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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설교 : 마 9:18-33 깨끗게 하시고 온전케 하시는 하나님 / 김동호 목사

by 【고동엽】 2021. 12.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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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끗게 하시고 온전케 하시는 하나님
마태복음 9:18-33


설교방송 (설교본문)


성경을 보면 도저히 인간의 이성과 상식으로는 믿을 수 없는 말씀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는 오늘 읽은 본문의 말씀 속에서도 그와 같은 말씀들을 쉽게 찾아 낼 수 있습니다. 오늘에 본문의 말씀을 보니 예수님은 혈류병자와 보지 못하는 자와 듣지 못하고 말하지 못하는 자들을 고쳐 주셨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죽은 사람을 살리시기까지 하셨습니다.

여러분은 이와 같은 말씀을 사실로 믿으실 수 있으십니까? 여러분은 예수님이 실제로 그와 같은 일들을 행하셨다고 믿으실 수 있으십니까?

중고등학교 때 친구들에게 예수를 믿으라고 전도를 하면 친구들이 어떻게 예수님이 물 위를 걸으실 수 있으며 어떻게 예수님이 죽은 사람을 살릴 수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물위를 걸으신 예수님을 이야기하면 한 발 빠지기 전에 또 한 발을 넣고, 한 발 빠지기 전에 또 한 발을 넣었느냐며 비아냥거리는 친구들이 많았습니다. 그때마다 저는 그 친구들에게 이렇게 대답하곤 하였습니다.

'너희들이 말하는 것은 사람이고 내가 너희들에게 믿으라고 말하는 것은 하나님이다. 사람이 물 위를 걷는다는 물론 말도 되지 않는 소리이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말이 되지 않는 소리가 있는데 그것이 무엇인지 아느냐? 그것은 하나님이 물에 빠지셨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하나님이신데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물 위를 걸으신 것이 무엇이 그렇게 이상하다는 말이냐? 없는 사람을 만드신 분이 하나님이신데 그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죽은 사람 하나 살리신 것이 무엇이 그렇게 이상하다는 말이냐?'






모든 문제는 예수님은 하나님으로 믿느냐 믿지 못하느냐에 달려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믿지 못하면 모든 것은 도무지 믿을 수 없는 소리가 되고 맙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으로 믿으면 모든 것이 다 이해되고 모든 것이 다 믿어집니다.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 떡 다섯 개로 오 천명을 먹이고도 열두 광주리가 남았다는 말씀도 이해되고, 예수님께서 죽은 사람을 살리시고 모든 병든 자들을 고치셨다는 말씀도 다 이해가 됩니다.






예수는 믿으면 있고 믿지 못하면 없습니다. 최근에 어떤 종교학자 한 사람이 '예수는 없다'라는 책을 써서 물의를 일으키고 있는데 그가 예수는 없다라고 주장하는 까닭은 그가 결국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그냥 훌륭한 삶을 사신 성인으로 이해하기 때문에 우리가 믿고 따르는 예수를 인정할 수 없었던 것이고,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믿고 따르는 우리들이 유치해 보이고 불쌍해 보일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 교수는 예수의 의미를 그가 하나님 이셨다는 데 두지 아니하고, 그냥 그의 훌륭하신 말씀과 삶에 두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세상에 한 분밖에 없다고 말하는 것이 옳지만 훌륭한 말씀과 삶을 산 사람이 예수님 한 분밖에 없다고 말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만 믿어야 구원을 얻는다는 말을 어리석고 편협한 생각이라고 단정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에게 우리들이 아무리 편협하고 유치하게 보일 수밖에 없는 까닭은 우리들은 저와 달리 예수님을 그냥 단순히 훌륭한 말씀과 삶을 사신 사람으로 보지 아니하고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하나님으로 믿기 때문입니다.






우리 크리스천들은 물론 예수님의 훌륭하신 말씀과 삶을 따라 살려고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우리 크리스천들은 그것을 포함하여 예수님을 사람이 되신 하나님으로 믿고 고백하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 중에도 그 종교학자와 같이 예수님의 신성을 부인하고 인성만 인정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저들은 엄밀한 의미에서 기독교인은 아닙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아닙니다.






저의 신앙은 어떻게, 왜 그렇게 되었는가를 설명할 수는 없지만 아주 분명하게 단순히 예수님의 훌륭하신 말씀과 삶을 본 받으려고 하는 차원을 벗어나 예수님을 인간의 몸을 입고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이 땅에 오신 하나님으로 믿습니다.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믿기 때문에 저는 예수님이 이 땅에서 인간으로서는 할 수 없는 여러 가지 기사와 이적을 행하신 것을 의심 없이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본문의 말씀을 어떤 가감과 해석 없이 그대로 믿습니다.






