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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의 확신과 구속경륜 ... 칼빈의 믿음 이해

by 【고동엽】 2021. 11. 11.
조직신학 연재> 구원의 확신(4) <칼빈대학교 신학대학원> 구원의 확신과 구속경륜 ... 칼빈의 믿음 이해 박혜근


다음 글은 칼빈대학교 신학대학원에서 박혜근 교수의 조직신학 과목인 <구원의 확신>에 대한 강의 내용을 녹취하여 편집하였다. <리폼드뉴스 편집부>


기도

하나님 아버지, 은혜를 감사합니다. 우리 연약한 인생을 위해서 자비로운 손으로 붙잡아 주시고 오늘도 말씀을 연구하는 자리로 부르셔서 공부할 수 있도록 은혜 주셔서 감사합니다. 사랑하는 주님, 우리 마음과 행위로 하나님의 뜻을 알고 죄 지었던 것을 이 시간 회개합니다. 주님 용서해주시고 새롭게 되게 하시며 죄와 싸울 수 있는 힘을 더하여 주옵소서. 사랑하는 주님 이 공부가 학문에 그치지 않게 도와주시고 장차 하나님을 섬기는 사역의 현장에서 빛을 발할 수 있도록 은혜를 더하여 주옵소서. 오늘도 주님, 우리와 함께 해주시길 간절히 바라오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지난번 강의에서 칼빈의 믿음의 이해를 소개하면서 역설적인 요소를 칼빈이 어떻게 설명하는지 강의했다. 첫 번째, 두 번째, 세 번째에 대해서 강의했다.

말하자면 칼빈의 믿음의 해명에 모순인 듯이 보이는 요소들이 있다. 간단히 말하면 칼빈은 구원의 확신이 믿음의 본질에 속한다고 언제나 가르쳤다. 그래서 언제나 믿음이 있는 곳에는 구원의 확신이 필연적으로 함께한다고 가르쳤다. 그러나 칼빈은 동시에 확신은 믿음과 함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의식 가운데 포착되지 않을 수도 있다고 가르치기도 했다.

그러니까 무슨 말이냐면 믿음 있는 곳에 확신이 있다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때로는 구원하는 믿음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구원에 이르는 확신을 갖지 못할 수도 있다고 가르쳤다. 이것은 분명히 모순인 듯이 보인다. 이런 소위 말하면 믿음과 확신 사이에 한편으로는 동시성, 일치성을 강조하다가 동시에 그것과 믿음과 확신 사이에 단절, 말하자면 경험에 있어서 오차가 있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실제로 경험에 영역에 있어서, 실천적인 영역에 있어서 확신을 갖지 못할 수도 있다고 가르쳤다.

이것은 칼빈의 기독교 강요나 그의 설교집, 그의 소논문에 보면 믿음과 확신 사이에 두 가지 요소를 동시에 가르치고 있음으로 해서 피상적으로는 칼빈의 신학이 어떤 모순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칼빈은 이런 모순을 스스로 모순이라고 인식하지 아니하고, 그것은 믿음의 속성에서 비롯되는 것이라고 보았다. 그리고는 이것을 세 가지로 설명을 할 수 있다고 말씀을 드렸다. 실제로 이런 설명은 칼빈이 하고 있는 것이 아니고, 그의 신학에서 이와 같이 설명가능하다고 말씀드렸다.

무슨 말이냐면 칼빈은 믿음과 확신이 언제나 동시에 있다고도 가르치고 그러나 한편으로는 경험의 영역에 있어서 실천적으로는 언제나 확신이 수반되는 것은 아니라고 모순되는 두 가지 주장을 하였다. 그러나 칼빈은 그것을 모순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될지에 대한 구체적인, 명세적인 설명을 준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모순이라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말은 자신의 신학적 체계 안에서는 이러한 두 가지 모순되는 듯한 주장이 칼빈 본인에게는 그것이 모순으로 감지되지 않고 있었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그러면 칼빈 본인에게는 이것 두 가지가 아무런 모순이 되지 않는 것이라고 보았다면 그만한 신학적 시스템이 무엇인지 규명하는 것이 중요하다.

지난 강의에서는 그의 신학에 있어서 네 가지 정도로 모순되는 듯한 주장을 설명할 수 있다고 말씀드렸다. 첫 번째, 당위와 현실 사이에 대립과 긴장으로 인한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니까 어떠해야 된다는 당위성이 있다는 것이다. 당위성은 믿음은 언제나 구원의 확신을 수반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믿음의 정의에 따르는 당위성이다. 그러나 실제 현실에 있어서는 그렇지 않다.

실제로 구원하는 믿음을 가진 사람의 경험 안에서는 당연한 주장, 믿음의 정의가 반드시 의식적 수준 안에서 포착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칼빈은 믿음의 정의와 실제 믿음의 경험을 구분해야 된다고 주장한 바가 있다. 이것은 믿음과 확신은 필연적인 관계이면서도 그러나 반드시 경험에 있어서는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해명하는 데에는 매우 중요한 요소이다.

두 번째, 육신과 성령의 대립으로 설명될 수 있다고 하였다. 믿음은 성령의 선물이다. 그래서 믿음은 언제나 성결하다. 믿음에는 언제나 확신이 수반된다. 성령의 선물이므로 완전하고 어떠한 의심도 혼란도 없다. 그러나 믿음을 구사해야 하는 사람은 영적인 존재인 동시에 우리들 역시 육신의 존재이다. 그러므로 육신에 머물고 있는 한 육신으로 인한 한계 때문에 불안과 의심은 거의 불가피하게 믿음과 함께 표출된다고 말씀드렸다. 그래서 믿음은 성령으로부터 오는 것이다.

그러나 육신으로부터는 뭐가 오냐면 불안이 오고 의심이 오다. 이 두 가지는 결코 섞이지 않고 공존할 수 있다고 하였다. 무슨 말이냐면 칼빈은 구원하는 믿음을 신자가 소유하고 있으면 그 믿음 안에는 언제나 구원의 확신이 따라오고, 또 언제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실 약속에 대한 분명한 인식이 있다. 그러나 신자가 육신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 결과 의심이 수반된다.

그러나 그 의심은 믿음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고 육체의 한계로 말미암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경험에는 믿음과 불안은 마치 한 뿌리에서 나온 두 가지처럼 보여서 확신이 없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믿음이 있으면 그 안에는 확신이 있는 것이고, 육체로 말미암는 의심도 사람 안에 공존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그래서 칼빈은 믿음의 정의와 믿음의 확신 사이에는 괴리가 발생한다는 것이다.

세 번째, 믿음의 본질과 믿음의 현실을 비교함으로써 설명할 수 있다고 말씀드렸다.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이자 성령의 씨이다. 로마 카톨릭에서는 신자들이 구원에 대한 개연성을 말하는 수준에 그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것은 믿음이 가진 영속적인 속성을 몰라서 하는 말이라고 말씀을 드렸다.

성경의 가르침에 따르면 아무리 작은 믿음이라도 그 참된 믿음은 성령이 심으신 것이므로 그 안에는 반드시 확신과 확실성이 함께 따른다고 하였다. 왜냐하면 믿음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기 그렇다. 그런데 하나님이 주신 믿음 안에 본질이 무엇이냐, 확신이다. 그래서 확신은 믿음의 크기와 그 성숙의 정도와는 상관없고 그것은 진정성과만 관련 있다. 믿음이 참되다면 반드시 확신은 따른다.

