공산주의는 기독교와 상극입니다. 언제나 독재가 있는 나라에서는 기독교를 말살하려 듭니다. 그리고 공산주의 나라에서 기독교는 핍박의 대상이 됩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독재와 싸우고 공산주의와 싸우는 관계가 되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이 땅에 다시는 독재가 자리 잡지 못하도록 기도해야 하고 만일 그런 조짐이 있다면 목숨을 내놓고 저지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 땅에 다시 공산주의가 고개를 든다면 그 또한 저지하기 위해서 목숨을 내놓고 싸워야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그것이 사명입니다.
2
그런데 이 기독교에 대한 도전이 근래에 와서는 문화적으로 교묘한 방법을 통해서 또 다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마치 사탄의 접근법을 사용하며 다가오는 느낌입니다. 옛날에는 사탄의 수법이 넘어지게 하고 깨지게 하고 부러지게 하고 망하게 하는 물리적인 방법을 사용했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마치 간첩이 다가오는 것처럼 웃으며 다가옵니다. 간첩은 처음부터 나는 간첩이다 하고 오지 않습니다. 그러면 누구도 간첩에게 속아 넘어가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무 의심도 하지 않도록 부드럽게 다가와서 함께 지내다 보면 어느 날 내가 이미 깊숙이 빠져 들어가서 빠져나올 수 없을 정도로 말려들어 가게 하는 그런 방법을 사용합니다. 그것이 사탄의 수법입니다.
오늘 그 문화라는 탈을 쓰고 우리에게 도전해 오는 유혹이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유다복음”이라는 것의 등장입니다. 이 유다복음이라는 것은 지난 2천년 동안 이집트 사막에 묻혀 있었던 것을 발굴한 문서입니다. 이 유다복음은 기원 180년경에 영지주의의 한 분파인 가인파들이 기록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가인파는 가인, 소돔, 가룟 유다 등을 연구하면서 이들에게도 예언적으로 어떤 도구로 사용된 것이 아닌가 하는 이론으로 재평가 하는 그런 분파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때 가인파 외에 마르시온파, 몬타누스파, 시몬구스파 등 여러 분파가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들은 성경을 자의적으로 해석해서 짜깁기 하는 일을 했는데 이 유다복음이라는 문서도 그렇게 만들어진 것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이 문서를 1970년도에 발굴했는데 1983년도에 300만 불에 고미술상에게 팔려갔고 그것이 다시 여러 명의 주인을 거쳐서 오늘은 스위스의 고미술재단에 소장되어 있는데 들리는 말로는 이 사실을 언제 터트려야 고가로 인정을 받을까 하고 생각하다가 오늘 이 시점이 가장 호기라고 생각해서 터트린 것이라고 합니다. 이 시점이 왜 호기냐 하면 마침 이때 다빈치 코드라는 책이 발표됨으로서 전 세계적으로 기독교에 대해서 관심이 고조되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그 의도가 순전히 장사 속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성경은 여러 검증절차를 거쳐서 구약성서 39권은 AD 100년에 얌니아회의에서 정경으로 인정받았습니다. 신약 성경 27권은 AD 397년 칼타고 회의에서 정경으로 채택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외의 것들은 가치가 없는 것으로 외경에 편입되어 있습니다. 이 26쪽 짜리 유다복음이라는 것도 그중 하나라고 보고 있습니다. 그 내용의 줄거리는 유월절 전 1주간 동안 가룟 유다와 예수님이 비밀대화가 시작되어 마침내 예수님이 유다에게 너는 나를 배반할 사명을 가지고 태어났으니 너는 나를 배반하라고 속삭였다는 내용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유다를 수제자로 여겼고 특별 사명이 있는 사람으로 암시했다는 것입니다. 이 책이 얼마나 오늘 이 시대에 영향을 미칠지는 모르지만 기독교를 음해하고 간접적으로 핍박하려는 음모로 보고 있습니다.
