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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설교.자료모음

요한복음 4:35-42(예배설교) 심는 사람과 거두는 사람의 세대간 동역

by 【고동엽】 2021. 12. 8.

너희는 넉 달이 지나야 추수할 때가 이르겠다 하지 아니하느냐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눈을 들어 밭을 보라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도다 거두는 자가 이미 삯도 받고 영생에 이르는 열매를 모으나니 이는 뿌리는 자와 거두는 자가 함께 즐거워하게 하려 함이라 그런즉 한 사람이 심고 다른 사람이 거둔다 하는 말이 옳도다 내가 너희로 노력하지 아니한 것을 거두러 보내었노니 다른 사람들은 노력하였고 너희는 그들이 노력한 것에 참여하였느니라 여자의 말이 내가 행한 모든 것을 그가 내게 말하였다 증언하므로 그 동네 중에 많은 사마리아인이 예수를 믿는지라 사마리아인들이 예수께 와서 자기들과 함께 유하시기를 청하니 거기서 이틀을 유하시매 예수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믿는 자가 더욱 많아 그 여자에게 말하되 이제 우리가 믿는 것은 네 말로 인함이 아니니 이는 우리가 친히 듣고 그가 참으로 세상의 구주신 줄 앎이라 하였더라 /


요한복음이 몇 달째 계속 되기 때문에 아마 진도가 너무 늦게 나가지 않나, 이런 생각을 하실 수 있습니다. 1월 9-20일까지 제가 인도네시아 발리에 있는 선교지 4곳을 방문하고 봉사활동을 한 것을 간략하게 보고드림으로써 여러분에게 해외선교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고자 합니다. 인도네시아는 우리 한반도의 7배 크기 나라로써 인구가 2억 4천만 명, 미국 다음으로 큰 나라입니다. 그런데 인도네시아 국경의 서쪽과 동쪽길이는 5천 킬로미터, 오른쪽에 파푸아뉴기니 이디안자야지역과 자바 수마트라 지역까지 길이가 5천 킬로미터입니다. 섬은 1만 7천개, 그 중에서 1만 1천개는 무인도, 아무데나 가서 우리가 정착해 살아도 인도네시아 정부는 그걸 간섭할 힘이 없는 겁니다. 그런데 인도네시아 인구 중 12%가 기독교인데, 중국 다음으로 기독교인 인구가 많은 나라, 그런데 그들은 박해 중에 있는 기독교인이기 때문에 미국이나 한국에서 보는 기독교인과는 완전히 다릅니다. 정신이 말짱말짱한 기독교인들입니다. 같이 예배를 드리면 은혜가 충만한 1천 6백만이 있습니다. 중국 기독교인과 인도네시아 기독교인 한국기독교인 브라질 기독교인, 이 네 기독교인이 21세기의 기독교계를 대표할 나라라고 세계 선교학자들이 말합니다. 그런데 그 중에서 인도네시아는 300년간 네덜란드의 식민 지배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네덜란드어와 라틴어가 그들의 알파벳이 됐기 때문에 라틴어와 독일어 네덜란드어를 알면 글자를 많이 읽을 수 있습니다. 많은 단어가 라틴어에서 나왔습니다. 케팔라 하면 머리죠. 인도네시아말로 끄빨라인데 캡틴입니다. 클라스를 끌라스라고 말합니다. 많은 단어가 인도 유러피언 언어를 알면 금방 알 수 있는 단어입니다. 우리는 50문장 정도를 외워서 봉사활동을 했는데, 통합측 대구동노회에서 개척한 지역을 다녔습니다. 대구동노회 신안교회라는 교회에서 허성수 장로님과 김순화 선교사님을 파송했고, 거기에 우리가 지금 6년 정도 이래로 계속 숭실대학교 교목실회 봉사단과 밀착된 동역을 하고 있습니다. 허성순은 남자분이고 김순화는 여자분인데 부부입니다. 이분이 인도네시아 발리의 최초의 기독교 순교자가 났던 곳, 운딸운딸이라는 곳, 발리라는 지도를 보면 제주도 2.7배의 큰 도인데, 거위 또는 닭이 한 마리가 모이를 쪼아 먹는 형상입니다. 닭의 염통 부위에 해당하는 곳이 바둥군인데, 그 바둥군의 밑에 있는 도시가 뎀파사루고, 뎀파사루 밑에 있는 도시가 지난 번 테러가 일어났던 구타해변의 두갈이라는 식당이 있습니다. 우리가 갔던 곳은 테러가 일어났던 곳에서 가까운 운딸운딸 지역인데, 이곳이 최초로 기독교인이 순교를 당했던 곳입니다. 운딸운딸 지역에 인도네시아 전역에서 오는 신학교가 있는데 조그만 합니다. 옛날 평양숭실 만큼, 평양장로교신학대학만큼 작은 학교입니다. 한 달 등록금은 6만원입니다. 신학교학생이 1년을 공부하니까 72만원이면 한명의 신학자를 배출하는데, 4년 동안 다녀야 합니다. 인도네시아 기독교가 진정성이 넘치는 가장 큰 이유는 모슬렘과 힌두교로부터 얻은 개종자입니다. 모슬렘과 힌두교는 기독교를 믿자마자 가문에서 축출됩니다. 그래서 직장이 없어집니다. 완전히 소외됩니다. 모슬렘과 힌두교인이 헤게모니를 쥐고 있는 인도네시아에서 기독교인이 되면 더 이상 승진할 수 없습니다. 반드시 그만 두고 나와야 합니다. 군청 과장이상이 되지 못합니다. 우리가 갔던 곳은 군청 과장 정도까지 승진하는 것을 감수하면서 3대째 예수를 믿고 있는 장로님 같은 분이 땅을 희사한 곳에 세운 유치원과 초등학교입니다. 유치원과 초등학교를 합해서 400명의 어린 아이들이 있는데, 이 아이들이 일주일에 두 시간씩 한국말을 배웠기 때문에 한국말을 제법 합니다. 보자마자 아이들이 엄청 아름답게 생겼습니다. 어른은 예쁜 사람이 없는데 아이들은 아주 예쁩니다. 어른이 되면 얼굴이 미워지는 이유를 물었더니 귀신을 섬겨서 그렇다고 설명을 하더라고요. 그런데 그 이유가 그런지는 모릅니다. 어린아이들은 한국 아이들과 비교할 수 없이 모든 아이가 다 너무 예쁩니다. 그런데 초등학교 들어가서 어른이 될 때 보면 온통 얼굴이 생기가 없는 얼굴로 바뀝니다. 힌두교가 발리섬의 97%를 주장합니다. 