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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해석학(고광필) 8강 - 두 지평의 논리

by 【고동엽】 2021. 11.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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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지평의 논리(The Grammar of Two Horizons)


전통적으로 고대 해석학은 고대 문서의 이해를 위한 규칙들의 공식화에 있었다. 해석자는 문법, 어휘, 문체들을 포함한 텍스트의 언어로부터 출발했다. 즉 택스트의 언어적, 문화적, 역사적 문맥을 조사함으로서 해석학이란 역사적인 맥락에서 조건지워진다고 봤다. 그러나 현대에 이르러서 해석학이란 텍스트의 역사적 맥락이란 양면적 즉 해석자와 택스트간의 관계성에서 이루어진다고 본다(anthony C. 씨슬톤, <두지평>, 권성수외 역[총신대학출판부, 1995], 40).


종교개혁 이후 개몽주의 영향으로 오직 성경만(Scripture alone)으로가 아니라 오직 이성만(reason alone)으로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모든 것은 이성의 검증을 받게 되었다. 그래서 성경해석에 있어서도 고등비평이 등장하게 되었고 성경도 다른 문서와 동일하게 취급하고자하는 사조가 지배적인 영향을 미쳤다. 소위 자유주의 신학의 흐름이 신학계를 지배하게 되었다. 신학의 유일한 규범인 하나님 말씀의 계시에서 신학을 시작하기 보다는 인간의 인식론에 기초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고자는 하는 성향이 강해져갔다. 그래서 성경해석학도 철학의 영향을 받게 되었다.
현대 성경 해석학의 선구자로 불리우는 쉴라이에르마허(Friedrich Schleiermacher)는 “이해의 기술”(the art of understanding)로서 보편적 해석학을 시도했다. 이해하는 기술은 모든 학문에 다 적용할 수 있으며 성경도 외외가 아니다. 여기서 이해의 기술이라는 말은 화술적인 기술이 아니라 말해진 바(text)를 이해하는 기술인 것이다. 다시말하면, 이해의 기술은 말하는 것과 이해하는 것의 구별을 의미한다. 해석에 있어서 이해한다는 것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이 해석학에 있어서 중요시 하게 되었으며 이해의 기술로서 해석은 텍스트 저자의 정신적(심리적) 과정을 감정이입을 통해서 다시 체험(추체험)하는 것이다(리차드 E. 팔머, <해석학이란 무엇인가>, 이한우 역[문예출판사, 1993], 132).


쉴라이에르마허 이후에 해석학에 획기적인 선을 그은 사람이 빌헤름 딜타이(Wilhelm Dilthey)(1833-1911)이다. 딜타이는 하이덱거, 불트만, 가마다머에게 영향을 미친 중요한 사상가로서 자연과(naturwissenshcaaten)학과 정신과학(geisteswissenschaften)을 분리 시켰다. 전자는 설명을 기초한 과학이며 후자는 이해를 기초한 학문이라고 했다. 딜타이는 정신과학에 기초한 해석학을 수립하고자 했다. 딜타이에 의하면 해석이라는 것은 사변이 그 출발점이 아니라 구체적인 경험이 출발점이라고 믿었다. 구체적인 경험은 역사적인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인간의 자기 성찰은 내면적인 것 뿐 만 아니라 실존의 역사성(geschtlichkeit)을 인식하는 것으로 봤다. 실존의 역사성을 무시하는 “로크와 흄 그리고 칸트에 의해 구성된 <인식하는 주관>의 혈관 속에는 살아있는 피가 흐르지 않는다”고 딜타이는 비판했다(팔머, <해석학이란 무엇인가>, 154에서 재인용). 이해에 있어서 감정과 의지, 이성을 총체적으로 보지 않고 구별하는 데서 오는 이해는 뜨거운 피가 아니라 냉냉한 피가 흘러서 생동감이 없는 이해와 같은 것이다.


딜타이에 있어서 역사성이란 인간의 자기이해(self-understanding)를 말한다. 역사라고 하는 것은 단순한 기록이 아니라 한정된 시간 속에서 일어나는 인간의 이해가 역사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과거 사실을 오늘의 현제에서 이해할 수 있는가? 삶의 객관화(objectification of life)룰 통해서 이다. 따라서, 역사란 삶의 객관화(objectification of life)이다. 삶의 객관화란 인간 이해의 표현이요 그것이 역사에 대한 해석이다. 따라서, “역사의식은 자기 이해의 하나의 형태이다”(historical consciousness is a mode of slef-knowledge, Hans-Georg Gadmaer, Truth and Method[New York: Crossroad, 1892], 207). 의미가 역사성에 기초해 있기 때문에 시간의 변화에 따라서 의미도 변하는 것이고 인간 이해는 한정된 것이다. 틸타이는 해석학을 역사성의 지평위에 놓음으로서 삶의 체험을 강조하는 해석학을 발전시켰다.


술라이에르마허나 딜타이에서 이해라고 하는 것은 단순히 설명이 아니라 삶의 정황에서 오는 것임을 강조했다. 그래서 해석이란 텍스트와 해석자의 관계성이 중요하게 됨을 암시해 준다. 여기서 해석에 있어서 두 지평이라는 말이 떠오르게 된다. 여기서 지평이라는 말은 은유로서 무엇을 이해하는 틀(frame-work)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관점(view-point), 출발점(point of departure), 안경(spectakles)으로도 말하여질 수 있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텍스트와 해석자의 두 지평의 관계성을 현대 해석학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하이덱거, 불트만, 가다머, 그리고 비트겐슈타인의 관점을 살핌으로서 해석한다고 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펴보고자 한다. 특히 비트겐슈타인의 문법의 개념과 해석의 관계성을 설명하고 해석학에 있어서 다른 어떤 사람보다도 그의 중요성을 크게 부각시킬 것이다.

I. 마틴 하이데거(Martin Heidegger)의 해석학

하이덱거의 해석학에 있어서 그의 사상을 살펴보기 위해서는 전기 하이덱거와 후기 하이덱거의 사상을 살펴보는 것이 대단히 중요하다.

1)전기 하이데거

하이덱거는 그의 명저 <존재와 시간>(Being and Time)이라는 저서에서 존재에 대해서 연구(question of being)한다. 존재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아니라 존재란 어떻게 이해되어지는가를 질문한다. 이런점에서 하이덱거의 존재에 대한 질문은 형이상학적인 질문이아니라 실존적인 질문이다. 하이덱거의 존재에 대한 질문은 단순한 이론적인 존재 의미가 아니라 존재의 근원적인 혹인 원초적인 구조를 실존적 현상학적으로 파헤친다. 하이덱거에서 존재란 그냥 존재하는 사물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존재에 대해서 질문하는 존재(question about one's own being)이다. 이것이 현존재(dasein)이다. 현존재는 이미 세계안에 주어진 존재(bing in the world)로서 시간안에 존재 혹은 역사적인 존재이다. 여기서 세계안에 주어진 존재라는 말은 세계와 존재를 구분하는 이원론적인 존재가 아니라 현 존재는 이미 세계안에서 숨쉬고 살고 있는 존재로서 존재한다는 것이다. 환언하면 현존재는 세계를 전제한다는 의미이다. 시간적 혹은 역사적인 존재란 존재의 유한성을 의미한다.
성 어거스틴은 그의 명저 <참회록>에서 시간과 존재에 대해서 아주 중대한 분석을 했다. 그에 의하면 시간은 과거 현재 미래로 나누어진 것이 아니라 현재를 기점으로 해서 우리는 과거는 기억으로 현재는 직관으로 미래는 기대로 이해한다는 것이다. 결국 과거, 현재, 미래라는 시간도 현재의 관점에서 과거를 기억하고 현재에서 현재를 직관하고 현제에서 미래를 기대하게 된다. 현재라는 시점이 대단히 애매모호하지만 현재를 기점으로 해서 시간을 파악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현재라는 시점이 중요한 것이다.
어거스틴은 시간은 창조와 더불어 시작된다고 했다(<참회록>, 11권 30). 따라서, 인간은 시간내 존재가 된다. 시간을 “팽창”(distension/ distentio/ <참회록>, 11권 23,)이라고 정의한다. 여기서 팽창이라는 말은 마음을 혼란스럽게 하는 상태인 혼란(distraction)을 의미하기도 한다. 따라서, 시간 내에 존재하는 인간은 쉽게 이 세상에서 허무한 것들에 빠져들며, 세상것에 애착심을 갖기 쉬우며, 세상 것에 정신을 잃어버릴 때가 많다고 했다(<참회록>, 11권 29장 39절). 때문에, 이 세상의 허무한 것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어떤 목적(intentio)을 가지고 살아아야 하는 존재로 어거스틴은 봤다. 우리 인간의 영원한 목표인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서 살 때 허무한 세상에서 의미있게 살 수 있는 것이다. 세상 것에 대한 지나친 애착심을 버리고 영원한 하늘나라를 소망하며 거룩한 나그네로 살 때 우리는 유혹 많고 부질없는 삶에서 벗어나 가장 의미있고 감격에 찬 삶을 살 수 있는 것이다.
시간 내의 존재인 현존재가 무엇을 이해한다는 것은 세계내에 있는 무엇을 사용함으로 이해한다. 가령 망치의 의미는 못을 박으려고 할 때 드러나게 된다. 망치를 사용할 때 그 의미가 발견되어진다. 또한 현존재가 무엇을 이해한다고 하는 것은 이미 우리가 이해하고자 하는 것에 대한 선이해(vorverstandnis)가 불가피하다는 것이다. 이것은 해석학적으로 대단히 중요한 개념이다. 가령 우리가 구원이라는 말을 이해하려면 기독교 공동체 내에서 사용하는 구원의 개념을 이해하지 못하고서는 구원이라는 말을 이해할 수 없다는 것과 같다. 그래서 모든 이해는 선 이해를 전재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전제 없는 해석은 없다는 말이 나오게 되었다. 선이해(事前理解)라는 개념은 불트만의 성경해석학에 키의 역할을 하는 개념이 된다.