신자가 비록 믿음의 의식에 있어서, 믿음을 자기 개인의 것으로 향유하는데 있어서 아직까지 성숙하지 못하고 미약해서 확신을 가지지 못하는 경우에도 믿음의 본질로서 확신은 소멸되지 않고 구원하는 믿음과 함께 거기에 여전히 있다고 칼빈이 가르쳤다. 쉽게 말하면 의식하지 못한다고 해서 확신이 없는 것이 아니고 확신이란 언제나 구원의 본질로서 존재한다는 말이다.

그러니까 구원받으리라는 확신이 있습니까? 물었을 때, 저는 아직 그런 확신이 없는데요 라고 말한다고 해서 원칙적으로 구원의 확신이 없다고 말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확신이란, 사실은 근본적으로 의식의 문제가 아니고 칼빈에게는 본질의 문제이다. 인간이 의식하고 있느냐, 없느냐가 확신의 관건이 아니다. 비록 인간이, 신자가 확신을 의식하지 못하고 있다고 할지라도 확신은 믿음의 본질로서 자리한다 그것이다. 이 세가지가 지난주에 강의한 내용이다.


오늘은 네 번째를 설명할 것이다.

구속경륜이라는 관점에서 설명할 수 있다.

구속경륜이라고 하면 아버지는 선택하시고 아들은 아버지께서 선택하신 그 사람들을 위해서 구원을 성취하시고 성령은 성취하신 구속을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원하기로 예정된 그 사람들에게 개별적으로 적용하신다. 이것이 구속경륜이다. 언제나 포맷이 있다. 아버지는 선택하시고, 아들은 아버지께서 선택하신 그들을 위해 속죄를, 구원을, 구속을 성취하고, 성령은 그렇게 아버지께서 영원 전에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신 그 사람들을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신 그 구속을 개별적으로 적용하신다. 그것도 개별적으로 한 사람 한 사람, 하나님의 선택하심을 따라 그리스도의 구원을 그들에게 개별적인 것으로 적용하신다. 적용하신다는 말은 그들이 그리스도의 구원을 자기의 것으로 향유할 수 있도록, 주관적인 체험 안에서 그들의 것이 되도록 하신다.

쉽게 말하면 아버지께서는 구원을 받을 자를 정하시고 아들은 구원을 완성하시고, 성령은 완성하신 그 구원을 아버지께서 주시기로 작정하신 그 사람들에게 개별적으로 그들의 것이 되도록 적용하신다. 이것이 구원의 경륜이다. 바로 이러한 구속경륜이라는 관점에서도 믿음과 확신 사이에 존재하고 있는 이런 괴리를 설명할 수 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이런 것이다. 아버지께서 구원을 주시기로 예정하신 그들이 성령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을 받게 되면 그들은 제일 먼저 구원을 받는 순간 복음 안에 있는 그리스도를 먼저 본다. 그리고 그 복음 안에 있는 그 약속이 자기 자신을 위한 하나님의 선물인 줄을 알고 그 선물을 힘있게 붙들게 된다.

그런데 붙들게 되는 그 단계에서는 아직까지 그것이 명확하게 자신의 의식 세계 안에 자리를 잡지 못한 상태로 남아 있다. 이것이 나중에 청교도 신학자들이 조금 더 세분화하고 체계적이고 정밀하게 발전시키는 여지가 여기에서 발생하는 것이다. 처음에 성령께서 부르심을 받을 때 이들은 하나님의 약속을 먼저 자기를 위한 약속으로 인식하게 된다. 그러나 이 약속이 자신의 의식세계 안에 분명하게 마음으로 그것을 받아들이고 기쁨으로 누릴 수 있는 단계까지 즉시로 이행하는 것은 아니고, 단지 이 약속이 자기를 위해서 예비된 것이라는 사실만 기쁨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리고는 그 이후에 성장의 과정을 거치게 된다. 성장의 과정을 거치게 될 때는 약속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좀 더 구체적으로 깨닫게 된다. 그것을 사모하는 마음으로 깨닫게 된다. 깨닫게 되면서 약속이 진실하고 확실할 뿐만 아니라 이 약속이 아름답고 참되고 영원하다는 사실을 깊이 있게 깨달아 간다. 깨달아 가는 중에 믿음에 따른 확신이 의식의 표면으로 올라오게 된다. 이것은 조금 있다가 다루게 되는 청교도의 신학에서도 분명히 드러난다.

그래서 이 성령은 신자들에게 그들에게 구원이 있음을 먼저 깨닫게 하시고, 그 결과 의심과 불안을 극복하게 하신다. 성령께서 신자들에게 확신을 심어줄 때는(이거 중요하다) 아버지의 선택과 그리스도 안에서의 보존에 대한 지식을 깨닫게 한다. 그러니까 칼빈은 확신에 이르게 되는 과정에서 성령이 동원하시는 수단이 있는데 그것이 무엇이냐면, 아버지의 예정에 대해서 생각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신자들을. 그리고 그렇게 아버지께서 구원하시기로 예정한 그 사람들이 창세전에 속해 있고 영원토록 그들은 그리스도의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한다. 그렇게 됨으로써 마음의 안도감과 확신을 가지게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성령은 아버지의 선택, 아들의 속죄 이 사실들을 신자들에게 확신케 함으로써 구원의 확신에 이르게 그들을 안내해 가신다는 것이다. 물론 여기에는 일정한 성장의 과정이 따른다. 구원받는 순간에 완전한 상태의 확신을 가지게 되는 것이 아니고, 그러나 성령께서 그들 속에서 끊임없이 사역하신 결과로 확신에 이르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칼빈은 예정론을 정당하게 사유하게 되면, 매일 확신 가운데서 살아가도록 부름 받은 신자들의 믿음을 확정짓는데 매우 유익하다라는 사실을 강조하였다. 여기서 주목해서 보아야 할 것은 칼빈이 기독론적인 영역에서 사용하고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원래 칼빈이 기독교강요 초판을 쓸 때는 예정론이 신론에 있었다. 그러다가 다시 3판을 고쳤을 때는 예정론을 옮겨서 기독론으로 가지고 갔다. 그 말이 무슨 말이냐면 사실은 예정론은 어떤 신론의 영역에서, 혹은 관념론적인 신학의 영역에서 다루어질 것이 아니고, 실제로 우리 신앙생활에 도움을 주기 위해서 가르쳐 주신 것이 바로 예정론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말이다.

