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리를 가르치는 일의 절대적 중요성과 가치 (아더 핑크)
“하나님의 말씀을 보든, 교회 역사를 보든 간에,
교리 교육이 얼마나 중요하고 가치 있는 일인지를 발견할 수 있으며
그것이 장기간 결핍될 때 발생하는 비극적인 결과들 또한 발견할 수 있다.
교리를 가르치는 이유는
성도의 이해를 밝게 해주며, 지성을 훈련하며, 판단력을 불어 넣어 주기 위함이다.
교리는 감사의 동기를 마련하여 주며, 선행에의 동기를 마련하여 준다.
믿음에 대한 근본적인 교리를 전혀 배우지 않았거나,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의 믿음이
건전할 수가 없다.
근본적인 교리를 “하나님 말씀의 초보”(히 5:12), 혹은 ‘성경의 기본진리’라고 하는데,
이는 구원에 이르기 위해서는 필수적인 것이다.
‘성령의 감동과 성경의 권위’, ‘영원토록 복되신 삼위일체’,
‘그리스도의 한 인격 속에 내재하는 두 가지 본성들’,
‘그분의 완전하고도 충분한 희생’, ‘우리의 타락’,
‘중생’, ‘무조건적인 칭의’
이런 것들은 진리의 성전을 지탱하는 중요한 기둥들인데,
이것들이 없으면 성전은 유지될 수 없다.
옛적에 하나님은 탄식하셨다.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베임을 당하는도다)” (호 4:6)
그리고는 선언하셨다.
“이러므로 나의 백성이 무지함을 인하여 사로잡힐 것이요
그 귀한 자는 주릴 것이요 목마를 것이며..(사 5:13)
하나님께서는
“내가 또 내 마음에 합한 목자들을 너희에게 주리니
그들이 지식과 명철로 너희를 양육하리라”(렘 3:15)고 하신다.
여기서 지식은 하나님의 영광스런 계시의 교리를 통하여 제일 먼저 전달되어 졌다.
교리적인 기독교가 되어야만 실제적인 기독교가 될 수 있다.
왜냐하면
영적인 생활의 원동력이 감정이나 충동적인 어떤 것에서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이 원리들로부터 나오기 때문이다.
인간이 무엇을 깨닫고 바르게 되는 것은 바로 이 진리에 의해서 이다.
“주의 빛과 주의 진리를 보내시어 나를 인도하시고
주의 거룩한 산과 주께서 계시는 곳에 이르게 하소서!”(시43:3)
우리는 진리의 지식(요 17:3, 딤전 2:4)과 진리에 대한 믿음(살후 2:13)에 의해
구원받는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17:3)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우리가 항상 너희를 위하여 마땅히 하나님께 감사할 것은
하나님이 처음부터 너희를 택하사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과 진리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게 하심이니..(살후 2:13)〕
또한 우리는 진리에 의하여 자유(요 8:32)케 되고 성화(요17:17)된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 8:32)
그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요17:17)〕
우리의 하나님과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이 증가함에 따라 우리의 은혜도 증가한다.(벧후 1:2, 3:18)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를 앎으로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 (벧후 1:2)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라(벧후 3:18)〕
우리를 보존하는 것은 은혜와 진리이다.(시 61:7, 잠 21:28)
〔그가 영원히 하나님 앞에서 거주하리니 인자와 진리를 예비하사 그를 보호하소서(시 61:7),
거짓 증인은 패망하려니와 확실히 들은 사람의 말은 힘이 있느니라 (잠 21:28)〕
“명철이 너를 보호하여..”(잠 2:11)
“터가 무너지면 의인이 무엇을 할꼬?”(시 11:3)
이 질문은 매우 적절한 질문이다.
‘터’라는 말의 히브리어는 구약성경에 딱 한번 나오는데 이사야 19:10에 나온다.
“애굽의 기둥이 부숴지고 품꾼들이 다 마음(*히브리 원어는 ‘터’)에 근심하리라”(사 19:10)
우리의 계획과 행동이 다 마음에서 나오는 것처럼,
2차적인 진리들이 도출되는 곳이 바로 ‘1차적인 원리(*터)들’ 이다.
모든 교훈의 기초가 바로 이 진리들인 것이다.
‘의인의 믿음과 소망은 신앙의 원리들 위에 설립된다.’(메튜 헨리)
이 기초들은 완전히 그리고 궁극적으로 요동치 않는 것이지만,
하나님께서는 가끔 그것을 시험해보신다.
‘신앙의 기초들이 무너질 때 의인들이라면 마땅히 해야 할 일이 있다.
그들은 거룩한 성전 안에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가 모든 일들을 알고 계시는 하나님께
그들의 신앙의 기초를 뒤흔드는 자들의 모든 계획들과 시도들을 중지시켜 달라고 간구해야 것이다.
또한 성도들은 이 거룩한 믿음 위에 서기 위하여 서로 협력해야 한다.’(존 길)
지난 세기 동안 교리교육은 눈에 띄게 쇠퇴하여 갔다.
주의와 신조들이 무가치한 것들로 인식되었다.