ii)후기 하이덱거

학자들의 견해에 따라서 다르지만 하이덱거의 전기 사상과 후기 사상은 불연속적인 것이 아니라 자기 사상을 새로운 방법에서 보고자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하이덱거 자신이 자신의 책<존재와 시간>을 펴낸지 32년 후에 “그때, 중요했고 지금도 여전히 중요한 것은 존재자들의 존재(the Being of beings)를 명확하게 드러내는 일이다”라고 했다( 씨슬톤, <두지평>, 506에서 재인용). 새로운 방법이란 언어를 통해서 보려고 하는 방법이다. 하이덱거거는 <언어에의 도상에서>(On the Way to Language)라는 책에서 언어의 본질에 대해서 말하면서 Stefan George's “The Word”라는 시의 마직막 절을 인용하여 언어의 본질을 말한다. “So I renounced and sadly see: Where word breaks off no thing may be.” 하이덱거에의하면 이 시의 마지막 절은 언어가 무엇인지 즉 언어의 본질(the nature of language)를 잘 말해준다고 한다. Martin Heidegger, on the Way to Language(New York: Harper & Row, Publishers, 1982), 57-108.
번역한다면 “그래서 나는 나 자신을 부인하고 슬프게 본다: 언어가 결핍된 곳에는 언떤 사물도 없다.” 여기서 사물이라는 것은 존재하는 모든 것이라고 하이덱거는 말했다. 다시말하면, 언가가 없이는 아무것도 말할 수 없다로 이해할 수 있다. 언가가 없이는 하나님도 말할 수 없으며, 언어가 있는 곳이 존재가 있다 하이덱거는 말한다. 존재는 언어를 통해서 존재(An “is” arises where the word breaks up)한다고 말할 수 있다. Martin Heidegger, on the Way to Languaage, 108.
하이덱거에 의하면 언어는 세가지 특성을 가지고 있다. Martin Hidegger, Poetry, Language, Thought, Trans. Albert Hofstadter, 192
?째, 언어는 표현이다(speaking is expression!). 여기서 표현이라는 말은 인간의 마음 속에 있는 무엇인가를 언어를 통해서 밖으로 표출시킨 것이다. 그래서 말함이란 외적인 것과 내적인 것을 포함한다. 둘째, 언어란 인간의 행위이다(speech is regarded as an activity of man). 언어란 인간을 처음으로 존재캐 하는 것이다(It is langauge that first brings man about, brings him into existence). 다시말하면 존재는 언어를 통해서 말해진다(Man would be bespoken by language). 셋째, 언어는 사실이나 사실이 아닌 것을 표상(presentation)하거나 재연(representation)시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이덱거는 언어의 본질은 말함(language speaks)에 있다고 했다. 언어는 적막을 깨뜨리는 종소리처럼 말하는 것이다. 말함에 있어서 언어는 언어가 된다. 인간은 언어에 반응하면서만이 말한다. 이미 말해진 것 안에서 말함은 우리를 위해서 말한다. Martin Heidegger, Poetry, Language, Thought, 210.
결국 언어는 존재를 발생케 한다.
하이덱거의 언어에 대한 이해를 씨슬톤은 세가지로 설명한다. 첫째, 언어는 사건적 언어이다. 일어나게 하는 것이다. 자기것으로 만든 것(to make one's own)이다. 자기 것으로 사용하는 것(to appropriate)이다. 사건적 언어는 단순히 인간의 사고라기보다는 존재에 근거를 두고 있다. In current vieww view, language is held to be a kind of communication. I serves for verrbal exchange and agreement, and in general for communicating. But language is not only not primarily an audible and written expression! of what is to be communicated. It not only puts foorth in words and statements what is overtly or covertly intended to be communicaated; language alone brings what is, as sometning that is, into the open for the first time. Where there is no language, as in the being of stone, plant, and animal, there is also no openess oof what is, and consequently no openness either of that which is not and of the empty.
Projective saying is poetry: the saying of world and earth, the saying of the arena of their conflict and thus of the place of all nearness and remoteness of the gods. Poetry is the saying of the unconcealedness of what is.( Martin Heidegger, Poetry, Language, Thought, 73-74
다시말하면, 언어는 단순히 사고와 감정을 전달하는 매체라가기보다는 존재의 존재방식이다. 언어를 가지고 존재는 말도 하고 사고하고 느끼는 것을 표현하는 방식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언어는 존재방식이다. “언어란 인간이 그것을 가지고 존재에 대해 말하는 원초적인 시이다”라고 하이덱거는 말했다(<두 지평>, 각주 65에서 재인용). 둘째, 언어는 모여있음으로서 로고스(logos as collectedness)와 관련하여 언어는 모으는 힘(gathering power)이다. 다시 말하면, 언어는 존재자의 모여있음의 안에서 존재자의 존재를 있게 한다. 그래서 말함(saying)은 모음의 소리가 된다. 하이덱거의 영향을 받은 에른스트 푹스는 “믿음의 언어는 믿음을 모음(gathering of faith)과 그리고 그렇게 함으로서 그리스도가 말해지게 한다”라고 말했다(씨슬톤, <두 지평>, 521, 각주 86에서 재인용). 말씀의 선포는 그리스도를 중심으로한 공동체를 형성하며 그 속에서 자신의 동반존재성(togatherness)을 갖는다. 세째, 하이덱거는 언어는 “존재의 집”(das Haus des Seins die Hut des Anwesens)이다라고 했다(<두 지평>, 523, 각주 98에서 재인용). 언어가 존재의 집이라는 말은 은유로서 존재는 언어를 통해서 존재케 된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존재는 언어의 말을 듣고 살므로서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말함보다도 들음이 먼저이다. 하이덱거의 언어에 대한 관심과 그의 통찰력은 게오르그 가다머를 비롯하여 후기 신 해석학(the new hermeneutic)의 주자인, 에른스트 푹스, 게하르드 에벨링에 지대한 여향을 미쳤다.

II.루돌프 불트만(Rudolf Bultmann)의 비신화해석
(Entmythologiert/Demythologizing/탈신화/비신화)

불트만은 후기 하이덱거보다는 전기 하이덱거의 사상에에 영향을 입었다. 불트만은 신약학자로서 그의 비신화 성경해석학으로서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던 신학자로서 그의 성경해석학에 대해서 동의를 하든 아니하든간에 신학을 하는 사람이면 그를 무시할 수 없는 신약신학자이다.
불트만의 비신신화 성경해석은 그의 신약의 우주론에 대한 이해에서 기인한다. 그에 의하면 신약의 우주론은 그 자체가 신화적인 성격을 갖고 있다.

신약성서 우주론(Weltbild)은 본래 그 특성이 신화적이다. 세계는 삼층적 구조를 지닌 것으로 간주되는데, 중심에는 땅이, 위에는 하늘이 아래에는 음부(지하세계)가 있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하늘은 하나님과 천사장의 것들의 거주지이고..., 지하세계는 지옥이며... 땅은... 한편으로는 하나님과 그의 천사들의 초자연적 활동의 장이며, 다른 한편으로 사단과 그의 귀신들의 활동의 장이다. 이러한 초자연적 세력들은 자연의 순환과정과 인간이 생각하고 의욕하고 행하는 모든 것들 속에 개입한다. 기적들은 전혀 드믈지 않다. 인간은 자신의 삶을 통하지 못한다(<두 지평>, 395, 각주 8에서 재인용).

불트만에 의하면 신약성경의 우주론은 오늘날의 과학발전이 되기 전에 쓰여졌기 때문에 신약기자들의 표현방식이 원시적이고 신화적이어서 오늘의 첨단과학의 사고를 갖고있는 현대인들에게는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이다. 따라서, 이 신화적인 사건을 현대적인 언어로 바꾸어야 한다는 것이다.
불트만에의하면 신화란 믿을 수 없는 황당무괴한 이야기 아니다. “신화의 목적은 세계를 있는 그대로 객관적으로 묘사하느 데 있지 않고, 인간 자신이 살고 있는 세계 속에서 얻은 자신에 대한 이해를 표현하는 데 있다. 신화는 우주론적으로가 아니라 인간론적으로 해석되어져야 하며 신존적으로 해석되면 더욱 좋을 것”이라고 불트만은 말했다(<두 지평>, 398, 각주 15에 재인용). 신화란 단순히 꾸며낸 이야기가 아니라 인간의 실존이해를 신화적인 표현방식을 써서 표현한 것이다. 따라서, 성경을 실존적으로 해석한다. 현대적인 상황에 맞추어 성경의 메시지를 재해석해야 한다는 말이다.