힌두교를 97% 주장하는 곳에서 기독교가 1881년에 네덜란드 선교사를 통해서 도입됐는데, 발리 지역에 기독교 선교가 시작됩니다. 여러분께서 한 번 갈 기회가 있으면 꼭 저랑 한 번 가고 싶은 곳이 발리 지역에 기독교인들이 유배당해서 개척한 밀림 지역입니다. 1881년에 네덜란드 선교사 야콥 더 룸이라는 사람이 전도를 하고, 자기가 전도했던 니고데모라는 인도네시아 첫 원주민에게 마침내 살해를 당합니다. 왜냐하면 야콥이라는 선교사가 원주민 니고데모를 전도했는데, 니고데모가 원주민 사회에서 너무나 박해를 받으면서 정신이상이 걸렸습니다. 정신착란에 빠져서 자기에게 불행을 가져온 이 선교사를 죽여 버린 겁니다. 그 선교사가 묻힌 무덤도 가봤습니다. 그 선교사가 죽고 30년 동안 선교가 중단됐다가 1931년 장도항이라는 중국 선교사가 와서 똑같이 운딸운딸 지역에서 전도를 시작합니다. 이 사람이 대단히 놀라운 일을 했습니다. 1년에 120명씩 세례를 주는 대역사가 일어납니다. 그래서 장도항 선교사가 약 5년 동안 선교한 결과 힌두교 한 복판이었던 운딸운딸 지역에 기독교 개종자로 가득 넘쳤습니다. 그래서 강에는 세례 받는 사람들이 가득 찼습니다. 이때 힌두교도들이 집중적으로 공격해서 살해당하고 집이 불탑니다. 그래서 운딸운딸 지역에 있는 기독교인들이 네덜란드 총독을 찾아가 담판을 짓습니다. 이 폭력행위를 중지시켜 주던지 우리에게 다른 살 곳을 달라고 하니까 65km 떨어진, 사람이 전혀 살지 않고 악어와 표범이 있는 밀림 지역에서 살라고 했습니다. 800 세대가 이주를 갑니다. 걸어서 이주를 갔는데, 최초의 이주기록을 보니까 표범과 악어가 있었다고 기록돼 있습니다. 아나콘다 같은 큰 뱀, 빌림빙살이라는 곳입니다. 찾아보면 나옵니다. 제가 가장 인상적이었던 곳이 이곳입니다. 이 밀림에 기독교인만 사는 집단촌이 형성됐는데, 지금 인도네시아 전역에서 환경이 가장 깨끗하고 범죄가 제로이고, 가장 주거환경이 좋은 곳으로 매년 꼽히는 곳인데, 농가소득이 높은 곳입니다. 빌림빙살이라는 지역으로 기독교인들이 자발적 유배를 당합니다. 800세대가 들어가서 공동체를 형성하고 250헥타르라는 넓고 사람이 없는 밀림지역에 가서 기독교인들이 교회를 개척하고 기독교 성지를 만듭니다. 그게 바로 장도항 선교사라는 선교사가 뿌린 씨앗입니다. 그런데 장도항 선교사는 너무나 급작스럽고 폭발적이고 엄청난 부흥의 역사를 가져오면서 힌두교 교인들로부터 뭇매를 맞고 추방을 당합니다. 추방당하면서 장도항 선교사가 뿌렸던 씨앗, 인도네시아 원주민들이 빌림빙살이라는 밀림지역에 개척했던 큰 교회가 지금 남아있고 지금도 150세대가 남아있는데 전부 기독교인들입니다. 완전한 평화가 지배하는 너무나 넓은 지역입니다. 발리섬 왼쪽에 그런 지역이 있습니다. 그런데 거기서 민박이 가능합니다. 제가 여러분을 데려가고 싶은 곳입니다. 그 민박은 아무 것도 없는 곳입니다. 전기만 간신히 들어오는 곳인데, 밀림에서 걷고 공부하면서 기도하기가 너무 좋습니다. 해외봉사활동을 9일간 바짝 하면 선교사님이 하루 반나절 정도를 이런 식으로 다니게 해줍니다. 그런데 9일간 바짝 하는 것은 아침 8시 반부터 밤 8시까지 유치원과 초등학교 고아 아이들을 섬기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 숭실대 임팩트 22기는 훈련을 잘 하고 가서 많은 호평을 받고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제가 인도네시아에 가서 깨달았던 것은 한국보다 훨씬 순결하고 너무나 열정적인 기독교인이 1 6백만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들은 박해중의 기독교인이고 손해를 감수한 기독교인이기 때문에 우리와 종류가 다릅니다. 눈빛이 다릅니다. 찬양 드리는 시간이 예배를 합해서 2시간 반이고, 복음성가가 우리와 다릅니다. 복음성가가 인도네시아 전통민요 가락에 흐르는데 아무 감동이 없이 노래를 부른 사람이 없습니다. 완전한 감동 안에서 찬양을 부릅니다. 힌두교는 재산의 반을 신에게 바칩니다. 힌두교 믿고 예수 믿을 때 십일조는 너무 쉬운 겁니다. 왜냐하면 10분의 5를 아예 신에게 바쳤기 때문에, 브라만 비시누 시바 , 힌두교의 세 신입니다. 창조의 신, 선신, 악신, 이 신들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서 재산의 반을 써버리는데, 힌두교는 이렇게 제물을 많이 바치는데 회계장부를 공적으로 관리하지 않기 때문에 제사장이 다 가져갑니다. 제사장이 전부 다 헌금을 개인금고에 집어넣기 때문에, 제사장을 힌두교 말로 뻔저따라고 합니다. 그런데 뻔저따는 현자 현인 학자라는 뜻입니다. 나마사야 다땅 나리 코레아, 나마사야 ?? 라고 하면 엄청 돈이 많은 사람인줄 알고, 뻔저따라는 말을 쓰자마자 뛰어옵니다. 혹시 이 사람한테 돈이 있지 않을까, 뻔저따라는 말을 쓰면 안 됩니다. 목사라는 말을 쓰면 엄청난 부자를 의미합니다. 목사님은 하나님의 대리자이기 때문에 부잣집에 살아야 하고 차를 제일 좋은 차를 타야 합니다. 힌두교 가정에서는, 그래서 목사님 집이 좋습니다. 우리는 힌두교가 간디 기독교에 끼친 영향이 매우 크다는 걸 알수 있고, 헌신이 매우 쉽습니다. 발리 힌두교도들은 제사를 지내는 시간이 직장보다 중요하기 때문에, 한국 가구업자 장로님이 인도네시아 발리에서 가구업을 하는데 3분의 1이 안 옵니다. 왜 안 오냐고 물으면 지금 신에게 제사를 드리러 가야 한다고 하고, 너 해고한다고 하면 해고하라고 합니다. 실제로 힌두교도들은 제사지내는 일이 어떤 직업상의 생계유지보다도 중요하기 때문에 그렇게 희생을 많이 합니다. 힌두교 신에 대한 경건으로 가득 찬 발리 섬에서 태어난 기독교인들이기 때문에 헌신이 너무 잘 돼 있고, 헌금을 정말 잘 합니다. 