제 신앙에 있어서 기사와 이적은 사실 그다지 중요하지 않습니다. 저는 다니엘의 세 친구가 극렬히 타는 풀무 불 앞에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능히 건져내시겠지만 그렇게 아니 하실찌라도 왕이 만든 신상에 절하지 않겠다'고 고백한 '그렇게 아니하실찌라도'의 신앙을 좋아합니다.






제 신앙의 대부분은 예수님의 기사와 이적에 치우쳐 있지 않습니다. 제 신앙의 대부분의 예수님의 훌륭하신 말씀과 그 분의 훌륭하신 삶입니다. 제 설교의 대부분은 그의 말씀과 삶에 대한 것입니다. 저는 우리 높은 뜻 숭의교회를 개척하고 지금까지 불과 몇 달 되지 않지만 그 동안 한 번도 예수님의 기사와 이적에 포커스를 맞춘 설교를 한 적이 없습니다. 지난 몇 달 동안 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이제껏 설교를 해 오면서 저는 예수님의 기사와 이적에 대하여 거의 설교를 한 적이 없습니다.






너무 예수님의 기사와 이적에만 포커스를 맞춘 설교를 저는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제가 그렇게 하는 까닭은 제가 예수님의 기사와 이적을 믿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기사와 이적을 행하셨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그렇게 대단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할 수 있으면 그것을 말하지 않기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본문 30절에 보면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을 고쳐 주신 후에 엄히 경고까지 하시면서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그와 같은 말씀을 하신 까닭은 기독교 신앙의 포커스가 말씀에 맞추어지지 아니하고 예수님의 기사와 이적에만 맞추어 질 것을 염려하셨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저는 그와 같으신 예수님의 말씀과 뜻을 따라 예수님의 기사와 이적에 포커스를 맞춘 설교를 잘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제가 예수님의 기사와 이적을 믿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말하지 말라 하시기 때문에 말하지 않는 것뿐이지 저는 그 누구 못지 않게 예수님의 기사와 이적을 믿습니다. 저는 예수님을 그냥 훌륭한 말씀과 삶을 사신 사람으로 이해하지 아니하고 우리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직접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하나님으로 믿기 때문에 예수님의 그와 같은 이사와 기적을 믿는 것이 조금도 어렵지 않습니다.






진리를 이해하는 것과 이해한 진리를 행하는 것은 전혀 다른 것입니다. 이해하고 듣기는 쉬우나 그대로 살기는 어렵습니다. 그것은 저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말씀대로 살려고 나름대로는 노력합니다.






어버이날 큰 아이로부터 메일을 받았습니다. 제 아이는 그 메일에서 제가 부족하지만 설교한 대로 살려고 노력하기 때문에 존경한다고 이야기하였습니다. 그리고 그와 같은 저의 삶이 자신에게 큰 영향을 끼친다고 이야기 해 주었습니다. 세상의 그 어떤 선물을 받은 것보다 기뻤습니다. 부끄러웠지만 그러나 정말 감사했습니다.






저는 제 아이들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와 같은 평을 받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성경은 예수님에 대하여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에게 있어서 말씀은 곧 삶이었습니다. 성경은 세례요한에 대하여 '광야에서 웨치는 자의 소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세례요한에게서는 소리가 났습니다. 물론 광야에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고 소리를 질렀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를 소리라고 하신 까닭은 그는 그냥 가만있어도 그의 몸과 삶에서 소리가 났기 때문입니다. 저는 시를 쓸 줄 모르지만 만일 세례요한이라는 제목으로 시를 쓴다면 한 줄만 쓰겠습니다.






'그에게서는 소리가 났다'






제 최고의 욕심은 세례요한과 같은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저는 정말 그런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소리 같은 삶을 살기 위하여 가장 중요한 것은 진리를, 말씀을 이해하는데서 벗어나 그 말씀과 진리를 사는 것입니다. 소리는 이해에서 나는 것이 아니라 삶에서 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부족하지만 말씀대로 살려고 노력은 합니다. 진리를 이해하는 것은 어떤 면에서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해하고 깨달은 진리를 사는 것은 생각처럼 쉽지 않습니다. 부족하지만 힘들고 어려운 삶을 살려고 노력할 수 있는 힘은 믿음에서 나옵니다. 제 삶은 진리에 대한 이해에서 출발하고 그 진리를 말씀해 주신 살아 계시고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는 믿음에서 완성됩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살아보려고 부족하지만, 정말 부족하지만 발버둥치는 힘은 그와 같은 말씀을 하신 예수님이 그냥 현명하고 지혜로운 사람이 아니라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라고 믿는 믿음에서 옵니다.






말씀대로 살다가는 죽을 것도 같고, 망할 것도 같습니다. 죽고 망하는 것까지는 몰라도 틀림없이 손해를 볼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씀대로 살려고 용기를 내 보는 까닭은 예수님이 하나님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능히 나를 극렬히 타는 풀무 불에서 건져 주실 수 있는 능력이 있는 하나님이시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제 삶에서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진리를 이해할 수 있는 능력입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저에게 나름대로 진리를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신 것에 대하여 감사를 드립니다. 그러나 저에게 그 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진리대로 살 수 있는 능력입니다. 진리를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을 지혜라고 이야기한다면 진리를 살 수 있는 능력을 저는 믿음이라고 말하겠습니다.