On the Problem of Demythologizing, I) Term Demythologizing: "by demythologizing, I understood as a hermeneutical procedure that inquires about the reality reffered to by mythological statement or texts." ii) the Presupposition of Demythologizing: It is presupposed that "myth indeed talks about a reality, but in an inadequate way. It also presupposes a specific understanding of reality." iii) The Characteristics of Myth according to Bultmann: a) "Myth intends to talk about a reality which lies beyond the reality that can be objectified, observed, and controled, which is of decisive significance for human existence. It is the reality that means for us salvation or damnation, grace or wrath, and that demands of us respect and obedience"(160, 252). Key is here that myth objectifies and thus speaks in objectifies and thus speaks in objective statements about a reality that is not an object and this mythological statement is of decisive significance for human existence. Example, NT world pictures, resurrection, etc. iv) The Human understanding: a)understanding "in which we find our selves in a world filled with enigmas and mysteries and in which we experience a destiny that is equally enigmatic and mysterious"(161, 253); b) "We are forced to recognize that we are not lords of our life, and aware of that the world and our lives have their ground and limit in a transcendt power that lie (or powers that lie) beyond whatever we can reckon with and dispose of "(161, 253). v) The Problems of Myth: a) Myth talks about a reality, but in an inadequate way; b) Symbols and mythological pictures "conceal" a meaning; theological and philosophical task is to make it interprete clearly; c) the meaning of myth or symbols cannot be reexpressed only mythological language;" It must be interpreted. vi) Demythologizing, thereforem is to seek to bring out myth's real intention to talk about our own authentic reality as human being"--existentiell interpretaion, that is, self-understanding(161, 253-254).
Two modes of human existence: a)inauthentic existence, b) huthentic existence. the former is "we understand ourselves in terms of the world that stands at our own disposal. "Thereby, this is: "We understand ourselves in terms of the futtre of which we can dispose." Thereby, this existence is charterized as "responsible decision."Herethe two modes of human existence are dialectical. And existentiel which results from personal choice is dereved from existential which is concerned with the structure of dasein, and lays ground for personal decission. Therefore, existentiel interpretaion of the biblical texts makes possible autentic self understanding--understanding self before God. this self understndingpresupposes the "preunderstanding" of God; therby, demythologizing makes the Bible sensible for modern people. In this respect, demythologzing is a hermeneutical method or a method of an exegisis of an exegisis of the Scriptures.
"Symbolum est collatio, id est coaptatio, visibilium formarum as demonstationem rei invisibilis propositarum."("a symbol is bringing togather, that is, a harmonizing of visible forms for the purpose of demonstrating things that have been stated about what is invisible")[ Paul Ricoeur, The conflict of Interpretations, 59]. "The genesis of representation and the problem of motivation both arise in the passage from the act to its expression!."(Ricoeour, The Conflict of Interpretation, 215).

성경의 탈신화는 하이덱거 철학의 방법에 의해서 된 것이 아니라 신약성경 자체가 탈신화를 시도한다고 불트만은 주장했다. “탈신화는 성경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시대의 세계관인 성경의 세계관을 거부하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서 “거짖된 거침돌을 제거하고 참다운 거침돌, 즉 십자가의 말씀에 바로 ?점을 맞추게 할 것이다”(<두 지평>, 402, 각주 29에서 재인용). 따라서, 탈신화란 성경의 메시지를 현대 우리가 살고 있는 실존적 상황에 맞추어서 재해석한다는 말이다.
불트만은 자신이 신약의 메시지를 하이덱거의 철학에 팔아넘겼다는 비난에 대해서 다음과같이 변증한다. “어떤 비평가들이 내가 하이덱거의 범주들을 차용하여 신약성서에 억지로 적용하려한다고 반대해 왔다. 이것이 단지 그들이 진정한 문제에 눈이멀어가고 있음만을 보여 주는 것이 아닌가 하고 걱정이 된다”(<두 지평>, 407, 각주 48에서 재인용). 따라서, 불트만은 성경자체가 실존적인 해석을 요구한다고 말한다. 그 이유는 첫째, 성경의 언어는 인간 실존의 문제를 말하고 있으며 새로운 자기이해를 요구하고 있다. 둘째, 신화는 인간 실존이해의 원시적인 표현방식이다. 세째, 비신화의 과정은 신약자체에서 시작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그를 공중에서 만나게 될 것이다”(살전4:15-17). 그는 “하늘의 구름을 타고” 오실 것이다(막 14:62). 이러한 사건은 불트만에 의하면 미래에 일어날 사건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우리는 더 이상 인자가 구름타고 돌아올 것을 바라서는 안되고 신실한 자들이 그를 공중에서 만나리라는 희망을 품어서도 안돤다”라고 불트만은 말했다(<두 지평>, 408, 각주 52에서 재인용). 위의 성경 말씀은 종말론적인 사건으로서 현재 우리에게 신앙의 결단을 촉구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뿐만아니라, 불트만에 의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사건도 시간과 공간에서 일어난 객관적인 역사적인 사실(ein objectives historiches faktum)이 아니라 인간의 자기이해를 표출시킨 신화라고 했다.
불트만에 있어서 “택스트에 대한 모든 이해는 물음의 방향(woraufhin)에 의해 인도된다. 따라서 이것은 질문되어진 내용에 대한 전이해를 전제한다. 이해는--또한 ‘객관적인’ 이해로서--저자와 해석자가 질문되어진 대상에 대해 삶의 관계를 가질 때, 그리고 그 이유 때문에 가능하다”(발터 슈미탈스, <불트만의 실존적론 신학>, 변순환 옮김[대한기독교출판사, 1991], 243). 여기서 중요한 언어는 전이해(preunderstanding/vorverstandnis/nichtwissendes Wissen[의식되지않은 지식])라는 말이다. 이 말은 하이덱거에 있어서 이해의 선구조(fore-structure)를 의미한다. 무엇의 이해는 선 이해를 전제한다는 말이다. 가령 구원에 대해서 질문하는 사람은 이미 구원에 대해서 선 지식이 없이는 구원에 대한 질문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성경 해석은 해석자의 실존적인 전 이해가 성경의 해석의 키가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서 성경의 메시지를 현 상황에 맞게 선포해야 성경의 메시지가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물론 성경의 메시지를 진공 속에서 선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성경 말씀을 실존상황에 적용시킨다는 것은 중요하다.
그러나, 불트만의 실존적 성경해석은 성경 텍스트보다도 해석자의 실존적 지평을 중요시 함으로서 성경을 일방적으로 또는 주관적으로 해석하게 되므로서 성경의 본 뜻을 왜곡시케게 된다. 이것이 실존적 성경해석의 문제점이다. 따라서, 불트만에 있어서 문제가 되는 것을 세가지로 생각할 수 있다. 첫째, 불트만이 성경의 특정 본문을 신화로 보려고 하는 것은 성경 언어를 실존적으로만 보려고 한 것에서 기인된다. 부활의 경우만 보더라도 성경의 저자들은 부활사건을 역사적 사실로 말하고 있다. 우리 주님이 부활하신 후에 제자들게 말씀하시고, 성경을 가르쳐 주시고, 함게 계시다는 언어을 보면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보고 듣고 만지는 그러한 언어를 사용해서 주님이 부활하셨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사실 죽은 자가 살았다는 것을 이 이상 더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가? 일상언어를 인간의 자기이해를 표현하는 신화로 보는 것은 신화의 의미를 잘 못이해한 것이며 불트만이 이해하는 자기 이해로서 신화적인 표현은 신화라기보다는 은유적인 표현이라고 해야할 것이다. 둘째, 불트만의 실존적 성경해석은 해석자의 지평을 강조함으로서 텍스트의 지평을 무시하는 성경의 의미를 왜곡시키는 해석이다. 셋째, 불트만의 실존적 역사 개념은 실존적인 만남에서 이루어지는 것을 강조함으로서 역사의 객관성을 무시하게 된다.
해석에 있어서 전 이해의 중요성을 역설한 것은 불트만의 중요한 통찰력이다. 인식론적인 입장에서 본다면 모든 것의 인식이란 선험적인 것이 아니라 경험을 전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어떤 전 이해를 갖느냐가 중요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석에 있어서 한쪽만을 강조한 불트만의 실존적 성경해석은 절름발이 해석학이다. 이것을 보완하는 작업이 가다머의 “영향사적”(Wirkunggechichte/effective history) 해석이다.

