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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망하는 영혼 시 42:1-5

by 【고동엽】 2022. 1. 7.

갈망하는 영혼

 

 

시 42:1-5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 하니이다

 

 

 

인간은 늘 갈급해 하는 존재입니다. 그 갈급해 하는 마음이 본문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오늘 읽은 성경본문은 영혼의 갈급한 심정을 심각하게 표현한 말씀입니다. 이 본문에 대해서 여러 해석이 있습니다. 하나는 여호야킴이 바벨론으로 포로로 잡혀간 후 언제 돌아갈지 모르는 고국의 하늘을 바라보고 그리워하는 심정을 시로 표현한 것이라고 보는 견해입니다. 그리고 히스기야가 이사야로부터 죽을 것이라는 통고를 받고 벽을 향하여 무릎을 굻고 어린 아이처럼 눈물을 흘리며 하나님께 탄원하던 마음을 표현했던 시라고 말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또 하나는 다윗이 압살롬으로부터 반역을 당하고 낙향하여 안식일 날 성전에 가지 못하는 안타까운 마음을 표현한 시라고도 말합니다. 모두 일리가 있는 해석입니다.

 

그렇지만 오늘 읽은 말씀의 머리 표제를 보면 고라자손의 시라고 되어 있습니다. 고라자손 중 한 사람이 영적으로 갈급한 마음을 표현한 시라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입니다. 고라자손은 레위 지파 중 일파입니다. 모세와 아론의 사촌형제들의 후손들입니다. 이들은 출애굽 후 광야에서 모세에게 비판하고 반기를 들었다가 하나님으로부터 심판을 받아 땅이 갈라져 그 자손들이 모두 땅에 묻혀버리는 심판을 받았습니다. 원래 이 고라자손은 성전에서 문지기로, 진설병을 만드는 일로 그리고 찬양대로 활약했던 자부심을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전에 절기 때마다 백성들을 대표해서 성전에서 찬양을 맡아 사역했던 사람들입니다.

 

그 고라자손 중의 한사람인 시인이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을 떠나 이역 멀리 요단 북쪽에 거주 하고 있습니다. 그 멀리에서 예루살렘 하늘을 향하여 눈물을 지으며 그 옛날의 성전생활을 그리워하고 있습니다. 그 자손은 지금 어떤 사정에 의해서 예루살렘에 돌아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 옛날 예루살렘에 있을 때 성전에서 문지기로, 찬양대원으로, 진설병을 구우며 즐겁게 봉사를 했는데 지금은 갈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지금 그 때를 생각만 하면 그리움이 사무쳐 옵니다. 그런데 더 마음이 상한 것은 지금 이방인들에 둘러싸여 살아가고 있는 일입니다. 이 이방인들이 그를 보고 비웃습니다. 조롱합니다. 그때 이 시인은 자신이 지금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 비참한 심정을 본문에서 시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신앙이 해이 되고 또 병상에 있으면서 회개하는 심정으로 이 시를 읽고 묵상했으면 합니다. 여기서 몇 가지 생각할 일이 있습니다.

 

 

 

“인간은 끊임없이 갈급해 하는 존재“

 

 

 