그러니까 예정론은 매우 실천적인 것이고 목회적 차원에서 매우 유용한 도구라는 사실을 칼빈이 제대로 인식하였다. 그래서 신론에 있던 예정론을 기독론으로 가지고 간 것이다. 그래서 1판과 3판 사이에 차이가 있다. 그래서 몇 판, 몇 판이라고 언급하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고 있다. 칼빈의 예정론을 잘 활용하면 그것은 구원의 확신을 얻는데 매우 중요하다. 이것은 여러분의 목회 현장에서도 반드시 상기되어야 할 사실이다. 예정론을 가르쳐 놓지 않으면, 칼빈의 논리에 따르면 성령이 그들로 하여금 확신에 이르게 하시는 수단 하나를 잃어버리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러니까 예정론은 단순하게 사변적인 논쟁을 위한 주제가 아니다. 그것은 신자들의 신앙의 성장과 확신을 가지게 하는 일에 있어서 성령이 언제나 즐겨 동원하시는 교육학적인 수단이 무엇이냐, 예정론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자들이 자신의 영원 전 하나님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고, 그 예정의 결과 우리는 처음부터 그리스도에게 속해 있는 자, 또 지금도 우리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요 앞으로도 영원토록 내가 그리스도의 것이라는 사실을 생각하게 됨으로써 신자는 마침내 확신에 이르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이델베르크 신앙고백서 제 1문에 제일 먼저 물은 질문이 이것이다. “지금 살 때와 죽을 때 여러분들의 마음에 진정한 위안이 되는 것은 무엇입니까?” 대답이 뭐냐면, “나는 영원 전부터 그리고 지금도 앞으로도 영원히 내가 그리스도에게 속해 있고, 내가 그리스도의 것임을 확신하는 사실에 내 마음에 위안이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바로 그것 때문이다.

바로 하이델베르크 신앙고백서 1문은 확신에 관한 것이다. 한마디로 말하면 신자가 어떻게 확신에 이를 수 있냐고 물으면 그것은 자신이 창세전에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예정되고 그리스도 안에서 구속받기로 작정되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사실과 확신은 궤를 같이 한다는 말이다.

그러니까 목회적으로 매우 유용한 것이다. 한마디로 말하면 내가 가르치는 교회의 교인들로 하여금 구원의 확신을 갖게 하기 위해서 목회적인 노력을 기울인다면 무엇보다 예정론에 대해서 부지런히 정밀하게 성경이 의도한대로 가르쳐야 한다. 그렇지 않고는 어쩌면 성경이 우리에게 선물로 주시는 완전한 확신의 상태에 이르는 데는 실패할지 모른다.

바로 그런 관점에서 구속 경륜이 믿음과 확신 사이의 괴리를 설명하는데 매우 유용하다. 무슨 말이냐면, 한마디로 말하면 제일 먼저 약속을 받을 때는 우리가 창세전부터 아버지로 말미암아 구원받기로 작정했다는 그 단계에는 깨닫지 못한다. 그러나 약속을 받고 난 이후에 성령의 내적인 사역을 통해서 마침내 무엇을 깨닫게 되냐면, 아버지의 예정, 그리스도의 구속을 더 깊이 있게 성경이 가르치는 바대로 체계적으로 깨닫게 된다. 그런 깨달음과 함께 무엇이 오냐, 구원에 대한 확신은 증대된다는 그 말이다. 그래서 경험의 영역에서는 일정한 괴리가 발생할 수 밖에 없다.

무슨 말이냐면 부르심을 받을 그 초기에 약속을 붙잡는 그것도 믿음이고, 성장의 과정을 거쳐서 확신에 이르게 되는 그때의 믿음도 이때 믿음과 동일한 참된 믿음이다. 믿음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고 단지 차이가 있다면 믿음 안에 있던 확신이, 잠자는 상태로 있던 그 확신이 하나님의 예정이나 성령의 부르심을 통해서, 내가 그리스도에게 속해 있다는 깨달으면서 잠자고 있는 확신이 표면화되는 것이다. 의식 안에서 표면화되는 것이다. 의식 위로 마침내 올라오는 것이다.

땅 속에 떨어져 있던 씨앗이 땅 속에 묻혀 있는 동안에는 그것이 죽었는지, 살았는지 확인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봄이 되고 그것이 마침내 싹을 틔우고 올라올 때는 아, 땅 속에 있던 씨앗이 살아 있구나 하는 사실을 깨닫는다. 확신도 그와 같다는 것이다. 처음 믿음이 떨어질 때 그 믿음은 참된 믿음이다. 그 참됨 믿음 안에 확신이 자리하고 있었고, 시간이 지나서 성장을 거듭하게 되면 잠자고 있던, 의식 저변에 있던 믿음 안에 원형으로만 남아 있던 그 확신이 마침내 의식 안으로 분화되어 나타난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그때 아 이 사람이 구원의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고 말하지만 칼빈의 주장에 따르면, 그것은 가지게 된 것이 아니라 이미 가지고 있던 구원의 확신이 의식의 수준 안에서 분화되었다고 말해야 정확하다는 것이다. 이런 분화의 과정을 거칠 때 성령이 동원하시는 도구가 무엇이냐, 예정론이라는 것이다. 이런 과정에서 성령이 동원하시는 또 다른 도구가 그리스도의 구속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구속경륜이라는 관점에서도 설명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렇게 칼빈에게 있어서 확신이란 언제나 그리스도 중심적 신학과 밀접하게 관계가 있다. 그리스도 중심적 신학과 관련되어 있다는 말은 무슨 말인가 하면, 아버지께서 선택하실 때, 엡 1:1-5에서 특별히 4절을 보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라는 말이 있다. 그러므로 제일 먼저 아버지께서 우리를 예정하실 때는 예수 그리스도를 먼저 예정한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구주가 되도록 먼저 그를 예정하신다. 그러니까 사실은 우리를 개별적으로 예정하시기 전에 먼저, 아버지께서는 아들을 우리들의 구주가 되도록 먼저 예정하신다. 그리고 그 이후에 그 구주로 예정하신 아들 안에서 구원 받을 자를 예정하시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들은 처음부터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받기로 예정된 자들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하나님의 영원 전에 그가 기뻐하신 뜻의 성취이기도 하고, 동시에 기억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원래 목적하셨던 그리스도 안으로 다시 돌아가는, 회복의 의미가 있다는 것을 기억하라. 그리스도 안에서 아버지께서 선택하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속죄를 이루시는 것이다.

성령은 자신의 일을 가지고 우리들에게 구속을 적용하는 게 아니다. 성령은 언제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그리스도의 구원을, 그리스도를 위해서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사람들에게 적용하는 것이다. 그래서 언제나 성경도 예수 그리스도의 것을 가지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우리들 각자에게 적용하시는 것이다. 보면 전부다 예수 그리스도, 예수 그리스도, 예수 그리스도이다. 그러므로 구속경륜은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이다.

바로 이렇게 확신이란 무엇이냐, 칼빈에게는 그리스도 중심적 신학과 같이 맞물려 있었다.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구원도 없는 것이고, 예수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믿음도 없고, 예수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확신을 가질 방안도 없는 것이다.