III. 한스 게오르그 가다머(Hans- Georg Gadamar)의

영향사적 해석학

가다머는 그의 명저 <진리와 방법론>(Truth and Method)에서 자기 저서의 목적은 일반적인 해석학의 이론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이해에 있어서 공통적인 것을 발견하고 이해라고 하는 것은 결코 주어진 대상에 대한 주관적인 이해가 아니라 주어진 대상에 대한 영향사적인 이해이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라고 했다(<진리와 방법론>, xix).
가다머에 의하면 전 이해란 단순히 현재의 실존적인 것만이 아니라 전통에서 영향을 받는다. 해석자의 선입견(Voruteile)은 전통을 통해서 개인에게 영향을 미친다. 그래서 선입견이란 부정적인 의미보다는 존재자의 역사적인 실재(die geschichtliche Wilklichkeit seines Seins)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전통은 전통적인 관례, 가치, 풍습을 권위있는 것으로 인정하므로서 존제자의 역사적인 실재에 영향을 미친다. 다시말하면, “이해는 우리의 주관적인 행위로서가 아니라 자신을 과거와 현재가 그 안에서 끈임없이 뒤석이는 전통의 과정 속에 위치시키는 것으로서 여겨져야 한다. 이것이 해석학 이론에 표현되어야만 하는 것이다”라고 가다머는 말한다(<진리와 방법론>, 258). 따라서, 영향사란 전통과 시간적 간격이 미치는 영향들이 이해에 자체에 미치는 과정을 말한다. 환언하면 해석이란 과거와 현재, 또는 텍스트와 해석자 사이의 지평의 융합이다(Horizontverschmelzung). 여기서 텍스트와 해석자의 지평의 융합은 비판적인 거리와 긴장의 동화가 아니라 “역사의식(historical consciousness) 속에 일어나는 전통과 만남은 모두 텍스트와 현재 사이의 긴장을 경험함을 의미한다. 해석학의 과제는 소박한 동화를 시도함으로써 이러한 긴장을 얼버무리는 것이 아니라 의식적으로 그것(긴장)을 드러내는 데 있다”고 가다머는 경고하고 있다(Truth and Method, 273). 해석자의 지평은 혹은 해석자의 선입견은 전통과 현재 사이의 역사의식의 긴장 속에서 변화될 수 있음을 시사한다.
가다머는 해석에서 적용(Anwendung/application)이 이해와 해석을 하나로 통일시키는 것임을 강조한다(We consider application to be as integral a part of the hermeneutical act as are understanding and interpretation/ Truth and Method, 275). 해석한다고 하는 것은 텍스트의 의미를 현 상황에 적용시키므로서 해석은 완성된다는 말이다. 적용이 없는 해석은 추상적인 것이며 절름발이의 해석이다.
가마다머의 해석학에 있어서 언어가 차지하는 비중은 상당히 크다. 이해와 언어는 분리될 수 없다. 가다머에 의하면 “언어란 이해 자체가 그 안에서 실현되는 보편적인 전달매체이다. ... 모든 해석은, 대상이 말로 표현될 수 있게 하지만 그와 동시에 해석자 자신의 언어이기도 한, 언어라는 매체를 통해서 발생한다”(Truth and Method, 350/ Rather, language is universal medium in which understanding itself is realized. The mode of realization of understanding is interpretation. This statement does not mean that there is no special problem of expression!. The difference between the lanaguage of a text and the language of the interpreter, or the gulf that seperates the translator from the original, is not merely secondary question. on the contrary, the fact os that the problems of linguistic expression! are already problems of understanding. All understanding is interpretation, and all interpretation takes place in the medium of a language which would allow the object to come into words and yet is at the same time the interpretor's own language.). 게하르트 에벨링의 말을 빌리자면 해석은 언어의 이해하기 보다는 언어를 통한(through language) 이해라고 할 수 있다(<두 지평>, 477, 각주 80에서 재인용).
가다머에 의하면 해석이란 언어라는 보편적인 매개체를 통해서 이루워진다. 여기서 가다머의 언어에 대한 이해를 볼 수 있다. 해석에 있어서 언어는 해석자의 사고의 표현임을 알 수 있다. 인간의 사상과 감정을 전달하는 매개체로서 가다머의 언어의 개념은 삶의 형태(forms of life)의 표현으로서 비트겐슈타인의 언어 개념과는 다르다고 본다.
가다머에 있어서 해석이란 두 지평의 융합이라는 개념이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은 사실이지만 칼빈주의 입장에서 본다면 문제가 있다. 해석이란 해석자의 일방적인 이해가 아니라 전통에 의해서 형성된 선입견에 의해서 해석되어지는 쌍방적 즉, 텍스트의 지평과 해석자 지평의 융합에 의해서 이루어진다는 것은 중요한 통찰력이지만 두 지평의 융합에서 해석자의 지평이 항상 텍스트의 지평에 의해서 변화되고, 수정되고, 보완되어야만 한다. 성경을 예로 들면 성경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히 변치않은 하나님의 말씀이지만 성경을 해석하는 사람의 지평은 항상 성령의 검으로써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님의 내적 조명과 가르침을 받아서 해석자의 지평이 변화되고, 수정되고 보완되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성경의 의미를 새로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이미 성경 속에 있는 있는 자연스럽고 분명한 의미를 성령님의 내적조명을 통해서 드러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텍스트와 해석자의 지평이 동시적인 것이 아니라 텍스트의 지평이 항상 해석자의 지평을 변화시키고, 수정하고, 보완해야 한다. 그래야 성경을 있는 그대로 볼수 있고, 그대로 이해할 수 있고, 그대로 선포할 수 있는 것이다.

IV.루드위그 비트겐슈타인(Ludwig Wittgenstein)의 문법적
해석(Grammartical Investigation)

루드위그 비트겐슈타인(Ludwig Wittgenstein)을 보는 사람의 각도에 따라서 다르지만 분석철학(analytic philosophy)의 창시자라고도 하며 언어철학(philosophy of language)의 창시자라고도 하나 이러한 견해는 그의 사상을 잘못 이해한 결과라고 생각된다. 그의 사상의 영향을 받아 그가 원치도 않았던 두 학파가 생기기도 했다. 하나는 빈(vienna)을 중심으로 한 논리적 실증주의(logical positivism)요, 영국 옥스포드 대학을 중심으로 한 언어철학(philosophy of language)이다. 사실 이 두 학파는 비트겐슈타인(Wittgenstein)의 사상과 일치한다고 볼 수는 없으나 영향을 받은 것은 사실이다. 전자는 1920년에서 1930년 사이에 일
Ludwig Wittgenstein의 입장에서 본
신학의 기능과 언어논리: 문법으로서 신학(Theology as Grammar)

루드위그 비트겐슈타인(Ludwig Wittgenstein)을 보는 사람의 각도에 따라서 다르지만 분석철학(analytic philosophy)의 창시자라고도 하며 언어철학(philosophy of language)의 창시자라고도 하나 이러한 견해는 그의 사상을 잘못 이해한 결과라고 생각된다. 그의 사상의 영향을 받아 그가 원치도 않았던 두 학파가 생기기도 했다. 하나는 빈(vienna)을 중심으로 한 논리적 실증주의(logical positivism)요, 영국 옥스포드 대학을 중심으로 한 언어철학(philosophy of language)이다. 사실 이 두 학파는 비트겐슈타인(Wittgenstein)의 사상과 일치한다고 볼 수는 없으나 영향을 받은 것은 사실이다. 전자는 1920년에서 1930년 사이에 일어난 비엔나(Vienna Circle)을 중심한 학파로서 경험주의 전통에 깊이 영향을 받았으며 이 경험주의 전통과 현대 논리적 수학적인 이론을 도입해서 특히 초기 비트겐슈타인(Wittgenstein)과 버트란드 러셀(B. Russell)의 저작에 힘입어 경험주의 철학을 이론화한 것으로서 어떤 명제나 문장의 의미는 이의 검증방법(the method of verification)에 의하여 결정된다고 믿었다. 환언하면 한 문장의 의미는 과학적인 관찰이나 경험에 그 진실성 여부가 결정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신학이나 형이상학은 무의미한 것이라고 혹평했다. 후자는 언어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입장에서는 비트겐슈타인(Wittgenstein)과 비슷한 점이 있지만 실제로 사용되는 언어는 불분명한 점이 많기 때문에 언어사용을 이론화한다는 점에서 근본적으로 다르다고 생각된다. 예를 들면 길버트 라일(G. Ryle)은 그의 유명한 저서인 마음의 개념(The Concept of Mind)이란 책의 서론에서

이 책은 몇가지 유보조건 하에서 마음의 이론(혹은 정신의 이론)이라 부를 수 있는 것에 관한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은 마음(mind)에 관한 무슨 새로운 정보를 전달해주지는 않는다. 우리는 이미 정신에 관한 풍부한 정보를 갖고 있다. 이 정보는 철학자들의 논증에서 도출되거나 그런 논증에 의해서반박될 성질의 것이 아니다. 따라서 이 책에 나오는 철학적 논증들은 정신에 관기존의 지식을 확장하려는 것이 아니라, 다만 이미 알고 있는 지식들의 논리적인 지형도(logical map)를 올바르게 그리려는 데 그 본연의 의도가 있다. 길버트 라일 <마음의 개념>, 이한우옮김(문에출판사, 1994), 9.