본문 1절을 보면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하고 호소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시인은 지금 마음 한곳에서 심하게 올라오는 갈급한 심정을 토로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인간은 늘 갈망하는 존재입니다. 더 행복해지기를 갈망합니다. 사람은 더 많이 소유하기를 갈망합니다. 더 아름다워지기를 갈망합니다. 더 평안해지기를 갈망합니다. 더 큰 아파트로 옮겨갈 것을 갈망합니다. 외로움으로 공허한 마음이 채워지기를 갈망합니다. 사람은 늘 이렇게 오늘 보다 더 좋아지기를 갈망하는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큰 목마름의 갈망은 영혼의 갈망일 것입니다. 지금 시인은 어떤 심정인가 하면 시냇가를 찾아 헤매는 사슴의 심정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사슴은 목이 마르면 참지 못하는 동물입니다. 그래서 사슴은 늘 시냇물 언저리에서 서식하며 살아갑니다. 살아가다 보면 이렇게 갈급할 때가 있습니다. 배가 고플 때는 먹을 것을 찾습니다. 배가 고플 때는 자연스럽게 누구나 먹을 것을 찾습니다. 갈급함 중에서 배고픔의 갈급함처럼 강렬한 것도 없습니다. 여러분, 3일만 금식해 보십시오. 별 생각이 다 들 것입니다. 그래서 도둑질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또 외로움도 견디기 힘든 갈급함입니다. 그래서 고독이 가장 큰 병입니다. 사람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이 고독이 가장 큰 병으로 다가옵니다. 그중에서도 노년의 고독은 참 뼈아픈 외로움입니다. 아들딸들은 바쁘다고 본 척도 하지 않습니다. 손자들도 조금 크면 노인들을 싫어합니다. 그래서 노인들은 늘 혼자입니다. 그래도 두 내외가 해로하면 참 좋은데 혼자면 외로움이 더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양로원이나 노인병원은 산속에 지으면 안 됩니다. 도심 한가운데에서 사람들이 북적대는 곳에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 외로움은 노인뿐이 아닙니다. 청소년들도 할 일 없이 혼자 있으면 반드시 탈선하게 됩니다. 미국에 이민 간 청소년들이 자꾸만 마약에 손을 대는 것도 시간은 많고 할 일은 없고 부모들은 일하러 가서 집에 보호자는 없고 하니까 외로움에서 마약에 손을 대는 것입니다.

 

이 고독이 병입니다. 또 몸이 아플 때 사람들은 위로를 받고 싶어집니다. 병상에서 오랜 시간 혼자 있으면 마음이 공허해지고 위로받고 싶어집니다. 사람들이 찾아와 주기를 갈구합니다. 사람은 이렇게 무엇인가 늘 갈급해하고 살아갑니다. 그중에서도 영적인 갈급함은 가장 큰 목마름일 것입니다. 시인은 하나님의 성전을 떠나 버림받은 심정으로 예루살렘 북쪽 멀리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 하늘을 처다 보며 옛날 성전에서 봉사하고 찬양할 때를 생각하니 그때가 마음에 사무쳐 옵니다. 그래서 그때 심정을 표현하기를 “사슴이 시냇물을 갈급함 같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하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런 갈급함도 아무나 가지는 마음이 아닙니다. 이것도 영적으로 성숙해진 사람이나 느끼는 깊은 목마름입니다. 인생은 끊임없이 갈급해 하고 목말라 하는 존재입니다.

 

 

 

“불안해하는 존재”

 

 

 

본문 5절을 보면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불안해하는가“하고 말합니다. 여기 시인은 전에는 예배드리러 성전에 가서 찬양대도 하고 사람들을 안내하기도 하며 사역했는데 지금은 갈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때를 생각하니 마음이 갈급하고 또 마음이 상하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낙심이 되고 그 낙심이 커지니까 나는 이대로 죽을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면서 마음이 불안해졌습니다. 그래서 말하기를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불안해하는가”하고 말합니다.

 

여러분, 신앙인은 낙심이 금물입니다. 낙심하게 되면 마음에 불안이 찾아오고 의심이 찾아옵니다. 그리고 그 다음은 원망하게 됩니다. 그래서 신앙인에게 가장 큰 약점은 불안해하는 일이고 낙심하는 일입니다. 그때 신앙이 전의를 상실하게 되고 약화되고 의심이 생기게 됩니다. 사탄이 노리는 것이 바로 이 마음에 의심이 들게 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결국 마음을 약하게 만들고 용기를 잃게 만들고 원망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인은 9절에서 “어찌하여 나를 잊으셨나이까, 어찌하여 나를 슬프게 하시나이까”하고 불평하면서 심정을 토로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생각해 보십시오. 누가 자기를 잊었습니까. 누가 자기를 슬프게 했습니까. 자신이 낙심하니까 의심이 생기고 원망이 생기는 것입니다. 여러분, 삶이 무슨 면이든 약해지게 되면 곧 바로 마음에 원망부터 생기게 됩니다. 일이 잘될 때는 누구도 원망하지 않습니다. 누가 찾아주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그런데 실패하면 모든 것이 원망뿐입니다. 건강할 때는 원망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병들면 누구를 탓하게 됩니다. 원망부터 서려옵니다. 신앙이 강할 때도 누구를 원망하지 않습니다. 그때는 돌아다닐 일도 많고 놀 일도 많고 할 일도 많습니다. 그런데 신앙이 약해졌을 때는 원망부터 생기고 마음이 불안해지고 시비가 일어나고 짜증이 일어나고 귀찮고 조그만 말도 소화를 해 내지를 못합니다. 모두 약해져서 그렇습니다.