보통 아이가 한 집안에 8명이 태어납니다. 산아제한이 없기 때문에, 이 태어난 아이들을 양육하지 못해서 생기는 것이 고아원입니다. 고아원은 우리 고아원과 다릅니다. 부모가 없는 고아원이 아니라 공동체생활을 하는 고아원이기 때문에 아이들이 축구를 엄청 잘 하고 얼굴이 창창하고 오히려 집에 사는 아이보다 훨씬 더 좋습니다. 대부분 고아들이 공동체 생활을 하기 때문에, 가보면 항상 아이들이 축구를 하자고 합니다. 14-18세 짜리 아이들과 축구를 하는데 이 아이들은 맨발로 공을 차는데 한국에서 간 사람들이 이기지를 못합니다. 그렇게 인도네시아 사람들의 독특한 기독교, 헌신이 가득 찬 기독교, 그러나 힌두교 영향을 많이 받은 기독교가 발리 섬에 있습니다. 지금 발리섬은 인구가 400만명인데, 그 중 기독교가 20만 명 정도 됩니다. 15-20만명, 그런데 그 숫자는 모르는데 이슬람들이 많이 와서 힌두교의 목을 조르고 있습니다. 제가 갔을 때 한 목사님은 너무 전도에 열심인데, 모슬렘을 가가호호 방문하는데, 지방 도서의 모슬렘이기 때문에 테러가 없습니다. 모슬렘들이 선물을 받으러 크리스마스에 지금 이 만큼 되는 교회 예배당에 300명이 왔습니다. 그래서 성탄절 마다 텐트를 치고 예배를 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 지역 온도는 27-31도 사이입니다. 이런 순결한 기독교가 살아 있습니다. 원시림 같은 기독교가 살아 있는데, 제가 다니면서 이제 막 박해와 소멸의 감수하는 기독교가 인도네시아에서 꽃 피는 이 때에 우리 한국교회는 너무나 많은 스캔들과 영적인 오염들로 사로잡힌 것을 볼 때 가슴이 아픕니다. 줄 게 없습니다. 깨닫고 와야 할 게 많고 도전받아야 할 게 많습니다. 다만 한국은 지금 기독교로 유명하지 않고 대장금으로 유명합니다. 1년에 4번씩 대장금을 방영한답니다. 한국에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고, 오로지 이영애를 아느냐? 배용준 사진을 구할 수 있느냐? 이것만 계속 묻습니다. 그래서 그 사진을 하나 가지면 인도네시아 돈으로 5만 루피아, 우리나라 2천원입니다. 인도네시아 사람들은 친절하고 매우 소박하지만 인도네시아 기독교인들은 힌두교와 모슬렘의 박해속의 심령이기 때문에 헌신이 특심하고 예배가 살아 있다는 것, 그걸 제가 말씀드립니다. 여러분이 한 번 잘 조직해서 선교지를 한 번 다녀올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가장 특이한 것 중 하나가 신학교를 졸업하기 위해서 15명의 세례교인을 얻어야 합니다. 세례개종자를 15명 데려와야 합니다. 예배당에서 15명을 데려온 사람에게 담임목사가 사인을 하면 이 사인이 C학점입니다. 20명의 개종자를 내면 B학점입니다. 25명의 개종자를 내면 A학점인데, 우리가 갔던 곳에 25명의 개종자를 낸 너무나 멋지게 생긴 청년 전도사를 봤는데, 이 친구는 오토바이를 타고 다니면서 모슬렘들을 그렇게 많이 전도했습니다. 이 친구가 데려온 300명의 모슬렘이 성전에 다 모인 겁니다. 기독교가 착하기만 하면 편견이 없습니다. 그쪽 모슬렘들은, 지방모슬렘들은요. 이런 아주 색다른, 1900년대 우리 한국교회 같은 느낌이 드는 인도네시아 발리에서 11일간 있으면서 많은 충격적인 장면을 보았고, 인도네시아에서 지금도 복음이 활활 불붙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고, 힌두교의 박해와 이슬람의 보이콧 비협조 행정적인 탄압 속에 기독교가 꽃 핀다는 것, 그것이 훨씬 더 초대교회와 방불한 느낌이 든다는 것이 더 확신이 들었구요. 제가 발리 한인교회에 가서 설교를 짧게 했는데, 발리 현지인교회와 한인교회를 각각 갔는데, 현지인 교회는 150명이 다니고 한인교회는 60명이 다니는데, 발리 현지인교회에 밤예배에 갔는데 사람들이 우리가 한국에서 왔다고 음식을 엄청나게 차려놓고, 물론 발리음식들입니다. 우리가 먹기에는 쉽지 않은 음식들, 그걸 잔뜩 차려놓고 2시간 동안 예배를 드리고 8시반 9시까지 식사해도 개의치않고 계속 찬양을 하는 겁니다. 보통 예배를 드리면 2시간 반입니다. 발리 사람들은 시간이 돈이 아닙니다. 얼마든지 하나님을 향해서 2시간씩 바뀔 수 있습니다. 이것이 제가 발리에서 느꼈던 아주 독특한 인상이고, 신자들의 얼굴이 총총히 살아있기 때문에 오히려 우리가 그분들에게 배워야 합니다. 제가 오늘 발리 이야기를 한 이유는 요한복음 때문에 여러분이 힘들까 싶어서 이야기를 하는데, 발리를 가기를 원하면 신혼여행을 발리로 가는 것을 추천합니다. 해발 3100미터 아궁산이라는 휴화산이 있는데 산에 올라가면 초가을 날씨입니다. 너무나 아름다운 화산분화구가 많은 산입니다. 여러분이 아는 발리는 저 멀리 해변가에 있는데 윈드서핑하는 곳인데 그곳은 제가 볼 때 추천할만한 곳이 못됩니다. 저는 굉장히 지저분하다는 인상을 받았고 그런 휴양지는 적합하지 않다, 제가 가장 인상적인 곳은 산지역과 밀림지역, 그다음 우리 기독교인들이 집성촌을 이뤘던 멋진 기독교 마을, 그곳이 가장 아름다웠고요. 바나나는 길거리에 많이 있고, 야자열매도 따먹으면 됩니다. 따서 돌로 깨먹으면 됩니다. 돌로 깨기가 힘들어서 그렇지 아무도 막지 않습니다. 그 외에도 살랏과 두리안이라는 열대과일이 많이 열려 있습니다. 두리안은 아주 비린내가 많이 나는 독한 열대과일인데, 아이들에게 진정한 열대인이 되려면 두리안을 먹어야 한다며 마지막 밤에 테스트를 했는데 3분의 2가 먹지를 못하더라고요. 두리안 음식 먹어봤나요? 엄청난 냄새가 나는 열대과일입니다. 열대과일의 황제라고 합니다. 신혼여행을 딴 데로 가기로 한 사람들은 어쩔 수 없고요. 현준형제는 사이판으로 가기로 돼 있기 때문에, 아직 결혼한 사람에게는 발리를 추천합니다. 