특별히 칼빈은 이런 이유로 그리스도를 뭐라고 별명 붙였느냐면, 선택의 거울이라고 하였다. 아주 재미있는 표현이다. 우리가 거울을 보면 얼굴이 비췬다. 얼굴이 고체적인 사물을 통해 반영된다. 그런데 내가 선택되었는지 아닌지를 알기 위해서는 마치 사람이 거울을 들고 얼굴을 보듯이 그리스도의 얼굴을 쳐다보면 마침내 그리스도의 얼굴에서 나의 선택을 거울을 통해 나의 얼굴을 비춰보는 것처럼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선택의 거울이라고 불렀다. 그 이유는 무엇이냐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분명하고 오류 없이 우리 자신의 선택을 목격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그리스도를 믿고,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신앙하고 고백하는 그 사람은 바로 그 고백하는 신앙 안에서 자신의 선택을 확신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 안에서 내 죄가 속해졌다는 사실을 확신할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를 고백하는 그 신앙 안에서 예수님의 속죄가 나에게 선물로 주어졌다는 것을 확신하게 된다.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죽음을 통해서 우리는 오늘도 우리가 부지불식간에 짓는 죄가 사해지고 있음을 확신할 수 있게 된다. 그리스도인의 모든 죄는 그리스도와 관련해서만 가능하다.

칼빈은 이렇게 하나님의 객관적이고 영원한 선택과 우리가 선택되었다는 이 주관적인 확신 사이의 간격을 그리스도로 다리 놓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가 들어오시게 되면, 그리스도가 우리들 면전에 서게 되면 하나님의 영원한 경륜이 나에게는 현재로 실현되는 것이다. 우리 지금 확인한다. 아버지께서 나를 정말로 선택하셨던가. 선택하셨던 아버지의 그 의지 안에 정말 내가 있었는지 흔들릴 때가 있다. 그럴 때는 그리스도에게 가면 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 앞에 서는 순간에 영원한 하나님의 경륜과 오늘 현재의 경험 사이의 괴리가 싹 매어진다는 것이다.

신학은 그리스도를 얼마나 열렬히 그리고 간절한 마음으로 사모하고 사랑했는지에 의해서 결정된다는 것이 칼빈의 신학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여러분, 신학은 냉담한 마음으로 못한다. 차가운 마음으로 못한다. 그래서 칼빈은 이렇게 말했다. 신학이란 의지로도 하고, 이성으로도 하고, 감성으로도 하고, 온 몸으로도 한다고 하였다. 신학의 정도와 깊이를 결정하는 것은 지성의 문제가 아니고 사랑의 문제이다. 그리스도를 온전히 사랑하는 사람이 칼빈의 신학을 제대로 이해하거나 구사할 수 있는 것이다. 칼빈의 신학을 보면 그가 얼마나 그리스도 중심적인 삶을 살았는지 모른다.

따라서 그리스도 안에서는 영원과 현재, 신적인 선택과 나의 확신 사이가 아무런 긴장 없이 그리스도 안에서는 마침내 화해된다. 따라서 하나님의 선택, 예정은 확신의 의무를 불러일으키는 것이 아니고 도리어 확신을 도리어 강화한다. 예정론이 전도를 방해하는 것이 아니고 전도의 정당성, 전도의 효능을 더해 준다고 하였다. 예정론은 한 사람의 확신을 복잡하고 혼란스럽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더욱 더 강화한다. 몰라서 하는 소리이다.

칼빈은 구원하지 못하는 믿음을 열거한다. 예를 들면 믿음의 환상, 믿음의 그림자 현상, 잠정적 믿음, 위선의 탈을 쓴 믿음 등등을 언급한다. 그런데 이런 믿음들은 거짓 믿음이고, 참된 믿음과 유사한 형태를 지닌다고 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 검증은 필수적이라고 하였다. 늘 자기를 검정해야 한다.

그런데 자기 검증에 있어서 무엇보다도 신자들은 자신들의 의식의 저변으로 내려가서 진정으로 그리스도를 신뢰하고 있는지를 물어보아야 된다고 하였다. 그러니까 내 믿음이 참된지 아닌지를 알아보려면 제일 먼저 그리스도를 신뢰하는지 아닌지 그것을 먼저 물어봐야 한다고 하였다. 그러니까 참된 믿음의 검증에 있어서도 그리스도 중심적 신학을 구사하고 있다.

자, 하나님의 선택과 확신에 있어서 그 상관관계를 말할 때 칼빈의 논리는 다음과 같이 전개된다.

(1) 선택은 실제적인 구원을 목표로 한다. 실제적이라는 말을 꼭 강조해야 한다. 실제로 그들이 성령의 부르심을 받고 성화의 과정을 거치고, 그 구원의 마지막 영광에 이르게 될 것을 하나님의 선택은 지향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선택은 그들 자신의 됨됨이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한마디로 말하면 그리스도의 속죄 위에서, 그리스도의 구원 위에서 구원받을 자를 예정했다.

(2) 그러므로 하나님의 선택은 전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위에, 그리스도 안에 근거한다.

(3) 그들의 선택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것임으로 구원의 확신이라는 것도 그들 자신의 됨됨이 안에서 발견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의 어떤 자질이나 인격적인 성숙과 관련되어 발견되지 않고, 그리스도와 분리되어 아버지 안에서도 발견되지 않는다고 하였다. 확신은 어디에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되어야 한다.

(4)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연합은 확신의 기반이라고 하였다. 이 네 가지 단계를 꼭 기억해야 한다.

그래서 신자의 확신은 그리스도의 연합에서 발견된다.

여기에서도 칼빈은 확신은 어디 있는 것으로 보는가? 확신은 내 안에 있는 것이 아니다. 나의 심리적 상태나 인간의 능동성 안에 있는 것이 아니고, 우리 자신의 그리스도의 연합 안에 자리하고 있는 것으로 보았다. 그러므로 그 확신이란 인간의 의심이나 혼란에 의해서 소멸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적어도 그들이 그리스도와 연합한 상태에 머물기만 하면, 확신은 믿음과 함께 그들과 있다.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비록 확신이 없을지라도 확신이 없다는 사실이, 그들이 참된 구원하는 믿음을 갖지 못했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해야 한다. 확신이 없다고 해서 구원받지 못했다고 말할 수도 없고, 확신이 없다고 해서 믿음이 없다고 말할 수도 없다. 확신이 없는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구원받은 믿음이 그들 가운데 있을 수 있다. 왜냐하면 확신이란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자, 바로 이것 때문에 이 강의를 처음 시작할 때 말씀드렸던 칼빈주의자들의 논쟁이 비롯되는 것이다.

성령은 그리스도가 그들 안에 있고 그들은 그리스도에게 속한다는 사실을 신자들에게 확신시켜 줌으로서 성령은 선택된 신자들의 마음에 그리스도와 그의 은택을 적용한다.

가. 칼빈의 믿음 이해에 대한 칼빈주의자들의 견해

자, 오늘은 이런 칼빈의 설명을 염두에 두고 실제로 칼빈주의자들 안에서 이런 칼빈의 믿음의 이해를 어떻게 수용하고 설명했는지를 한번 살펴보도록 하겠다.

조금 있다가 설명할 텐데 확신이 없다고 해서 그 안에 구원하는 믿음이 없다고 할 수 없다는 말 이해하는가? 왜냐하면 구원할 믿음이 있기만 하면, 그것은 반드시 그 구원하는 믿음의 속성으로서의 확신은 거기에 있는 것이다. 그런데 왜 구원하는 믿음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확신이 없느냐 묻는다면 믿음 밖에 있는 확신은 그 믿음의 초기상태에는 마치 수면 상태에 있는 것처럼 의식 저변에 놓여서 포착이 잘 되지 않는다. 않고 있다가 신앙의 성장이라는 과정을 거치게 되면서 마침내 그것이 성령의 내적인 사역을 통해 의식적 상태로 분화한다. 의식적 상태로 분화시킬 때 성령의 동원하시는 도구 중의 하나님의 예정이라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속죄이다. 이런 것을 가르침으로써 마침내 믿음의 본질로 자리 잡고 있던 잠자고 있는 듯 한 확신이 한 사람의 의식적 상태로 분화된다.