 

그래서 시인은 2절에서 “내가 어느 때에 가서 하나님의 얼굴을 뵈올 고“하고 탄식합니다. 지금 시인이 처한 상황이 어떤 상황인지 모르지만 시인은 지금 예루살렘에 갈 수 없는 입장입니다. 그런데 언제 예루살렘에 돌아갈 수 있는지 조차도 기약이 없습니다. 그래서 원망이 서려오고 마음이 불안해지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세상을 살다 보면 이런 때가옵니다. 배가 고플 때 먹을 수 있다면 그것은 고민이 아닙니다. 배는 고픈데 먹을 것이 없으니 고민입니다. 그래서 갈증이 오고 원망이 오고 두려움과 불평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실향민이 고향에 언제든지 갈 수 있으면 무슨 실향민입니까. 고향은 있는데 가고는 싶은데 갈 수가 없으니 고민이 크고 그리움은 더 커지는 것입니다. 병상에서 꼼짝을 못하니까 고민이 크고 더 불안해지고 원망이 오는 것입니다. 언제까지 시간이 지나면 일어나 회복될 수 있다면 무슨 고민입니까. 그런데 언제까지 누워 있어야 하는지 시간은 자꾸만 지나가는데 회복될 기미는 없으니까 마음에 두려움이 오고 원망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갈증이 심하게 솟아 올라오는 것입니다.

 

여러분, 교회생활을 열심히 하십시오. 자유롭게 교회에 가고 싶을 때 부지런히 다니십시오. 앞으로 가고 싶어도 가지 못할 때가 올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에 와서까지 잠자는 분들이 있습니다. 쏟아지는 잠을 막을 길은 없습니다. 이 문제는 인정사정도 없이 쏟아져 내려옵니다. 그런데 조금만 기다리십시오. 조금 있으면 실컷 잠잘 때가 곧 올 것입니다. 시인은 갈급해 합니다. 성전에 가고 싶은데 갈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사모함과 그리움과 갈급함이 몰려옵니다. 그 그리움은 언제 갈 수 있다는 기약이 없기 때문에 더욱 사무쳐 옵니다. 그리고 마음에 불안으로 다가 왔습니다. 그래서 고백하기를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며 낙심하며 어찌하여 불안해하는가”하고 자신을 달래고 있습니다. 사람은 늘 갈급해 하고 또 늘 불안해하는 존재입니다.

 

 

 

“구실하며 살아야 하는 존재”

 

 

 

본문 3절을 보면 “사람들이 종일 내게 하는 말이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하니 내 눈물이 주야로 내 음식이 되었도다”하고 눈물을 짓습니다. 여러분, 사람은 소명의 존재입니다. 인간이 신성한 것은 소명을 가진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값은 신성한 의무와 뜻과 소명을 가진 존재이기 때문에 소중한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자기에게 주어진 값이나 소명을 이루며 살고 구실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조롱받습니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가장 뼈아픈 불행은 조롱받고 살아가는 일입니다. 사람이 태어나서 자신이 할 일을 하지 않고 살면 조롱받습니다.

 

조롱 중에서도 자기 스스로에게 조롱받는 것이 가장 비참한 일입니다. 자기도 자기를 조롱합니다. 양심이 자신을 조롱합니다. 마음속으로 “너도 참 한심하다, 네가 어쩌다 이렇게 되었니”하고 자신이 자신에게 조롱합니다. 여러분은 그런 조롱 받아보지 않았습니까. 사람은 그때 가장 초라하고 누가 뭐라 하지 않아도 비참해 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방인들로부터 조롱받는 것도 참을 수 없는 일입니다. 지금 이방인들 틈에 끼어 살아가는 것도 자존심이 상하는데 이방인들이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하고 조롱합니다. 유대인들에게는 이것이 가장 뼈아픈 조롱입니다. 유대인들이 바벨론으로 포로로 잡혀가 살아가는 동안 그런 조롱을 받으며 살았습니다. 이방인들이 “네 하나님께 부르던 노래를 불러보라, 그러면 먹을 것을 주겠다”하고 조롱했습니다.

