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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복음

복음에 합당한 생활 (빌 1:27-30)

by 【고동엽】 2021. 11.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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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에 합당한 생활  (빌 1:27-30)

프랭클린 박사가 일본 근처의 섬들에서 선교할 때 경험했던 일화가 있습니다.
어느 날 해가 저물었을 때 한 상인이 프랭클린에게 오더니 다른 섬에 매우 복음을 듣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있으니 가서 그들을 만나 달라고 청했습니다. 그런데 그날 따라 프랭클린은 너무도 고된 일에 지쳐 있었기에 최근에 복음을 받아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어 구원받은 사람에게 “저는 지금 너무 지쳐 있으니 당신이 제 대신 그들에게 성경을 갖다 주시지 않겠습니까”라고 말했을 때 그 신자가 이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아닙니다. 지금은 그 사람들에게 성경을 갖다 줄 수 없습니다. 성경은 박사님이나 저와 같은 사람이 볼 수 있는 책입니다. 그 섬 사람들은 아직도 박사님 당신을 읽고 있습니다.
그 날 밤 프랭클린 박사는 잠을 이룰 수가 없었습니다. 밤새도록 그 신자가 한 말이 뇌리에서 떠나지를 않았습니다.
“그 사람들은 아직도 박사님, 당신을 읽고 있습니다.”
프랭클린은 동이 트기 전에 사람들을 만나기 위하여 다른 섬으로 갔습니다.

그렇습니다. 아직 거듭나지 못한 사람들은 그리스도인의 모습과 삶에서 향기를 맡고자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삶과 모습에서 성경 말씀의 진리를 들으려고 합니다.
이것을 깨닫지 못할 때 우리들은 복음에 합당한 생활을 할 수 없게 되고 그것은 우리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리스도의 복음에 먹칠을 하는 것이 되고 복음 전도에 장애가 되는 것입니다. 얼마나 슬프고 주님 보시기에 안타가운 일입니까?

오늘 본문은 바울을 통하여 하나님이 빌립보 교회 성도들을 깨우치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이 말씀이 오늘은 이 강단을 통하여 우리 모두를 깨우치는 말씀이 되길 바랍니다.

바울은 옥중에서도 빌립보 교회 교인들의 평안과 영적 진보를 염원하는 참된 목자의 심정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바울에게 있어서 빌립보 교회는 잊을 수 없는 교회입니다. 마게도냐를 건너가서 처음으로 찾아가 복음을 전한 도시가 빌립보였습니다.(행 16:9-40) 빌립보 교회는 루디아를 중심으로 하여 여성들이 바울의 선교 사역을 적극 지원한 교회였으며 유럽에 세워진 최초의 교회라는 점에서 큰 의의를 지니고 있습니다.
빌립보 교회 교인들은 바울에 대하여 물질과 마음으로 너무도 따뜻하고 아름답게 섬기고 후원했던 교회였습니다.(고후 11:8-9)
본문에 앞서 1-11절까지는 빌립보 교회 교인들을 향한 바울의 간절한 기도의 내용입니다. 옥중에서도(7절) 빌립보 교회를 잊지 않고 기도하는 바울의 마음은 다음 몇 가지로 요약됩니다.
첫째는 빌립보 교회에 사랑이 더욱 넘치기를 바라는 것으로서 그 사랑이 맹목적인 것이 아니라 지식과 총명을 갖춘, 그래서 절제와 분별력을 갖춘 사랑이 넘치기를 기도했습니다. 그것은 성도의 진정한 복음에 합당한 생활의 기초가 되는 것입니다.
둘째는 빌립보 교회 교인들이 예수를 구주로 믿어 죄사함 받은 사람이라면 성령으로 말미암은 의의 열매를 풍성히 맺는 성도가 되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를 소망하는 기도였습니다.
규모 없이 행하여 교회에 거치는 자가 되지 말고 진리 안에서 아름다운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함으로 온 성도가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늘 우리 교회 성도들에게 원하시는 것임을 하나님은 바울을 통하여 깨우치고 있음을 깨닫는 은혜가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본문에 의하면 하나님께서는 믿는 사람들이 복음에 합당한 생활을 함으로써 믿지 않는 사람들이 구원 얻은 역사가 나타남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도리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복음에 합당한 생활은 무엇입니까?
복음은 율법이나 교리나 신경이나 교회 법이나 신학이 아니며 사랑과 이해와 용서와 관용입니다. 이 복음 광야에서 화초를 피게 하고 말랐던 시내를 흐르게 하며 이 산과 저 산이 마주 쳐 울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을 노래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삶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1. 복음에 합당한 생활은 한 마음 한 뜻으로 협력하는 생활입니다.(27절)

27절 말씀입니다.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 이는 내가 너희를 가 보나 떠나 있으나 너희가 일심으로 서서 한 뜻으로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협력하는 것과”

여기에 “생활하라”는 말의 헬라어 ‘폴리튜에스데’(πολιτευεσζε)는 “시민답게 살아라”는 의입니다. 즉, 빌립보 교인들에게 있어서 그들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기 때문에(빌 3:20) “하늘의 시민답게 살아라”는 강조점이 담겨 있으며 하늘의 시민답게 사는 삶의 기준이 바로 복음인 것입니다.