그 이유는 발리가 기독교 유적지가 많고, 관광지로 개발되지 않은 곳 중에 아름다운 곳이 많아요. 기름값이 1리터당 600원밖에 안 됩니다. 하루 종일 버스를 빌려도 버스비가 너무 쌉니다. 여관비 빌라, 민박하는 빌라가 너무나 쌉니다. 여행사를 통해서 가지 말고 저를 통해서 가면, 저랑 접촉했던 허성순 선교사님이 가면 크게 도와줄 것 같습니다. 발리 한인교회에 제 아는 제자의 친구가 담임목사더라고요. 거기서 또 즉석 부흥회를 했습니다. 아무튼 교실 바닥에서 잠을 자면서 다녔지만 너무나 행복하고 멋진 시간이었습니다. 발리 한인교회 또는 발리 신혼여행지를 추천합니다. 앞으로 새정부가 들어서면 북한도 신혼여행지로 많이 떠오를 것 같습니다. 결혼하지 않은 여러분에게 많은 희망을 드리고 싶습니다. 사마리아는 예수님에게서 큰 부담이었습니다. 예수님을 인류의 구세주가 되기 위해서 오신 분이라고 보면 안 됩니다. 여러분이 생각할 때 우리 구원중심으로 볼 때 예수님을 보면 예수님은 자기 꿈도 없고 자기 생애에서 이룰 과업도 없이 그냥 추상적이고 무시간적인 인류의 구새주가 되시기 위해서 오셨다고 생각하는 것은 굉장히 잘못된 겁니다. 예수님은 자기 생애 동안 이룰 구체적인 과업을 가졌던 분입니다. 그 구체적 과업이 무엇인가는 잘 드러나지 않습니다만 복음서를 잘 읽어보면 네 가지입니다. 예수님은 어떤 구체적 과업을 가졌는가? 예수님은 로마제국으로부터 이스라엘의 정치적 독립을 하기 위해서는 왕조를 세워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이건 왕조중심의 정치적 독립주의거든요. 무력항쟁주의입니다. 그런데 젤롯당들은 왕조를 세우고 국가적인 틀을 갖추는데 앞장섰습니다. 예수님은 반석위에 교회, 비무장 인간적인 계약공동체, 형제자매와 사랑이 가득 찬 공동체를 재결성하는 것이 예수님의 가장 우선적 관심사입니다. 예수님께 하나님 나라가 왔다는 말은 막연한 말이 절대 아닙니다. 아브라함 자손들이 모세와 다윗의 언약 아래로 다시 모여 서로 촘촘히 돌보는 공동체로 재탄생하는 것이 예수님의 lifetime mission 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인류의 구세주가 되겠다는 바울신학의 용어로 규정되기 이전에 예수님 자신이 이 땅에서 하신 일이 무엇인가? 아브라함의 잃어버린 자손들을 찾아서 이스라엘 열두지파를 재구성하는 것이 lifetime mission입니다. 이스라엘 열두지파를 모으겠다는 그 마음은 나는 선한 목자라는 말에서 가장 많이 나옵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10장 11-14절에서, 나는 선한 목자다, 이 말이 나온 게 에스겔 34장인데 다윗왕의 마음, 재림다윗, 즉 다윗왕의 후손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이냐? 옛날 다윗이 이스라엘 열두지파를 모아서 공과 의로 다스렸던 다윗왕국적인 평화를 회복하는 것, 사자와 어린 양이 한데 뒹구는 것, 그런 평화로운 공동체를 만드는 게 예수님의 제1과제, 그럼 예수님의 과제는 그 당시 누구와 달랐습니까? 성전을 중심으로 거룩의 위계질서를 가지고 민중을 구분하면서 계층화하는 바리새인적 사두개인적 종교 공동체도 아니고, 열심당원처럼 무력항쟁을 통해서라도 로마로부터 헤롯 분봉왕을 몰아내고 독립적인 신정국가를 세우려고 했던 왕조중심의 플랜도 아닙니다. 에세네파처럼 고결한 분리주의자가 돼서 광야에서 분리돼서 도시사회를 포기해버리고 저 광야로 나가 빛의 자녀들이 되겠다고 다짐했던 순수정결주의자도 아닙니다. 예수님은 도시 안에서 마을 안에서 촌과 성읍을 두루 다니면서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는 자의식을 심어주고, 형제자매들에게 의로운 친구가 되도록 이스라엘의 열두 공동체를 똘똘 뭉치게 만드는 것이 예수님의 lifetime mission입니다. 이걸 여러분이 먼저 알아야 합니다. 이걸 알고 나서 바울신학으로 가야 합니다. 예수님이 자기 당대에서 해야 할 구체적인 과업이 있었다는 걸 모른 채 바로 우리 구원을 위해서 십자가에 매달려 죽었다는 둥, 이런 식으로 논리적 비약을 하면 감동자체가 오지 않습니다. 이 lifetime mission 예수님이 자기 생애에서 해야 할 일, 이스라엘 열두지파의 회복입니다. 이스라엘 열두지파의 회복은 선한목자에게 주어진 사명입니다. 선한목자에게 주어진 사명 중에 에스겔 36장 37장에는 이런 말이 나옵니다. 해외에 흩어져 있는 지파, 해외에 흩어져 있는 모든 동포까지 끌어 모으는 강력한 자기장 같은 리더십, 이것이 에스겔 36장에 나오는 선한 목자이기 때문에 해외에 있는 디아스포라 유대인마저도 끌어 모으는 선한 목자, 이것이 예수님의 구체적인 lifetime mission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생각을 하신 겁니다. 왕조를 세울 생각도 없었고, 제사장 중심의 성전의 지배체제를 공고하게 할 마음도 없었고, 정결한 수도분리공동체를 구성할 마음도 없었고, 예수님은 각자 자기 삶의 자리에서 아브라함의 자손답게 사는 삶의 도를 성령의 감동 안에서 치유 안에서 회복 안에서 화해 안에서 가능하게 하려고 했던 분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병자를 고쳐준 것, 예수님이 화해시켜준 것, 예수님이 아브라함의 잃어버린 자를 불러와서 민족반역자로 살던 세리들을 하나님 백성의 세리로 만들어준 까닭, 재활복구 절차를 거친 까닭은 아브라함 자손공동체를 회복하기 위한 것입니다. 이것이 가장 큰 것입니다. 두 번째로 아브라함 공동체를 회복하기 위하여 예수님은 사마리아 이슈, 사마리아와 유대와 갈릴리로 갈려진 삼등분된 적대의 담벼락을 허물어뜨리는 것이 예수님의 과업이었습니다. 