 

참 부끄럽고 이렇게 수치스러울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아무도 모르게 그발 강가로 가서 버드나무에 수금을 걸어놓고 다리 뻗고 울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눈물 흘리며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내가 배를 채우기 위해서 하나님께 드리던 노래를 팔면 내 혀가 입천장에 붙으리로다.” 그리고 그들은 눈물을 흘렸고 통곡했습니다.

 

오늘 그리스도인은 세상을 살아가면서 이런 자존심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자존심을 팔고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이 있다면 그 사람은 그리스도인도 아닙니다. 신앙인은 세상에서 책임 있게 살아야 합니다. 세상에서 분명하게 살지 못하면 이렇게 조롱을 받습니다. 동네에서 “네가 예수 믿는 사람이냐”하고 조롱받습니다. 직장에서 “너 같으면 차라리 예수 믿지 않겠다“하고 조롱받습니다. 그것이 최고의 조롱이고 욕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그 시대를 책임 있는 삶을 살아갈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살아가다가 실패만 해도 부끄럽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병들기만 해도 부끄럽고 면목이 없습니다. 그 점에서 목사는 더 면목이 없습니다. 목사는 몸이 아파도 죄송하고 기침만 해도 죽을 지경입니다. 목사는 딸만 낳아도 안 됩니다. 그러면 주례도 안 받으려고 합니다. 목사는 죽을 때도 폼있게 죽어야 합니다. 아니면 평생 쌓아놓은 스타일이 순간 구겨집니다.

 

그래서 그런 생각을 해 봅니다. 이제 목회하다 은퇴하고 그 후 85세까지 건강하게 살다가 85세 되는 해 5월에 하나님으로부터 “이제는 준비하라”는 계시를 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생을 준비하고 어느 날 저녁 식사를 마치고 가족들을 모아놓고 할 이야기 다 하고 잠자리에 들기 전에 폼 잡기 위해서 성경을 읽다가 콕 쓸어져 죽는 것입니다. 이것이 나의 종말의 날에 폼있게 죽는 시나리오입니다. 얼마나 멋있는 종말입니까. 그때 장례식에 온 사람들에게 나의 죽음의 이야기가 화제가 될 것입니다. 그것이 죽어서도 메시지를 남기는 죽음입니다. 그렇게 죽어야 하겠는데 그렇게 되리라고 믿습니다. 그리스도인은 그 시대를 살아가는 세상의 등불입니다.

 

 

 

“하나님을 바라보라”

 

 

 

여기서 시인은 결론을 내립니다. 5절을 보면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여전히 찬송하리로다”하고 끝을 맺습니다. 이것이 결론입니다.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궁극적으로 인간의 삶은 하나님을 떠나서는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매사 결론은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젊어서는 별 소리를 다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이 한때 하나님을 떠나 살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 시간이 길면 안 됩니다. 그러면 여기 이 시인처럼 피눈물 흘릴 때가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살아가면서 먼저 소중히 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이 예배를 소중히 여기는 삶입니다. 평소 바쁘다, 할 일 많다, 피곤하다 해서 예배생활 소홀히 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이것 한 가지는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우리들이 언젠가는 예배드리려고 교회에 가고 싶어도 갈 수가 없을 날이 올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때는 병석의 자리에서든지, 멀리 혼자 떨어져 있는 자리에서 이 시인처럼 눈물지으며 마치 사슴이 갈급해서 시냇물을 찾아 헤매고 실망하는 그런 날이 올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모하는 일에 전념해야 합니다. 바쁘고 피곤해도 예배를 소중히 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 삶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모하는 삶입니다. 그러면 그 마음에 하나님은 만족하게 채우실 것입니다.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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