또 하나는 지금 한창 문제가 되고 있는 “다빈치 코드”라는 영화입니다. 댄 브라운이라는 사람이 쓴 소설을 영화화한 것입니다. 그 영화를 만든 론 하워드라는 감독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영화는 지금까지 믿어왔던 역사가 온전히 뒤바꾸는 내용이다, 이 비밀이 밝혀지는 순간 전 세계가 충격에 휘말리게 될 것이다“. 그러니까 작심하고 기독교를 훼손하려는 의도에서 이 영화를 만들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영화는 5. 17일 프랑스 칸 영화제 개막작으로 제작된 영화라고 합니다. 그 내용은 예수가 마리아와 결혼했고 그 사이에서 자녀들을 낳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딸 사라는 프랑스 메로빙거 왕족과 결혼해서 지금까지 살고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면 그 사라라는 딸이 생존해 있다는 비밀을 누가 터트렸는가 하면 르네상스 시대의 작가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자신이 그린 최후의 만찬이라는 그림 속에 그 비밀이 들어있다는 것입니다. 그 그림은 1494년에서 98년까지 그린 그림인데 이 그림이 지금 이탈리아 밀라노 산타마리아 델레 그라치에 있는 한 수도원에 있는데 그 그림에서 예수님 오른쪽에 있는 제자가 사실은 제자가 아니고 마리아라는 것입니다. 그 그림에 다빈치가 그려 넣은 코드 즉 암호를 찾아보면 그 비밀을 알 수 있다고 해서 제목이 다빈치 코드입니다.
그 코드 즉 암호가 “성배(聖杯)”인데 성배는 최후의 만찬 때 사용한 포도주잔을 말합니다. 그 잔이 프랑스어로 상 그리엘(san greal)입니다. 그런데 지(g) 라는 글자를 앞으로 옮겨놓으면 상 리엘(sang real) 이 된다는 암호입니다. “상 리엘”의 뜻은 왕의 혈통 즉 예수의 혈통이란 뜻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최후의 만찬 때 사용한 성배는 예수님의 육신의 혈통을 의미하는 것으로 예수님은 육신의 사람이었고 그의 자녀들이 지금도 세상에 살고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사람들이 이 책을 쓰고 영화로 만들기 위해서 얼마나 머리를 쥐어짜고 하나님이 주신 그 교묘한 지혜를 이렇게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사람들은 이 사람들의 논리에 잘 속아 넘어가며 곡해하며 호도되고 있습니다. 이 경우는 지금 프랑tm에서도 똑같이 상영을 앞두고 극장 앞에 간판으로 예수가 마리아의 젓을 빨고 있는 나체모습을 그려서 걸어놓았습니다. 그러자 프랑스의 기독교인들이 항의하는 바람에 그 그림이 떼어져 내리는 사태까지 벌어졌다고 합니다. 오늘 이 세상은 지금 상식에도 없는 문화라는 탈을 쓴 적그리스도적 작태들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여기에 오늘 반기독교적 NGO가 만들어졌고 반기독 사이트가 생겨서 무차별적으로 공격을 가해오고 있습니다.
3
지금 왜 이런 현상들이 나타나고 있습니까. 왜 기독교는 어느 시대나 고난을 받고 시대를 초월해서 가는 곳 마다 수난의 대상이 되고 미움을 받고 있습니까. 그것이 오늘 읽은 본문의 말씀에서 잘 지적하고 있습니다.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먼저 나를 미워하는 줄 알라”(18)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택하였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19) “나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며 멀리하고 욕하고 너희 이름을 악하다 하여 버릴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도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그 시대를 이 점을 알고 살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 그리스도인은 그 시대를 책임 있게 살아야 합니다. 그 책임을 다하지 못하면 이런 반기독교적인 문화들이 더 빨리 더 넓게 퍼져나갈 것입니다. 기독교가 자기 역할을 다하지 못하면 사탄이 더 활개를 치고 이런 영화들과 책들이 문화라는 탈을 쓰고 세상을 파괴하려 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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