예수님 과업 중에, 4장 3절 보세요. 사마리아를 통과해야 할 일, 이것은 예수님의 특수한 과업의식이고, 4장 34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 사마리아로 보내신 뜻이라는 말로 먼저 이해야 합니다. 이걸 자꾸 추상적으로 세상으로 보내신 뜻이라고 풀면 안 됩니다. 맥락 안에서 먼저, 예수님께서 사마리아와 유대와, BC 125년에 유대와 사마리아 사이에 있었던 전쟁의 상처, 동족상잔의 상처를 해소하고자 하는 그 열망이 너무 강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북쪽 갈릴리에서 컸기 때문에 유대인들의 사마리안 편견이 약했습니다. 유대인들 중에서 사마리아인을 싫어한 사람은 유대인 종교 엘리트들이 사마리아인들을 싫어했습니다. 유대인들이 사마리아인들을 다 싫어한 게 아닙니다. 사마리아가 그리심산에서 성전을 지었기 때문에 그 성전을 지었던 사마리아 사람들의 종교적 헤게모니를 증오했던 유대인 종교지도자들이었지, 일반 민중은 그렇게 미워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범사마리아에 대한 우호적 감정을 통하여 사마리아와 유대 사이에,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에 평화를 도모하고자 하는 것, 이것도 lifetime mission 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로마제국에 앞잡이노릇을 하는 세리들과 군병들을 친하나님 쪽으로, 하나님백성 이스라엘 백성 내부구성원으로 재활 복구시켰죠. 창녀들을 재활 복구시켰죠. 예수님은 쓰레기 같은 죄인들을 하나님의 자녀공동체로 재활복구시킴으로 부자가 구원받고 감동받아서 사회정의를 위한 funding을 하도록 도우신 겁니다. 그래서 삭개오 같은 사람 한 사람이 예수님께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삭개오 주변 사람들은 삭개오의 회개 때문에 평화를 맛보고 정의를 맛보았습니다. 가버나움의 세리였던 레위가 전향함으로써 그 주변이 정의롭고 그 주변이 평화를 맛보게 만들었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lifetime mission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예수님의 말뜻은 땅을 갖지 못한 사람에게 땅을 돌려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희년제도를 실시하지 않아 지주가 오랫동안 땅을 소유하면서 땅을 돌려주지 않은 사람들을 감동시켜서 땅을 돌려주게 만드셨고요. 두 번째로 채무노예가 되어서 감옥에 갇힌 자들을 풀어주도록 채무자들의 채무탕감을 설득하셨고, 실제로 귀신들리고 병들고 아픈 사람을 고쳐주심으로 총체적인 치료와 회복과 구원을 맛보게 만든 것이 예수님의 lifetime mission이었다, 구체적인 lifetime mission이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몰두한 겁니다. 예수님은 절대로 자기 당대의 성취할 과업의 분량을 의식하지 않고 막연하게, 나는 인류의 메시아가 돼야 할 텐데 언제 십자가에 못이 박힐까? 십자가에 못 박힐 생각만 한 그런 자기 강박적인 사람이 아니라 교제의 기쁨을 아시는 분이었고, 먹는 즐거움과 포도주를 마시는 기쁨과 무리지어 어울려 다니는 청년의 기상들을 다 아시는 깊이 살아 있는 분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 괄호하고, 사마리아와 유대와 사마리아와 갈릴리의 화해, 그 뜻을 행했더니 너무 기분이 좋아서 진수성찬을 드신 것과 똑같았습니다. 그래서 하는 말이, ‘나를 보내신 이의 뜻’ 이스라엘 열두지파를 회복하여 은혜공동체, 평화공동체, 서로 촘촘히 돌보는 상호인애의 공동체를 회복하는 것이야말로 하나님의 뜻이었기 때문에 이 뜻이 성취되니까 너무 기분이 좋은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lifetime mission의 구체화를 위해서 하나님께서 제자를 양성하라고 하셨기 때문에, 요한복음 17장 4절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 그 뜻 중에서 제자를 양성하여 세상에 파송하는 일, 이것도 하나님께서 예수님께 맡긴 당대의 mission입니다. 요약하면 이스라엘 열두지파를 회복하고 해외 동포까지 포함하여 원래 하나님의 통치를 기다리는 준비를 시킬 것, 하나님 나라의 통치를 받을 준비를 시킬 것, 하나님의 통치를 받기 위해서는 회개를 해야 하기 때문에 회개하라는 메시지를 시종일관 베푸신 것, 예수님은 회개하라는 말을 참 많이 했습니다. 그 회개의 결과 모든 육체가 하나님 영광을 보는 상태가 일어나게 만들었어요. 그래서 여러분, 예수님의 목적은 무엇입니까? 예수님 당대에 하나님 나라의 통치를 구현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답입니다. 예수님 당대에 하나님 나라가 나타났습니다. 예수님을 만지는 모든 사람이 정결케 되었고, 예수님의 시선을 받은 사람이 치료가 되었고, 예수님의 손에 일으킴을 받은 사람이 일어났습니다. 앉은뱅이가 일어났습니다. 눈먼 자가 눈을 떴습니다. 이게 하나님 나라 아닙니까? 채무노예가 된 사람들이 풀려났습니다. 땅을 갖지 못한 사람들이 땅을 가졌습니다. 