이와 같은 삶의 내용은 바울을 통해서 오늘 우리에게 깨우치시는 주님의 말씀은 “일심으로 한 뜻으로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협력하는 것”입니다.

27절에 기록된 “일심으로”의 헬라어는 ‘엔 헤니 프뉴마티’(εν ενι πνευματι)로서 뒤에 나오는 “한 뜻으로”와 연결된 상태로 볼 때 “인간의 여이나 마음”을 나타내는 말인데 이 말의 의미는 빌립보 교인들이 마음과 정신이 하나되어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애써야 할 것을 강조하는 말입니다.

시편 133편에서도 성도의 연합이 얼마나 아름답고 귀한 것임을 잘 나타내는 말씀이 있습니다.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라고 되어 있는데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된 성도들이 함께 교제하며 즐거워할 때 참 교회의 모습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이 연합의 아름다움이 어떻게 표현되고 있습니까?
서로의 상처가 치료되는 아름다움입니다.
그리스도의 향기가 퍼지는 아름다움입니다.
생명이 약동하는 아름다움입니다.

이와 같은 성도의 아름다운 연합의 생활이 결국은 복음의 신앙을 위한 것이 되고 복음에 합당한 생활이 되는 것입니다.

복음에 합당한 생활은 무엇보다도 예수 안에서 거듭난 성도들의 연합입니다. 한 마음 한 뜻으로 주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서로 사랑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2. 어떤 고난의 상황에서도 두려워하지 않는 담대한 생활이 복음에 합당한 생활입니다.(28절)

28절 말씀입니다.
“아무 일에든지 대적하는 자를 인하여 두려워하지 아니하는 이 일을 듣고자 함이라 이것이 저희에게는 멸망의 빙거요 너희에게는 구원의 빙거니 이는 하나님께로부터 난 것이니라”

이 말씀의 내용은 하나님이 바울을 통하여 빌립보 교회 교인들에게 주변의 많은 핍박과 거짓 교사들의 수많은 유혹 속에서도 두려워하여 도망치거나 회피하는 것이 아니라 담대하게 맞서서 영적 싸움을 전개하기를 권면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말씀은 오늘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복음에 합당한 생활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영적 싸움을 담대하게 싸우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도는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은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고전 1:18)
이 능력을 경험한 성도들은 온갖 악형과 희롱과 핍박과 죽음의 위협 앞에서도 믿음을 지켰습니다. 그 어떤 상황 앞에서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이와 같은 사람들을 세상이 감당치 못할 것이라고 히브리서 11:38에서 증거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복음에 합당한 생활입니다.

사무엘상 17장에는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블레셋의 공격 앞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두려워 벌벌 떨었지만 소년 다윗은 결코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객관적인 전력으로 볼 때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것과도 같았지만 다윗은 골리앗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의 눈으로 골리앗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눈으로 볼 때 아무리 거장 골리앗이라 할지라도 그에게는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확신하게 되었을 때 담대히 골리앗을 향해 나아갈 수 있었고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

이와 같은 경험을 다윗은 시편 3:6에서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천만인이 나를 둘러치려 하여도 나는 두려워하지 아니하리이다”

이같은 믿음을 가진 성도를 세상이 두려워합니다.
이같은 확신을 가진 성도를 사단이 무서워합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11장에는 어떤 고난의 상황에서도 두려워하지 않는 담대한 생활을 한 믿음의 선진들의 삶의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습니다.
믿음으로 모세는 하나님 백성과 함께 고난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습니다.