서론에서 보는 바와 같이 Ryle은 언어적인 입장에서 서구 철학자들의 잘못을 수정하는 이론을 제시하고 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현대 언어철학자들은 우리 인간을 고뇌케 하는 의미, 진리, 이성(mind)과 몸(body)에 대한 이론을 정립하려는 경향이 짙다고 볼 수 있다.
비트겐슈타인(Wittgenstein)은 신학자라고 볼 수는 없으나 신학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으며 모든 것을 종교적인 면에서 봐야 한다고 말했다. Ruth Rhees, Ludwig Wittgenstein: Personal Recollections, Totowa, NJ: Rowman and Littlefiled, 1981, 79. cited as LWPR.
그는 48세 때 다음과 같이 기독교에 대해서 말했다. 기독교는 철학적으로 이해되어 져야 하는 사변적인 교리가 아니며 인간에게 무엇이 일어났고 일어날 것이라는 것을 말하는 이론이 아니라 실제적으로 인간의 삶에서 경험할 수 있는 역사적인 사실에 대한 묘사이다. 죄의식은 실제적인 사건이며 절망과 믿음을 통한 구원도 역사적인 사실이다. “Christianity is not a doctrine, not, I mean, a theory about what has happened and will happen to the human soul, but a description of something that actually takes place in human life. For ‘consciousness of sin' is a real event, and so despair and salvation through faith”(Ludwig Wittgenstein, Culture and Value, ed. G. H. von Wright, trans. Peter Winch, Chicago: Th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80, 28). cited as CV.
비트겐슈타인에 의하면 기독교는 이론이 아니라 어떻게 구원받고 구원받은 신자로써 살아야하는 삶의 방법을 가르쳐 주는 것이 기독교이다. 개혁주의 입장에서 보면 비트겐슈타인을 진정한 신자라고 하기는 어려울른지는 몰라도 그의 친한 친구인 폴 엥글만(Paul Engelman)에 의하면 비트겐슈타인은 말없이 행동하는 믿음(wordless faith)을 가진 자라고 말했다. 비트겐슈타인의 저서에는 기독교에 대한 관심이 많았고 그 저술의 목적도 기독교적이다. 비트겐슈타인(Wittgenstein)은 그의 제자인 듀리(O. C. Drury)에게 말하기를 오스트리아에 있는 자기 친구인 한 신부로부터 편지를 받았는데 그 편지의 내용과 자기 자신의 소감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그 편지에서 자기 친구는 하나님의 뜻이라면 비트겐스타인의 저작활동이 잘 되어져가기를 바란다고 했다. wittgenstein이 말하기를 그것이 내가 원하는 것이다(하나님의 뜻이라면). 바하는 그의 Orgelbuchlein의 타이틀에서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나의 이웃은 나의 책으로 말미암아 유익을 받을 것이다.’ 나도 나의 저작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고 싶다” LWPR..

비트겐슈타인의 저작에는 기독교에 대한 짤막한 서술들이 많다. 그중에 한 예를 들면 그의 후기 저서인 <철학적인 탐구>(philosophical Investigations)에서 신학의 기능을 문법으로서 신학(theology as grammar)이라고 했다. 여기서 문법의 개념은 영문법이나 국문법과 같은 개념이 아니라 언어의 사용을 지배하는 룰이라고 말할 수 있다. 환언하면 언어 논리(the logic of language)라고도 말할 수 있다. 간단하게 말한다면 비트겐슈타인(Wittgenstein)의 입장에서 신학이란 이론적인 체계 아니라, 성경 언어의 사용울 통해서 성경의 의미를 파악하는 문법적인 탐구(grammatical investigation)라고 할 수있다.
비트겐슈타인(Wittgenstein)의 문법의 개념은 언어 놀이(language game)와 삶의 형태(forms of life) 사이의 관계성에 의해서 파악되는 개념으로서 성경해석 방법으로서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이 글은 두 부분으로 나누어 지는데 제 I 부는 I) 비트겐슈타인(Wittgenstein)의 생애, II) 비트겐슈타인의 사상(전기 후기)을 소개하며, III) 비트겐슈타인의 문법(grammar)의 개념, IV) 문법과 언어 놀이(language game), V) 문법과 삶의 형태(forms of life) 관계성을 설명함으로서 비트겐슈타인의 문법의 개념이 해석학적 방법으로서 매우 중요함을 역설할 것이다. 둘째 부분에서는 비트겐슈타인의 문법(언어논리)적 탐구를 이용해서, VI) 칼빈의 성경관 VII) 칼빈의 성경해석의 원리, VIII) 칼빈의 신학의 기능을 고찰함으로서 문법으로서 신학의 기능을 명료화시킬 것이다. 따라서, 이 글의 요지는 비트겐슈타인의 문법적 탐구가 성경해석에 대단히 유효한 방법일뿐만아니라 신학의 기능을 새롭게 재 조명해줄 수 있다는 가능성을 개진하는 하나의 방법론적인 시도가 될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서 자유주의, 혼합주의 신학의 혼돈 가운데서 살고 있는 오늘을 사는 목회자나 신학자의 사명이 간접적으로 재조명될 것이다.

Ⅰ. 비트겐슈타인(Ludwig Wittgenstein)의 생애

비트겐슈타인(Wittgenstein)은 1889년 4월 26일에 오스트리아 빈(vienna)에서 당시 오스트리아 철강산업의 회장이며 억만장자의 칼 비트겐슈타인(Karl Wittgenstein)의 팔남매의 막내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는 로마 카톨릭 신자로서 비트겐슈타인(Wittgenstein)은 카톨릭 교회에서 세례를 받았다. 그는 14살 까지는 집에서 교육을 받았고 그의 집안은 고도의 교양을 갖춘 분위기였으며 또한음악을 열정적으로 좋아했으며 집의 내방객 중에는 클라라, 슈만, 브람스가 있었다. 비트겐슈타인(Wittgenstein)은 클라리넷 연주에 재능이 있었고 그의 음악성은 친구들에게 교향곡이나 협주곡 전악장을 휘파람으로 연주했으며 한 때는 지휘자가 되고 싶은 적도 있었다. 그는 공학을 공부하기 위해서 베를린에 있는 공과대학에 입학 후 새로운 재봉틀을 만들 정도로 공학에 관심이 많았다. 그 후에 그의 아버지는 비트겐슈타인(Wittgenstein)을 후계자로 삼기 위해서 영국 만체스터에 유학시켰으며 당시 실험단계에 있는 프로펠러 항공학에 관심이 많았고 수학에 관한 그의 관심은 이 때에 싹트게 되었다. 처음에는 순수 수학에서 수학의 근원(the foundations of mathematics)적인 문제로 그의 관심이 바뀌었다. 그후 독일 Jenna에 있는 새로운 논리학(new logic)의 거장인 프라게(G. Frege)의 충고로 화이트헤드(A. Whitehead)와 러셀(B. Russell)의 공저인 <수학의 원리>(Principia Mathematica)을 통해서 비트겐슈타인(Wittgenstein)은 철학을 시작했다. 비트겐슈타인(Wittgenstein)은 그의 나이 23세 때 영국 캠브리지 대학에 들어갔고 그 다음 바로 대학원에 들어가게 되었으며 Russell이 지도 교수였다. 그 곳에서 수학 논리를 세 학기 정도 공부하다가 1914년 8월에 세계 제 1차 대전을 만나게 되었으며 탈장이 되어 군에 입대하지 않아도 되었는데도 자원 입대하게 되었다. 군입대 동기는 잘 밝혀지지 않았지만 그의 나이 17-28세 사이에 그는 인생의 위기와 갈등 가운데 있었다. 그 인생의 궁극적인 문제를 풀어보고자 했는지도 모른다. 비트겐슈타인(Wittgenstein)은 전쟁의 와중 속에서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했던 생명에 대한 위협과 동료들의 죽음 속에서 인생의 허무와 종교성이 싹트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비트겐슈타인(Wittgenstein)은 철학적으로는 프라게 러셀로부터 영향을 받었으며, 종교적으로는 톨스토이, 도스도엡스기, 킬케고올, 성 어거스틴으로부터 영향을 받았다. 그는 어려서부터 소름끼치는 고독과 자살을 생각하기도 했다. “사람들은 끝없이 흔들거리다가 넘어지고 또 흔들거리다가 넘어진다. 오직 혼자서 자신을 일으켜 세우고, 더 나아 가려고 애쓸 수 있을 뿐이다. 나는 언제나 전생애를 걸고 행동해야 했다” 빌헬름 바이쉐델, 철학적 뒷계단, 강혜경 옮김, 시간과 공간사, 1990, 315.
전쟁중의 생명의 위협속에서 그는 인생을 매우 심각하게 생각하게 되었고 모든 것을 종교적인 면에서 봐야만 한다고 고백했다. 궁극적인 인생의 의미는 하나님을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보았다. 개혁주의 입장에서 본다면 그를 성실한 신자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그는 아버지로부터 억대의 재산을 물려 받아서 그의 누나와 당시 가난한 예술가들에게 전부 하나도 남김없이 기부금으로 주었다. 그 중에는 유명한 마리아 릴케, 트라켈이라는 시인도 있었다. 자신은 국민학교 선생이 되었다. 한때는 수도원에 들어가고자 했다. 그는 일생동안 검소한 생활(의자하나 책상 그리고 책 몇권)을 했다. 이와 같은 결단은 비트겐슈타인(Wittgenstein)의 인격과 그의 기독교적인 삶에 대한 열정을 보여 준다고 말할 수 있다. 전쟁 포로로 잡혀 있는 동안(1918) 그의 유명한 전기 저서 <논리철학논고>(Tractatus Logico-Philosophicus)를 그의 나이 29세 때 완성하게 되었다. 당시 독일 저명한 논리학자인 프라게(G. Frege)와도 친분과 연락이 있었지만 프라게(Frege)는 비트겐슈타인(Wittgenstein)의 책을 이해하지 못했다고 비트겐슈타인(Wittgenstein)은 말했고 그의 선생이요, 친구인 러셀(B. Russell)도 그 책의 진의를 이해하지 못했다고 비트겐슈타인(Wittgenstein)은 고백했다. 특히 러셀과 친하게 되었는데 러셀은 말하기를 “Wittgenstein을 알게 된 것은 내 생애에 있어서 가장 극적인 정신 체험 중의 하나였다”고 고백하면서 그를 “천재의 완벽한 전형”이라고 고백했다. 그는 켐브리지 대학에서 그의 초기작품인 <논리철학논고>로 1929년에 철학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그 대학에서 강의를 시작했다. 비트겐슈타인은 강의안 없이 고뇌와 열정을 가지고 질문과 답변으로 특이한 강의로 학생들을 사로잡았으며 정교수 자리까지 올라가게 되었으나 나중에 포기하고 노르웨이의 자기가 만든 오두막집에서 학문에 몰두했다. 비트겐슈타인은 자기 생전 한권의 책만을 발행했는데 그 한권의 책이 <논리철학논고>(Tractatus Logico-Philosophicus)이다.
비트겐슈타인은 학문에 대한 열정과 진실된 인간됨을 분리시키지 않았다. 나무는 그 열매로 안다는 성경 말씀을 깊이 이해한 사람이라고 생각된다. 이러한 그의 태도는 러셀의 고백에서 잘 드러난다. 이 고백은 비트겐슈타인(Wittgenstein)이 젊은 나이인 때였다. “그는 열 두시가 되면 나의 방에 찾아 오곤 했다. 그는 수시간 동안 울 안에 갇혀있는 사자처럼 방안을 왔다갔다 했다. 잠이 오기도 했지만 나는 그를 나가도록 하지 않았다. 한저녁 수시간의 죽음같은 침묵후에 나는 그에게 말했다. 비트겐슈타인(Wittgenstein) 당신은 지금 논리학에 대해서 생각하십니까? 아니면 당신의 죄에 대해서 생각합니까? 둘 다 생각합니다. 그리고 다시 침묵으로 되돌아갔다.” 비트겐슈타인이 그의 일생동안 고민했던 문제는 언어논리. 좋은 철학을 하기 위해서는 좋은 사람이 되어야한다고 봤다.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죄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그에게서 죄란 인간의 한계성을 인정하고 진실되게 살려고 하는 피나는 윤리적 종교적인 투쟁이었다. 그는 참 인간이 되는 길은 자기와 피맺힌 투쟁(blood way)의 길이라고 했다. 비트겐슈타인(Wittgenstein)의 제자 중의 한 사람인 라이트(G. H. von Wright)은 말하기를 비트겐슈타인(Wittgenstein)은 두 형태의 독특한 성격이 있는데 하나는 확고한 신념(strong principles)이요, 다른 하나는 불타는 정열(passionate heart)이라고 했다. 전자는 윤리적인 것이요, 후자는 종교적인 것에서 기인한 것이라고 했다. Norman Malcolm, Ludwig Wittgenstein,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1984, 17-18.
루터가 은혜스런 하나님을 만나고자 투쟁했던 것처럼 비트겐슈타인(Wittgenstein)은 철학의 근본문제 뿐만 아니라 인생의 근본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하기 위해서 투쟁하고 일생동안 그 작업에 전념했던 사람이다. 그는 말하기를 “내가 줄 수 있는 모든 것은 하나의 방법이다. 나는 여러분들에게 어떠한 진리도 가르칠 수 없다” K. T. Fann, Wittgenstein's Conception of Philosophy, Berkely and Los Angeles: University of Califonia Press, 1971, 109.
그에게서 중요한 것은 “하나의 방법을 발견한 것이다.” Ibid., 109.
그 방법은 언어의 사용을 통해서 문제를 조명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독신으로서 일생(62년)을 한 목적을 가지고 인생의 근본문제를 분명하게 볼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하기 위해서 고뇌와 피눈물나는 일생을 아낌없이 바친 인류의 사상가라고 말할 수 있다. 오늘에는 그의 남긴 작품이 20여 권에 달하며 그는 죽으면서 “나는 가장 감격과 환희에 찬 인생을 살았노라”고 고백했다. Norman Malcolm, Ludwig Wittgenstein, 81.
감격과 환희에 찬 삶이란 한 가지 목적에 자신을 아낌없이 바치는 삶에서 발견되어지는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Ⅱ. 비트겐슈타인(Wittgenstein)의 사상