이런 범 하나님의 압도적인 은혜의 통치가 예수님이 가져온 효과입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은 막 영광을 돌렸습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는 말은 하나님 통치가 지금 나타났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던 이유는 날 때부터 소경된 자를 돌보시는 자는 우리 이스라엘 모두를 돌보신 것이다, 이렇게 된 것입니다. 날 때부터 소경돼서 성전 앞 미문 앞에서 성전에서 걸인 생활하던 그 사나이를 돌본 하나님은 우리 모두를 돌본 것이다, 이렇게 된 겁니다. 12년 동안 혈우병 걸린 여인을 고친 것은 우리를 모두를 고친 것이다, 이런 함묵적인 구원이해 때문에 하나님께 영광 돌린 것입니다. 우리 한국교회가 모든 사람을 다 구원하지 못해도 날 때부터 소경된 비참한 사람을 구원하면 한국사람 모두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이 그 안에 드러나는 겁니다. 그렇게 따지면 하나님의 구원은 선택적 우선이 있습니다. 가난한 사람이 우선입니다. 대한민국에 하나님 구원이 나타났다는 것은 대한민국의 일반정치체제를 통해서는 도저히 구원의 근처에 가보지도 못하는 그 사람이 권고받고 그 사람이 구원받아야만 하나님의 구원이라는 말을 할 수 있는 겁니다. 절대로 가난한 사람은 인간 정치로는 구원을 못합니다. 가난한 사람에게 복음이 전파된다는 것은 하나님의 통치만이 가능한 일입니다. 절대로 마르크스나 레닌이나 모택동이나 쿠바나 미국 자본주의나 일본자본주의나 누구도 가난한 사람을 우선시하면서 그들을 구원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11장 5절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이것이 예수님이 가져오신 하나님 나라입니다. 예수님이 가져온 하나님 나라는 그 당시 하나님 나라 복음에 저항하는 사람들을 많이 불러 일으켰겠죠? 누가 가장 큰 문제가 됐을까요? 고리대금업을 하는 사람이겠죠? 로마제국의 역사에서 줄리어스 시저를 찔러 죽인 사람이 마르쿠스 브루투스입니다. 두 명의 브루투스가 있어요. 카시우스라는 사람도 있고 브루투스라는 사람도 있는데, 로마원로원 300명 중에서 16명이 가담한 것이 BC 44년 3월 15일에 일어난 줄리어스 시저의 암살사건입니다. 줄리어스 시저를 찔러 죽인 사람 중 한 사람이 고리대금업자입니다. 브루투스, 48% 고리대금업자입니다. 줄리어스 시저가 고리대금업을 금지했습니다. 지방민들에게 해외속주민들에게 돈놀이하는 것을 반대했기 때문에 줄리어스 시저가 로마 자유농민들에 대한 평등경제, 형평경제를 실시했습니다. 이 사람에게 미움을 많이 받은 세네카라는 사람입니다. 세네카가 줄리어스 시저를 죽이는데 앞장선 모든 암살자의 배후조종자입니다. 이 사람은 고리대금업자입니다. 줄리어스 시저가 가져오는 모든 계획은 그들에게 불안을 줬습니다. 예수님이 가져온 이 변화는 예수님을 죽여 버리지 않고는 안 된다고 느낄 만큼 그 당시 뿔뿔이 흩어졌던 적수들 대적자들을 하나 되게 뭉쳤습니다. 예수를 죽여야 한다는 일로 하나 되게 만들었습니다. 그게 누구입니까? 바리새인 사두개인 서기관 장로들 로마제국, 평소에 사이가 다 안 좋았습니다. 예수가 몰고 온 이 엄청난 혁명적 변화를 막는 길은 6명의 파당이 뭉치는 길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죽었는데, 예수님이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 가져오기 위하여 시도하다가 죽임을 당했는데, 하나님 나라의 통치를 총체적으로 가져오다가 죽임을 당하면 예수님 죽음 이후로 하나님 나라가 stop이 되는 것이죠? 모든 세계사의 혁명적 변화는 혁명지도자가 죽으면 끝나지 않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의 경우는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게 하셔서 복제인간 예수를 엄청나게 역사 속에 풀어버리셨습니다. 그래서 만민에게 구원사건이 일어난 겁니다. 예수님은 당대적 국지적 이스라엘 한 시대의 하나님 나라의 운동을 했는데, 한 시대의 국지적으로 일어난 하나님 나라의 운동을 영원한 하나님 나라 운동의 모델 패러다임으로, 영원히 하나님 나라의 운동은 이런 방식으로 일어나야 한다, 표준적인 하나님 나라의 운동을 시대에 거쳐 만민에게 배포하고 복제시킨 사건이 십자가 부활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했다는 말은 예수가 한 일은 옳다, 전 세계 만민에게 일어나야 할 하나님 나라 운동이다, 예수님이 일으킨 하나님 나라 운동이야 말로 전 세계 만민에게 일어나야 할 하나님 나라 운동이기 때문에 하나님 나라 운동의 기업을 가진 너희는 땅 끝까지 가야 한다, 그게 바로 세계선교입니다. 예수님이 일으킨 하나님 나라 운동을 세계적으로 적용 가능한 운동으로 인을 치신 사건이 부활사건입니다. 초시간적인 효력을 갖는 사건,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은 패배가 아니라 당신이 일으킨 하나님 나라 운동의 세계적 공인절차입니다. 그래서 대한민국에 만일 하나님 나라가 왔다면 예수님하고 똑같은 일이 일어나야 합니다. 가난한 사람에게 복음이 전해져야 하고, 앉은뱅이가 일어나야 하고, 상호 돌봄의 정신이 많이 일어나야 하고, 사자와 어린 양이 춤을 춰야 하고, 그것이 일어나야만 성령이 함께 하는 하나님 나라 운동이 되는 것입니다. 