신학공부보다는 과학, 심리학, 사회학 등에 대한 공부에 열심 내었다.
‘우리에게 기독교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달라!’ 는 요청이 있었다.
이 요청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표면적으로는
그 요구가 영적이며 적절한 것이라고 결론지었다.
그러나 실제적으로 그것은 말도 안 되는 것이며
어떤 중요한 의미도 내포하지 못한 가상의 구분일 뿐이다.
그리스도의 양성적 인격, 중보자적 특징,
택함 받은 자와의 공적인 특징과 그들에 대한 구속사역에 대한 성경적 개념은
그분의 신성, 독특한 인성, 약속의 머리되심,
그리고 그분의 삼중직을 인정할 때만 형성될 수 있다.
그들은 여러 번 반복되어 나오는 ‘그리스도 교훈’(요이9)에 충분한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기 때문에
그런 분리(‘기독교’와 ‘그리스도’)를 만들었던 것이다.
그리스도 교훈은
주님의 신비한 인격과 그 큰 구원에 관한 성경의 모든 교훈들을 이해하게 해 준다.
또한 그들은 ‘그리스도의 비밀(신비)’(골 4:3)에 대해서도 소홀히 여겼다.
그리스도의 신비는 진리의 말씀 속에 계시하신 하나님의 깊은 것을 의미한다.
기독교의 영광뿐 아니라 기독교의 거룩한 기원에 대한 결정적인 증거들이 교리에 나타나고 있는데,
교리는 인간의 고안물이 될 수 없다.
말로 표현하기 어렵고, 설명하기 어려운 삼위일체 교리, 하나님의 아들의 성육신, 왕자의 죽으심,
그분이 순종하시고 제물이 되셔서 하나님의 의를 만족시키심으로써, 우리의 죄가 사해졌다는 사실,
우리를 성전으로 삼으시는 성령님, 우리와 그리스도와의 연합 등은
가장 최고로 고상한 거룩하고도 신비한 진리들로서
유일한 이성의 최고봉을 훨씬 능가하는 진리들인 것이다.
그리스도의 진리들은 전체적으로 완전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
거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다양한 지혜와 우리들을 향하신 요구들과 그것을 실천하게 해주는 원동력 등을
발견할 수 있다.
그리스도 교리의 우수성과 아름다움은
진리에 대한 개별적인 이해, 그것들이 상호관계, 그 주제의 일치성, 영광의 주님의 대한 찬미 등을
이해하게 될 때 분명하여 진다.
어떤 이들에게 그리스도의 교리가 일관성이 없게 보이는 이유는
그들이 교리의 부수적인 것들만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필요한 것은 전체적인 이해와 안목이다.
그런데, 그것은 부지런하고 끈질긴 적용에 의해서만 얻어진다.
설교는 많지만, 슬프게도 교육은 거의 없다.
하나님의 권고의 말씀을 하나도 빠짐없이 선포하고,
그 각각의 관계를 설명하며, 진리의 전 영역을 보여주여야 하는 것이며,
균형에 따른 안정감을 얻게 하며 전체적으로 아름다운 조화가 나타나게 해야 될 것이다.
그들은 공언할 뿐만 아니라, 증명도 해야 하며
확신시키려는 것 뿐 만 아니라, 자기가 확신하는 바를 입증할 수도 있어야 한다.
우리는 사도 바울이 “성경을 가지고 강론하며
뜻을 풀어 그리스도가 해를 받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야 할 것을 증명했다”
(행17:2,3)는 말씀을 읽는다.
그는 선천적으로 그리고 은혜로 말미암아 그 일을 잘 수행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었다.
그는 하나님의 사람이었을 뿐만 아니라 똑똑하고 배운 사람이기도 했다.
그는 자기의 이성적인 능력을 상당히 많이 이용했다.
그는 자기가 전하는 것을 증명도 하지 않고 믿으라고 강권하지는 않았으며
자기가 강권하는 것에 대해서는 증거를 내세웠다.
그는 복음의 기초적이고 핵심적인 교리들을 전파했는데,
그때마다 쉽고도 결정적인 논리로써 그것을 증명해야겠다고 느꼈던 것이다.
“안식일마다 바울이 회당에서 강론하고 유대인과 헬라인을 권면하니라”(행18:4)
강론이 악용될 수 있다고 해서 강단에서 그 강론을 그쳐서는 안 된다.
이성적으로 잘 생각하면,
올바를 원리들로부터 정확한 결론들을 도출해낼 수 있을 것이며,
명쾌하고도, 확실한 주장들을 추론해 낼 수도 있다.
어떤 명제의 진리들을 효과적으로 추론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것을 설명하고, 그것에 대한 지지발언을 하며,
반대되는 진술에 대해 대답한다.
바로 그것이 사도 바울의 방법이었는데
그것은 사도행전과 바울서신을 볼 때 명백하다.
모든 종교에 있어서 가장 근본적이고 초보적인 문제인 하나님 존재를 설명할 때,
바울은 간단하면서도 인상 깊게 강론했다.