비트겐슈타인(Wittgenstein)의 저서가 많지만 그의 생존 시에 발행된 저서는 한 권이다. 이 책이 그의 전기 작품인 <논리철학논고>(Tractatus Logico-Philosophicus)이다. 후기 저서인 <철학적 탐구>(Philosophical Investigations)은 사후에 출판되었다. 이 두 저서를 간단하게 소개하고 본 논문의 핵심인 문법이라는 개념을 설명하고자 한다.
전기 저서인 <철학적 논고>는 칸트가 순수이성비판을 통해서 이론이성(theoretical reason)과 실천이성(practical reason)을 구별함으로서 이성의 한계성을 그었다면 비트겐슈타인(Wittgenstein)은 언어를 통해서 인간의 사고의 한계성을 기술했다. 그는 이 책의 서론에서 다음과 같이 이 책의 내용과 목적에 대해서 기술했다.
이 책은 아마도 이 속에 표현된 생각들 - 또는 적어도 그와 비슷한 생각들 - 을 그 자신이 이미 해본 사람에게만 이해될 것이다. - 그러므로 이 책은 교과서가 아니다. - 만약 이 책을 읽고 이해하는 한 사람에게 즐거움을 줄 수 있다면, 이 책의 목적은 달성될 것이다. 이 책은 철학의 문제들을 다루고 있으며 - 내가 믿기로는 - 이 문제들이 제기되는 것이 우리 언어의 논리에 대한 오해에 기인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 전 책의 전 의미는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을 것이다. 어떻게든 말해질 수 있는 것은, 명료(clearly)하게 말해질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 그러므로 이 책은 생각에, 아니 그보다는 - 생각이 아니라 생각들의 표현에 한계를 그을 것이다. 왜냐하면 생각에 한계를 긋기 위해서는, 우리가 이 한계의 양편을 모두 생각할 수 있어야(그리하여 생각될 수 없는 것도 생각할 수 있어야)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한계는 오직 언어에만, 그어질 수 있을 것이며, 한계의 다른 한편에 놓여 있는 것은 단순히 비의미적(none-sense)인 것이 될 것이다. L. 비트겐스타인, 論理的哲學論考, 朴영식, 최세일 옮김, 정음사, 1987, 3-5.

서문을 통해서 몇가지 중요한 비트겐슈타인(Wittgenstein)의 사상을 요약할 수 있다. 첫째 비트겐슈타인(Wittgenstein)의 철학적 논고는 철학의 이론을 소개하는 교과서가 아니며 자기처럼 언어논리에 대해서 피나는 투쟁이 없이는 그의 깊은 사상을 이해하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둘째, 이 저서는 철학의 근본문제들은 철학적인 이론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언어 논리에 대한 오해에서 기인된다는 것이다. 셋째, 말할 수 있는 것은 분명하게 말해야 하며 모르는 것에 대해서는 입을 닥쳐야 된다는 것이다. 넷째, 우리 인간 사고의 표현에 한계가 있다는 것을 시사해 준다. 이 한계성은 언어의 사용을 통해서 보여진다. 우리가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 우리의 삶 가운데 있다는 것은 단적으로 인간 사고의 한계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따라서, 다섯째, 설명 할 수 없는 것을 설명할려고 하는 것은 넌센스가 되는 것이다. 그것은 보여 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환언하면 언어의 논리 즉 문법을 잘 모르는 경우라고 말할 수 있다.
후기 저서인 <철학적 탐구>(Philosophical Investigation)는 그의 저서 서문에서 비트겐슈타인(Wittgenstein)이 말한 대로 이 책은 그가 지난 16년 동안 그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철학적인 문제들의 탐구이다. 이 문제들은 의미의 개념, 이해의 개념, 명제의 개념, 논리의 개념, 수학의 기초, 의식의 개념, 다른 많은 문제들을 다루고 있다. 그러나 이 책은 이러한 중요한 문제들을 체계적으로 다룬 것이 아니다. 그는 새로운 이론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짤막한 질문 혹은 그에 대한 묘사로 되어 있다. 환언하면 이 철학적인 문제들에 대한 문법적인 탐구(grammatical investigation)라고 말할 수 있다. 환언하면 문법적 탐구란 언어의 사용을 통해서 철학의 제 문재를 해결하고자 한 시도이다. Wittgenstein은 <철학적 탐구>를 사고에 대한 어려움을 덜어 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 통찰력을 가지고 자기 자신의 생각을 분명하게 하도록 자극을 주기 위해서라고 했다. 그래서 그의 저서를 깊이 이해하려면 비트겐슈타인이 갖었던 열정과 피맺힌 투쟁이 있어야 한다.