제가 성경을 통하여 정말로 욕심을 내는 것은 솔로몬의 지혜입니다. 그러나 그보다 훨씬 더 욕심을 내는 것은 다윗과 아브라함의 믿음입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고백한 베드로의 믿음입니다.






'예수는 없다'라는 책을 쓴 교수는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믿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하나님이라고 기록한 성경을 사실을 기록한 말씀으로 이해하지 아니하고 우리에게 지혜와 교훈을 주기 위하여 기록한 말씀으로만 이해합니다. 성경을 fact로 보지 아니하고 meaning으로만 봅니다. 그는 성경이 fact에 대한 information을 주기 위하여 쓴 책이 아니라 meaning을 통한 transformation을 주기 위하여 쓴 책이라고 말합니다.






물론 성경에는 우리에게 어떤 사실에 대한 information이 아닌 변화에 대한 transformation을 목적으로 기록된 말씀이 많이 있습니다. 그와 같은 말씀 속에서 fact를 찾으려고 하는 것은 무의미합니다. 그것은 마치 시집(詩集)을 가지고 역사를 공부하려고 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와 말씀 속에서 무조건 fact에 대한 information을 찾으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저도 그와 같은 사실을 인정합니다. 그 교수의 그와 같은 지적은 매우 훌륭합니다.






그러나 그 교수나 놓치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성경 속에는 transformation을 위한 meaning만 있는 것이 아니라 정확한 information을 위한 fact도 기록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성경을 무조건 tranformation을 위한 meaning으로만 이해하여 정확한 fact에 대한 information을 부정해서는 안 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은 meaning이 아니라 fact입니다. 오늘 말씀은 우리에게 지혜와 지식을 주기 위하여 기록된 말씀이 아니라 믿음을 주기 위하여 기록된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훌륭한 삶의 교훈과 지혜를 주시는 단순한 랍비가 아닌 우리의 생명을 주장하시는 하나님이심을 가르쳐 주기 위하여 기록된 말씀입니다.






저는 오늘 본문의 말씀을 사실로 믿습니다. 저는 이 말씀을 통하여 내가 믿는 예수님이 단순한 선생이 아니라 나의 생사화복을 주장하시는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다시금 확인합니다. 그리고 지금 나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바로 이 믿음이라는 것을 인정합니다. 신앙은 이성을 부인하지 않지만 이성에 얽매여서는 안 됩니다. 신앙은 이성을 포함하지만 초월합니다. 이성으로 신앙을 이해하고 재단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저는 예수님이 열두 해 동안이나 혈류병으로 앓던 여인의 병을 낫게 하셨다는 말씀을 사실로 믿습니다. 저는 예수님께서 죽은 소녀를 살리셨다는 말씀을 사실로 믿습니다. 저는 예수님께서 앞을 보지 못하는 두 맹인을 보게 하셨다는 말씀도 사실로 믿고 귀신들려 듣지 못하고 말 못하는 사람을 고쳐 주셨다는 말씀도 사실 그대로 믿습니다. 저는 예수님이 사람이 되신 하나님이라고 믿습니다.






저는 오늘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우리 사람들을 사랑하셔서 어떻게 하든지 깨끗게 하시고 온전케 해 주시기를 원하시는 분이시라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 예수님은 우리가 아무리 절망적인 자리에 빠져 있다고 할찌라도 능히 우리를 깨끗게 하시고 온전케 하실 수 있는 능력이 있는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예수님의 표현이 있습니다. 그 표현이 오늘 말씀 속에도 나타납니다. 그것은 29절에 '너희 믿음대로 되라'는 말씀입니다. 그 말씀은 믿음대로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을 교훈을 위한 동화로 읽지 아니하고 우리의 믿음을 위한 사실로 읽을 수 있다면, 그리하여 여러분들이 금보다 귀한 믿음을 가지실 수 있다면 성경에 나타난 모든 기사와 이적의 주인공이 되실 줄 저는 믿습니다.






예수님은 오늘 우리들에게 물으십니다. '내가 능히 이 일 할 줄을 믿느냐?' 우리가 오늘 본문의 맹인과 같이 '주여 그러하오이다'라고 대답할 수만 있다면 예수님은 오늘 우리들에게도 '너희 믿음대로 되라'라고 말씀해 주시리라 저는 믿습니다.






예수님을 단순한 랍비가 아닌 사람이 되신 하나님으로 믿어 단순한 지혜와 교훈만이 아닌 하나님의 능력을 이 땅에서도 체험하고 경험하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들이 다 되실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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