그것을 나중에 후기 칼빈주의자들이 ‘확신의 충만한 상태’(Faith in it's fullness)라고 하였다. 충만한 확신 가운데 있는 믿음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비교적 초기에 이런 상태에 이르기 전의 믿음을 무엇이라 했느냐? ‘작동하는 믿음’(Faith in exercise)이라고 했다. 이런 식의 구분을 나중에 설명하겠지만 칼빈은 인정하지 않았다. 믿음을 두 가지 형식으로 구분하는 것을 반대하였다. 그러나 아마 칼빈은 이런 식의 구분을 한다면 동정적일 것이다. 내 마음에 쏙 와 닿지 않지만 영 틀렸다고 말하기는 곤란한 그런 정도로 보면 될 것이다.

그러면 왜 후기 칼빈주의자들은 이렇게 믿음을 두 계층으로 구분했느냐면 초기의 신자가 가졌던 믿음과 확신과 함께 있는 믿음을 어떤 식으로든 표현을 하기 원했던 것이다. 그래서 이런 표현을 동원한 것이다. 그러니까 확신은 있든지 없든지 그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고 구원하는 믿음이 있느냐, 없느냐가 중요하다. 이게 결론이다. 그러니까 “확신 있습니까?”라는 질문에 아멘 못해도 괜찮다. 거기에 기죽을 필요가 없다. 그러나 확신을 갖도록 노력은 해야 한다.

더 중요한 것은 칼빈이 말한 대로 내가 그리스도를 신뢰하고 있는지를 자기 검증해야 한다. 믿음 안에 있는지 검증해야 한다. 성경 어디에도 너희들이 확신 안에 있는지 검증하란 말 없다. 믿음 안에 있는지 점검하라고 하였다. 믿음만 있으면 확신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칼빈은 이런 경우를 설명한다. 본인은 확신을 가졌다고 하나 실제로 구원할 믿음이 없는 사람이 있고 이는 정죄 받은 자이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자신이 믿음 안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확신이 없는 사람이 있다고 하였다.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이 참으로 그들을 구원하시기로 예정하고자 그리스도의 은혜를 베푸신 자들이기는 하나, 그들은 아직까지 구원의 기쁨을 맛보지 못하고 있는 사람이다. 그 사람들은 목회자들에게 맡겨진 자들이다. 목회자들이 그들을 더 완전한 확신을 갖도록 열심히 그들을 인도해야 할 책임을 져야 한다고 했다.

내가 믿음 안에 있는지를 확인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그리스도인에게 마땅하게 자신의 믿음의 진위여부를 묻지 않을 수 없다. 믿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든 아니든 누구에게나 요구되는 것이다. 자기 검증을 해야 한다. 만약에 내가 다이아 반지를 샀다면 그것이 진짜인지 아닌지 궁금하지 않겠는가? 그러니까 누구든지 믿음을 가졌다고 자부하는 사람이라면, 만약에 믿음에 대해서 무관한 자들은 질문을 할 필요도 없다. 그러나 적어도 내가 믿음을 가진 자라고 스스로 고백하는 사람이 있다면 반드시 그 사람은 자기 믿음이 얼마나 참된 믿음인지 날마다 검증해야 한다. 그것은 믿음을 가진 사람들의 기본적인 속성이다.

1) 콤리(A. Comie), 브라켈(W. Brakel)

칼빈주의자들 안에서 이런 믿음에 대한 칼빈의 설명을 가장 신학에서 잘 반영한 사람, 그것을 좀 더 체계화 한 사람을 들라고 한다면 알렉산더 콤리(A. Comrie 1706-1774)를 들 수 있다. 이 사람은 누구냐? 화란의 ‘제2 종교개혁’, 혹은 ‘철저한 종교개혁’, 오히려 ‘철저한 종교개혁’이라는 말이 더 정확한 번역이다.

신학사전을 찾아보면 화란의 ‘제2 종교개혁’, ‘철저한 종교개혁’이라고 나온다. 그게 바로 이 콤리를 비롯한 화란의 개혁파 신학자들이 주도한 운동이다. 그런데 이 화란의 ‘제2종교개혁’은 영국의 청교도혁명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쉽게 말하면 영국의 청교도운동과 마찬가지의 성격이 화란의 ‘제2 종교개혁’이라고 보면 된다.

실제로 영국의 종교개혁, 특별히 청교도 사상이 이 화란의 콤리를 비롯한 ‘제2종교개혁’를 주도한 신학자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고 당시의 청교도들의 저서들이 거의 대부분 빠짐없이 화란어로 번역되었다. 화란의 ‘제2 종교개혁’의 대표적인 인물을 들라 하면 G. Voetius와 W. Brakel이다. 이 두 사람이 대표적인 사람이다. 이들의 책은 거의 다 화란어로 되어 있고 번역된 책들이 거의 없다. 사람들에게 많은 관심을 갖지 못했다. 왜냐면 청교도들에 대해서 많이 연구가 됐는데, 이 화란의 ‘제2 종교개혁’은 그렇게 큰 관심을 갖지 못했다. 그래서 영어로 번역되는 것이 미진했다.

어쨌든 화란의 ‘제2종교개혁’의 주역이었던 콤리가 오늘 우리가 살펴볼 인물이다. 콤리는 18세기 화란의 개혁파 진영에 큰 영향을 미쳤던 사람이다. 18세기 중엽에 화란에서는 ‘확신이 믿음의 본질에 속하는가?’에 대해서 열띤 논쟁이 전개되어 있었다. 이 논쟁에서 콤리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는 이미 우리가 살펴본 바 있는 믿음에 관한 칼빈의 이해를 해명하는데 집중하였다. 단순하게 해명한 것이 아니고 좀 더 정밀하고 분석적이고 체계적인 방법으로 해명하고자 했다. 그래서 그의 신학 안에는 칼빈이 시도했던 믿음의 이해가 좀 더 정교한 학문적인 형태로 잘 구현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미리 결론적으로 말하면 콤리는 많은 책을 썼는데 그가 지향한 목적은 두 가지이다.

첫째는 확신이 믿음의 본질에 속하지 않는다는 주장을 반박하는 것이었다. 이는 무슨 말인가? 바로 확신은 믿음의 본질에 속한다는 것을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이다. 두 번째는 믿음의 분명한 확신은 구원하는 믿음을 소유하였음을 확증하기 위한 필수적 요건이라는 주장을 반박하기 위함이었다. 확신이 구원하는 믿음을 확증하기 위한 필수적 요건이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하고자 하였다.