“이와 같이 신의 소생이 되었은즉
신을 금이나 은이나 돌에다 사람의 기술과 고안으로 새긴 것들과 같이
여길 것이 아니라”(행 17:29)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롬 1:20)
그는 인간의 타락에 관한 교리를 말할 때,
먼저 이방세계 특성과 행위를 길게 증명한 후, 구약을 인용하여 결론짓기를
“그러면 어떠하뇨? 우리는 나으뇨? 결코 아니라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 있다고 우리가 이미 선언하였느니라”(롬 3:9)
우리의 마음은 이해력과 양심에 의해 움직이는 것이기 때문에
설명하고 증명하고 적용해야 하는 것이 교사의 임무이다.
사도 바울은 벨릭스 앞에 섰을 때 “의와 절제와 장차 오는 심판을 강론하여”
그 로마의 관리를 두려워하게 만들었다.(행 26:25)
그러나, 슬프다!
이처럼 성경을 강론하고 설명하며, 교리적으로 가르치는 일은
이제 옛날 일이 되어 버렸다.
많은 사람들이 소위 경험만 외쳤으며 교리의 지식은 무시했다.
오늘날 우리는 그 결과가 얼마나 개탄할 일인가 보고 있는데,
우리 세대는 심지어 진리에 대한 신학적인 지식조차 결핍하고 있다.
소위 경험적이며 실제적인 설교들이 신학적인 강론을 대신하게 되었고
복음의 커다란 근본들은 모욕을 받고 있다.
한번 개신교 국가가 되었던 지역에 다시 가톨릭이 들어가곤 했었다.
바로 그 때, 경험으로는 그들을 물리칠 수가 없었을 것이다.
건전한 교리만이 힘을 발휘할 수 있을 것이다.
실제적인 거룩은 그 행위의 원천이 되는 뿌리가 마르고 시들게 될 때에
쇠미하게 될 것이 분명하다.
‘믿음의 교리가 없는 곳에서 믿음의 순종은 기대할 수 없다.
반면에 행위 없는 교리 또는 단순히 신학적이고 사색적인 지식들은 실천되지 않는 한
아무 소용이 없다.
교리와 실천은 병행되어야 하며,
하나님의 뜻을 알고 또 행하기 위해서는 교리를 가르치고 실천하는 일이 꼭 필요하다.
처음 불을 밝힌 자는 또 다른 불에 이를 것이다.’(존 길)
그것이 바로 디모데후서 3:16의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먼저) 교훈과 (그 후에)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라는 말씀의 순서이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교훈하고 있다.
“네가 네 자신과 가르침을 삼가 이 일을 계속하라
이것을 행함으로 네 자신과 네게 듣는 자를 구원하리라”(딤전 4:16)
마찬가지로 디도에게도 분부하고 있다.
“이 말(3-7의 교훈)이 미쁘도다!
원컨대 네가 이 여러 것에 대하여 기쁘게 말하라!!
이는 하나님을 믿는 자들로 하여금 조심하여 선한 일을 힘쓰게 하려 함이라
이것은 아름다우며 사람들에게 유익하니라”(딛 3:8)
슬프다! 그리스도의 교리를 가르치되,
그 줄기와 가지, 그 대의(大意)와 효력을 다 가르치는 자는 너무도 너무도 적다.
영적인 진리를 바르고 명쾌하게 이해하는 것 보다
더 멋지게 영적인 마음을 꾸미는 교양은 없을 것이다.
우리가 실수를 멀리하는 것도 거기서 시작된다.
영적인 결실도 거기서 시작된다.
교리는 하나의 틀(모형)이다.
거기에 우리의 마음을 던져 우리 마음의 모양을 얻는 것이다.(‘교훈의 본’, 롬 6:17)
뿌려진 씨가 어떤 씨냐에 따라 추수할 것이 결정되는 것처럼
늘 배우는 것이 무엇이냐에 따라 그 문하생의 삶이 결정된다.
16,17세기의 기독교를 상징했던 그 순결성, 그 독실함, 그 열심,
인간 앞에서의 의로움, 하나님과의 밀접한 교제가
지금은 어디에 있는가?
개혁자들과 청교도들의 설교는 주로 교리적이었다.
하나님의 은혜로 그 결과는 진리에 대한 사랑으로 나타났고
수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계명과 교훈을 포기하느니
그들의 생명을 내어 놓았고 수많은 박해와 어려움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그의 행동이 선하기만 하며, 그가 무엇을 믿든지 상관없다고 하는 것은
극히 잘못된 것이다.
진리에 대해 무관심한 사람은 하나님께 옳지 않은 마음을 드러내기 마련이다.
지난 세기 동안, 하나님이 가장 높이 들어서 사용하시던 사람들은
이 청교도의 길을 걸어간 사람들이었다는 사실을 지적해야겠다.
찰스 스펄젼, 시이저 맬런, 로버트 머리 멕체인,
그리고 영국 국교회에서 분리되어 나온 스코틀랜드 자유교회 지도자들은
설교할 때마다 교리 전파에 최선의 관심과 노력을 기울였다.
-아더 핑크의 ‘실천적인 기독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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