Ⅲ. 문법의 개념(the Concept of Grammar)

비트겐슈타인(Wittgenstein)의 문법의 개념은 그의 전기 저서나 후기 저서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이 개념은 철학적인 문제들을 조명하고 명료하게 하는 하나의 방법으로 쓰여지고 있다. 그러나 이 개념은 전기와 후기에서 아주 다른 의미를 갖고 있다. 철학적 논고에서 문법이라는 말은 “논리적 구문”(logical syntax) 혹은 “논리적 문법”(logical grammar)라는 말과 동의어로 쓰이고 있다. 불렉(Max Black)은 논리적 문법이란 문장 속에서 의미를 주는 문장의 구조의 배열을 말해 주는 룰이라고 했다. Max Black, A Companion to Wittgenstein's Tractatus, Ithaca: Cornell University Press, 1964, 133.
비트겐슈타인(Wittgenstein)에 의하면 우리 일상 언어는 이 논리적은 문법을 숨기고 있으므로 철학적인 문제가 생긴다고 봤다. 예를 들면 “이다”(is)라는 단어는 수학에서 하나 더하기 하나는 둘이다 라고 할 때 “=”는 동등하다는 의미, 무엇이 존재하다는 의미, 자동사로서 존재한다(to exist)처럼 “간다”(to go) 형용사로서 무엇이 일어나고 있다는 의미로도 쓰일 수 있다. “is”는 콘텍스트에 따라서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는 다른 심볼이다. Ludwig Wittgenstein, Tratatus Logico-Philosophicus, trans. C.K.Ogden, London ; Roultedge & Kegan Paul LTD., 1981, section, 3.323. cited as TLP.
이와같이 일상언어는 논리적 문법을 숨김으로서 근본적으로 철학적인 문제를 해결하는데 혼동을 가져오고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바로 이 때문에 비트겐슈타인(Wittgenstein)은 이상적이고 인위적인 언어(ideal sign language)를 통해서 언어의 불명료성을 극복할 수 있다고 믿었다. 이러한 논리 체계가 럿셀과 Frege의 견해이다. 논리적 문법을 좀 더 자세하게 알기 위해서는 비트겐슈타인(Wittgenstein)의 그림이론(picture theory)를 살펴 보는 것이 중요하다.
비트겐슈타인(Wittgenstein)은 언어는 세계의 현실을 묘사한다(language pictures a realty of the world). 인간과 세계는 언어를 통해서 연결된다는 말이다. 세계와 언어의 관계성은 논리적인 관계성(logical grammar)인데 이 관계성은 1:1의 관계성 가운데 있다. 그는 이 아이디어를 1914년 가을에 자동차 사고에 대한 재판기사가 실린 잡지를 통해서 갖게 되었다. 변호인이 사고가 어떻게 일어났는가를 그림으로 그리면서 설명한 것을 통해서 비트겐슈타인(Wittgenstein)은 그림과 실제 사고 상황이 서로 상관관계에 있는 것을 발견함으로써 언어로 표현된 문장(문장의 구조)은 실제로 세계 속에 존재하는 구조와 같으며 이는 더 나아가서 문장의 구조(logical grammar)는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보여진다는 통찰력을 갖게 되고 이 통찰력은 나중에 보여지는 것(showing)과 말할 수 있는 것(saying)을 구별하게했다. 비트겐슈타인(Wittgenstein)은 1919년 8월 19일 러셀(Russell)에게 보낸 편지에서 철학의 근본 문제는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은 보여 주어야만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전기 저서에서는 문장의 구조와 요소를 알게 되면 그 문장의 의미를 알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와같은 견해는 언어가 쓰이는 상황, 사용하는 사람을 고려하지 않은 단순한 언어와 세계만을 말한다. 후기에 이러한 사상이 바뀌게 되었다. 전기 저서 발표 후 16년 후에 비트겐슈타인(Wittgenstein)은 그의 전기 사상의 잘못된 점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는 고백하기를 나의 전기 저서에서 아주 중요한 잘못을 발견하게 되었는데 그것은 논리적 문법이 문장 속에 감추어져 있다는 것과 과학자처럼 논리적인 분석에 의해서 감추어진 문법을 조명할 수 있다고 믿은 것이다. Ludwig Wittgenstein, Philosophical grammar, ed. rush Rhees, trans. Anthony Kenny, Oxfor : Basil Blackwell, 1974, 210.

후기 저서인 철학적 탐구에서는 문법의 개념은 전기와는 아주 다르다. 전기에서는 우리 일상언어 속에 문법을 감추어져 있다고 했는데 후기는 그와는 정반대이다. 문법은 일상언어 속에 감추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보여 진다고 봤다. 비트겐슈타인(Wittgenstein)은 말하기를 “논리(문법)는 스스로 모든 것을 해결한다. 그래서 우리가 해야만 할 일은 그것이 어떻게 사용되는지를 보는 것이다(logic must take care of itself. All we have to do is to look and see how it does it).” Ludwig Wittgenstein, Notebooks 1914-1916, 2nd ed. trans. G.E.M. Anscombe, 2e, lle.
이 말은 아주 깊은 의미가 있는 말이다. 후기에 있어서 언어의 개념은 언어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이 누구이며 어떤 상황에서 사용하며 몸의 언어까지도 포함(눈물, 제스처, 눈짓, 목소리의 강, 약, 옷차림 등)한다. 언어는 단순히 인간의 사상과 감정을 전달하는 매개체라기보다는 삶의 표현이다.
문법은 비트겐슈타인(Wittgenstein)의 후기 사상의 아주 중요한 개념으로서 그에 의하면 철학의 근본적인 문제는 언어 사용의 혼동에 있다고 봤으며 이의 해결점은 언어의 사용(the use of word)을 재배열하거나 그대로 봄으로써 문제의 혼동하는 점을 조명하여 문제가 안되게(to dissolve)함으로 철학의 문제점을 해결하고자 했다. 이 언어의 사용이 바로 문법 혹은 언어논리이다. 그래서 문법은 언어의 사용을 지배하는 룰(rule)이라고 말할 수 있다. 여기서 중요한 단어는 언어의 사용과 룰이라는 말에 있다. 문법의 중요한 점을 네 가지로 말할 수 있다.
첫째, 문법은 언어의 사용을 묘사한다. Wittgenstein에 의하면 문법은 다른 방법으로서 설명할 수 없는 언어를 묘사할 뿐이라고 했다(Philosophical Investigations, 3rd ed. Rush Rhees, trans. G.E.M. Anscombe, New York: Macmillan Publishing Co., 1958, section, 496, cited as PI).
예를 들면 사랑이라는 말을 생각해 보자. 예수님의 사랑, 부부간의 사랑, 청춘남녀의 사랑, 자식과 부모간의 사랑 등을 들 수 있다. 똑같이 사랑이라는 말을 쓰지만 예수님의 사랑과 청춘남녀의 사랑은 차원과 질이 다른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는 각 사랑의 문법이 다르다고 말할 수 있으며 문법이 다르기 때문에 그 의미도 다르다고 말할 수 있다. 둘째, 문법은 언어의 의미를 결정한다. 비트겐슈타인(Wittgenstein)은 “한 단어의 의미는 그 언어의 사용에 있다” PI., section, 43.
여기서 중요한 것은 문법 자체가 그 단어의 의미라는 말은 아니다. 그 단어의 사용이 어떤 상황에서 누가 사용하는가에 따라서 그 의미가 달라진다는 말이다. 우리 인간의 삶 속에서 가장 중요한 단어중에 하나가 사랑이라는 언어일 것이다. 그러나 사랑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얼른 대답하기가 어렵다. 왜 그렇게도 우리 인간이 원하고 많이 쓰는 단어인데도 왜 우리는 그 의미를 얼른 알기가 어려운 것인가? Webster's English-Korean Dictionary은 사랑은 애정, 좋아함, 연애, 자비, 무득점(정구)이라고 정의했다. 이렇게 정의를 내렸다고 해서 우리는 사랑의 의미를 알 수 있는 것인가? 사랑의 명작을 읽었다고 해서 사랑의 의미를 깊이 이해했다고 말할 수 없다. 라이그린(Anders Nygren)의 Agape & Eros라는 사랑의 고전적인 책을 읽었다고 해서 우리는 사랑의 의미를 이해했다고 말할 수 있는가? Anders Nygren, Agape & Eros, trans. Philips Watson, 1953. Nygren에 의하면 사랑에는 세가지 종류의 motive가 있는데 첫째는 아가페로서 무조건적인 하나님의 사랑을 말하며 기독교에서 볼 수 있으며, 둘째는 Nomos(율법)로서 도덕적인 무엇을 성취함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려는 자세로서 유대인들에 해당하며, 셋째는 에로스로서 영원을 향한 사랑으로서 희랍사상에 속한다.
이러한 책들을 읽으면 사랑에 대한 지식은 습득할 수 있을 지는 몰라도 사랑의 깊은 의미는 이해했다고 볼 수 없다. 왜 그런가? 언어적인 측면에서 볼 때는 사랑이란 정의를 내리거나 책을 많이 읽었다 해서 깊이 이해할 수 있는 개념이 아니라 삶을 통해서 보여 주는 개념이기 때문이다.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사랑도 다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요한일서 4장 7절에 보면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η αγαπη εκ του θεου)이라고 했다(love comes from God). 이 말은 무슨 말인가? 성경에 의하면 진정한 사랑은 인간으로 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온다는 말이다.
인간의 사랑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야속한 것이기이다. 오늘날에 많은 사람들이 인간에게서 나오는 감정적이고 야속한 사랑으로 인간관계를 갖으려고 하기 때문에 문제가 많다고 생각한다. 에로스의 사랑은 상대방에게서 무엇인가 좋아하는 점을 발견했을 때 인간의 사랑은 싹이 튼다. 왜 내가 좋아하느냐고 묻는다면 그것은 내게서 결핍된 것이기 때문이다. 결핍된 것은 바로 다른 “나”이다. 그래서 인간의 사랑은 소유에 있다. 이것이 인간 사랑의 본질이다. 그러나 참 사랑은 인간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 부터 오는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의 사랑은 어떻게 나타나게 되었는가? 요한일서 4장 9절에 보면 “하나님의 사랑이 이렇게 나타난 바(εφανερωθη)되었으니”(this is how God showed his love among us). 하나님의 사랑은 보여졌다 혹은 계시되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우리는 어떤 때 보여준다는 말을 쓰는가 하는 문제이다. 우리는 “보여준다”는 말을 잘 모를 때 쓴다. 그래서 기독교에서 말하는 사랑은 말로 하는 것이 아니라 보여주는 것이다. 로마서 5장 8절 말씀이 이를 증명한다.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συνιστησιν)하셨느니라” 여기서 중요한 말은 “확증”했다는 말(God demonst rates his own love)이다. 하나님은 사랑을 말로 하지 않고 예수님을 십자가 못박히게 하심으로 우리를 사랑한다는 것을 증명했다는 말이다. 그래서 사랑을 “말과 혀로만”할려고 하는 사람은 아직 기독교의 사랑의 문법을 모르는 사람이다. 기독교의 사랑은 언어적인 면에서 볼때 말로 하는 것이 아니라 “행함과 진실함”으로 해야 한다(요일 3:18). 요한일서 4장 10절이나 로마서 5장 8절 말씀에서 보면 하나님의 깊은 사랑은 예수님의 보혈을 통해서 인간의 죄를 용서해주는 데 있다. 우리는 이 사랑을 말하여 사죄의 은총이라 부른다. 비트겐슈타인(Wittgenstein)에 의하면 무엇의 에센스는 문법에 의해서 보여진다고(essense is expressed by grammar) 했다. PI, No. 371.
그렇다면 기독교의 사랑의 본질은 용서의 사랑에 있다. 용서의 사랑을 구체적으로 배우지 못한 신자는 하나님의 지극한 사랑을 모른다고 말할 수 있다. 원수까지도 사랑하려면 이 사랑을 덧입을 때만이 가능하다. 셋째, 문법에는 두 종류의 문법이 있다. 하나는 표층문법(surface grammar)이요, 다른 하나는 심층문법(depth grammar)이다. PI., section, 664.
전자는 단지 문장의 구조만을 말하며 후자는 문장의 구조뿐만 아니라 의미를 말한다. 예를 들면 “예수님은 당신을 사랑합니다.” “유병헌은 당신을 사랑합니다.” 이 두 문장에서 문법적으로는 주어, 타동사, 목적어를 다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 의미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표층문법(surface grammar)은 같지만 심층문법(depth grammar)은 다르기 때문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누가 말했느냐가 중요하다. 네째, 문법은 명령적인 힘(imperative force)를 갖고 있다. 가령 축구경기를 한다고 가정하자 축구경기를 하고 안하고는 나의 결정에 달려있지만 일단 경기를 하고자 하면 그 경기의 룰을 따라야만 한다. “따라야만 하는” 명령적인 힘은 나에게 있는 것이 아니고 언어의 사용이 가지고 있는 룰이라고 할 수 있다.