왜냐면 어떤 사람들은 확신이 없으면 구원하는 믿음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말을 했기 때문이다. 칼빈은 확신이 없어도 구원하는 믿음을 가지고 있을 수 있다고 하였다. 그런데 18세기 중엽에 화란의 개혁파 신학자들 가운데 어떤 이들은 만약에 확신하는 믿음 없으면 구원하는 믿음은 없다고 주장했다. 거기에 반대하면서 비록 확신하는 믿음이 없다 할지라도 구원하는 믿음이 반드시 없다고 할 수는 없다는 사실을 주장하고자 했던 것이다.

콤리는 칼빈과 마찬가지로 확신은 믿음의 본질에 속한다고 보았다. 그러나 확신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동일한 양식과 정도로 소유되는 것은 아니라고 보았다. 그러니까 확신의 정도, 확신의 내용은 조금씩 다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시기도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조금 전에도 설명했지만 믿음이 주어지는 비교적 초기 단계에서 확신은 발아되지 않은 씨가 땅속에 묻혀있는 것과 같은 양상을 띤다는 것이다.

그러다가 신앙의 성장과 함께 그 자신이 믿음으로 이미 확고한 것을 의식 안에서 분명하게 잡게 되는 진보를 보이게 되면서 궁극적으로는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확신의 상태에 이르게 된다는 것이다. 비교적 초기 상태에는 확신이 발아되지 않는 씨처럼 땅 속에 묻혀 있다가 진화의 성장을 거치면서 그것이 점점 의식의 차원에서 분화되고 마침내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그리스도의 완전한 분량에까지 자라나간다.

따라서 확신이 씨앗의 형태에 있든지 아니면 성장가도에 있든지, 아니면 그것이 이미 완전한 상태에 이르렀든지 간에 그것은 성령의 주권적 선물이라는 점을 강조하고자 했다. 한마디로 말하면 확신이 발아되지 않는 씨앗의 형태로 있든지, 성장 중에 있든지 안 그러면 상당한 완성의 상태에 이르렀던지 간에, 어떤 상태든지 간에, 확신이란 성령의 주권적 선물이다. 그것을 강조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나 콤리의 주장은 기본적으로 매우 성경적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많은 신자들이 이 확신을 한 개인의 공로나 혹은 능동적 참여의 결과물로 인식하려고 하는 경향이 농후하다. 결국에는 내가 어떻게 노력하고, 어떻게 기도하고, 어떻게 헌신했는지에 따라서 결정될 수 있는 요소인 것처럼 생각한다.

콤리는 그것을 적극적으로 비판하고 이 확신 역시 칭의나 성화와 마찬가지로 성령의 주권적 선물이라는 사실을 교인들에게 가르치고자 했던 것이다. 성령의 주권적 선물이다. 그러므로 성령께서 우리를 어떻게 인도해 나가시는지에 대해 먼저 알아야 하고, 그리고 신자들이 각자 노력할 수 있는 성경적인 2차적 수단을 찾아야 한다. 1차적 수단은 성령의 가르침이라고 하였다.

조금 더 상술해 보자. 당시 개혁파는 둘로 나누어져 있었는데 첫 번째 입장은 Brakel이 주장하는 것이다. 이 사람 뿐만 아니라 F. Lampe도 있는데 이 사람은 독일 사람이다. 이런 사람들이 무엇을 주장했느냐면 “확신은 믿음의 열매에 속한다”라고 했는데 ‘믿음의 본질’이 아니다. 그들은 도피성을 찾는 믿음(refuse-taking Faith)라고 했는데 구약성경을 보면 도피성이 나온다.

부지불식간에 살인한 자가 자기 목숨을 구원하기 위해서 도피성으로 달려가게 되는데 구원을 호소하면서, 바로 그런 믿음. 도피성이 예수님을 상징하는 것인데 누구든지 구원을 받고 싶은 사람은 과거의 도피성을 향해 뛰어가는 것처럼, 그리스도를 향한 갈급함과 목마름을 가지고 그리스도를 향해 달려가는 그 믿음을 무엇이라고 했냐면 도피성을 찾는 믿음(refuse-taking Faith)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또 하나는 확신하는 믿음(an assured Faith)이다. 이렇게 믿음을 두 계층으로 나누었다. 도피성을 향해 나가가는 믿음. 이 믿음은 아주 초기적인 믿음의 단계이다. 오로지 그리스도를 향한 갈급함, 그리스도를 만나야겠다는 그 절박함. 그것으로 대변되는 믿음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믿음의 단계를 지나고 나면 어디로 향하게 되냐? 확신하는 믿음, 소위 말하면 구원하는 확신을 가지는 믿음이라는 더 높은 단계의, 좀 더 정제되고 성숙한 단계에 믿음에 이르게 된다는 것이다. 마치 계단으로 따지면 두 계층으로 나눴다.

그러나 이런 식의 구분은 칼빈의 신학에서는 정당화되지 않는 믿음의 서술이다. 칼빈은 믿음을 정의할 때, 매우 단순하게 정의했다. 무엇이라고 정의했는가? 바로 ‘참된 구원하는 믿음’이라고 하나만 정의했다. 그 구원하는 믿음이 작든지 크든지, 초기든 확신을 동반한 믿음이든지, 믿음의 본질은 여전히 그대로 있다. 단지 차이가 있다면 확신을 의식화 단계를 수반하느냐, 하지 않느냐하는 단계가 있지만 그것은 믿음의 본질과는 관계가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의식화된 확신이든 발아 상태로, 발아되지 못한 상태로, 수면 상태에 있는 확신을 가진 믿음이든 믿음은 동일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극단적인 말로 한다면 확신을 갖지 못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구원하는 믿음만 있으면 그들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그 영광에 이른다.

확신의 문제는 누구에게 남겨져 있는가? 바로 목회자들의 과제로 남겨져 있는 것이다. 구원은 하나님 아버지의, 믿음을 주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과제이다. 그러나 확신은 목회적 과제이다. 그러나 이 목회적 과제도 이루시는 분은 성령이다. 이 때 목회적 과제로서의 확신이 무엇이냐면 바로 의식화된 확신이다. 아버지의 일로서의 확신은 무엇인가? 믿음의 본질로서의 확신인 것이다. 칼빈은 단지 확신을 두 계층으로 나누었을 뿐이다.

그런데 후기 18세기 화란의 종교개혁자들 가운데 특별히 Brakel 같은 경우에는 확신을 이중으로 나눈 것이 아니고, 믿음을 2가지로 나눈 것이다. 여기에 중대한 변화가 있다. 잘 봐야 한다. 칼빈은 단지 확신을 두 가지 상태로 구분했다. 그러나 이런 확신에 대한 두 가지 구분은 믿음의 본질과 상관없는 것이고 믿음은 단일한 하나의 참된 믿음이라고 가르쳤다. 그러다가 18세기 중엽쯤 돼서 화란으로 넘어가게 되면 어떻게 되느냐면 이 확신을 이중으로 나누는 것이 아니고, 결국 이런 확신의 이중의 구분이 뭘 낳는다고 보느냐? 믿음의 구분을 낳는다고 봤다.

이건 신학적으로 큰 변화이다. 한국교회가 바로 이런 우를 범하고 있다. 확신이 있으면 참된 믿음이고 확신이 없으면 좀 문제 있는 믿음이라고 본다. 그것이 잘못이다. 이것이 18세기 화란에서 있었던 일이다. 꼭 기억해야 한다. 확신이 본질로 있든, 확신이 의식화되었든, 그것이 믿음의 속성, 믿음의 진정성에 어떤 변화를 더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 칼빈의 생각이다. 성경적이다.