만일 그것이 일어나지 않고, 힌두교처럼 샤머니즘처럼 교권을 가진 사람이 부자가 되고 민중의 가장 깊은 탄식소리는 예배당에 모여 한 번도 하나님을 향해서 타전되지 못하고 이 땅의 가장 억울하고 부조리한 삶의 질서가 하나님께 왜 이렇게 되었느냐고 외쳐지지도 않는다면 그건 교회가 아니고, 그건 하나님 나라 운동이 아닙니다. 지금 한국교회는 하나님 나라 운동 대열에서 이탈한, 한국의 전통적인 타락한 불교 타락한 유교 타락한 도교 타락한 샤머니즘, 타락한 종교의 혼탁한 흐름을 장악하는 사람이 똑같이 교회라는 간판을 붙였기 때문에 헷갈렸고 여기서 우리는 많은 혼선이 있습니다. 저도 오랫동안 이것이 고민되었습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한국 교회는 가라지와 알곡이 각축하고 있다는 겁니다. 정통하나님 나라 교회는 절대로 이런 양상으로 들어가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서 그건 미성숙한 것이 아닙니다. 조용기 목사는 미성숙한 사람이 아니라 잘못된 씨앗입니다. 씨가 다른 겁니다. 처음에는 이 사람들이 미성숙하다고 생각했는데 씨앗이 다릅니다. 지금 한국교회 범조용기류의 교권침탈 재산 강탈 교회 세습 이런 모든 범죄는 뭐가 약간 잘못돼서 그런 게 아닙니다. 아예 처음부터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아니고 하나님의 성령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겁니다. 우리는 처음에 미성숙이 아닐까 라고 생각했습니다. 미성숙이 아닙니다. 절대로 다른 복음이고, 그건 예수님의 복음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일으킨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사마리아에 가서 사마리아 여자 한 사람과 영적 소통을 하고 너무 기뻐 이런 말을 하십니다. ‘너희는 넉 달이 지나야 추수할 때가 이르겠다 하지 아니하느냐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씨를 뿌리지 마자 저렇게 몰려오는 사마리아 사람들을 보라, 추수할 때가 되었다, 사마리아 사람들이 몰려오니까 예수님은 ‘너희 눈을 들어 밭을 보라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도다’ 사마리아 여인 한 사람에 뿌렸던 씨앗이 금방 열매를 맺었습니다. ‘거두는 자가 이미 삯도 받고 영생에 이르는 열매를 모으나니 이는 뿌리는 자와 거두는 자가 함께 즐거워하게 하려 함이라’ 예수님 자신이 이미 보상을 받았습니다. 제자들은 보상을 받았습니다. 어떤 보상을 받았습니까? 사마리아 사람과 예수님 사이에 뿌리 깊은 적개심이 해소되는 상, 임금입니다. 상을 받았습니다. 사마리아가 이스라엘의 일부분으로 돌아오는 기쁨을 만끽했습니다. 그게 바로 보상입니다. 그게 바로 거두는 자의 상금, 임금입니다. 예수님은 영생에 이르는 열매, 영생이 무엇일까요?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단련된 사람이 누리는 것이 영생입니다. 이것이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인생입니다. 여러분,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단련된 사람이 그냥 일상적으로 하나님 나라인줄도 모르고 살아가는 행복한 삶, 그게 하나님 나라입니다. 하나님 나라 엄청나다, 그런 것이 아니라 지금 이 땅에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위해서 삶의 모든 우선순위를 조정해서 사는 사람, 그것이 영생입니다. 그 영생을 위하여 열매를 거두신 겁니다. 증거는 무엇입니까? 내가 영생을 위하여 알곡으로 추수되었는가? 그 증거는 이것입니다. 내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싹둑 잘렸는가? 내가 예수님 말씀을 듣고 잘린바 된 추수 알이 되었는가? 낱알이 되었는가? 예수님 말씀으로 내가 세상과 분리되었는가? 예수님 말씀으로 내가 세상의 모든 욕정으로부터 창조적 분리를 경험했는가? 내가 예수님 말씀으로부터 이 세상의 헛된 옛날의 ambition으로부터 분리를 경험했는가? 내 삶의 목표가 제대로 되었는가? 구원받은 형제들과의 공동체 생활과 교제하는 삶이 나에게 희열을 주는가? 그렇습니다. 우리가 많은 책을 읽는 것도 감동되지만 신앙심이 좋고 멋진 사람들과 그들의 정기를 묵상하고 그들을 가만히 쳐다보고 있는 것도 우리에게 용기를 주고 힘을 줍니다. 그게 바로 영생에 이르는 열매입니다. 한 사람이 심고 다른 사람이 거둔다는 말은 사도행전 8장을 예상하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요한복음 4장에서 심었던 그 파종이 대규모의 열매를 맺은 때가 사도행전 8장입니다. 사도행전 8장에 보면 빌립과 베드로와 요한이 사마리아 역사에 대역사를 이루고, 9장 31절에 마침내 이렇게 나옵니다. ‘사마리아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 가고’ 아마 요한복음은 사마리아인들이 많이 들어와 있는 교회일 것입니다. 왜? 사마리아에 대한 가장 많은 증언이 들어 있고, 요한복음 8장에서 예수님을 사마리아 사람이라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은 사마리아와 유대인들이 합동하여 이룬 연합교회의 복음서이다, 사마리아와 유대인들이 하나가 되어 이룬 복음서가 요한복음서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 당대의 lifetime mission, 이것에 충실할 때 영원한 성취를 이룰 수 있습니다. 