믿음으로 기생 라합은 정탐꾼을 평안히 영접하여 멸망하는 자들과 함께 멸망치 않았습니다.
모든 믿음의 사람들은 사자들의 입을 막기도 하며 불의 세력을 멸하기도 하며 칼날을 피하기도 하며 연약한 가운데서 강하게 되기도 하며 전쟁에 용맹 되어 이방 사람들의 진을 물리치기도 하며 여자들은 자기의 죽은 자를 부활로 받기도 하며 또 어떤 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악형을 받되 구차히 면하지 아니하였으며 또 어떤 이들은 희롱과 채찍질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험도 받았으며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에 죽는 것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으면서도, 광야와 산중과 암혈과 토굴에 유리하면서도 그들은 두려워하지 아니하였으며 담대히 복음에 합당한 생활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이런 사람들을 세상이 감당치 못하는 것이며 이와 같은 믿음으로 복음에 합당한 생활을 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하나님이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3.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위한 복음의 진보를 이루는 생활이 복음에 합당한 생활입니다.(29절)

29절 말씀입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심이라”

이 말씀은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는 고난받는 것까지도 감사함으로 받을 수 있는 믿음의 진보를 깊이 교훈하고 있습니다.

12절 말씀입니다.
“형제들아 나의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의 진보가 된 줄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라”
참으로 놀랍고 위대한 선언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의 삶은 그리스도 때문에 당하는 고난도 감사함으로 받을 뿐 아니라 오히려 그것은 자신은 물론 그리스도 교회에 있어서 퇴보가 아니라 진보가 되는 것임을 역설하는 바울의 고백을 우리는 깊이 새겨야 할 것입니다.

바울은 A.D. 62-63년까지 로마에 투옥되어 재판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나의 당한 일”이라고 바울이 표현한 것은 복음을 전하다가 감옥에 갇힌 것과 로마의 옥중에서 고난 당한 모든 것을 의미하는 데 그와 같은 고난은 오히려 바울로 하여금 더욱 확신 있는 믿음 생활을 하게 하였을 뿐 아니라 그와 같은 상황은 복음 전파에 상당한 어려움이 되었지만 결과는 그 어려움이 오히려 복음 전파에 진보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진보가 된”에 해당하는 헬라어 ‘프로코펜’(προκοπην)은 원래 비난과 박해 속에서도 계속 앞으로 나아가는 것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바울이 옥에 갇히게 됨으로 복음을 전하지 못하게 되었지만 법정에서 복음을 변호하게 된 것이 오히려 이방 세계에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기회가 되어서 복음의 진보가 이루어졌음을 시사하는 것입니다.(딤후 2:9)

그것 때문에 14절 말씀을 보면 형제 중 다수가 바울의 매임 때문에 주안에서 신뢰함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담대히 말하게 되었다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어떠합니까?

사업을 하면서도 예수 믿는다는 것 때문에 조금만 손해가 될 것 같으면 비신앙인의 모습으로 금방 돌아가 버리고, 직장 생활에서 예수 믿는다는 것 때문에 승진이 늦어지거나 기타 이해관계에 매이게 되면 비신앙인의 모습으로 돌아가 버리고, 정치를 하면서도, 경제 생활에서도, 사회 생활에서도 우리는 복음의 진보를 이루지 못하고 복음에 합당한 생활이 아니라 복음에 거치는 자가 되어 살아오지는 않았습니까?

가룟 유다처럼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것이라는 대상이거나, 사울 왕처럼 차라리 왕이 되지 않았더라면 하는 슬픈 대상이 된 것처럼 차라리 목회자가 되지 않았더라면, 차라리 임원이 되지 않았더라면 복음의 진보를 가로막는, 복음에 거치는 자가 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대상이 되는 슬픈 일은 우리에게 없어야 할 것입니다.

복음은 율법이나 교리나 신조나 신경이나 교회 법이나 신학이 아니며 사랑과 용서입니다. 사랑과 용서만이 참 자유를 얻고 치유함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교회의 기초는 성전이나 율법이 아니며 유전이나 전통이 아니며 신조나 신경이 아니며 교리나 신학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입니다.

교회의 사명은 교세 확장이나 종교 사업이나 왕국적이거나 제국적인 선교에 있는 것이 아니며, 지배나 정복이나 군림이나 처단이나 제거에 있는 것이 아니며, 반목과 질시와 대림과 대결과 원수시하는 것과 적대시에 있는 것이 아니라 교회는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는 사명에 있는 것입니다.

어떻게 이것이 기능합니까?
사랑과 용서로서 가능합니다.
사랑을 새 계명으로 말씀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 원수 사랑을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실천될 때 교회는 산 위의 동네가 되는 것이며, 등경 위의 등불이 되는 것이며 세상의 빛이며 소금이 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교회가 복음의 역사를 통하여 광야에 화초를 피게 하고 말랐던 시냇물을 흐르게 하고 낮은 골짜기를 높게 하며 높은 산을 낮게 하고 이 산과 저 산이 마주 쳐 울려 예수 그리스도의은총을 찬송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 아름다운 생활이 그리스도를 믿는 구원받은 성도로서의 우리의 삶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이와 같은 삶을 살아가는 것이 복음에 합당한 삶입니다.

출처/박청호목사 설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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