예를 들면 갈릴리 바다에서 밤에 배를 타고 호수를 건너려는 제자들이 풍랑을 만나 두려워했다. 그 풍랑에 걸어오신 주님께서 배위에 오르면서 제자들에게 하시는 말이 있다. “믿음이 적은 자들아, 어찌하여 의심하였느냐?” 이렇게 꾸지람하셨다. 그 적은 믿음은 구원하는 믿음이다. “내가 이스라엘에서 이만한 큰 믿음을 본적이 없다”라고 백부장을 칭찬했다. 그 큰 믿음도 그 배 위에서 무서워 떨던 저희의 마음의 믿었던 적은 믿음도 동일한 참된 믿음이다.

크고 작음을 결정하는 근본이로서는 무엇이냐, 확신과 신뢰이다. 한마디로 말하면 하나님께 기대하는 만큼 그 믿음을 사용할 수 있는 단계, 큰 믿음이다. 믿음을 사용해야 하는 그 특정한 상황에서 믿음을 발휘하지 못하는 상태, 적은 믿음이다. 그러나 그들 속에 믿음이 있는 건 사실이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그들 배위에 오르신 것이다. 아주 상징적이다. 믿음이 적은 자들의 배위에 영존하시는 아버지, 야훼 하나님이 그 위에 올라타신 것이다. 그리고 풍랑을 잔잔케 하셨다. 왜냐하면 그들 속에 믿음 있는 것을 보셨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신학적으로 지금 큰 변화가 온 것이다. 확신에서 이중으로 본 칼빈의 신학을 사실 어떻게 들고 있냐면, 이런 것들이 어떤 두 가지 서로 다른 종류의 믿음이 있는 것처럼 지금 이해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결국 확신을 믿음의 본질로 보지 않고, 믿음의 열매로 본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두 계층, 어떻게 보면 초기 단계의 믿음과 성숙한 믿음, 이런 식의 두 계층으로 나누었는데 이 두 계층을 나누게 되는 결정자가 의식화된 믿음의 확신이 있느냐 없느냐이다.

그러면 왜 이들을 이렇게 둘로 나누었냐면 그 동기가 있을 것인데 확신과 믿음을 본질적으로 하나로 여기게 되면, 만약에 확신을 믿음의 본질로 여기게 되면 목회적인 관점에서는, 목회자들로서는 초신자들로 하여금 확신을 가질 수 없는 상태는 곧 그들이 중생하지 못한 것으로 믿게 하여 낙심에 이르게 할 위험이 있다고 봤기 때문이다. 이렇게 둘로 나눈 동기는 초기 단계, 도피성을 찾는 믿음’refuse-taking Faith)에는 확신이 없다.

그러면 남들은 다 확신을 갖고 있는데 나는 확고부동한 확신이 없다고 한다면, 초신자들은 이렇게 생각한다는 것이다. ‘내가 제대로 중생하지 못했구나?’라고 생각하고 불필요한 낙심에 이르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낙심을 막기 위해서는 믿음을 두 단계로 나누는 것이 초신자들로 하여금 예기치 못한 낙심에 이르지 못하도록 방지하는 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둘로 나눈 것은 신학적인 동기보다 목회적인 동기, 실천적인 동기인 것이다.

어떻게 생각하는가? 괜찮은 방법인가? 여기에서 좋은 예가 있다. 목회자들이 교인들의 실천적인 어려움을 이해하고 그것을 어째든 그 문제를 극복하기 위한 다양한 노력을 해야 하지만 그때도 기억해야 한다. 그런 목회적 동기로 인해서 성경의 계시에 대한 어떤 가르침을 왜곡하거나 그것을 굴절시키는 것을 쉽게 해서는 안 된다. 차라리 하나님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가르치되 그것을 최선을 다해 사람들이 받아들일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 한마디로 텍스트를 왜곡시켜 버리는 것이다. 하나님의 이 계시를 목회적 의도로 왜곡하는 것이 정당화되지 않는다.

이런 주장에 맞서서 두 번째 그룹은 무엇인가?

2) 그로에(Theodore van de Groe), 투이넨(Theodore van de Thuynen)

이 두 사람은 Brakel의 주장에 맞서서 무엇이라고 주장했느냐? 확신이 결여된 사람은 구원하는 믿음이 없는 자들이라는 칼빈의 가르침을 적극적으로 옹호하였다. 칼빈이 확신이 만약에 없는 사람은 그 사람은 믿음이 없다고도 하였다. 앞에서는 확신하는 믿음이 없다고 해서 구원하는 믿음이 없는 것은 아니라고 했지만 여기에서는 확신하는 믿음이 없는 사람은 구원하는 믿음이 없다고 보는 이 모순을 설명하려고 하였다.

이때 칼빈이 말했던 확신은 본질로서의 확신을 말한다. 칼빈이 그때 확신이라는 것은 어떤 의식화된 단계의 확신을 말하기보단 믿음의 본질로서의 확신을 말하는 것이다. 믿음의 정의를 말하고 있는 것뿐이다. 이 말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이들은 무엇을 주장했느냐면 믿음과 확신을 분리하게 되면 목회적으로 도리어 위험하다고 판단했다. 앞에서는 분리하는 것이 목회적으로 안전하다고 했는데 이 사람들은 차라리 분리하지 않는 것이 더 낫다고 주장했다.

이 두 그룹의 주장이 무엇이냐면 믿음과 확신을 하나로 볼 것인가, 분리해서 볼 것인가이다. 왜냐? 그 이유는 확신하는 믿음이 없는 것이다. 칼빈은 의식화된 확신이 끝내 없을 수도 있다는 것을 가르쳤다. 끝내 없을 수도 있다. 그들이 죄 가운데 있거나 하나님의 뜻을 어김으로서 그들이 구원하는, 자기의 구원에 이르렀다는 개인적인 확신을 갖지 못하는 상태로 생을 종결지을 수 있다는 것을 언급하였다. 그런데 두 번째 그룹은 확신하는 믿음이 없으면서도 단지 그리스도를 향한 갈급함을 가졌다는 이유로 섣불리 구원에 이르렀다고 오판할 수 있기 때문에 믿음과 확신을 분리할 수 없다고 하였다.

두 그룹이 서로 다른 주장을 했다. 한쪽 그룹에서는 믿음을 두 계층(도피성을 찾는 믿음, 확신을 갖는 믿음)으로 나누었는데, 이 믿음을 두 계층으로 나누게 된 근본적인 결정자는 확신이 있느냐 없느냐이다. 확신이 없는 상태 단지 그리스도를 찾는 믿음은 무엇이냐, 도피성을 찾는 믿음, 그러나 좀 더 성숙해서 어느 정도 확신을 가진, 의식화된 확신하는 믿음. 이렇게 믿음을 두 계층으로 나누었다.