Ⅳ. 문법과 언어놀이(language- game)

어느날 비트겐슈타인(Wittgenstein)은 산책하다가 축구게임 하는 것을 보았는데 그때 그의 생각 가운데 우리도 언어를 가지고 게임을 할 수 있다는 영감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어린애들이 처음에는 지시적으로 언어를 배우지만 일단 배우면 여러 가지 다른 언어를 배울 수 있는 것처럼 언어를 쓰고 배우는 것이 게임과 비슷하다. 게임에 룰이 있는 것처럼 언어사용에도 룰이 있다. 이 룰이 문법이며 우리 신자는 성경의 언어를 배움으로써 신자로 되어가는 것이다. 문제는 어떻게 누가 성경언어를 가르치고 배우느냐에 따라서 여러 가지 형태의 신앙생활의 틀을 결정한다. 개혁주의 신앙을 배우면 개혁주의 신자가 되는 것은 인위적인 것이 아니며 언어가 보여주는 하나의 논리인 것이다. 이 언어놀이가 문법을 보여준다고 말할 수 있다. 쉽게 말하면 우리의 모든 삶은 여러 가지 형태의 언어놀이를 통해서 이루어진 삶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 언어놀이가 어떤 형태의 삶의 틀(form of style)을 형성한다고 볼 수 있다.

Ⅴ. 문법과 삶의 형태(forms of life)

위에서 말한 것처럼 여러가지 삶의 형태는 언어놀이에 의하여 형성되어 지는 것이다. 그래서 삶은 주어진 것이며 일단 어떤 형태의 삶의 틀이 형성되면 그것을 바꾸기가 아주 힘든 것이다. 여기서 주어진 것이라고 하는 것은 중요하다. 필자는 미국에서 13년을 살았는데 고기는 안 먹고 살 수 있어도 김치와 된장국을 먹지 않고는 살 수가 없었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하고 누가 물어본다면 단순하게 한국에서 거의 33년 동안 이것들을 먹고 살았기 때문이다. 김치가 쇠고기 보다 영양분이 많아서도 아니고 한국 사람의 주체성을 지키기 위해서도 아니다. 여기서 해석학적인 면에서 중요한 것은 어떤 것을 평가하고 해석하고 이해하고 판단하는 근거가 이 삶의 틀에서 나온다는 것이다. 철학적으로 말한다면 삶의 틀은 세계를 보는 안경, 지평 혹은 관점이라는 말이라고 할 수 있다. 칼빈이 성경을 “안경”(spectacle)이라고 말한 것은 중요한 말이라고 생각한다. 성경만으로(Sola Scriptura)라는 말은 개혁주의 안경이라고 한다면 틀린 말이 아닐 것이다. 종합하면 인간은 언어를 사용하여 언어놀이를 하고 언어놀이를 하다보면 어떤 삶의 틀이 생긴다. 그래서 어떤 삶의 틀은 주어지는 것이라고 한다. 이 삶의 틀에서 나오는 언어의 사용은 그 언어의 의미를 결정 지운다. 우리가 어떤 언어를 사용한다는 것은 우리는 그러한 삶을 살았다는 것을 전제할 수 있다. 언어의 사용을 통해서 우리는 대개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를 알 수 있다.
비트겐슈타인(Wittgenstein)의 사상은 지금까지의 서구사상과 아주 다르다. 전자는 독창적이고 명료성(clarity)과 간결성(persipicuity)에 중점을 두고 언어사용을 봄으로서 모든 것의 에센스를 파악하려 했다면 후자는 체계(system)를 이용하여 거대한 지식의 빌딩을 건축하려 했다. 서구의 많은 철학자나 신학자들까지도 새로운 이론을 도입함으로 과학에서 처럼 인간의 근본문제를 해결하는 데 진보를 믿었다. 그러나 비트겐슈타인(Wittgenstein)에 의하면 인간의 근본문제는 예나 지금이나 변한 것이 없으며 방대한 이론을 통해서 쌓아올린 거대한 지식의 빌딩의 체계에 의해서 인간의 병패적인 사고를 고치려고 하기보다는 언어의 사용을 통해서 그 문제점을 조명케 했으며, 언어의 원초적인 홈(original home of language)인 언어 놀이(language-game)를 통해서 모든 문제의 핵심을 조명하고 파악해서 병패적인 사고를 치유하고자 한다. 언어에 생명력을 불어넣은 것은 언어대한 이론이 아니라 언어 사용이다. 비트겐슈타인(Wittgenstein)의 후기 사상의 언어논리 개념은 그가 말한대로 새로운 이론을 도입해서 문제의 근본을 해결하려 하지 않고 언어의 사용을 봄으로 어디에 문제가 있는가를 조명해주고 이로 인해 문제가 문제로 되지않게(to dissolve)함으로써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 전도서 기자가 이미 말했듯이 해아래 새 것이 없다고 한 말을 깊게 이해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우리에게 주어진 언어를 가지고 해석에 앞서서 언어사용을 봄으로서 문제점을 새롭게 파악하게 하고 조명해 주는 방법을 제시한 사람이었다. 그가 말한 것처럼 자기의 방법에 창조적인 것이 있다면 이미 있는 것을 새롭게 보는 방법이라고 했으며 그는 자신의 공헌을 말했다. “나는 내 방법의 창조성은(그 말이 옳다면) 씨에 속한 것이 아니라 밭에 해당하는 것이라고 믿는다. 나의 밭에 어떤 씨를 심어 보라 그러면 다른 밭에 심는 것과 다르게 자랄 것이다.” “I believe that my originality(if that is the right word) is an originality belong to the soil rather than to the seed.(perhaps I have no seed of my own). sow a seed in my soil and it will grow differently than it would in any other soil”(Norman Malcolm의 Ludwing Wittgenstein의 14페이지 각주 17번으로부터 재인용).
여기서 나온 밭은 성경의 씨뿌리는 자의 비유에서 나오는 좋은 밭과 같을 것이다. 다른 해석 방법보다 30배 60배 100배나 좋은 결실을 맺는 해석방법이 될 것이다. 둘째 부분에서는 비트겐슈타인(Wittgenstein)의 밭에다 칼빈의 언어를 심어보는 작업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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