우리 당대에 해야 할 일에 충실할 때 세계사적으로 영원한 가치가 있는 일에 투신하는 셈이 된다는 것, 너무 중요합니다. 우리 당대에 해야 할 lifetime mission이 무엇입니까? 촘촘히 돌보는 공동체를 만드는 것입니다. 이 대한민국에 태어난 모든 사람들에게 인간의 존엄성을 만끽하도록 도와주는 대한민국의 가장 약한 사람들이 대한민국에 소속감을 느끼도록, 하나님 나라의 소속감을 느끼도록 만들어야 합니다. 대한민국 단위에서 못하니까 교회부터 하라는 겁니다. 교회에 소속됐다는 이유로 내가 하나님 나라의 영토에서 받는 은총의 햇살을 만끽한다고 느끼게 만들어 주는 것, 그럼 가난이 우대받는 교회가 되겠죠? 가난한 사람이 우대받는 교회가 되려면 헌금을 많이 한 사람을 우대하는 분위기가 은닉돼야 하겠죠? 헌금 많이 하는 사람은 여전히 가치가 있고 그들은 존중받아야 하겠지만 그것이 가난한 사람을 교회에 오는 것을 막는 이데올로기가 되면 안 되겠죠? 촘촘히 돌보면서도 아무도 권리를 요구하지 않는 공동체, 아무리 봉사를 많이 하지만 권력을 요구하지 않고 기득권을 요구하지 않는 공동체, 공기처럼 자기를 은닉하고 얇게 자기를 감추어버리는, 무진장 사랑의 수고를 하고도 공기처럼 자기를 은닉하고 가볍게 하는 사람들, 이런 공동체에 가난한 사람을 우대하는 분위기가 형성되지 않겠습니까? 교회부터 그렇게 된다면 무슨 확신이 들까요? 교회에서 된다면 대한민국 전체에서 된다는 확신이 들기 때문에 법이 바뀌겠죠? 제도가 바뀌겠죠? 김종철 교수님이 최근에 농민들에게 돈을 수십조 주지 말라, 농민들에게 5조, 7조, 수십조를 줬습니다. 그런데 그 돈이 빚과 노름으로 다 갑니다. 김종철 교수님의 말은 이것입니다. 5조를 매달 농민에게 100만원씩 기본소득으로 주면 지방 오일장이 살아납니다. 저는 모든 국민이 기본적으로 국민인 한 받는 기본소득을 준다면 실업문제가 해결됩니다. 내수경제가 살아납니다. 골목상권이 살아납니다. 예산이 충분히 가능합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가장 좋은데 그게 바로 희년정신입니다. 이스라엘 땅에 태어났다는 것만으로 땅의 소출로부터 혜택을 자동적으로 받았던 것이 희년정신이거든요. 대한민국에 태어났기 때문에 행복추구권의 이름으로 대한민국에서 행복하게 살 최소한의 권리를 보장해주는 제도, 이런 게 국민소득권입니다. 알래스카가 지금 이렇게 하고 있습니다. 알래스카의 주민이 됐다는 이유만으로 알래스카에서 나오는 모든 유전을 다 줍니다. 베네수엘라가 지금 이렇게 하고 있습니다. 베네수엘라에서 나오는 모든 석유자원은 국민에게 공평하게 배당됩니다. 베네수엘라에서 나온 모든 석유는 베네수엘라 국민에게 속했다면서 소득을 다 나눠줍니다. 룰라 대통령이 저소득층 편모슬하에 사는 5천만 명에게 국민소득을 다 나눠줬습니다. 룰라 대통령이 국민소득을 나눠줌으로써 엄청난 사회적 형평작업이 일어났습니다. 룰라 대통령이 밀었던 여자 대통령이 86%로 다시 당선됐습니다. 지금 대한민국의 경제 불황은 구매력의 만성결핍입니다. 구매력의 만성결핍은 경제 불황입니다. 왜? 고가상품은 계속 팔리지만 일반 중저가 상품은 팔리지 않기 때문에 물건이 안 팔리니까 공장이 돌아가지 않습니다. 그런데 모든 사람에게 촘촘한 은혜로 사회안전망을 해주면 사회가 살아납니다. 이 세상 사람들은 이걸 원치 않습니다. 왜? 왜 일도 안 하는 사람에게 은혜로 주려고 해? 왜 일도 안 하는 사람에게 공짜로 주려고 해? 그렇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일도 하지 않는 자에게, 의롭지 못한 자에게 의롭다고 선언해주는 곳이고, 이걸 경제적으로 치환하면 하나님 나라는 일하고 싶지만 일할 기회가 없는 사람에게 공짜로 임금을 지불하는 제도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의 은혜를 경제학적으로 치환한 것입니다. 그런데 부분적으로 큰 성공을 거두었기 때문에, 김종철 교수와 신문사설에서 국민소득배당제라는 말이 막 나옵니다. 왜냐하면 만성구매력 결핍을 해결하는 길은 소득을 일정하게 배급하는 것밖에 없습니다. 아마 여러분은 1,2년 내로 이런 말을 더 많이 들을 겁니다.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가 죽어서 천당 갈 것을 창백하게 기다리면서 이 세상 포기하고 아주 음울하게 사는 것을 바라는 게 아니라 이 땅에 하나님 나라가 임하는 걸 기뻐하고, 이 땅에 하나님 나라의 통치를 구현해 내는 일에 투신할 때 우리의 국지적이고 한시적인 노력이 영원히 가치 있는 노력이 될 것을 믿게 해주십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아버지 하나님 예수님은 자기 당대에 성취해야 할 과업이 뚜렷하여 유대와 사마리아 갈릴리 사이에, 열두지파 사이에 하나 되는 이치를 꿈꾸며 그 일에 투신하였습니다. 그 일에 투신하다가 하나님 나라 운동이 좌절되었지만 예수님께서는 죽은 자 가운데 부활하셔서 전 세계 만민에게 하나님 나라 운동을 펼쳐주셨습니다. 주님 우리 한국에 2012년에 사는 그리스도인들이 우리 당대에 성취할 하나님 나라 운동의 단위를 허락하시고 그 비전을 고취시켜 주시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주님 우리가 감격적으로 하나님 나라에 동참하며 감격적으로 하나님 찬양하며 사랑하는 기쁨 주소서. 권태를 이기고 무기력과 냉담을 이기는 사랑의 열정을 허락하여 주소서. 예수님 이름 들어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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