이들은 믿음과 확신을 서로 분리해서 다루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보았다. 그러니까 초기에는 구원하는 믿음을 가졌지만 확신이 없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나중에 확신하는 단계에 이르게 되면 믿음과 확신이 같이 공존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하는 이유는 초신자들이 낙심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두 번째 그룹은 오히려 그 반대였다. 이런 식으로 믿음과 확신을 서로 분리해서 다룰 것이 아니고, 칼빈의 주장대로 언제나 믿음과 확신은 같이 있다는 사실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 동기를 물으면 그들은 도피성을 찾는 믿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 그러나 끝내 확신하는 믿음의 상태에 이르지 못한 사람이 그들이 볼 때는 구원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이다.

Brakel을 중심으로 하는 그룹이나 Groe를 중심으로 하는 그룹이나 이들이 공통적으로 무엇을 믿었느냐 하면 이 두 가지가 다 있어야 구원하는 믿음으로 보았다. 두 가지가 다 있어야 했다. 이들 두 그룹은 공통적으로 믿음을 두 계층으로 나눈 것에 대해서는 반대하지 않았다. 이 두 번째 그룹은 뭘 더했느냐하면 이것이 이렇게 나눌 때 한 가지 믿음을 정의하면서 본질적으로 언제나 확신이 있다고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만약에 이 단계의 확신이 없고, 단지 확신을 결의한 믿음의 형태로만 말하게 되면 결국에는 확신하는 믿음의 단계에 이르지 못하는 사람이 도피성을 찾는 믿음만 가지면서도 자신이 구원에 이르렀다는 생각할 수 있는 여지가 있기 때문에 이것을 막기 위해서는 둘로 구분하더라도 언제나 믿음과 확신은 본질적으로 하나라는 사실을 강조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둘의 주장은 칼빈의 생각을 구현하고자 했었다. 콤리의 주장을 들어보면 좀 더 칼빈의 사상에 대해서 더 분명하게 이해하는 계기가 되리라고 본다.

여기서 우리는 오해하면 안 된다. 우리의 입장은 칼빈 정통주의이다. 성경에 가르치는 바에 따르면 사람이 구원하는 믿음을 가지면 구원하는 믿음 안에 확신이 있다. 이제 이 부분을 끝내고 나면 실제 성경본문을 가지고 와서 칼빈이 해왔던 것이 옳다는 것을 성경신학 쪽으로 뒷받침해야 교리가 선다. 그러나 구원하는 믿음을 가지게 되면 구원하는 믿음 안에 확신이 수반된다. 수반되는 이유는 믿음이 성령으로부터 오는 참된 선물이기 때문이다. 꼭 잊어서는 안 된다. 믿음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이기 때문에 완전하고 그것은 하나님의 뜻으로 충분하다. 그러므로 그 안에 확신이 있다.

그러나 믿음을 가진 사람이, 우리가 생각하는 소위 말하는 구원에 대한 확실한 상태에 이르게 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구원하는 믿음 안에는 확신이 본질로서만 때로 있을 뿐 그것이 의식화 단계 또는 한 인간의 경험 안에서 주관적인 확신 안에서 그것이 제대로 분화되지 못한 상태로 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확신이 없다고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왜냐면 확신이란 사실, 칼빈이 ‘확신’을 정의할 때 좀 특이한 점이 있다. 우리는 보통 ‘확신’이라고 하면 어떤 마음의 상태를 생각한다.

그런데 칼빈은 마음의 상태라는 확신보다 좀 더 넓고 더 초월적인 단계를 생각한다. 확신을 가능하게 하는 하나의 원리가 있다. 잠재된 가능성이 있는 것이라고 보았다. 그때 확신은 잠재하고 있는 가능성을 보게 된다. 그것이 실현된 실체가 되기 위해서는 과정을 거치게 된다. 그러나 칼빈은 실현된 실체가 되기 이전에 단지 잠재된 가능성의 상태로서의 확신도 확신은 있다고 말해야 한다. 이유는 그것이 하나님의 작정에 의한 것이고 성령님의 선물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참되다고 말해야 하고, 우리의 개인의 경험이 어떠하던지 간에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이렇게 말했던 칼빈의 신학의 동기는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가 구원을 받는다는 사실을 조금이라도 손상시키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다. 만일 조금이라도 우리 인간의 개인적인 노력이나 혹은 의식화된 단계가 구원의 진성성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 요소라고 한다면, 전적은혜로 말미암은 구원이라는 교리가 손상을 입게 된다. 그것 때문에 칼빈은 철저하게 하나님의 선물, 성령의 선물로서의 구원하는 믿음, 그리고 구원하는 믿음 안에 잠재된 가능성으로서의 확신 그것도 참되다고 인정하려고 하는 것이다.

두 논쟁은 첫 번째 그룹은 구원하는 믿음과 확신을 분리해서 다룰 수도 있다. 두 번째 그룹에서는 절대로 분리해서 다루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만약 분리해서 다루다가 자칫하면 초기 단계의 믿음을 가진 사람은 구원받지 못할 수도 있다. 자기는 구원받았다고 생각하지만 구원받지 못할 수도 있다.

어떤 경우에? 확신에 이르는 믿음을 갖지 못하게 되었을 때, 평생 신앙생활 열심히 했는데 정신차려 보니까 지옥이라면 어떻게 하겠는가?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적어도 초기 단계의 믿음도 참된 믿음이라고 인정해주는 것이 칼빈의 사상에 부합하다는 것이다.

두 그룹 다 동기는 무엇이냐 하면 목회적인 동기 때문이다. 후기 칼빈주의자들은 목회적인 동기가 신학을 하는데 매우 중요한 요소였다. 그런데 칼빈은 그런 철저한 목회적인 동기보다는 교리적인 동기가 더 강했던 사람이었다. 왜냐하면 로마 카톨릭으로부터 뛰쳐나와 가지고 로마 카톨릭의 잘못된 교리를 배격해야 하기 때문에 실천적인 관심보다는 교리적인 관심이 더 컸던 것이다. 그러나 이미 개신교가 정착 단계에 들어가고 그런 단계에서 신학을 했던 사람들은 자신들이 목양하는 교회 교인들의 실천적인, 또 실제적인 유익이 더 급선무였다. 바로 실천적인 동기 때문에 이런 논쟁이 벌어지게 된 것이다.

마무리 기도.

하나님 아버지, 은혜를 감사합니다. 창세전에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 삼으시고, 그 삼으신 하나님의 뜻에 따라 우리로 하여금 구속받게 하사, 구원하는 믿음을 선물로 얻게 하시고 그 믿음 안에서 우리가 날로 우리에게 주어진 약속과 소망에 대해서 확신하며 생존할 수 있도록 하시니 감사합니다. 사랑하는 주님, 우리가 받은 소망이 무엇인지 우리 자신도 깨닫게 하시고, 우리를 통하여 은혜를 사모하는 자들에게도 분명하게 가르칠 수 있도록 진리의 영을 더하여 주시고 지식을 더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박혜근 박사 / 칼빈대학교 신학대학원 조직신학교수

영남대학교 전자공학과(B.E.)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M.Div.)
Westminster Theological Seminary(Th.M.)
Westminster Theological Seminary(Ph.D.)

<저서> Salvation in Moltmanns Trinitarian Theology The Cross and Praxis


http://www.reformednews.co.kr/sub_read.html?uid=2032§ion=s출처 : 개혁주의 마을
글쓴이 : grace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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